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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26장 (제VIII권 제XXVI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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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제VIII권 제XXVI장) 전쟁 제21년 · 알키비아데스의 사모스 소환 · 에우보이아의 반란과 사백인회의 몰락 · 키노세마 해전

같은 여름, 이 일이 있은 바로 뒤에 펠로폰네소스인은 스스로를 적의 맞수로 여기지 않아 함대를 한데 모아 싸우기를 마다했고 그만한 수의 배에 쓸 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몰랐으니 특히 티사페르네스가 봉급을 주는 데 그토록 인색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펠로폰네소스에서 처음에 받은 지시대로 람피아스의 아들 클레아르코스를 함선 40척과 함께 파르나바조스에게 보냈다. 파르나바조스가 그들을 부르며 봉급을 댈 채비를 하고 있었고, 게다가 비잔티움이 그들에게 반란의 뜻을 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펠로폰네소스 함선들은 아테네인의 눈을 피하려고 먼바다로 나갔는데 폭풍을 만나, 클레아르코스와 함께한 대부분은 델로스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밀레토스로 돌아왔고 클레아르코스는 거기서 뭍길로 헬레스폰토스에 가서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10척은 메가라 사람 헬릭소스의 지휘 아래 헬레스폰토스로 건너가는 데 성공해 비잔티움을 반란으로 이끌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사모스의 지휘관들이 이를 전해 듣고 헬레스폰토스를 지키도록 함대를 보내어 그들을 막게 했고, 비잔티움 앞바다에서 양편 8척씩이 맞붙는 싸움이 벌어졌다.

한편 사모스의 우두머리들, 그중에서도 정체를 바꾼 그 순간부터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들이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던 트라시불로스는 마침내 민회에서 병사들 대다수를 제 편으로 끌어들였고, 그들이 알키비아데스의 소환과 사면에 표를 던지자 배를 타고 티사페르네스에게 건너가 알키비아데스를 사모스로 데려왔으니, 그가 티사페르네스를 펠로폰네소스인에게서 떼어 자기들 편으로 돌려놓는 것 말고는 살길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민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알키비아데스는 추방당한 제 개인의 불운을 하소연하고 한탄했으며, 나랏일을 아주 길게 이야기하며 앞날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한껏 부추기고 티사페르네스에게 제가 가진 영향력을 터무니없이 부풀렸다. 이렇게 한 그의 목적은 아테네의 과두 정권이 그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정치 결사가 흩어지는 것을 재촉하며, 사모스의 군대 안에서 제 신망을 높이고 그들 자신의 자신감도 북돋우며, 끝으로 적이 티사페르네스를 되도록 깊이 의심하게 만들어 그들이 품고 있던 기대를 꺾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알키비아데스는 군대에 이런 터무니없는 약속을 늘어놓았다. 티사페르네스가 그에게 엄숙히 다짐하기를, 아테네인을 믿을 수만 있다면 제게 무엇이든 남아 있는 한 그들이 물자에 아쉬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며 제 은 침상을 녹여 돈을 찍어야 하는 지경이 되더라도 그러하리라 했고, 지금 아스펜도스에 있는 페니키아 함대를 펠로폰네소스인이 아니라 아테네인에게 데려오겠다고 했으나, 다만 알키비아데스가 소환되어 아테네인의 보증이 되어 줄 때에만 그들을 믿을 수 있으리라 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과 그 밖의 많은 말을 듣고 아테네인은 곧바로 그를 앞서의 장군들과 함께 장군으로 뽑고 모든 일을 그의 손에 맡겼다. 이제 군대 안에는 무사히 살아남아 사백인회에 앞갚음하리라는 지금의 기대를 어떤 대가와도 바꿀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들은 말이 그러하고 보니 그들은 눈앞의 적을 얕보고 당장 피레우스로 배를 몰아 가려는 마음이 되었다. 더 가까운 적을 뒤에 두고 피레우스로 가자는 그 계획을 알키비아데스는 그것을 우기는 사람이 많은데도 단호히 거절하며, 이제 자기가 장군으로 뽑혔으니 먼저 티사페르네스에게 배를 타고 가서 전쟁을 이어 갈 방책을 그와 의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민회를 떠나자마자 곧바로 길에 올랐으니, 둘 사이에 온전한 신뢰가 있다고 여기게 하려는 것이었고 또 티사페르네스에게 제 무게를 더하는 한편 자기가 이제 장군으로 뽑혔으므로 마음먹기에 따라 그에게 이롭게도 해롭게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음을 보이려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티사페르네스로 아테네인을 겁주고 아테네인으로 티사페르네스를 겁주었다.

한편 밀레토스의 펠로폰네소스인은 알키비아데스가 소환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미 티사페르네스를 믿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이제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그에게 정이 떨어졌다. 실상 아테네인이 밀레토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나가 싸우기를 마다한 뒤로 티사페르네스는 그 어느 때보다 봉급 주는 일에 굼떠졌고, 그 전에도 알키비아데스 때문에 그에 대한 미움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전과 같이 한데 모인 병사들과 병사 말고도 무게 있는 몇몇 사람은 저희가 아직 한 번도 봉급을 온전히 받지 못했다는 것, 받은 것도 양이 적은 데다 그나마 제때 주지 않았다는 것, 판가름 나는 싸움을 하거나 물자를 얻을 수 있는 다른 자리로 옮기지 않으면 뱃사람들이 달아나리라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제 잇속을 위해 티사페르네스의 비위를 맞추는 아스티오코스의 잘못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했다.

