(마) 일차 과정과 이차 과정 ― 억압1
꿈 과정의 심리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보려고 감히 나서면서, 나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았다. 사실 내 서술 능력으로는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다. 그토록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사슬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낱말을 하나씩 늘어놓는 서술로 재현하면서, 설명하는 내내 아무 선입견도 없는 듯이 보이기란 내 힘에 꽤 부치는 일이다. 이제 나는 꿈의 심리학을 서술하면서 내 견해가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길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속죄해야 한다. 꿈을 파악하는 내 관점은 그에 앞선 신경증 심리학 연구를 거쳐 얻은 것이다. 여기서는 그 연구를 끌어들이지 않기로 되어 있는데도 나는 거듭 그것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꿈에서 출발해 신경증 심리학과 연관을 맺고 싶은데도 말이다. 이 어려움 때문에 독자가 겪을 온갖 불편을 나는 잘 알지만, 그것을 피할 길은 알지 못한다.
이런 사정이 마음에 차지 않으니, 내 노력의 가치를 높여 줄 듯한 다른 관점에 기꺼이 잠시 머물러 보겠다. 1장 첫머리에서 보였듯이, 나는 권위자들 사이의 더없이 날카로운 모순으로 얼룩진 주제와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꿈 문제를 다듬어 낸 뒤에는 이 모순들 대부분에 자리를 찾아 줄 수 있었다. 다만 제기된 견해 가운데 두 가지, 곧 꿈은 무의미한 과정이라는 견해와 꿈은 신체적 과정이라는 견해에는 단호히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경우를 빼면, 서로 모순되는 견해들을 모두 복잡한 논증의 이 대목 저 대목에서 받아들여야 했고, 그 견해들이 저마다 무언가 옳은 것을 찾아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꿈이 깨어 있을 때의 충동과 관심사를 이어 간다는 것은 꿈의 잠재적 사고를 찾아냄으로써 아주 널리 확인되었다. 이 사고들은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크나큰 관심을 끄는 것만을 다룬다. 꿈은 결코 하찮은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 견해에도 동의했다. 곧 꿈은 낮의 사소한 잔재를 주워 모으며, 낮의 중요한 사건은 깨어 있을 때의 활동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간 뒤에야 비로소 꿈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견해다. 우리는 이것이 꿈 내용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꿈 내용은 왜곡을 통해 꿈 사고에 달라진 표현을 준다. 꿈 과정은 연상 기제의 본성상 깨어 있을 때의 정신 활동이 아직 붙잡지 않은 최근의 재료나 사소한 재료를 더 쉽게 차지하며, 검열 때문에 심리적 강도를 중요하지만 불쾌하기도 한 재료에서 사소한 재료로 옮겨 놓는다고 우리는 말했다. 꿈의 기억 과잉과, 꿈이 유년기 재료에 기대는 것은 우리 이론의 주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우리는 꿈 이론에서, 유년기적인 것에서 비롯된 소원이 꿈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될 원동기 구실을 한다고 보았다. 잠자는 동안의 객관적 감각 자극이 지닌, 실험으로 입증된 의의를 우리는 물론 의심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우리는 이 재료를, 깨어 있을 때의 활동에서 남은 사고의 잔재와 똑같은 관계로 꿈 소원과 이어 놓았다. 꿈이 객관적 감각 자극을 착각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을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권위자들이 미결로 남겨 둔 이 해석의 동기를 우리가 채워 넣었다. 해석은, 지각된 대상이 수면 방해꾼으로서는 무해해지고 소원 성취에 쓰일 수 있게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트럼불 래드[40]가 증명한 듯한, 잠자는 동안 감각 기관이 보이는 주관적 흥분 상태를 우리는 꿈의 특별한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흥분을 꿈 뒤에서 작용하는 기억들이 퇴행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꿈을 설명할 때 흔히 요체로 여겨지는 내적 기관 감각에도 우리의 견해에서는 소박한 역할이 주어졌다. 떨어지는 감각, 하늘을 나는 감각, 제지되는 감각 같은 것들은 필요할 때마다 꿈 작업이 꿈 사고를 표현하는 데 쓸 수 있도록 늘 준비된 재료로 놓여 있다.
