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제III권 제XI장) 전쟁 제6년 · 데모스테네스의 서부 그리스 전역 · 암브라키아의 몰락
여름이 끝났다. 이어진 겨울에 역병이 두 번째로 아테네인을 덮쳤다. 역병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떠난 적은 없었으나 그 창궐이 눈에 띄게 잦아들어 있던 참이었다. 두 번째로 찾아온 역병은 꼬박 1년을 끌었고 처음의 것은 2년을 끌었는데, 아테네인을 이보다 더 괴롭히고 그들의 힘을 이보다 더 깎아 낸 것은 없었다. 대오에 든 중장보병이 4,400명이나 이 병으로 죽었고 기병이 300명 죽었으며, 그 밖에 끝내 밝혀지지 않은 수의 민중이 죽었다. 같은 때에 아테네와 에우보이아와 보이오티아에서 지진이 여러 차례 일어났고, 특히 마지막에 든 지방의 오르코메노스가 심했다.
같은 겨울에 시칠리아의 아테네인과 레기온인이 함선 30척으로 아이올로스의 섬들을 치러 나섰다. 여름에는 물이 없어 그 섬들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섬들에는 크니도스의 식민단인 리파라인이 사는데, 그들은 그 가운데 그리 크지 않은 리파라라는 섬에 자리를 잡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나머지 섬 디디메와 스트롱길레와 히에라를 갈아 먹는다. 히에라에서는 그 일대 사람들이 헤파이스토스가 대장간을 두고 있다고 믿는데, 밤에는 불꽃이 낮에는 연기가 그 섬에서 그토록 많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 섬들은 시켈인과 메시나인의 해안 앞에 놓여 있고 시라쿠사의 동맹이었다. 아테네인은 그 땅을 짓밟았으나 주민들이 굴복하지 않으므로 레기온으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겨울이 끝나고, 투키디데스가 그 역사를 기록한 이 전쟁의 다섯째 해도 그와 함께 끝났다.
이듬해 여름 펠로폰네소스인과 그 동맹은 아르키다모스의 아들 아기스의 지휘 아래 아티카를 치러 나서서 이스트모스까지 갔으나, 지진이 여러 차례 일어나므로 침공하지 못한 채 되돌아갔다. 지진이 그토록 잦던 그 무렵에 에우보이아의 오로비아이에서는 바다가 그때의 해안선에서 물러났다가 거대한 물결이 되어 돌아와 도시의 큰 부분을 덮쳤고, 다시 물러갈 때에도 그 일부를 물속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래서 한때 땅이던 곳이 지금은 바다다. 주민 가운데 높은 땅으로 제때 달려 올라가지 못한 자들은 죽었다. 오푼토스의 로크리스 해안 앞 섬 아탈란테에서도 비슷한 물난리가 일어나, 아테네의 요새 일부를 쓸어 가고 바닷가에 끌어올려 둔 두 배 가운데 한 척을 부수었다. 페파레토스에서도 바다가 조금 물러났으나 물난리가 뒤따르지는 않았고, 지진이 성벽 일부와 공회당과 그 밖의 건물 몇을 무너뜨렸다. 내 생각으로는 이 현상의 원인을 지진에서 찾아야 한다. 그 충격이 가장 세차게 닿은 지점에서 바다가 뒤로 밀려났다가 갑자기 배가된 힘으로 되돌아오면서 물난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지진이 없이 이런 재난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같은 여름에 시칠리아에서는 교전하는 여러 세력이 저마다 작전을 벌였다. 시칠리아 그리스인끼리 서로 싸우기도 했고 아테네와 그 동맹이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테네인이 참여한 싸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만 골라 적기로 한다. 아테네 장군 카로이아데스가 싸움에서 시라쿠사인에게 죽자 함대의 지휘는 라케스 한 사람에게 돌아갔고, 그는 동맹과 힘을 합해 메시나인에게 속한 곳 밀라이로 함대를 이끌었다. 밀라이의 수비대로 있던 메시나인 2개 대대가 배에서 내리는 무리를 노려 매복했으나 아테네인과 그 동맹에게 크게 죽임을 당하고 무너졌으며, 아테네인과 동맹은 그대로 방벽을 들이쳐 그들에게 아크로폴리스를 내놓고 자기들과 함께 메시나로 진군하도록 강요했다. 이 도시 또한 뒤에 아테네인과 그 동맹이 다가오자 굴복하고 인질과 그 밖에 요구받은 모든 담보를 내놓았다.