군대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스티오코스의 몸을 두고 다음과 같은 소동이 일어났다. 시라쿠사인과 투리오이 뱃사람은 대부분 자유민이었고, 이 함대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 뱃사람들이 아스티오코스에게 달려들어 봉급을 내놓으라고 하는 데에도 가장 대담했다. 아스티오코스는 다소 뻣뻣하게 대답하며 그들을 을러댔고, 도리에우스가 제 뱃사람들을 두둔하고 나서자 그에게 지휘봉을 치켜들기까지 했다. 이를 본 무리는 뱃사람다운 기세로 성이 나서 아스티오코스를 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때맞춰 그들을 보고 제단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고, 그리하여 그가 맞지 않은 채로 둘은 떼어졌다. 한편 티사페르네스가 밀레토스에 세운 요새를 밀레토스인이 기습해 빼앗고 그 안의 수비대를 쫓아냈는데, 이 일은 나머지 동맹, 그중에서도 시라쿠사인의 지지를 얻었으나 리카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리카스는 나아가 밀레토스인과 왕의 땅에 있는 그 밖의 사람들은 전쟁이 잘 매듭지어질 때까지 티사페르네스에게 웬만큼 고분고분하게 굴고 그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밀레토스인은 이 일과 그와 비슷한 다른 일들로 그에게 성이 나 있었고, 뒷날 그가 병으로 죽자 군대에 있던 스파르타인이 바라는 자리에 그를 묻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아스티오코스와 티사페르네스에 대한 군대의 불만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 때 민다로스가 아스티오코스의 뒤를 이어 해군 사령관이 되려고 스파르타에서 와서 지휘를 맡았다. 이제 아스티오코스는 고향으로 배를 몰았고, 티사페르네스는 두 나라 말을 하는 카리아 사람이자 제 심복 가운데 하나인 가울리테스를 그와 함께 보내어 요새 사건을 두고 밀레토스인을 걸어 따지게 하는 한편 밀레토스인을 맞받아 제 변호를 하게 했다. 티사페르네스가 알기로 밀레토스인은 주로 그의 행실을 고발하려고 스파르타로 가는 길이었고 헤르모크라테스를 데리고 있었는데, 헤르모크라테스는 티사페르네스가 알키비아데스와 손잡고 펠로폰네소스의 대의를 망치려 했으며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몰아붙일 참이었다. 실상 헤르모크라테스는 봉급을 온전히 되돌려 주지 않는 일로 늘 그와 사이가 나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시라쿠사에서 추방당하고 새 지휘관들, 곧 포타미스와 미스콘과 데마르코스가 시라쿠사인의 함선을 맡으러 밀레토스에 오자, 티사페르네스는 망명 중인 그를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몰아붙였고, 그에게 씌운 여러 혐의 가운데에는 한때 자기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가 얻지 못하자 스스로 자기 원수를 자처했다는 것도 있었다.

아스티오코스와 밀레토스인과 헤르모크라테스가 스파르타로 배를 몰아가는 동안 알키비아데스는 이미 티사페르네스에게서 사모스로 건너와 있었다. 그가 돌아온 뒤, 앞서 말한 대로 사모스의 병력을 달래고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려고 보낸 사백인회의 사절들이 델로스에서 왔고, 민회가 열려 그들이 말을 해 보려 했다. 병사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민주정을 뒤엎은 자들을 죽이라고 외쳤으나, 마침내 어렵사리 가라앉아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사절들은 이번 변혁이 나라를 구하려는 것이지 망치거나 적에게 넘기려는 것이 아니라고 일러 주었으니, 자기들이 다스리는 동안 적이 나라 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미 그럴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 오천인회는 모두가 정치에 제 몫을 갖게 되며, 듣는 이들의 친족은 카이레아스가 헐뜯어 전한 것 같은 폭행도 그 밖의 학대도 당한 일이 없고 모두 떠날 때 그대로 제 재산을 아무 탈 없이 누리고 있다고 했다. 이 말 말고도 그들은 여러 가지를 더 말했으나 성이 난 청중에게 더 나은 효험을 보지는 못했고, 온갖 다른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은 피레우스로 배를 몰아 가자는 것이었다. 알키비아데스가 나라에 처음으로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이때였고, 그것도 더없이 두드러진 공이었다. 사모스의 아테네인이 제 동포를 치러 가기로 마음을 굳혔을 때, 그리 되었더라면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는 틀림없이 당장 적의 손에 넘어갔을 터인데 그것을 막은 사람이 바로 알키비아데스였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무리를 붙들어 둘 수 없었을 그 순간에 그는 벼르던 원정을 멈춰 세웠고, 사절들에게 사사로이 품은 원한을 꾸짖어 돌려세웠다. 그는 제 이름으로 답을 주어 그들을 돌려보냈는데, 오천인회의 정치에는 반대하지 않으나 사백인회를 물리고 오백인 평의회에 다시 권한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와 함께 군대의 봉급을 더 잘 마련할 수 있도록 씀씀이를 줄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전적으로 찬성한다고 했다. 대체로 그는 그들에게 버티며 적 앞에서 당당한 낯을 보이라고 일렀으니, 나라가 구원되면 언젠가 두 편이 화해할 좋은 가망이 있지만 사모스에 있는 쪽이든 아테네에 있는 쪽이든 한 번 무너지고 나면 화해할 상대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아르고스인이 보낸 사절들이 와서 사모스에 있는 아테네 민중을 돕겠다고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부를 때 와 달라는 청과 함께 돌려보냈다. 아르고스인과 함께 온 것은 파랄로스호의 뱃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앞서 그들이 사백인회의 손에 수송선에 실려 에우보이아 둘레를 돌라는 명을 받은 데서 이야기를 멈추었거니와, 그들은 사백인회가 스파르타로 보내는 아테네 사절들, 곧 라이스포디오스와 아리스토폰과 멜레시아스를 실어 나르는 데 쓰였는데, 아르고스 옆을 지나가면서 그 사절들을 붙잡아 민주정을 뒤엎은 우두머리들이라며 아르고스인에게 넘겼고, 저희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대신 아르고스 사절들을 배에 태우고 자기들에게 맡겨진 갤리선을 몰아 사모스에 왔다.