꿈 과정이 빠르고 순간적이라는 것은, 이미 마련된 꿈 내용을 의식이 지각하는 데에는 들어맞는 듯하다. 그에 앞선 꿈 과정의 부분들은 아마 느리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진행될 것이다. 가장 짧은 순간에 몰아넣어진, 넘치도록 많은 꿈 내용이라는 수수께끼를 우리는, 정신생활에서 거의 다 만들어진 구조물을 가져다 쓰기 때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풀었다. 꿈이 기억 때문에 왜곡되고 일그러진다는 것이 옳기는 하지만 성가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꿈 작업이 시작될 때부터 작용해 온 왜곡 작업 가운데 눈에 드러나는 마지막 작업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신생활이 밤에는 잠드는가, 아니면 낮과 똑같이 제 모든 능력을 쓸 수 있는가를 둘러싼 격렬하고 도무지 화해할 수 없어 보이는 논쟁에서, 우리는 양쪽 모두에 동의할 수 있었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는 꿈 사고가, 심리 장치가 제공하는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더없이 복잡한 지적 활동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렇더라도 이 꿈 사고가 낮 동안에 생겨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정신생활에 수면 상태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하다. 그러니 부분 수면설조차 제 몫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면 상태의 특징을 심리적 연관의 붕괴에서가 아니라, 낮을 지배하는 심리 체계가 제 수면 소원 때문에 활동을 멈추는 데서 찾았다. 외부 세계에서 물러남도 우리의 견해에서 그 의의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유일한 요인은 아니지만 퇴행을 도와 꿈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표상의 흐름을 의지로 이끄는 일을 물리친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신생활이 목적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보았듯이, 원하는 목적 표상을 버리고 나면 원치 않는 목적 표상이 지배권을 쥐기 때문이다. 꿈속의 느슨한 연상 결합을 우리는 인정했을 뿐 아니라, 짐작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그 지배 아래 두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고 뜻있는 다른 결합을 대신하는, 꾸며 낸 대용물일 뿐임을 알아냈다. 물론 우리도 꿈을 부조리하다고 불렀다. 그러나 꿈이 부조리를 꾸며 보일 때 실은 얼마나 지혜로운지를 우리는 여러 예에서 배울 수 있었다. 꿈에 부여되어 온 기능 가운데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꿈이 밸브처럼 정신의 짐을 덜어 준다는 것, 그리고 로베르트의 주장대로 온갖 해로운 재료가 꿈속의 표현을 거쳐 무해해진다는 것은 꿈속의 이중 소원 성취에 관한 우리 이론과 정확히 맞아떨어질 뿐 아니라, 그의 표현 그대로 두어도 로베르트 자신에게보다 우리에게 한층 더 잘 이해된다. 심리적인 것이 제 능력들의 유희에 자유롭게 몸을 맡긴다는 것은, 우리에게서는 전의식적 활동이 꿈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꿈속에서 정신생활의 태아적 상태로 되돌아감」과 해블록 엘리스[23]의 관찰, 곧 「거대한 감정과 불완전한 생각으로 이루어진 태곳적 세계」는, 낮 동안 억제된 원시적 작업 방식이 꿈 형성에 참여한다는 우리의 추론을 절묘하게 앞질러 내다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들라주[15]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도 억제된 재료가 꿈꾸기의 원동력이 된다.
셰르너가 꿈의 상상력에 부여하는 역할도, 심지어 그의 해석도 우리는 온전히 인정했다. 다만 말하자면 그것들을 문제의 다른 부문으로 데려가야 했다. 꿈이 상상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상상력이 꿈 사고의 형성에 가장 큰 몫을 하는 것이다. 꿈 사고의 원천을 알려 주는 실마리는 셰르너에게 빚지고 있지만, 그가 꿈 작업의 몫으로 돌리는 것은 거의 모두 무의식의 활동으로 돌려야 한다. 이 활동은 낮 동안에도 움직이며, 꿈만이 아니라 신경증 증상에도 계기를 대 준다. 우리는 꿈 작업을 이 활동과는 전혀 다르고 훨씬 좁게 제한된 것으로 떼어 놓아야 했다. 끝으로 우리는 꿈과 정신 장애의 관계를 결코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땅 위에 더 단단한 토대를 놓아 주었다.
이렇게 우리 이론의 새로운 재료로, 말하자면 더 높은 통일체 안에 한데 묶이자, 권위자들의 더없이 다양하고 더없이 모순된 결론들이 우리의 구조물 안에 들어맞는 것을 보게 된다. 그 가운데 몇몇은 달리 배치되었고, 완전히 물리쳐진 것은 몇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구조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심리학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친 숱한 불분명한 점들은 제쳐 두더라도, 이제 우리는 새로운 모순에 부딪혀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듯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꿈 사고가 완전히 정상적인 정신 작용에서 나온다고 인정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꿈 사고 가운데서 전적으로 비정상적인 정신 과정을 여럿 발견했고, 그 과정들은 꿈 내용에까지 똑같이 미친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해석하면서 이 과정들을 되풀이했다. 우리가 「꿈 작업」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모두 우리가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심리적 과정과 너무나 동떨어져 보여서, 꿈꾸기의 심리적 활동이 저급하다는 저자들의 더없이 가혹한 판단도 우리에게는 근거가 충분해 보인다.
어쩌면 한층 더 나아가야만 해명과 개선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꿈 형성으로 이어지는 배치 가운데 하나를 골라내 보겠다.
