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꿈속의 윤리적 감정
나 자신의 꿈 연구를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해될 이유로, 나는 깨어 있는 삶의 도덕적 성향과 감정이 꿈속까지 미치는지, 미친다면 어디까지 미치는지 하는 부분 문제를 꿈의 심리학에서 떼어 놓았다. 다른 모든 심리적 능력에 관한 저자들의 서술에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모순이 여기서도 다시 눈에 띈다. 어떤 이들은 꿈이 도덕적 의무를 전혀 모른다고 단호히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이 꿈 생활에서도 그대로 남는다고 그만큼 단호히 주장한다.
밤마다 겪는 꿈의 경험을 떠올려 보기만 해도 첫째 주장이 옳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어 보인다. 예센[36]은 이렇게 말한다(553쪽). 「꿈속에서 사람이 더 나아지거나 더 덕스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꿈속에서는 양심이 입을 다무는 듯하다. 꿈에서는 동정을 느끼지 않으며, 도둑질과 살인과 암살 같은 가장 나쁜 범죄도 더없이 무심하게, 나중에 뉘우치지도 않고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라데슈토크[54](146쪽)는 이렇게 말한다. 「눈여겨볼 것은, 꿈속에서는 연상이 맺어지고 표상이 결합하되 숙고와 이성, 미적 취향과 도덕적 판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판단력은 극도로 약해지고, 윤리적 무관심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폴켈트[72](23쪽)는 이렇게 표현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꿈속의 성적 관계는 유난히 고삐가 풀려 있다. 꿈꾼 사람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파렴치하고 도덕적 감정과 판단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들, 심지어 가장 존경하는 이들까지도, 깨어 있을 때라면 생각 속에서조차 그들과 결부시키기를 부끄러워했을 행위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본다.」
꿈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성격대로 행동하고 말한다는 쇼펜하우어 같은 이들의 발언은 앞에서 든 말들과 가장 날카롭게 대조된다. R. P. 피셔1는, 주관적인 감정과 욕망, 또는 정동과 정념이 꿈 생활의 자의성 속에서 드러나며, 한 사람의 도덕적 특성이 그의 꿈에 비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하프너[32](25쪽): 「드문 예외를 빼면…… 덕 있는 사람은 꿈에서도 덕이 있을 것이다. 그는 유혹을 물리치고, 증오와 시기와 분노를 비롯한 온갖 악덕에 조금도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다. 반면 죄 많은 사람은 대개 깨어 있을 때 눈앞에 두는 영상을 꿈에서도 발견할 것이다.」
숄츠[59](36쪽): 「꿈속에는 진실이 있다. 오만으로 가리든 겸손으로 가리든 온갖 가면을 쓰고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을 알아본다……. 정직한 사람은 꿈에서도 명예롭지 못한 죄를 저지르지 않으며,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자기 본성에 낯선 무언가를 대하듯 그 일에 소스라친다. 황제의 목을 베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신하 하나를 처형하게 한 로마 황제는, 그런 꿈을 꾸는 자라면 깨어 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근거를 들어 자기 처사를 정당화했는데, 그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도무지 자리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우리는 의미심장하게도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파프2는 잘 알려진 속담을 바꾸어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 꾼 꿈을 내게 말해 보라. 그러면 네가 속으로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내가 이미 숱하게 인용한 힐데브란트[35]의 짧은 저작은, 내가 문헌에서 찾아낸 어느 것 못지않게 완결되고 생각이 풍부한 꿈 문제 연구로서, 꿈속의 도덕성 문제를 관심의 한가운데에 놓는다. 힐데브란트에게도 삶이 깨끗할수록 꿈도 깨끗하고, 삶이 더러울수록 꿈도 더럽다는 것은 엄격한 규칙이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은 꿈에서도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뻔한 계산 착오에도, 아무리 낭만적으로 학문을 뒤집어 놓은 것에도, 아무리 재치 있는 시대착오에도 기분이 상하거나 의심을 품지 않으면서도, 선과 악, 옳음과 그름, 덕과 악덕의 차이만은 놓치지 않는다. 낮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던 것이 잠자는 시간에 아무리 많이 사라진다 해도, 칸트의 정언 명령만은 떼어 낼 수 없는 길동무처럼 우리 발꿈치에 달라붙어 잠결에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인간 본성의 근본인 도덕적 본질이 너무나 단단히 뿌리박혀 있어서, 꿈속에서 상상력과 이성과 기억과 그 밖의 같은 급의 능력들이 휩쓸려 드는 만화경 같은 뒤흔들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설명할 수 있다」(45쪽 이하).