같은 여름, 알키비아데스의 귀환과 티사페르네스의 전반적인 처신이 겹쳐 펠로폰네소스인의 불만이 극에 이르러 그들이 그가 아테네 편에 붙었음을 더는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무렵, 티사페르네스는 아무래도 그들 앞에서 이 혐의를 벗고 싶었던 듯 페니키아 함대를 데리러 아스펜도스로 갈 채비를 하고 리카스에게 함께 가자고 청했으며, 자기가 없는 동안 군대의 봉급을 대도록 타모스를 제 대리로 세우겠다고 말했다. 전하는 말이 저마다 달라서 그가 어떤 뜻으로 아스펜도스에 갔으면서도 끝내 함대를 데려오지 않았는지를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페니키아 함선 147척이 아스펜도스까지 왔다는 것은 틀림없으나 어째서 더 나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왔다. 어떤 이들은 그가 펠로폰네소스의 힘을 소모시키려는 제 계획에 따라 자리를 비운 것이라고 여기는데, 아무튼 그의 대리인 타모스가 그보다 나은 것은커녕 봉급을 더 못 주는 자였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그가 페니키아인을 부릴 생각이 애초에 없었으면서 그들을 풀어 주는 값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아스펜도스로 불렀다고 여긴다. 또 다른 이들은 스파르타에서 자기를 향해 터져 나온 원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제 잘못이 아니며 배에 정말로 사람이 태워져 있었고 자기가 틀림없이 그것을 데리러 갔었다는 말을 들으려 한 것이라고 여긴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함대를 데려오지 않은 까닭이 그리스인의 힘을 지치게 하고 마비시키려는 데 있었음이 너무나 분명하니, 곧 아스펜도스로 가는 여정에 허비된 시간으로 그 힘을 축내고 어느 쪽 저울에도 제 무게를 싣지 않음으로써 두 편을 팽팽하게 맞물려 두려 한 것이다.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면 그는 그럴 수 있었으니, 물론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함대를 데려왔더라면 그는 십중팔구 스파르타인에게 승리를 안겼을 터인데, 스파르타의 해군은 그 없이도 아테네 해군을 못한 편이라기보다 맞먹는 편으로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가장 분명하게 옭아매는 것은 배를 데려오지 않은 데 대해 그가 내세운 핑계다. 그는 모인 수가 왕이 명한 것보다 적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의 돈을 적게 쓰고 더 적은 비용으로 같은 목적을 이루었다면 그의 공이 도리어 높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든 그 뜻이 무엇이었든 티사페르네스는 아스펜도스에 가서 페니키아인을 만났고, 펠로폰네소스인은 그가 바라는 대로 필리포스라는 스파르타 사람을 갤리선 2척과 함께 보내어 함대를 데려오게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가 아스펜도스로 갔음을 알고 제 자신도 함선 13척을 거느리고 그리로 배를 몰았는데, 사모스의 아테네인에게 크고 확실한 공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으니 페니키아 함대를 아테네인에게 데려오거나 적어도 그것이 펠로폰네소스인과 합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십중팔구 그는 티사페르네스가 애초에 함대를 데려올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 티사페르네스가 자기와 아테네인에게 보이는 겉보기의 우의를 빌미로 펠로폰네소스인의 눈에 그를 되도록 깊이 얽어 넣어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그가 아테네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알키비아데스가 닻을 올려 동쪽으로 파셀리스와 카우노스를 향해 곧장 배를 몰아가는 동안 사백인회가 사모스로 보냈던 사절들이 아테네에 이르렀다. 그들이 알키비아데스의 전갈을 전하여 버티며 적 앞에서 굳건한 낯을 보이라 하고 자기가 그들을 군대와 화해시키고 펠로폰네소스인을 이길 큰 가망을 품고 있다고 하자, 이미 불만을 품고 있었고 무슨 안전한 길로든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어 하던 과두파 대다수는 곧바로 그 마음을 크게 굳혔다. 이들은 이제 한데 뭉쳐 정권을 거세게 헐뜯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과두정 아래서 으뜸가는 장군이자 관직에 있던 사람들, 곧 하그논의 아들 테라메네스와 스켈리아스의 아들 아리스토크라테스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축에 들면서도 (스스로 말하기로는 사모스의 군대가, 그중에서도 알키비아데스가 두렵고, 또 자기들이 스파르타로 보낸 사절들이 민중의 권한도 없이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두렵다면서) 권력이 몇 사람 손에 지나치게 몰려 있다는 것을 굳이 물고 늘어지지는 않으면서도 오천인회가 이름뿐 아니라 실제로도 있음을 보여야 하며 정체를 더 공정한 바탕 위에 놓아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그들이 내건 정치의 구호였을 뿐이고, 그들 대부분은 사사로운 야심에 떠밀려 민주정에서 생겨난 과두정을 반드시 무너뜨리고야 마는 그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저마다 한꺼번에 동등한 자일 뿐 아니라 제 동료들의 으뜸이요 주인인 체하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정 아래서는 뜻을 이루지 못한 후보가 제 패배를 더 쉽게 받아들이니, 동등한 자에게 졌다는 수모를 겪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만을 품은 자들에게 가장 뚜렷하게 힘을 준 것은 사모스에서 알키비아데스가 가진 세력과 과두정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그들 자신의 믿음이었고, 이제 그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 민중의 지도자가 되느냐를 두고 겨루기가 벌어졌다.

한편 사백인회 가운데 민주 정체에 가장 반대하던 우두머리와 회원들이 있었으니, 사모스에서 지휘하던 시절 알키비아데스와 다투었던 프리니코스, 민중의 모질고 뿌리 깊은 원수인 아리스타르코스, 그리고 페이산드로스와 안티폰과 그 밖의 우두머리들이었다. 이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그리고 사모스의 군대가 자기들에게서 떨어져 나가 민주정을 내세웠을 때 다시 한번 제 무리 가운데서 사절을 스파르타로 보내어 화약을 맺으려고 온갖 애를 썼고 에에티오네이아에 성벽을 쌓았는데, 이제 사절들이 사모스에서 돌아오고 민중뿐 아니라 제가 가장 믿던 동료들까지 등을 돌리는 것을 보자 그 노력을 갑절로 했다. 아테네의 형편도 사모스의 형편만큼이나 걱정스러웠으므로 그들은 이제 안티폰과 프리니코스와 그 밖의 열 사람을 서둘러 보내며, 조금이라도 견딜 만한 조건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스파르타와 화약을 맺으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에에티오네이아의 성벽 공사를 그 어느 때보다 힘껏 밀어붙였다. 그런데 테라메네스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말로는 이 성벽의 뜻이 사모스의 군대가 피레우스로 밀고 들어오려 할 때 그것을 막자는 데 있다기보다 적의 함대와 군대를 마음대로 들일 수 있게 하자는 데 있었다. 에에티오네이아는 항구 어귀 바로 옆에 붙은 피레우스의 방죽인데, 이제 뭍 쪽에 이미 서 있던 성벽과 이어 요새로 만들어졌으니 그 안에 몇 사람만 두어도 어귀를 장악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뭍 쪽의 옛 성벽과 이제 그 안쪽 바다 쪽으로 쌓고 있던 새 성벽은 둘 다 항구의 좁은 입구에 서 있는 두 망루 가운데 하나에서 끝났다. 그들은 또 이 성벽과 바로 잇닿아 있는 피레우스에서 가장 큰 회랑을 담으로 둘러막아 제 손아귀에 두었고, 모든 사람에게 항구로 들어오는 곡식과 저희가 쟁여 둔 것을 거기에 부리게 하고 팔 때에도 거기서 꺼내 가게 했다.

