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소원 성취
앞에서 인용한 불타는 아이 꿈은 소원 성취 이론이 부딪히는 어려움을 헤아려 볼 반가운 기회를 준다. 꿈이 소원 성취일 뿐이라는 것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 그것도 불안 꿈이 내놓는 모순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의 분석적 해명들에서 꿈 뒤에 뜻과 심리적 타당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우리는 이 뜻이 그토록 단순하게 규정되리라고는 좀처럼 기대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확하지만 간결한 정의에 따르면, 꿈은 잠 속에서 (잠들어 있는 한에서) 이어지는 사고다. 낮 동안 우리의 사고가 판단, 추론, 반박, 기대, 의도 따위의 그토록 다양한 심리 행위를 낳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잠든 동안의 사고는 왜 소원을 낳는 일에만 매여 있어야 하는가? 오히려 다른 심리 행위, 이를테면 걱정을 꿈의 형태로 나타내는 꿈이 많지 않은가? 그리고 앞서 말한 아버지의 아주 투명한 꿈이야말로 바로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잠든 사이 눈에 비쳐 든 불빛을 보고, 촛불이 넘어져 시신에 불이 붙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스러운 결론을 끌어낸다. 그리고 이 결론에 현재 시제로 펼쳐지는, 감각에 와닿는 상황을 입혀 그것을 꿈으로 바꾼다. 이 꿈에서 소원 성취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느 쪽이 우세하다고 짐작해야 하는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이어진 사고인가, 아니면 새로운 감각 인상이 불러일으킨 사고인가?
이런 고려는 모두 정당하며, 꿈에서 소원 성취가 맡는 역할과, 잠 속으로 이어지는 깨어 있을 때의 사고가 지니는 의의를 더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실 우리가 꿈을 두 무리로 나누게 된 것도 이미 소원 성취 때문이었다. 우리는 드러내 놓고 소원 성취인 꿈들을 찾아냈고, 또 소원 성취를 알아볼 수 없고 흔히 갖은 수단으로 그것이 감추어져 있는 꿈들도 찾아냈다. 뒤의 부류에서 우리는 꿈 검열의 영향을 알아보았다. 위장되지 않은 소원 꿈은 주로 아이들에게서 발견되었지만, 잠깐 스쳐 가는 솔직한 소원 꿈이 어른에게서도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이 낱말은 일부러 강조했다).
이제 꿈에서 이루어지는 소원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어디서」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대립, 또는 어떤 차이를 염두에 두는가? 내 생각에 그것은 의식적인 낮의 생활과, 무의식적인 채로 남아 밤에만 제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심리 활동 사이의 대립이다. 그리하여 나는 소원의 기원에서 세 가지 가능성을 찾아낸다. 첫째, 소원은 낮 동안 일깨워졌으나 외적인 사정 때문에 충족을 얻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면 인정은 받았으되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이 밤으로 넘겨진다. 둘째, 소원은 낮 동안 떠올랐으나 물리쳐졌을 수 있다. 그러면 이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억제된 소원이 남는다. 또는 셋째, 소원은 낮의 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고, 밤중에 억제된 것에서 생겨나는 소원들에 속할 수도 있다. 이제 심리 장치에 관한 우리의 도식을 따른다면, 첫째 종류의 소원은 전의식계에 자리매길 수 있다. 둘째 종류의 소원은 전의식계에서 무의식계로 밀려났으며, 어딘가에서 버틸 수 있다면 오직 그곳에서만 버틸 수 있다고 가정해도 될 것이다. 한편 셋째 종류의 소원 충동은 무의식계를 아예 벗어날 수 없다고 우리는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원천에서 생겨나는 소원들이 꿈에 대해 같은 가치를 지니는지, 꿈을 일으키는 힘도 같은지 하는 물음이 떠오른다.
이 물음에 답하려고 우리가 가진 꿈들을 훑어보면, 곧바로 꿈 소원의 넷째 원천으로 갈증이나 성욕처럼 밤중에 생겨나는 현재적 소원 자극을 덧붙이고 싶어진다. 그러고 나면 꿈 소원의 원천은 꿈을 일으키는 능력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낮에 중단된 바다 여행을 꿈에서 이어 간 어린 소녀의 꿈과, 앞에서 말한 다른 아이들의 꿈이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 꿈들은 낮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억제되지는 않은 소원으로 설명된다. 낮 동안 억제된 소원이 꿈에서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아주 많은 예로 보여 줄 수 있다. 이 부류에서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빈정거리기를 좀 좋아하는 한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보다 어린 친구가 약혼을 하자, 그녀는 하루 내내 아는 사람들에게서 그 약혼자를 아느냐,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녀는 아낌없는 칭찬으로 대답하면서 자기 판단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사실은 진실을, 곧 그가 평범한 사람(Dutzendmensch)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데도 말이다.1 그날 밤 그녀는 같은 질문을 받고 「추가 주문 시에는 번호만 알려 주셔도 충분합니다」라는 상투 문구로 대답하는 꿈을 꾼다. 끝으로 우리는 수많은 분석에서, 왜곡을 겪은 모든 꿈에서 소원은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지각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 모든 소원이 꿈 형성에 대해 같은 가치와 힘을 지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정이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지금 나는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꿈 소원이 이보다 더 엄격하게 결정된다고 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아이들의 꿈을 보면, 낮에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이 꿈을 일으키는 장본인일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아이의 소원이며, 유년기의 힘을 지닌 소원 충동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낮에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이 어른에게 꿈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할지 나는 몹시 의심스럽다. 오히려 우리가 지적 활동으로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 감에 따라, 어린 시절에는 자연스러운 그런 강렬한 소원을 만들어 내거나 품고 있는 일을 헛된 것으로 여겨 점점 더 물리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유년기 유형의 심리 과정을 더 오래 간직한다. 여기서 보이는 차이는, 본래 또렷하던 시각적 상상이 차츰 쇠퇴해 가는 데서 볼 수 있는 차이와 같다.