우리는 꿈이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짜인 여러 사고를 대신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 이 사고들이 우리의 정상적인 정신생활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정신 작용에서 높이 사는 성질, 정신 작용을 고차원의 복잡한 활동으로 돋보이게 하는 성질을 우리는 꿈 사고에서 모두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이 정신 작업이 잠자는 동안에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가정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고수해 온, 수면의 심리 상태에 관한 견해가 크게 흔들릴 것이다. 이 사고들은 얼마든지 낮에 생겨났을 수 있으며, 처음부터 우리 의식에 알아채이지 않은 채 계속 자라나 잠이 들 무렵에는 완성된 채로 서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런 사정에서 무언가를 결론지어야 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가장 복잡한 정신 작용도 의식의 협력 없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것은 히스테리나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정신분석할 때마다 우리가 이미 따로 배운 사실이다. 이 꿈 사고들은 그 자체로는 분명 의식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낮 동안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의식되는 상태는 어떤 심리 기능, 곧 주의가 발휘되느냐에 달려 있다. 주의는 정해진 양만큼만 쓰일 수 있는 듯하며, 다른 목적들 때문에 문제의 생각의 흐름에서 거두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의 흐름이 의식에서 멀어지는 또 다른 경로는 다음과 같다. 의식적으로 되짚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때 일정한 길을 따라간다. 그런데 그 길이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표상으로 우리를 이끌면, 우리는 거기서 멈추고 더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되었다가 버려진 생각의 흐름은, 주의를 억지로 되돌려 놓을 만큼 강도가 유난히 뚜렷한 지점에 이르지 않는 한, 주의를 되찾지 못한 채 계속 자아져 나갈 수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처음의 거부, 어쩌면 옳지 않다거나 그 사고 행위의 현재 목적에 쓸모없다는 이유로 판단이 의식적으로 내렸을 거부가, 어떤 사고 과정이 의식에 알아채이지 않은 채 잠이 들 때까지 이어지는 까닭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요약해 말하자면, 우리는 이런 생각의 흐름을 전의식적인 것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완전히 올바른 것이라고 믿는다. 또 그것은 그저 소홀히 된 것일 수도 있고, 중단되어 억제된 것일 수도 있다. 이 표상의 흐름을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도 솔직히 말해 두자. 우리는, 집중 에너지라고 부르는 일정한 흥분량이 목적 표상에서 출발해 그 목적 표상이 고른 연상 통로를 따라 전치된다고 믿는다. 「소홀히 된」 생각의 흐름은 그런 집중을 받지 못했고, 「억제된」 또는 「거부된」 생각의 흐름에서는 이 집중이 거두어졌다. 그러니 둘 다 제 충동에 내맡겨진 셈이다. 에너지를 비축한, 목표를 향한 생각의 흐름은 일정한 조건에서 의식의 주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에너지의 잉여」를 받는다. 의식의 본성과 활동에 관한 우리의 가정은 조금 뒤에 밝혀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전의식계에서 촉발된 생각의 흐름은 저절로 사라질 수도 있고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 앞의 결말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생각의 흐름은 제 에너지를 자기에게서 뻗어 나가는 모든 연상 통로로 퍼뜨려 생각의 사슬 전체를 흥분 상태에 빠뜨리는데, 이 흥분 상태는 한동안 이어지다가, 출구를 요구하는 흥분이 휴면 에너지로 변환되면서 가라앉는다.2 이 첫째 결말에 이르면 그 과정은 꿈 형성에 더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전의식 속에는 다른 목적 표상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것들은 우리 무의식의 원천과 늘 활동하는 소원들에서 나온다. 이 목적 표상들은 그렇게 홀로 내버려진 생각의 권역 안에 있는 흥분들을 장악하고, 그 권역과 무의식적 소원 사이에 연결을 세우며, 무의식적 소원에 깃든 에너지를 그리로 옮겨 줄 수 있다. 이때부터 소홀히 되었거나 억제된 생각의 흐름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처지가 된다. 다만 이렇게 힘을 보강받아도 의식에 이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의식적이던 생각의 흐름이 무의식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의식적인 생각의 흐름이 처음부터 무의식적 소원과 이어져 있어서 그 때문에 지배적인 목표 집중에 거부당했다면, 또는 무의식적 소원이 다른 ― 어쩌면 신체적인 ― 이유로 활성화되어 전의식계가 집중하지 않은 심리적 잔재로 스스로 전이를 꾀했다면, 꿈 형성의 다른 배치가 생겨났을 것이다. 세 경우는 모두 결국 한 가지 결말로 모인다. 곧 전의식 안에, 전의식적 집중에게서 버림받고 무의식적 소원에게서 집중을 받는 생각의 흐름이 하나 자리 잡는 것이다.
이때부터 생각의 흐름은 일련의 변형을 겪는데, 우리는 이 변형을 더는 정상적인 심리적 과정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결과, 곧 정신병리적 형성물을 내놓는다. 이 변형들을 두드러지게 짚어 한데 묶어 보자.
1. 개개 표상의 강도가 통째로 방출될 수 있게 되고, 한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옮아가면서 뚜렷한 강도를 지닌 개별 표상들을 이룬다. 이 과정이 거듭 되풀이되면 마침내 생각의 흐름 전체의 강도가 표상 요소 하나에 모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6장에서 알게 된 압축의 원리다. 꿈이 주는 낯선 인상은 주로 압축 탓인데, 의식이 다가갈 수 있는 정상적인 정신생활에서는 그와 비슷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생각의 사슬 전체의 결절점이나 최종 결과로서 큰 심리적 의의를 지니는 표상들을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유효성은 내적 지각에 띌 만큼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며, 그래서 그 표상에 담긴 것이 조금이라도 더 강렬해지는 일은 없다. 압축 과정에서는 심리적 연관 전체가 표상 내용의 강도로 바뀐다. 책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낱말을 자간을 띄워 찍거나 굵은 글씨로 인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로 할 때라면 같은 낱말을 크고 또박또박, 힘주어 발음할 것이다. 첫째 비유는 곧바로 6장 (가)에서 든 예(이르마의 주사 꿈에 나오는 트리메틸아민)로 우리를 이끈다. 미술사가들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조각들이 표현된 인물의 지위를 조상(彫像)의 크기로 나타내면서 비슷한 원리를 따른다는 데 우리의 주의를 돌린다. 왕은 수행원이나 정복당한 적보다 두세 배 크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로마 시대의 어느 미술품은 같은 목적을 이루는 데 더 섬세한 수단을 쓴다. 황제의 형상은 한가운데에 꼿꼿이 선 자세로 놓이고, 그 모습을 제대로 빚어내는 데 각별한 공을 들이며, 그의 적들은 그의 발치에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더는 난쟁이들 사이의 거인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늘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도 저 오래된 표현 원리의 메아리일 뿐이다.