이 문제를 더 논의해 나가면서 우리는 두 무리의 저자 모두에게서 기묘한 왜곡과 비일관성을 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꿈속에서는 사람의 도덕적 인격이 허물어진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부도덕한 꿈은 더는 관심거리가 못 될 것이다. 그들은 꿈이 부조리하다는 데서 깨어 있을 때의 지적 생활이 보잘것없음을 증명하려는, 겉보기에 비슷한 시도를 물리쳤던 것과 똑같이 태연하게, 꿈꾼 사람에게 그 꿈의 책임을 지우고 꿈이 나쁘다는 데서 그의 본성에 악한 기질이 있다고 추론하려는 시도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정언 명령」이 꿈속까지 미친다고 보는 다른 쪽 사람들은 부도덕한 꿈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만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그들이 꾼 불미스러운 꿈 때문에 평소 굳게 지켜 온 자기 도덕성에 대한 평가를 저버리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얼마나 선한지 얼마나 악한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는 듯하고, 자기가 꾼 부도덕한 꿈의 기억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듯하다. 꿈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데서 이미 말한 대립 말고도, 두 무리의 저자는 모두 부도덕한 꿈이 어디서 생겨나는지 설명하려고 애쓰는데, 그 기원을 정신생활의 기능에서 찾느냐 신체적 원인으로 정신생활이 입는 손상에서 찾느냐에 따라 새로운 대립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사실이 절박하게 밀어붙이는 힘에 떠밀려, 꿈 생활의 책임을 주장하는 쪽도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쪽도 꿈의 부도덕성에 특별한 심리적 원천이 있다는 것만은 함께 인정하게 된다.
꿈속에서도 도덕성이 이어진다고 인정하는 이들도 모두 자기 꿈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만은 경계한다. 하프너[32]는 이렇게 말한다(24쪽). 「우리는 꿈에 책임이 없다. 우리의 삶이 진리와 실재성을 지니게 해 주는 유일한 토대가 우리의 생각에서 떨어져 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속에서 바라는 일도 꿈속에서 행하는 일도 있을 수 없고, 덕도 죄도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사람은 죄스러운 꿈을 간접적으로 불러오는 한에서는 그 꿈에 책임이 있다.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덕적 마음을 깨끗이 할 의무가 있으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더욱 그렇다.
꿈의 도덕적 내용에 대한 책임을 한편으로 물리치고 한편으로 인정하는 이 뒤섞인 태도를 힐데브란트는 훨씬 더 깊이 분석해 들어간다. 그는 꿈의 극적인 표현 방식, 가장 복잡한 숙고 과정을 아주 짧은 시간에 몰아넣는 일, 그리고 그 자신도 인정하는 꿈속 표상 요소의 가치 저하와 혼란을 꿈의 부도덕한 측면에 불리한 사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조목조목 밝힌다. 그런데도 그는 더없이 진지한 숙고에 떠밀려, 허물과 꿈속의 죄에 대한 책임을 모두 그냥 부인하고 싶어진다고 고백한다.
(49쪽): 「어떤 부당한 비난, 특히 우리의 의도와 신념에 관계된 비난을 아주 단호하게 물리치고 싶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표현을 쓴다. 물론 이 말로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꿈의 영역이야말로 우리가 자기 생각에 책임을 져야 할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먼 곳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곳의 생각은 우리의 참된 존재와 느슨하게, 앞뒤 없이 이어져 있을 뿐이어서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여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조차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굳이 부정해야겠다고 느끼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해명이 그곳까지 미치지 않으면 완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동시에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여기서 비록 자기도 모르게나마 진실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52쪽): 「꿈에 떠오른 생각치고, 그 첫 동기가 깨어 있을 때 이미 어떤 소원이나 욕망이나 충동으로 마음을 스쳐 가지 않은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본래의 충동에 대해서는, 꿈이 그것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꿈은 그것을 흉내 내고 늘려 놓았을 뿐이며, 우리 안에서 찾아낸 역사적 재료 한 조각을 극의 형식으로 가공했을 뿐이다. 꿈은 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는 사도의 말을 극으로 옮겨 보일 뿐이다. 그리고 깨어나서 자신의 도덕적 힘을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타락한 꿈이 대담하게 지어 올린 건축물을 보고 웃을 수도 있지만, 그 건축물을 빚어낸 본래의 재료에는 우스운 구석이 조금도 없다. 사람은 꿈꾼 사람의 잘못에 대해, 그 전액은 아니더라도 일정한 비율만큼은 책임을 느낀다. 「반박하기 어려운 이런 뜻에서 우리는,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온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한다. 꿈에서 저지른 죄는 하나하나가 적어도 희미한 최소한의 죄책을 함께 가져온다는 확신을 우리는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힐데브란트는 꿈의 부도덕성이 생겨나는 원천을, 낮 동안 유혹하는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스쳐 가는 악한 충동의 싹과 기미에서 찾으며, 이 부도덕한 요소도 인격의 도덕적 평가에 넣어 셈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알다시피 어느 시대에나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자신은 악한 죄인이라고 탄식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 같은 생각, 이 생각에 대한 이 같은 평가였다.