그러나 대체로 나는, 낮에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만으로는 어른에게 꿈을 만들어 내기에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의식 생활에서 비롯하는 소원 자극이 꿈을 일으키는 데 한몫한다는 것은 기꺼이 인정하지만, 아마 그것이 전부일 것이다. 전의식적 소원이 다른 원천에서 힘을 보강받지 않는다면 꿈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 원천은 무의식이다. 나는 의식적 소원은 자신을 강화해 줄 비슷한 무의식적 소원을 일깨우는 데 성공할 때에만 꿈의 유발 요인이 된다고 믿는다. 신경증의 정신분석에서 얻은 시사를 따라, 나는 이 무의식적 소원들이 언제나 활동하고 있어서 의식 생활에서 오는 충동과 결합할 기회를 찾기만 하면 언제든 표현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자신의 더 큰 강도를 그 충동의 더 작은 강도에 옮겨 준다고 믿는다.2 그래서 꿈에서는 의식적 소원만 실현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꿈의 형성에 나타나는 작은 특이점 하나가, 무의식에서 온 강력한 조력자의 자취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언제나 활동하며 말하자면 불멸인, 무의식에서 온 이 소원들은 전설 속의 티탄들을 떠올리게 한다. 까마득한 옛날 승리한 신들이 그들 위로 굴려 얹은 육중한 산들을 그때부터 줄곧 짊어지고 있으며, 억센 사지가 경련할 때마다 지금도 이따금 그 산들을 뒤흔드는 티탄들 말이다. 신경증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에서 배웠듯이, 억압 속에서 발견되는 이 소원들은 그 자체로 유년기에 기원을 둔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꿈 소원이 어디서 비롯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앞서 밝힌 견해를 거두어들이고, 다음과 같은 다른 견해로 바꾸고 싶다. 꿈에 나타나는 소원은 유년기의 소원이어야 한다. 그 소원은 어른에게서는 무의식계에서 비롯하는 반면, 전의식계와 무의식계 사이에 분리와 검열이 아직 없거나 이제 막 형성되는 중인 아이에게서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온,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억압되지 않은 소원이다. 이 견해를 일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곳에서도 자주 증명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의식적인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남은 소원 충동은 꿈 형성에서 뒷전으로 밀려난다. 꿈 내용에서 나는 이 소원 충동에, 잠자는 동안의 현재적 감각이라는 재료에 돌린 몫만을 돌리려 한다(5장 (다) 참조). 이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남은, 소원이 아닌 다른 심리적 자극들을 고려한다 해도, 나는 이 생각의 흐름이 내게 그어 준 노선을 지키기만 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먹음으로써, 깨어 있을 때의 사고에 쓰이던 에너지 총량을 잠정적으로 끊어 내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이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잘 자는 사람이다. 나폴레옹 1세는 이런 사람의 본보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이 일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늘 완벽하게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풀리지 않은 문제, 시달리게 하는 근심, 압도적인 인상은 잠자는 동안에도 사고 활동을 이어 가게 하며, 우리가 전의식이라고 이름 붙인 체계 속에서 심리 과정을 유지한다. 잠 속으로 이어지는 이 정신 과정들은 다음 무리로 나눌 수 있다. 1, 우연한 방해 때문에 낮 동안 끝맺지 못한 것. 2, 정신력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끝내지 못한 채 남은 것, 즉 풀리지 않은 것. 3, 낮 동안 물리쳐지고 억제된 것. 여기에, 낮 동안 전의식의 작업으로 우리의 무의식계에서 흥분된 것이 이루는 강력한 무리 (4)가 합쳐진다. 끝으로 사소하고 그래서 처리되지 않은 채 남은 낮의 인상으로 이루어진 무리 (5)를 덧붙일 수 있다.
