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꿈의 심리학적 특성
꿈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때 우리는 꿈이 우리 자신의 심리 활동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런데도 다 만들어진 꿈은 우리에게 어딘가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우리가 지어낸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압박을 우리는 거의 느끼지 않아서, 「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내게 꿈이 나타났다」고도 말할 수 있다. 꿈의 이 「심리적 낯섦」은 어디에서 오는가? 꿈의 원천에 관한 앞의 논의에 따르면, 그것은 꿈 내용에 이르는 재료에 달려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 재료는 대부분 꿈 생활과 깨어 있는 생활에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꿈에서 이런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심리 과정의 변화가 아닌지 물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꿈의 심리학적 특성을 가려내 보려 할 수 있다.
G. Th. 페히너[25]는 『정신물리학 원론』(520쪽, 제2부)의 몇몇 소견에서, 꿈과 깨어 있는 생활의 본질적 차이를 누구보다 강하게 강조하고 이 차이를 누구보다 멀리 나아가는 결론에 이용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의식적 정신생활이 주 문턱 아래로 그저 가라앉는 것」도, 외부 세계의 영향에서 주의가 딴 데로 돌려지는 것도, 깨어 있는 생활과 비교한 꿈 생활의 특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꿈의 무대가 깨어 있을 때의 표상 생활과는 다른 곳에 마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정신물리적 활동의 무대가 잠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똑같다면, 내 생각에 꿈은 더 낮은 강도로 유지되는, 깨어 있을 때의 표상 활동의 연장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게다가 그 재료와 형식도 깨어 있을 때의 표상 활동과 함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다르다.」
페히너가 정말 무엇을 뜻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내가 아는 한 그가 이 말로 실마리를 보여 준 그 길을 더 따라가 본 사람도 없다. 생리학적인 뇌 기능 국재화(局在化)의 뜻으로, 또는 대뇌 피질의 조직학적 구획과 관련지어 이 말을 해부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여러 심급(instance)이 앞뒤로 차례차례 놓여 짜인 심리 장치(psychic apparatus)에 적용할 수 있다면, 재치 있고 알찬 생각임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다른 저자들은 꿈 생활의 뚜렷한 심리학적 특성 가운데 이런저런 것을 부각하는 데 만족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더 멀리 나아가는 설명 시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꿈 생활의 주요 특성 가운데 하나는 잠드는 상태에서 이미 나타나며 그것을 잠을 불러들이는 현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슐라이어마허[61](351쪽)에 따르면, 깨어 있는 상태의 특징은 심리 활동이 영상보다는 관념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그러나 꿈은 영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잠이 다가오면 의지적 활동이 어려워지는 딱 그만큼 비의지적 활동이 나타나며, 이 비의지적 활동은 모두 영상의 부류에 속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우리가 의도해서 바란다고 느끼는 표상 작업을 해낼 수 없게 되는 것, 그리고 이런 흐트러짐과 어김없이 결부되어 영상이 나타나는 것, 이 두 가지는 꿈에서 늘 변함없는 성질이며, 꿈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할 때 꿈 생활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 영상들, 곧 입면 환각에 관해서는 그 내용마저 꿈 영상과 똑같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아냈다.
그러므로 꿈은 주로 시각 영상으로 생각하지만, 오로지 시각 영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청각 영상도 쓰고, 그보다 덜하지만 다른 감각의 인상도 쓴다.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생각되거나 상상되는 것도 많다(아마 낱말 표상의 잔재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그래도 꿈에 특징적인 것은 내용 가운데 영상처럼 작용하는 요소, 곧 기억 표상보다 지각을 더 닮은 요소뿐이다. 정신과 의사라면 누구나 아는 환각의 본성에 관한 온갖 논의는 제쳐 두고, 우리는 사정에 밝은 모든 저자와 함께 꿈은 환각을 일으킨다고, 다시 말해 생각을 환각으로 대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시각 표상과 청각 표상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 잠들 무렵 떠올리던 일련의 소리에 대한 기억이 잠에 빠져드는 사이에 같은 선율의 환각으로 바뀌었다가, 깨어나면 질적으로 달리 형성된 더 부드러운 기억 표상에 다시 자리를 내주며, 이런 일이 선잠에 빠져들 때마다 거듭 번갈아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관찰되었다.