꿈의 압축이 나아가는 방향은 한편으로는 꿈 사고의 참된 전의식적 관계가,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 속 시각적 회상이 끌어당기는 힘이 정한다. 압축 작업이 성공하면 지각 체계로 침투하는 데 필요한 강도가 생겨난다.
2. 게다가 강도의 이런 자유로운 전이 가능성 덕분에, 그리고 압축에 이바지하면서, 말하자면 타협물이라 할 중간 표상이 만들어진다(수많은 예 참조). 이것 역시 정상적인 표상의 흐름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다. 정상적인 표상의 흐름에서는 무엇보다 「알맞은」 표상 요소를 골라서 붙들어 두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의식적 사고에 맞는 언어 표현을 찾으려고 애쓸 때에는 합성 형성물과 타협 형성물이 유난히 자주 생긴다. 이것들은 「말실수」로 간주된다.
3. 서로 강도를 옮겨 주는 표상들은 아주 느슨하게 이어져 있으며, 진지한 사고에서는 멸시당하고 재치의 효과를 낼 때에나 쓰이는 연상 형식으로 결합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소리가 같거나 울림이 비슷한 데 기대는 유형의 연상이 눈에 띈다.
4. 서로 모순되는 사고들은 서로를 없애려 애쓰지 않고 나란히 남아 있다. 그것들은 흔히 마치 모순이 없다는 듯이 합쳐져 압축을 이루거나, 사고에서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만 행동에서는 자주 용인하는 타협을 이룬다.
앞서 합리적으로 형성된 사고들이 꿈 작업 도중에 겪는 비정상적인 과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 몇 가지가 이것이다. 이 과정들의 주된 특징으로 우리는, 집중 에너지를 이동 가능하고 방출 가능하게 만드는 일에 큰 비중이 실린다는 점을 알아본다. 이 에너지가 들러붙어 있는 심리적 요소의 내용과 본래 의미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압축과 타협 형성은 사고를 영상으로 바꿀 계기가 생겼을 때 퇴행에 이바지하려고만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상으로의 퇴행이 없는 꿈, 예컨대 「Autodidasker ― 궁정 고문관 N.과의 대화」 꿈을 분석해 보면, 그리고 더욱 뚜렷하게는 종합해 보면, 다른 꿈들과 똑같은 전치와 압축의 과정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다른 두 종류의 심리적 과정이 꿈 형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정상적인 사고와 대등한, 완전히 올바른 꿈 사고를 만들어 내고, 다른 하나는 이 생각들을 몹시 놀랍고도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룬다. 뒤의 과정을 우리는 이미 6장에서 본래의 꿈 작업으로 따로 떼어 놓았다. 이제 이 뒤의 심리적 과정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신경증, 특히 히스테리의 심리학 속으로 꽤 깊이 파고들어 가 보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이와 똑같은 올바르지 않은 심리적 과정이 ― 여기 열거하지 않은 다른 과정들과 함께 ― 히스테리성 증상의 형성을 지배한다는 것을 배운다. 히스테리에서도 우리는 곧바로, 우리의 의식적 사고와 대등한 완전히 올바른 일련의 사고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 사고들이 이런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알 길이 없고, 나중에야 재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사고들이 어딘가에서 우리의 지각으로 밀고 들어왔다면, 형성된 증상을 분석해 보고서 우리는 이 정상적인 사고들이 비정상적인 취급을 받아 압축과 타협 형성을 통해, 피상적인 연상을 거쳐, 모순을 덮어 가린 채, 그리고 마침내 퇴행의 길을 거쳐 증상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아낸다. 꿈 작업의 특성과 정신신경증 증상을 형성하는 심리적 활동의 특성 사이에 완전한 동일성이 있다는 것을 보았으니, 히스테리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결론을 꿈에 옮겨 적용해도 정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히스테리 이론에서 우리는 다음 명제를 빌려 온다. 정상적인 생각의 흐름이 이처럼 비정상적인 심리적 가공을 겪는 것은, 그 생각의 흐름이 유년기 생활에서 비롯되어 억압 상태에 있는 무의식적 소원의 전이에 쓰였을 때뿐이다. 이 명제에 따라 우리는 꿈을 추동하는 꿈 소원이 언제나 무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가정 위에 꿈 이론을 세웠는데, 우리 스스로 인정했듯이 이 가정은 보편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반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거리낌 없이 써 온 억압이라는 용어의 참뜻을 밝히려면, 우리의 심리학적 구조물에 무언가를 좀 더 덧붙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원시적 심리 장치라는 허구를 공들여 그려 보았다. 이 장치의 작업은 흥분이 쌓이는 것을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흥분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조절된다. 그래서 이 장치는 반사 장치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졌다. 본래 몸 내부의 변화로 가는 길이던 운동성이, 장치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방출 통로를 이루었다. 이어서 우리는 충족 체험이 가져오는 심리적 결과를 논의했는데, 그때 둘째 가정도 함께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곧 흥분이 쌓이면 ― 여기서 우리가 상관하지 않는 어떤 양식에 따라 ― 불쾌로 지각되어, 흥분의 감소가 쾌로 지각되는 충족 체험을 다시 불러오도록 장치를 움직인다는 가정이다. 불쾌에서 출발해 쾌를 향해 나아가는, 장치 안의 이런 흐름을 우리는 소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소원 말고는 아무것도 장치를 움직일 수 없으며, 장치 안의 흥분 방출은 쾌와 불쾌의 지각으로 자동 조절된다고 말했다. 최초의 소원은 충족의 기억을 환각적으로 집중하는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환각은 기진맥진할 때까지 유지되지 않는 한 욕망을 그치게 하지 못했고, 따라서 충족과 결부된 쾌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둘째 활동, 우리 용어로 말하면 둘째 체계의 활동이 필요해졌다. 이 활동은 기억 집중이 지각으로까지 나아가 거기서부터 심리적 힘을 묶어 두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욕구 자극에서 나오는 흥분을 자발적 운동성을 거치는 우회로로 이끌어야 했으며, 그 운동성은 마침내 외부 세계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충족 대상을 실제로 지각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했다. 여기까지 우리는 심리 장치의 설계를 그려 보았다. 이 두 체계는, 우리가 완전히 발달한 장치 안에 설정하는 무의식계와 전의식계의 싹이다.