깨어 있는 삶의 이 잔재들이 잠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심리적 강도를, 특히 풀리지 않은 것의 무리에서 나오는 강도를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이 흥분들은 틀림없이 밤에도 표현되려고 계속 애쓴다. 그리고 수면 상태에서는 전의식 속에서 흥분이 평소처럼 이어지는 일도, 흥분이 의식되어 끝맺어지는 일도 불가능해진다고 그만큼 확실하게 가정할 수 있다. 우리가 밤에도 우리의 정신 과정을 정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잠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수면 상태가 전의식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감히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수면의 심리학적 성격이 본질적으로 바로 이 체계의 에너지 변화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체계는 운동성으로 들어가는 길목도 지배하는데, 잠자는 동안 이 운동성은 마비되어 있다. 이와 달리 꿈의 심리학에는, 수면이 무의식계의 상태에 이차적인 변화 말고 다른 변화를 일으킨다고 가정할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전의식계 안의 밤의 흥분에는, 무의식계에서 오는 소원 흥분이 밟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이 남아 있지 않다. 이 흥분은 무의식계에서 힘을 보강받아야 하고, 무의식적 흥분이 밟는 우회로를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전의식적인 낮의 잔재(day remnants)는 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낮의 잔재가 꿈속으로 풍부하게 침투하고, 꿈 내용을 이용해 밤에도 의식 앞에 억지로 나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니, 낮의 잔재는 때로 꿈 내용을 지배하기까지 하며, 낮의 작업을 이어 가도록 꿈 내용을 몰아붙인다. 또 낮의 잔재가 소원이라는 성격 말고 다른 어떤 성격이든 똑같이 지닐 수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낮의 잔재가 꿈에 받아들여지려면 어떤 조건을 따라야 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몹시 유익하며, 소원 성취 이론에는 결정적이기까지 하다.
앞에서 예로 든 꿈 가운데 하나, 이를테면 내 친구 오토가 바제도병의 증상을 보이는 것 같은 꿈(5장 (라))을 골라 보자. 낮 동안 내 친구 오토의 모습이 나를 얼마간 걱정스럽게 했고, 이 걱정은 이 사람에 관한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런 감정이 잠 속까지 나를 따라왔다고 가정해도 될 것이다. 나는 아마 그에게 무슨 탈이 났는지 알아내려고 골몰해 있었을 것이다. 밤에 내 걱정은 내가 보고한 그 꿈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꿈의 내용은 무의미했을 뿐 아니라 소원 성취도 전혀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낮에 느낀 걱정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게 표현된 원천을 캐기 시작했고, 분석이 그 연관을 드러내 주었다. 나는 내 친구 오토를 어떤 L. 남작과, 나 자신을 어떤 R. 교수와 동일시했다. 낮의 사고 대신 하필 이런 대체물을 고르도록 내가 떠밀린 데에는 설명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무의식계에서 언제나 나 자신을 R. 교수와 동일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불멸하는 유년기 소원 가운데 하나, 곧 위대해지려는 소원의 실현을 뜻했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상태였다면 틀림없이 물리쳤을, 내 친구에 대한 꺼림칙한 생각들이 이 기회를 틈타 꿈속으로 숨어들었지만, 낮의 걱정 역시 꿈 내용 속의 대체를 통해 나름의 표현을 얻었다. 그 자체로는 소원이 아니라 오히려 걱정이었던 낮의 사고는, 이제는 무의식적이고 억제된 유년기 소원과 어떻게든 연결되어야 했다. 그러면 그 소원이 이 낮의 사고를 ― 물론 이미 알맞게 손질된 모습으로 ― 의식에 대해 「생겨나게」 해 주었다. 이 걱정이 강하게 지배할수록 맺어야 할 연결도 그만큼 강해야 한다. 소원의 내용과 걱정의 내용 사이에는 아무 연관이 없어도 되며, 우리 예에서도 연관은 전혀 없었다.
이제 우리는 꿈에 대해 무의식적 소원이 지니는 의의를 날카롭게 규정할 수 있다. 꿈을 일으키는 자극이 주로, 또는 오로지 낮의 잔재에서 나오는 꿈이 한 부류를 이룬다는 것은 인정해도 좋다. 그리고 언젠가 「원외 교수」가 되고 싶다는 나의 간절한 욕망조차, 친구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아직 활동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날 밤 나를 방해받지 않고 잠들어 있게 내버려 두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걱정만으로는 꿈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꿈에 필요한 추진력은 소원이 대 주어야 했고, 그런 소원을 꿈의 추진력으로 제 손으로 구해 오는 것은 걱정이 할 일이었다. 비유로 말하자면, 낮의 사고가 꿈에서 기업가(entrepreneur) 역할을 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기업가는 머릿속에 어떤 구상을 품고 있든,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든, 자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필요한 비용을 치러 줄 자본가에게 기대야 한다. 그리고 꿈에 드는 심리적 비용을 대 주는 이 자본가는, 깨어 있을 때의 사고가 어떤 성질의 것이든, 언제나 그리고 틀림없이 무의식에서 온 소원이다.