표상이 환각으로 바뀌는 것만이, 꿈이 그에 대응할지도 모르는 깨어 있을 때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점은 아니다. 꿈은 이 영상들로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 내고, 무언가를 현재의 일로 펼쳐 보이며, 슈피타[64](145쪽)의 말대로 관념을 극화한다.1 그러나 꿈 생활의 이런 측면이 온전히 특징지어지려면, 꿈꾸는 동안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체험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점, 곧 환각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인다는 점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대개는 그렇다는 말이고, 예외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다. 이것은 체험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한 것, 곧 꿈꾼 것일 뿐이라는 비판은 깨어나서야 비로소 떠오른다. 이 특성이 잠잘 때 꾸는 진짜 꿈과, 결코 현실과 혼동되지 않는 백일몽을 가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꿈 생활의 특징을 부르다흐[8]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했다(476쪽). 「꿈의 특징으로 다음을 덧붙일 수 있다. (ㄱ) 우리 정신의 주관적 활동이 객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지각 능력이 상상력의 산물을 마치 감각 활동인 것처럼 지각하기 때문이다…… (ㄴ) 잠은 자기 통제를 없애 버린다. 그러므로 잠들려면 어느 정도의 수동성이 필요하다……. 잠결의 영상은 자기 통제가 느슨해진 데서 생긴다.」
이제 꿈 환각을 정신이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까닭을 설명해 보아야 한다. 이 환각은 어떤 의지적 활동이 멈춘 뒤에야 나타날 수 있다. 슈트륌펠[66]은 이 점에서 정신이 올바르게, 제 메커니즘에 맞게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꿈의 요소는 결코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 감각을 거쳐 나타나는 체험과 비슷하게 정신이 실제로 겪는 참된 체험이다(34쪽). 깨어 있을 때 정신은 낱말 영상과 언어로 표상하고 생각하지만, 꿈에서는 실제로 손에 잡힐 듯한 영상으로 표상하고 생각한다(35쪽). 게다가 꿈은 깨어 있을 때와 똑같이 감각과 영상을 외부 공간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공간 의식을 드러낸다(36쪽). 그러므로 꿈속의 정신은 자기 영상과 지각에 대해 깨어 있을 때와 같은 관계에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43쪽). 그런데도 정신이 이 때문에 길을 잃는다면, 그것은 안에서 오는 감각 지각과 밖에서 오는 감각 지각을 가려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비판이 잠 속에서는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기 영상의 객관적 실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시험에 그 영상들을 부칠 수 없다. 나아가 마음대로 바꿔 넣을 수 있는 영상과 자유로운 선택이 끼어들 수 없는 영상을 구별하는 일도 소홀히 한다. 정신이 오류를 범하는 것은 자기 내용에 인과 법칙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58쪽). 요컨대 정신이 외부 세계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데에, 주관적인 꿈의 세계를 믿는 까닭 또한 들어 있다.
델뵈프[16]는 조금 다른 논증을 거쳐 같은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꿈 영상을 현실로 믿는 것은, 잠 속에서는 꿈 영상과 견주어 볼 다른 인상이 없기 때문이며 외부 세계와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환각을 참이라고 믿는 것은 어쩌면 잠 속에서 시험을 해 볼 수 없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꿈은 이 모든 시험을 거치게 하고도 우리를 속일 수 있다. 꿈에서 보는 장미를 만질 수 있다고 믿게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델뵈프에 따르면, 무언가가 꿈인지 의식된 현실인지를 보여 주는 타당한 기준은 깨어난다는 사실 말고는 없으며, 그나마도 실제로 대개 그렇다는 정도의 기준일 뿐이다. 「깨어나서 내가 옷을 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나는 잠들 때부터 깨어날 때까지 겪은 모든 것을 헛것이라고 판정한다」(84쪽). 「잠자는 동안 내가 꿈 영상을 실재한다고 여긴 것은, 잠재울 수 없는 정신의 습관, 곧 내 자아와 맞세울 수 있는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습관 때문이다.」2
외부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의 표지로 여겨지는 만큼, 잠든 정신과 외부 세계의 관계를 밝혀 주는 동시에 위의 추론을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막아 줄, 옛 학자 부르다흐[8]의 재치 있는 관찰 몇 가지를 소개해 둘 만하다. 부르다흐는 말한다. 「잠은 정신이 감각 자극에 흥분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생긴다…… 그러나 잠의 조건은 감각 자극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 자극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어떤 감각 인상은 정신을 가라앉히는 데 쓰이는 한 오히려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방앗간 주인은 제 방아 돌아가는 덜거덕 소리를 들어야만 잠들 수 있고, 조심하느라 밤에 불을 켜 두어야 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는 잠들지 못한다」(457쪽).
