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전형적인 꿈
대체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꿈 내용 뒤에 숨은 무의식적 사고를 내주려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꿈을 해석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우리 꿈 해석 방법을 실제로 쓸 수 있는 범위는 크게 줄어든다.1 그러나 개인은 여느 때 제 꿈 세계를 저마다의 특이한 모양으로 자유롭게 빚어내어 남이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드는데, 이와 달리 거의 누구나 똑같은 방식으로 꾸어 온 꿈도 얼마쯤 있어서, 우리는 그런 꿈이 꿈꾸는 사람 누구에게서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가정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 전형적인 꿈들에 각별한 관심이 가는 것은, 그것들이 아마 누구에게서나 모두 같은 원천에서 나오고, 따라서 꿈의 원천에 관해 알려 주는 데 특히 알맞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꿈은 더없이 철저하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류의 예 몇 가지만 좀 자세히 살펴보려 하며, 그러기 위해 먼저 이른바 알몸의 당혹 꿈과 가까운 사람이 죽는 꿈을 골라 보겠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알몸이거나 옷을 변변히 걸치지 못한 채로 있는 꿈은, 자기는 그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이 덧붙은 채 나타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알몸 꿈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그 꿈에서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느낄 때, 달아나거나 숨고 싶어 할 때, 그리고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고 이 불쾌한 상황을 바꿀 힘이 없다는 기묘한 제지를 느낄 때뿐이다. 이런 연관 속에서만 이 꿈은 전형적이다. 그 밖의 점에서는 그 내용의 핵이 온갖 관계 속으로 끌려 들어가거나 개인적인 부연으로 대체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부끄러움과 같은 성질의 불쾌한 감각이고, 주로 자리를 옮겨 감으로써 제 알몸을 감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소원이다. 내 독자들도 대부분 언젠가 꿈속에서 이런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 체험이 어떤 성질이고 어떤 모양새였는지는 대개 분명하지 않다. 흔히 「나는 셔츠 바람이었다」고들 보고하지만, 이것이 뚜렷한 영상인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옷이 모자란 상태가 무척 막연해서, 꿈 보고에서는 「나는 슈미즈 바람이었거나 속치마 바람이었다」처럼 양자택일로 표현된다. 대체로 옷차림의 결함은 거기에 따르는 부끄러움을 정당화할 만큼 심하지 않다. 군대에 복무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흔히 알몸 대신 규정에 어긋나는 복장이 나타난다. 「나는 군도를 차지 않은 채 거리에 있는데 장교들이 오는 것이 보인다」라든가, 「나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있다」라든가, 「나는 체크무늬 사복 바지를 입고 있다」 따위다.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얼굴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남은 낯선 사람들이다. 전형적인 꿈에서는 자기에게 당혹감을 안기는 옷차림 때문에 꾸지람을 듣거나, 하다못해 남의 눈에 띄는 일조차 결코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내가 특히 선명한 꿈 하나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듯이, 뻣뻣하게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은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하다.
꿈꾸는 사람의 부끄러운 당혹감과 구경꾼들의 무심함은 꿈에서 자주 나타나는 모순을 이룬다. 낯선 사람들이 놀라서 그를 바라보며 비웃거나 분개한다면 꿈꾸는 사람이 느끼는 바에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 뒤쪽의 불쾌한 특징은 소원 성취의 경향 때문에 없어졌지만 당혹감은 이런저런 까닭으로 보존되어 그대로 남았고, 그래서 두 부분이 서로 들어맞지 않게 된 것이다. 소원 성취의 경향 때문에 겉모습이 부분적으로 왜곡된 이 꿈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증거가 있다. 이 꿈이 우리 모두가 안데르센의 이야기로 잘 아는 동화2의 바탕이 되었고, 최근에는 L. 풀다가 『부적』에서 시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안데르센의 동화에서는 사기꾼 둘이 황제에게 값비싼 옷을 짜 주는데, 그 옷은 착하고 참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고 한다. 황제는 이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행차에 나서고, 옷감이 일종의 시금석 노릇을 하는 바람에 모든 사람이 겁에 질려 황제가 알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한다.
그런데 우리 꿈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이해할 수 없는 꿈 내용이 옷을 벗은 상태를 지어내도록 부추겼고, 기억에 떠오르는 상황이 그 상태 속에서 의미를 띠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데는 그리 대단한 대담함이 필요하지 않다. 이때 그 상황은 본래의 의미를 빼앗기고 다른 목적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뒤에서, 꿈 내용에 대한 이런 오해가 둘째 심리 체계의 의식적 활동 때문에 자주 일어나며 최종적인 꿈 형성의 한 요인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 나아가 강박 관념과 공포증이 생겨날 때에도 비슷한 오해가, 역시 같은 심리적 인격 안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꿈에서 이 변형을 위한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사기꾼은 꿈이고, 황제는 꿈꾸는 사람 자신이며, 도덕을 설교하려는 경향은 잠재적 꿈 내용이 억압의 희생물이 된 금지된 소원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음을 드러낸다. 내가 신경증 환자들을 분석할 때 이런 꿈이 나타나는 연관을 보면, 이 꿈이 가장 이른 어린 시절의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가족뿐 아니라 낯선 유모와 하녀와 손님들 눈에도 옷을 변변히 걸치지 못한 채로 보였으면서도 제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던 때는 오직 어린 시절뿐이었다.3
조금 더 자란 아이들은 옷을 벗으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일종의 도취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깔깔 웃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제 몸을 찰싹찰싹 두드린다. 그러면 어머니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그러지 못하게 하며 이렇게 말한다. 「에그, 창피한 짓이야 ― 그러면 못써.」 아이들은 흔히 노출하려는 갈망을 드러낸다. 우리 고장에서는 시골 마을을 지나노라면, 나그네 앞에서, 어쩌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느라, 제 셔츠를 걷어 올리는 두세 살배기 꼬맹이를 만나지 않기가 어려울 정도다. 내 환자 한 사람은 여덟 살 때의 한 장면을 의식적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잠자리에 들려고 막 옷을 벗은 그가 속셔츠 바람으로 춤을 추며 누이동생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하녀가 막았다는 것이다. 신경증 환자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는 이성의 아이들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일이 큰 역할을 한다. 편집증에서 옷을 입고 벗는 동안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망상은4 곧바로 이런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도착된 채로 남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아이다운 충동을 강박으로까지 키운 부류가 있으니, 바로 노출증 환자들이다.
수치심이 없는 이 유년기는 훗날의 우리 기억에는 하나의 낙원처럼 보이며, 낙원 자체도 개인의 어린 시절에서 나온 합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낙원에서 인간이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다가, 수치심과 두려움이 깨어나는 순간이 오자 추방이 뒤따르고 성생활과 문화적 발달이 시작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꿈은 밤마다 우리를 이 낙원으로 데려갈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가장 이른 어린 시절의 인상들(선사 시대부터 대략 만 네 살이 될 무렵까지)이 그 자체로, 그 밖의 모든 것과 상관없이, 어쩌면 그 내용과도 더는 상관없이 재생되기를 갈망하며, 그것들이 되풀이되는 것은 소원 성취라는 추측을 감히 내놓은 바 있다. 그러니 알몸 꿈은 노출 꿈이다.5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현재에 속한 모습으로 보이는 자기 자신, 그리고 그 뒤에 쌓인 숱한 허술한 차림의 기억들 밑에 묻혀서 또는 검열 때문에 흐릿해지고 마는 변변찮은 옷차림이라는 표상 ― 이 두 가지가 노출 꿈의 핵을 이룬다. 그다음이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다. 유년기의 그 노출 장면을 실제로 구경한 사람들이 꿈에 다시 나타나는 예를 나는 하나도 알지 못한다. 꿈은 단순한 기억인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유년기에 우리의 성적 관심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은 꿈에서도, 히스테리에서도, 강박 신경증에서도 모든 재생에서 빠져 있다. 오직 편집증만이 구경꾼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채로 있는데도 그들이 거기 있다고 광신적으로 확신한다. 꿈이 이들 대신 들여놓는 「많은 낯선 사람들」, 곧 눈앞에 펼쳐진 구경거리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이들은 바로, 노출이 향했던 단 한 사람의 친밀한 인물의 소원 반대물(wish-opposite)이다. 게다가 「많은 낯선 사람들」은 꿈에서 다른 어떤 알맞은 연관에서든 자주 나타나는데, 소원 반대물로서 그들은 언제나 「비밀」을 뜻한다.6 편집증에서 일어나는 옛 사태의 복원도 이 대립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혼자가 아니다. 분명 누군가 지켜보고 있지만, 구경꾼들은 「많은 낯선, 기묘하게 막연한 사람들」이다.
나아가 노출 꿈에서는 억압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꿈의 불쾌한 감각은, 둘째 심리적 심급이 물리친 노출 장면이 그런데도 표현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그 심급이 보이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 감각을 피하려면 그 장면을 되살리지 않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지되는 감각은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이 감각은 꿈이 의지의 갈등, 곧 부정(否定)을 표현하는 데 훌륭하게 쓰인다. 우리의 무의식적 의도에 따르면 노출은 계속되어야 하고, 검열의 요구에 따르면 멈추어야 한다.
우리의 전형적인 꿈이 동화나 그 밖의 문학 소재와 맺는 관계는 어쩌다 한 번 있는 것도, 우연한 것도 아니다. 시인은 대개 변형 과정의 도구인데, 때로는 시인의 예리한 통찰이 이 과정을 분석적으로 알아보고 거꾸로 따라가서, 말하자면 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 일도 있다. 한 친구가 G. 켈러의 『초록의 하인리히(Der Grüne Heinrich)』에 나오는 다음 대목에 내 주의를 돌려 주었다. 「친애하는 레 군, 오디세우스가 벌거벗은 채 진흙투성이가 되어 나우시카와 그 놀이 동무들 앞에 나타날 때, 그 처지에 담긴 독특하고 짜릿한 진실을 자네가 언젠가 몸소 겪어서 깨닫게 되기를 나는 바라지 않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은가? 그 일을 한번 가까이 들여다보세. 자네가 언젠가 고향과, 자네에게 소중한 모든 것과 헤어져 낯선 땅을 떠돌게 된다면, 그리하여 많은 것을 보고 겪고, 근심과 슬픔을 안고, 어쩌면 비참하고 버림받은 처지가 되기까지 한다면, 자네는 어느 날 밤 어김없이 고향에 다가가는 꿈을 꾸게 될 걸세. 고향이 더없이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며 반짝이는 것이 보이고, 매력 있고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자네를 맞으러 나올 걸세. 그런데 자네는 문득 자기가 누더기를 걸치고, 벌거벗은 채 먼지투성이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지. 이름 모를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자네를 사로잡고, 자네는 몸을 가리고 숨으려 애쓰다가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네. 사람이 있는 한, 이것은 근심을 짊어지고 운명에 시달리는 사람의 꿈일 걸세. 그러니 호메로스는 그 상황을 인간의 영원한 본성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온 것이지.」
시인이 듣는 이들에게서 건드리기를 흔히 노리는 인간의 이 깊고 영원한 본성은, 유년기에, 곧 나중에 선사 시대가 되는 그 시기에 뿌리를 둔 정신의 움직임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년기의 억제되고 금지된 소원들은, 고향 없는 사람이 품는 소원 가운데 나무랄 데 없고 의식될 수 있는 것들을 덮개 삼아 터져 나오며, 그래서 나우시카 전설에서 객관화된 꿈은 어김없이 불안 꿈의 형태를 띤다.
이 장 (다)에서 말한 내 꿈, 곧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다가 이내 층계에 달라붙어 있는 꿈으로 바뀌는 그 꿈도, 이런 꿈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을 보여 주므로 역시 노출 꿈이다. 그러니 이 꿈도 어린 시절의 체험으로 소급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체험을 손에 넣으면 하녀가 나를 대한 태도, 곧 내가 양탄자를 더럽혔다고 나무란 일이 꿈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자리를 얻는 데 어디까지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바라던 설명을 내놓을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시간적인 가까움을 사실상의 연관으로 해석하는 법을 배운다. 겉보기에 아무 연관이 없는 두 생각이 곧바로 잇따라 나오면, 그 둘은 추론해 낼 수 있는 하나의 통일체에 속한다. 내가 a와 t를 나란히 적으면 한 음절 at으로 읽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7 꿈들 서로의 관계도 이와 같다. 방금 인용한 계단 꿈은 한 계열의 꿈들에서 가져온 것이며, 그 계열의 다른 꿈들은 내가 해석해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이 계열에 들어 있는 꿈이라면 같은 연관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계열의 다른 꿈들은 한 유모에 대한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젖먹이 시절의 어느 때부터 두 살 반이 될 때까지 이 유모에게 맡겨져 있었고, 그녀에 대한 흐릿한 기억이 내 의식에 남아 있다. 최근에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그녀는 늙고 못생겼지만 무척 영리하고 야무진 사람이었다. 내 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추론에 따르면, 그녀는 나를 늘 가장 다정하게 대하지는 않았고, 내가 청결 교육을 받아들이는 소질을 넉넉히 보이지 못하면 모진 말을 했다. 그러니 이 교육 사업을 이어 가려 함으로써, 그 하녀는 꿈속에서 내게 선사 시대 노파의 화신으로 대접받을 권리를 얻는 것이다. 아이는 이 보모가 자기를 모질게 대했는데도 그녀에게 사랑을 쏟았다고 가정해야 한다.89
전형적이라고 부를 만한 또 하나의 꿈 계열은 가까운 사람, 곧 부모나 형제자매나 자식 따위가 죽었다는 내용을 지닌 꿈들이다. 이런 꿈은 곧바로 두 부류로 나누어야 한다. 하나는 꿈꾸는 사람이 꿈을 꾸는 동안 슬픔에 흔들리지 않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그 죽음 때문에 깊은 비탄을 느끼며, 심지어 잠자는 동안 뜨거운 눈물을 흘려 이 비탄을 드러내기까지 하는 꿈이다.
첫째 부류의 꿈은 제쳐 두어도 된다. 그런 꿈은 전형적인 꿈으로 꼽힐 권리가 없다. 분석해 보면 그 꿈들은 담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뜻하며, 다른 어떤 소원을 덮어 가리려는 것임이 드러난다. 언니의 하나뿐인 아들이 자기 앞에 상여에 누워 있는 것을 보는 이모의 꿈(4장)이 그렇다. 이 꿈은 그녀가 어린 조카의 죽음을 바란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알게 되었듯이, 이 꿈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소원을 감추고 있을 뿐이며, 그 사람은 그녀가 전에도 그만큼 오래 못 보다가 다른 조카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다. 꿈의 진짜 내용인 이 소원은 슬퍼할 까닭을 주지 않으며, 그래서 꿈에서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꿈에 담긴 정동은 꿈의 외현 내용이 아니라 잠재 내용에 속하며, 정동 내용은 표상 내용에 닥친 왜곡을 입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랑하는 친족이 죽는 것을 상상하고 슬픈 정동을 느끼는 꿈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 꿈들은 그 내용이 말하는 그대로, 그 사람이 죽었으면 하는 소원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모든 독자와, 비슷한 꿈을 꾸어 본 모든 사람의 감정이 내 해석에 반발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으므로, 될 수 있는 한 가장 넓은 바탕 위에 내 증명을 세우도록 애써야 한다.