다른 경우에는 자본가 자신이 꿈의 기업가가 된다. 사실 이쪽이 더 흔한 경우인 것 같다. 낮의 작업이 무의식적 소원을 불러일으키고, 이 소원이 다시 꿈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꿈 과정은 여기서 비유로 쓴 경제적 관계의 다른 모든 가능성과도 나란히 간다. 그러니까 기업가가 자본을 얼마간 스스로 댈 수도 있고, 여러 기업가가 같은 자본가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으며, 여러 자본가가 기업가에게 필요한 자본을 함께 댈 수도 있다. 이처럼 꿈 소원 둘 이상이 함께 만들어 내는 꿈도 있고 그와 비슷한 변형도 많지만, 이런 것들은 쉽게 건너뛸 수 있고 우리에게 더는 흥미롭지 않다. 꿈 소원에 관한 이 논의에서 끝맺지 못한 것은 나중에 더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쓴 비유들의 「tertium comparationis」〔비교되는 두 것의 공통점〕, 즉 알맞게 할당되어 우리가 자유로이 쓸 수 있게 주어진 액수는, 꿈의 구조를 예시하는 데 한층 더 섬세하게 쓰일 수 있다. 6장 (나)에서 보였듯이, 대부분의 꿈에서 우리는 지각할 수 있는 강도를 특별히 많이 공급받은 중심 하나를 알아볼 수 있다. 이 중심은 으레 소원 성취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꿈 작업의 전치를 되돌림의 과정으로 풀어 보면, 꿈 사고 속 요소들의 심리적 강도가 꿈 내용 속 요소들의 지각할 수 있는 강도로 대체되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소원 성취 곁에 있는 요소들은 흔히 소원 성취의 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소원에 맞서는 불쾌한 사고의 파생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흔히 인위적으로 중심 요소와 연결됨으로써, 표현에 이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강도를 얻었다. 이렇게 소원 성취의 표현력은 연상의 일정한 범위에 퍼지고, 그 범위 안에서 그 자체로는 힘이 없는 요소까지 포함해 모든 요소를 표현으로 끌어올린다. 강한 소원이 여럿 있는 꿈에서는 개별 소원 성취의 범위를 서로 쉽게 가를 수 있다. 꿈속의 틈도 흔히 그런 경계 지대로 설명할 수 있다.
앞의 논의로 꿈에 대한 낮의 잔재의 의의가 상당히 제한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낮의 잔재에 얼마간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는 있다. 모든 꿈은 그 내용에서 최근 어느 날의 어떤 인상, 그것도 흔히 더없이 사소한 인상과의 연관을 보인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이 드러내 주는 만큼, 낮의 잔재는 꿈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될 성분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꿈의 혼합물에 이것이 덧붙여져야 할 필연성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5장 (가) 참조). 이 필연성은 무의식적 소원이 맡는 역할을 면밀히 좇은 다음 신경증 심리학에서 가르침을 구할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무의식적 표상은 그 자체로는 전의식에 결코 들어갈 수 없으며, 이미 전의식에 속해 있는 무해한 표상과 결합하여 그 표상에 자기 강도를 옮기고 그 밑에 자신을 숨김으로써만 그곳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전이라는 사실이며, 신경증 환자의 정신생활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 가운데 아주 많은 것이 이 사실로 설명된다.
이렇게 해서 과분하게 풍부한 강도를 얻은 전의식의 표상은, 전이를 겪고도 바뀌지 않은 채 남을 수도 있고, 전이하는 표상의 내용에서 비롯한 변형을 억지로 떠안을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비유를 끌어오기 좋아하는 나를 독자가 너그러이 봐주리라 믿거니와, 억압된 표상이 놓인 처지는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인 치과 의사가 놓인 처지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미국인 치과 의사는 정규 의사에게서 그 의사의 이름을 공개 간판에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법적 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개업할 수 없다. 또 치과 의사와 이런 동맹을 맺는 것이 당연히 가장 바쁜 의사들이 아니듯이, 정신생활에서도 억압된 표상을 가려 주는 데는, 전의식에서 작용하는 주의를 그 자신은 그다지 많이 끌지 않은 전의식적 표상이나 의식적 표상만이 선택된다. 무의식은 전의식의 인상과 표상 가운데, 사소하다고 해서 눈길을 받지 못한 채 남은 것들이나 물리쳐지는 바람에 곧 이 주의를 빼앗긴 것들을 즐겨 자기 연결 속에 휘감는다. 한 방향으로 긴밀한 연결을 맺은 표상은 새로운 연결의 무리 전체에 대해 거의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연상 연구에서 잘 알려져 있고 모든 경험이 확인해 주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에 이 원리에서 출발해 히스테리성 마비의 이론을 세워 보려 한 적이 있다.