「정신은 잠자는 동안 외부 세계와 스스로를 격리하고 주변부에서 물러난다……. 그렇다고 연결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니다. 잠자는 동안에도 듣고 느끼지 못하고 깨어난 뒤에야 듣고 느낀다면, 사람은 결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감각이 계속된다는 것은, 우리를 깨우는 것이 늘 인상의 감각적 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인상의 심리적 관계라는 사실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하찮은 말에는 잠든 사람이 깨지 않지만 이름을 부르면 깨어난다…… 그러므로 정신은 잠자는 동안에도 감각을 가려낸다……. 바로 그래서, 어떤 중요한 것의 표상과 관련된 감각 자극이라면 그것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깨어날 수 있다. 등불이 꺼지면 사람이 깨어나고, 방아가 멈추면 방앗간 주인이 깨어난다. 다시 말해 깨어나는 것은 어떤 감각 활동이 멈추었기 때문이며, 이는 그 감각 활동이 지각되고 있었고, 대수롭지 않은 것, 아니 오히려 흐뭇한 것이어서 정신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다」(460쪽 이하).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 반론들을 무시하기로 하더라도, 외부 세계에서 물러남으로써 생겨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꿈 생활의 성질들로는 꿈의 낯섦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꿈의 환각을 다시 표상으로, 꿈의 상황을 다시 생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꿈 해석이라는 과제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깨어난 뒤 기억을 더듬어 꿈을 재현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며, 이 역번역에 온전히 성공하든 부분적으로만 성공하든 꿈은 그 신비로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저자는 깨어 있는 생활의 표상 재료에 그보다 더 깊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서슴없이 가정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슈트륌펠[66]은 이렇게 말한다(17쪽). 「객관적으로 활동하는 시야와 정상적인 의식이 멈추면, 정신은 감정, 욕망, 관심, 행동이 뿌리내리고 있던 토대를 잃는다. 깨어 있을 때 기억 이미지에 달라붙어 있던 심리 상태, 감정, 관심, 가치 평가도 …… 어떤 모호한 압력에 굴복하며, 그 결과 이것들과 이미지의 연결이 끊어진다. 깨어 있을 때 지각한 사물, 사람, 장소, 사건, 행동의 이미지는 하나하나 무척 풍부하게 재생되지만, 그 어느 것도 제 심리적 가치를 함께 데려오지 않는다. 심리적 가치는 이미지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래서 이미지들은 제 힘에만 기대어 정신 속을 떠돈다…….」
이미지가 이처럼 심리적 가치를 빼앗기는 것은 이 또한 외부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데서 비롯하는 일인데, 슈트륌펠에 따르면 우리 기억 속에서 꿈이 낯설게 느껴지는 인상은 주로 이 때문이다.
이미 들었듯이, 잠드는 것만으로도 심리 활동 가운데 하나, 곧 표상의 흐름을 의지로 이끄는 일을 내려놓게 된다. 그러니 다른 근거들로도 짐작되는 추측, 곧 수면 상태가 심리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추측이 절로 떠오른다. 이 기능들 가운데 어떤 것은 아예 멈추어 버릴지도 모른다. 나머지 기능이 방해받지 않고 계속 작동하는지, 이런 조건에서도 정상적으로 일을 해낼 수 있는지가 다음 물음이다. 꿈의 특성을 수면 상태의 열등한 심리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 꿈이 깨어 있을 때의 우리 판단에 남기는 인상이 이런 견해를 뒷받침한다.3 꿈은 앞뒤가 맞지 않고, 가장 심한 모순도 서슴없이 한데 묶으며, 불가능한 일을 허용하고, 낮에 얻은 권위 있는 지식을 무시하며, 윤리적·도덕적으로 둔감하다. 깨어 있을 때 꿈이 그 상황들 속에서 하듯 행동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깨어 있을 때 꿈 내용에 나오는 식으로 말하거나 그런 일을 보고하는 사람은 정신이 혼란하고 박약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그러니 꿈속의 심리 활동을 하찮게 평가할 때, 특히 꿈에서는 고등한 지적 활동이 멈추거나 적어도 크게 손상된다고 선언할 때, 우리는 그저 사실에 알맞은 말을 찾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저자들은 보기 드물게 한목소리로(예외는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꿈에 대한 판단을 내렸는데, 그 판단은 곧바로 꿈 생활에 관한 특정한 이론이나 설명으로 이어지는 성격의 것이다. 이제 방금 내가 한 개관을, 꿈의 심리학적 성격에 관해 여러 저자, 곧 철학자와 의사들이 한 발언을 모아 보충할 때가 되었다.
르무안[42]에 따르면, 꿈 영상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꿈의 유일한 본질적 성격이다.
모리[48]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163쪽). 「Il n’y a pas des rêves absolument raisonnables et qui ne contiennent quelque incohérence, quelque anachronisme, quelque absurdité.」〔완전히 이치에 맞아서 얼마간의 앞뒤 안 맞음, 얼마간의 시대착오, 얼마간의 부조리도 담지 않은 꿈이란 없다.〕
슈피타[64]가 인용한 헤겔에 따르면, 꿈에는 객관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연관이 전혀 없다.
