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꿈 과정의 심리학1
남에게서 들은 꿈 가운데 이 대목에서 특히 눈여겨볼 만한 것이 하나 있다. 한 여성 환자가 내게 들려준 꿈인데, 그녀 자신도 꿈에 관한 어느 강연에서 들은 것이었다. 본래의 출처는 나도 모른다. 이 꿈이 그 부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이 꿈을 흉내 내기까지 했는데, 즉 이 꿈의 요소들을 자기 꿈속에서 되풀이하여, 이런 전이로 어떤 한 점에서 이 꿈에 동의한다는 뜻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이 본보기 꿈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한 아버지가 여러 날 밤낮으로 아이의 병상을 지켰다. 아이가 죽자 그는 옆방으로 물러나 쉬었는데, 자기 방에서 다른 방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그 방에는 타오르는 촛불에 둘러싸여 아이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지키는 사람으로 남겨 둔 한 노인이 시신 곁에 앉아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몇 시간 잠을 잔 뒤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아이가 그의 침대 곁에 서서 그의 팔을 붙잡고 「아버지, 제가 불타는 게 안 보이세요?」 하고 원망하듯 외쳤다.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 옆방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달려 들어가 보니 노인은 잠들어 있었고, 사랑하는 아이의 시신은 넘어진 촛불에 덮개와 한쪽 팔이 타 있었다.
이 가슴 아픈 꿈의 뜻은 아주 단순하며, 내 환자가 전한 대로라면 강연자가 내놓은 설명도 옳았다. 열린 문으로 들어와 잠든 사람의 눈에 비친 환한 빛이, 그가 깨어 있었다면 받았을 것과 똑같은 인상, 곧 넘어지는 촛불 때문에 시신 가까이에서 불이 났다는 인상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잠자리에 들면서 그 늙은 파수꾼이 제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걱정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 해석에서 우리가 고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덧붙일 수 있는 것은 다만, 꿈 내용이 중층 결정되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 그리고 아이의 말은 아이가 살아 있을 때 했던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말들이 아버지에게 중요한 일들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제가 불타요」라는 호소는 아이의 목숨을 앗아 간 열병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고, 인용된 말 「아버지, 안 보이세요?」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감정적인 일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을 우리의 심리적 존재와 연관 지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인정하고 나면, 그토록 곧바로 깨어나야 할 사정에서 꿈이 생겨났다는 것이 놀라울 수도 있다. 우리는 또 이 꿈에도 소원 성취가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아이는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이는 몸소 아버지에게 경고하고, 그의 침대로 와서 그의 팔을 붙잡는다. 꿈속 말의 첫 부분을 낳은 그 일이 있었을 때에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한순간 더 잠을 잔 것은 이 소원 성취를 위해서였다. 꿈이 의식적 숙고를 이긴 것은 아이를 한 번 더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여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먼저 깨어나서, 자기를 옆방으로 이끈 결론을 그다음에 끌어냈더라면, 그는 아이의 생명을 바로 이 한순간만큼 줄여 버렸을 것이다.
이 짧은 꿈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특이한 점은 아주 분명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꿈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지, 꿈 작업이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감추는지를 밝히려고 애썼다. 달리 말해 지금까지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해석의 문제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마주친 꿈은 쉽게 설명되고 뜻이 훤히 드러나 있는데도, 우리의 꿈꾸기를 의식적 사고와 뚜렷이 가르는 본질적 특징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어서 분명히 설명을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차린다. 해석의 문제를 모두 풀고 난 뒤에도 우리는 우리의 꿈 심리학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여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기 전에, 여기까지 오는 길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는지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자. 솔직히 인정해야 하거니와,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것은 여정 가운데 쉽고 편안한 구간이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따라온 길은 모두 빛으로, 해명으로, 온전한 이해로 이어졌다. 그러나 꿈의 심리 과정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려는 순간부터 모든 길은 어둠으로 이어진다. 꿈을 심리 과정으로서 설명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설명한다는 것은 알려진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인데, 꿈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해 그 근본적 설명으로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을 그 아래 거두어 넣을 만한 심리학적 지식이 우리에게는 아직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심리 장치의 구조와 그 안에서 작용하는 힘들에 관해 일련의 새로운 가정을 세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가정들을 가장 단순한 논리적 연결 너머로까지 밀고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가치가 불확실함 속으로 녹아들어 버릴 수 있다. 또 설령 우리가 결론을 내리면서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거기 걸린 논리적 가능성을 모두 헤아린다 하더라도, 기초 자료가 불완전할 공산이 커서 우리의 해답은 여전히 완전한 실패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또한 꿈이나 그 밖의 단 하나의 활동을 아무리 꼼꼼히 조사하더라도 심리 장치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한 설명을 얻거나, 적어도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러려면 일련의 심리 활동 전체를 비교 연구한 뒤에 결정적으로 변함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한데 모아야 한다. 그러므로 꿈 과정의 분석에서 얻게 될 심리학적 견해들은, 다른 출발점에서 같은 문제의 핵심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르는 다른 연구들의 결과와 이어질 수 있을 때까지 말하자면 연결점에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가) 꿈의 망각
