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퇴행
이제 반론에 맞서 방비를 갖추었거나, 적어도 방어의 무기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는 가리켜 보였으니, 그토록 오래 준비해 온 심리학적 탐구에 들어서는 일을 더는 미룰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탐구해 얻은 주요 결과를 한데 모아 보자. 꿈은 중대한 심리 행위이며, 그 추진력은 언제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다. 꿈이 소원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꿈의 숱한 특이성과 부조리는 꿈이 형성되는 동안 받은 심리적 검열의 영향에서 비롯한다. 이 검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 말고도, 심리적 재료를 압축하려는 강한 경향, 심상으로의 극화에 대한 고려, 그리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꿈 구조물에 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겉모습을 입히려는 고려가 꿈의 형성에 한몫했다. 이 명제들 하나하나에서 길은 더 나아가 심리학적 요청과 가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소원 동기와 네 조건 사이의 상호 관계, 그리고 네 조건이 서로 맺는 관계를 탐구해야 할 것이며, 꿈을 정신생활과 연관 지어야 할 것이다.
이 장 첫머리에서 우리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을 떠올리려고 꿈 하나를 인용했다. 이 불타는 아이 꿈의 해석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 완전하게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주지 않았다. 우리는 아버지가 도대체 왜 깨어나지 않고 꿈을 꾸어야 했는지 스스로 물었고, 아이를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려는 소원을 꿈의 유일한 동기로 알아보았다. 여기에 또 다른 소원 하나가 한몫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중의 논의를 거친 뒤에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소원 성취를 위해 수면 중의 정신 과정이 꿈으로 바뀌었다고 말해 두자.
소원 실현을 되돌려 놓으면, 두 형태의 심리적 사건을 서로 가르는 성질은 이제 하나만 남는다. 꿈 사고는 아마 이렇게 되어 있었을 것이다. 「시신이 누워 있는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어쩌면 촛불이 넘어져 아이가 불타고 있다!」 꿈은 이 숙고의 결과를 바꾸지 않고 전하되, 그것을 현재에 일어나며 깨어 있을 때의 체험처럼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황 속에 표현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꿈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두드러진 심리학적 성격이다. 어떤 사고가, 대개는 바라던 사고가, 꿈에서는 객관화되어 장면으로, 또는 우리가 믿기로는 체험된 것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이제 꿈 작업의 이 특징적인 특이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좀 더 겸손하게 말해서, 이것을 심리 과정들과 어떻게 관련지어야 할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꿈이 드러내는 모습에 서로 거의 독립된 뚜렷한 성격이 두 가지 있다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하나는 「어쩌면」을 빼고 현재의 상황으로 표현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고를 시각 영상과 말로 바꾼다는 것이다.
꿈 사고에서 일어나는 이 변형, 곧 꿈 사고에 담긴 기대를 현재로 옮겨 놓는 변형은 바로 이 꿈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는 아마 이 꿈에서 소원 성취가 맡는 특별한, 아니 오히려 부차적인 역할과 맞아떨어질 것이다. 잠 속에서 꿈 소원이 깨어 있을 때의 사고의 연장과 갈라지지 않는 다른 꿈, 이를테면 이르마의 주사 꿈을 들어 보자. 여기서 표현에 이르는 꿈 사고는 기원법으로 되어 있다. 「이르마의 병이 오토 탓이라면 좋으련만!」 꿈은 기원법을 지워 버리고 그 자리에 단순한 현재형을 놓는다. 「그래, 이르마의 병은 오토 탓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왜곡되지 않은 꿈조차 꿈 사고에 가하는 변화 가운데 첫째 것이다. 그러나 꿈의 이 첫째 특이성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다. 의식적 공상, 곧 백일몽을 끌어와 이것을 밝혀 두자. 백일몽도 제 표상 내용을 이와 비슷하게 다룬다. 도데의 주아외즈 씨는 딸에게는 자기가 일자리가 있어 사무실에 나가 있는 줄로 믿게 해 두고 일자리 없이 파리 거리를 헤매는데, 그러면서 그 역시 자기에게 후원과 일자리를 얻게 해 줄지도 모를 사정을 현재형으로 꿈꾼다. 그러므로 꿈은 백일몽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현재형을 쓴다. 현재형은 소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되는 시제다.