뒤가[19]는 말한다. 「Le rêve, c’est l’anarchie psychique, affective et mentale, c’est le jeu des fonctions livrées à elles-mêmes et s’exerçant sans contrôle et sans but; dans le rêve l’esprit est un automate spirituel.」〔꿈, 그것은 심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정신적인 무정부 상태이고, 제멋대로 내버려진 채 통제도 목적도 없이 움직이는 기능들의 놀이다. 꿈속에서 정신은 하나의 정신적 자동인형이다.〕
「중심 자아의 논리적 힘으로 한데 묶여 있는 표상 생활이 느슨해지고, 풀어지고, 뒤섞이는 것」은 폴켈트[72]조차 인정한다(14쪽).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잠자는 동안의 심리 활동은 결코 목적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꿈에 나타나는 표상 결합의 부조리를 키케로(『예언에 관하여(De Divin.)』 제2권)보다 더 강하게 단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Nihil tam praepostere, tam incondite, tam monstruose cogitari potest, quod non possimus somniare.」〔아무리 앞뒤가 뒤집히고, 아무리 어지럽고, 아무리 기괴하더라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꿈꾸지 못할 것은 없다.〕
페히너[25]는 말한다(522쪽). 「마치 심리 활동이 이성적인 존재의 뇌에서 바보의 뇌로 옮겨 간 것 같다.」
라데슈토크[54]는 말한다(145쪽). 「이 부조리한 활동에서 어떤 확고한 법칙을 알아보기란 정말 불가능해 보인다. 깨어 있을 때의 표상 생활을 이끄는 이성적 의지와 주의의 엄격한 단속에서 벗어난 꿈은, 모든 것을 미친 듯한 놀이 속에서 만화경처럼 어지럽게 휘돌린다.」
힐데브란트[35]는 말한다(45쪽). 「꿈꾸는 사람은, 이를테면 추론의 사슬에서, 얼마나 놀라운 비약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가! 가장 익숙한 경험 법칙이 뒤집히는 것을 얼마나 태연하게 바라보는가! 흔히 말하듯 일이 너무 지나쳐 무의미가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끝에 잠이 깨기 전까지, 자연과 사회의 질서에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견뎌 내는가!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곱셈을 한다. 셋에 셋을 곱하면 스물이다. 개가 우리에게 시를 읊어 주어도, 죽은 사람이 제 발로 무덤까지 걸어가도, 바위가 물 위를 헤엄쳐 다녀도 우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지엄한 명을 받들어 자못 진지하게 베른부르크 공국이나 리히텐슈타인 공국으로 그 나라 해군을 시찰하러 가고, 폴타바 전투 직전에 카를 12세의 의용병으로 입대하기도 한다.」
빈츠[4]는 이런 인상에서 나오는 꿈 이론을 짚는다(33쪽). 「꿈 열 가운데 적어도 아홉은 내용이 부조리하다. 우리는 꿈에서 서로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이나 사물을 한데 묶는다. 다음 순간 만화경 속에서처럼 배열이 바뀌는데, 할 수만 있다면 앞의 것보다 더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배열로 바뀐다. 이렇게 불완전하게 잠든 뇌의 변덕스러운 놀이가 이어지다가, 마침내 우리는 깨어나 이마에 손을 얹고, 내게 정말 아직 이성적으로 상상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있는지 스스로 묻는다.」
모리[48]는 꿈 영상이 깨어 있을 때의 생각과 맺는 관계를 두고, 의사에게 무척 인상적인 비유를 찾아낸다(50쪽). 「La production de ces images que chez l’homme éveillé fait le plus souvent naître la volonté, correspond, pour l’intelligence, à ce que cont pour la motilité certains mouvements que nous offrent la chorée et les affections paralytiques…….」〔깨어 있는 사람에게서는 대개 의지가 불러일으키는 이 영상들의 산출이 지성에 대해 갖는 의미는, 무도병과 마비성 질환에서 보이는 어떤 운동들이 운동성에 대해 갖는 의미와 같다…….〕 그 밖에도 그는 꿈을 「toute une série de dégradation de la faculté pensant et raisonant」〔생각하고 추론하는 능력이 줄줄이 퇴락해 가는 과정 전체〕로 여긴다(27쪽).