그러면 먼저 한 가지 주제로 눈을 돌려 보자. 이 주제는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반론 하나를 낳았는데, 그 반론은 꿈 해석에서 우리가 해 온 작업의 토대를 허물 기세다. 여러 방면에서 이런 반론이 나왔다. 우리가 해석하려는 꿈을 우리는 실은 알지 못한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꿈을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 알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1장 (라) 참조). 우리가 꿈에 대해 기억하는 것, 우리가 해석 방법에 맡기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믿을 수 없는 기억 때문에 왜곡되어 있다. 이 기억은 꿈을 간직하는 데 유난히 알맞지 않아 보이며, 하필 꿈 내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빠뜨렸을 수도 있다. 자기 꿈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꿈을 꾸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한 조각밖에 알지 못하고, 그 조각마저 유난히 불확실해 보인다고 한탄할 까닭을 우리는 자주 발견한다. 다른 한편, 우리 기억이 꿈을 조각조각 재현할 뿐 아니라 착각에 빠져 그릇되게 재현한다는 것은 모든 점으로 보아 확실하다. 한편으로 꿈꾼 재료가 정말로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앞뒤 없고 어지러웠는지 의심할 수 있듯이, 다른 한편으로는 꿈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만큼 앞뒤가 이어져 있었는지도 의심할 수 있다. 재현하려고 애쓰는 동안, 원래 있던 빈틈이나 망각으로 생긴 빈틈을 멋대로 고른 새 재료로 메우지 않았는지, 꿈을 꾸미고 다듬고 매만져서 그 실제 내용에 대한 판단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 저자(슈피타[64])는, 질서 있고 앞뒤가 이어진 것은 모두 우리가 꿈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동안에야 비로소 꿈속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밝혔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 가치를 밝히겠다고 나선 바로 그 대상을 손에서 빼앗길 위험에 처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꿈을 해석하면서 이런 경고를 무시해 왔다. 아니, 오히려 꿈 내용의 가장 작고 가장 하찮으며 가장 불확실한 구성 요소에서도, 뚜렷하고 확실한 부분을 담은 요소에서 못지않게 해석의 요구가 뚜렷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르마의 주사 꿈에서 우리는 「나는 급히 M. 박사를 불러들였다」라는 대목을 읽었고, 이 작은 덧붙임조차 특별한 유래가 없었다면 꿈속에 들어오지 않았으리라고 가정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나이 많은 동료를 그 병상으로 「급히」 불러들였던 그 불운한 환자의 이야기에 이르렀다. 51과 56의 차이를 quantité négligé〔무시해도 좋은 양〕으로 다룬, 겉보기에 부조리한 꿈에서는 51이라는 수가 거듭 언급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지 않고, 거기서 꿈의 잠재 내용 속에 51이라는 수로 이어지는 두 번째 생각의 흐름이 있다고 추론했다. 이 실마리를 따라가자 51세를 수명의 한계로 여기는 두려움에 이르렀는데, 이 두려움은 삶에 한계 따위는 없다고 큰소리치던 지배적인 생각의 흐름과 더없이 뚜렷하게 대조되었다. 「Non Vixit〔그는 살지 않았다〕」 꿈에서 나는 「P.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Fl.은 내게 묻는다」 운운하는 문장을 발견했는데, 처음에는 하찮은 삽입구로 보고 지나쳤던 문장이다. 해석이 막혀 멈추자 나는 이 말로 되돌아갔고, 이 말을 거쳐 유년기의 공상에 이르는 길을 찾아냈다. 그 공상은 꿈 사고 속에서 중간 연결점으로 나타나 있었다. 길을 이어 준 것은 시인의 다음 시구였다.
그대가 나를 이해한 적은 드물었고,
내가 그대를 이해한 적도 드물었네.
그러나 우리가 진창에 빠졌을 때,
우리는 대번에 서로를 이해했다네.
모든 분석은 꿈의 가장 하찮은 특징이 분석에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처음에 그 특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에 과제의 완수가 늦어진다는 것을 여러 예로 보여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꿈을 해석하면서 꿈에 나타난 언어 표현의 미묘한 차이 하나하나를 존중했다. 아니, 꿈을 알맞은 문체로 옮기려던 노력이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무의미하거나 모자란 문구와 마주쳤을 때에도 우리는 그 표현의 결함까지 존중했다. 요컨대 권위자들이 그때그때 급히 꾸며 낸 자의적인 즉흥물로 여긴 것을 우리는 경전처럼 다루었다. 이 모순은 설명을 요구한다.
그 설명은 권위자들을 깎아내리지 않고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나온다. 꿈의 기원에 관해 새로 얻은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순들은 완전히 들어맞는다. 꿈을 재현하려 할 때 우리가 꿈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이차 가공이라고 이름 붙인 것, 곧 정상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꿈이 겪는, 흔히 오해받는 그 가공의 또 다른 예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왜곡 자체는 꿈 사고가 꿈 검열 때문에 으레 겪는 가공의 일부일 뿐이다. 권위자들은 여기서 꿈 왜곡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작용하는 부분을 짐작해 냈거나 관찰했다. 우리에게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만큼 쉽게 알아볼 수는 없지만 훨씬 폭넓은 왜곡 작업이 이미 숨은 생각들 가운데서 꿈을 제 대상으로 골라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권위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다만, 꿈을 떠올려 말로 옮기는 동안 꿈이 겪는 변경을 자의적이고 풀 수 없는 것으로, 따라서 꿈을 해석할 때 우리를 그르치기 쉬운 것으로 여긴다는 점뿐이다. 우리는 심리적인 것의 결정성을 과소평가한다.2 이 영역에는 자의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첫째 생각의 흐름이 결정하지 않고 남겨 둔 요소는 곧바로 둘째 생각의 흐름이 떠맡아 결정한다는 것을 아주 일반적으로 보여 줄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전적으로 마음대로 수 하나를 떠올려 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게 떠오르는 수는, 순간의 내 의도와는 동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내 안의 생각들이 분명하고도 필연적으로 결정한다.3 깨어 있는 상태의 손질을 거치며 꿈이 겪는 변경도 그와 똑같이 자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변경들은 자기가 대신 들어선 내용과 연상으로 이어진 채 남아 있으면서 그 내용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는데, 그 내용 자체가 또 다른 무언가의 대리물일 수도 있다.