그러나 둘째 성질은 백일몽과 구별되는, 꿈 특유의 것이다. 곧 표상 내용이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지각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바뀌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믿으며 그것을 체험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다만 모든 꿈이 표상을 지각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바꾸는 이 변형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두자. 오로지 사고로만 이루어진 꿈들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꿈들이 꿈으로서 지니는 실질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내 꿈 「Autodidasker ― N. 교수에 관한 깨어 있을 때의 공상」이 그런 성질의 것이다. 이 꿈에는 그 내용을 내가 낮 동안 생각했다고 할 때보다 지각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더 들어 있지 않다. 게다가 긴 꿈에는 어느 것에나, 지각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지 않은 채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흔히 생각하거나 알듯이 그저 생각되거나 알려질 뿐인 요소들이 들어 있다. 또 표상이 지각할 수 있는 이미지로 바뀌는 이런 변형은 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할 때 저절로 나타날 수도 있고 정신신경증의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환각과 환영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여기서 떠올려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여기서 살피는 관계는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도 꿈의 이 성격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보여서 꿈 생활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려면 아주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 분야의 권위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꿈 이론에 관한 모든 소견 가운데, 나는 언급할 만한 것으로 하나를 강조하고 싶다. 위대한 G. Th. 페히너[25]는 꿈에 할애한 몇몇 논의와 관련하여, 꿈의 자리가 깨어 있을 때의 표상 활동과는 다른 곳에 있다는 믿음을 밝힌다(『정신물리학 원론(Psychophysik)』, 제2부, 520쪽). 다른 어떤 이론으로도 꿈 생활의 특별한 성질을 파악할 수 없다.
우리 손에 주어지는 관념은 심리적 장소라는 관념이다. 여기서 다루는 심리 장치가 해부학적 표본으로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아예 무시하기로 하고, 심리적 장소를 어떤 식으로든 해부학적으로 규정하려는 유혹은 조심스럽게 피하기로 하자. 우리는 심리학의 땅 위에 머물 것이며, 심리 활동에 쓰이는 장치를 복합 현미경이나 사진기, 또는 그 밖의 비슷한 장치 같은 것으로 떠올려 보라는 요구만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심리적 장소는 그런 장치 안에서 영상의 일차 요소 가운데 하나가 생겨나는 자리에 해당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미경과 망원경에는 장치의 손에 잡히는 부분이 하나도 놓여 있지 않은, 어느 정도는 상상의 것인 장소나 영역이 있다. 이 비유와 그 밖의 비슷한 모든 비유가 불완전하다고 사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비교들은 심리 활동을 분해하여 개별 활동을 장치의 개별 구성 부분에 하나하나 돌림으로써 심리 활동의 복잡함을 알기 쉽게 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거들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런 분석으로 심리 장치의 짜임새를 밝혀내려는 시도를 감행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나는 그런 시도에서 해로울 것이 없다고 본다. 냉정한 판단을 잃지 않고 비계를 건물로 착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가정에 마음껏 고삐를 풀어 주어도 된다고 나는 믿는다. 미지의 대상에 처음 다가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조 관념뿐이므로, 우리는 가장 조잡하고 가장 손에 잡히는 가설을 다른 어떤 가설보다 앞세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 장치를 하나의 복합 장치로 생각하고, 그 구성 부분을 심급, 또는 명료함을 위해 체계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면 이 체계들이 어쩌면 망원경의 여러 렌즈계처럼 앞뒤로 차례차례 놓여 서로 일정한 공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심리 체계가 실제로 공간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심리학적 사건들에서 흥분이 일정한 시간 순서에 따라 체계를 거쳐 간다는 사실로 확고한 순서가 세워지기만 하면 우리의 목적에는 충분하다. 다른 과정들에서는 이 순서가 바뀔 수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은 열어 두어도 좋다. 간결하게 말하기 위해, 이제부터 장치의 구성 부분을 「Ψ-체계」라고 부르겠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Ψ-체계로 이루어진 이 장치에 방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모든 심리 활동은 (내적 또는 외적) 자극에서 출발해 신경 자극으로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장치에 감각 말단과 운동 말단을 부여한다. 감각 말단에는 지각을 받아들이는 체계가 있고, 운동 말단에는 운동성의 수문을 여는 또 다른 체계가 있다. 심리 과정은 대체로 지각 말단에서 운동 말단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심리 장치의 가장 일반적인 도식은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된다.