같은 여름에 아테네인은 알키스테네스의 아들 데모스테네스와 테오도로스의 아들 프로클레스에게 함선 30척을 주어 펠로폰네소스를 돌게 하고, 니케라토스의 아들 니키아스에게 또 다른 60척과 중장보병 2,000명을 주어 멜로스를 치게 했다. 멜로스인은 섬사람이면서도 아테네의 속민이 되기를, 아니 그 동맹에 드는 것조차 거부했으므로 그들을 굴복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 땅을 짓밟았어도 굴복을 얻어 내지 못하자 함대는 멜로스에서 닻을 올려 그라이아 지방의 오로포스로 갔고, 해가 질 무렵 배를 대자 중장보병은 곧바로 배에서 내려 육로로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를 향해 떠났으며, 그곳에서 미리 맞춰 둔 신호에 따라 칼리아스의 아들 히포니코스와 투클레스의 아들 에우리메돈이 이끄는 아테네의 총동원 병력과 만났다. 그들은 진을 치고 그날은 타나그라 땅을 짓밟으며 보낸 뒤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이튿날에는 맞서 나온 타나그라인과 그들을 도우러 올라온 테베인 몇을 쳐부수고 무구 얼마를 거두어 전승 기념물을 세운 다음 물러났는데, 한쪽 병력은 도시로 가고 다른 쪽은 배로 갔다. 니키아스는 함선 60척으로 해안을 따라가며 로크리스의 연안을 짓밟고 그렇게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스파르타인은 트라키스에 헤라클레이아 식민시를 세웠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말리스인은 모두 세 부족, 곧 파랄리아인과 히에라인과 트라키스인으로 나뉜다. 이들 가운데 마지막 부족이 이웃 오이타이아인과의 전쟁에서 크게 시달린 끝에 처음에는 아테네에 자기들을 맡기려 했으나, 나중에 아테네에서 바라는 안전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 티사메노스를 사절로 뽑아 스파르타로 보냈다. 이 사절에는 스파르타인의 모국 도리스에서 온 사람들도 같은 청을 들고 함께 들었는데, 그들 또한 같은 적에게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스파르타인은 식민단을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트라키스인과 도리스인을 돕고자 한 것이기도 했고, 세우려는 도시가 아테네인과의 전쟁에 유리하게 자리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도 있었다. 그곳에서 에우보이아를 겨눈 함대를 갖출 수 있었고 그 섬으로 건너가는 길이 짧다는 이점이 있었으며, 그 도시는 트라키아로 가는 길목의 기지로도 쓸 만했다. 요컨대 모든 사정이 스파르타인으로 하여금 그곳을 세우는 데 열을 올리게 했다. 먼저 델포이의 신에게 물어 좋은 답을 받은 뒤 그들은 식민단을 내보냈는데, 스파르타 시민1과 페리오이코이2로 이루어졌고, 이오니아인과 아카이아인과 그 밖의 몇몇 종족을 뺀 나머지 그리스인 가운데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 오라고 불렀다. 식민시의 창건자로는 스파르타인 세 사람, 레온과 알키다스와 다마곤이 이끌었다. 정착을 마친 뒤 그들은 이제 헤라클레이아라 불리는 도시의 성벽을 새로 쌓았다. 테르모필레에서 약 4.5마일3, 바다에서 약 2.25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조선소를 짓기 시작하면서, 지키기 쉽도록 테르모필레 쪽 면을 바로 그 좁은 길목에 붙여 막았다.
이 도시를 세운 일은 분명히 에우보이아를 괴롭히려는 뜻이었으므로(그 섬의 케나이온으로 건너가는 길이 짧았다) 처음에는 아테네에 적잖은 불안을 일으켰으나, 뒤에 일어난 일은 그 불안을 조금도 뒷받침하지 않았고 그 도시는 아테네에 아무 골칫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았다. 그 일대에서 주권을 쥐고 있던 테살리아인은 그 도시가 세워지면서 자기들의 땅이 위협받게 되었으므로 그것이 아주 강력한 이웃이 될까 두려워하여 새 정착민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그들과 싸웠고, 마침내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정착민의 수가 상당히 많았는데, 스파르타인이 세운 곳이니 번영이 보장되어 있다고 여겨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파르타인 자신도 그들이 보낸 총독들을 통해 그 번영을 망치고 인구를 줄이는 데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가혹하게, 더러는 공정하지 않게 다스려 주민 대부분을 겁주어 내보냈고, 그리하여 이웃이 그들을 누르기가 더 쉬워졌다.