환자들의 꿈을 분석할 때 나는 이 주장을 확인하는 다음과 같은 시험을 으레 해 보는데, 이 시험이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꿈 보고가 처음에 알아듣기 어려워 보이면 나는 꿈꾼 사람에게 그것을 되풀이해 달라고 청한다. 그가 같은 말로 되풀이하는 일은 드물다. 표현이 바뀌는 대목들이 꿈의 위장에서 약한 곳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는데, 이 대목들은 지크프리트의 옷에 수놓은 표시가 하겐에게 쓸모 있었던 것과 똑같이 내게 쓸모가 있다. 분석은 이 지점들에서 출발할 수 있다. 꿈을 푸는 데 특별히 공을 들이겠다는 내 예고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경고가 된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저항에 떠밀려 꿈의 위장에서 약한 곳을 감싸고, 속을 드러내는 표현을 더 먼 표현으로 바꾼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기가 버린 표현에 오히려 내 주의를 끌어 준다. 꿈의 풀이를 막으려고 들이는 수고를 보면, 꿈의 옷을 얼마나 공들여 짰는지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판단이 부딪히는 의심을 저자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보다 덜 정당하다. 이 의심이 지적인 확신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기억은 본래 아무런 보증도 알지 못하며, 그런데도 우리는 객관적으로 정당한 것보다 훨씬 자주 기억의 진술을 믿으라는 압력에 굴복한다. 꿈을, 또는 꿈의 개별 자료를 바르게 재현했는가 하는 의심 역시 꿈 검열, 곧 꿈 사고가 의식으로 침투하는 데 맞서는 저항의 파생물일 뿐이다. 이 저항은 전치와 치환을 일으키는 데 힘을 다 써 버리지 않았으므로, 통과를 허락받은 것에 의심의 형태로 들러붙는다. 이 의심이 꿈의 강렬한 요소는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약하고 희미한 요소만 공격한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더욱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꿈 사고와 꿈 사이에서 모든 심리적 가치의 전도가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곡은 가치를 바꿔 놓음으로써만 가능했다. 왜곡은 으레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이것으로 만족하기도 한다. 꿈 내용의 희미한 요소에 의심이 달라붙어 있다면, 우리는 그 암시를 따라 이 요소에서 추방된 꿈 사고 가운데 하나의 직접적인 파생물을 알아볼 수 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의 어느 공화국에서 큰 혁명이 일어난 뒤와 꼭 같다. 예전의 고귀하고 강력하던 지배 가문들은 이제 추방되고, 높은 자리는 모두 벼락출세한 자들이 차지하며, 도시 안에는 몹시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이나 패배한 당파의 먼 추종자들만 용인된다. 그들조차 온전한 시민권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혐의를 받으며 감시당한다. 비유 속의 혐의 자리에, 우리의 경우에는 의심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꿈 분석에서는 신빙성을 가늠한다는 생각 전체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것이나 저것이 꿈에 나왔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온전히 확실한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꿈 요소를 추적하면서 이런 고려를 물리치기로 마음먹기 전까지 분석은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다. 해당 요소에 대한 반감은 분석받는 사람에게서, 그 원치 않는 표상이 그의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형태로 심리적 효과를 드러낸다. 이런 효과는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것이나 저것이 꿈에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쪽으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고 말한다 해도 앞뒤가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분석에서 의심이 바로 이렇게 방해하는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야말로 의심을 심리적 저항의 파생물이자 도구로 낙인찍는다. 정신분석이 무엇이든 미심쩍어하는 것은 정당하다. 정신분석의 규칙 가운데 하나는 이렇다. 작업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저항이다.