그림 1.
그러나 이것은 심리 장치가 반사 장치처럼 짜여 있어야 한다는, 우리에게 오래전부터 익숙한 요구를 따른 것일 뿐이다. 반사 행위는 모든 심리 활동의 본보기로 남는다.
이제 우리에게는 감각 말단에서 첫 분화를 인정할 이유가 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지각은 우리 심리 장치 안에 흔적을 남기는데, 이것을 「기억 흔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기억 흔적과 관계되는 기능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른다. 심리 과정을 체계들에 결부시키겠다는 결심을 진지하게 지킨다면, 기억 흔적은 체계의 요소들에 생긴 지속적인 변화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다른 곳에서 밝혀졌듯이, 하나의 같은 체계가 제 요소에 생긴 변화를 충실히 간직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새것 그대로 남아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동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 뻔한 어려움이 생긴다. 우리의 시도를 이끄는 원칙에 따라, 우리는 이 두 활동을 서로 다른 두 체계에 나누어 맡기겠다. 장치의 첫째 체계는 지각 자극을 받아들이되 그 가운데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는다고, 즉 기억이 없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뒤에 첫째 체계의 순간적인 흥분을 지속적인 흔적으로 바꾸는 둘째 체계가 놓여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리 심리 장치의 도식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림 2.
지각 체계에 작용하는 지각에서 우리가 그 내용 자체 말고도 그만큼 지속적인 다른 무언가를 간직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의 지각은 기억 속에서 서로 이어져 있는 것으로 드러나며, 한때 동시에 일어났던 지각들은 특히 그렇다. 우리는 이것을 연상이라는 사실이라 부른다. 그런데 지각 체계에 기억이 전혀 없다면 연상을 위한 흔적도 간직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이제 분명하다. 예전 연결의 잔재가 새로운 지각에 맞서 영향을 미친다면, 개별 지각 요소는 제 기능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방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기억 체계가 연상의 토대라고 가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연상이라는 사실은 이런 데 있다. 저항이 줄어들고 길이 닦인 결과, 흥분이 기억 요소 가운데 하나에서 셋째 기억 체계보다는 둘째 기억 체계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더 살펴보면, 그런 기억 체계를 하나가 아니라 여럿 가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각 요소들이 퍼뜨린 같은 흥분이 이 체계들 속에서 여러 가지로 고정된다. 이 기억 체계들 가운데 첫째 것은 어쨌든 동시성에 따른 연상을 고정해 담고 있을 것이며, 더 멀리 놓인 체계들에서는 같은 흥분 재료가 다른 형태의 합치에 따라 배열될 것이다. 그래서 유사성 따위의 관계가 어쩌면 이 뒤쪽 체계들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체계의 심리적 의미를 말로 전하려는 시도는 물론 부질없을 것이다. 그 특징은 기억의 원재료 요소들과 맺는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가에, 더 깊은 이론을 가리키고자 한다면 이 요소들을 향한 전도 저항이 어떤 등급을 이루는가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어쩌면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리킬지도 모르는 일반적인 소견 하나를 끼워 넣어도 되겠다. 변화를 간직하는 능력이 없고 따라서 기억도 없는 지각 체계는 우리 의식에 감각적 성질의 온갖 다양성을 가져다준다. 반면에 우리의 기억은 그 자체로는 무의식적이며, 가장 깊이 새겨진 기억도 예외가 아니다. 기억은 의식될 수 있지만, 무의식 상태에서 제 영향을 모두 펼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성격이라 부르는 것은 분명 우리가 받은 인상의 기억 흔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것도 우리에게 가장 강하게 작용한 인상, 곧 아주 어린 시절의 인상, 거의 한 번도 의식되지 않는 그 인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기억이 다시 의식될 때에는 지각과 비교해 감각적 성질을 전혀 보이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보인다. 이제 Ψ-체계 안의 의식에 관한 한 기억과 성질은 서로를 배제한다는 것이 확인될 수 있다면, 뉴런 흥분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해 매우 유망한 통찰이 우리에게 열린다.