이런 대조되는 표상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것도 윤리 영역이 아닌 곳에서도 두루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 표상들에 대한 판단이 때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슈피타[64]에게서 우리는 이와 관련된 A. 첼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발견한다(에르슈와 그루버가 엮은 『학문 일반 백과사전(Allgemeinen Encyklopädie der Wissenschaften)』의 「광기(Irre)」 항목, 144쪽). 「정신이 늘 충분한 힘을 지녀서, 평소의 맑은 생각의 흐름을 거스르는 비본질적인 표상뿐 아니라 아주 터무니없는 표상에도 방해받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짜여 있는 경우는 드물다. 실로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도, 꿈처럼 어지럽히고 괴롭히는 이 표상의 무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사색과 가장 거룩하고 진지한 정신 작업을 망쳐 놓는다고 한탄할 까닭이 있었다.」
이 대조 표상이 심리학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힐데브란트의 또 다른 관찰이 더 밝게 비추어 준다. 꿈은 때로 깨어 있을 때에는 대개 닫혀 있는 우리 존재의 깊고 가장 내밀한 곳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55쪽). 칸트도 『인간학』에서 같은 인식을 드러낸다. 꿈은 우리에게 숨은 성향을 드러내 보이고, 우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다른 교육을 받았더라면 무엇이 되었을지를 보여 주려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데슈토크[54](84쪽)는 꿈이 흔히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드러내 보일 뿐이며, 그래서 우리가 꿈을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라고 부당하게 욕한다고 말한다. 우리 의식에 낯선 충동이 나타나는 것은, 깨어 있을 때에는 없거나 보잘것없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 다른 표상 재료를 꿈이 마음대로 다루는, 이미 익숙한 그 방식과 비슷한 일일 뿐이다. 이 점을 일깨워 준 것은 베니니[3] 같은 이들의 관찰이다. 베니니는 이렇게 말한다. 「Certe nostre inclinazione che si credevano soffocate a spente da un pezzo, si ridestano; passioni vecchie e sepolte rivivono; cose e persone a cui non pensiamo mai, ci vengono dinanzi」〔오래전에 숨이 막혀 꺼져 버린 줄 알았던 우리의 어떤 성향이 다시 깨어나고, 묻혀 있던 옛 정념이 되살아나며,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사물과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149쪽). 폴켈트[72]도 비슷하게 말한다.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리 의식에 들어왔고 어쩌면 한 번도 망각에서 불려 나온 적이 없는 표상조차, 꿈에서 제가 마음속에 있음을 알려 오는 일이 흔하다」(105쪽). 끝으로, 슐라이어마허[61]에 따르면 잠들어 가는 상태에는 원치 않는 표상(영상)이 나타난다는 것도 여기서 말해 두어 무방할 것이다.
부도덕한 꿈에서도 부조리한 꿈에서도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 표상 재료 전체를 「원치 않는 표상」이라는 이름 아래 묶을 수 있다. 중요한 차이는 하나뿐이다. 도덕 영역의 원치 않는 표상은 우리의 다른 감정과 대립하는 반면, 다른 것들은 그저 낯설게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더 깊이 파고드는 인식으로 이 차이를 없앨 수 있게 해 줄 만한 일은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꿈속에 원치 않는 표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대조되는 윤리적 충동이 이렇게 밤에 드러나는 데서, 깨어 있는 정신과 꿈꾸는 정신의 심리학을 위해 어떤 추론을 끌어낼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견해 차이와, 또 한 번 달라진 저자들의 편 가르기를 보게 된다. 힐데브란트와 그의 기본 견해를 대변하는 다른 이들이 따라온 생각의 흐름은 이렇게밖에는 이어 갈 수 없다. 곧 부도덕한 충동에는 깨어 있을 때에도 어떤 힘이 있고 다만 그 힘이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제지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 그리고 잠자는 동안에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데 바로 그것이 제지로 작용하여 우리가 그런 충동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막아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은 인간의 본성을, 그 전부는 아니더라도 참모습을 보여 주며, 숨은 정신생활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다. 힐데브란트가 꿈에 영혼의 도덕적 황폐를 일깨워 주는 경고자의 역할을 맡길 수 있는 것도 오직 이런 가정 위에서다. 의사들이 보기에 꿈이 아직 눈에 띄지 않은 몸의 병을 알려 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슈피타[64] 역시 이와 다른 견해에 이끌렸을 리 없다. 그는 예컨대 사춘기에 정신으로 밀려드는 흥분의 흐름을 언급하면서, 깨어 있는 동안 엄격하게 덕스러운 삶을 살고, 죄스러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억제하려고 애쓰고, 그 생각이 무르익어 행동이 되지 못하게 막았다면 꿈꾼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라며 그를 위로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원치 않는」 표상을 낮 동안 「억제된」 표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나타나는 데서 실제의 심리적 현상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저자들을 따른다면 이 마지막 추론을 내릴 권리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예센[36]에게 원치 않는 표상은 꿈에서도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 열병이나 그 밖의 섬망에서도, 그저 「휴식에 들어간 의지 활동의 성격, 그리고 내적 충동이 불러일으킨 영상과 표상의 다소 기계적인 진행이라는 성격」을 띨 뿐이다(360쪽). 