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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사) 꿈 이론과 꿈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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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꿈 문제에 관한 학술 문헌

(사) 꿈 이론과 꿈의 기능

꿈에서 관찰되는 여러 특징을 되도록 하나의 관점에서 설명하려 하는 동시에, 꿈이 더 넓은 현상 영역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규정하는 꿈에 관한 진술을 꿈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개별 꿈 이론들은 꿈의 이런저런 특징을 두드러지게 내세우고 거기에 설명과 관계를 이어 붙인다는 점에서 서로 구별될 것이다. 이론에서 꿈의 기능, 즉 꿈의 쓸모나 그와 같은 어떤 작용을 반드시 끌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목적론에 맞추어져 있는 우리의 기대는, 꿈의 기능을 이해하게 해 주리라 약속하는 이론을 그래도 반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어느 정도 꿈 이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꿈에 관한 견해를 우리는 이미 여럿 알게 되었다. 꿈은 사람의 행동을 이끌려고 신들이 보낸 것이라는 고대인의 믿음은, 꿈에 관해 알 만한 모든 것을 알려 주는 완전한 꿈 이론이었다. 꿈이 생물학 연구의 대상이 된 뒤로 이론의 수는 더 많아졌지만, 그 가운데 몇몇은 매우 불완전하다.

완전함을 바라지 않는다면, 꿈속 심리적 활동의 정도와 방식에 대한 기본 견해를 기준으로 꿈 이론들을 다음과 같이 느슨하게 묶어 볼 수 있다.

1. 델뵈프[16]의 이론처럼, 깨어 있는 상태의 심리적 활동이 온전히 꿈속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이론. 여기서는 정신이 잠들지 않는다. 정신의 장치는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다만 깨어 있을 때와 다른 조건 아래 놓이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활동하면서도 깨어 있을 때와는 다른 결과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 이론들에서 문제는, 꿈꾸는 사고와 깨어 있는 사고의 차이를 모조리 수면 상태의 조건에서 끌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이론들에는 꿈의 기능에 다가갈 길이 없다. 사람이 왜 꿈을 꾸는지, 심리 장치의 복잡한 기제가 겉보기에 자신에게 맞지 않는 조건 아래 놓였는데도 왜 계속 돌아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합당한 반응으로는 꿈 없이 자는 것과 방해하는 자극이 다가올 때 깨어나는 것, 이 두 가지만 남을 뿐이고, 셋째 반응인 꿈꾸기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2. 이와 반대로, 꿈에서는 심리적 활동이 줄어들고 연결이 느슨해지며 쓸 수 있는 재료가 빈약해진다고 보는 이론. 이 이론들을 따르면 수면에 대해 델뵈프가 부여한 것과는 전혀 다른 심리학적 성격을 가정해야 한다. 수면은 정신을 훨씬 넘어서까지 미친다. 수면은 단지 정신을 외부 세계에서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정신의 기제 속으로 파고들어 때로는 그것을 쓸모없게 만든다. 정신의학의 재료에서 비교를 하나 끌어와도 된다면, 첫째 이론들은 꿈을 편집증처럼 짜 맞추고, 둘째 이론들은 치매나 아멘티아를 본으로 삼아 꿈을 만든다고 말할 수 있겠다.

수면으로 마비된 심리적 활동의 한 조각만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이론은 의학 저술가들 사이에서도 학계에서도 단연 가장 사랑받는다. 꿈 해석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널리 있다고 전제할 수 있는 한, 이 이론을 지배적인 꿈 이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이론이 모든 꿈 해석을 위협하는 가장 험한 암초, 곧 꿈에 담긴 대조 가운데 하나에 부딪혀 난파하는 일을 얼마나 손쉽게 비켜 가는지는 강조해 둘 만하다. 이 이론은 꿈을 부분적 각성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또는 헤르바르트의 『심리학』이 꿈을 두고 말하듯 「점진적이고 부분적이며 동시에 몹시 변칙적인 깨어남」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점점 더 깨어나 마침내 완전히 깨어나기에 이르는 일련의 상태를 따라감으로써, 꿈의 부조리에서 드러나는 열등한 활동에서부터 정신 활동이 온전히 집중된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계열을 포괄해 낸다.