모리의 이 주장을 개개의 고등 심리 활동에 대해 되풀이하는 저자들의 발언은 굳이 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슈트륌펠[66]에 따르면 꿈에서는 관계와 연관에 바탕을 둔 몇몇 논리적 정신 작용이 사라지며, 무의미가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물론 그렇다(26쪽). 슈피타[64](148쪽)에 따르면 꿈속의 표상은 인과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라데슈토크[54]와 다른 저자들은 꿈에서 판단과 결단이 약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들[37](123쪽)에 따르면 꿈에는 비판이 없고, 의식 전체의 내용으로 일련의 지각을 바로잡는 일도 없다. 같은 저자는 「꿈에서도 의식적 활동의 모든 형식이 나타나지만, 그것들은 불완전하고, 제지되어 있으며, 서로 고립되어 있다」고 말한다. 꿈에 드러나는, 우리의 의식적 지식에 어긋나는 모순을 슈트리커[77][78](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는 꿈에서는 사실이 잊히고 표상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사라진다는 근거로 설명한다(98쪽). 기타 등등.
이처럼 꿈속의 심리 능력을 대체로 나쁘게 말하는 저자들도, 꿈에 심리 활동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다는 것만은 인정한다. 꿈 문제를 다루는 다른 많은 연구자에게 가르침으로 영향을 준 분트[76]는 이를 분명히 인정한다. 꿈에 나타나는 정신생활의 잔여가 어떤 종류이며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로는, 재생 능력, 곧 꿈속의 기억이 가장 적게 손상된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깨어 있는 생활의 같은 기능보다 어느 정도 뛰어날 수도 있다(이 장 (나) 참조). 물론 꿈의 부조리 가운데 일부는 바로 꿈 생활의 이런 망각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말이다. 슈피타[64]에 따르면, 잠에 사로잡히지 않고 남아 꿈을 이끄는 것은 마음의 정서 생활이다. 「심정(Gemüth)이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주관적 본질로서 감정들을 변함없이 아우르는 것을 말한다」(84쪽).
숄츠[59](37쪽)는 꿈 재료가 겪는 「우의적 해석」에서 꿈에 드러나는 심리 활동을 본다. 지베크[62]는 정신이 지각하고 바라보는 모든 것에 가하는 「보충적 해석 활동」(11쪽)을 꿈에서도 확인한다. 겉보기에 가장 높은 심리 기능인 의식에 대해서는, 꿈의 경우 판단하기가 특히 어렵다. 우리는 무엇이든 의식을 거쳐서만 알 수 있으므로 꿈에서 의식이 유지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슈피타는 꿈에서 유지되는 것은 의식뿐이고 자기의식은 유지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델뵈프[16]는 이런 구별을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관념의 결합을 지배하는 연상 법칙은 꿈 영상에도 들어맞는다. 아니, 꿈에서는 다른 어디에서보다 그 지배가 더 순수하고 강하게 드러난다. 슈트륌펠[66]은 말한다(70쪽). 「꿈은 보기에 오로지 꾸밈없는 표상의 법칙만을 따르거나, 아니면 그런 표상과 더불어 기관 자극을 따른다. 다시 말해 숙고와 이성, 미적 감각, 도덕적 판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가 여기 견해를 소개한 저자들은 꿈 형성을 대략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다른 곳에서 논한 여러 원천에서 와서 잠에 작용하는 감각 자극의 총합이 먼저 정신 속에 한 무리의 표상을 일깨우고, 이 표상들은 환각으로 나타난다(분트에 따르면 외부 자극과 내부 자극에서 생겨나므로 착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 표상들은 알려진 연상 법칙에 따라 서로 결합하고, 같은 규칙에 따라 다시 새로운 일련의 표상(영상)을 불러낸다. 그러고 나면 아직 활동하고 있는, 정리하고 사고하는 정신 능력의 잔여가 이 재료 전체를 되도록 잘 가공한다(분트[76]와 바이간트[75] 참조).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겨나지 않은 영상들이 깨어날 때 이런저런 연상 법칙을 따르도록 결정하는 동기를 찾아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그러나 꿈 표상들을 서로 잇는 연상이 특별한 종류의 것이어서 깨어 있을 때의 정신 활동에서 보는 연상과 다르다는 것도 여러 번 관찰되었다. 그래서 폴켈트[72]는 말한다. 「꿈에서는 표상들이 우연한 유사성과 거의 알아챌 수 없는 연관에 기대어 서로 쫓고 쫓긴다. 모든 꿈에는 이런 느슨하고 자유로운 연상이 배어 있다.」 모리[48]는 표상 사이의 이런 결합 방식을 매우 중시하는데, 이 특징 덕분에 그는 꿈 생활을 어떤 정신 장애들에 더 가깝게 견줄 수 있었다. 그는 délire〔섬망〕의 두 가지 주요 특징을 이렇게 든다. 「(1) une action spontanée et comme automatique de l’esprit; (2) une association vicieuse et irregulière des idées」〔(1) 정신의 자발적이고 거의 자동적인 활동, (2) 관념의 그릇되고 불규칙한 연합〕(126쪽). 모리는 자기 꿈에서 뛰어난 예를 두 가지 들려주는데, 거기서는 소리가 비슷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꿈 표상들이 이어진다. 한번은 그가 예루살렘인지 메카인지로 순례(pélerinage)를 떠나는 꿈을 꾸었다. 숱한 모험 끝에 그는 화학자 펠티에(Pelletier)와 함께 있었다. 펠티에는 이야기를 좀 나누더니 그에게 아연 삽(pelle)을 하나 주었는데, 이어진 꿈 조각에서 그 삽은 그의 기다란 장검이 되었다(137쪽). 또 한번은 꿈에서 큰길을 걸으며 이정표에 적힌 킬로미터(kilometres)를 읽었다. 이윽고 그는 한 향신료 상인과 함께 있었는데, 상인에게는 모리의 몸무게를 달 커다란 저울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상인이 그에게 말했다. 「파리에 계신 게 아니라 질롤로(Gilolo) 섬에 계신 겁니다.」 그 뒤로 여러 영상이 이어졌는데, 그 속에서 그는 로벨리아(Lobelia) 꽃을 보았고, 이어서 얼마 전 사망 소식을 읽었던 로페스(Lopez) 장군을 보았다. 마침내 그는 로토(lotto) 놀이를 하다가 잠에서 깼다.