신경증 분석에서 알게 된, 억압된 표상의 전이에 대한 바로 그 필요가 꿈에서도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꿈의 두 수수께끼를 단번에 설명할 수 있다. 곧 모든 꿈 분석에서 최근의 인상이 엮여 들어가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이 최근 요소가 흔히 더없이 사소한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배운 것을 덧붙일 수 있다. 이 최근의 사소한 요소들이 꿈 사고 가운데 가장 깊숙이 놓인 것의 대체물로 그토록 자주 꿈 내용에 들어오는 것은, 저항하는 검열을 가장 덜 두려워해도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검열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하찮은 요소가 선호되는 까닭만 설명해 줄 뿐이고, 최근 요소가 늘 있다는 것은 전이의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두 무리의 인상은 모두 아직 연상에서 자유로운 재료를 원하는 억압의 요구를 채워 준다. 사소한 인상은 폭넓은 연상을 맺을 계기를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최근의 인상은 그런 연상을 맺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낮의 잔재가 ― 사소한 인상도 꿈 형성에 참여할 때에는 이제 여기에 넣을 수 있다 ― 억압된 소원이 쓸 수 있는 추진력을 무의식계에서 빌려 올 뿐 아니라, 무의식에 없어서는 안 될 무언가, 곧 전이에 필요한 발판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심리 과정을 더 깊이 파고들려 한다면, 먼저 전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동의 움직임을 더 밝혀야 할 것이다. 정신신경증 연구는 실로 우리를 그쪽으로 떠밀지만, 꿈 자체는 이 점에서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
낮의 잔재에 관해 한 가지만 더 말해 두자. 낮의 잔재야말로 수면의 진짜 방해꾼이며 꿈은 그렇지 않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꿈은 오히려 수면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점은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꿈 소원을 논의하면서 그것을 무의식계의 영역까지 거슬러 추적했고, 그것이 낮의 잔재와 맺는 관계를 분석했다. 낮의 잔재는 그 자체가 소원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종류의 심리적 충동일 수도 있으며, 그저 최근의 인상일 수도 있다. 이로써 우리는 꿈 형성에서 의식적 사고 활동이 온갖 변이 속에서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어떤 주장에도 자리를 내준 셈이다. 우리의 사고 계열에 기댄다면, 꿈이 낮의 작업을 이어받아 깨어 있는 상태에서 풀지 못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매듭짓는 저 극단적인 경우조차 설명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석해 보면 전의식적 활동의 노력에 이런 동맹과 성공적인 보강을 제공한 유년기의 또는 억압된 소원의 원천이 드러날 만한 예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수수께끼의 해답에 한 걸음도 더 다가가지 못했다. 무의식은 왜 잠자는 동안에만 소원 성취를 위한 추진력을 댈 수 있는가? 이 물음의 답은 소원의 심리적 본성을 밝혀 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답은 심리 장치 도식의 도움을 받아 주어질 것이다.
이 장치 역시 오랜 발달 과정을 거쳐서야 지금처럼 완성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 장치를 그 활동의 이른 단계에 있던 모습으로 복원해 보자. 다른 곳에서 확증될 가정들에서, 우리는 장치가 처음에는 되도록 흥분 없이 지내려고 애썼으며, 그래서 처음 형성될 때 그 도식은 반사 장치의 형태를 취했다는 것을 안다. 그 덕분에 장치는 밖에서 자기에게 닿는 감각 자극을 무엇이든 운동 경로를 통해 곧바로 방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의 욕구가 이 단순한 기능을 흔들어 놓았다. 장치가 더 발달하도록 떠미는 힘을 주는 것도 이 삶의 욕구다. 삶의 욕구는 처음에 커다란 신체적 욕구의 형태로 장치에 나타났다. 내적 욕구가 일으킨 흥분은 운동성에서 출구를 찾는데, 이것을 「내적 변화」 또는 「정서 표현」이라 부를 수 있다. 배고픈 아이는 어쩔 줄 모르고 울거나 버둥거리지만, 아이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내적 욕구에서 비롯하는 흥분이 요구하는 것은 한순간의 분출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 아이의 경우에는 바깥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 충족 체험이 이루어져 내적 흥분이 없어질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 체험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는 어떤 지각(우리 예에서는 음식의 지각)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지각의 기억 이미지는 이후 욕구의 흥분이 남긴 기억 흔적과 연합된 채 남는다.
이렇게 맺어진 연결 덕분에, 이 욕구가 다음번에 나타날 때에는 하나의 심리적 충동이 생겨난다. 이 충동은 이전 지각의 기억 이미지를 되살리고, 그리하여 이전 지각 자체를 다시 불러낸다. 즉 첫 충족의 상황을 실제로 되살려 놓는다. 이런 충동을 우리는 소원이라 부른다. 지각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소원 성취이며, 욕구 흥분이 지각을 온전히 되살리는 것이 소원 성취에 이르는 가장 짧은 길이다. 이 길을 실제로 밟는 심리 장치의 원시적 상태, 즉 소원하는 일이 환각으로 녹아드는 상태를 가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첫 심리 활동은 지각 동일성(identity of perception)을 목표로 한다. 즉 욕구가 채워지는 일과 결부된 그 지각을 되풀이하려 한다.