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되는 소원이 언제나 현재적인 소원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예를 우리는 이미 하나 보았다. 그것은 죽었거나 버려졌거나 덮였거나 억압된 소원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꿈에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런 소원에 일종의 지속적인 존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 소원들은 우리가 말하는 뜻에서 죽은 사람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피를 마시자마자 일종의 생명을 얻어 깨어나는 『오디세이아』의 혼령들을 닮았다. 4장의 상자 속 죽은 아이 꿈에서 우리가 다룬 것은 열다섯 해 전에 현재적이었고 그때부터 솔직하게 인정되어 온 소원이었다. 꿈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 꿈의 밑바탕에도 가장 이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는 것을 덧붙이는 일이 아마 사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꿈꾼 사람은 어린아이였을 때, 언제였는지는 확실히 정할 수 없지만, 어머니가 자기를 배었을 때 깊은 우울에 빠져서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자라서 스스로 임신하게 되자 그녀는 어머니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누군가 비탄을 드러내며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나 자매가 죽었다는 꿈을 꾼다면, 나는 그 꿈을 그가 지금 그들의 죽음을 바란다는 증거로 쓰지 않겠다. 꿈 이론은 그만큼까지 요구하지 않으며, 꿈꾼 사람이 그들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다고 결론짓는 것으로 만족한다 ― 어린 시절의 어느 한때에. 그러나 이렇게 한정한다고 해서 반대자들이 그리 잠잠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그들은 지금은 그런 소원을 품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는 것과 똑같이 힘차게, 자기가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마저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가 아직 내놓는 증언을 바탕으로, 가라앉아 버린 유년기 심리의 한 부분을 재구성해야 한다.10
먼저 아이들과 그 형제자매의 관계를 살펴보자. 우리가 무슨 까닭으로 이 관계를 으레 사랑에 찬 관계라고 전제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른들 사이에서 형제자매가 서로 반목하는 예는 누구나 겪어 보아 알고 있고, 그런 불화가 이미 어린 시절에 비롯했거나 처음부터 줄곧 있었다는 것도 우리는 자주 알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제자매를 다정하게 아끼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많은 어른들도, 어린 시절에는 거의 끊임없는 적대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손위 아이는 손아래 아이를 못살게 굴고, 헐뜯고, 장난감을 빼앗았다. 손아래 아이는 손위 아이에게 어쩌지 못하는 분노로 속을 끓이며 그를 시기하고 두려워했고, 아니면 자유를 향한 첫 충동과 부당하다는 첫 감정을 이 압제자에게 돌렸다. 부모는 아이들이 서로 사이가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그 까닭을 찾지 못한다. 얌전한 아이라 해도 그 성격이 우리가 어른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이는 철저히 이기적이다. 아이는 제 욕구를 절실하게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고 가차 없이 애쓴다. 경쟁자인 다른 아이들, 그중에서도 맨 먼저 형제자매를 상대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우리는 아이를 악하다고 하지 않는다. 버릇없다고 할 뿐이다. 우리의 판단으로 보나 형법의 눈으로 보나 아이는 제 나쁜 짓에 책임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하다. 우리가 유년기라고 부르는 바로 이 시기 안에 이 꼬마 이기주의자에게서 이타적 충동과 도덕이 깨어나고, 마이네르트의 말을 빌리면 이차 자아가 일차 자아를 덮어 누르리라고 기대해도 좋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은 모든 영역에서 한꺼번에 발달하지 않으며, 게다가 도덕 없는 유년기가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런 도덕이 발달하지 않는 경우에 우리는 즐겨 「퇴화」를 들먹이지만, 그것은 분명 발달이 멈춘 경우다. 일차적 성격이 이미 나중의 발달에 덮여 버린 경우에도, 히스테리 발작이 일어나면 그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다시 드러날 수 있다. 이른바 히스테리성 성격과 버릇없는 아이의 성격이 서로 들어맞는다는 것은 눈에 띄게 뚜렷하다. 반면 강박 신경증은, 다시 고개를 드는 일차적 성격에 한층 강화된 제동으로서 덧씌워진 과잉 도덕에 해당한다.
그러니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이 죽으면 깊은 상실감에 빠질 많은 사람들도, 무의식적인 소원 가운데 예전부터 그들을 향해 품어 온 악한 소원을 지니고 있으며, 이 소원은 꿈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 세 살까지의 어린아이들이 형제자매를 대하는 태도를 관찰하는 것은 특히 흥미롭다. 그때까지는 아이가 혼자였는데, 이제 황새가 새 아기를 데려왔다는 말을 듣는다. 그 아이는11 새로 온 아기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단호하게 제 의견을 밝힌다. 「황새가 그 애를 도로 데려가는 편이 낫겠어.」12
나는 아이가 새로 온 아기 때문에 자기가 입게 될 불이익을 헤아릴 줄은 안다는 견해에 진지하게 찬성한다. 내가 아는 한 부인은 지금 네 살 아래 여동생과 무척 사이가 좋은데, 여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래도 내 빨간 모자는 안 줄 거야.」 아이가 이런 사정을 나중에야 깨닫는다면, 적의는 그때 가서 깨어난다. 나는 세 살도 안 된 여자아이가 요람 속 젖먹이의 목을 조르려 한 경우를 알고 있다. 그 아기가 계속 곁에 있으면 자기에게 좋을 일이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시기심을 그 온전한 세기와 뚜렷함 그대로 품을 수 있다. 또 어쩌면 어린 동생이 정말로 얼마 안 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아이는 다시 온 집안의 애정을 독차지했는데, 그때 황새가 또 새 아기를 보낸다. 그렇다면 이 귀염둥이가, 그 사이에 받던 대접을 앞으로도 똑같이 받으려고 새 경쟁자 역시 먼젓번 아기와 같은 운명을 맞기를 바라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겠는가?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린 동생을 대하는 아이의 이런 태도는 단순히 나이 차이에 따라 정해진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여자아이에게는 힘없는 갓난아기를 향한 모성 본능이 깨어날 것이다.
형제자매를 향한 적대적 감정은 어른들의 둔한 관찰이 알아채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어린 시절에 나타나는 것이 틀림없다.
내 아이들은 잇달아 빨리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이런 관찰을 할 기회를 놓쳤다. 지금 나는 그 기회를 어린 조카에게서 되찾고 있다. 조카의 완전한 지배는 열다섯 달 만에 여자 경쟁자가 나타나면서 흔들렸다. 물론 이 젊은이가 어린 누이동생에게 무척 기사답게 굴어서 손에 입을 맞추고 쓰다듬어 준다는 말을 듣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조카가 만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새로 익힌 말솜씨를 써서, 자기 눈에 쓸데없어 보이는 이 인물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야기가 동생에게로 흘러가기만 하면 그는 끼어들어 성난 목소리로 외친다. 「너무 쪼(그)매, 너무 쪼(그)매.」 요 몇 달 사이에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 이 달갑잖은 비판을 벗어나자, 그는 동생이 그렇게까지 관심을 받을 만하지 않다는 자기 주장을 정당화할 다른 길을 찾아냈다. 기회만 있으면 그는 우리에게 일깨운다. 「쟤는 이가 하나도 없어.」13 우리 모두는 내 또 다른 누이의 큰딸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여섯 살이던 그 아이는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이모들을 차례로 붙들고 「루시는 아직 그거 이해 못 하지, 그렇지?」 하고 물으며 다짐을 받으려 했다. 루시는 두 살 반 아래의 경쟁자였다.
형제자매가 죽는 이 꿈, 곧 부풀려진 적대감을 뜻하는 꿈을 나는 여성 환자들 누구에게서도 어김없이 찾아냈다. 예외는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도 쉽게 달리 해석하여 규칙을 확증하는 예로 바꿀 수 있었다. 한번은 치료 시간에 한 부인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증상과 관계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그런 꿈을 꾼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듯한 다른 꿈을 하나 떠올렸다. 네 살 때, 곧 집안의 막내였을 때 처음 꾸었고 그 뒤로 되풀이해서 꾼 꿈이었다. 「모두 꿈꾼 사람의 형제자매와 남녀 사촌들인 아주 많은 아이들이 풀밭에서 뛰놀고 있었다. 갑자기 모두 날개가 돋더니 날아올라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이 꿈의 뜻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꿈이 형제자매 모두가 죽는 꿈이며, 그것도 검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본래 형태 그대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것이다. 나는 감히 다음과 같은 해석을 끼워 넣어 본다. 많은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죽었을 때 ― 이 경우에는 두 형제의 아이들이 한 형제자매처럼 함께 자랐다 ― 당시 아직 네 살이 안 된 우리의 꿈꾼 사람이 어느 지혜로운 어른에게 「아이들은 죽으면 어떻게 돼요?」 하고 물었을 법하지 않은가? 대답은 아마 「날개가 돋아서 천사가 된단다」였을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꿈속의 형제자매와 사촌들은 이제 모두 천사처럼 날개가 있고 ― 이것이 중요한 점인데 ― 날아가 버린다. 우리의 꼬마 천사 제조자는 혼자 남는다. 생각해 보라, 그 많던 아이들 가운데 단 하나만 남는 것이다! 아이들이 풀밭 위에서 뛰논다는 특징은 거의 틀림없이 나비를 가리킨다. 마치 옛사람들이 프시케를 나비의 날개를 지닌 모습으로 떠올리게 된 것과 똑같은 연상에 아이도 이끌린 것 같다.
이제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아이가 형제자매에게 적대적 충동을 품는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아이의 심성이 어떻게 경쟁자나 자기보다 힘센 놀이 친구가 죽기를 바랄 만큼 사악함의 극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마치 모든 잘못은 사형으로만 속죄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 있음」에 대한 아이의 관념이 우리의 관념과 낱말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잊고 있다. 아이는 부패의 끔찍함도, 차가운 무덤 속에서 떠는 일도, 끝없는 무(無)의 공포도 알지 못한다. 저세상에 관한 모든 신화가 증언하듯, 어른은 이런 것을 생각 속에 품고 견디기를 그토록 힘들어하는데 말이다. 아이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낯설다. 그래서 아이는 이 끔찍한 낱말을 가지고 놀며 다른 아이를 을러댄다. 「너 또 그러면 죽을 거야, 프랜시스가 죽은 것처럼.」 그러면 가엾은 어머니는 몸서리를 친다. 인간의 태반이 어린 시절을 넘겨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아마 잊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여덟 살이나 된 아이도 아직은 자연사 박물관에 다녀와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엄마, 나 엄마 정말 사랑해. 엄마가 죽으면 박제로 만들어서 여기 방에 세워 둘 거야. 그러면 언제나, 언제나 엄마를 볼 수 있잖아!」 죽어 있음에 대한 아이의 관념은 이토록 우리의 관념과 닮은 데가 없다.14
죽기 전의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보지 않고 지나온 아이에게, 죽어 있다는 것은 「가 버렸다」는 것, 곧 남은 사람들을 더는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 부재가 여행 때문인지, 사이가 멀어져서인지, 죽음 때문인지, 그것이 어떤 방식과 수단으로 생겨났는지를 아이는 가리지 않는다. 아이의 선사 시대에 유모가 내보내지고 그 뒤 얼마 안 가 어머니가 죽었다면, 분석으로 밝혀지듯 아이의 기억 속에서 두 체험은 서로 겹쳐진다. 아이가 곁에 없는 사람을 그리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름에 몇 주 동안 여행을 다녀와 물어보았다가 「아이들이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않았어요」라는 대답을 들은 많은 어머니들이 서글프게 깨달은 바다. 그러나 어머니가 정말로 저 「어떤 나그네도 그 경계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지의 나라」로 가 버리면, 아이들은 처음에는 어머니를 잊어버린 듯 보이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죽은 어머니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그러니 아이에게 다른 아이가 없어졌으면 하고 바랄 동기가 있다면, 이 소원에 그 아이가 죽었으면 하는 형태의 옷을 입히지 못하게 막을 제약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죽음을 바라는 꿈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내용이야 온갖 차이가 있을지언정 아이의 소원이 어른의 소원과 어떻게든 같은 것임을 증명한다.
형제자매를 향한 아이의 죽음 소원이 아이다운 이기주의, 곧 형제자매를 경쟁자로 여기게 만드는 이기주의로 설명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고 욕구를 채워 주는 부모, 바로 그 이기적인 동기에서라도 아이가 무사하기를 바라야 마땅한 부모를 향한 같은 소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어려움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부모가 죽는 꿈이 대개 부모 가운데 꿈꾸는 사람과 성이 같은 쪽에 관계한다는 경험이다. 그래서 남자는 주로 아버지가 죽는 꿈을, 여자는 어머니가 죽는 꿈을 꾼다. 이것이 늘 그렇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이 꿈이 앞서 말한 방식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도 뚜렷해서,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요인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담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마치 이른 시기에 성적 선호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 같고, 마치 사내아이는 아버지를 사랑의 경쟁자로 여기고 여자아이는 어머니에게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 없애 버리면 자기에게 이득이 될 수밖에 없는 경쟁자로 말이다.
이 생각을 끔찍하다고 물리치기 전에, 독자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실제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문화와 공경의 요구가 이 관계에 바라는 것과, 매일의 관찰이 사실로 보여 주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적대적 감정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검열 앞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소원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조건이 더없이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다.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살펴보자. 나는 우리가 십계명의 계율에 부여해 온 신성함이 현실을 보는 우리의 눈을 흐린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대부분이 제5계명15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아마 감히 알아차리려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인간 사회의 가장 낮은 층에서나 가장 높은 층에서나, 부모에 대한 공경은 다른 이해관계 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예사다. 인간 사회의 태고 시대로부터 신화와 전설 속에 전해 오는 어렴풋한 소식들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권력과 그 권력을 휘두른 무자비함에 관해 불쾌한 생각을 얻게 된다. 크로노스는 멧돼지가 암퇘지의 새끼들을 집어삼키듯 제 자식들을 집어삼키고, 제우스는 아버지를 거세하고16 그 자리를 차지해 지배자가 된다. 옛 가족에서 아버지가 전제적으로 다스릴수록 아들은 더욱 적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정해진 후계자로서 아버지가 죽은 뒤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조바심도 그만큼 컸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 시대의 중산층 가정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이 제 운명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에 필요한 수단을 주지 않음으로써, 부자 관계에 본디 깃들어 있는 증오의 싹이 자라도록 거드는 것이 보통이다. 의사는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슬픔이, 마침내 얻은 자유에 대한 만족감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어느 아버지나 딱할 만큼 낡아 버린 potestas patris〔아버지의 권력〕 가운데 오늘날의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으며, 입센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오래된 다툼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는 시인은 누구나 효과를 거두리라 확신할 수 있다.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갈등은, 딸이 자라 성적 자유를 바라는데 어머니가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거꾸로 어머니가 피어나는 딸의 아름다움을 보며 자신이 성적 요구를 단념할 때가 왔다는 경고를 받을 때 생겨난다.
이런 사정은 모두 누구나 아는 것이고 누구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모에 대한 공경이 오래전부터 범할 수 없는 것이 된 사람들도 부모가 죽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앞의 논의로 미루어, 부모를 향한 죽음 소원도 가장 이른 유년기에서부터 설명해야 하리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다.
이 추측은 정신신경증 환자들에게 적용해 보면, 그들을 대상으로 한 분석을 통해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재확인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아이의 성적 소원이 ― 싹트는 상태에서도 이런 이름으로 부를 만하다면 ― 아주 이른 시기에 깨어나며, 여자아이의 첫 끌림은 아버지를, 사내아이가 처음 품는 아이다운 갈망은 어머니를 향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내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여자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성가신 경쟁자가 된다. 이런 감정이 아이를 죽음 소원으로 이끄는 데 얼마나 적은 것으로도 충분한지는 형제자매의 경우에서 이미 보여 주었다. 성적 선택은 대개 부모 쪽에서 일찍 드러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귀여워하고 어머니는 아들들 편을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향인데, 성의 마력이 판단을 흐리지 않는 한에서는 둘 다 아이들의 교육에 진지하게 힘쓴다. 아이는 어떤 편애든 아주 잘 알아채며, 부모 가운데 자기를 밀어내는 쪽에 맞선다. 어른에게서 사랑을 얻는다는 것은 아이에게 특정한 갈망의 충족일 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자기 뜻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이가 부모 가운데에서 부모의 선택에 상응하는 선택을 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성적 충동을 따르는 동시에 부모에게서 나오는 감정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유년기의 끌림을 보여 주는 징후는 대부분 흔히 간과되지만, 그중 몇몇은 유년기의 첫 몇 해가 지난 뒤에도 관찰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여덟 살 소녀는 어머니가 식탁에서 불려 나가면 그 기회를 틈타 자기가 어머니의 후계자라고 선포한다. 「이제 내가 엄마야. 찰스, 채소 더 먹을래? 어서 좀 더 먹어.」 등등. 네 살이 채 안 된, 유난히 영리하고 활발한 한 소녀는 아이 심리의 이 대목이 남달리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엄마는 가 버려도 돼. 그러면 아빠는 나랑 결혼해야 하고, 나는 아빠의 아내가 될 거야.」 그렇다고 이 소원이 아이가 어머니를 다정하게 사랑할 가능성마저 아이의 삶에서 결코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여행을 떠날 때마다 어린 사내아이가 어머니 곁에서 잘 수 있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훨씬 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아이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사랑하는 예쁜 엄마 곁의 자리를 지키려고 아버지가 늘 없었으면 하는 소원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분명 이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처럼 「죽은」 사람들은 늘 없고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는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을 관찰한 결과는 억지를 쓰지 않아도 여기서 내놓은 해석에 잘 들어맞지만, 성인 신경증 환자의 정신분석이 의사에게 들이미는 것만큼 완전한 확신을 주지는 못한다. 이 경우에는 문제의 꿈들이, 소원 꿈이라는 해석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서두와 함께 보고된다. 어느 날 나는 한 부인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본다. 그녀가 말한다. 「이제 친척들을 보고 싶지 않아요. 다들 저를 보면 몸서리를 칠 게 틀림없어요.」 그러고는 거의 아무런 이음새도 없이, 꿈 하나가 기억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 꿈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네 해 전에 꾼 꿈으로, 내용은 이렇다. 여우인지 스라소니인지가 지붕 위를 거닐고 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떨어진다, 혹은 그녀가 떨어진다. 그 뒤에 그녀의 어머니가 죽어서 집 밖으로 실려 나간다 ― 그러자 꿈꾼 사람은 서럽게 운다. 이 꿈은 어머니가 죽은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소원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으며, 친척들이 자기를 보면 몸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 꿈 때문이라고 내가 알려 주자마자, 그녀는 꿈을 풀 재료를 얼마간 내놓았다. 「스라소니 눈」은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골목의 한 사내아이가 그녀에게 붙인 욕된 별명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 살 때 벽돌 하나가 어머니 머리 위로 떨어져 어머니가 피를 많이 흘린 일이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심리 상태를 차례로 거친 한 젊은 아가씨를 철저히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병이 시작될 때의 광란에 가까운 흥분 상태에서 환자는 어머니에게 아주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침대에 다가오기만 하면 때리고 욕을 퍼부었지만, 한편으로 훨씬 나이 많은 언니에게는 여전히 다정하고 순종적이었다. 이어서 정신은 맑지만 다소 무감각하고 잠이 몹시 어지러운 상태가 뒤따랐다. 내가 그녀를 치료하고 꿈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은 이 단계에서였다. 그 꿈들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수가 다소 알아보기 어려운 방식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다루었다. 어떤 때는 그녀가 어느 노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고, 어떤 때는 자매들이 상복을 입고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꿈들의 뜻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회복이 더 진행되자 히스테리성 공포증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든 늘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서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이 사례는 나의 다른 경험들에 비추어 볼 때 무척 교훈적이었다. 이 사례는 말하자면 여러 나라 말로 나란히 옮겨 놓은 번역처럼, 심리 장치가 흥분을 일으키는 같은 표상에 반응하는 여러 방식을 보여 주었다. 내가 둘째 심리적 심급이 제압된 상태로 이해하는 흥분 상태에서는, 어머니를 향한 무의식적 적의가 운동 충동으로서 힘을 얻었다. 이어 소요가 진압되어 평온이 찾아오고 검열의 지배가 회복되자, 이 적대감은 어머니가 죽었으면 하는 소원을 실현하려고 꿈의 영역에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정상 상태가 한층 더 굳건해진 뒤에는, 히스테리성 역반응이자 방어 현상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만들어 냈다. 이런 고찰에 비추어 보면, 히스테리가 있는 아가씨들이 왜 그토록 자주 어머니에게 유별나게 매달리는지도 더는 설명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또 한번은 강박 신경증 때문에 삶을 거의 견딜 수 없게 된 한 젊은이의 무의식적 정신생활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거리에 나갈 수가 없었는데, 마주치는 사람을 모두 죽이게 되리라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는 시내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를 살인 사건의 혐의를 받게 될 경우에 대비해 알리바이 증거를 갖추는 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사람이 교양이 높은 만큼 도덕적이기도 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분석은 ― 덧붙이자면 이 분석은 치유로 이어졌다 ― 이 불쾌한 강박 관념의 바탕에서, 다소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를 향한 살해 충동을 찾아냈다. 그 충동은 본인도 크게 놀랐지만 일곱 살 때 이미 의식적으로 표출된 적이 있었고, 물론 그보다 훨씬 이른 유년기에 생겨난 것이었다. 아버지가 고통스러운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뒤, 젊은이가 서른한 살 때 낯선 사람들에게로 옮겨 간 강박적 자책이 앞서 말한 공포증의 형태로 나타났다. 제 아버지를 산꼭대기에서 낭떠러지로 떠밀고 싶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와 그만큼 가깝게 맺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을 아껴 주리라고 믿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사람은 제 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옳다.