이런 조치들은 오래전부터 테라메네스의 불평을 자아냈고, 사절들이 아무런 전반적인 화의도 이루지 못한 채 스파르타에서 돌아오자 그는 이 성벽이 나라를 망치고 말 것 같다고 단언했다. 바로 이때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함선 42척이, 그 가운데에는 로크리와 타렌툼에서 온 시칠리아 그리스인과 이탈리아 그리스인의 배도 있었는데, 에우보이아인의 부름을 받고 이미 라코니아의 라스 앞바다에 떠서 에우보이아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지휘한 사람은 스파르타 시민1 아게산드로스의 아들 아게산드리다스였다. 이제 테라메네스는 이 함대가 에우보이아를 도우러 가는 것이라기보다 에에티오네이아에 요새를 쌓는 무리를 도우러 오는 것이며, 서둘러 손을 쓰지 않으면 나라가 기습을 당해 잃게 되리라고 잘라 말했다. 이것은 그저 헐뜯는 말이 아니었으니, 지목받은 자들이 실제로 그와 비슷한 계획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장 바란 것은 제국을 내놓지 않고 과두정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안 되면 배와 성벽만이라도 지켜 독립을 누리는 것이었으며, 이것마저 얻지 못하면 되살아난 민주정의 첫 제물이 되느니 차라리 적을 불러들여 화약을 맺고 성벽과 배를 내주더라도 목숨만 보장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권을 손에 쥐고 있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뒷문과 출입구와 적을 끌어들일 방도를 갖추어 공사를 밀어붙였으니, 때를 놓치지 않고 끝내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들을 향한 불평은 처음에는 몇 사람에 그쳐 남모르게 오갔는데, 마침내 프리니코스가 스파르타에 사절로 갔다 돌아온 뒤 길목을 지키고 있던 페리폴로이2 가운데 하나에게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칼에 찔려, 평의회 회의장에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쓰러져 죽었다. 찌른 자는 달아났으나 그를 도운 아르고스인 하나가 붙잡혀 사백인회에게 고문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에게서 사주한 자의 이름을 캐내지 못했고 페리폴로이 지휘관의 집과 다른 집들에 모이곤 하던 사람이 많은 줄 안다는 것 말고는 더 알아내지 못했다. 일은 여기서 흐지부지되게 두었다. 이 일로 테라메네스와 아리스토크라테스와 사백인회 안팎에 있던 그 편 사람들은 크게 대담해져 이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때쯤에는 그 함선들이 라스에서 돌아 나와 에피다우로스에 닻을 내리고 아이기나를 휩쓸었기 때문인데, 테라메네스는 그 배들이 에우보이아로 가는 길이라면 자기가 늘 정권에 씌워 온 그 계획을 도우러 오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서야 아이기나로 들어갔다가 다시 에피다우로스로 돌아와 닻을 내렸을 리가 없다고 우겼다. 그러니 더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끝내 숱한 선동 연설과 의심이 오간 끝에 그들은 정말로 일에 나섰다. 에에티오네이아에 성벽을 쌓고 있던 피레우스의 중장보병들, 그 가운데에는 제 부족을 거느린 대장 아리스토크라테스도 있었는데, 이들이 과두정 아래의 장군이자 그 도당에 헌신하던 알렉시클레스를 붙잡아 어느 집으로 끌고 가 가두었다. 이 일에는 무니키아의 페리폴로이 지휘관인 헤르몬이라는 사람과 다른 이들이 거들었고, 무엇보다 중장보병의 대다수가 그들 편에 있었다. 마침 평의회 회의장에 앉아 있던 사백인회에 이 소식이 닿자마자, 딴마음을 품은 자들만 빼고 모두가 당장 무기가 있는 자리로 가려 했고 테라메네스와 그 편 사람들을 을러댔다. 테라메네스는 제 변명을 하며 당장 가서 알렉시클레스를 구해 내는 것을 돕겠다고 말했고, 제 편에 속한 장군 하나를 데리고 피레우스로 내려갔으며 아리스타르코스와 기병대의 젊은이 몇이 뒤를 따랐다. 이제 온통 공황과 혼란이었다. 도성에 있는 사람들은 피레우스가 이미 넘어가고 갇힌 자는 죽임을 당했으리라 여겼고, 피레우스에 있는 사람들은 도성 쪽 무리가 당장에라도 쳐들어오리라 여겼다. 그러나 나이 든 이들이 도성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기 걸이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붙들어 세웠고, 이 나라의 프로크세노스3인 파르살로스 사람 투키디데스가 나서서 맞선 두 편 사이에 몸을 던지고는 적이 아직 가까이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판에 나라를 망치지 말라고 호소해, 마침내 그들을 가라앉히고 서로에게 손을 대지 않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 테라메네스가 피레우스로 내려왔는데 그 자신이 장군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중장보병들에게 노발대발했으나, 아리스타르코스와 민중의 적들은 참으로 진심에서 성이 나 있었다. 그러나 중장보병의 대다수는 흔들림 없이 하던 일을 이어 가며 테라메네스에게 이 성벽이 좋은 뜻으로 쌓인 것이라고 여기는지, 헐어 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는지를 물었다. 이에 그는 헐어 버리는 것이 가장 낫다고 그들이 여긴다면 자기로서도 그들과 뜻이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중장보병과 피레우스에 있던 많은 사람이 곧바로 성벽 위로 올라가 그것을 허물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이 무리를 향해 외친 말은 사백인회 대신 오천인회가 다스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두 이 일에 함께하라는 것이었다. "민중이 다스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두"라고 드러내 놓고 말하는 대신 그들은 여전히 오천인회라는 이름 뒤에 몸을 숨겼으니, 오천인회가 정말로 있을까 두렵고 또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모르고 화를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상 사백인회가 오천인회가 있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것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바라지도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으니, 그만큼 많은 사람을 제 권력의 동무로 들이는 것은 다름 아닌 민주정이 되겠으나 이 알 수 없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두려워하게 만들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튿날 사백인회는 놀라기는 했으나 그래도 평의회 회의장에 모였고, 한편 피레우스의 중장보병들은 가두어 둔 알렉시클레스를 놓아주고 성벽을 헐어 버린 뒤 무기를 들고 무니키아 가까이에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으로 가서 거기서 민회를 열어 도성으로 진군하기로 정했으며, 그에 따라 길을 나섰다가 아나케이온4에 멈춰 섰다. 여기서 사백인회가 보낸 대표 몇이 그들에게 와서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장 온건해 보이는 이들을 설득해 저희부터 조용히 있게 하고 나머지도 붙들어 두게 했다. 그들은 오천인회의 명단을 밝히겠으며 오천인회가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가운데서 돌아가며 사백인회를 뽑게 하겠다고 말했고, 그러면서 나라를 망치거나 적의 품으로 밀어 넣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숱한 사람이 말하고 또 말을 듣고 난 뒤 중장보병 전체는 전보다 가라앉았으니 나라 전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이제 화합을 되살리기 위해 정한 날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민회를 열기로 뜻을 모았다.