꿈의 망각 역시, 그것을 설명하면서 심리적 검열의 힘을 고려하지 않는 한 헤아릴 수 없는 채로 남는다. 밤새 꿈을 많이 꾸었는데 조금밖에 간직하지 못했다는 느낌은, 사실 여러 경우에 다른 뜻을 지닐 수도 있다. 어쩌면 꿈 작업이 밤새도록 느낄 수 있을 만큼 이어졌고 그러고서 이 짧은 꿈 하나만 남겼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깨어나면서 꿈이 점점 더 잊혀 간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떠올리려고 몹시 애를 써도 꿈을 잊는 일이 잦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이 대개 자기가 잊은 것의 범위를 과대평가하듯이, 꿈에 난 빈틈을 보고 제 앎의 결함을 판단하여 그 결함 또한 과대평가한다고 믿는다. 망각으로 꿈 내용에서 잃어버린 것은 모두 분석으로 되찾을 수 있을 때가 많다. 적어도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남은 조각 하나에서 꿈 사고를 모두 찾아낼 수 있다. 물론 꿈 자체를 되찾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분석에서 더 많은 주의와 자제력을 들여야 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꿈의 망각에 적대적인 의도가 없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꿈의 망각이 목적을 지니며 저항에 봉사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해 주는 것은, 분석에서 망각의 예비 단계를 살펴보는 일이다.4 해석 작업 도중에 빠졌던 꿈 조각 하나가 갑자기 떠오르는 일이 자주 있다. 망각에서 이렇게 건져 낸 꿈 부분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꿈의 풀이로 가는 가장 짧은 길 위에 놓여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저항에게 가장 거슬리는 것이었다. 이 논고와 관련해 내가 모은 꿈의 예 가운데서, 이런 꿈 내용 한 조각을 나중에 끼워 넣어야 했던 일이 한 번 있었다. 정이 가지 않는 여자 길동무에게 앙갚음을 하는 여행 꿈이었는데, 일부가 상스럽고 추잡한 탓에 나는 그 꿈을 거의 해석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 빠졌던 부분은 이렇다. 「나는 실러의 책 한 권을 두고 『It is from ——』 하고 말했다가, 나 스스로 잘못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It is by.』 하고 고쳐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누이에게 『정말이지, 그가 맞게 말했어.』 하고 한마디 했다.」
몇몇 저자에게는 그토록 놀라워 보이는 꿈속의 자기 교정은 우리가 고려할 가치가 없다. 그보다 나는 꿈속 문법적 실수의 본보기를 내 기억에서 끌어내 보이려 한다. 내가 처음 영국에 간 것은 열아홉 살 때였고, 나는 아일랜드해 바닷가에서 하루를 보냈다. 나는 당연히 파도가 남기고 간 바다 동물들을 잡으며 놀았고, 특히 불가사리 한 마리에 매달려 있었는데(꿈은 홀투른〔Hollthurn〕 ― 해삼〔Holothurian〕으로 시작한다), 그때 예쁘장한 여자아이 하나가 다가와 내게 「Is it a starfish? Is it alive?〔그거 불가사리예요? 살아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Yes, he is alive〔응, 그는 살아 있어〕」 하고 대답했다가, 곧 내 잘못이 부끄러워져 그 문장을 바르게 고쳐 되풀이했다. 그때 내가 저지른 문법적 실수 대신, 꿈은 독일 사람들이 아주 흔히 저지르는 다른 실수를 들여놓는다. 「Das Buch ist von Schiller」〔그 책은 실러가 쓴 것이다〕는 the book is from〔그 책은 ~에게서 왔다〕이 아니라 the book is by〔그 책은 ~이 지었다〕로 옮겨야 한다. 꿈 작업이 이렇게 바꿔 놓는 까닭이, from이라는 낱말이 소리가 닮은 덕분에 독일어 형용사 fromm(경건한, 독실한)과 놀라운 압축을 이룰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은, 꿈 작업의 목적과, 수단을 고르는 데 거리낌이 없는 그 방식에 대해 우리가 들은 모든 것을 생각하면 이제 더는 놀랍지 않다. 그런데 바닷가의 이 무해한 회상은 이 꿈과 관련해 무엇을 뜻할까? 그 회상은 아주 순진한 예를 들어, 내가 성(性)을 잘못 썼다는 것, 즉 성별을, 또는 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낱말인 「he」를 그것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놓았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이것은 분명 꿈 풀이의 열쇠 가운데 하나다. 『물질과 운동(Matter and Motion)』이라는 책 제목의 유래(몰리에르의 『상상병 환자(Malade Imaginaire)』: La matière est-elle laudable?〔변은 좋은 상태인가?〕 ― A motion of the bowels〔배변〕)를 들어 본 사람이라면 빠진 부분을 쉽게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꿈의 망각이 대부분 저항의 활동 탓이라는 것을 demonstratio ad oculos〔눈앞에 보여 주는 증명〕으로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한 환자가 내게, 꿈을 꾸기는 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그래도 우리는 작업을 이어 간다. 나는 저항에 부딪히고 그것을 환자에게 분명히 짚어 준다. 격려하고 재촉하면서 그가 어떤 불쾌한 생각과 화해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일에 성공하자마자 그는 외친다. 「이제 무슨 꿈을 꾸었는지 떠오릅니다.」 그날 그를 작업에서 방해하던 바로 그 저항이 꿈도 잊게 한 것이다. 이 저항을 극복함으로써 나는 꿈을 기억 속으로 불러왔다.
마찬가지로 환자는 작업의 어떤 대목에 이르러, 사흘이나 나흘, 또는 그보다 더 전에 꾸었고 그동안 내내 망각 속에 잠들어 있던 꿈을 떠올리기도 한다.