심리학적 표현 방식을 빼놓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더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꿈 이론이 빈츠[4]의 논의(43쪽)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이 [마비] 상태는 이른 아침 시간이 되면 차츰 끝나 간다. 뇌의 단백질 속에 쌓인 피로 물질이 차츰 줄어든다. 피로 물질은 차츰 분해되거나, 쉼 없이 흐르는 혈액 순환에 실려 나간다. 여기저기서 몇몇 세포 덩어리가 깨어난 것으로 구별되지만, 그 둘레에서는 모든 것이 아직 무감각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제 흐릿한 우리 의식 앞에 개별 집단의 고립된 작업이 나타난다. 이 의식은 연상을 다스리는 뇌의 다른 부분의 통제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영상은 대개 가까운 과거의 객관적 인상에 들어맞지만, 서로 거칠고 불규칙하게 맞물린다. 풀려나는 뇌세포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꿈의 비합리성은 점점 줄어든다.」

꿈을 불완전한 부분적 각성 상태로 보는 견해, 또는 그 영향의 흔적은 근대의 생리학자와 철학자 누구에게서나 틀림없이 찾아볼 수 있다. 이 견해를 가장 완전하게 대변하는 사람은 모리[48]다. 이 저자는 깨어 있음과 잠들어 있음을 해부학적 부위별로 머릿속에 그리는 듯이 보일 때가 많다. 어쨌든 그에게는 해부학적 영역 하나하나가 특정한 심리적 기능과 이어져 있는 듯하다. 여기서는 다만, 부분 각성설이 확증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에는 할 일이 많이 남으리라는 것만 말해 둔다.

이렇게 꿈 생활을 보는 견해에서 꿈의 기능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꿈의 위상과 중요성에 대한 평가는 빈츠의 다음 말(357쪽)에 일관되게 표명되어 있다. 「보다시피 모든 사실은 꿈을, 어느 경우에나 쓸모없고 많은 경우 병적이기까지 한 신체적 과정으로 규정하라고 우리를 몰아붙인다.」

꿈에 대해 쓰는 「신체적」이라는 말은 이 저자 덕분에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이 말은 한 방향만 가리키지 않는다. 먼저 이 말은 꿈의 원인론을 가리킨다. 독물을 투여해 실험적으로 꿈을 만들어 내는 연구를 한 빈츠에게는 이 원인론이 특히 분명했다. 되도록 꿈의 발동을 오로지 신체적 기원에 돌리는 것은 분명 이런 종류의 꿈 이론에 걸맞은 일이다. 이것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말하면 이렇다. 자극을 치워 스스로 잠든 뒤에는 아침까지 꿈을 꿀 필요도 계기도 없을 것이다. 아침이 되면 밀려드는 자극으로 차츰 깨어나는데, 그 과정이 꿈꾸기라는 현상에 비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잠을 자극 없이 지켜 낼 수가 없다. 메피스토가 생명의 싹을 두고 투덜거리듯, 자극은 사방에서 잠든 사람에게 닿는다.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심지어 깨어 있을 때에는 한 번도 신경 쓰이게 하지 않는 몸의 어떤 부위에서도 닿는다. 그래서 잠은 방해를 받는다. 정신은 이번에는 이 사소한 일에, 다음에는 저 사소한 일에 깨어나, 깨어난 부분으로 한동안 일하다가 다시 잠들 수 있게 되면 반가워한다. 꿈은 잠을 방해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물론 순전히 쓸데없는 반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신 기관의 활동인 꿈을 신체적 과정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꿈에 심리적 과정이라는 품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의 열 손가락이 악기 건반 위를 내달리는 것」이라는 아주 오래된 비유를 꿈에 적용한 것이야말로, 정밀 과학의 대표자들이 꿈 활동을 어떻게 평가해 왔는지를 아마 가장 잘 보여 줄 것이다. 이런 뜻에서 꿈은 도무지 번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음악을 모르는 연주자의 열 손가락이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부분 각성설은 일찍부터 반론을 피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부르다흐[8]는 1830년에 이렇게 말한다. 「꿈을 부분적 각성이라고 말한다면, 첫째로 그것으로는 깨어 있는 상태도 잠든 상태도 설명되지 않는다. 둘째로 그 말은, 꿈속에서 정신의 어떤 힘은 활동하고 다른 힘은 쉬고 있다는 것 이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불균등은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483쪽).