극장에서 민회를 열 날이 와서 막 모이려 할 때, 아게산드리다스가 이끄는 함선 42척이 메가라에서 살라미스 연안을 따라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것이야말로 테라메네스와 그 편이 그토록 여러 번 말한 그대로 그 배들이 그 성벽으로 오고 있는 것이라 여겼고, 성벽을 헐어 버린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아게산드리다스가 에피다우로스와 그 언저리를 맴돈 것이 짜고 한 일이었을 수는 있겠으나, 도성의 소란에서 기회가 생기리라는 기대만으로도 그가 거기 머물렀을 법하다. 어떻든 아테네인은 이 소식을 받자마자 떼 지어 피레우스로 달려 내려갔으니, 저희끼리의 싸움보다 더 나쁜 전쟁이 적의 손에서 저희를 위협하되 멀리서가 아니라 아테네의 항구 코앞에서 그러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미 물에 떠 있는 배에 올랐고, 어떤 이는 새로 배를 띄웠으며, 또 어떤 이는 성벽과 항구 어귀를 지키러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펠로폰네소스 함선들은 지나쳐 가서 수니온을 돌아 토리코스와 프라시아이 사이에 닻을 내렸다가 나중에 오로포스에 이르렀다. 아테네인은 도성이 변혁에 휩싸여 있는데도 가장 중요한 영지를 구하러 가는 데 한시도 늦출 수 없었으므로(아티카에서 막혀 버린 지금 그들에게 에우보이아는 전부였다) 서둘러, 그것도 훈련되지 않은 뱃사람들로 바다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고, 티모카레스를 몇 척의 배와 함께 에레트리아로 보냈다. 이 배들은 이르러서 에우보이아에 이미 있던 배들과 합해 모두 36척이 되었고 곧바로 싸움에 끌려들어 갔다. 아게산드리다스가 뱃사람들에게 밥을 먹인 뒤 오로포스에서 나왔기 때문인데, 오로포스는 바닷길로 에레트리아에서 약 7마일5 떨어져 있었다. 아테네인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배에 사람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뱃사람들은 여긴 대로 제 배 곁에 있지 않고 밥거리를 사러 도성 변두리의 집들로 가 있었다. 에레트리아인이 장터에 팔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미리 손을 써 둔 까닭이니, 아테네인이 배에 사람을 태우는 데 오래 걸리게 하고 적의 공격에 허를 찔려 있는 그대로 바다에 나가지 않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에레트리아에서는 오로포스에 있는 그들에게 언제 바다로 나올지를 알리는 신호를 올렸다. 그토록 허술한 채비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아테네인은 에레트리아 항구 앞바다에서 맞붙었고, 그런데도 한동안 제 자리를 지켰으나 마침내 쫓겨 달아나 해안까지 몰렸다. 그 가운데 저희에게 우호적이려니 여기고 에레트리아로 몸을 피한 자들은 그 도시에서 주민들에게 도륙되어 목숨을 잃었고, 에레트리아 땅에 있는 아테네 요새로 달아난 자들과 칼키스에 닿은 배들은 살아남았다. 펠로폰네소스인은 아테네 함선 22척을 빼앗고 뱃사람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뒤 전승 기념물을 세웠고, 오래지 않아 에우보이아 전체를 반란으로 이끌었으며(아테네인이 몸소 지키고 있던 오레오스만은 빼고) 섬의 일을 전반적으로 매듭지었다.

에우보이아에서 일어난 일의 소식이 아테네에 닿자 그들이 전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공황이 뒤따랐다. 시칠리아의 참사도, 그때에는 그토록 커 보였건만, 그 밖의 어떤 일도 그들을 그만큼 놀라게 한 적은 없었다. 사모스의 진영은 반기를 들었고, 배도 그 배에 태울 사람도 더는 없었으며, 저희끼리 불화해 당장에라도 주먹다짐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런 판에 이만한 크기의 참사가 그 모든 것 위에 덮쳐 함대를 잃고 무엇보다도 아티카보다 저희에게 더 값진 에우보이아를 잃었으니, 그들이 더없이 깊은 낙담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의 가장 크고 가장 급한 걱정은 적이 승리에 기고만장해져 곧장 자기들에게로 향해 피레우스를 치러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으니 피레우스를 지킬 배가 더는 없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시시각각 적이 닥치기를 기다렸다. 적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쉽게 그리할 수 있었을 터이고, 그리했더라면 그는 제가 나타남으로써 도성의 분열을 더 키웠거나, 머물러 포위했더라면 이오니아에서 온 함대가 과두정의 적이면서도 제 나라와 제 친족을 구하러 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며, 그동안에 헬레스폰토스와 이오니아와 섬들과 에우보이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대충 말해 아테네 제국 전체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숱한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인은 아테네인이 전쟁을 치르기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상대임이 드러났다. 두 기질 사이의 큰 차이, 곧 스파르타인의 굼뜸과 기력 없음이 그 상대의 과감함과 진취와 대비되는 그 차이가 더없이 큰 도움이 되었으니, 특히 아테네 같은 해상 제국에 그러했다. 실상 이것은 시라쿠사인이 보여 준 바이니, 기질이 아테네인과 가장 닮았고 또 아테네인과 싸워 가장 크게 성공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런데도 아테네인은 이 소식을 받고 함선 20척에 사람을 태웠으며, 예전에 모이곤 하던 프닉스 언덕에서 곧바로 첫 민회를 열어 사백인회를 물리고 오천인회에 정권을 넘기기로 표결했다. 오천인회에는 제 무구 한 벌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들어가게 했고, 또 어떤 관직을 맡더라도 봉급을 받아서는 안 되며 받는 자는 저주받은 자로 여기기로 정했다. 그 뒤로도 민회가 여러 번 열려 거기서 입법 위원을 뽑고 정체를 세우는 데 필요한 그 밖의 온갖 조치를 취했다. 아테네인이 여태껏 누린 가운데 가장 좋은 정치를 누린 것으로 보이는 때가 바로 이 정체의 첫 시기였으니,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는 그러하다.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섞는 일이 분별 있게 이루어졌고, 나라가 거듭된 참사를 겪고도 처음으로 고개를 들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알키비아데스와 그 밖의 추방자들을 불러들이기로 표결했고, 그와 사모스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전쟁에 힘껏 몸을 던지라고 다그쳤다.