그러나 꿈의 심리 활동을 이렇게 깎아내리는 데 반대편의 반박이 없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반박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꿈 생활을 깎아내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슈피타[64](118쪽)가 깨어 있는 상태를 지배하는 것과 같은 심리학적 법칙이 꿈도 지배한다고 장담하거나, 또 다른 사람(뒤가[19])이 「Le rêve n’est pas déraison ni même irraison pure」〔꿈은 이성의 상실도 아니고, 순전한 비이성조차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이 묘사한 꿈속의 심리적 무정부 상태와 모든 기능의 해체를 이 평가와 조화시키려고 전혀 애쓰지 않는 한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꿈의 광기에도 어쩌면 나름의 조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곧 어쩌면 덴마크 왕자의 광기처럼 꾸민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떠오른 듯하다. 여기 인용한 재치 있는 판단은 바로 그 왕자의 광기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저자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하기를 삼갔거나, 아니면 꿈이 그들에게 보여 준 겉모습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해블록 엘리스[23]는 꿈의 겉보기 부조리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꿈을 「거대한 감정과 불완전한 생각으로 이루어진 태곳적 세계」로 여기며, 그 세계를 연구하면 정신생활의 원시적 발달 단계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본다. 델뵈프[16] 같은 사상가는 이렇게 단언하는데, 물론 반대되는 자료에 맞설 증거는 대지 않았으니 실로 부당한 단언이다. 「Dans le sommeil, hormis la perception, toutes les facultés de l’esprit, intelligence, imagination, mémoire, volonté, moralité, restant intactes dans leur essence; seulement, elles s’appliquent à des objets imaginaires et mobiles. Le songeur est un acteur qui joue à volonté les fous et les sages, les bourreaux et les victimes, les nains et les géants, les démons et les anges」〔잠 속에서도 지각을 빼면 정신의 모든 능력, 곧 지성, 상상력, 기억, 의지, 도덕성은 그 본질에서 온전히 남아 있다. 다만 그것들이 상상의 대상, 움직이는 대상에 적용될 뿐이다. 꿈꾸는 사람은 미치광이와 현자, 사형 집행인과 희생자, 난쟁이와 거인, 악마와 천사를 마음대로 연기하는 배우다〕(222쪽). 에르베 후작은 모리[48]에게 날카롭게 반박당한 사람이고, 나는 온갖 애를 썼지만 그의 저작을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꿈속 심리 능력의 과소평가에 누구보다 힘차게 맞서 싸운 듯하다. 모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19쪽). 「M. le Marquis d’Hervey prête à l’intelligence, durant le sommeil toute sa liberté d’action et d’attention et il ne semble faire consister le sommeil que dans l’occlusion des sens, dans leur fermeture au monde extérieur; en sorte que l’homme qui dort ne se distingué guère, selon sa manière de voir, de l’homme qui laisse vaguer sa pensée en se bouchant les sens; toute la différence qui séparé alors la pensée ordinaire du celle du dormeur c’est que, chez celui-ci, l’idée prend une forme visible, objective et ressemble, à s’y méprendre, à la sensation déterminée par les objets extérieurs; le souvenir revêt l’apparence du fait présent.」〔에르베 후작은 잠자는 동안에도 지성에 행동과 주의의 자유를 온전히 인정하며, 잠이란 감각이 막히는 것, 곧 감각이 외부 세계를 향해 닫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견해로는 잠자는 사람은 감각을 막은 채 생각이 떠돌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때 평소의 생각과 잠자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는 차이는 오직 하나, 잠자는 사람에게서는 관념이 눈에 보이는 객관적 형태를 띠고, 외부 대상이 일으키는 감각과 혼동할 만큼 닮는다는 것이다. 기억이 눈앞의 사실이라는 겉모습을 입는 것이다.〕