같은 여름, 아테네인이 멜로스에 붙들려 있던 그 무렵에, 함선 30척으로 펠로폰네소스를 돌던 그들의 동료 시민들은 레우카스의 엘로메노스에서 매복으로 파수병 몇을 베어 없앤 뒤 이어서 큰 병력을 이끌고 레우카스 자체를 치러 갔는데, 오이니아다이를 뺀 아카르나니아인의 총동원 병력과 자킨토스인과 케팔레니아인과 코르키라에서 온 함선 15척이 그들을 보강하고 있었다. 레우카스인은 레우카스 도시와 아폴론 신전이 서 있는 지협의 밖과 안에서 자기 땅이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도 적의 수가 압도적이어서 아무 움직임도 내지 못했고, 그동안 아카르나니아인은 아테네 장군 데모스테네스에게 성벽을 쌓아 그 도시를 본토에서 끊어 놓으라고 다그쳤다. 그렇게 하면 도시를 반드시 손에 넣을 수 있고 가장 골치 아픈 적을 단번에 영원히 치워 버릴 수 있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그동안 메세니아인에게 설득된 터였다. 이만한 큰 군대가 모인 지금이 아이톨리아인을 칠 좋은 기회이며, 아이톨리아인은 나우팍토스의 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굴복시키면 본토의 그쪽 나머지 지역까지 아테네인의 것으로 만들기가 쉬워진다는 것이었다. 아이톨리아 민족은 수가 많고 싸움을 좋아했으나 성벽 없는 마을들에 멀찍이 흩어져 살았고 가벼운 무장밖에 없었으므로, 메세니아인의 말로는 구원이 닿기 전에 큰 어려움 없이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들이 권한 계획은 먼저 아포도티아인을 치고 다음에 오피오니아인을 치고 그다음에 에우리타니아인을 치는 것이었다. 에우리타니아인은 아이톨리아에서 가장 큰 부족으로, 전하는 바로는 알아듣기가 몹시 어려운 말을 쓰고 고기를 익히지 않고 먹는다. 이들을 한번 굴복시키면 나머지는 쉽게 따라 들어올 것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 계획에 동의했다. 메세니아인의 뜻을 맞춰 주려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톨리아인을 본토의 다른 동맹에 더하면 본국의 도움 없이도 보이오티아인을 치러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졸리스의 로크리스를 지나 도리스의 키티니온으로 가서 파르나소스를 오른쪽에 두고 나아가 포키스인에게 내려가는 길이었다. 포키스인은 아테네와의 오랜 우의 때문에 그가 예상한 대로 곧바로 마음을 정하지 않는다 해도 힘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포키스에 이르면 그는 이미 보이오티아의 국경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카르나니아인의 뜻을 거스르고 레우카스에서 닻을 올려 온 병력을 이끌고 해안을 따라 솔리온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기 뜻을 그들에게 알렸다. 레우카스를 포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이 동의하기를 거부하자, 그는 나머지 병력, 곧 케팔레니아인과 메세니아인과 자킨토스인과 제 함선에서 데려온 아테네 함상 보병 300명을 이끌고(코르키라의 함선 15척은 떠나 버렸다) 아이톨리아인을 치러 나섰다. 근거지는 로크리스의 오이네온에 두었는데, 오졸리스의 로크리스인이 아테네의 동맹이었고 온 병력을 이끌고 내륙에서 그와 만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이톨리아인의 이웃이며 무장도 같았으므로 그 지방의 지형과 주민이 싸우는 법을 알고 있어 이 원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시인 헤시오도스가 네메아에서 죽으리라고 미리 알린 신탁에 따라 그 지방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라고 전하는 네메아의 제우스 성역에서 군대와 함께 야영한 뒤, 데모스테네스는 날이 밝자 아이톨리아를 치러 떠났다. 첫날에는 포티다니아를 빼앗고 이튿날에는 크로킬레를, 사흘째에는 티키온을 빼앗았다. 티키온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전리품을 로크리스의 에우팔리온으로 돌려보냈는데, 오피오니아인까지 정복을 밀고 나가되 그들이 굴복하기를 거부하면 나우팍토스로 돌아가 그들을 두 번째 원정의 대상으로 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동안 아이톨리아인은 그 계획이 세워진 순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군대가 자기 땅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부족이 큰 병력으로 몰려왔다. 말리스 만 쪽으로 뻗어 사는 가장 먼 오피오니아인, 곧 보미아인과 칼리아인까지 그 가운데 들어 있었다.