이 변혁이 일어나자 페이산드로스와 알렉시클레스의 무리와 과두파의 우두머리들은 곧바로 데켈레이아로 물러났는데, 장군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타르코스만은 예외였으니 그는 궁수 가운데 가장 이방스러운 자들을 서둘러 데리고 오이노에로 갔다. 오이노에는 보이오티아 국경에 있는 아테네인의 요새로 그때 코린트인에게 포위되어 있었는데, 코린트인은 데켈레이아에서 돌아오던 제 무리가 그 수비대에게 끊겨 죽은 일로 성이 나 있었다. 코린트인은 이 일에 스스로 나섰고 보이오티아인에게 도와 달라고 청했다. 그들과 말을 맞춘 뒤 아리스타르코스는 오이노에를 지키던 수비대를 속여, 도성에 있는 저희 동포가 스파르타인과 타협을 보았으며 항복 조건 가운데 하나가 이곳을 보이오티아인에게 넘기는 것이라고 일렀다. 수비대는 그가 장군이었으므로 그 말을 믿었고 게다가 포위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몰랐으므로, 휴전을 맺고 요새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하여 보이오티아인이 오이노에를 손에 넣었고, 아테네의 과두정과 소란은 끝이 났다.

이야기를 다시 밀레토스의 펠로폰네소스인에게로 돌린다. 티사페르네스가 아스펜도스로 떠나면서 그 일을 맡겨 둔 대리인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봉급은 나오지 않았다. 페니키아 함대도 티사페르네스도 나타날 낌새가 없었고, 그와 함께 보내졌던 필리포스와 파셀리스에 있던 또 한 사람의 스파르타 시민 히포크라테스가 해군 사령관 민다로스에게 배는 아예 오지 않으며 자기들이 티사페르네스에게 심하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적어 보냈다. 그러는 동안 파르나바조스는 그들에게 오라고 청하며 함대를 얻으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었고, 티사페르네스와 마찬가지로 제 관할 안에서 아직 아테네에 매여 있는 도시들을 반란으로 이끌고자 했으니 그 성공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가 이제 이른 그 여름 무렵에 민다로스가 그 성화에 못 이겨, 사모스의 적을 따돌리려고 아주 질서 있게 그리고 별안간 함선 73척으로 밀레토스에서 닻을 올려 헬레스폰토스로 배를 몰았다. 그리로는 같은 여름에 이미 16척이 그보다 앞서 가서 케르소네소스의 일부를 휩쓴 뒤였다. 민다로스는 폭풍을 만나 이카로스로 피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사나운 날씨에 닷새인가 엿새를 거기 붙들려 있다가 키오스에 이르렀다.

한편 트라실로스는 그가 밀레토스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사모스에서 함선 55척으로 배를 몰았으니, 헬레스폰토스에 그보다 먼저 닿으려고 서두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키오스에 있음을 알고 거기 머물리라 여겨, 그 함대가 제가 모르는 사이에 움직이지 못하도록 레스보스와 그 맞은편 뭍에 척후를 두었고, 자신은 해안을 따라 메팀나로 가서 그들이 키오스에 얼마간 머물 경우 레스보스에서 치려고 곡식 가루와 그 밖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반란을 일으킨 레스보스의 도시 에레소스를 치러 가서 할 수 있다면 빼앗기로 마음먹었다. 메팀나에서 쫓겨난 으뜸가는 망명자 몇이 저희와 맹세로 맺어진 중장보병 약 50명을 쿠마이에서 건너 데려왔고, 뭍에서 다른 이들을 고용해 모두 300명을 채운 다음, 테베인과 레스보스인 사이에 핏줄이 통한다는 까닭으로 테베 사람 아낙산드로스를 뽑아 그들을 지휘하게 하고는 먼저 메팀나를 쳤기 때문이다. 미틸레네에서 아테네 수비대가 나아오는 바람에 그 계획이 어긋나고 도시 밖의 싸움에서 두 번째로 물리쳐지자, 그들은 산을 넘어가 에레소스를 반란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트라실로스는 배를 모두 거느리고 그리로 가서 그곳을 치기로 정했다. 그런데 트라시불로스가 망명자들이 건너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사모스에서 함선 5척으로 그보다 먼저 그리로 갔는데, 에레소스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게 닿았으므로 그대로 나아가 그 도시 앞에 닻을 내렸다. 여기에 헬레스폰토스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배 2척과 메팀나인의 배들이 더해져 모두 67척이 되었고, 배에 탄 병력은 이제 공성 기계와 쓸 수 있는 온갖 수단을 갖추어 에레소스를 힘껏 쳐서 빼앗을 채비를 했다.