지금까지 감각 말단에서 심리 장치가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관해 가정한 것은 꿈과도, 꿈에서 끌어낸 심리학적 설명과도 상관없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꿈은 장치의 다른 부분을 아는 데 증거의 원천이 되어 준다. 두 심리적 심급을 감히 가정하지 않고서는 꿈 형성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 가운데 한 심급은 다른 심급의 활동을 비판에 부치며, 그 비판의 결과로 의식에서 배제되는 일이 생긴다.
우리가 보았듯이, 비판하는 심급은 비판받는 심급보다 의식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앞의 것은 칸막이처럼 뒤의 것과 의식 사이에 서 있다. 게다가 우리는 비판하는 심급을, 우리의 깨어 있는 생활을 이끌고 의지에 따른 의식적 행동을 결정하는 심급과 동일시할 본질적인 근거를 찾아냈다. 이제 우리 이론을 전개하면서 이 심급들을 체계로 바꾸어 놓는다면, 방금 말한 사실 때문에 비판하는 체계는 운동 말단 쪽에 두어야 한다. 이제 두 체계를 우리의 도식에 그려 넣고, 거기 붙인 이름으로 두 체계가 의식과 맺는 관계를 나타내기로 하자.
그림 3.
운동 말단 쪽의 체계들 가운데 마지막 것을 우리는 전의식이라 부른다. 이 체계 안의 흥분 과정이 다른 몇몇 조건만 채워지면, 이를테면 일정한 강도에 이르거나 주의라고 불러야 할 기능이 일정하게 배분되거나 하는 따위의 조건만 채워지면 더 지체하지 않고 의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이름이다. 이 체계는 동시에 수의적 운동성의 열쇠를 쥐고 있는 체계이기도 하다. 그 뒤에 있는 체계를 우리는 무의식이라 부르는데, 이 체계는 전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의식에 다가갈 길이 없고, 전의식을 지나가는 동안 그 흥분이 어떤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꿈 형성의 충동을 우리는 이 체계들 가운데 어디에 자리매길 것인가? 단순하게 하기 위해, 무의식계(Unc.)에 자리매긴다고 해 두자. 물론 나중의 논의에서 우리는 이것이 아주 옳지는 않다는 것, 꿈 형성은 전의식 체계에 속하는 꿈 사고와 결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꿈 소원을 다룰 때 꿈의 추진력은 무의식계가 대 준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며, 이 후자의 움직임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 체계를 꿈 형성의 출발점으로 가정할 것이다. 이 꿈의 충동은 다른 모든 사고 형성물과 마찬가지로 이제 전의식 안으로 자신을 이어 가고, 거기서부터 의식에 들어가려고 애쓸 것이다.
경험이 가르쳐 주듯이, 전의식에서 의식으로 가는 길은 낮 동안에는 검열의 저항 때문에 꿈 사고에 닫혀 있다. 밤이면 꿈 사고는 의식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변화 때문에 들어가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무의식과 전의식의 경계를 지키는 저항이 밤에 가라앉는다는 사실 덕분에 꿈 사고가 의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라면, 우리는 표상의 재료로 이루어진 꿈, 곧 지금 우리의 관심을 끄는 환각적 성격을 보이지 않는 꿈을 얻을 것이다.
두 체계, 곧 무의식계와 전의식계(Forec.) 사이의 검열이 가라앉는다는 것으로는 「Autodidasker」 같은 꿈만 설명할 수 있을 뿐, 지금 이 탐구의 첫머리에서 문제로 삼은 불타는 아이 꿈 같은 꿈은 설명할 수 없다.