꿈을 「신체적」 과정으로 보는 기존의 꿈 이론 가운데에는, 1866년 로베르트[55]가 처음 내놓은 매우 흥미로운 꿈 견해가 하나 있다. 꿈에 기능 또는 유용한 목적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견해다. 로베르트는 이 이론의 토대로, 우리가 꿈 재료를 살펴보면서 이미 논의한 두 가지 사실을 관찰에서 가져온다(이 장 (나) 참조). 그 사실이란, 사람은 낮의 사소한 인상을 꿈꾸는 일이 매우 많고, 낮에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관심사를 꿈으로 가져가는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 로베르트는 오직 이것만이 옳다고 단언한다. 완전히 매듭지어진 일은 결코 꿈의 유발 요인이 되지 않으며, 마음속에 미완으로 남아 있거나 마음을 스치듯 건드린 일만이 꿈을 유발한다는 것이다(11쪽). 「우리가 대개 자기 꿈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꿈의 원인이 꿈꾼 사람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전날의 감각 인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상이 꿈에 이르는 조건은, 그 인상이 처리 도중에 방해를 받았거나, 너무 사소해서 그런 처리를 요구할 자격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로베르트는 꿈을 「그 반응이 심리적으로 나타나면서 인식에 이르게 된 신체적 배설 과정」으로 파악한다. 꿈은 싹에서 잘린 생각들의 배설이다. 「꿈꾸는 능력을 빼앗긴 사람은 틀림없이 머지않아 정신의 균형을 잃을 것이다. 끝맺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수많은 생각과 피상적인 인상이 그의 뇌에 쌓이고, 그 압력에 눌려 완성된 전체로서 기억에 통합되어야 할 것이 모조리 짓눌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짐을 너무 많이 진 뇌의 안전판 구실을 한다. 꿈에는 치유하고 짐을 덜어 주는 성질이 있다(32쪽).

꿈속의 표현이 어떻게 정신의 짐을 덜어 줄 수 있느냐고 로베르트에게 묻는다면 잘못일 것이다. 이 저자는 꿈 재료의 저 두 가지 특성에서, 잠자는 동안 쓸모없는 인상을 그렇게 내다 버리는 일이 신체적 과정으로 이루어지며, 꿈꾸는 것은 특별한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 그런 배설에 대해 우리가 얻는 앎일 뿐이라고 결론지은 듯하다. 물론 잠자는 동안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이 배설만은 아니다. 로베르트 자신도, 낮의 자극이 처리되기도 하며 「마음속에 놓인 소화되지 않은 생각 재료 가운데 배설되지 못한 것은 상상력에서 빌려 온 생각의 실로 하나의 완성된 전체로 엮이고, 그렇게 해서 무해한 공상 영상으로 기억에 편입된다」고 덧붙인다(23쪽).

그러나 로베르트가 지배적인 이론과 가장 노골적으로 맞서는 것은 꿈의 원천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다. 기존 이론에 따르면 외부와 내부의 감각 자극이 거듭 정신을 깨우지 않는다면 꿈은 없을 것이지만, 로베르트에 따르면 꿈을 꾸게 하는 충동은 정신 자체에 있다. 그 충동은 방출을 요구하는 과잉 부하에 있다. 그리고 신체 상태에 달린 꿈의 결정 원인은 부차적인 지위에 머물며, 깨어 있는 의식에서 가져온 꿈 형성의 재료가 전혀 없는 정신에서는 꿈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할 때, 로베르트는 완벽하게 일관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다만 정신의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공상 영상이 신경 자극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48쪽). 그러므로 로베르트에 따르면 꿈은 신체적 요소에 그렇게까지 의존하지는 않는다. 물론 꿈은 심리적 과정이 아니며, 깨어 있는 상태의 심리적 과정 가운데 들어설 자리도 없다. 꿈은 정신 활동을 맡은 장치 안에서 밤에 일어나는 신체적 과정이며,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있다. 곧 이 장치를 과로에서 지키는 것, 비유를 바꾸어 말하면 정신을 청소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저자 이브 들라주[15]는 꿈 재료를 고르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꿈의 같은 특징 위에 자기 이론을 세운다. 같은 사실을 조금만 달리 파악해도 최종 결과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보면 배울 점이 많다.