그러는 사이 키오스에 있던 민다로스와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이틀 치 양식을 받고 키오스인에게서 사람마다 키오스 돈 3닢6을 받은 뒤 사흘째 되는 날 서둘러 섬에서 나왔다. 에레소스에 있는 배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들은 먼바다로 나가지 않고 레스보스를 왼편에 둔 채 뭍을 향해 배를 몰았다. 포카이아 땅에 있는 카르테리아 항에 들러 낮밥을 먹은 뒤 그들은 쿠마이 연안을 따라 나아가 미틸레네 맞은편 뭍에 있는 아르기누사이에서 저녁을 먹었다. 거기서 그들은 밤이 깊었는데도 해안을 따라 항해를 이어 가 메팀나 맞은편 뭍에 있는 하르마토스에 이르러 거기서 밥을 먹었고, 렉톤과 라리사와 하마크시토스와 그 언저리의 도시들을 빠르게 지나쳐 한밤중이 되기 조금 전에 로이테이온에 이르렀다. 이제 그들은 헬레스폰토스 안에 들어와 있었다. 배 가운데 얼마는 시게이온과 그 언저리의 다른 곳에도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봉화의 경보와 적의 해안에 갑자기 불이 늘어난 것이 세스토스에 있던 아테네 함선 18척에게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바로 그날 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서둘러 배를 띄웠고, 케르소네소스의 해안에 바짝 붙어 엘라이오스까지 해안을 따라갔으니 적의 함대를 피해 먼바다로 빠져나가려는 것이었다.

아비도스에 있던 16척을 들키지 않고 지나쳤는데 그 배들은 다가오던 제 편에게서 아테네 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살피라는 경보를 받았는데도 그러했고, 새벽녘에 그들은 민다로스의 함대를 보았으며 그 함대는 곧바로 뒤를 쫓았다. 모두가 빠져나갈 틈이 있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임브로스와 렘노스로 달아났고, 맨 뒤에 있던 4척이 엘라이오스 앞바다에서 따라잡혔다. 그 가운데 하나는 프로테실라오스 신전 맞은편에서 좌초해 뱃사람과 함께 빼앗겼고 다른 두 척은 뱃사람 없이 빼앗겼으며, 네 번째 배는 임브로스 해안에 버려져 적의 손에 불탔다.

이 뒤에 아비도스에서 온 함대가 펠로폰네소스인에게 합류해 그 함대는 모두 86척이 되었다. 그들은 하루를 엘라이오스를 포위하는 데 썼으나 이루지 못하고 아비도스로 되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인은 제 척후에게 속아 적의 함대가 들키지 않고 지나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채 한가로이 에레소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들은 당장 에레소스를 버리고 온 힘을 다해 헬레스폰토스로 향했으며, 쫓기에 열이 올라 먼바다로 너무 멀리 나갔다가 이제 그들의 길목에 걸린 펠로폰네소스 함선 2척을 빼앗은 뒤 이튿날 엘라이오스에 닻을 내렸고, 임브로스로 피했던 배들을 데려와 닷새 동안 다가올 싸움을 채비했다.

이 뒤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맞붙었다. 아테네인은 종대를 이루어 해안에 바짝 붙어 세스토스로 배를 몰았고, 이를 알아챈 펠로폰네소스인은 그들을 맞으러 아비도스에서 나왔다. 이제 싸움이 코앞에 닥쳤음을 알고 양편은 날개를 넓게 폈으니, 아테네인은 케르소네소스를 따라 이다코스에서 아리아니까지 함선 76척으로, 펠로폰네소스인은 아비도스에서 다르다노스까지 86척으로 폈다. 펠로폰네소스의 오른쪽 날개는 시라쿠사인이 맡았고 왼쪽은 민다로스가 몸소 그 해군에서 가장 잘 달리는 배들과 함께 맡았으며, 아테네의 왼쪽은 트라실로스가 오른쪽은 트라시불로스가 맡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함대의 여기저기에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인은 먼저 맞붙으려고 서둘렀고, 제 왼쪽으로 아테네의 오른쪽을 에돌아 될 수 있으면 그들이 해협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끊고 그 중앙을 멀지 않은 해안으로 몰아붙이려 했다. 아테네인은 그 속셈을 알아채고 제 날개를 더 펴서 그들을 앞질러 나아갔고, 그동안 그들의 왼쪽은 이미 키노세마 곶을 지나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들은 중앙을 얇게 늘여 약하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 적보다 배가 적은 데다 키노세마 곶 둘레의 해안이 날카로운 모서리를 이루어 그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펠로폰네소스인은 이제 그 중앙을 쳐서 아테네인의 배들을 해안으로 몰아붙였고, 승세를 몰아가려고 뭍에 내렸다. 중앙에는 아무 도움도 갈 수 없었으니, 오른쪽의 트라시불로스 함대는 저를 치는 배가 많아서 그러했고, 왼쪽의 트라실로스 함대는 키노세마 곶이 벌어지는 일을 가린 데다 제 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라쿠사인과 그 밖의 적들에게 발이 묶여 있어서 그러했다. 그러나 마침내 펠로폰네소스인은 이겼다는 자신감에 적의 배를 쫓느라 흩어지기 시작했고, 제 함대의 적잖은 부분이 흐트러지게 두었다. 이를 본 트라시불로스의 함대는 옆으로 펴던 움직임을 멈추고 뱃머리를 돌려 제 앞의 배들을 쳐서 쫓아냈고, 다음으로 이기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부대의 흩어진 배들에게 거칠게 덤벼들어 그 대부분을 한 번 치지도 않고 달아나게 했다. 시라쿠사인도 이때쯤에는 트라실로스의 함대 앞에서 밀리고 있었고, 이제 제 동료들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드러내 놓고 달아났다.