이제는 꽤 많이 쌓인 내 경험에 따르면, 나중에 신경증 환자가 되는 모든 사람의 유년기 심리에서 부모가 주역을 맡는다. 부모 가운데 한쪽을 사랑하게 되고 다른 쪽을 미워하는 일은 저 숙명적인 재료의 총체를 이루는 데 한몫하는데, 이 재료는 심리적 충동들이 제공하여 유년기에 형성된 것으로, 나중에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증상에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나는 정신신경증 환자가 이 점에서, 전혀 새롭고 자기들에게만 고유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식으로 정상인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아이들을 이따금 관찰해 봐도 드러나듯, 정신신경증 환자들은 부모를 향한 애정 어린 소원이나 적대적 소원에서, 대부분의 아이들 마음속에 덜 뚜렷하고 덜 강하게 존재하는 감정을 과장된 형태로 보여 줄 뿐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고대는 이 사실을 확인해 주는 전설의 재료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으며, 이 전설들이 지닌 깊고 보편적인 영향력은, 유년기 심리에 관한 앞의 가정에도 그와 비슷한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할 때에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오이디푸스 왕의 전설과, 소포클레스가 쓴 같은 이름의 극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 오이디푸스는 젖먹이 때 내버려진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 신탁이 아버지에게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구조되어 다른 나라의 궁정에서 왕자로 자라다가, 제 출신이 의심스러워지자 그 역시 신탁에 묻는다. 그리고 고향을 피하라는 조언을 듣는데,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의 남편이 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고향이라고 믿은 곳에서 멀어지는 길 위에서 그는 라이오스 왕을 만나, 갑자기 벌어진 다툼 끝에 그를 때려죽인다. 이어 테베의 성문에 이르러 길을 가로막고 있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자, 테베 사람들은 감사의 뜻으로 그를 왕으로 뽑고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준다. 그는 오랫동안 평화롭고 영예롭게 다스리며, 자기 어머니인 줄 모르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과 두 딸을 얻는다. 그러다 마침내 역병이 돌자 테베 사람들은 다시 신탁에 묻는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사절들은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나라에서 몰아내면 역병이 곧 그치리라는 조언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자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그들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아무런 추측도 발견으로 이어지지 않는 터에, 그토록 오래된 죄를 저지른 자들의 자취를 어떻게 더듬어 찾을 것인가?」17
이제 극의 줄거리는, 오이디푸스 자신이 라이오스를 죽인 자이며 죽은 그 사람과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차츰 완성되어 가면서도 교묘하게 늦추어지는 ― 정신분석 작업을 닮은 ― 폭로 하나로만 이루어진다.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끔찍한 짓들에 깊이 충격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고향을 떠난다. 신탁은 이루어졌다.
『오이디푸스 왕(Oedipus Tyrannus)』은 이른바 운명 비극이다. 그 비극적 효과는 신들의 막강한 의지와, 파멸의 위협을 받는 인간들의 헛된 저항 사이의 대립에 있다고들 한다. 깊이 감동한 관객이 이 비극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신의 뜻에 순응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근대의 작가들은 같은 대립을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에 담아 비슷한 비극적 효과를 얻으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죄 없는 인간들이 온갖 몸부림을 쳐도 저주나 신탁의 선고가 그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관객들은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후대의 운명 비극들은 모두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오이디푸스 왕』이 당대의 그리스인들을 움직였던 것 못지않게 근대인들도 움직일 수 있다면, 그 까닭은 그리스 비극의 효과가 운명과 인간 의지의 대립에 바탕을 둔다는 가정에만 있을 수는 없고, 그 대립을 보여 주는 재료의 독특한 성질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조상 할머니(Die Ahnfrau)』나 후대의 다른 비극들에 나오는 상황은 제멋대로 지어낸 것이라고 정당하게 물리치면서도,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운명의 강제하는 힘을 기꺼이 인정하게 되는 목소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 속에는 이 내면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요인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의 운명이 우리를 움직이는 까닭은 오직 그것이 우리의 운명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탁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그에게 내린 것과 같은 저주를 우리에게도 내렸으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최초의 성적 충동을 어머니에게, 최초의 증오와 난폭한 소원을 아버지에게 돌리도록 운명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꿈을 보면 그렇다고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라이오스를 때려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왕은 우리 어린 시절의 소원이 실현된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운이 좋아서, 정신신경증 환자가 되지 않은 한, 그 뒤로 어머니에게서 성적 충동을 거두어들이고 아버지에 대한 질투를 잊는 데 성공했다. 이 원초적 소원이 이루어진 그 인물 앞에서, 우리는 이 소원들이 우리 안에서 겪어 온 억압의 온 힘으로 뒷걸음질 친다. 시인은 분석으로 오이디푸스의 죄를 드러내 보이면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내면을 알아보라고 다그친다. 이 충동들은 억제되었을지언정 그 내면에 여전히 있다. 코로스가 우리를 떠나보내며 남기는 비유는 ―
「…… 보라! 이름난 수수께끼를 풀었고 덕이 빼어났던 이 오이디푸스를, 인기에도 시민들의 행운에도 기대지 않았던 이 사람을. 보라, 마침내 얼마나 거센 역경의 폭풍이 그를 덮쳤는가」(제5막 4장).
이 경고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만을 겨눈다. 어린 시절 이래 스스로 보기에 그토록 지혜롭고 그토록 강해진 우리를 말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우리는 도덕을 거스르는 소원들, 자연이 우리에게 떠안긴 소원들을 모른 채 살아가며, 그 소원들이 드러나고 나면 어린 시절의 장면들에서 모든 눈길을 돌려 버리고 싶어 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본문 자체에도, 오이디푸스 전설이 아주 오래된 꿈 재료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가리키는 대목이 있다. 그 재료란 최초의 성적 충동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가 고통스럽게 흐트러지는 것이다. 아직 진상을 깨닫지 못했지만 신탁 때문에 걱정에 빠진 오이디푸스를, 이오카스테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꾸는 꿈을 들려주며 위로한다. 그녀 자신은 그 꿈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지만 ―
「꿈속에서 스스로 제 어머니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자라고 여기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이 겪은 운명이니라. 허나 이런 일을 하찮게 여기는 자가 가장 수월하게 세상을 살아가느니라」(제4막 3장).
자기 어머니와 성교하는 꿈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에도 많은 사람이 꾸었으며, 그들은 분개하고 놀라워하며 그 꿈을 이야기한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꿈은 비극을 푸는 열쇠이며 아버지가 죽는 꿈을 보완하는 짝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이 두 전형적인 꿈에 대한 상상의 반응이다. 그리고 어른이 이 꿈을 꿀 때 저항감을 느끼며 체험하듯, 전설도 공포와 자기 징벌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밖에 전설이 띠게 된 겉모습은, 이 재료를 신학적 목적에 쓰이게 하려는 몰이해한 이차 가공(secondary elaboration)의 결과다(이 절에서 다룬 노출증의 꿈 재료 참조). 신의 전능과 인간의 책임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물론 다른 모든 재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재료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18
가까운 사람이 죽는 전형적인 꿈을 떠나기 전에, 이 꿈들이 꿈 이론 전반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조금 더 밝혀 두어야겠다. 이 꿈들은, 억압된 소원이 만들어 낸 꿈 사고가 검열을 완전히 벗어나 아무 변화 없이 꿈으로 옮겨지는 아주 드문 경우가 실현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 나는 다음 두 요인에서 이 꿈들에 유리한 사정을 찾는다. 첫째, 우리에게서 이보다 더 멀리 있다고 믿는 소원은 없다. 우리는 이런 소원이라면 「꿈에도 떠오르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꿈 검열은 이런 괴물 같은 것에 대비하고 있지 않다. 솔론의 입법이 부친 살해에 대한 형벌을 정해 두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억압되어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이 소원은 바로 이 경우에 유난히 자주 낮의 경험의 한 조각, 곧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에 대한 걱정과 맞닥뜨린다. 이 걱정은 같은 내용을 지닌 소원을 이용하는 것 말고는 달리 꿈에 기록될 길이 없다. 그러나 소원은 낮 동안 일깨워진 걱정 뒤에 제 모습을 감출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더 단순한 과정으로 여겨, 사람은 낮에 마음을 쓰던 일을 밤에 꿈속에서 이어 갈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꿈은 꿈 설명과의 모든 연관에서 떨어져 나가고, 쉽게 풀 수 있는 문제 하나가 쓸데없이 남게 된다.
이 꿈들과 불안 꿈의 관계를 짚어 보는 것도 교훈적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죽는 꿈에서 억압된 소원은 검열을, 그리고 검열이 일으키는 왜곡을 피하는 길을 찾아냈다. 이 경우 반드시 뒤따르는 부수 현상은 꿈속에서 불쾌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 꿈은 검열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제압될 때에만 생겨나며, 거꾸로 불안이 이미 신체적 원천에서 주어져 있을 때에는 검열을 제압하기가 쉬워진다. 이로써 검열이 무엇을 위해 제 직무를 수행하고 꿈 왜곡을 행하는지가 분명해진다. 검열은 불안이나 그 밖의 불쾌한 정동이 생겨나는 것을 막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유년기 마음의 이기주의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이제 이 주제를 다시 꺼내어, 꿈도 이 특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 그럼으로써 유년기의 삶과 이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을 시사해 두고자 한다. 모든 꿈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모든 꿈에는 그 소중한 자아가, 비록 위장된 모습일지라도 나타난다. 꿈에서 실현되는 소원은 어김없이 이 자아의 소원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꿈을 불러일으켰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겉모습에 속은 것일 뿐이다. 이 주장에 어긋나 보이는 예를 몇 가지 분석해 보겠다.
I. 아직 네 살이 안 된 사내아이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곱게 차린 커다란 접시를 보았는데, 그 위에는 커다란 구운 고기 한 덩이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고기가 갑자기 ― 잘게 썰린 것이 아니라 ― 몽땅 먹혀 버렸다. 그는 그것을 먹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19
이 조그만 녀석이 꿈에서 본 호사스러운 식사, 그 식사를 한 이 낯선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그 설명은 낮의 경험에서 얻어야 한다. 아이는 며칠째 의사의 처방에 따라 우유만 먹고 지냈는데, 꿈 전날 저녁에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벌로 저녁밥을 거르게 되었다. 아이는 이런 굶기 치료를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었고, 그때 아주 의젓하게 견뎌 냈다. 이번에도 먹을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배가 고프다는 내색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교육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꿈 왜곡의 시초를 보여 주는 이 꿈에서도 드러난다. 이 푸짐한 식사, 그것도 구운 고기로 차린 식사를 바라는 사람이 아이 자신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이는 이 식사가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꿈속의 아이들이 하듯이(3장의 우리 어린 안나의 딸기 꿈 참조) 몸소 식탁에 앉지는 못한다. 그 사람은 익명으로 남는다.
II. 한번은 서점 진열대에서 『애서가 총서』의 새 권 하나를 보는 꿈을 꾼다. 내가 늘 사 보는 총서다(미술 연구서, 세계사 연구서, 이름난 예술 중심지 등). 새 총서의 이름은 『이름난 웅변가들(웅변집)』이고, 첫 권에는 레허 박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분석을 해 보면, 독일계 야당의 장광설 연설가인 레허 박사의 명성이 꿈꾸는 동안 내 생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아 보인다. 실은 며칠 전에 나는 새 환자 몇 사람의 심리 치료를 맡았고, 그 뒤로 하루에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씩 말을 해야 했다. 그러니 장광설 연설가는 바로 나 자신이다.
III. 또 한번은 내가 아는 대학 선생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꿈을 꾼다. 내 아들, 근시. 이어서 짧은 말과 대꾸로 이루어진 대화가 뒤따른다. 그다음에 꿈의 셋째 부분이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나와 내 아들들이 나온다. 잠재적 꿈 내용에 관한 한, 아버지와 아들과 M. 교수는 똑같이 나와 내 맏아들을 대신하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꿈은 또 다른 특이점 때문에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IV. 다음 꿈은 다정한 염려 뒤에 숨은, 참으로 비열한 이기적 감정의 예를 보여 준다.
내 친구 오토가 아파 보인다. 얼굴은 갈색이고 눈은 튀어나와 있다.
오토는 우리 집 주치의로, 나는 그에게 결코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지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내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이 병에 걸리면 번번이 잘 고쳐 주었고, 그 밖에도 선물할 핑계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안겼다. 꿈을 꾼 날 그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아내는 그가 피곤하고 지쳐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밤에 내 꿈이 찾아와 그에게 바제도병의 증상 몇 가지를 덧씌운다. 꿈 해석에 관한 내 규칙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이 꿈을 내가 친구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고 그 염려가 꿈에서 실현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꿈은 꿈이 소원 성취라는 주장뿐 아니라, 꿈은 이기적 충동에만 열려 있다는 주장과도 모순될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내게 설명해 보라. 오토의 겉모습은 그런 진단을 내릴 근거를 조금도 주지 않는데, 나는 왜 그가 바제도병에 걸렸을까 봐 두려워하는가? 이와 달리 내 분석은 여섯 해 전에 일어난 일에서 가져온 다음과 같은 재료를 내놓는다. R. 교수를 포함한 우리 일행 몇 사람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마차를 타고, 우리 시골 별장에서 몇 시간 떨어진 N.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술이 덜 깬 마부가 우리를 마차째 둑 아래로 굴러떨어지게 했는데, 우리가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했던 것은 순전히 운 좋은 우연 덕분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여관에서 밤을 보내야 했고, 그곳 사람들은 우리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크게 동정했다. morbus Basedowii〔바제도병〕의 틀림없는 징후를 보이는 ― 얼굴 피부가 갈색을 띠고 눈이 튀어나와 있었을 뿐 갑상선종은 없었다 ― 한 신사가,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서며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R. 교수는 특유의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잠옷 한 벌만 빌려주십시오.」 그러자 우리의 너그러운 벗은 「죄송하지만 그건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가 버렸다.