들라주는 매우 아끼던 사람을 여읜 뒤, 낮 동안 우리를 골똘히 사로잡는 일은 꿈에 나오지 않거나, 낮의 다른 관심사에 가려진 뒤에야 비로소 꿈에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을 자기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해 보니 이런 사정이 보편적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혼부부의 꿈에 대해서도 들라주는 이런 종류의 멋진 관찰을 내놓는다. 일반적으로 들어맞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말이다. 「S’ils ont été fortement épris, presque jamais ils n’ont rêve l’un de l’autre avant le mariage ou pendant la lune de miel; et s’ils ont rêve d’amour c’est pour être infidèles avec quelque personne indifférente ou odieuse.」〔두 사람이 서로 몹시 사랑했다면, 결혼 전에도 신혼 기간에도 서로를 꿈꾼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사랑의 꿈을 꾸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나 밉살스러운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꿈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꿈꾸는가? 들라주는 우리 꿈에 나오는 재료가 앞선 며칠과 그 이전 시기의 인상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과 잔재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본다. 우리 꿈에 나타나는 모든 것, 처음에는 꿈 생활의 창조물로 여기고 싶어지는 것도 더 철저하게 조사해 보면 알아보지 못한 재생, 곧 「souvenir inconscient」〔무의식적 기억〕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표상 재료에는 공통된 성격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보다 감각을 더 세게 건드렸을 인상, 또는 나타나자마자 곧 주의가 딴 데로 돌려진 인상에서 나온다. 인상이 덜 의식되었을수록, 그러면서도 강할수록 다음 꿈에서 한몫을 할 가망이 커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로베르트[55]가 강조한 것과 같은 두 부류의 인상, 곧 사소한 인상과 매듭지어지지 않은 인상이다. 그러나 들라주는 이 인상들이 꿈의 소재가 되는 것은 사소해서가 아니라 매듭지어지지 않아서라고 가정함으로써 둘의 연관을 바꾸어 놓는다. 사소한 인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히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사소한 인상 역시 새 인상이라는 본성상 「autant de ressorts tendus」〔그만큼의 팽팽히 당겨진 용수철〕이며, 잠자는 동안 풀려나게 된다. 약하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인상보다 꿈에서 한 역할을 맡을 자격이 더 큰 것은, 처리 도중에 우연히 붙들려 있거나 의도적으로 억압된 강한 인상이다. 낮 동안 제지나 억제로 쌓인 심리적 에너지가 밤에는 꿈의 원동력이 된다.

아쉽게도 들라주는 생각의 흐름을 여기서 멈춘다. 그는 꿈속의 독자적인 심리적 활동에 아주 작은 몫밖에 인정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의 꿈 이론은 뇌의 부분 수면이라는 지배적인 학설로 되돌아간다. 「En somme le rêve est le produit de la pensée errante, sans but et sans direction, se fixant successivement sur les souvenirs, qui ont gardé assez d’intensité pour se placer sur sa route et l’arrêter au passage, établissant entre eux un lien tantôt faible et indécis, tantôt plus fort et plus serré, selon que l’activité actuelle du cerveau est plus ou moins abolie par le sommeil.」〔요컨대 꿈은 목적도 방향도 없이 떠도는 생각의 산물이다. 그 생각은 제 길 위에 자리 잡고 지나가는 자신을 붙들 만큼 강도를 간직한 기억들에 차례로 머물며, 뇌의 현재 활동이 잠으로 얼마나 없어졌느냐에 따라 그 기억들 사이에 때로는 약하고 모호한, 때로는 더 강하고 촘촘한 연결을 맺는다.〕

셋째 무리에는, 꿈꾸는 정신에 깨어 있을 때에는 전혀 해낼 수 없거나 불완전하게밖에 해낼 수 없는 특별한 심리적 활동을 할 능력과 성향이 있다고 보는 꿈 이론들을 넣을 수 있다. 이 능력이 활동하면 대개 꿈의 유용한 기능이 생겨난다. 옛 심리학 저자들이 꿈에 부여한 품위는 주로 이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 대신 부르다흐[8]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그에 따르면 꿈은 「개체성의 힘에 제한받지 않고, 자기의식에 방해받지 않으며, 자기 결정에 이끌리지 않는 정신의 자연스러운 활동이자, 자유로운 유희에 몸을 맡긴 감각적 중심점의 생명 상태다」(486쪽).