그러나 메세니아인은 처음의 권고를 굽히지 않았다. 아이톨리아인은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데모스테네스를 안심시키며, 온 민족이 그에게 맞서 무장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되도록 빨리 밀고 나아가 닿는 대로 마을들을 차례차례 빼앗으라고 다그쳤다. 조언자들에게 끌리고 자기 운을 믿고, 아무 저항도 만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기에게 가장 모자란 경장 투창병을 보내 줄 로크리스의 원군도 기다리지 않은 채 나아가 아이기티온을 들이쳤다. 주민들은 그 앞에서 달아나 도시 위의 언덕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도시는 바다에서 약 9마일 떨어진 높은 땅에 서 있었다. 그동안 아이톨리아인은 구원하러 모여들어 이제 아테네인과 그 동맹을 쳤는데, 사방의 언덕에서 달려 내려와 투창을 던지고 아테네 군대가 나아오면 물러나고 물러나면 다시 달려들었다. 오랫동안 싸움은 이런 성격이었으니,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이 번갈아 되풀이되었고 그 두 가지 다에서 아테네인이 불리했다.
그래도 궁수들에게 화살이 남아 있고 그것을 쏠 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버텼으니, 경장의 아이톨리아인이 화살 앞에서는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수들의 지휘관이 죽고 그 부하들이 흩어진 뒤에는, 같은 힘씀을 끝없이 되풀이하느라 지치고 아이톨리아인의 투창에 몰린 병사들이 마침내 돌아서 달아났고, 길 없는 골짜기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떨어져 들어가 그렇게 죽었는데, 길잡이였던 메세니아인 크로몬까지 불행히도 죽고 말았다. 아주 많은 수가 추격하는 발 빠르고 가볍게 무장한 아이톨리아인에게 따라잡혀 그들의 투창 아래 쓰러졌다. 그러나 더 많은 수는 길을 잃고 숲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숲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었고 적이 곧 불을 놓아 그들을 둘러싸고 태웠다. 실로 아테네 군대는 온갖 모양의 죽음에 희생되었고 도주가 가져오는 온갖 변고를 다 겪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간신히 바다로, 그리고 처음 떠나온 곳인 로크리스의 오이네온으로 달아났다. 동맹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테네 중장보병이 120명 죽었으니 한 사람도 그보다 적지 않았으며, 모두 한창때의 사람들이었다. 이 전쟁 중에 쓰러진 아테네 시민 가운데 이들이 단연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죽은 사람 가운데에는 데모스테네스의 동료 지휘관 프로클레스도 있었다. 그동안 아테네인은 아이톨리아인에게서 휴전을 얻어 제 주검을 거두고 나우팍토스로 물러났으며, 거기서 배를 타고 아테네로 갔다. 데모스테네스는 나우팍토스와 그 근처에 남았으니, 그런 재앙을 겪은 뒤에 아테네인을 마주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무렵 시칠리아 연안의 아테네인은 로크리스로 항해해 가서 배에서 내려 상륙하여 자기들에게 맞서 온 로크리스인을 쳐부수고 할렉스 강의 요새 하나를 빼앗았다.
같은 여름에 아이톨리아인은 아테네의 원정이 있기 전에 오피오니아인 톨로포스와 에우리타니아인 보리아데스와 아포도티아인 티산드로스로 이루어진 사절을 코린트와 스파르타에 보내 두었는데, 아테네의 침공을 불러들인 나우팍토스를 치도록 군대를 보내 달라는 청을 얻어 냈다. 이에 스파르타인은 가을이 가까워질 무렵 동맹의 중장보병 3,000명을 내보냈는데, 그 가운데 500명은 트라키스에 새로 세운 도시 헤라클레이아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지휘는 스파르타 시민 에우릴로코스가 맡았으며 같은 스파르타 시민인 마카리오스와 메네다이오스가 그와 함께 갔다.