운동성을 통해 외부 세계를 성공적으로 바꿀 수 있으려면, 기억 체계에 많은 경험이 쌓여야 하고, 여러 목적 표상이 이 기억 재료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관계들이 다양하게 고정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가정을 더 밀고 나가 보자. 에너지를 시험 삼아 내보냈다 거두어들이는 둘째 체계의 다양한 활동은, 한편으로는 모든 기억 재료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개개의 사고 통로에 많은 양의 에너지를 보낸다면 그것은 둘째 체계로서는 쓸데없는 비용일 것이다. 그 에너지는 아무 목적 없이 유출되어 외부 세계를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양을 줄여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합목적성을 위해, 둘째 체계가 집중 에너지의 대부분을 휴면 상태로 붙들어 두고 작은 일부만을 전치에 쓰는 데 성공한다고 상정한다. 이 과정들의 기제를 나는 전혀 모른다. 이런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 보려는 사람은 물리적 유비를 찾아내고, 뉴런이 자극될 때의 운동 과정을 증명할 길을 닦아야 할 것이다. 나는 다만 이런 생각을 고수할 뿐이다. 첫째 Ψ-체계의 활동은 흥분량의 자유로운 유출을 지향하며, 둘째 체계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로 이 유출을 제지한다. 즉 둘째 체계는 아마 수준을 높임으로써 휴면 에너지로의 변환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나는 둘째 체계의 지배 아래에서는 첫째 체계의 지배 아래에서와 달리 흥분의 경과가 전혀 다른 역학적 조건에 매인다고 가정한다. 둘째 체계는 시험 삼아 하는 사고 작업을 마치고 나면 흥분의 제지와 정체를 풀어, 그 흥분이 운동성으로 유출되게 한다.
둘째 체계가 방출을 이렇게 제지하는 것이 불쾌 원칙(principle of pain)에 따른 조절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생각의 흐름이 떠오른다. 이제 일차적 충족 체험의 짝, 곧 객관적인 두려움 체험을 찾아보자. 지각 자극 하나가 원시적 장치에 작용해 불쾌한 정동의 원천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불규칙한 운동 표출이 잇따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장치를 지각에서, 동시에 불쾌에서 빼내게 되는데, 지각이 다시 나타나면 이 표출은 곧바로 (이를테면 도피 운동으로) 되풀이되고 지각이 다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쾌의 원천에 대한 지각을 환각의 형태로든 다른 어떤 형태로든 다시 집중하려는 경향은 남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일차적 장치에는 불쾌한 기억 이미지가 어떻게든 깨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그것을 버리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 흥분이 넘쳐흐르면 틀림없이 불쾌를 일으킬(더 정확히 말하면 일으키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비켜 가는 일은 예전에 지각에서 달아났던 일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인데, 이 일은 기억이 지각과 달리 의식을 흥분시켜 새로운 에너지를 제 쪽으로 끌어올 만한 성질을 넉넉히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 덕분에 더 쉬워지기도 한다. 심리적 과정이 예전의 불쾌한 기억을 이처럼 쉽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비켜 가는 일은 우리에게 심리적 억압의 본보기이자 첫 사례를 보여 준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불쾌한 것을 이렇게 비켜 가는 일의 상당 부분, 곧 타조가 하는 행동의 상당 부분은 성인의 정상적인 정신생활에서도 쉽사리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쾌 원칙 때문에 첫째 체계는 불쾌한 것을 사고의 연관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도무지 할 수 없다. 첫째 체계는 소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정이 그대로라면, 경험으로 쌓인 모든 기억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할 둘째 체계의 사고 활동이 방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두 길이 열린다. 둘째 체계의 작업은 불쾌 원칙에서 완전히 벗어나 불쾌한 회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길을 가거나, 아니면 불쾌가 풀려나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불쾌한 기억을 집중할 방도를 찾아낸다. 첫째 가능성은 물리쳐도 좋다. 불쾌 원칙은 둘째 체계의 정동 방출을 조절하는 조절기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째 가능성으로 이끌린다. 곧 이 체계는 회상의 방출을 제지하는 방식으로, 따라서 불쾌를 발생시키는, 운동 신경 자극에 견줄 만한 방출도 제지하는 방식으로 회상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출발점, 곧 불쾌 원칙에 대한 고찰과 신경 자극의 비용을 최소로 한다는 원칙에서, 우리는 둘째 체계를 통한 집중이 동시에 정동 방출에 대한 제지라는 가설에 이른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꼭 붙들어 두기로 하자. 이것이 억압 이론의 열쇠다. 곧 둘째 체계는 어떤 표상에서 나오는 불쾌의 발생을 막을 수 있는 처지에 있을 때에만 그 표상을 집중할 수 있다. 이 제지를 빠져나가는 것은 무엇이든 둘째 체계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남으며, 불쾌 원칙 때문에 곧 버려질 것이다. 그렇지만 불쾌의 제지가 완전할 필요는 없다. 