부르다흐를 비롯한 이들은 자기 힘을 자유롭게 쓰며 한껏 즐기는 이 상태를, 정신이 원기를 되찾고 낮일을 위해 새 힘을 얻는 상태, 이를테면 휴가 같은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부르다흐는 시인 노발리스가 꿈의 위력을 찬미한 멋진 말을 공감하며 인용한다. 「꿈은 삶의 규칙성과 평범함을 막아 주는 방벽이며, 묶여 있던 상상력의 자유로운 휴식이다. 꿈속에서 상상력은 삶의 온갖 영상을 뒤섞고, 어른들의 끝없는 진지함을 즐거운 아이들 놀이로 끊어 놓는다. 꿈이 없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더 일찍 늙을 것이다. 그러니 꿈은 어쩌면 위에서 곧바로 내려온 선물은 아니더라도, 무덤을 향한 순례길의 즐거운 과업이요 다정한 길동무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원기를 돋우고 병을 고치는 꿈의 활동은 푸르키녜[53]가 더욱 인상 깊게 그려 낸다. 「특히 생산적인 꿈이 이런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그런 꿈은 낮의 일과 아무 관련이 없는 상상의 가벼운 유희다. 정신은 깨어 있는 삶의 긴장을 이어 가려 하지 않고, 그것을 풀고 거기서 회복하려 한다. 정신은 무엇보다 깨어 있는 상태와 반대되는 상태를 만들어 낸다. 슬픔은 기쁨으로, 근심은 희망과 기분을 밝게 돌려 주는 영상으로, 미움은 사랑과 다정함으로, 두려움은 용기와 자신감으로 고친다. 의심은 확신과 굳은 믿음으로, 헛된 기대는 실현으로 달랜다. 낮이 줄곧 벌려 놓는 마음의 수많은 상처를, 잠은 덮어 주고 새로운 흥분에서 지켜 줌으로써 낫게 한다. 시간의 치유 효과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바탕을 둔다.」 잠이 정신생활에 이롭다는 것은 우리 모두 느끼는 바이며, 대중 의식의 막연한 짐작은 꿈은 잠이 제 혜택을 나누어 주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결코 놓지 않는 듯하다.

꿈을 잠든 상태에서만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는 정신의 특별한 활동으로 설명하려 한 시도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멀리 나아간 것은 1861년 셰르너[58]가 내놓은 것이다. 셰르너의 책은 무겁고 과장된 문체로 쓰였고, 주제에 대한 거의 도취한 열광에 들떠 있어서 우리를 함께 휩쓸어 가지 못하면 도리어 밀어낼 수밖에 없다. 그 책에는 분석을 가로막는 어려움이 워낙 많아서, 우리는 철학자 폴켈트[72]가 셰르너의 이론을 소개한 더 명료하고 짧은 서술에 기꺼이 기댄다. 「신비로운 덩어리들과 화려하고 장엄한 온갖 물결 속에서 참으로 심상치 않은 의미의 빛이 번쩍이며 뿜어져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철학자의 길이 더 밝아지지는 않는다.」 셰르너의 서술을 두고 그의 추종자 한 사람이 내린 비평이 이렇다.