군대가 델포이에 모이자 에우릴로코스는 오졸리스의 로크리스인에게 전령을 보냈다. 나우팍토스로 가는 길이 그들의 땅을 지나갔고, 게다가 그는 그들을 아테네에서 떼어 낼 생각을 품고 있었다. 로크리스에서 그를 가장 많이 도운 것은 암피사인이었는데, 그들은 포키스인의 적의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들이 먼저 스스로 인질을 내놓고, 침공해 온 군대를 두려워하던 나머지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이끌어 냈다. 먼저 가장 험한 길목을 쥐고 있던 이웃 미오니아인이 그리했고, 그다음으로 이프니아인과 메사피아인과 트리타이아인과 칼라이아인과 톨로폰인과 헤사인과 오이안테아인이 그리했으며, 이들은 모두 원정에 함께 들었다. 올파이인은 인질만 내놓는 것으로 그치고 침공에는 따라가지 않았으며, 히아이아인은 자기들 마을 가운데 하나인 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둘 다 거부했다.
준비를 마친 에우릴로코스는 인질들을 도리스의 키티니온에 두고 로크리스인의 땅을 지나 나우팍토스로 나아갔으며, 가는 길에 그에게 합류하기를 거부한 그들의 도시 둘, 오이네온과 에우팔리온을 빼앗았다. 나우팍토스 땅에 이르러 이제 아이톨리아인까지 합류하자 군대는 그 땅을 짓밟고 성벽이 없던 도시의 바깥 구역을 빼앗았으며, 그다음에는 아테네에 예속된 코린트의 식민시 몰리크리온도 빼앗았다. 그동안 아이톨리아의 일이 있은 뒤로 나우팍토스 근처에 머물러 있던 아테네인 데모스테네스는 그 군대의 소식을 듣고 도시가 걱정되어 아카르나니아인에게 가서 나우팍토스를 구원하러 가자고 설득했는데, 그가 레우카스를 떠나 버린 일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이에 그들은 중장보병 1,000명을 그의 함선에 태워 함께 보냈고, 이들이 그곳에 뛰어들어 도시를 구했다. 성벽은 길고 지키는 사람은 적어서 그러지 않았더라면 도시는 가장 큰 위험에 놓였을 것이었다. 그동안 에우릴로코스와 그 동료들은 이 병력이 들어간 것을 알고 도시를 들이쳐 빼앗을 수 없음을 깨닫고 물러났는데, 펠로폰네소스로 간 것이 아니라 한때 아이올리스라 불리고 지금은 칼리돈과 플레우론이라 불리는 지방과 그 근처의 여러 곳, 그리고 아이톨리아의 프로스키온으로 갔다. 암브라키아인이 와서 암필로키아의 아르고스와 암필로키아와 아카르나니아의 나머지를 치는 일에 힘을 합하자고 그들을 다그쳤기 때문이며, 이 지방들을 정복하면 본토 전체가 스파르타의 동맹이 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에우릴로코스는 이에 동의하고 아이톨리아인을 돌려보낸 뒤, 암브라키아인이 싸움터로 나서고 자기가 아르고스 앞에서 그들과 합칠 때가 오기까지 군대와 함께 그 일대에서 조용히 머물렀다.
여름이 끝났다. 이어진 겨울에 시칠리아의 아테네인은 그리스인 동맹과, 시라쿠사의 속민이거나 동맹이던 시켈인 가운데 시라쿠사를 버리고 자기들의 군대에 든 자들과 함께 시켈인의 도시 이네사로 진군했다. 그 아크로폴리스는 시라쿠사인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도시를 쳤으나 빼앗지 못하고 물러났다. 물러나는 길에 아테네인의 뒤를 따라 물러나던 동맹이 요새에서 나온 시라쿠사인에게 공격을 받아 그 군대의 큰 부분이 크게 죽임을 당하고 무너졌다. 그 뒤 라케스와 아테네인은 배에서 내려 로크리스에 여러 차례 상륙했고, 카이키노스 강에서 카파톤의 아들 프로크세노스와 함께 맞서 온 로크리스인을 쳐부수고 무구 얼마를 거두어 떠났다.