환각적인 꿈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흥분이 퇴행 경로를 밟는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기술할 길이 없다. 흥분은 장치의 운동 말단이 아니라 감각 말단으로 옮겨 가, 마침내 지각 체계에 이른다. 심리 과정이 무의식에서 깨어 있는 상태로 이어져 나아가는 방향을 전진적이라고 부른다면, 꿈은 퇴행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퇴행은 분명 꿈 과정의 가장 중요한 특이성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퇴행이 꿈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의도적인 회상과 우리의 정상적인 사고를 이루는 다른 과정들도, 심리 장치 안에서 어떤 복합적인 표상 행위로부터 그 밑바탕에 놓인 기억 흔적이라는 원재료로 거슬러 가는 퇴행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뒤로 돌아감은 기억 이미지 너머까지 이르지 못하며, 지각 이미지의 환각적 생생함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꿈에서는 왜 이것이 다른가? 꿈의 압축 작업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표상들에 들러붙어 있는 강도가 꿈 작업을 거치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온전히 전이된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각 체계의 집중(occupation)이 사고와는 반대 방향으로 완전한 감각적 생생함에 이르기까지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마 앞의 심리 과정에 일어난 이런 변경일 것이다.
지금 이 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두고 우리가 조금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 하나에 이름을 붙였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꿈에서 표상이, 한때 그것이 생겨 나온 지각할 수 있는 이미지로 되바뀌면 우리는 그것을 퇴행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한 걸음조차 정당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것을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이런 이름을 붙이는가? 그래도 나는 「퇴행(regression)」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 하나를 방향을 갖춘 심리 장치의 도식과 이어 준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대목에 와서 처음으로, 그런 도식을 세우는 것이 수고할 만한 일이 된다. 이 도식의 도움을 받으면 꿈 형성의 다른 어떤 특이성도 더 생각할 것 없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꿈을 우리가 가정한 심리 장치 안에서 일어나는 퇴행 과정으로 본다면, 꿈 사고의 정신적 관계는 모두 꿈 작업에서 사라지거나 힘겹게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경험으로 입증된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도식에 따르면 이 정신적 관계들은 첫째 기억 체계들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앞쪽에 놓인 체계들에 담겨 있으며, 퇴행 속에서 지각 이미지에 자리를 내주고 제 표현을 잃을 수밖에 없다. 꿈 사고의 구조는 퇴행 속에서 그 원재료로 분해된다.
그러나 낮 동안에는 불가능한 이 퇴행을 어떤 변화가 가능하게 하는가? 여기서는 가정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개별 체계들에 딸린 에너지 충전에 틀림없이 어떤 변화가 있어서, 그 때문에 체계들이 흥분의 방출에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치라면 어느 것에서든, 흥분의 흐름에 미치는 같은 효과가 이런 변화의 여러 형태를 통해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수면 상태와, 이 상태가 장치의 감각 말단에 일으키는 숱한 에너지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낮 동안에는 지각의 Ψ-체계에서 운동성 쪽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이 흐름은 밤에는 멎고, 흥분의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더는 가로막지 않는다. 몇몇 저자의 이론에 따르면 꿈의 심리학적 성격을 설명해 준다는 저 「외부 세계로부터의 격리」가 바로 이것인 듯하다(1장 참조). 그러나 꿈의 퇴행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병적인 깨어 있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다른 퇴행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다른 형태들 앞에서는 방금 한 설명이 분명히 우리를 저버린다. 퇴행은 전진 방향의 감각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도 일어난다.