이 원시적인 정신 활동은 쓰라린 삶의 경험을 거쳐 더 목적에 맞는 이차적 활동으로 바뀌었음이 틀림없다. 장치 안의 짧은 퇴행적 경로에서 지각 동일성을 세우는 것은, 같은 지각을 바깥에서 되살릴 때 반드시 뒤따르는 결과를 다른 면에서는 가져오지 못한다. 충족은 일어나지 않고 욕구는 계속된다. 내적 에너지 총량을 외적 에너지 총량과 같게 하려면 앞의 것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한다. 환각성 정신병과, 원하는 대상에 매달리느라 심리적 능력을 다 써 버리는 굶주림의 섬망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심리적 힘을 더 알맞게 쓰려면 완전한 퇴행을 제지하여, 퇴행이 기억 이미지 너머로 뻗어 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기억 이미지에서 출발해, 바라던 동일성을 마침내 외부 세계로부터 세우는 데 이르는 다른 길을 고를 수 있다. 이 제지와, 그에 따라 흥분을 딴 길로 돌리는 일은 수의적 운동성을 지배하는 둘째 체계의 과제가 된다. 즉 이제 그 활동을 통해 운동성이라는 비용이 미리 떠올려 둔 목적에 쓰이게 되는 체계다. 그러나 기억 이미지에서 출발해 외부 세계로부터 지각 동일성을 세우는 데까지 길을 헤쳐 나가는 이 복잡한 정신 활동 전체는, 경험이 소원 성취에 떠안긴 우회로를 나타낼 뿐이다.3 사고란 실로 환각적 소원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꿈을 소원 성취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자명해진다. 소원 말고는 그 무엇도 우리의 심리 장치를 활동하도록 몰아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원을 이루면서 짧은 퇴행적 경로를 따르는 꿈은, 그렇게 함으로써 목적에 맞지 않는다 하여 버려진 심리 장치의 일차적 형태를 보여 주는 한 예를 우리에게 보존해 줄 뿐이다. 정신생활이 아직 어리고 서툴렀을 때 깨어 있는 상태를 지배하던 것이 수면 상태로 쫓겨난 듯하다. 어른이 된 인류가 내버린 원시적 무기인 활과 화살을 아이 방에서 다시 보게 되는 것과 같다. 꿈은 아이의 버려진 정신생활의 한 조각이다. 정신병에서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평소 억제되어 있는 심리 장치의 이런 작동 방식이 다시 힘을 얻고, 그러면서 외부 세계에서 우리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무능을 드러낸다.
무의식적 소원 충동은 분명 낮에도 제 힘을 내세우려 애쓰며, 전이라는 사실과 정신병은 이 충동이 전의식 체계를 거쳐 가는 길을 따라 의식에 침투하고 운동성을 지배하려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심리적 건강의 파수꾼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은, 꿈이 그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무의식계와 전의식계 사이에 놓인 검열관이다. 그러나 이 파수꾼이 밤이면 경계를 늦추어 무의식계의 억제된 충동이 표현되도록 내버려 두고, 그리하여 환각적 퇴행을 다시 가능하게 하는 것은 파수꾼의 부주의가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적인 파수꾼은 쉬러 갈 때 ― 그리고 그의 잠이 깊지 않다는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 운동성으로 가는 문을 닫는 일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제지되어 있는 무의식계에서 나온 충동들이 무대 위를 어떻게 돌아다니든 간섭할 필요가 없다. 외부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운동 장치를 움직이지 못하므로, 그 충동들은 해롭지 않은 채로 남는다. 수면은 지켜야 할 요새의 안전을 보장한다. 비판적 검열의 작용이 밤에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이 검열이 병적으로 약해지거나 무의식적 흥분이 병적으로 강해져서 힘의 이동이 일어날 때, 그것도 전의식이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고 운동성으로 가는 통로가 열려 있는 동안에 일어날 때에는 사정이 그리 무해하지 않다. 그러면 파수꾼은 제압당하고, 무의식적 흥분이 전의식계를 굴복시킨다. 무의식적 흥분은 전의식계를 거쳐 우리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거나, 환각적 퇴행을 억지로 일으키고는, 지각이 우리의 심리 에너지 분배에 미치는 끌어당기는 힘을 빌려 자기들을 위해 설계되지 않은 장치를 다스린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정신병이라 부른다.