분석을 이어 가자, 바제도가 의사의 이름일 뿐 아니라 이름난 교육자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깨어 있는 지금은 이 사실을 그다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내 친구 오토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아이들의 신체 교육을 ― 특히 사춘기 동안의 교육을(그래서 잠옷이 나온다) ― 맡아 달라고 내가 부탁해 둔 사람이다. 꿈에서 오토를 앞서 말한 우리의 너그러운 은인의 병적 증상과 함께 봄으로써, 나는 분명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L. 남작이 호의 어린 제안을 했는데도 그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었던 것만큼이나, 내 아이들도 오토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제 이 꿈이 어떻게 이기적으로 방향을 트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20
그렇다면 소원 성취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 꿈에서 늘 험한 대접을 받는 것이 팔자인 듯한 내 친구 오토에게 앙갚음을 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정에 있다. 꿈에서 오토를 L. 남작으로 나타내면서, 나는 동시에 나 자신을 다른 누군가와, 곧 R. 교수와 동일시했다. 앞서 말한 그 일이 있었을 때 R.이 L. 남작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듯이, 나도 오토에게 무언가를 부탁해 두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요점이다. R. 교수는 나와 얼마간 비슷하게 학파의 울타리 밖에서 홀로 제 길을 걸어왔고, 오래전에 받을 자격을 얻은 칭호를 늘그막에야 받았다. 그러니 나는 또다시 교수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늘그막에」라는 말 자체가 소원 성취다. 내가 오래 살아서, 내 아들이 사춘기를 헤쳐 나가도록 몸소 이끌어 주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판에서는 그 밖의 전형적인 꿈들을 짧게만 다루었다. 쓸 만한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경험이 늘어난 덕분에, 이제는 이 꿈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말로 매번 같은 뜻을 지니는 꿈이고, 둘째는 내용이 똑같거나 비슷한데도 더없이 다양하게 해석해야 하는 꿈이다. 첫째 부류의 전형적인 꿈 가운데서 나는 시험 꿈과 이른바 치아 자극 꿈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졸업 시험에 합격해 졸업장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시험에 떨어진다거나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등의 불안 꿈이 얼마나 집요하게 자기를 쫓아다니는지 하소연한다. 대학 학위를 가진 사람에게는 이 전형적인 꿈 대신 다른 꿈이 나타난다. 이 꿈은 그가 박사 학위 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보여 주고, 그는 잠결에 자기는 이미 여러 해째 일을 해 오고 있으며 이미 대학 강사이거나 법률 사무소의 대표라고 헛되이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 저지른 잘못 때문에 받았던 벌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우리 학업의 두 고비에서 치른 엄한 시험의 그 dies irae, dies illa〔진노의 날, 그날〕에 우리 안에서 되살아난 기억이다. 신경증 환자의 「시험 공포증」도 이 어린애다운 불안 때문에 강해진다. 학생 신분을 벗어나고 나면, 우리를 벌하는 것은 더 이상 처음처럼 부모나 보호자도, 나중처럼 선생님도 아니다. 삶의 가차 없는 인과의 사슬이 그 뒤의 교육을 떠맡는다. 이제 우리가 졸업 시험이나 박사 학위 시험 꿈을 꾸는 것은 ― 의인의 무리에 드는 사람이라 한들 이런 시험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은 이가 누가 있으랴? ―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는 마땅히 해내야 할 만큼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떤 결과가 우리를 벌하지나 않을까 두려울 때마다, 요컨대 책임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다.
시험 꿈의 본래 설명은 식견 있는 한 동료의 말 덕분에 얻었다. 그는 어느 학술 토론에서, 자기 경험으로는 시험 꿈은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결코 시험에서 낙방한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점점 더 확인되고 있듯이 시험에 대한 불안 꿈은 꿈꾸는 사람이 이튿날 책임 있는 행동을 앞두고 망신당할 가능성을 내다볼 때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이 꿈은 아마 과거의 한 계기, 곧 크나큰 불안이 근거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결과가 그 불안을 반박해 준 계기를 골라낸 셈이다. 이것은 깨어 있을 때의 심급이 꿈 내용을 잘못 이해하는 아주 두드러진 예일 것이다. 꿈에 대한 이의, 곧 「하지만 나는 이미 박사인데」 등의 분개한 항의로 여겨지는 그 이의는 실은 꿈이 건네는 위로일 것이며, 따라서 이런 뜻일 것이다. 「내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졸업 시험을 앞두고 네가 품었던 불안을 생각해 보아라.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는 지금 이 순간 박사다」 등. 그러나 우리가 꿈의 탓으로 돌리는 불안은 낮의 잔재에서 비롯한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 설명을 시험해 볼 수 있었는데, 그 수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모두 들어맞았다. 이를테면 나는 박사 학위 시험에서 법의학 과목에 낙방했지만, 꿈에서는 이 일로 한 번도 마음을 쓴 적이 없다. 반면 꿈에서 식물학, 동물학, 화학 시험은 꽤 자주 치렀는데, 이 과목들은 근거 있는 불안을 안고 시험을 치렀지만 운이 좋았거나 시험관이 너그러웠던 덕분에 벌을 면했다. 졸업 시험 꿈에서 나는 어김없이 역사 시험을 치른다. 당시 훌륭하게 통과한 과목이지만, 고백하자면 그것은 순전히, 마음씨 좋은 교수가 ― 다른 꿈에 나오는 나의 외눈의 은인 말이다(1장 (나) 참조) ― 내가 문제지의 세 문제 가운데 둘째 문제에 줄을 그어 그 문제는 묻지 말아 달라는 뜻을 비쳤다는 것을 흘려 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은 졸업 시험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었다가 나중에 따로 시험을 치렀지만, 장교 시험에서는 떨어져 장교가 되지 못했다. 그는 앞의 시험 꿈은 꽤 자주 꾸지만 뒤의 시험 꿈은 한 번도 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동료(빈의 슈테켈 박사)는 「Matura」라는 낱말의 이중 의미(Matura ― 졸업 자격 시험: 성숙한, 무르익은)에 주의를 돌리면서, 이튿날 성적인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때 시험 꿈이 아주 자주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 경우 두려워하는 망신은 정력이 약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 있을 것이다. 한 독일 동료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아마 정당하게도, 독일에서는 이 시험을 Abiturium이라고 부르므로 이런 이중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정동적 인상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기차를 놓치는 꿈은 시험 꿈 옆에 놓일 만하다. 그 설명도 둘의 이런 가까운 관계를 정당화해 준다. 이 꿈들은 꿈속에서 느끼는 또 다른 불안감, 곧 죽음에 대한 불안에 맞서는 위로의 꿈이다. 「떠나다」는 죽음의 상징 가운데서도 가장 흔하고 가장 쉽게 손에 잡히는 것에 속한다. 그러므로 꿈은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진정하여라, 너는 죽지(떠나지) 않는다.」 시험 꿈이 「두려워 마라, 이번에도 네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우리를 달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종류의 꿈을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불안감이 위로의 표현과 곧바로 이어져 있다는 데 있다. 슈테켈은 최근에 펴낸 책 『꿈의 언어(Die Sprache des Traumes)』에서 죽음의 상징 표현을 자세히 다룬다.
환자들에게서 꽤 자주 분석해야 했던 「치아 자극 꿈」의 의미는 오랫동안 나를 비껴갔다. 몹시 놀랍게도, 너무나 큰 저항이 그 해석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압도적인 증거 앞에서 나는, 남자의 경우 이 꿈들에 추진력을 대 주는 것은 사춘기 시절의 자위에 대한 갈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꿈 두 개를 분석해 보겠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비행 꿈」이기도 하다. 두 꿈은 같은 사람의 것이다. 동성애 성향이 강하지만 실생활에서는 그것을 억압해 온 젊은 남자다.
그는 오페라 극장 1층 앞자리에서 『피델리오』 공연을 보고 있다. 그는 L. 옆에 앉아 있는데, L.은 그와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이라 그는 L.과 친구가 되고 싶다. 그는 갑자기 1층 앞자리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저쪽 끝까지 날아간다. 그러고는 손을 입에 넣어 이를 두 개 뽑아낸다.
그 자신은 이 비행을 두고, 마치 공중으로 「던져진」 것 같았다고 묘사한다. 『피델리오』 공연이었으므로 그는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어여쁜 아내를 얻은 자는――」
그러나 어여쁜 아내를 얻는 것조차 꿈꾼 사람의 소원에 들지 않는다. 다른 두 행이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운 좋은 (큰) 던지기에 성공한 자,」
「친구의 친구가 되는 데…….」
그러므로 꿈에는 「운 좋은 (큰) 던지기」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원 성취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정을 얻으려 애쓰다가 번번이 「내던져지는」 불운을 겪었다는 고통스러운 생각과, 옆자리에서 함께 『피델리오』 공연을 즐긴 그 젊은이에게서도 이런 운명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이어서 이 고상한 꿈꾼 사람을 몹시 부끄럽게 하는 고백이 나온다. 한번은 한 친구에게서 그렇게 거절당한 뒤 타오르는 욕망에 못 이겨 성적 흥분에 빠져들었고, 잇달아 두 번 자위를 했다는 것이다.
다른 꿈은 다음과 같다. 그가 아는 대학 교수 두 사람이 나 대신 그를 치료하고 있다. 한 사람은 그의 음경에 무언가를 하고, 그는 수술을 두려워한다. 다른 한 사람은 쇠막대로 그의 입을 찔러서 그는 이를 두 개 잃는다. 그는 비단 천 네 장으로 묶여 있다.
이 꿈의 성적 의미는 거의 의심할 수 없다. 비단 천은 그가 아는 한 동성애자와의 동일시에 해당한다. 꿈꾼 사람은 성교를 이룬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실제로 남자와의 성교를 찾아 나선 적도 없는데, 그는 사춘기 시절에 한번 배운 자위를 본보기로 삼아 성교를 상상한다.
나는 전형적인 치아 자극 꿈에 흔히 나타나는 변형들 ―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꿈꾸는 사람의 입에서 이를 뽑는 변형 ― 도 같은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치아 자극」이 어떻게 이런 의미를 띠게 될 수 있는지 알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아주 자주 일어나는 아래에서 위로의 이동에 주의를 돌려도 좋을 것이다. 이 이동은 성적 억압에 봉사하며, 이것 덕분에 히스테리에서 나타나는, 본래 성기에서 일어나야 할 온갖 감각과 의도가 덜 거리끼는 신체 부위에서 실현될 수 있다. 무의식적 사고의 상징 표현에서 성기가 얼굴로 대체되는 것도 이런 이동의 한 경우다. 여기에는 엉덩이가 뺨과 닮았다는 사실이 한몫하고, nymphæ〔소음순〕를 입의 구멍을 둘러싼 입술과 닮았다 하여 「입술」이라고 부르는 언어 관용도 한몫한다. 코는 수많은 빗댐에서 음경에 견주어지는데,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털이 있다는 점이 닮음을 완성한다. 해부학적 부위 가운데 단 하나, 치아만은 무엇과도 견줄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일치와 불일치가 한데 겹친다는 점 때문에, 치아는 성적 억압의 압력 아래에서 표현에 쓰이기에 알맞게 된다.
치아 자극 꿈을 자위 꿈으로 보는 해석이 정당하다는 것을 나로서는 의심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 해석에서 모든 모호함이 걷혔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21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설명을 밀고 나갈 뿐, 나머지는 풀지 못한 채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관용 표현이 드러내 주는 또 다른 연관도 지적해 두어야겠다. 우리 고장에서는 자위 행위를 가리키는 점잖지 못한 말이 쓰이는데, 곧 「잡아 뽑다」, 또는 「잡아 내리다」라는 말이다.22 이런 속된 말이 어디서 비롯하고 어떤 상징 표현에 바탕을 두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두 말 가운데 앞의 것에는 치아가 잘 들어맞을 것이다.2324
하늘을 날거나 떠다니는 꿈, 떨어지는 꿈, 헤엄치는 꿈 따위는 전형적인 꿈의 둘째 무리에 속한다. 이 꿈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진술을 할 수 없다. 앞으로 듣게 되겠지만, 이 꿈들은 경우마다 다른 것을 뜻한다. 다만 이 꿈들이 담고 있는 감각 재료만은 언제나 같은 원천에서 온다.
정신분석에서 얻은 재료로 보건대, 이 꿈들은 어린 시절의 인상을 되풀이한다고, 곧 아이에게 그토록 큰 매력을 지닌 운동 놀이를 가리킨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두 팔로 아이를 쭉 뻗쳐 들고 방을 가로질러 달리며 아이를 날게 해 주지 않은 삼촌, 또는 아이를 무릎에 앉혀 흔들다가 갑자기 다리를 쭉 펴거나 아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받치던 손을 빼는 척하며 떨어지기 놀이를 해 주지 않은 삼촌이 어디 있으랴. 그러면 아이들은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특히 거기에 약간의 겁과 어지럼증이 따르면 지칠 줄 모르고 더 해 달라고 조른다. 훗날 그들은 이것을 꿈에서 되풀이하는데, 꿈에서는 자기들을 붙잡아 주던 손을 빼 버리므로 이제 홀가분하게 떠다니고 떨어진다.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흔들기나 시소 같은 놀이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커스에서 곡예를 보면 이 흔들기의 기억이 새로워진다. 어떤 소년들의 경우 히스테리 발작은 그저 이런 곡예를 재현하는 것일 뿐이며, 그들은 그것을 아주 능숙하게 해낸다. 그 자체로는 해롭지 않은 이런 운동 놀이로 성적 감각이 일어나는 일도 드물지 않다.25 우리 사이에서 흔히 쓰이며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낱말로 그 생각을 나타내자면, 날기, 떨어지기, 현기증 따위의 꿈이 되풀이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거친 놀이(「Hetzen」)이며, 그 놀이의 관능적인 느낌은 이제 불안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나 어머니라면 누구나 알듯이, 아이들의 거친 놀이는 결국 다툼과 울음으로 끝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잠자는 동안의 피부 감각 상태나 폐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감각 따위가 비행 꿈과 떨어지는 꿈을 불러일으킨다는 설명을 물리칠 충분한 근거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 감각들 자체가 꿈이 다루는 기억에서 재생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감각들은 꿈 내용의 일부이지 꿈의 원천의 일부가 아니다.
성격과 기원이 비슷한 이 재료, 곧 운동 감각으로 이루어진 재료는 이제 온갖 꿈 사고를 표현하는 데 쓰인다. 대개 즐거움을 띠는 비행 꿈은 더없이 다양하게 해석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적으로 특수한 해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전형적인 성격의 해석이 필요하다. 내 여자 환자 한 사람은 땅에 닿지 않은 채 거리 위 어느 높이에 떠 있는 꿈을 아주 자주 꾸곤 했다. 그녀는 키가 아주 작게밖에 자라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따르는 온갖 더러움을 꺼렸다. 공중에 떠 있는 그녀의 꿈은 그녀의 두 소원을 모두 이루어 주었다. 발을 땅에서 들어 올려 주었고, 머리를 높은 곳에 우뚝 솟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꿈을 꾼 다른 여성들의 경우에는 비행 꿈이, 내가 작은 새라면, 하는 동경을 뜻했다. 또 어떤 여성들은 낮에 천사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 밤에 이렇게 천사가 된다. 나는 것과 새라는 표상이 밀접하게 이어져 있으니, 남자들의 비행 꿈이 대개 노골적인 관능의 의미를 띠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26 꿈꾸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날 수 있는 자기 능력을 늘 몹시 자랑스러워한다는 말을 들어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파울 페데른 박사(빈)는 비행 꿈의 상당수가 발기 꿈이라는 매혹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인간의 상상력을 그토록 끊임없이 사로잡는 발기라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 중력이 정지한다는 생각을 상상력에 강하게 새겨 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고대인들의 날개 달린 phalli〔남근상〕 참조).
떨어지는 꿈은 대개 불안을 띤다. 여성이 이런 꿈을 꿀 때는 해석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여성은 떨어짐〔타락(墮落)〕의 상징적인 뜻, 곧 성애의 유혹에 몸을 맡긴다는 것을 에둘러 이르는 뜻을 언제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꿈의 유년기 원천을 우리는 아직 다 길어 내지 못했다. 거의 모든 아이는 이따금 넘어졌다가 누군가 안아 일으켜 어루만져 준 적이 있으며, 밤에 침대에서 떨어지면 보모가 안아 올려 자기 잠자리로 데려갔다.
헤엄치는 꿈, 물결을 가르는 꿈 따위를 아주 즐겁게 자주 꾸는 사람들은 대개 잠자리에 오줌을 싸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래전에 단념하는 법을 배운 쾌감을 이제 꿈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헤엄치는 꿈이 어떤 표현에 쉽게 쓰이는지는 이런저런 예에서 곧 알게 될 것이다.