히스테리와 편집증의 환각, 그리고 정신이 정상인 사람들의 환영을 나는 실제로 퇴행에 해당하는 것, 곧 사실상 이미지로 바뀐 사고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변형을 겪는 것은 억제되었거나 무의식적인 기억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사고뿐이다. 그 예로 내 히스테리 환자 가운데 가장 어린 축에 드는 열두 살 난 소년을 들겠다. 소년은 「붉은 눈을 한 초록 얼굴들」에 겁에 질려 잠들지 못했다. 이 현상의 원천은 억제되었지만 한때는 의식되었던 기억, 곧 그가 네 해 동안 자주 보았던 한 소년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소년은 자위를 비롯한 어린아이의 숱한 나쁜 버릇에서 그에게 본받지 말아야 할 무서운 본보기였고, 그 버릇들은 이제 환자 자신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거리가 되어 있었다. 환자의 어머니는 그때, 그 버릇없는 소년의 안색이 초록빛을 띠고 있으며 그 소년이 붉은(즉 가장자리가 붉은)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 무서운 환영은 여기서 나왔으며, 그런 아이들은 정신이 이상해지고, 학교에서 공부가 늘지 않으며, 일찍 죽을 운명이라는 어머니의 경고를 끊임없이 그에게 일깨웠다. 이 어린 환자에게서 그 예측의 일부는 들어맞았다. 그는 중등학교 공부를 제대로 해 나가지 못했고, 그가 비의지적으로 떠올린 공상들을 살펴보니 드러났듯이 예언의 나머지 부분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의 치료가 성공을 거둔 뒤로 그는 다시 잠을 이루게 되었고 두려움을 떨쳤으며, 그 학년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여기에 마흔 살 된 히스테리 여성 환자가 자기의 정상적인 생활에서 겪은 일이라며 내게 들려준 환영 하나의 해석도 덧붙여 두겠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그녀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줄로 알고 있던 남자 형제가 방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 아들이 그녀 곁에서 자고 있었다. 아이가 외삼촌을 보고 공포에 질려 경련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녀는 홑이불을 끌어당겨 아이를 덮었다. 그렇게 하자 허깨비는 사라졌다. 이 환영은 그녀의 유년기 회상 하나를 고쳐 빚은 것이다. 그 회상은 의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녀 마음속의 무의식적 재료 전체와 더없이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그녀의 유모는 그녀에게, 젊어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환자는 그때 겨우 한 살 반이었다) 간질성 또는 히스테리성 경련을 앓았으며, 그 경련은 어머니의 남자 형제(환자의 외삼촌)가 머리에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으로 꾸며 어머니 앞에 나타났을 때 받은 공포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환영에는 회상과 똑같은 요소들, 곧 남자 형제의 출현, 홑이불, 공포, 그리고 그 결과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다른 관계 속에 배열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이되어 있다. 생각을 대신하는 이 환영의 뚜렷한 동기는, 외삼촌을 꼭 빼닮은 어린 아들이 외삼촌과 같은 운명을 겪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여기 든 두 예는 모두 수면과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으므로, 내 주장의 증거로는 알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환각성 편집증에 관한 나의 분석1과, 아직 발표하지 않은 정신신경증 심리학 연구의 결과를 끌어와, 이처럼 사고가 퇴행적으로 변형되는 경우에는 억제되었거나 무의식적인 회상, 대개는 유년기의 성격을 띤 회상의 영향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기억은 말하자면, 자기와 이어져 있으면서 검열 때문에 표현되지 못하는 사고를 퇴행 속으로, 곧 그 기억 자체가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표현 형식 속으로 끌어들인다. 히스테리 연구의 결과로서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두자면, 유년기 장면을 (기억이든 공상이든) 의식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하면 그 장면은 환각으로 보이며, 재현된 뒤에야 비로소 이 성격을 벗는다. 