불쾌가 시작되는 것만큼은 허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둘째 체계에게 그 기억의 성질을 알려 주고, 어쩌면 정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그 기억이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첫째 체계만이 허용하는 심리적 과정을 나는 이제 일차 과정(primary process)이라 부르고, 둘째 체계의 제지에서 생겨나는 과정을 이차 과정(secondary process)이라 부르겠다. 다른 한 가지 점을 들어, 둘째 체계가 무엇 때문에 일차 과정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는지 보여 주겠다. 일차 과정은 흥분을 방출해, 그렇게 모인 흥분량으로 지각 동일성을 이루려고 애쓴다. 이차 과정은 이 의도를 버리고, 그 대신 사고 동일성을 이루는 과제를 떠맡았다. 모든 사고는, 목적 표상으로 삼은 충족의 기억에서 출발해 같은 기억을 동일하게 집중하는 데 이르는 우회로일 뿐이며, 이 동일한 집중에는 운동 경험의 궤도를 따라 다시 도달해야 한다. 사고라는 상태는 표상들 사이의 연결 통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표상들의 강도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표상들에서 일어나는 압축과 중간 형성물 또는 타협 형성물이 이 목표 동일성에 이르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뻔하다. 그것들은 한 표상을 다른 표상으로 바꿔 놓음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면 원래의 표상에서 이어졌을 길에서 벗어나 버린다. 그래서 이차적 사고에서는 이런 과정을 조심스럽게 피한다. 불쾌 원칙 역시, 생각의 흐름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사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생각의 흐름이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사고 과정은 불쾌 원칙에 의한 배타적 조절에서 점점 더 벗어나, 정신의 작업을 통해 정동의 발생을 신호로서 필요한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활동의 세련화는 의식이 가져오는 새로운 에너지 과잉 집중으로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련화는 가장 정상적인 정신생활에서도 완전히 성공하는 일이 드물며, 우리의 사고는 불쾌 원칙이 끼어들어 변조될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차적 정신 작업의 재료를 이루는 사고가 일차적 심리 과정 속으로 흘러들 수 있게 해 주는, 우리 심리 장치의 기능 효율에 난 틈이 아니다 ― 꿈과 히스테리성 증상으로 이어지는 작업을 이제 우리는 이 공식으로 기술할 수 있다. 이런 기능 부족의 경우는 우리 발달사의 두 요인이 합쳐져 생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오로지 심리 장치에 속하며 두 체계의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왔고, 다른 하나는 들쭉날쭉 작용하면서 기관에서 비롯된 추진력을 정신생활 속으로 끌어들인다. 두 요인은 모두 유년기 생활에서 비롯되며, 유년기 이래 우리의 심리적·신체적 유기체가 겪어 온 변형의 결과다.
심리 장치 안의 심리적 과정 가운데 하나를 일차 과정이라고 이름 붙였을 때, 나는 서열과 능력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 관계도 이름 짓는 데 한몫 끼게 할 생각이었다. 우리가 아는 한 일차 과정만 지닌 심리 장치는 없으며, 그런 한에서 그것은 이론적 허구다. 그러나 일차 과정은 처음부터 장치 안에 있는 반면, 이차 과정은 살아가는 동안 차츰 발달해 일차 과정을 제지하고 덮으며, 어쩌면 인생의 절정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차 과정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는 것만큼은 사실에 근거한다. 이차 과정이 이렇게 늦게 나타나기 때문에, 무의식적 소원 충동으로 이루어진 우리 존재의 핵심은 전의식이 붙잡을 수도 제지할 수도 없다. 전의식의 몫은, 무의식에서 비롯된 소원 충동에게 가장 알맞은 길을 가리켜 주는 일로 영영 제한되어 있다. 이 무의식적 소원들은 그 뒤의 모든 심리적 노력에 강제를 가한다. 그 노력들은 이 강제에 따를 수밖에 없으며,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제 길에서 돌려세워 더 높은 목표로 이끌려고 애써야 한다. 전의식적 집중이 이처럼 늦어진 결과, 기억 재료의 넓은 영역이 다가갈 수 없는 채로 남는다.
유년기 생활에서 비롯된, 파괴할 수 없고 거칠 것 없는 이 소원 충동들 가운데에는, 그 성취가 이차적 사고의 목적 표상과 모순 관계에 들어서게 된 것들도 있다. 이 소원들이 성취되면 더는 쾌의 정동이 아니라 불쾌의 정동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정동 변환이야말로 우리가 「억압」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을 이루며, 우리는 억압에서, 단죄 곧 이성으로 물리치는 일이 유년기에 내딛는 첫걸음을 알아본다. 이런 변환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추진력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억압의 문제인데, 여기서는 이 문제를 스치듯 건드리기만 하면 된다. 이런 정동 변환이 발달 과정에서 일어난다는 것(본래는 없던 혐오가 유년기 생활에 나타나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차 체계의 활동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 두면 충분하다. 무의식적 소원이 정동 방출을 일으키는 출발점인 기억들은 전의식계가 한 번도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며, 그 때문에 그 기억들의 정동 방출은 제지될 수 없다. 바로 이 정동 발생 때문에, 이 표상들은 자기가 소원의 힘을 옮겨 준 전의식적 사고에게조차 지금도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오히려 불쾌 원칙이 작동해 전의식계가 이 전이 사고를 비켜 가게 만든다. 이렇게 내버려진 전이 사고는 「억압된」 것이 되며, 이로써 처음부터 전의식계에서 물러나 있던 유년기 기억의 저장고가 존재한다는 것이 억압의 전제 조건이 된다.