셰르너는 정신이 제 능력을 조금도 줄이지 않고 꿈 생활로 가져간다고 보는 저자들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꿈에서 자아의 중심성과 자발적 에너지가 어떻게 힘을 잃는지, 이 탈중심화로 인식과 감정과 의지와 상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이 심리적 힘의 잔재에는 어떻게 참된 정신의 성격은 없이 기계 장치의 성질만 남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 대신 상상력이라 불리는 정신 활동이 모든 이성적 지배에서 풀려나 완전히 고삐가 풀린 채 꿈속에서 절대적인 주권에 오른다. 물론 상상력은 마지막 건축 자재를 깨어 있는 상태의 기억에서 가져오지만, 그것으로 깨어 있는 상태의 건물과는 낮과 밤만큼 다른 건물을 짓는다. 상상력은 꿈에서 재생할 뿐 아니라 생산하기도 한다. 상상력의 특성이 꿈 생활에 그 기이한 성격을 준다. 상상력은 한없는 것, 과장된 것, 엄청난 것을 좋아하지만, 걸림돌이 되는 사고 범주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더 큰 유연성과 민첩성과 새로운 즐거움을 얻는다. 상상력은 마음의 섬세한 정서적 자극과 격동하는 정동에 극도로 민감하며, 내면의 삶을 재빨리 바깥의 조형적 선명함으로 바꾸어 빚어낸다. 꿈의 상상력에는 관념의 언어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눈에 보이게 그려 내야 하고, 이제 관념이 강하게 작용하므로 그 표현 방식의 풍부함과 힘과 거대함으로 그려 낸다. 그래서 그 언어는 아무리 단순하다 해도 장황하고 거추장스럽고 무거워진다. 언어가 명료해지기가 특히 어려운 것은, 상상력이 대상을 그 자신의 영상으로 표현하기를 싫어하고, 대상에서 묘사하고 싶은 바로 그 계기만 표현할 수 있다면 낯선 영상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상력의 상징화 활동이다……. 게다가 꿈의 상상력이 대상을 세부까지 베끼지 않고 윤곽만, 그것도 아주 대략적으로만 베낀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 그림은 재기 넘치게 가볍고 우아해 보인다. 그러나 꿈의 상상력은 대상을 그저 표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안에서부터 떠밀려 대상에 꿈 자아를 많든 적든 섞어 넣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의 행위를 만들어 낸다. 예컨대 시각 꿈은 거리에 떨어진 금화를 그려 낸다. 꿈꾼 사람은 금화를 주워 들고 기뻐하며 가져간다.

셰르너에 따르면 꿈의 상상력이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재료는 주로, 낮에는 그토록 모호한 기관 감각 자극이다(이 장 (다) 참조). 그래서 셰르너의 공상적인 이론과, 분트를 비롯한 생리학자들의 어쩌면 지나치게 냉철한 이론은 다른 점에서는 정반대이면서도 꿈의 원천과 꿈을 일으키는 자극에 대한 가정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생리학적 이론에 따르면, 내부 신체 자극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그 자극에 맞는 어떤 표상이 깨어나는 것으로 끝나 버린다. 그 표상이 연상의 길을 따라 다른 표상을 불러 도움을 받고, 이 단계에서 심리적 과정의 사슬은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셰르너에 따르면 신체 자극은 심리적 힘에 재료를 대 줄 뿐이고, 심리적 힘은 그 재료를 제 공상적 의도에 복무하게 할 수 있다. 셰르너에게 꿈 형성은, 다른 이들의 견해에서 그것이 끝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꿈의 상상력이 신체 자극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 목적에 맞는다고 볼 수 없다. 상상력은 신체 자극을 가지고 애태우는 장난을 치며, 해당하는 꿈에서 자극을 낳은 기관이라는 원천을 어떤 조형적 상징 표현으로든 나타낸다. 게다가 셰르너는, 폴켈트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지만, 꿈의 상상력에는 유기체 전체를 나타내는 즐겨 쓰는 표현이 있다고 본다. 그 표현이 바로 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상력은 서술할 때 이 재료에만 매이지는 않는 듯하다. 거꾸로 집 여러 채를 한꺼번에 써서 기관 하나를 가리킬 수도 있다. 예컨대 창자의 흥분에는 아주 길게 줄지어 선 집들을 쓴다. 또 어떤 때는 집의 특정 부분이 실제로 몸의 특정 부분을 나타낸다. 예컨대 두통 꿈에서는 방의 천장이(꿈은 그 천장이 파충류 같은 징그러운 거미로 뒤덮여 있다고 본다) 머리를 나타낸다.