권위자들은 꿈의 망각이 깨어 있는 상태와 잠든 상태 사이의 낯섦에 달려 있다고 믿어 왔지만, 정신분석의 경험은 꿈의 망각이 그보다는 저항에 더 많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를 우리에게 주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분석가들과 치료받는 환자들에게도, 흔히 말하듯 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곧바로, 정신 활동을 온전히 쥔 채로 그 꿈을 해석하기 시작하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런 경우 나는 꿈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쉬지 않은 적이 많았는데, 그런데도 깨어난 뒤에는 꿈 내용 자체와 마찬가지로 해석 작업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꿈을 꾸었다는 것도, 그 꿈을 해석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정신 활동이 꿈을 기억 속에 붙들어 둘 수 있었던 경우보다, 꿈이 해석 작업의 결과까지 망각 속으로 데려가 버린 경우가 더 잦았다. 그런데 이 해석 작업과 깨어 있을 때의 생각 사이에는, 권위자들이 꿈의 망각을 오로지 그것으로 설명하고 싶어 하는 그 심리적 간극이 없다. 모턴 프린스는 꿈의 망각에 대한 내 설명에 반대하는데, 꿈의 망각은 해리 상태에 대한 기억 상실의 한 특수한 예일 뿐이며, 내 이론을 다른 유형의 기억 상실과 조화시킬 수 없으니 다른 목적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그런 해리 상태를 그토록 서술하면서도 이 현상들의 역동적 설명을 찾으려는 시도는 한 번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독자가 짐작하게 만든다. 그런 시도를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억압과 그로써 생겨나는 저항이 「이 해리의 원인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심리적 내용에 대한 기억 상실의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꿈이 다른 심리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잊히지 않으며 다른 심리 활동과 똑같이 굳게 기억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은, 이 원고를 엮으면서 해 볼 수 있었던 실험 하나가 내게 증명해 주었다. 나는 내 꿈 가운데 그때 어떤 이유로 불완전하게밖에 분석하지 못했거나 전혀 분석하지 못한 것을 많이 적어 두었다. 내 주장을 예시할 재료를 얻으려고 나는 그 가운데 몇몇을 한두 해 뒤에 분석해 보려 했다. 이 시도는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했다. 아니, 해석은 꿈이 막 꾸어졌을 때보다 이 나중 시기에 더 쉽게 풀렸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사실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들자면, 꿈을 꿀 무렵 나를 방해하던 저항 가운데 몇 가지를 그사이에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나중에 해석하면서 나는 예전에 얻은 꿈 사고의 결과를 지금의 결과와 견주어 보았는데, 지금의 결과가 대개 더 풍부했고, 예전의 결과는 바뀌지 않은 채 어김없이 지금의 결과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놀라움을 거두었다. 환자들이 이따금 내게 이야기하는 지난 몇 해의 꿈을, 마치 간밤의 꿈인 것처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성과를 거두며 해석하는 데 나는 오래전부터 익숙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뒤늦은 꿈 해석의 예 두 가지를 불안 꿈을 논할 때 보고하겠다. 이 실험을 처음 했을 때 나는 이 점에서 꿈이 신경증 증상처럼 행동하리라고 기대했고, 그 기대는 옳았다. 신경증 환자, 이를테면 히스테리 환자를 정신분석으로 치료할 때 나는 환자를 내게 데려온, 지금도 남아 있는 증상과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잊힌 병의 첫 증상에 대해서도 설명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첫 증상의 문제가 오늘의 더 급박한 문제보다 풀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찍이 1895년에 펴낸 『히스테리 연구(Studien über Hysterie)』에서 나는, 마흔이 넘은 한 여성 환자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겪은 첫 히스테리성 불안 발작의 해명을 보고할 수 있었다.5
이제 꿈 해석에 관해 격식 없이 몇 가지 소견을 더 늘어놓아도 좋겠다. 자기 꿈을 분석해 내 주장을 검증해 보려는 독자에게 어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 꿈의 해석이 아무 수고 없이 하룻밤 사이에 저절로 찾아오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시(內視) 현상이나, 평소 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그 밖의 감각을 지각하는 데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이런 지각에는 어떤 심리적 동기도 맞서지 않는데도 그렇다. 「원치 않는 표상」을 다스리기란 그보다 훨씬 어렵다.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이 논고에서 내세운 요구를 채워야 한다. 여기서 제시한 규칙을 따라, 작업하는 동안 그는 자기 안의 모든 비판, 모든 편견, 모든 감정적 또는 지적 편향을 억누르려 애쓸 것이다. 우리는 생리학 실험실의 실험자에게 준 클로드 베르나르의 계율 「Travailler comme une bête〔짐승처럼 일하라〕」를 언제나 마음에 새길 것이다. 곧 짐승만큼 끈질기되 결과에도 짐승만큼 무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권고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이 과제가 분명 더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꿈 해석은 언제나 한자리에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사슬을 따라가다 보면 작업 능력이 바닥났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날은 꿈이 더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럴 때는 작업을 멈추고 다음 날 다시 돌아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면 꿈 내용의 다른 부분이 주의를 끌고, 그렇게 해서 꿈 사고의 새로운 층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게 된다. 이것을 꿈의 「분할」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꿈 해석을 처음 하는 사람에게, 꿈의 모든 요소를 설명하는 재치 있고 앞뒤가 이어진 완전한 해석을 손에 넣었다 해도 과제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 해석 말고도, 그가 미처 보지 못한 같은 꿈의 또 다른 해석이 그 위에 겹쳐 있을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 표현되려고 애쓰는 무의식적 생각의 흐름이 얼마나 풍부한지 짐작해 보기란 참으로 간단하지 않다. 동화 속 떠돌이 재봉사처럼, 꿈 작업이 여러 뜻을 품은 표현 방식으로 말하자면 한 방에 파리 일곱 마리를 잡는 솜씨를 믿기란 더욱 그렇다. 독자는 저자가 쓸데없이 재주를 낭비한다고 줄곧 나무라고 싶어지겠지만, 스스로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든 생각을 고치게 될 것이다.