가장 유리한 경우에는 전의식계 안의 전이 사고에서 에너지가 거두어지자마자 불쾌의 발생이 그치며, 이 효과는 불쾌 원칙의 개입이 합목적적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억압된 무의식적 소원이 기관에서 오는 강화를 받아 그것을 제 전이 사고에게 빌려줄 수 있고, 그 강화로 전이 사고가 전의식계의 집중에게서 버림받은 뒤에도 제 흥분을 가지고 침투하려 애쓸 수 있게 해 준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러면 방어 투쟁이 벌어진다. 전의식계가 억압된 표상에 맞서는 대항을 강화하기 때문이며, 그 뒤 이 투쟁은 전이 사고(무의식적 소원의 운반자)가 증상 형성을 통해 어떤 타협의 형태로 침투하는 데로 이어진다. 그러나 억제된 사고가 무의식적 소원 충동에게 강하게 집중을 받고 전의식적 집중에게서 버림받는 순간부터, 그 사고는 일차적 심리 과정에 굴복하여 오직 운동 방출만을, 또는 길이 트여 있다면 바라던 지각 동일성을 환각으로 되살리는 것만을 추구한다. 앞서 우리는 경험적으로, 앞에서 기술한 올바르지 않은 과정들이 억압 속에 있는 사고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제 우리는 그 연관의 또 다른 부분을 파악한다. 이 올바르지 않은 과정들은 심리 장치 안에서 일차적인 과정이다. 그것들은 전의식적 집중에게서 버림받은 사고가 홀로 내버려져, 무의식에서 나와 방출을 추구하는, 제지되지 않은 에너지로 제 몸을 채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난다. 「올바르지 않다」고 불리는 이 과정들이 사실은 정상적인 것의 변조, 곧 결함 있는 사고가 아니라 제지에서 풀려났을 때의 심리 장치의 활동 방식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관찰을 몇 가지 더 보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의식적 흥분이 운동성으로 전이되는 일도 같은 과정에 따라 일어나며, 전의식적 표상이 낱말과 결합할 때에도 부주의 탓으로 돌려지는 똑같은 전치와 혼합이 쉽사리 나타난다는 것을 본다. 끝으로, 이런 일차적 경과를 제지하는 데에는 반드시 작업의 증가가 따른다는 증거를 하나 들고 싶다. 이런 생각의 흐름이 의식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면, 우리는 희극적 효과, 곧 웃음으로 방출되어야 할 잉여를 얻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신신경증 이론은, 어린 시절의 발달기에 억압(정동 변환)을 겪는 것은 오직 유년기 생활에서 온 성적 소원 충동뿐이라고 완전히 확신하며 주장한다. 이 소원 충동들은 나중의 발달기에 다시 활동할 수 있으며, 본래의 양성성에서 형성되는 성적 체질의 결과로, 또는 성생활의 불리한 영향의 결과로 되살아날 능력을 지닌다. 그렇게 해서 이것들은 모든 정신신경증 증상 형성에 추진력을 대 준다. 이 성적 힘들을 끌어들여야만 억압 이론에 아직 드러나 보이는 빈틈을 메울 수 있다. 성적인 것과 유년기적인 것이라는 요청을 꿈 이론에서도 주장할 수 있는지는 미결로 남겨 두겠다. 꿈 소원은 언제나 무의식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하면서 나는 이미 증명할 수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기에, 이 문제는 여기서 미완으로 남겨 둔다.3 꿈 형성과 히스테리성 증상 형성에서 심리적 힘들의 작용이 어떻게 다른지도 더 파고들지 않겠다. 그러려면 비교할 두 항 가운데 하나에 대해 더 분명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한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며, 두 심리 체계와 그 작동 방식과 억압에 관한 이 논의 전체를 방금 벌인 것도 바로 그 한 가지 때문이었음을 여기서 고백해 두겠다. 내가 문제의 심리학적 관계를 대체로 올바르게 파악했는지, 아니면 이토록 어려운 문제에서 쉽게 그럴 수 있듯이 그릇되고 단편적으로 파악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적 검열과, 꿈 내용의 올바른 가공 및 비정상적 가공을 어떻게 달리 해석하게 되든, 그런 과정들이 꿈 형성에서 작용하며 본질적으로 히스테리성 증상 형성에서 관찰되는 과정과 더없이 가까운 유비를 보인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꿈은 병리적 현상이 아니며, 정신 능력의 쇠약을 뒤에 남기지도 않는다. 내 꿈과 신경증 환자의 꿈에서 건강한 사람의 꿈에 관해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다는 반론은 논평 없이 물리쳐도 좋다. 그러므로 현상에서 그 추진력을 추론해 보면, 신경증이 이용하는 심리 기제는 정신생활의 병적 장애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심리 장치의 정상적인 구조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심리 체계,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검열, 한 활동이 다른 활동을 제지하고 덮는 일, 두 체계가 의식과 맺는 관계 ― 또는 이것들 대신 실제 사정을 더 올바르게 해석해 줄 수 있는 무엇이든 ― 이 모든 것은 우리 심리 장치의 정상적인 구조에 속하며, 꿈은 이 구조를 아는 데 이르는 길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 우리 지식에 보탤 것으로서 완벽하게 확증된 최소한에 만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꿈이 억제된 재료가 정상적인 사람에게서도 계속 존재하며 심리적 활동을 할 능력을 잃지 않는다는 증거를 제공한다고 말할 것이다. 꿈 자체가 이 억제된 재료의 표출 가운데 하나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경우에 그렇고, 실질적인 경험에 따르면 적어도 꿈 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을 가장 눈에 띄게 보여 주는 꿈들 가운데 상당수에서 그렇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모순들의 대립적 조정 때문에 표현을 가로막히고 내적 지각에서 차단되어 있던 억제된 심리적 재료는, 밤이 되면 타협 형성물의 지배 아래에서 의식으로 밀고 들어올 길과 방도를 찾아낸다.