그러나 모리는 이렇게 덧붙인다. 「Qu’il y a une différence de plus et capitale à savoir que les facultés intellectuelles de l’homme endormi n’offrent pas l’équilibre qu’elles gardent chez l’homme l’éveillé.」〔차이가 하나 더 있으며, 그것도 결정적인 차이다. 곧 잠든 사람의 지적 능력은 깨어 있는 사람에게서 유지하는 균형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꿈을 심리적 산물로 보고 매기는 평가는 문헌에서 그 폭이 매우 넓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그 표현을 알게 된 가장 낮은 과소평가에서 시작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거쳐, 꿈을 깨어 있는 생활의 능력보다 훨씬 높이 두는 과대평가에까지 이른다. 알다시피 심리학적 특징들을 세 가지 이율배반으로 그려 낸 힐데브란트[35]는, 그 셋째 대립에서 이 계열의 양 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19쪽). 「그것은 한편의 고조, 흔히 거장다운 경지에까지 이르는 거듭된 상승과, 다른 한편의 정신생활의 뚜렷한 감퇴와 쇠약, 흔히 인간의 수준 아래로까지 떨어지는 감퇴와 쇠약 사이에 있다.」
「첫째 것에 관해서라면, 꿈의 정령이 지어내고 엮어 내는 것 속에 때로 감정의 깊이와 진실함, 섬세한 느낌, 명료한 시야, 예리한 관찰, 재빠른 재치가 드러난다는 것을, 곧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늘 지닌 자질이라고는 겸손하게 부인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을 제 경험으로 확인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꿈에는 놀라운 시정(詩情), 뛰어난 우의(寓意), 비할 데 없는 유머, 매혹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꿈은 독특한 이상화의 옷을 입혀 세계를 바라보며, 흔히 그 현상들이 주는 효과를 끌어올려 그 바탕에 놓인 본질을 더없이 재치 있게 이해하는 데까지 이른다. 꿈은 지상의 아름다움을 참으로 천상의 광채 속에, 숭고한 것을 최고의 위엄 속에, 실제로 무서운 것을 가장 소름 끼치는 모습 속에, 우스운 것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걸쭉한 익살 속에 그려 보인다. 그리고 때로는 깨어난 뒤에도 이런 인상 가운데 하나로 가슴이 가득 차서, 현실 세계는 이런 것을 한 번도 우리에게 베풀어 준 적이 없다고 여기게 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깎아내리는 말과 이 열광적인 찬사는 정말로 같은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인가? 찬사를 보내는 이들은 어리석은 꿈을, 깎아내리는 이들은 사려 깊고 재치 있는 꿈을 못 보고 지나친 것은 아닌가? 그리고 두 종류가 다 있다면, 곧 이렇게도 저렇게도 판단받아 마땅한 꿈이 다 있다면, 꿈의 심리학적 성격을 찾는 것은 헛된 일로 보이지 않는가? 꿈에서는 정신생활의 가장 낮은 저하에서부터 깨어 있을 때에는 보기 드문 고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해결책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이런 반론에 부딪힌다. 모든 꿈 연구자의 노력 뒤에는, 본질적인 특징에서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이런 모순들을 없애 줄, 규정할 수 있는 꿈의 성격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정밀한 자연 과학보다 철학이 지성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던, 이제는 지나간 그 지적 시대에 꿈의 심리 능력이 더 빠르고 더 따뜻하게 인정받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꿈은 정신을 외부 자연의 힘에서 해방하며 영혼을 감각적인 것의 사슬에서 풀어 준다는 슈베르트의 발언, 그리고 꿈을 정신생활이 더 높은 단계로 날아오르는 것으로 그린 아들 피히테4와 그 밖의 사람들이 표명한 비슷한 견해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런 말은 신비주의자와 신심 깊은 이들이나 되풀이할 뿐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발전하면서 꿈의 평가에도 반동이 일어났다. 꿈의 심리 활동을 하찮고 가치 없는 것으로 가장 쉽게 깎아내리는 사람은 사실 의학계 저자들이다. 반면에 철학자와 비전문 관찰자, 곧 아마추어 심리학자들은 대중의 생각과 더 잘 맞게 대체로 꿈의 심리적 가치를 고수해 왔는데, 이 분야에서 이들의 기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꿈속 심리 능력을 낮게 평가하는 쪽으로 기우는 사람은 당연히 꿈의 원인론에서 신체적 자극원을 더 중시한다. 꿈꾸는 정신에게 그 능력의 대부분을 남겨 두는 사람은, 꿈꾸기에 독자적인 자극도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당연히 없다.