모든 꿈을 해석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해석 작업에서는 꿈의 왜곡을 일으킨 심리적 힘들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적 관심과 자제력, 심리학적 지식, 꿈 해석의 숙련으로 내면의 저항을 다스릴 수 있느냐는 결국 힘의 우열 문제가 된다. 어느 정도 나아가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적어도 꿈이 재치 있는 구조물이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은, 대개는 그 뜻을 짐작할 만큼은 나아갈 수 있다. 두 번째 꿈이 첫 번째 꿈에 대해 세운 해석을 확증하고 이어 가는 일은 아주 흔하다. 몇 주나 몇 달에 걸쳐 이어지는 꿈 한 계열 전체가 공통의 바탕 위에 서 있고, 그래서 서로 연관 지어 해석해야 하는 일도 있다. 잇달아 꾼 꿈들에서는 한 꿈이 다음 꿈에서는 가장자리로만 암시되는 것을 중심점으로 삼거나, 아니면 바로 그 반대여서, 두 꿈이 해석에서 서로를 보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같은 밤에 꾼 여러 꿈을 해석할 때 아주 으레 하나의 전체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예를 들어 보였다.
가장 잘 해석된 꿈에서도 우리는 한 부분을 어둠 속에 남겨 두어야 할 때가 많다. 해석해 보면 그 부분이 꿈 사고의 엉킨 실타래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실타래는 풀어낼 수 없지만 꿈 내용에 새로 보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꿈의 쐐기돌, 곧 꿈이 미지의 것 속으로 솟아오르는 자리다. 해석에서 마주치는 꿈 사고는 대개 끝맺음 없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 우리 사고 세계의 그물처럼 얽힌 짜임 속으로 녹아들기 때문이다. 이 짜임의 어느 더 촘촘한 곳에서, 버섯이 균사체에서 돋아나듯 꿈 소원이 솟아오른다.
이제 꿈의 망각이라는 사실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거기서 중요한 결론 하나를 끌어내는 것을 정말로 소홀히 했다. 깨어 있는 생활이 밤에 형성된 꿈을 깨어난 직후 통째로, 또는 낮 동안 조각조각 잊으려는 뚜렷한 의도를 보이고, 이 망각에 주로 관여하는 것이 이미 밤에 꿈에 맞서 제 몫을 한 꿈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이런 물음이 생긴다. 꿈 형성은 이 저항에 맞서 도대체 무엇을 해낸 것인가? 깨어 있는 생활이 꿈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치워 버린 가장 두드러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심리적 힘들의 작용을 고려하면, 저항이 낮에 그러하듯 밤에도 지배하고 있었다면 꿈은 결코 생겨나지 못했으리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항이 밤 동안 힘의 일부를 잃는다고 결론짓는다. 저항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왜곡을 만들어 내는 데서 저항이 꿈 형성에 관여한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항이 밤에는 약해진다는 가능성, 저항이 이렇게 약해진 덕분에 꿈 형성이 가능해졌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저항이 깨어나면서 온전한 힘을 되찾자마자, 힘을 잃고 있는 동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을 곧바로 치워 버린다는 것도 쉽게 이해된다. 기술 심리학은 꿈 형성의 주된 결정 요인이 정신의 잠든 상태라고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명을 덧붙일 수 있다. 수면 상태는 내심리적 검열을 약하게 함으로써 꿈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분명 이 결론을 꿈의 망각이라는 사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으로 여기고, 거기서 수면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의 에너지 관계에 관한 추론을 더 펼쳐 나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당분간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꿈의 심리학 속으로 조금 더 깊이 파고들고 나면, 꿈 형성의 기원을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꿈 사고가 의식에 이르지 못하게 막는 저항은 어쩌면 그 자체로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채 따돌려질 수도 있다. 또 꿈 형성에 유리한 두 요인, 곧 저항의 약화와 저항의 따돌림이 수면 상태 덕분에 동시에 가능해진다는 것도 그럴듯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멈추고, 이 생각의 흐름은 나중에 이어 가기로 하자.