「Flectere si nequeo superos, Acheronta movebo.」〔천상의 신들을 꺾을 수 없다면, 저승을 움직이리라〕
어쨌든 꿈 해석은 정신생활 속 무의식을 아는 데 이르는 via regia〔왕도〕다.
꿈의 분석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모든 장치 가운데 가장 경이롭고 가장 신비로운 이 장치의 구성을 이해하는 쪽으로 조금 나아갔다. 물론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이른바 병적인 다른 형성물들에서 출발해 무의식의 분석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만큼의 첫걸음은 떼었다. 병은 ― 적어도 기능적이라고 불러 마땅한 병은 ― 이 장치가 파괴되거나 그 내부에 새로운 분열이 생겨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병은 오히려,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 그토록 많은 활동을 가려 버리는 힘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 구성 요소들이 강해지고 약해지는 것으로 역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장치가 두 체계로 이루어져 있기에 정상적인 활동조차 단일한 체계로는 불가능했을 만큼 섬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른 곳에서 보여 줄 수 있었다.4
주
1. 영역본 표제 끝은 「Regression」(퇴행)이지만, 이 절이 다루는 것은 억압(repression)이고 퇴행은 앞 절 (나)의 주제다. 영역자 자신의 찾아보기도 이 절의 쪽을 「Repression」 아래에 둔다. 전달 과정의 오류로 보아 「억압」으로 옮겼다. ― 옮긴이.
2. J. 브로이어가 우리의 『히스테리 연구』(1895년, 제2판 1909년)에서 밝힌 의미심장한 견해 참조.
3.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제를 다루는 데 빈틈이 있는데, 나는 그 빈틈을 일부러 남겨 두었다. 그것을 메우려면 한편으로는 너무 큰 노력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꿈과 동떨어진 재료를 폭넓게 끌어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억제된」이라는 낱말과 「억압된」이라는 낱말에 서로 다른 뜻을 결부하는지를 밝히지 않고 피해 왔다. 분명히 해 둔 것은 다만, 뒤의 낱말이 앞의 낱말보다 무의식과의 관계를 더 강조한다는 것뿐이다. 꿈 사고가 의식으로 나아가는 전진적 진행을 버리고 퇴행의 길을 택할 때에도 왜 검열에 의한 왜곡을 겪는가 하는, 이와 가까운 문제에도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무엇보다, 꿈 작업을 더 분석해 나가면 이르게 되는 문제들에 관심을 일깨우고, 도중에 그 문제들과 마주치는 다른 주제들을 가리켜 보이는 데 마음을 썼다. 어디서 추적을 멈추어야 할지 정하기가 늘 쉽지는 않았다. 꿈에서 정신성적 생활이 하는 역할을 샅샅이 다루지 않고 성적 내용이 뻔히 드러나는 꿈의 해석을 피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독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성생활을 의사와 과학 연구자가 고려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할 「pudendum」〔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생각과도, 내가 신경병리학에서 밝혀 온 원칙과도 거리가 한참 멀다. 달디스의 아르테미도로스를 옮긴 번역자는 도덕적 분개에 떠밀려 『꿈의 상징』에 들어 있는 성적인 꿈에 관한 장을 독자가 알지 못하게 감추었는데, 나는 그 분개 또한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로 말하자면, 성적인 꿈을 설명하다 보면 아직 해명되지 않은 도착과 양성성의 문제에 깊이 얽혀 들 수밖에 없으리라는 확신 하나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재료를 다른 맥락을 위해 남겨 두었다.
4. 정신병리학을 심리학 위에 세우는 데 이바지하는 현상은 꿈만이 아니다. 나는 미완성 논문 몇 편으로 이루어진 짧은 연작(『정신의학·신경학 월보(Monatsschrift für Psychiatrie und Neurologie)』에 실린 「건망증의 심리 기제에 대하여(Über den psychischen Mechanismus der Vergesslichkeit)」, 1898년, 그리고 「은폐 기억에 대하여(Über Deckerinnerungen)」, 1899년)에서 일상생활의 여러 심리적 현상을 같은 견해에 따라 해석하려고 한다. 이 논문들과 「망각」, 「말실수」 등에 관한 다른 논문들은 그 뒤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이라는 제목으로 한데 묶여 1904년과 1907년에 나왔으며, 그 영역본도 곧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