이제 궤멸은 완전했다. 펠로폰네소스인은 대부분 먼저 미디오스 강으로 피했다가 나중에 아비도스로 달아났다. 아테네인이 빼앗은 배는 몇 척뿐이었으니, 헬레스폰토스가 좁은 탓에 적이 안전한 데까지 가는 길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이 승리보다 더 때맞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때까지 그들은 자잘한 손실이 여러 번 있었던 데다 시칠리아의 참사도 있어 펠로폰네소스 함대를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제 자신을 못 미더워하기를 그쳤고 적이 바다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한편 그들은 적에게서 키오스 배 8척, 코린트 배 5척, 암브라키아 배 2척, 보이오티아 배 2척, 그리고 레우카스와 스파르타와 시라쿠사와 펠레네의 배를 한 척씩 빼앗았고 제 배는 15척을 잃었다. 키노세마 곶에 전승 기념물을 세우고 부서진 배들을 거두어들이고 휴전을 맺어 적의 주검을 돌려준 뒤, 그들은 승리의 소식을 실어 아테네로 갤리선 한 척을 보냈다. 에우보이아의 최근 참사가 있고 아테네가 변혁에 휩싸인 가운데 이 배가 바라지도 못한 좋은 소식을 싣고 닿자 아테네인은 새로 용기를 얻었고, 어깨를 걷어붙이고 나선다면 제 대의가 아직 이길 수도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해전이 있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세스토스의 아테네인은 서둘러 배를 손본 뒤 반란을 일으킨 키지코스를 치러 갔다. 하르파기온과 프리아포스 앞바다에서 그들은 비잔티움에서 온 배 8척이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다가가 해안의 병력을 쫓아 버린 뒤 그 배들을 빼앗았으며, 그러고 나서 더 나아가 성벽이 없던 키지코스 도시를 되찾고 시민들에게서 돈을 거두었다. 그러는 사이 펠로폰네소스인은 아비도스에서 엘라이오스로 배를 몰아 빼앗겼던 갤리선 가운데 아직 성한 것들을 되찾았는데 나머지는 엘라이오스인이 불태워 버린 뒤였고,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클레스를 에우보이아로 보내어 그 섬의 함대를 데려오게 했다.

그 무렵 알키비아데스가 제 함선 13척을 거느리고 카우노스와 파셀리스에서 사모스로 돌아와, 페니키아 함대가 펠로폰네소스인과 합치는 것을 막았고 티사페르네스를 전보다 아테네인에게 더 우호적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제 배 9척에 더 사람을 태웠고 할리카르나소스인에게서 많은 돈을 거두었으며 코스에 요새를 쌓았다. 이 일을 마치고 코스에 총독을 앉힌 뒤 그는 사모스로 배를 몰아 돌아왔으니, 이제 가을이 가까웠다. 그러는 동안 티사페르네스는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밀레토스에서 헬레스폰토스로 갔다는 말을 듣고 아스펜도스에서 다시 돌아서서 이오니아로 온 돛을 폈다. 펠로폰네소스인이 헬레스폰토스에 있는 동안, 아이올리스 혈통의 사람들인 안탄드로스인은 아비도스에서 중장보병 얼마를 뭍길로 이다산을 넘어 실어 와 제 도시 안으로 들였으니, 티사페르네스의 페르시아 부관 아르사케스에게 학대를 당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아르사케스가 남모를 다툼이 있다는 핑계로 델로스인의 으뜸가는 사람들을 불러 군역을 맡으라고 했는데(이들은 델로스를 정화한다는 까닭으로 아테네인에게 제 고향에서 쫓겨난 뒤 아트라미티온에 자리 잡은 델로스인이었다), 그들을 제 벗이요 동맹이라 하여 도시 밖으로 끌어낸 다음 밥자리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그들을 에워싸고 제 병사들을 시켜 활로 쏘아 죽이게 했다. 이 일로 안탄드로스인은 그가 언젠가 저희에게도 무슨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가 그들에게 견디기에 너무 무거운 짐까지 지웠으므로 그들은 제 성채에서 그의 수비대를 쫓아냈다.

티사페르네스는 펠로폰네소스인의 이 짓을, 그리고 그에 더해 제 수비대가 마찬가지로 쫓겨난 밀레토스와 크니도스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 듣고 이제 저와 그들 사이의 틈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그들에게서 더 해를 입을까 두려웠고, 또 파르나바조스가 그들을 맞아들여 더 짧은 시간에 더 적은 비용으로 어쩌면 자기보다 아테네를 더 잘 상대해 내리라는 생각에 속이 상했으므로, 그는 헬레스폰토스로 가서 그들과 다시 합치기로 마음먹었으니 안탄드로스에서 벌어진 일을 두고 따지고 페니키아 함대 문제와 자기에게 걸린 그 밖의 혐의에 대해 되도록 잘 변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에페소스로 가서 아르테미스에게 제사를 올렸다....7

[이 여름 다음의 겨울이 지나면 이 전쟁의 제21년이 끝난다.]8

끝

주

  1. 1. 스파르타 시민 — 스파르타 사회는 완전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 시민, 주변 자유민, 헬롯으로 나뉘었다. 원문에서 저자는 이 좁은 뜻의 '스파르타 시민'과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스파르타(라케다이몬)'를 구분해 쓴다.

  2. 2. 페리폴로이 — 아티카의 국경 요새와 변경을 순찰하던 아테네의 수비 부대. 젊은 시민들이 정규 복무에 들어가기 전에 이 일을 맡는 것이 관례였다.

  3. 3. 프로크세노스 — 제 나라에 살면서 다른 나라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맞아 돌보던 사람. 나라가 그 자리를 맡겼고 대개 집안 대대로 이어졌으며 명예로 여겼다.

  4. 4. 아나케이온 — 아크로폴리스 북쪽 비탈에 있던 디오스쿠로이(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신전. 그 앞뜰은 병력이 모이는 자리로 자주 쓰였다.

  5. 5. 약 7마일 — 크롤리가 원문의 그리스 단위를 영국식 단위로 옮긴 것이다. 이 번역은 크롤리의 영역본을 저본으로 삼았으므로 그 표기를 따랐다.

  6. 6. 키오스 돈 3닢 — 키오스에서 통용되던 은화 세 닢. 크롤리는 원문의 화폐 단위를 옮기지 않고 '키오스의 돈'이라고만 적었다. 현대 화폐로 환산하지 않는다.

  7. 7. 투키디데스의 역사는 여기서 끊긴다. 마침표 넷은 문장이 끝났다는 표시가 아니라 글이 이 자리에서 멎었다는 저본의 표시다. 저자는 서술 도중에 죽었고, 전쟁 자체는 이로부터 여러 해를 더 이어져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항복으로 끝났다.

  8. 8. 이 문단의 대괄호는 저자가 아니라 판본 편집자의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해마다 그 해의 끝을 알리는 문장으로 서술을 맺었는데, 글이 앞에서 끊겼으므로 편집자가 그 형식에 맞추어 마지막 해의 마무리를 대괄호 안에 채워 넣었다. 저본의 표시를 그대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