같은 겨울에 아테네인은 델로스를 정화했는데, 어떤 신탁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전에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그 섬을 정화한 적이 있었으나, 섬 전체가 아니라 신전에서 보이는 만큼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하여 섬 전체를 정화했다. 델로스에서 죽은 사람들의 무덤을 모두 파냈고, 앞으로는 누구도 그 섬에서 죽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고 그런 사람은 레네아로 옮겨 가도록 명했다. 레네아는 델로스에 아주 가까워서, 사모스의 참주 폴리크라테스가 해상의 패권을 쥐고 있던 시절에 정복한 여러 섬에 레네아를 더한 뒤 그것을 쇠사슬로 델로스에 매어 델로스의 아폴론에게 봉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테네인은 정화를 마친 뒤 델로스 경기의 5년제 축제4를 처음으로 열었다. 실로 옛날에는 이오니아인과 이웃 섬사람들이 델로스에 크게 모였으니, 지금 이오니아인이 에페소스의 축제에 가는 것처럼 그 축제에 왔고, 그곳에서 운동 경기와 시 경연이 열렸으며 여러 도시가 춤추는 무리를 데려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폴론 찬가에서 가져온 다음의 호메로스 시구보다 더 분명한 것이 없다.
포이보스여, 멀리든 가까이든 어디를 거니시든 당신이 머무는 모든 곳 가운데 델로스가 가장 사랑스러웠나니. 겉옷 걸친 이오니아인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길을 잡아 당신의 축일을 지키며, 사내다운 겨룸마다 당신의 은혜를 부르고, 당신의 이름을 기려 춤추고 노래하네.
이오니아인이 겨루러 간 시 경연 또한 있었다는 것은 같은 찬가에서 가져온 다음 구절이 보여 준다. 그는 델로스 여인들의 춤을 기린 뒤에 이런 시구로 찬가를 맺으면서 자기 자신을 함께 가리킨다.
자, 아폴론께서 그대들 모두를 지켜 주시기를. 그러니 사랑스러운 이들아, 안녕히. 그러나 내가 그대들의 마음에서 떠나간다고는 말하지 말아 다오. 뒷날 어느 때 이 세상의 또 다른 나그네가 그대들의 바닷가에 닿아 여기 그대들의 처녀들에게 누가 그대들의 귀에 가장 달게 노래하더냐 묻는다면, 그때 나를 떠올리고 웃음으로 이렇게 답해 다오. ‘키오스5의 바위섬에서 온 눈먼 노인이라고.’
호메로스는 이렇게 옛날 델로스에 큰 모임과 축제가 있었음을 증언한다. 뒷날에는 섬사람들과 아테네인이 제물과 함께 춤추는 무리를 계속 보냈으나 아마도 고난 때문에 경연과 의식 대부분이 없어졌고, 그러다 이번에 아테네인이 경마라는 새로운 종목을 더해 그 경기를 열게 된 것이었다.
같은 겨울에 암브라키아인은 에우릴로코스의 군대를 붙들어 둘 때 그에게 약속한 대로 중장보병 3,000명을 이끌고 암필로키아의 아르고스를 치러 나아가, 아르고스 땅에 들어가 올파이를 차지했다. 올파이는 바다 가까운 언덕 위의 요새로, 전에 아카르나니아인이 성벽을 쌓아 온 민족의 재판을 여는 곳으로 쓴 데였으며, 해안에 있는 아르고스 시에서 약 2.75마일 떨어져 있다. 그동안 아카르나니아인은 병력의 일부를 이끌고 아르고스를 구원하러 갔고 나머지는 암필로키아의 크레나이, 곧 ‘샘’이라 불리는 곳에 진을 쳐서 에우릴로코스와 그의 펠로폰네소스인을 지켜보며 그들이 지나가 암브라키아인과 합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면서 아이톨리아 원정을 이끌었던 데모스테네스를 자기들의 지휘자로 청해 불렀고, 티모크라테스의 아들 아리스토텔레스와 안팀네스토스의 아들 히에로폰이 지휘하여 펠로폰네소스 앞바다를 돌던 아테네 함선 20척도 불렀다. 한편 올파이의 암브라키아인은 제 도시로 사람을 보내 총동원 병력을 이끌고 도우러 와 달라고 청했다. 에우릴로코스의 군대가 아카르나니아인을 지나오지 못할까, 그리하여 자기들만 외롭게 싸워야 하거나 물러나고자 할 때 위험 없이는 물러날 수 없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에우릴로코스와 그의 펠로폰네소스인은 암브라키아인이 올파이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그들과 합치려 프로스키온에서 서둘러 떠났으며, 아켈로오스를 건너 아카르나니아를 지나 나아갔는데, 주민들이 아르고스를 구원하러 가서 그 땅은 비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스트라토스인의 도시와 그 수비대를 두고 왼쪽에는 아카르나니아의 나머지를 두었다. 스트라토스인의 땅을 지나 피티아를 통과해 나아갔고, 다음에는 메데온을 스쳐 림나이아를 지났다. 그러고 나서 아카르나니아를 뒤로 두고 우호적인 땅인 아그라이아인의 지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아그라이아인에게 속한 티마오스 산에 이르러 그것을 넘고 날이 저문 뒤 아르고스 땅으로 내려갔으며, 아르고스 시와 크레나이의 아카르나니아 진지 사이를 지나 올파이의 암브라키아인과 합쳤다.