이제 우리는 무의식계와 전의식계라는 두 체계를 도입하느라 중단되었던 우리의 심리학적 구성을 완성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꿈의 유일한 심리적 추진력인 소원을 더 살펴볼 이유는 아직 충분하다. 꿈이 어느 경우에나 소원 실현인 까닭은 꿈이 무의식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설명했다. 무의식계는 활동의 목표로 소원 성취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소원 충동 말고는 쓸 수 있는 힘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꿈 해석에서 이렇게 멀리 나아가는 심리학적 사변을 끌어낼 권리를 조금 더 누리려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꿈을 다른 심리적 구조물도 포괄할 수 있는 연관 속에 놓는다는 것을 보여 줄 의무가 있다. 무의식계라는 체계가 ― 또는 우리 논의의 목적에 비추어 그와 충분히 비슷한 무언가가 ― 존재한다면, 꿈이 그것의 유일한 발현일 수는 없다. 모든 꿈이 소원 성취일 수는 있겠지만, 꿈이라는 이 소원 성취 말고도 비정상적인 소원 성취의 다른 형태가 있음이 틀림없다. 실제로 모든 정신신경증 증상에 관한 이론은 그것들 역시 무의식의 소원 성취로 보아야 한다는 명제에서 정점에 이른다. 우리의 설명에 따르면 꿈은 정신의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한 무리의 첫째 항일 뿐이며, 그 무리를 이해하는 것은 정신의학 문제 가운데 순수하게 심리학적인 부분을 푸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소원 성취 무리의 다른 항들, 이를테면 히스테리성 증상은 내가 지금까지 꿈에서 찾아내지 못한 본질적인 성질 하나를 보여 준다. 곧 이 논고에서 자주 언급한 연구들에서 나는, 히스테리성 증상이 형성되려면 우리 정신생활의 두 흐름이 합쳐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증상은 실현된 무의식적 소원의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증상으로 이루어지는 전의식의 다른 소원이 거기에 합류해야 한다. 그래서 증상은 적어도 이중으로 결정되어 있다. 서로 다투는 두 체계가 저마다 한 번씩 결정한다.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이상의 중층 결정에는 한계가 없다. 무의식계에서 나오지 않은 결정은, 내가 아는 한 언제나 무의식적 소원에 맞서 반동하는 생각의 흐름, 이를테면 자기 처벌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히스테리성 증상은 서로 다른 심리 체계에 원천을 둔, 서로 대립하는 두 소원 성취가 하나의 표현 속에 합쳐질 수 있는 곳에서만 생겨난다. (히스테리성 증상의 기원에 관한 나의 최근 정식화는 히르슈펠트 등이 펴내는 『성과학 잡지(Zeitschrift für Sexualwissenschaft)』에 실린 논문(1908)을 참조하라.) 이 점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보아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문제의 얽힘을 남김없이 벗겨 보이는 것 말고는 무엇도 확신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만 하는 데 그치고, 확신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다. 한 여성 환자의 히스테리성 구토는, 한편으로는 사춘기 시절부터 품어 온 무의식적 공상, 곧 끊임없이 임신하여 아이를 아주 많이 갖고 싶다는 공상의 실현으로 드러났고, 이 공상은 나중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남자에게서 아이를 얻고 싶다는 소원과 결합되었다. 이 무절제한 소원에 맞서 강력한 방어 충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구토는 환자의 몸매와 아름다움을 망쳐 사람들 눈에 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으므로, 증상은 그녀의 처벌하려는 생각의 흐름에도 들어맞았다. 이렇게 양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증상은 현실이 되도록 허락되었다. 이것은 파르티아 여왕이 삼두 정치가 크라수스에게 택한 것과 같은, 소원 성취를 허락하는 방식이다. 여왕은 크라수스가 황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원정에 나섰다고 믿고, 녹인 금을 그의 시신의 목구멍에 부어 넣게 했다. 「이제 그대가 갈망하던 것을 얻었도다.」 지금까지 꿈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꿈이 무의식의 소원 성취를 표현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지배적인 전의식은 소원에 몇 가지 왜곡을 가한 뒤에야 이것을 허락하는 듯하다. 꿈 소원에 적대하면서 그 짝으로서 꿈에서 실현되는 생각의 흐름을, 우리는 사실 규칙적으로 증명해 보일 처지가 못 된다. 꿈에서 반동 형성의 흔적을 찾아낸 것은 이따금뿐이었다. 이를테면 「삼촌 꿈」(4장)에서 친구 R.을 향한 애정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빠져 있는 전의식의 몫은 다른 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지배적인 체계가 수면 소원 쪽으로 물러나 있는 동안, 꿈은 무의식계에서 온 소원을 여러 겹의 왜곡을 거쳐 표현하고, 심리 장치 안에 필요한 에너지 변화를 일으켜 이 소원을 실현하며, 마침내 잠이 지속되는 내내 그것을 붙들어 둘 수 있다.4