부도덕한 꿈이 꿈꾼 사람의 정신생활에 대해 증명하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든 문제의 표상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의 심리적 충동이 아니다. 또 다른 저자 모리[48]를 읽으면, 그 역시 꿈의 상태에 심리적 활동을 목적 없이 파괴하는 대신 그 구성 요소로 나누는 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는 도덕의 경계를 넘어서는 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Ce sont nos penchants qui parlent et qui nous font agir, sans que la conscience nous retienne, bien que parfois elle nous avertisse. J’ai mes défauts et mes penchants vicieux; à l’état de veille, je tache de lutter contre eux, et il m’arrive assez souvent de n’y pas succomber. Mais dans mes songes j’y succombe toujours ou pour mieux dire j’agis, par leur impulsion, sans crainte et sans remords……. Évidemment les visions qui se déroulent devant ma pensée et qui constituent le rêve, me sont suggérées par les incitations que je ressens et que ma volonté absente ne cherche pas à refouler」〔말하고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성향이다. 양심은 때로 경고는 할지언정 우리를 붙들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결점과 악한 성향이 있다. 깨어 있을 때 나는 그것과 싸우려고 애쓰고, 꽤 자주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에서는 언제나 굴복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움도 뉘우침도 없이 그 충동에 떠밀려 행동한다……. 분명 내 생각 앞에 펼쳐져 꿈을 이루는 환영은, 내가 느끼되 자리를 비운 내 의지가 물리치려 하지 않는 부추김이 내게 불어넣은 것이다〕(113쪽).
꿈에는 꿈꾼 사람에게 실제로 있으면서도 억압(repressed)되었거나 감추어진 부도덕한 성향을 드러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모리의 다음 말(115쪽)보다 더 힘주어 자기 의견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n rêve l’homme se révèle donc tout entier à soi-même dans sa nudité et sa misère natives. Dès qu’il suspend l’exercice de sa volonté, il dévient le jouet de toutes les passions contre lesquelles, à l’état de veille, la conscience, le sentiment d’honneur, la crainte nous défendent.」〔그러므로 꿈에서 인간은 타고난 벌거숭이 모습과 비참함 그대로 자기 앞에 온전히 드러난다. 의지의 행사를 멈추자마자 인간은 온갖 정념의 노리개가 되는데, 깨어 있을 때에는 양심과 명예심과 두려움이 그 정념에서 우리를 지켜 준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인상적인 말도 한다(462쪽). 「Dans le rêve, c’est surtout l’homme instinctif que se révèle……. L’homme revient pour ainsi dire à l’état de nature quand il rêve; mais moins les idées acquises ont pénétré dans son esprit, plus les penchants en désaccord avec elles conservent encore sur lui d’influence dans le rêve.」〔꿈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 본능적인 인간이다……. 인간은 꿈꿀 때 이를테면 자연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나 습득한 관념이 그의 정신에 덜 스며들었을수록, 그 관념과 어긋나는 성향이 꿈속에서 여전히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어서 그는 한 예로, 자신이 글에서 가장 격렬하게 공격하는 바로 그 미신의 희생자로 꿈에 나타나는 일이 잦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리는 이 모든 재치 있는 관찰이 꿈 생활의 심리학적 인식에 대해 지닐 수 있는 가치를 스스로 깎아 버린다. 자기가 그토록 정확하게 관찰한 현상에서, 그가 보기에 꿈 생활을 지배하는 「automatisme psychologique」〔심리적 자동성〕의 증거를 조금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자동성을 심리적 활동과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슈트리커[77]의 의식 연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꿈이 망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꿈에서 강도를 두려워한다면, 강도는 물론 상상의 것이지만 두려움은 실제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꿈속에서 생겨나는 정동은 나머지 꿈 내용에 내리는 판단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고, 꿈속의 심리적 과정 가운데 어느 부분이 실제의 것일 수 있는가, 즉 그 가운데 어느 부분이 깨어 있는 상태의 심리적 과정 안에 편입되기를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