집의 상징 표현과는 전혀 상관없이, 꿈을 자극하는 이 신체 부위를 표현하는 데에는 알맞은 다른 대상이라면 무엇이든 쓰일 수 있다. 「그래서 숨 쉬는 허파는 가스가 윙윙거리며 타오르는 난로에서, 심장은 속이 빈 상자와 바구니에서, 방광은 둥글거나 자루 모양이거나 그저 속이 파인 물건에서 제 상징을 찾는다. 남성의 성적 흥분 꿈에서 꿈꾼 사람은 거리에서 클라리넷의 윗부분을, 그 옆에서 담뱃대의 같은 부분을, 또 그 옆에서 모피 한 조각을 발견한다. 클라리넷과 담뱃대는 남성 성기의 대략적인 모양을 나타내고, 모피는 음모를 나타낸다. 여성의 성적 꿈에서는 바싹 맞붙은 두 허벅지 사이의 비좁음이 집들로 둘러싸인 좁은 안뜰로, 질은 그 안뜰을 지나가는 아주 좁고 미끄럽고 부드러운 오솔길로 상징될 수 있는데, 꿈꾼 사람은 이를테면 어느 신사에게 편지를 전하려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폴켈트, 39쪽). 특히 주목할 것은, 이렇게 몸을 자극하는 꿈이 끝날 무렵이면 상상력이 이를테면 가면을 벗고, 자극하는 기관이나 그 기능을 숨김없이 드러내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를 자극하는 꿈」은 대개 꿈꾼 사람이 입에서 이를 하나 꺼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꿈의 상상력은 자극하는 기관의 모양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 기관에 담긴 물질을 상징화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그래서 예컨대 창자 흥분의 꿈은 우리를 진창길로 이끌고, 방광을 자극하는 꿈은 거품 이는 물로 이끈다. 또는 자극 자체와 그 흥분의 방식, 그리고 자극이 탐내는 대상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꿈 자아가 자기 상태의 상징화와 구체적으로 결합하기도 한다. 예컨대 통증 자극이 있을 때 우리가 사나운 개나 날뛰는 황소와 필사적으로 싸우거나, 성적인 꿈에서 꿈꾼 여자가 벌거벗은 남자에게 쫓기는 자신을 보는 경우가 그렇다. 공들여 꾸미느라 생길 수 있는 온갖 장황함을 제쳐 두면, 모든 꿈의 중심 동력으로 남는 것은 상징화하는 상상력의 활동이다. 그다음으로 폴켈트[72]는 섬세하고 열정적으로 쓴 책에서 이 상상력의 성격을 더 깊이 파고들고, 그렇게 알아낸 심리적 활동에 철학적 관념 체계 안의 자리를 정해 주려 했다. 그러나 그 체계는 철학적 사고방식을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미리 교육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이해하기 어렵다.

셰르너는 꿈속에서 상징화하는 상상력의 활동에 아무런 유용한 기능도 결부시키지 않는다. 꿈에서 정신은 제 손에 쥐어진 자극을 가지고 논다. 정신이 온당치 않게 논다고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우리에게, 셰르너의 꿈 이론이 자의적이며 모든 연구의 규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너무도 뻔한데, 그 이론을 이렇게 꼼꼼히 살펴서 무슨 쓸모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셰르너의 이론을 검토도 없이 물리치는 것은 너무 오만한 일이라고 말해 그런 거부를 미리 막아 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이론은 자기 꿈에 큰 주의를 기울였고 개인적으로도 모호한 심리적 사건을 추적하는 데 매우 잘 맞는 듯한 한 사람이, 자기 꿈에서 받은 인상 위에 세운 것이다. 게다가 이 이론이 다루는 대상은 수천 년 동안 인류에게 신비롭게 보였으면서도 내용과 연관이 풍부한 것이며, 엄격한 과학은 스스로 고백하듯 그 대상을 밝히는 데 세간의 정서와 정반대로 그 대상의 실질과 의의를 부정하려 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태지 못했다. 끝으로 솔직히 인정하자. 꿈을 밝히려는 우리의 시도에서도 공상적인 것은 피할 수 없는 듯하다. 공상적인 신경절 세포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빈츠[4]처럼 냉철하고 정밀한 연구자에게서 끌어와 이 절에 인용한 대목, 곧 깨어남의 여명이 대뇌의 잠든 세포 덩어리를 따라 번져 가는 모습을 그린 대목은, 공상성에서도 있을 법하지 않음에서도 셰르너의 해석 시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나는 셰르너의 해석 시도 밑에 무언가 실제적인 것이 깔려 있음을 보여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그것은 흐릿하게만 관찰되었고, 꿈 이론을 자처할 자격을 줄 만한 보편성도 지니지 못했지만 말이다. 당장은 셰르너의 꿈 이론이 의학적 이론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꿈 생활의 설명이 아직도 어떤 두 극단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아마 깨닫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