냉정하게 견주어 보아도 꿈 생활에 돌리고 싶어지는 뛰어난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기억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흔한 경험은 이미 충분히 논했다. 옛 저자들이 자주 칭송한 꿈 생활의 또 다른 우월성, 곧 꿈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힐데브란트[35]가 지적하듯 이 우월성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꿈도 깨어 있을 때의 사고만큼 시간과 공간을 고려하는데, 꿈은 사고의 한 형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꿈은 시간과 관련해 또 하나의 이점을 누린다고 여겨진다. 곧 또 다른 의미에서 시간의 흐름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모리[48]의 단두대 꿈 같은 꿈들은, 꿈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깨어 있는 정신에서 우리의 심리 활동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각 내용을 몰아넣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결론은 많은 논거로 반박되었다. 르 로랭[45]과 에게르[20]의 논문 「꿈의 겉보기 지속 시간에 관하여」는 길고도 흥미로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미묘하고 파장이 큰 물음에 대해 그 논쟁이 마지막 말을 한 것은 아마 아닐 것이다.
꿈이 낮의 지적 작업을 이어받아 낮 동안 결말을 보지 못한 것을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 의심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 시인과 작곡가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보고와 샤바네[11]가 엮은 모음집이 보여 주듯 논란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해도, 그 사실의 해석은 원칙적으로 수많은 의문에 열려 있다.
끝으로, 꿈에 있다고들 하는 예언의 힘은 논쟁의 대상이며, 여기서 넘어설 수 없는 냉엄한 숙고가 고집스럽고 끈질긴 믿음과 맞부딪친다. 이 문제에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을 모조리 부정하지 않도록 삼가는 것은 실로 옳은 일이다. 그런 사례 가운데 몇몇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심리학적 근거로 설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주
1. 질베러는 졸음이 오는 상태에서는 추상적인 생각마저 같은 것을 표현하는 구체적이고 조형적인 영상으로 바뀔 수 있음을 멋진 예들로 보여 주었다(블로일러·프로이트 엮음, 『정신분석·정신병리 연구 연보(Jahrbuch)』 제1권, 1900).
2. 하프너[32]도 델뵈프와 비슷하게, 온전한 심리 장치의 평소에는 올바른 기능 속으로 비정상적인 상태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어떤 변화를 바탕으로 꿈 활동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 상태를 조금 다른 말로 그려 냈다. 그에 따르면 꿈의 첫째 표지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 곧 표상이 개인에게 공통된 시간과 공간의 질서 속 제자리에서 풀려난다는 것이다. 이와 이어진 꿈의 둘째 근본 특성은 환각과 상상과 공상의 조합을 객관적 지각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고등한 심리적 힘의 총체, 특히 한편으로는 관념 형성, 판단, 추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자기 결정이 감각적인 공상 영상과 결합하며, 언제나 그것을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활동들도 꿈 표상의 불규칙성에 가담한다. 가담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 능력과 의지력 자체는 잠자는 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활동에 관한 한 우리는 깨어 있을 때와 똑같이 예리하고 똑같이 자유롭다. 사람은 꿈에서도 사고 법칙을 거슬러 행동할 수 없다. 곧 자기에게 모순으로 드러나는 것과 화합할 수 없다, 등등. 꿈에서도 그는 자기에게 선으로 표상되는 것만을 욕구할 수 있다(sub ratione boni〔선이라는 명목 아래〕). 그러나 사고와 의지의 법칙을 이렇게 적용하는 가운데, 인간 정신은 꿈에서 한 표상을 다른 표상으로 오인함으로써 길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는 꿈에서 더없이 큰 모순을 지어내고 저지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날카로운 판단과 가장 조리 있는 추론의 사슬을 펼쳐 보이고, 가장 덕스럽고 거룩한 결심을 할 수도 있다. 꿈에서 우리의 상상력이 펼치는 비상의 비밀은 오로지 방향 감각의 결여에 있으며, 비판적 숙고와 타인과의 상호 이해가 없다는 것이 꿈에서 우리의 판단과 희망과 소원이 분별없이 치닫는 주된 원천이다(18쪽).
3. 영역본은 「which is contrary to such a conception」(이런 견해에 반한다)이라 했으나, 이어지는 문장들은 모두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인상(앞뒤가 맞지 않음, 모순, 도덕적 둔감)을 늘어놓는다. 독일어 원문의 entgegenkommen(맞아떨어지다, 뒷받침하다)을 반대의 뜻으로 읽은 것으로 보아, 앞뒤 논지에 따라 옮겼다. ― 옮긴이.
4. 하프너[32]와 슈피타[6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