불 꿈의 해석은, 밤에 잠자리에 오줌을 싸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성냥불 장난을 금하는 아이 방의 금지를 정당화해 준다. 불 꿈 역시 어린 시절 enuresis nocturnus〔야뇨증〕의 회상에 바탕을 둔다. 「어느 히스테리 분석의 단편(Bruchstück einer Hysterieanalyse)」(1905)27에서 나는 이런 불 꿈 하나를 꿈꾼 사람의 유년기 이력과 관련지어 완전히 분석하고 종합해 보였으며, 이 유년기 재료가 성숙한 나이에 어떤 충동을 표현하는 데 이용되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전형적인」 꿈을 여러 사람의 꿈에서 같은 외현적 꿈 내용이 자주 되풀이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꿈을 상당수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좁은 골목을 지나가는 꿈, 줄지어 이어진 방들을 죄다 지나가는 꿈,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밤도둑의 꿈, 사나운 짐승(황소, 말)에게 쫓기는 꿈, 칼이나 단검이나 창으로 위협받는 꿈이 그렇다. 마지막 두 꿈은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 등이 꾸는 외현적 꿈 내용으로서 특징적이다. 특별히 이 재료를 다루는 연구가 있다면 크게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두 가지 소견을 내놓겠는데, 이것들이 전형적인 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I. 꿈 풀이에 몰두하면 할수록, 어른들의 꿈은 대부분 성적 재료를 다루며 성애적 소원을 표현한다는 것을 더욱 기꺼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꿈을 실제로 분석하는 사람, 곧 꿈의 외현 내용에서 잠재적 꿈 사고로 밀고 들어가는 사람뿐이다. 외현 내용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다(이를테면 성적인 꿈을 다룬 저작들에서 네케가 그렇듯이). 이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며, 오히려 꿈 설명의 기본 가정과 완전히 들어맞는다는 것을 곧바로 인정해 두자. 수많은 구성 요소를 지닌 성 충동만큼 어린 시절부터 많은 억제를 겪어야 했던 충동은 없으며,28 다른 어떤 충동에서도 그토록 많고 그토록 강렬한 무의식적 소원이 살아남지 않았다. 이 소원들이 이제 잠든 상태에서 작용해 꿈을 만들어 낸다. 꿈 해석에서는 성적 콤플렉스(sexual complexes)의 이런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지만, 물론 그것만이 전부라고 여길 만큼 과장해서도 안 된다.
많은 꿈에 대해서는, 세심하게 해석하면 그 꿈들을 심지어 양성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박할 수 없는 이차 해석(secondary interpretation)이 나오고, 그 해석에서 그 꿈들이 동성애적 충동, 곧 꿈꾸는 사람의 정상적인 성 활동과 공통되는 충동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W. 슈테켈29과 알프레트 아들러30가 주장하듯 모든 꿈을 양성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증명할 수 없는 만큼이나 있을 법하지도 않은 일반화이며, 나는 그것을 지지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가장 넓은 뜻의 성애적 욕구가 아닌 다른 욕구를 채워 주는 꿈, 이를테면 배고픔 꿈, 갈증 꿈, 편의 꿈 등이 많다는 명백한 사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모든 꿈 뒤에서는 사형 선고를 보게 된다」(슈테켈)라거나, 모든 꿈은 「여성적인 선에서 남성적인 선으로 이어지는 연속」을 보여 준다(아들러)는 비슷한 주장도, 내가 보기에는 꿈 해석에서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어선다.
눈에 띄게 순진한 꿈이 한결같이 노골적인 성애적 소원을 담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른 곳에서 주장한 바 있으며, 새로운 예를 수없이 들어 이를 확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소해 보이고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의심받지 않을 많은 꿈도, 분석해 보면 틀림없이 성적인 소원 충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소원 충동은 흔히 뜻밖의 성질을 띤다. 이를테면 다음 꿈에서 해석을 다 해내기 전에 누가 성적인 소원을 짐작하겠는가? 꿈꾼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위풍당당한 두 궁전 사이에 조금 뒤로 물러앉은 작은 집이 한 채 서 있는데, 그 집의 문은 닫혀 있어요. 아내가 저를 데리고 거리를 조금 걸어 그 작은 집까지 가서 문을 밀어 열어요. 그러자 저는 비스듬히 위로 기울어진 안뜰 안으로 재빠르고 수월하게 미끄러져 들어가요.
꿈을 번역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 좁은 공간으로 파고드는 것과 잠긴 문을 여는 것이 가장 흔한 성적 상징 표현에 속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이 꿈에서 뒤에서 하는 성교의 시도(여체의 위풍당당한 두 엉덩이 사이로)를 표현한 것을 쉽게 찾아낼 것이다. 좁고 비스듬한 통로는 물론 질이다. 꿈꾼 사람의 아내가 도와준다는 대목은, 현실에서 그가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하게 붙들어 두는 것은 오직 아내에 대한 배려뿐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게다가 물어보니, 꿈 전날 한 젊은 처녀가 꿈꾼 사람의 집안에 들어왔는데,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그녀는 이런 식의 접근을 아주 싫어하지는 않으리라는 인상을 그에게 주었다. 두 궁전 사이의 작은 집은 프라하의 흐라트신〔성(城) 지구〕에 대한 회상에서 따온 것으로, 그리하여 다시 그 도시 출신인 그 처녀를 가리킨다.
내가 환자들에게 오이디푸스 꿈, 곧 자기 어머니와 성교하는 꿈이 얼마나 잦은지 강조하면 「그런 꿈은 기억나지 않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곧바로 위장되어 있고 사소한 또 다른 꿈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환자가 되풀이해서 꾼 꿈인데, 분석해 보면 바로 같은 내용의 꿈, 곧 또 하나의 오이디푸스 꿈임이 드러난다. 어머니와 성교하는 위장된 꿈이 같은 내용의 드러난 꿈보다 훨씬 더 잦다는 것을 나는 독자에게 장담할 수 있다.31
풍경과 장소에 관한 꿈 가운데는 「나는 전에 거기 가 본 적이 있다」는 확언에 언제나 무게가 실리는 꿈이 있다. 이 경우 그 장소는 언제나 어머니의 성기다. 사실 다른 어떤 장소에 대해서도 「전에 거기 가 본 적이 있다」고 이토록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다.
흔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으며 좁은 공간을 지나가거나 물속에 머무는 것을 다루는 많은 꿈은, 태아 시절의 삶과 어머니 자궁 속에 머물던 일과 출생 행위에 관한 공상에 바탕을 둔다. 다음은 공상 속에서 이미 태아일 때 기회를 틈타 부모의 성교 행위를 엿본 젊은 남자의 꿈이다.
「그는 깊은 갱도 속에 있는데, 거기에는 제머링 터널에서처럼 창문이 하나 나 있다. 처음에 그는 이 창문으로 텅 빈 풍경을 보다가, 그 안에 그림 하나를 지어 넣는데, 그림은 곧바로 거기 나타나 빈 공간을 채운다. 그림은 어떤 농기구로 샅샅이 써레질하고 있는 밭을 나타내는데, 상쾌한 공기, 거기 따라붙는 고된 노동이라는 관념, 푸르스름한 검은 흙덩이들이 기분 좋은 인상을 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계속 가다가 초등학교 하나가 문을 연 것을 보는데 …… 그리고 그 학교에서 아이의 성적 감정에 그토록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데 놀라고, 그 일로 나를 떠올린다.」
여기 한 여자 환자의 예쁜 물 꿈이 있다. 이 꿈은 치료 과정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 호숫가의 여름 휴양지에서, 그녀는 창백한 달이 물에 비치는 자리에서 검은 물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이런 종류의 꿈은 출산 꿈이다. 그 해석은 외현적 꿈 내용에 보고된 사실을 뒤집어서 이루어진다. 곧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 대신 「물에서 나오는 것」, 곧 「태어나는 것」으로 읽는 것이다.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는지는 프랑스어 「la lune」〔달〕의 나쁜 뜻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창백한 달은 흰 「엉덩이」(Popo)가 되는데, 아이는 머지않아 그곳을 자기가 나온 곳으로 알게 된다. 그렇다면 환자가 여름 휴양지에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꿈꾼 사람에게 이렇게 묻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치료가 저를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만들어 주지 않았나요?」 그러므로 이 꿈은 이 여름 휴양지에서 치료를 계속해 달라는, 곧 그곳으로 그녀를 찾아와 달라는 초대가 된다. 어쩌면 이 꿈에는 스스로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원에 대한 아주 수줍은 암시도 담겨 있을 것이다.32
또 하나의 출산 꿈과 그 해석을 E. 존스[95]의 저작에서 옮겨 온다. 「그녀는 바닷가에 서서, 자기 아이인 듯한 어린 사내아이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물이 자기를 덮을 때까지 그렇게 걸어 들어갔고, 그녀는 수면 가까이에서 아이의 머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만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장면은 붐비는 호텔 홀로 바뀌었다. 남편이 그녀를 떠났고, 그녀는 한 낯선 남자와 『대화에 들어갔다』.」 분석해 보니 꿈의 뒷부분은 남편에게서 달아나 제삼자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냈는데, 그 제삼자 뒤로는 앞서의 한 꿈에서 언급된 X. 씨의 형제가 뚜렷이 비쳐 보였다. 꿈의 앞부분은 꽤 뻔히 보이는 출생 공상이었다.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꿈에서도, 아이를 자궁의 물 밖으로 낳는 일은 흔히 왜곡되어 아이가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다른 많은 예 가운데 아도니스, 오시리스, 모세, 바쿠스의 탄생이 잘 알려진 실례다. 물속에서 머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환자에게 곧바로, 단 한 번의 임신 때 느꼈던 태동의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사내아이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자 몽상이 하나 이어졌는데, 그 몽상 속에서 그녀는 아이를 물에서 건져 내 아이 방으로 데려가 씻기고 옷을 입혀 자기 집안에 들이는 자신을 보았다.
그러므로 꿈의 뒷부분은 사랑의 도피에 관한 생각들을 나타내는데, 이 생각들은 바탕에 깔린 잠재 내용의 앞부분에 속했다. 꿈의 앞부분은 잠재 내용의 뒷부분인 출생 공상에 해당했다. 이런 순서의 역전 말고도, 꿈의 각 부분 안에서 또 다른 역전들이 일어났다. 앞부분에서는 아이가 물속으로 들어갔고, 그다음에 머리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바탕에 깔린 꿈 사고에서는 먼저 태동이 일어났고, 그다음에 아이가 물을 떠났다(이중의 역전). 뒷부분에서는 남편이 그녀를 떠났다. 꿈 사고에서는 그녀가 남편을 떠났다.
아브라함[79]은 첫 해산을 앞둔 한 젊은 여성의 또 다른 출산 꿈을 전한다(22쪽). 집 바닥의 한 곳에서 지하 운하가 곧장 물속으로 이어진다(산도, 양수). 그녀가 바닥의 뚜껑문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갈색 털가죽을 두른 생물이 하나 나타나는데, 물개와 거의 비슷하다. 이 생물은 꿈꾼 사람의 남동생으로 바뀌는데, 그녀는 늘 이 동생에게 어머니 같은 관계에 있었다.
「구조」 꿈은 출산 꿈과 이어져 있다. 구하는 것, 특히 물에서 구해 내는 것은 여자가 꾸는 꿈에서는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 그러나 꿈꾸는 사람이 남자일 때는 이 뜻이 달라진다.33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가 두려워하고 이따금 잠을 방해하기까지 하는 강도, 밤도둑, 유령은 모두 하나의 같은 어린 시절 회상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아이가 잠자리에 오줌을 싸지 않도록 요강에 앉히려고 아이를 깨우거나, 아이가 잠자면서 손을 어떻게 두고 있는지 똑똑히 보려고 이불을 들춰 본 밤의 방문객들이다. 나는 이런 불안 꿈 몇몇을 분석하면서 밤의 방문객에 대한 정확한 기억을 끌어낼 수 있었다. 강도는 언제나 아버지였고, 유령은 흰 잠옷을 입은 여성 인물에 해당할 가능성이 더 컸다.
II. 꿈에서 성적 재료를 표현하는 데 상징 표현이 풍부하게 쓰인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 자연히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이 상징들 가운데 많은 것이 속기 부호처럼 단단히 정해진 의미를 지니고 한결같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그리고 암호 해독법에 따라 새로운 해몽서를 엮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이와 관련해 말해 둘 것은, 이 상징 표현이 꿈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 사고, 특히 민중의 무의식적 사고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상징 표현은 한 민족의 꿈보다는 그 민족의 민간 전승, 신화, 전설, 말투, 속담, 유행하는 우스개에서 더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다.34
꿈은 잠재적 사고를 위장해 표현하려고 이 상징 표현을 이용한다. 이렇게 쓰이는 상징 가운데는 물론 어김없이, 또는 거의 어김없이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많다. 다만 심리적 재료의 기묘한 가소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꿈 내용 속의 어떤 상징은 이따금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본래의 뜻대로 해석해야 할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꿈꾸는 사람이 남다른 기억들 때문에, 보통은 그렇게 쓰이지 않는 것이라도 무엇이든 성적 상징으로 쓸 권리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가장 자주 쓰이는 성적 상징도 매번 뜻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제한과 유보를 달아 둔 뒤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해 두어도 좋겠다. 황제와 황후(왕과 왕비)는 대부분의 경우 정말로 꿈꾸는 사람의 부모를 나타내며,35 꿈꾸는 사람 자신은 왕자나 공주다. 길쭉한 물건, 막대기, 나무줄기, 우산(펼쳐 올리는 모습이 발기에 견줄 만하므로)은 모두, 그리고 길쭉하고 날카로운 무기, 칼, 단검, 창은 모두 남근을 나타낸다. 같은 것을 나타내는, 흔하지만 썩 이해가 가지 않는 상징으로 손톱 줄이 있다(문지르고 긁기 때문일까?). 작은 함, 상자, 보석함, 벽장, 난로는 여성의 그 부분에 해당한다. 자물쇠와 열쇠의 상징 표현은 울란트가 「에버슈타인 백작(Grafen Eberstein)」을 노래한 시에서 흔해 빠진 음담을 펼치는 데 아주 우아하게 쓴 바 있다. 한 줄로 늘어선 방들을 지나가는 꿈은 사창가 꿈이나 하렘 꿈이다. 계단, 사다리, 층층대, 또는 그것을 위로든 아래로든 오르내리는 것은 성행위의 상징적 표현이다.36 기어오르는 매끄러운 벽이나, 흔히 큰 불안 속에서 타고 내려오는 집의 전면(파사드)은 곧추선 사람의 몸에 해당하며, 아마도 어린아이들이 부모나 양부모의 몸을 타고 기어오르던 회상을 꿈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리라. 「매끄러운」 벽은 남자다. 불안 꿈에서는 흔히 집에서 튀어나온 어떤 부분을 꽉 붙들고 있다. 탁자, 차려 놓은 식탁, 널빤지는 여자인데, 아마 몸의 굴곡을 지워 버리는 대립 때문일 것이다. 「침대와 식탁」(mensa et thorus〔식탁과 침대〕)이 결혼을 이루므로, 꿈에서는 흔히 식탁이 침대를 대신하고, 할 수 있는 한 성적 표상 복합체가 먹는 일의 복합체로 옮겨 놓인다. 옷가지 가운데서는 여자의 모자를 흔히 남성 성기로 확실하게 해석할 수 있다. 남자의 꿈에서는 넥타이(cravat)가 음경의 상징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는 넥타이가 길게 늘어져 있고 남자에게 특유한 물건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마음대로 골라 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상징의 원본에 대해서는 자연이 이런 자유를 금하고 있다. 꿈에서 이 상징을 쓰는 사람들은 넥타이에 돈을 아끼지 않으며, 제대로 된 넥타이 수집품을 갖추고 있다.37 꿈에 나오는 복잡한 기계와 장치는 모두 성기일 가능성이 아주 크며, 그것을 묘사하는 데서 꿈의 상징 표현은 기지의 활동만큼이나 지칠 줄 모른다. 마찬가지로 꿈에 나오는 많은 풍경, 특히 다리나 숲이 우거진 산이 있는 풍경은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끝으로, 알 수 없는 신조어가 나오면 성적 의미를 지닌 구성 요소들로 짜 맞춘 결합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꿈에서는 아이도 흔히 성기를 뜻한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성기를 다정하게 「꼬마」라고 부르곤 하기 때문이다. 남성 성기의 아주 새로운 상징으로 비행기를 들 수 있는데, 비행기가 이렇게 쓰이는 것은 나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점으로도, 때로는 그 생김새로도 정당화된다. 어린아이와 노는 것이나 꼬마를 때리는 것은 흔히 꿈이 자위를 표현한 것이다. 그 밖의 여러 상징을, 일부는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지만, 슈테켈[114]이 예를 들어 가며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꿈에서 오른쪽과 왼쪽은 윤리적인 뜻으로 파악해야 한다. 「오른쪽 길은 언제나 올바름에 이르는 길을, 왼쪽 길은 범죄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그러므로 왼쪽은 동성애, 근친상간, 성도착을 뜻할 수 있고, 오른쪽은 결혼, 매춘부와의 관계 등을 뜻한다. 그 의미는 언제나 꿈꾸는 사람 개인의 도덕적 관점에 따라 정해진다」(앞의 책, 466쪽). 꿈에서 친척은 대개 성기 역할을 한다(473쪽). 마차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슈테켈은 나이 차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으로 해석한다(479쪽). 여행할 때 들고 다니는 짐은 사람을 짓누르는 죄의 짐이다(같은 책). 꿈에 자주 나오는 수에도 슈테켈은 고정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 해석들은 충분히 검증되지도 않았고 보편타당하지도 않아 보인다. 물론 개별 사례의 해석은 대개 그럴듯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 내가 활용하지 못한 W. 슈테켈의 최근 저서 『꿈의 언어』에는 가장 흔한 성적 상징의 목록(72쪽)이 있는데, 그 목적은 모든 성적 상징이 양성적으로 쓰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상상력이 어떻게든 허락하기만 한다면) 남성적인 뜻과 여성적인 뜻으로 동시에 쓰일 수 없는 상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괄호 속의 구절이 이 주장의 절대성을 상당 부분 덜어 낸다. 상상력은 이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슈테켈의 일반적 진술이 더 큰 다양성을 인정하는 쪽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밝혀 두는 것도 쓸데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성 성기에나 여성 성기에나 똑같이 자주 쓰이는 상징들 말고도, 주로 또는 거의 전적으로 한쪽 성만을 가리키는 상징들이 있고, 남성의 의미나 여성의 의미 하나만 알려진 상징들도 있다. 길고 단단한 물건과 무기를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또는 속이 빈 물건(궤짝, 상자, 주머니 등)을 남성 성기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력이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꿈과 무의식적 공상이 성적 상징을 양성적으로 이용하는 경향은 태곳적 특징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에는 성기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두 성에 같은 성기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몹시 불완전한 시사들이, 다른 사람들이 더 세심하게 수집하도록 자극하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38
이제 꿈에서 이런 상징 표현이 쓰인 예를 몇 가지 덧붙이겠다. 꿈의 상징 표현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꿈을 해석하기가 얼마나 불가능해지는지, 그리고 많은 경우 상징 표현이 얼마나 거역할 수 없이 밀고 들어오는지를 이 예들이 보여 줄 것이다.