또 가장 이른 유년기의 기억은, 평소에는 기억이 시각적이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늘그막까지 지각할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는 성격을 간직한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이제 유년기의 회상이나 그것에 바탕을 둔 공상이 꿈 사고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 회상의 조각들이 얼마나 자주 꿈 내용에 떠오르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자주 꿈 소원을 낳기까지 하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꿈에서도 사고가 시각 이미지로 바뀌는 것은 시각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면서 되살아나려고 애쓰는 회상들이, 의식에서 떨어져 나와 표현되려고 몸부림치는 사고들에 미치는 끌어당김의 결과일 수 있다는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견해를 따르면, 꿈은 최근의 재료로 전이되어 생겨난, 유년기 장면의 변형된 대체물이라고도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유년기의 것은 스스로 되살아나기를 관철할 수 없으므로, 꿈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유년기 장면(또는 그 장면의 공상적 반복)이 말하자면 꿈 내용의 본보기를 제공한다는 뜻에서 그 의의를 이렇게 가리켜 두면, 셰르너와 그 제자들이 세운 가정, 곧 내적인 흥분 원천이 있다는 가정은 쓸데없어진다. 셰르너는 꿈이 유난히 생생하거나 시각 요소가 유난히 풍부할 때 「시각적 흥분」의 상태, 곧 시각 기관 안의 내적 흥분 상태를 가정한다. 이 가정에 반대할 필요는 없으며, 그런 흥분 상태를 시각 기관의 심리적 지각 체계에 대해서만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해도 된다. 다만 우리는 이 흥분 상태가 기억을 통해 만들어지며, 예전에 현재적이었던 시각적 흥분을 새로 되살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겠다. 내 경험에서는 유년기 회상이 이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를 들 수 없다. 내 꿈은 남들의 꿈이 그러리라고 내가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보다 분명 지각할 수 있는 요소가 덜 풍부하다. 그러나 최근 몇 해 사이에 꾼 가장 아름답고 가장 생생한 꿈에서, 나는 꿈 내용의 환각적 선명함을 최근에 받은 인상들의 감각적 성격으로 쉽게 거슬러 올라가 설명할 수 있다. 6장 (사)에서 이야기한 꿈에서는 물의 어두운 푸른 빛깔, 배의 연통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갈색 빛깔, 그리고 내가 본 건물들의 음울한 갈색과 붉은색이 내 마음에 깊고 오래가는 인상을 남겼다. 어떤 꿈을 시각적 흥분 탓으로 돌려야 한다면 바로 이 꿈이다. 그런데 무엇이 내 시각 기관을 이렇게 흥분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앞선 일련의 인상과 결합한 최근의 인상이었다. 내가 본 색깔들은, 꿈꾸기 전날 내 아이들이 나더러 감탄하라고 웅장한 건물을 쌓아 올린 장난감 블록의 색깔이었다. 큰 블록들은 똑같은 음울한 붉은색으로, 작은 블록들은 똑같은 푸른색과 갈색으로 덮여 있었다. 여기에 지난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색채 인상, 곧 이손초강과 석호〔베네치아 라구나〕의 매혹적인 푸른빛, 알프스 지방의 갈색 색조가 이어져 있었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색깔들은 기억 속에서 본 색깔들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꿈이 제 표상 내용을 조형적 이미지로 바꾸는 이 특이성에 관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을 되짚어 보자. 우리는 꿈 작업의 이 성격을 설명하지도, 알려진 심리학 법칙으로 거슬러 올라가 밝히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미지의 연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따로 골라내어 「역행적」 성격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퇴행이 일어난 곳이면 어디서나 우리는 그것을, 사고가 의식으로 가는 정상적인 길을 따라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저항의 효과로, 그리고 거기 있는 생생한 기억들이 그 사고에 동시에 미치는 끌어당김의 결과로 보았다. 꿈에서는 낮 동안 감각 기관에서 흘러나오는 전진적 흐름이 멎는 덕분에 퇴행이 쉬워지는지도 모른다. 다른 형태의 퇴행에서는 이 보조 요인을 대신할 보상이, 퇴행의 다른 동기들이 강화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 병리적 퇴행의 경우에는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너지 전이 과정이 정상적인 정신생활의 퇴행에서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과정이 지각 체계들의 완전한 환각적 집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꿈 작업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표현 가능성에 대한 고려」라고 기술한 것은, 꿈 사고가 건드린, 시각적으로 기억된 장면들의 선택적 끌어당김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꿈을 심리학적으로 활용하는 이 첫 부분이 우리 자신조차 온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 속에서 쌓아 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아주 벗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해도 틀림없이 거의 같은 곳에 이를 것이며, 그 뒤에는 어쩌면 앞길을 더 잘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주
1. 『히스테리와 기타 정신신경증에 관한 논문 선집』, 165쪽, A. A. 브릴 옮김(『신경정신질환 저널』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