이제 살펴보아야 할, 우리의 꿈 해석 절차에 대한 또 다른 일련의 반론이 있다. 이 해석에서 우리는 평소에 숙고를 이끄는 목적 표상을 모두 내려놓고 꿈의 한 요소에 주의를 기울인 다음, 그와 관련해 우리에게 떠오르는 원치 않는 생각들을 적어 둔다. 그러고는 꿈 내용의 다음 구성 요소를 붙잡고 같은 작업을 되풀이한다. 생각이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데려가든 상관하지 않고 그 생각에 이끌려 가다 보면, 끝내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헤매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침내 애쓰지 않고도 우리 꿈이 비롯한 꿈 사고와 마주치리라는 확신에 찬 희망을 품는다. 비판자는 이에 맞서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꿈의 한 요소에서 출발해 어딘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어떤 표상에든 무언가는 연상으로 이어 붙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다만, 이렇게 목적 없고 자의적인 생각의 나들이에서 꿈 사고를 용케 맞힌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 자기기만일 것이다. 연구자는 한 요소에서 연상의 사슬을 따라가다가 어떤 이유로 그 사슬이 끊기는 것이 보이면 두 번째 요소를 붙잡는다. 그러니 처음에는 한없이 뻗어 나가던 연상이 이제 좁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앞의 연상 사슬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분석에서 첫 사슬의 생각들과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 어떤 생각들을 더 쉽게 만나게 된다. 그러고는 꿈의 두 요소 사이의 연결점을 나타내는 생각을 찾아냈다고 상상한다. 게다가 그는 정상적인 사고에서 이루어지는, 한 표상에서 다른 표상으로 넘어가는 이행만 빼고는 생각을 잇는 데 온갖 자유를 허락하므로, 일련의 「중간 사고」로 자기가 꿈 사고라고 부르는 무언가를 꾸며 내는 것은 결국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중간 사고들은 달리 알려진 바가 없으므로, 그는 아무런 보증도 없이 그것을 꿈의 심리적 등가물이라며 내놓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는 자의적인 방법과, 우연을 지나치게 재치 있게 이용하는 일이 따라붙는다. 이런 쓸데없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식으로 어떤 꿈에서든 원하는 해석을 얼마든지 짜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반론이 우리에게 제기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변호하며 다음과 같은 것들을 내세울 수 있다. 우리의 꿈 해석이 서로 들어맞는다는 것, 개별 표상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다른 꿈 요소들과 놀라운 연관이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꿈 해석처럼 꿈을 그토록 완벽하게 덮고 설명하는 것을 앞서 확립된 심리적 연관을 따라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꿈 분석의 방법이 히스테리 증상을 풀 때 쓰는 방법과 같다는 사실로도 우리를 정당화할 수 있다. 히스테리 증상에서는 증상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방법의 올바름이 입증된다. 곧 끼워 넣은 삽화가 본문의 해명을 확증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 곧 이렇게 자의적이고 목적 없이 자아낸 생각의 사슬을 따라가서 어떻게 미리 정해진 목표에 이를 수 있느냐는 문제를 피해 갈 까닭은 없다. 우리는 이 문제를 풀 수는 없지만, 문제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있기 때문이다.
꿈 해석에서처럼 숙고를 내려놓고 원치 않는 표상이 떠오르게 내버려 둘 때 우리가 목적 없는 생각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주장은, 사실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가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목적 표상뿐이며, 이것이 멈추자마자 미지의, 더 정확히 말하면 무의식적인 목적 표상이 곧바로 작동하기 시작하여 이제 원치 않는 표상들의 흐름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다. 목적 표상이 없는 사고방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신생활에 미칠 수 있는 어떤 영향으로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다. 또 그런 사고방식이 자리 잡는 정신 착란 상태도 나는 알지 못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 분야에서 심리적 구조의 견고함을 너무 일찍 내버렸다. 목적 표상이 없는 무질서한 생각의 흐름은, 꿈의 형성이나 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히스테리와 편집증의 영역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확인했다. 어쩌면 그런 흐름은 내인성 정신 질환에서는 아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혼란 상태의 섬망조차 뢰레의 재기 넘치는 이론에 따르면 의미를 지니며, 빠진 부분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관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도 같은 확신에 이르렀다. 섬망은 제 지배를 더는 숨기려 애쓰지 않는 검열이 해 놓은 일이다. 이 검열은 더는 자기에게 거슬리지 않는 손질을 거들어 주는 대신 자기가 반대하는 것을 사정없이 지워 버리고, 그 때문에 남은 것은 앞뒤 없이 보이게 된다. 이 검열은 러시아 국경의 신문 검열관과 비슷하게 행동한다. 그 검열관은 자기가 보호하는 독자들의 손에 검은 연필이 지나간 외국 신문만 들어가게 한다.
어떤 연상의 사슬이든 따라가는 표상들의 자유로운 유희는 아마 파괴적인 기질적 뇌 병변에서나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정신신경증에서 그렇게 여겨지는 것은 언제나, 숨은 목적 표상이 전면으로 밀어낸 일련의 생각에 검열이 미친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6 떠오르는 표상들(또는 영상들)이 이른바 피상적 연상, 곧 소리의 닮음, 낱말의 이중 의미, 내적인 의미 관계 없는 우연한 결합으로 서로 이어져 있을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재담과 말장난에서 쓰기를 스스로 허락하는 온갖 연상으로 이어져 있을 때, 그것은 목적 표상에서 풀려난 연상의 틀림없는 표지로 여겨져 왔다. 이 구별 표지는 꿈 내용의 요소들에서 곁가지로, 곁가지에서 본래의 꿈 사고로 우리를 이끄는 생각의 연결에 들어맞는다. 그 놀라운 예를 우리는 꿈 분석에서 숱하게 발견했다. 거기서는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기에 너무 느슨한 연결도, 너무 고약한 재담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너그러움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은 멀리 있지 않다. 하나의 심리적 요소가 다른 요소와 거슬리거나 피상적인 연상으로 이어져 있을 때에는 언제나, 둘 사이에 검열의 저항에 굴복하는 올바르고 더 깊은 연결도 존재한다.