1. 남자(남성 성기)의 상징인 모자:39 (유혹에 대한 불안 때문에 광장 공포증을 앓던 젊은 여성의 꿈에서 가져온 한 조각).
「여름에 저는 거리를 걷고 있어요. 모양이 특이한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데, 가운데 부분은 위로 휘어 올라가 있고 양옆 부분은 아래로 늘어져 있어요(여기서 서술이 막혔다). 그것도 한쪽이 다른 쪽보다 낮게요. 저는 명랑하고 마음이 든든해서, 젊은 장교 한 무리를 지나치며 속으로 생각해요. 당신들 가운데 누구도 나를 넘볼 수는 없어.」
모자에 대해 그녀가 아무 연상도 내놓지 못하자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 모자는 사실 남성 성기입니다. 가운데 부분이 솟아 있고 옆 부분 두 개가 아래로 늘어져 있으니까요.」 두 옆 부분이 고르지 않게 늘어져 있다는 세부는 일부러 해석하지 않았다. 해석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바로 결정 요인들 속의 이런 개별적 특징인데도 말이다. 나는 이어서, 그렇게 남자다운 성기를 지닌 남자가 그녀에게 있기만 하면 장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다시 말해 그들에게서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보호해 줄 사람이나 동행 없이는 나다니지 못하는 것은 주로 유혹에 관한 공상 탓이다. 그녀의 불안에 대한 이 마지막 설명은 다른 재료를 근거로 이미 여러 번 그녀에게 해 줄 수 있었다.
이 해석을 들은 뒤 꿈꾼 사람이 보인 태도는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모자에 대한 서술을 거둬들이고, 두 옆 부분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우겼다. 그러나 나는 내가 들은 것을 너무도 확신했기에 넘어가지 않았고, 내 말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용기를 내어, 남편의 고환 한쪽이 왜 다른 쪽보다 낮은지, 남자는 다 그런지 물었다. 이로써 모자의 특이한 세부가 설명되었고, 그녀는 해석 전체를 받아들였다. 모자 상징은 환자가 이 꿈을 이야기하기 훨씬 전부터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만큼 빤히 들여다보이지는 않는 다른 사례들로 미루어, 나는 모자가 여성 성기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는다.
2. 성기로서의 꼬마 ― 성교의 상징으로서 치이는 것(같은 광장 공포증 환자의 또 다른 꿈).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어린 딸을 떠나보내서 혼자 가야 한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철도로 가다가, 그녀의 꼬마가 선로 위를 곧장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래서 치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녀는 뼈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때 그녀는 불편한 느낌을 받지만 진짜 공포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뒤쪽에 그 부위가 보이지 않는지 살펴본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꼬마를 혼자 나가게 내버려 두었다고 어머니를 나무란다.」 분석. 이 꿈을 여기서 완전히 해석해 보이기는 쉽지 않다. 이 꿈은 일련의 꿈 가운데 하나여서, 나머지 꿈들과 연관 지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상징 표현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충분히 따로 떼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는 먼저 기차 여행을 역사적으로, 곧 어느 신경병 요양소를 떠난 일에 대한 암시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녀는 물론 그 요양소의 원장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왔는데, 떠날 때 그 의사가 기차역까지 나와 꽃다발을 건넸고, 어머니가 이 경의의 표시를 지켜보는 바람에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어머니는 그녀의 연애를 훼방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데, 이 엄격한 여인이 딸의 소녀 시절에 실제로 맡았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에 떠오른 생각은 「그러고 나서 그녀는 뒤쪽에 그 부위가 보이는지 살펴본다」라는 문장에 관한 것이었다. 꿈의 전면(파사드)만 보면 당연히 치여서 짓이겨진 어린 딸의 신체 부위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녀는 언젠가 욕실에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뒤에서 본 일을 떠올린다. 그러고는 성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더니, 남자는 뒤에서도 성기가 보이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이제 그녀는 스스로, 꼬마는 성기이고 그녀의 꼬마는(그녀에게는 네 살 난 딸이 있다) 그녀 자신의 성기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기더러 마치 성기가 없는 사람처럼 살기를 바란다고 어머니를 나무라며, 꿈의 첫 문장, 곧 어머니가 그녀의 꼬마를 떠나보내서 혼자 가야 한다는 문장에서 이 나무람을 알아본다. 그녀의 공상 속에서 혼자 거리를 간다는 것은 남자도 없고 성관계도 없다는 뜻이며(coire〔성교하다〕 = 함께 가다), 그녀는 그것이 싫다. 그녀가 한 모든 말에 따르면, 그녀는 소녀 시절 아버지를 더 따른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질투를 사서 정말로 괴로워했다.
「꼬마」가 남성 성기나 여성 성기의 상징이라는 것은 슈테켈이 지적한 바 있는데,40 그는 이와 관련해 아주 널리 퍼진 언어 관용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이 꿈의 더 깊은 해석은 같은 날 밤에 꾼 다른 꿈에 달려 있는데, 그 꿈에서 꿈꾼 사람은 자기를 남자 형제와 동일시한다. 그녀는 「선머슴」이었고, 남자아이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말을 늘 들었다. 남자 형제와의 이 동일시는 「꼬마」가 성기를 뜻한다는 것을 유난히 분명하게 보여 준다. 어머니는 그를(그녀를) 거세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 위협은 그 부위를 가지고 논 데 대한 벌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동일시는 그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자위를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만 이 사실을 그녀는 이제 남자 형제에 관한 기억 속에만 간직하고 있었다. 이 두 번째 꿈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그 무렵 남성 성기에 대해 일찍이 알게 되었다가 나중에 그 앎을 잃어버렸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두 번째 꿈은 남자아이가 거세되어 여자아이가 생겨난다는 유년기의 성 이론을 가리킨다. 내가 이 어린아이다운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자 그녀는 곧바로 한 일화로 그것을 확인해 주었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 「잘린 거야?」 하고 묻자 여자아이가 「아니, 원래부터 이랬어」 하고 대답했다는 일화였다.
그러므로 첫 번째 꿈에서 꼬마를, 곧 성기를 떠나보내는 것도 위협받은 거세를 가리킨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남자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두고 어머니를 탓한다.
「치이는 것」이 성교를 상징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많은 원천에서 그것을 확신하고 있지 않다면 이 꿈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3. 건물·계단·갱도로 성기를 표현하기. (아버지 콤플렉스로 제지된 젊은 남자의 꿈.)
「그는 아버지와 함께 어떤 곳을 산책하고 있는데, 그곳은 틀림없이 프라터다. 로툰데가 보이기 때문이다.41 로툰데 앞에는 작은 앞 건물이 있고, 거기에 계류 기구가 하나 매여 있다. 그런데 기구는 완전히 쭈그러든 것 같다. 아버지가 이게 다 무엇에 쓰는 거냐고 그에게 묻는다. 그는 이에 놀라지만 아버지에게 설명해 준다. 그들은 어느 안뜰로 들어서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양철판이 한 장 놓여 있다. 아버지는 거기서 큼직한 조각을 하나 잡아 뜯으려 하면서도, 먼저 누가 보고 있지 않은지 둘러본다. 그는 아버지에게, 감시인에게 말만 하면 더는 아무 어려움 없이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안뜰에서 계단이 갱도 안으로 내려가는데, 갱도의 벽은 어딘가 가죽 지갑처럼 푹신하게 덧대어져 있다. 이 갱도 끝에는 좀 더 긴 층계참이 있고, 그다음에 새 갱도가 시작된다…….」
분석. 이 꿈을 꾼 사람은 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반갑지 않은 유형의 환자에 속한다. 이런 환자들은 어느 지점까지는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고 분석을 따라오지만, 그 지점부터는 거의 다가갈 수 없는 채로 머문다. 이 꿈은 그가 거의 혼자서 분석했다. 「로툰데는」 하고 그는 말했다. 「제 성기이고, 앞에 있는 계류 기구는 제 음경입니다. 저는 음경이 약한 게 늘 걱정이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더 자세히 해석해야 한다. 로툰데는 엉덩이인데, 아이는 으레 엉덩이를 성기와 결부한다. 더 작은 앞 건물은 음낭이다. 꿈에서 아버지가 이게 다 무엇에 쓰는 거냐고 그에게 묻는다. 곧 성기의 목적과 구조를 묻는 것이다. 이 사태를 뒤집어야 하며 질문하는 쪽은 그여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아버지 쪽에서 그런 질문을 한 일은 실제로 한 번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이 꿈 사고를 소원으로 파악하거나, 다음과 같이 조건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아버지에게 성에 관해 깨우쳐 달라고 청하기만 했더라면.」 이 생각의 연속은 곧 다른 자리에서 찾게 될 것이다.
양철판이 펼쳐져 있는 안뜰은 우선은 상징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업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신중을 기하느라 아버지가 거래하는 다른 재료 대신 양철을 넣었지만, 꿈의 언어 표현은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꿈꾼 사람은 아버지의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이윤이 주로 기대는 미심쩍은 관행에 몹시 넌더리를 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앞의 꿈 사고(「내가 그에게 청하기만 했더라면」)의 연속은 이럴 것이다. 「그는 손님들을 속이듯 나를 속였을 것이다.」 장사의 부정직함을 표현하는 데 쓰인 잡아 뜯기에 대해서는 꿈꾼 사람 자신이 두 번째 설명을 내놓는데, 바로 자위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할 뿐 아니라(이 절 앞부분 참조), 자위의 은밀함이 그 반대로(「아니, 그건 아주 드러내 놓고 해도 되는걸」) 표현된다는 사실과도 잘 들어맞는다. 게다가 꿈의 첫 장면에서 질문을 아버지에게 떠넘겼듯이 자위 행위를 다시 아버지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과 완전히 맞아떨어진다. 그는 벽이 푹신하게 덧대어져 있다는 점을 들어 갱도를 곧바로 질로 해석한다. 질 속의 성교 행위가 보통처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것도 나는 다른 사례들에서 확인했다.42
첫 번째 갱도 끝에 좀 더 긴 층계참이 있고 그다음에 새 갱도가 시작된다는 세부를 그는 스스로 전기적(傳記的)으로 설명한다. 그는 한동안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지만 그 뒤 제지 때문에 그만두었고, 이제 치료의 도움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꿈은 끝으로 갈수록 흐릿해지며, 노련한 해석자라면 꿈의 둘째 장면에서 다른 주제의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본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업과 그 부정직한 관행은 갱도로 표현된 첫 번째 질을 뜻하므로,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인물로 상징된 남성 성기와 풍경으로 상징된 여성 성기.
(B. 다트너가 보고한, 남편이 순경인 하층 계급 여자의 꿈.)
…… 그때 누군가가 집에 침입했고, 겁에 질려 순경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떠돌이 둘과 서로 뜻을 맞추어 어느 교회로 들어갔는데,43 그 교회로는 계단이 아주 많이 이어져 있었다.44 교회 뒤에는 산이 하나 있었고,45 그 꼭대기에는 울창한 숲이 있었다.46 순경은 투구와 목가리개와 외투를 갖추고 있었다.47 순경을 따라 아주 순순히 함께 간 두 부랑자는 허리에 자루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48 교회에서 산으로 길이 하나 나 있었다. 이 길 양쪽에는 풀과 덤불이 우거졌는데, 산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빽빽해지다가 꼭대기에서는 아예 숲을 이루며 퍼져 있었다.
5. 계단 꿈.
(오토 랑크의 보고와 해석.)
다음에 소개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몽정 꿈은 이 절 앞부분에서 보고한 치아 자극 꿈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 바로 그 동료에게서 얻은 것이다.
「나는 계단집〔stair-house〕의 계단을 달려 내려가며 작은 여자아이를 쫓는다. 그 아이가 내게 무슨 짓을 해서 벌을 주고 싶은 것이다. 계단 밑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 아이를 붙들어 주었다. (다 자란 여자였나?) 나는 아이를 움켜잡지만 때렸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나는 계단 중간에 와 있고, 거기서 그 아이와 (말하자면 공중에서) 성교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교는 아니다. 나는 내 성기를 그 아이의 외음부에 문지르기만 하는데, 그러면서 그것을 아주 또렷하게 본다. 옆으로 뉘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보는 것만큼이나 또렷하게. 성행위를 하는 동안 나는 내 왼쪽 위에 (이것 역시 공중에 떠 있는 듯이) 작은 그림 두 점이 걸려 있는 것을 본다. 풀밭 위의 집 한 채를 그린 풍경화들이다. 더 작은 그림에는 화가의 서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내 성이 적혀 있었다. 그 그림은 내 생일 선물로 정해진 것 같았다. 그림들 앞에는 더 싼 그림도 구할 수 있다는 내용의 작은 팻말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계단 아래에서 나를 보았던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아주 흐릿하게 본다. 그리고 몽정에서 비롯한 축축한 느낌에 잠이 깬다.」
해석. 꿈꾼 사람은 꿈 전날 저녁 어느 서점에 들렀는데, 거기서 기다리는 동안 진열된 그림 몇 점을 살펴보았다. 꿈속의 그림들과 비슷한 모티프를 그린 그림들이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작은 그림 하나가 있어 화가의 이름을 보려고 다가갔지만,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같은 날 저녁 늦게 그는 어느 모임에서 보헤미아 출신 하녀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하녀는 자기 사생아가 「계단에서 만들어졌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꿈꾼 사람은 이 별난 일의 자세한 사정을 물어, 그 하녀가 애인과 함께 자기 부모의 집에 갔는데 거기서는 성관계를 가질 기회가 없었고, 흥분한 남자가 계단에서 일을 치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도주에 섞음질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짓궂은 말에 재치 있게 빗대어 꿈꾼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는 그야말로 지하실 계단에서 자랐군.」
꿈 내용에 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 낮의 체험들을 꿈꾼 사람은 쉽게 재생해 냈다. 그러나 꿈이 마찬가지로 이용한 오래된 유년기 기억의 한 조각도 그는 그만큼 쉽게 재생해 냈다. 계단집은 그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집이자, 그가 처음으로 성 문제를 알게 된 집이었다. 이 집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난간에 걸터앉아 미끄러져 내려오곤 했는데, 그러면 성적으로 흥분했다. 꿈에서도 그는 계단을 아주 빠르게 내려온다. 얼마나 빠른지, 그 자신이 분명하게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계단 하나하나에 발이 거의 닿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가 흔히 쓰던 말로 하자면 「날았다」거나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 유년기 체험에 비추어 보면 꿈의 첫머리는 성적 흥분이라는 요인을 표현하는 것 같다. 같은 집과 그 이웃집에서 꿈꾼 사람은 이웃 아이들과 싸움 놀이를 하곤 했는데, 그 놀이에서 그는 꿈에서와 똑같이 욕구를 채웠다.
꿈에서 계단이나 계단 오르기가 거의 어김없이 성교를 상징한다는 것을 성적 상징 표현에 관한 프로이트의 연구49에서 떠올린다면 이 꿈은 분명해진다. 이 꿈의 추진력도 그 결과도, 몽정이 보여 주듯이, 순전히 리비도적 성질을 띤다. 잠든 상태에서 성적 흥분이 일어났고(꿈에서는 이것이 계단을 빠르게 달려 내려가거나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거기에 섞인 가학적 가닥은 싸움 놀이를 바탕으로 해서, 아이를 쫓아가 제압하는 데서 암시된다. 리비도적 흥분은 높아져서 성적 행동을 재촉한다(꿈에서는 아이를 움켜잡아 계단 중간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여기까지라면 이 꿈은 순전히 성적 상징 표현으로 된 꿈이어서, 서툰 꿈 해석자에게는 알쏭달쏭할 것이다. 그러나 방해받지 않는 잠을 보장해 주었을 이 상징적 충족은 강력한 리비도적 흥분을 감당하기에 모자랐다. 흥분은 오르가슴에 이르고, 그리하여 계단 상징 표현 전체가 가면이 벗겨져 성교의 대용물임이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계단 상징 표현이 성적으로 이용되는 이유의 하나로 두 행위가 모두 리듬을 띤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 꿈은 특히 이를 뒷받침하는 것 같다. 꿈꾼 사람이 분명하게 주장한 바에 따르면, 꿈 전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성행위의 리듬이었기 때문이다.