전의식의 이 끈질긴 수면 소원은 대체로 꿈 형성을 쉽게 해 준다. 죽은 이가 누운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을 보고 시신에 불이 붙었다는 결론에 이른 아버지의 꿈을 떠올려 보자. 아버지가 불빛에 깨어나는 대신 이런 결론을 내리게 만든 결정적인 심리적 힘 가운데 하나는, 꿈에 보이는 아이의 생명을 한순간이나마 늘리려는 소원이었음을 우리는 보여 주었다. 억압에서 나오는 다른 소원들은 아마 우리 눈을 벗어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꿈을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꿈의 둘째 추진력으로 아버지의 수면 소원을 들 수 있다. 아이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잠도 꿈 덕분에 한순간 늘어나기 때문이다. 밑바닥에 깔린 동기는 이렇다. 「꿈이 계속되게 두자. 그러지 않으면 깨어나야 하니까.」 이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꿈에서도 수면 소원은 무의식적 소원을 거든다. 3장에서 우리는 보기에도 편의 꿈인 꿈들을 보고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모든 꿈이 이 이름을 요구할 수 있다. 계속 자려는 소원의 효력은 깨우는 자극에서 생긴 꿈에서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런 꿈은 객관적 감각 자극을 수면의 지속과 양립할 수 있게 바꾸어 놓는다. 이 자극을 꿈속에 엮어 넣어, 그것이 외부 세계에 대한 경고로서 내세울 수 있는 권리를 모조리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자려는 이 소원은, 오로지 안에서만 수면 상태를 어지럽힐 수 있는 다른 모든 꿈의 형성에도 한몫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 그냥 계속 자. 그래 봐야 꿈일 뿐이야.」 꿈이 너무 멀리 나갈 때 전의식계가 의식에게 건네는 암시는 많은 경우 이것이다. 그리고 비록 입 밖에 나오지 않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말은 꿈꾸기에 대해 우리의 지배적인 심리 활동이 취하는 태도를 대체로 나타내 주기도 한다. 나는 우리는 잠들어 있는 동안 내내, 우리가 꿈꾸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잠자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확실히 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결론에 맞서, 우리의 의식은 뒤의 것을 아는 쪽으로는 결코 향하지 않으며 앞의 것을 아는 쪽으로는 검열관이 뜻밖에 허를 찔리는 특별한 경우에만 향한다는 반론이5 제기되지만, 우리는 이 반론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반론에 맞서서는, 자기가 자고 있고 꿈꾸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의식하며, 꿈 생활을 이끄는 의식적 능력을 타고난 듯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꿈꾸는 사람은 꿈이 흘러가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어나지 않은 채 꿈을 끊고, 다른 방향으로 이어 가려고 꿈을 새로 시작한다. 요청을 받으면 자기 극에 더 행복한 결말을 붙여 주는 인기 작가와 같다. 또 다른 때에는, 꿈이 그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상황에 놓으면 그는 잠결에 이렇게 생각한다. 「이 꿈을 계속해서 몽정으로 기운을 빼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진짜 상황을 위해 미뤄 두는 편이 낫겠다.」
주
1. 독일어 낱말 「Dutzendmensch」(한 다스짜리 사람)는, 그 젊은 여성이 친구의 약혼자에 대한 자기의 진짜 의견을 나타내려고 쓰고 싶어 한 말로, 숫자가 전부인 사람을 가리킨다. ― 영역자 브릴의 주.
2. 이 소원들은 이런 파괴될 수 없는 성격을, 참으로 무의식적인 모든 심리 행위, 곧 오로지 무의식 체계에만 속하는 심리 행위와 함께 지니고 있다. 이 경로들은 늘 열려 있으며 쓰이지 않아 버려지는 일이 결코 없다. 흥분 과정이 무의식적 흥분을 부여받을 때마다 이 경로들은 몇 번이고 그 방출을 이끈다. 비유해서 말하면, 이것들이 겪는 소멸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저승의 망령들이 겪는 소멸과 같은 형태다. 망령들은 피를 마시는 순간 새로운 생명으로 깨어났다. 전의식 체계에 달린 과정들은 이와 다른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 신경증의 정신 요법은 이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3. 르 로랭은 꿈의 소원 성취를 옳게도 이렇게 찬양한다. 「Sans fatigue sérieuse, sans être obligé de recourir à cette lutte opiniâtre et longue qui use et corrode les jouissances poursuivies.」〔심한 피로도 없이, 좇는 즐거움을 닳게 하고 좀먹는 저 끈질기고 기나긴 싸움에 기댈 필요도 없이.〕
4. 이 생각은 우리 시대에 최면 연구를 되살린 리에보의 『수면 이론』에서 빌려 온 것이다. (『유도 수면(Du Sommeil provoqué)』 운운, 파리, 1889.)
5. 영역본은 「앞의 것」(꿈꾸고 있다는 앎)과 「뒤의 것」(잠자고 있다는 앎)을 뒤바꾸어, 검열이 허를 찔릴 때 알게 되는 것이 잠자고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적었다. 이는 6장 (아)의 설명(검열이 허를 찔리면 「꿈일 뿐이야」라는 생각이 끼어든다)과 맞지 않아, 독일어 원문대로 두 말의 자리를 바로잡았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