피상적 연상이 우세한 까닭을 올바로 설명하는 것은 목적 표상의 억제가 아니라 검열의 압력이다. 검열이 정상적인 연결 통로를 지나갈 수 없게 만들 때마다, 표상 속에서 피상적 연상이 깊은 연상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마치 산악 지방에서 전반적인 교통 두절, 이를테면 홍수 때문에 길고 넓은 간선 도로를 지나갈 수 없게 되어, 평소에는 사냥꾼이나 다니는 불편하고 가파른 오솔길로 교통을 이어 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두 경우를 구별할 수 있지만, 둘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첫째 경우에 검열은 두 생각의 연결에만 향하고, 두 생각은 서로 떨어져 나와 반대를 피한다. 그러면 두 생각은 차례로 의식에 들어오고 그 연결은 가려진 채 남는데, 그 대신 달리는 생각지도 못했을 둘 사이의 피상적 연결이 우리에게 떠오른다. 이 피상적 연결은 대개, 억제되었으나 본질적인 연결을 낳은 표상 복합체의 모서리가 아니라 다른 모서리에 붙어 있다. 둘째 경우에는 두 생각 모두 그 내용 때문에 검열에 굴복한다. 그러면 두 생각은 올바른 형태가 아니라 변형되어 대체된 형태로 나타나며, 대체된 두 생각은 자기들이 대신한 생각들 사이에 있던 본질적 관계를 피상적 연상으로 나타내도록 골라진다. 그러므로 두 경우 모두, 검열의 압력 아래 정상적이고 긴요한 연상이 피상적이고 겉보기에 부조리한 연상으로 전치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치를 알고 있기에 우리는 꿈 분석에서 피상적 연상에도 서슴없이 기댄다.7
신경증 환자의 정신분석은 두 가지 공리를 풍성하게 활용한다. 첫째, 의식적 목적 표상을 내려놓으면 표상의 흐름을 지배하는 힘이 숨은 목적 표상에게로 넘어간다는 것, 둘째, 피상적 연상은 억제된 더 깊은 연상을 대신하는 전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니, 정신분석은 이 두 공리를 제 기법의 기둥으로 삼는다. 환자에게 숙고를 모두 떨쳐 버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해 달라고 청할 때, 나는 그가 치료라는 목적 표상을 내려놓을 수 없으리라는 전제를 굳게 붙든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이 아무리 무해하고 자의적으로 보여도 이 병적 상태와 연관이 있다고 결론 내릴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환자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또 하나의 목적 표상은 나 자신의 인격이다. 따라서 이 두 해명을 온전히 평가하고 자세히 증명하는 일은 치료 방법인 정신분석 기법을 서술하는 일에 속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접한 주제 가운데 하나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이런 주제에 닿는 곳에서 꿈 해석이라는 주제를 떠나려 한다.8
모든 반론 가운데 옳은 것, 그리고 여전히 남는 것은 하나뿐이다. 해석 작업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을 모두 밤의 꿈 작업에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해석할 때 우리는 꿈 요소에서 꿈 사고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낸다. 꿈 작업은 반대 방향으로 길을 냈는데, 이 길들이 거꾸로도 똑같이 지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렵다. 오히려 낮 동안 우리는 새로운 생각의 연결로 중간 사고와 꿈 사고에 이곳저곳 다른 자리에서 가닿는 길을 낸다는 것이 드러났다. 낮의 새로운 생각 재료가 어떻게 해석의 무리 속에 자리를 잡는지, 그리고 아마 밤사이 더해진 저항까지 새롭고 더 먼 우회로를 내도록 몰아붙이는지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낮에 자아내는 곁가지의 수와 형태는, 그것이 찾고자 하는 꿈 사고로 가는 길을 열어 주기만 한다면 심리학적으로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주
1. 영역본 표제는 「The Psychology of the Dream Activities」다. 이 장 본문은 「dream activity」라는 말을 쓰지 않고 「dream process」를 쓰며, 이 번역은 dream activity를 「꿈 작업」으로 옮겼으므로 표제를 그대로 따르면 6장과 뒤섞인다. 본문의 말에 따라 「꿈 과정」으로 옮겼다. ― 옮긴이.
2. 영역본은 「We over-estimate the determination of the psychic」(과대평가한다)이라 했으나, 바로 뒤의 「이 영역에는 자의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와 이 대목 전체의 논지(꿈 보고의 변형을 자의적이라 여기는 것은 결정성을 얕보는 잘못이다)와 정반대다. 독일어 원문(unterschätzen)에 따라 「과소평가한다」로 바로잡았다. ― 옮긴이.
3.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제4판, 1912 참조. (영역본 준비 중.)
4. 망각 일반의 목적에 관해서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 참조.
5. A. A. 브릴이 번역하여 『히스테리 논문 선집』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6. 융은 조발성 치매의 분석으로 이 명제를 훌륭하게 입증했다. (『조발성 치매의 심리학』, F. 피터슨·A. A. 브릴 옮김.)
7. 피상적 연상이 꿈속에 드러나 있는 경우에도 같은 고찰이 물론 들어맞는다. 이를테면 모리가 보고한 두 꿈(1장 (마), pélerinage〔순례〕 ― pelletier ― pelle〔삽〕, kilometer ― kilogram ― gilolo, Lobelia ― Lopez ― Lotto)이 그렇다. 어떤 종류의 회상이 즐겨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지 나는 신경증 환자들과의 작업에서 알고 있다. 사춘기의 호기심 많은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이 성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욕구를 달래려고 백과사전을 뒤적이던 일이다.
8. 위의 명제들은 쓸 당시만 해도 몹시 있을 법하지 않게 들렸지만, 그 뒤 융과 그의 제자들이 『진단적 연상 연구(Diagnostische Assoziationsstudien)』에서 실험으로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