두 그림에 관해서도 한마디 더 해 두자. 이 그림들은 실제 의미 말고도 「Weibsbilder」(문자 그대로는 여자 그림이지만 관용적으로는 여자들)라는 값을 지닌다. 이것은 꿈 내용이 큰(다 자란) 여자아이와 작은 여자아이를 보여 주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꿈이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다룬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싼 그림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춘 콤플렉스를 가리키고, 마찬가지로 작은 그림에 적힌 꿈꾼 사람의 성과 그 그림이 그의 생일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부모 콤플렉스를 가리킨다(계단에서 태어나다 ― 성교로 잉태되다).
꿈꾼 사람이 계단참에서 침대에 누워 젖은 느낌을 받는 자신을 보는 흐릿한 마지막 장면은, 유년기의 자위보다도 더 이전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으며, 그와 비슷하게 쾌감을 주었던, 잠자리에 오줌을 싸던 장면들에 분명 그 원형이 있다.
6. 변형된 계단 꿈.
신경과민이 몹시 심한 내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은 금욕하는 사람이었고, 공상이 어머니에게 붙박여 있었으며, 어머니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꿈을 거듭 꾸었다. 나는 언젠가 그에게, 억지로 금욕하느니 적당히 자위하는 편이 덜 해로울 것이라고 말해 준 적이 있다. 이 영향이 다음 꿈을 불러일으켰다.
「피아노 선생이, 피아노 치기를 게을리하고 모셸레스의 『연습곡(Études)』과 클레멘티의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Gradus ad Parnassum)』〔파르나소스산에 오르는 계단〕을 연습하지 않는다고 그를 나무란다.」 이에 대해 그는, 『그라두스』는 계단일 뿐이고 피아노 자체도 음계가 있으니 계단일 뿐이라고 말했다.
성적 사실을 표현하는 데 맞춰 쓰이지 못할 연상 계열은 없다고 해도 옳다. 나는 한 화학자의 꿈으로 끝을 맺겠다. 젊은 남자인 그는 자위하는 버릇을 여자와의 성교로 대신해 끊어 보려고 애써 왔다.
예비 설명. ― 꿈 전날 그는 한 학생에게 그리냐르 반응을 가르쳤다. 이 반응에서는 요오드의 촉매 작용 아래 마그네슘을 완전히 순수한 에테르에 녹여야 한다. 그 이틀 전에는 같은 반응을 하던 중에 폭발이 일어나 실험하던 사람이 손을 데었다.
꿈 I. 그는 페닐마그네슘브로마이드를 만들어야 한다. 그는 실험 장치를 유난히 또렷하게 보는데, 마그네슘 대신 자기 자신을 넣어 놓았다. 이제 그는 묘하게 흔들리는 자세로 있다. 그는 혼잣말로 자꾸 되뇐다. 「이게 맞아, 잘되고 있어, 발이 녹기 시작하고 무릎이 물러지고 있어.」 그러고 나서 그는 손을 아래로 뻗어 발을 더듬는데, 그러는 사이 (어떻게 그랬는지는 그도 모른다) 도가니에서 다리를 꺼내고, 다시 혼잣말을 한다. 「그럴 리가 없어……. 그래, 틀림없이 그래, 제대로 됐어.」 그러고 나서 그는 반쯤 깨어나 꿈을 속으로 되풀이해 본다. 나에게 들려주고 싶어서다. 그는 꿈을 분석하는 것이 뚜렷이 두렵다. 이렇게 반쯤 잠든 상태에서 그는 몹시 흥분해 있고, 쉴 새 없이 되풀이한다. 「페닐, 페닐.」
II. 그는 온 가족과 함께 ……ing에 있다. 열한 시 반에. 그는 어떤 부인과 밀회하기로 되어 있어 쇼텐토어에 가야 하는데, 열한 시 반이 되어서야 잠이 깬다. 그는 혼잣말을 한다. 「이제 너무 늦었어. 거기 가면 열두 시 반일 거야.」 다음 순간 그는 온 가족이 식탁 둘레에 모여 있는 것을 본다 ― 어머니와, 수프 그릇을 든 하녀는 유난히 또렷하게. 그러자 그는 혼잣말을 한다. 「뭐, 벌써 밥을 먹고 있으면 나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지.」
분석: 그는 첫 번째 꿈에도 밀회에서 만나기로 한 부인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고 확신한다(이 꿈은 기다리던 만남의 전날 밤에 꾼 것이다). 그가 가르친 학생은 유난히 불쾌한 녀석인데, 마그네슘이 아직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화학자에게 「이거 맞지 않는데요」 하고 말했고, 화학자는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야 확실히 맞지 않지」 하고 대답했다. 그 자신이 바로 이 학생임이 틀림없다. 학생이 자기 합성에 무관심하듯 그는 자기 분석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꿈속에서 조작을 해내는 그는 나 자신이다. 이루어진 성과에 그토록 무관심한 그가 내 눈에 얼마나 불쾌해 보이겠는가!
게다가 그는 분석(합성)의 재료다. 치료의 성공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꿈속의 다리는 전날 저녁의 한 인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춤 강습에서 한 부인을 만났는데, 그녀를 정복하고 싶었다. 그녀를 어찌나 바짝 끌어안았던지 한번은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누르던 것을 멈추자, 그녀가 그의 넓적다리 아랫부분을 무릎 바로 위까지, 곧 꿈에서 말한 그 자리를 단단히 마주 눌러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여자는 레토르트 속에서 마침내 잘되어 가는 마그네슘이다. 그가 여자에게 남성적이듯 나에게는 여성적이다. 여자와 잘되면 치료도 잘될 것이다. 무릎 언저리에서 자기 몸을 더듬어 느끼고 알아차리는 것은 자위를 가리키며, 전날의 피로에 해당한다……. 밀회는 실제로 열한 시 반으로 정해져 있었다. 늦잠을 자고 늘 대하던 성적 대상 곁에(곧 자위에) 머물고 싶은 그의 소원은 그의 저항에 해당한다.
페닐이라는 이름을 되풀이한 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린다. yl〔-일〕로 끝나는 이 라디칼들은 모두 예전부터 그의 마음에 들었고, 쓰기도 아주 편하다. 벤질, 아세틸 등등. 그러나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슐레밀(Schlemihl)50이라는 라디칼을 내놓자 그는 크게 웃더니, 여름에 프레보의 책을 한 권 읽었는데 그 책에 「Les exclus de l’amour」〔사랑에서 밀려난 사람들〕라는 장이 있었고, 그 장의 묘사를 읽으며 슐레밀들이 떠올랐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제 경우입니다」 하고 덧붙였다. 밀회를 놓쳤더라면 그는 또다시 슐레밀 노릇을 했을 것이다.
주
1. 꿈꾸는 사람이 잠재적 꿈 사고를 표현하는 데 우리에게 익숙한 상징을 이용하는 경우는 예외다.
2. 「황제의 새 옷」.
3. 동화에도 아이가 나온다. 거기서 한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외치기 때문이다. 「아니, 저 사람 아무것도 안 입었잖아.」
4. 영역본은 「the desire to be observed」(지켜보이기를 바라는 욕망)라 했으나, 편집증에서 문제 되는 것은 누가 자기를 지켜본다는 확신, 곧 망상이다(독일어 원문은 Wahn). 뜻이 달라지는 곳이라 「망상」으로 옮겼다. ― 옮긴이.
5. 페렌치는 여성들의 흥미로운 알몸 꿈을 여럿 보고했는데, 이 꿈들은 유년기의 노출 욕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몇몇 특징에서는 위에서 논한 「전형적인」 알몸 꿈과 다르다.
6. 뻔한 이유로, 꿈에 「온 가족」이 나타나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7. 독일어 원문의 예는 a+b=ab다. 영역자가 영어 낱말(at)이 되도록 바꾸었다. ― 옮긴이.
8. 이 꿈의 보충 해석: 계단에 침 뱉기는 자유로운 번역을 거쳐 나를 「esprit d'escalier〔계단의 재치〕」로 이끌었다. 「Spucken」(영어로는 spit〔침을 뱉다〕, 그리고 spook〔유령〕처럼 구는 것, 곧 출몰하는 것)이 유령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단 재치」는 재빠르게 받아치는 재주(독일어로는 Schlagfertigkeit ― 되받아 때릴, 곧 칠 태세)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며, 나는 정말이지 이 점에서 나 자신을 나무라야 한다. 그러나 그 유모에게 「때릴 태세」가 모자랐는지가 과연 문제일까?
9. 앞 주의 말장난은 소리가 비슷한 두 독일어 낱말 spucken(침을 뱉다)과 spuken(유령이 나돌다)에 기댄다. 영역본은 두 낱말을 「Spucken」 한 철자로 합쳐 적었다. ― 옮긴이.
10. 『정신분석·정신병리 연구 연보(Jahrbuch für psychoanalytische und psychopathologische Forschungen)』 제1권(1909)에 실린 「다섯 살 소년의 공포증 분석(Analyse der Phobie eines fünfjährigen Knaben)」과 『성 문제(Sexualprobleme)』 제1권(1908)에 실린 「유아기의 성 이론에 대하여(Ueber infantile Sexualtheorien)」 참조.
11. 영역본은 the younger(동생)라 했으나 문맥상 동생을 맞는 손위 아이를 가리킨다. ― 옮긴이.
12. 앞에서 든 논문에서 그 공포증을 분석한 세 살 반의 한스는, 누이동생이 태어난 직후 열에 들떠 이렇게 외친다. 「난 여동생 싫어.」 일 년 반 뒤 신경증을 앓을 때 한스는, 어머니가 아기를 목욕시키다가 욕조에 빠뜨려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한스는 마음씨 착하고 다정한 아이여서, 곧 누이동생을 좋아하게 되고 특히 동생을 감싸 주기를 좋아한다.
13. 세 살 반의 한스는 누이동생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똑같은 말로 표현한다(앞의 주들 참조). 한스는 동생이 이가 없어서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한다.
14. 나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재능 있는 열 살 소년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빠가 죽은 건 알겠는데, 왜 저녁 먹으러 집에 안 오는지는 모르겠어.」
15.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영역본의 셈법(개신교)으로는 제5계명이고, 독일어 원문(가톨릭·루터교 셈법)으로는 제4계명이다. ― 옮긴이.
16. 적어도 일부 신화적 표현에서는 그렇다. 다른 표현들에 따르면 거세는 크로노스만이 제 아버지에게 행한다.
이 모티프의 신화적 의미에 관해서는 오토 랑크의 『영웅 탄생의 신화(Der Mythus von der Geburt des Helden)』, 『응용 정신학 총서(Schriften zur angew. Seelenkunde)』 제5권, 1909 참조.
17. 제1막 2장. 조지 서머스 클라크 옮김.
18. 비극 문학의 또 다른 위대한 창조물인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두 문명 시대의 정신생활이 보이는 모든 차이, 곧 인류의 감정생활에서 억압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진전해 온 것이, 같은 재료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 데서 드러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아이의 근본적인 소원 공상이 꿈에서처럼 밝은 데로 끌려 나와 실현된다. 『햄릿』에서는 그것이 억압된 채 남아 있으며, 우리는 ― 신경증의 경우와 얼마간 비슷하게 ― 그것에서 비롯하는 제지를 통해서만 그 존재를 알게 된다. 주인공의 성격에 관해 완전히 어둠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도 이 근대극의 압도적인 효과와 양립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극은 자기에게 맡겨진 복수의 과업을 햄릿이 망설이는 데 바탕을 둔다. 본문은 이 망설임의 이유나 동기를 밝히지 않으며, 수많은 해석의 시도도 그것을 제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괴테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는 견해에 따르면, 햄릿은 사고 활동이 지나치게 발달한 탓에 본래의 활력이 마비된 인간 유형을 나타낸다. (「사색의 창백한 빛깔에 온통 병들어.」)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시인은 신경 쇠약에 걸린 병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줄거리는, 햄릿이 결코 행동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인물로 보이도록 의도되지 않았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두 번 본다. 한 번은 앞뒤 가리지 않는 격정에 휩싸여 휘장 뒤에서 엿듣는 자를 찔러 죽일 때이고, 또 한 번은 자기에게 마련되어 있던 죽음으로 두 신하를 보낼 때다 ― 그것도 신중하게, 심지어 교활하게, 르네상스 시대 군주다운 거리낌 없음을 온전히 드러내며. 그렇다면 아버지의 유령이 그에게 지운 과업을 이루지 못하게 그를 붙드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떠오르는 설명은, 그것이 이 과업의 독특한 성질이라는 것이다. 햄릿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만 아버지를 없애고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 곧 자기의 억압된 어린 시절 소원이 실현된 모습을 보여 주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는 일만은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를 복수로 몰아가야 할 혐오는 그의 안에서 자기 비난으로, 양심의 가책으로 바뀌고, 이 가책은 그 자신도 자기가 벌해야 할 살인자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그에게 들이댄다. 이로써 나는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무의식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을 의식의 언어로 번역한 셈이다. 누군가 햄릿을 히스테리 환자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나는 그것을 내 해석에서 나온 추론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햄릿이 오필리아와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내는 성적 거부감도 이 견해와 아주 잘 들어맞는다. 그것은 그 뒤 몇 해 동안 시인을 점점 더 사로잡아 마침내 『아테네의 타이먼』에서 절정에 이르러 표현되는 바로 그 성적 거부감이다. 물론 『햄릿』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시인 자신의 심리일 수밖에 없다. 게오르그 브란데스의 셰익스피어 연구서(1896)에서 나는, 이 극이 셰익스피어의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곧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아직 생생할 때, 짐작건대 아버지를 향한 어린 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나던 무렵에 쓰였다는 사실을 가져온다. 일찍 죽은 셰익스피어의 아들 하나가 햄닛(햄릿과 같은 이름)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햄릿』이 부모에 대한 아들의 관계를 다루듯, 그 뒤에 나온 『맥베스』는 자식 없음이라는 주제에 바탕을 둔다. 모든 신경증 증상이, 그리고 꿈 자체가 재해석될 수 있으며 완전히 이해되려면 재해석을 필요로 하기까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참된 시적 창조물도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 이상의 동기, 하나 이상의 충동에서 나왔을 것이 틀림없으며 하나 이상의 해석을 허용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여기서 창작하는 시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충동의 무리만을 해석하려 했다. 이 언급에 담긴 『햄릿』 문제에 대한 견해는 뒤에 토론토(캐나다)의 어니스트 존스 박사가 새로운 논거를 많이 들어 쓴 상세한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햄릿』의 재료가 『영웅 탄생의 신화』와 이어져 있다는 것도 O. 랑크가 밝혀 보였다. ― 「햄릿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동기 연구」(『미국 심리학 저널』, 1910년 1월, 제21권).
19. 마찬가지로 크고, 넘쳐 나고, 엄청나고, 과장된 것은 무엇이든 어린아이다운 특징일 수 있다. 아이에게는 커지고 싶다는 소원, 모든 것을 어른만큼 받고 싶다는 소원보다 더 강렬한 소원이 없다. 아이는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다. 아이는 그만을 모르며, 마음에 들었거나 맛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되풀이해 달라고 끝없이 조른다. 아이는 문화와 교육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절제하는 법, 겸손하고 체념할 줄 아는 법을 배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경증 환자도 무절제와 지나침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20. 존스 박사가 미국의 한 학회에서 강연하며 꿈의 이기주의를 이야기하자, 학식 있는 한 부인이 이 비과학적인 일반화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녀 생각에 강연자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꿈에 대해서나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뿐, 미국 사람들의 꿈까지 거기 포함할 권리는 없었다. 그녀 자신으로 말하자면, 자기 꿈은 모두 철저히 이타적이라고 확신했다.
21. C. G. 융에 따르면 여성의 경우 치아 자극 꿈은 출산 꿈의 의미를 지닌다.
22. 이 절의 「전기적(傳記的)」 꿈 참조.
23. 이를 뽑는 꿈과 이가 빠지는 꿈은 민간 신앙에서 가까운 벗이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정신분석은 기껏해야 위에서 비친 패러디적인 뜻으로만 그런 의미를 인정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오토 랑크[109]가 제공해 준 치아 자극 꿈 하나를 끼워 넣는다.
치아 자극 꿈이라는 주제에 관해, 얼마 전부터 꿈 해석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여 온 한 동료에게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다.
나는 최근에 치과에 가는 꿈을 꾸었다. 치과 의사는 내 아래턱 어금니 하나를 드릴로 파냈다. 그가 그 이를 하도 오래 손보는 바람에 그 이는 못 쓰게 되어 버렸다. 그러자 그는 집게로 그 이를 잡고 너무도 수월하게 뽑아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것은 사실 치료하던 그 이가 아니니 개의치 말라고 하고는 그 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는데, 거기서 그 이는 (지금 생각하기로는 위 앞니였다) 여러 켜로 갈라졌다. 나는 진료 의자에서 일어나 호기심에 차서 가까이 다가가, 흥미진진하게 의학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의사는 눈에 띄게 하얀 그 이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떼어 내 어떤 기구로 갈면서(가루로 빻으면서), 이것이 사춘기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이가 이렇게 쉽게 빠지는 것은 사춘기 이전뿐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여자의 경우 여기에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를 낳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반쯤 깨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 꿈에 몽정이 따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을 꿈의 어느 대목에 딱 집어 넣을 수는 없다. 이를 뽑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 꿈꾸었는데, 그 꿈은 이렇게 끝났다. 나는 모자와 웃옷을 어딘가에(아마 치과에) 두고 와서, 누가 뒤따라 가져다주기를 바라며 외투만 걸친 채 막 떠나려는 기차를 잡으려고 서둘렀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맨 끝 칸에 뛰어오르는 데 성공했는데, 거기에는 이미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객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불편한 자세로 여행해야 했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쓴 끝에 마침내 성공했다. 우리는 긴 터널을 지나갔는데, 그 터널 안에서 맞은편에서 오는 기차 두 대가 마치 우리 기차가 터널이라도 되는 듯 우리 기차를 뚫고 지나갔다. 나는 바깥에서 들여다보듯 객차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꿈을 해석할 재료로 우리는 꿈꾼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체험과 생각을 얻었다.
I. 얼마 전부터 나는 실제로 치과 치료를 받고 있었고, 꿈을 꿀 무렵에는 꿈에서 드릴로 파낸 그 아래턱 이가 줄곧 아파서 괴로웠다. 치과 의사는 실제로도 그 이를 내가 바라는 것보다 오래 손보았다. 꿈을 꾼 날 오전에 나는 통증 때문에 다시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는 치료하던 이 말고 같은 턱의 다른 이, 아마 통증이 거기서 오는 듯한 그 이를 뽑게 해 달라고 권했다. 막 돋아나고 있던 『사랑니』였다. 이 기회에, 또 이와 관련해서, 나는 의사로서의 그의 양심에 호소하는 질문을 하나 했다.
II. 같은 날 오후 나는 치통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을 한 부인에게 사과해야 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치관은 거의 다 없어졌지만 이뿌리 하나를 뽑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그녀는 눈니(eye teeth)를 뽑는 것이 특히 아프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는 사람 하나가 아래턱의 이는 뽑기가 훨씬 쉽다고 말해 주었다고 했다. 그녀의 경우가 바로 그런 이였다. 그 아는 사람은 또 마취 상태에서 엉뚱한 이 하나를 뽑혔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이 말 때문에 그녀는 꼭 받아야 할 수술이 더 두려워졌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눈니라는 것이 어금니를 말하는지 송곳니를 말하는지, 그리고 눈니에 관해 알려진 것이 무엇인지 내게 물었다. 나는 이 모든 의미에 미신의 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일러 주었지만, 민간의 몇몇 견해가 지닌 진짜 의미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기 경험으로 아주 오래되고 널리 퍼진 민간 신앙 하나를 알고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임신한 여자가 치통을 앓으면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III. 이 속설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Traumdeutung)』(독일어판 제2판 193쪽)에서 주장한 치아 자극 꿈의 전형적 의미, 곧 자위의 대용물이라는 의미와 관련해서 내 흥미를 끌었다. 이 민간 속설에서도 치아와 남성 성기(Bub〔사내아이〕)가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날 저녁 『꿈의 해석』에서 해당 대목을 읽었고, 거기서 무엇보다도 곧 인용할 진술들을 발견했다. 이 진술들이 내 꿈에 미친 영향은 앞서 말한 두 체험의 영향만큼이나 뚜렷이 알아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치아 자극 꿈에 관해 『남자의 경우 이 꿈들에 추진력을 대 주는 것은 사춘기 시절의 자위에 대한 갈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쓰고 있다(독일어판 제2판 193쪽). 또 이렇게 쓴다. 『나는 전형적인 치아 자극 꿈에 흔히 나타나는 변형들 ― 예컨대 다른 사람이 꿈꾸는 사람의 입에서 이를 뽑는 변형 ― 도 같은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치아 자극”이 어떻게 이런 의미에 이를 수 있는지는 미심쩍어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아래에서 위로의 이동(문제의 꿈에서는 아래턱에서 위턱으로)에 주의를 돌리는데, 이 이동은 그토록 자주 일어나고, 성적 억압에 봉사하며, 그 덕분에 히스테리에서 나타나는, 본래 성기에서 일어나야 할 온갖 감각과 의도가 덜 거리끼는 신체 부위에서 실현될 수 있다』(독일어판 제2판 194쪽). 『그러나 어떤 관용 표현에 담긴 또 다른 연관도 지적해 두어야겠다. 우리 고장에서는 자위 행위를 가리키는 점잖지 못한 말이 쓰이는데, 곧 “잡아 뽑다”, 또는 “잡아 내리다”라는 말이다』(독일어판 제2판 195쪽). 이 표현은 내가 어린 시절에 이미 자위를 가리키는 말로 익히 알던 것이다. 여기서부터라면 노련한 꿈 해석자는 이 꿈의 바탕에 깔려 있을지 모를 유년기 재료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꿈에서 이가 그렇게 쉽게 빠졌고 빠진 뒤에 위 앞니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흔들리던 앞니 하나를 내가 몸소 쉽게, 아프지도 않게 뽑아냈던 어린 시절의 한 체험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날까지도 세세한 점까지 또렷이 기억하는 이 일은, 내가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자위를 시도하기 시작한 바로 그 이른 시기에 일어났다 ― (은폐 기억). 여성의 치아 자극 꿈은 출산을 뜻한다는 C. G. 융의 주장을 프로이트가 언급한 것(독일어판 제2판 194쪽 각주)은, 임신부의 치통이 지니는 의미에 관한 민간 신앙과 함께, 여성적 의미와 남성적 의미(사춘기) 사이에 대립을 세워 놓았다. 이와 관련해 나는, 치료를 마치고 치과 의사에게서 풀려난 직후에 꾼 예전의 꿈 하나를 떠올린다. 막 씌운 금관이 빠져 버리는 꿈이었는데, 꿈속에서 나는 적지 않은 비용 때문에 몹시 속상해했다. 그 비용 걱정은 그때까지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체험에 비추어 보면, 이 꿈은 이제 경제적으로 덜 유리한 온갖 형태의 대상애와 견주어 자위가 지닌 물질적 이점을 추어올리는 것으로 이해된다(금관은 오스트리아의 금화이기도 하다〔오스트리아의 화폐 단위 크로네(Krone)는 『관(冠)』이라는 뜻이다〕).
이론적으로 이 사례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로워 보인다. 첫째, 꿈속의 사정이 이를 뽑는 행위 도중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이 사례는 프로이트가 드러내 보인 연관을 확증해 준다. 몽정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기계적 자극의 도움 없이 이루어지는 자위적 충족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경우 몽정으로 얻는 충족은 흔히 그렇듯 상상 속의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 없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기 성애적이며, 기껏해야 어쩌면 가느다란 동성애적 가닥(치과 의사)을 보여 줄 뿐이다.
언급할 만해 보이는 둘째 점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우리가 프로이트의 견해를 전혀 쓸데없는 방식으로 입증하려 한다는 반론이 쉽게 나올 수 있다. 독서의 체험만으로도 꿈 내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치과 방문, 부인과의 대화, 『꿈의 해석』을 읽은 일만으로도, 밤에 치통으로 잠을 설치기도 한 이 잠자는 사람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충분히 설명되며, 잠을 방해하는 통증이 없어진 것까지 설명될 수 있다(아픈 이를 없애는 표상으로, 그리고 동시에 두려워하던 고통스러운 감각을 리비도로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러나 이 가정을 얼마만큼 받아들이든, 프로이트의 설명을 읽은 것이 꿈꾼 사람에게서 이 뽑기와 자위 행위의 연관을 만들어 냈다고 진지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꿈꾼 사람 자신이 인정했듯이(『잡아 뜯다』) 이 연상이 이미 오래전에 형성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 연관은 효력을 발휘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부인과의 대화와 관련해 이 연상을 한층 더 자극했을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는, 꿈꾼 사람이 나중에 한 말에서 드러난다. 그는 『꿈의 해석』을 읽으면서, 뻔한 이유로 치아 자극 꿈의 이 전형적 의미를 믿을 수 없었고, 그것이 이런 성질의 꿈 모두에 들어맞는지 알고 싶다는 소원을 품었다는 것이다. 꿈은 이제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이것을 확인해 주며, 그가 왜 그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 꿈은 이 점에서도 소원 성취다. 곧 프로이트의 이 견해가 중요하고 확고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다는 소원의 성취다.
24. 앞 주(랑크의 보고)의 「엉뚱한 이」 ― 영역본은 「one of her false teeth」(틀니 하나)라 했으나, 뒤따르는 말(그 말을 듣고 수술이 더 두려워졌다)과 맞지 않는다. 독일어 falscher Zahn(엉뚱한 이, 잘못 뽑은 이)을 「틀니」로 읽은 것으로 보아 바로잡았다. ― 옮긴이.
25. 신경과민과는 전혀 거리가 먼 한 젊은 동료가 이와 관련해 내게 이렇게 말한다. 「제 경험으로 아는데, 그네를 탈 때 아래로 내려가는 움직임이 가장 세찬 순간이면 성기에 묘한 느낌이 들곤 했어요. 제게 정말로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관능적인 느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었죠.」 나는 환자들에게서, 관능적인 감각을 동반한 첫 발기가 소년 시절 무언가를 기어오르다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첫 성적 충동이 어린 시절의 몸싸움과 씨름에서 비롯하는 일이 많다는 것은 정신분석으로 아주 확실하게 밝혀져 있다.
26. 물론 이것은 「vögeln」〔새(Vogel)에서 나온 말로, 성교한다는 뜻〕이라는 비속어를 아는, 독일어를 쓰는 꿈꾸는 사람에게만 들어맞는다. ― 영역자 브릴의 주.
27. 『신경증론 소논문집(Sammlung kl. Schriften zur Neurosenlehre)』 제2집, 1909.
28. 저자의 『성 이론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A. A. 브릴 옮김) 참조.
29. W. 슈테켈, 『꿈의 언어』, 1911.
30. 알프레트 아들러, 「삶과 신경증에서의 심리적 양성구유(Der Psychische Hermaphroditismus im Leben und in der Neurose)」, 『의학의 진보(Fortschritte der Medizin)』 1910년 제16호, 그리고 『정신분석 중앙지(Zentralblatt für Psychoanalyse)』 제1권(1910~1911)에 실린 그 뒤의 글들.
31. 이런 위장된 오이디푸스 꿈의 전형적인 예 하나를 나는 『정신분석 중앙지』 제1호에 발표했다. 자세한 분석을 곁들인 또 다른 예는 같은 잡지 제4호에 오토 랑크가 보고했다. 사실 고대인들도 드러난 오이디푸스 꿈의 상징적 해석을 모르지 않았다(O. 랑크[108], 534쪽 참조). 이를테면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는 꿈 하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우리에게 전해 오는데, 해몽가들은 이 꿈을 땅(어머니 대지)을 차지하게 될 길조로 해석했다. 또 잘 알려져 있듯이, 신탁은 타르퀴니우스 일가에게 그들 가운데 어머니에게 먼저 입 맞추는 자가 로마의 지배자가 되리라고 일러 주었는데(osculum, matri tulerit〔어머니에게 입맞춤을 바치는〕), 브루투스는 이것을 어머니 대지를 가리키는 말로 알아들었다(terram osculo contigit, scilicet quod ea communia mater omnium mortalium esset〔그는 땅에 입을 맞추었다. 땅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어머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리비우스, 제1권 61장). 이런 신화와 해석은 올바른 심리학적 인식을 가리킨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남달리 사랑받거나 귀여움을 받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흔히 영웅적으로 보이고 억지로라도 실제의 성공을 끌어내는 그런 자기 신뢰와 굳건한 낙관주의를 삶에서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2. 태내 생활에 관한 공상과 무의식적 사고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게 된 것은 겨우 최근의 일이다. 그것들에는, 산 채로 묻히지나 않을까 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이 품는 기이한 불안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으며, 죽은 뒤의 삶에 대한 믿음의 가장 깊은 무의식적 근거도 들어 있다. 이 믿음은 출생 이전의 이 신비로운 삶을 미래로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출생 행위는 최초의 불안 체험이며, 따라서 불안 정동의 원천이자 본보기다.
33. 그런 꿈에 대해서는 피스터, 「정신분석적 영혼 돌봄과 치유의 한 사례(Ein Fall von Psychoanalytischer Seelensorge und Seelenheilung)」, 『복음의 자유(Evangelische Freiheit)』, 1909 참조. 「구조」의 상징에 관해서는 내 강연 「정신분석 치료의 앞으로의 전망(Die Zukünftigen Chancen der psychoanalytischen Therapie)」, 『정신분석 중앙지』 제1호, 1910 참조. 또 「사랑 생활의 심리학에 대한 기고 I. 남성에게서 보이는 대상 선택의 특수한 유형에 대하여(Beiträge zur Psychologie des Liebeslebens, I. Ueber einen besonderen Typus der objektwahl beim Manne)」, 『연보(Jahrbuch)』, 블로일러·프로이트 엮음, 제2권, 1910도 참조.
34. 블로일러와 그의 제자인 메더, 아브라함 등 취리히 학파가 상징 표현에 관해 쓴 저작들, 그리고 그들이 참조하는, 의사가 아닌 저자들(클라인파울 등)의 저작 참조.
35.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 주지사, 시장이 꿈에서 흔히 아버지를 나타낸다. ― 영역자 브릴의 주.
36. 다른 자리에서 한 말을 여기서 되풀이해도 좋겠다(「정신분석 치료의 앞으로의 전망」, 『정신분석 중앙지』 제1권 1·2호, 1910). 「얼마 전 나는, 우리 연구를 잘 모르는 어떤 심리학자가 내 친구 하나에게, 우리가 꿈의 은밀한 성적 의미를 분명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자주 꾸는 꿈은 계단을 오르는 꿈인데, 그 뒤에 성적인 것은 분명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 반론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우리는 꿈에 계단, 층계, 사다리가 나오는 경우를 조사했고, 곧 계단(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 성교의 확실한 상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 비교의 근거는 찾기 어렵지 않다. 리듬 있는 간격을 두고, 숨이 점점 가빠지는 가운데 높은 곳에 이르렀다가, 몇 번 재빨리 뛰어 다시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단을 오르는 데서 성교의 리듬을 알아볼 수 있다. 언어 관용도 잊지 말고 고려하자. 언어 관용은 『오르기』나 『올라타기』가 아무 덧붙임 없이 성행위를 대신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는 것을 보여 준다. 프랑스어에서는 계단의 한 단을 『la marche』라고 하는데, 『un vieux marcheur』〔글자 그대로는 늙은 걸음꾼, 늙은 난봉꾼을 이르는 말〕는 우리의 『늙은 오름꾼』과 꼭 맞아떨어진다.」
37. 넥타이를 거의 「necktie」라는 말로만 부르는 이 나라에서, 영역자는 넥타이가 꿈꾸는 사람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짐스러운 여자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넥타이 ― 무거운 짐처럼 내 목에 매인 것 ― 내 약혼녀」가 결국 약혼을 깬 한 남자의 꿈에서 나온 연상이다. ― 영역자 브릴의 주.
38. 꿈의 상징 표현에 대한 셰르너의 견해와 여기서 전개한 견해 사이에는 온갖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셰르너[58]야말로 꿈속 상징 표현의 참된 발견자로 인정받아야 하며, 그의 책이 쉰 해 가까이 공상적이라는 평을 들은 뒤에 정신분석의 경험이 그 책의 명예를 되찾아 주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39. 『정신분석 중앙지(Zentralblatt für Psychoanalyse)』 제1권 5·6호(1911)에 실린 「꿈의 해석 보유(Nachträge zur Traumdeutung)」에서.
40. 「꿈 해석에 대한 기여(Beiträge zur Traumdeutung)」, 『정신분석·정신병리 연구 연보(Jahrbuch für Psychoanalyt. und psychop. Forsch.)』 제1권, 1909, 473쪽. 같은 글(475쪽)에는 가운데에 깃털이 비스듬히 꽂힌 모자가 (성 불능인) 남자를 상징하는 꿈도 보고되어 있다.
41. 로툰데(Rotunde)는 1873년 빈 만국 박람회 때 프라터에 세운 거대한 원형 건물이다. ― 옮긴이.
42. 『정신분석 중앙지』 제1권 참조.
43. 또는 예배당 ― 질.
44. 성교의 상징.
45. Mons veneris〔불두덩〕.
46. Crines pubis〔음모〕.
47. 외투와 두건 차림의 악마들은, 이 방면에 밝은 어떤 사람의 설명에 따르면 남근적 성질을 띤다.
48. 음낭의 두 쪽.
49. 『정신분석 중앙지』 제1권, 2쪽 참조.
50. 이 히브리어 낱말은 독일어를 쓰는 나라들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운이 없고 서투른 사람을 뜻한다. ― 영역자 브릴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