날이 밝을 때 여기서 하나가 된 그들은 메트로폴리스라 불리는 곳에 자리를 잡고 진을 쳤다. 오래지 않아 함선 20척의 아테네인이 아르고스인을 도우러 암브라키아 만으로 들어왔고, 데모스테네스와 메세니아 중장보병 200명과 아테네 궁수 60명이 함께 왔다. 함대가 올파이 앞바다에서 그 언덕을 바다 쪽에서 막고 있는 동안, 아카르나니아인과 암필로키아인 몇은 이미 아르고스에 이르러 적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암필로키아인 대부분은 암브라키아인이 힘으로 붙들어 두고 있었다. 그들은 데모스테네스를 뽑아 자기들의 장군들과 함께 동맹군 전체를 지휘하게 했다. 데모스테네스는 그들을 올파이 가까이 이끌고 가서 진을 쳤는데, 큰 협곡이 두 군대를 갈라놓고 있었다. 닷새 동안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엿새째에 양편이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펠로폰네소스인의 군대가 더 커서 맞선 편의 날개를 넘어 뻗었으므로, 데모스테네스는 자기 오른쪽이 둘러싸일까 두려워 떨기나무가 무성한 우묵한 길에 중장보병과 경장 병력 400명쯤을 매복시켜, 싸움이 붙는 순간에 튀어나와 앞으로 뻗어 나온 적의 왼쪽 날개 뒤를 잡게 했다. 양편이 준비를 마치자 싸움이 붙었다. 데모스테네스는 메세니아인과 아테네인 몇과 함께 오른쪽 날개에 있었고, 전열의 나머지는 아카르나니아인의 여러 부대와 암필로키아 투창병으로 채워져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인과 암브라키아인은 뒤섞여 늘어섰고 만티네이아인만 왼쪽에 뭉쳐 있었으나 날개의 끝까지는 미치지 않았는데, 그 끝에서는 에우릴로코스와 그의 병력이 메세니아인과 데모스테네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인은 이제 싸움에 깊이 들어가 넘쳐 뻗은 날개로 적의 오른쪽을 돌아 꺾으려는 참이었는데, 그때 매복해 있던 아카르나니아인이 뒤에서 그들을 덮쳐 첫 공격에 무너뜨렸고 그들은 버티고 맞서지 못했다. 그들이 빠진 공포가 군대 대부분을 달아나게 했으니, 에우릴로코스의 부대와 자기들의 가장 좋은 병력이 베여 쓰러지는 것을 보고 한없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 일의 대부분은 싸움터의 이 자리에 배치되어 있던 데모스테네스와 그의 메세니아인이 해냈다. 그동안 암브라키아인(그 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병사들이다)과 오른쪽 날개의 병력은 맞선 부대를 쳐부수고 아르고스까지 그것을 쫓아갔다. 추격에서 돌아온 그들은 본대가 패한 것을 알아보았고, 아카르나니아인에게 몰리면서 간신히 올파이로 길을 뚫었으나 가는 길에 큰 손실을 입었다. 규율도 대오도 없이 내달렸기 때문이며, 물러나는 동안 군대 가운데 대오를 가장 잘 지킨 만티네이아인만 예외였다.
싸움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튿날 에우릴로코스와 마카리오스가 죽어 홀로 지휘를 이어받은 메네다이오스는 그토록 뚜렷한 패배를 겪은 뒤에 어떻게 머물러 포위를 견뎌야 할지 막막했으니 육지로도 막히고 바다로는 아테네 함대에 막혀 있었으며, 어떻게 무사히 물러날지도 그만큼 막막했으므로, 데모스테네스와 아카르나니아의 장군들에게 휴전과 퇴각의 허락을, 아울러 주검을 거둘 것을 두고 교섭을 열었다. 그들은 주검을 그에게 돌려주었고, 전승 기념물을 세운 뒤 자기들의 주검도 300구가량 거두었다. 요구받은 퇴각은 군대 전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와 그의 아카르나니아 동료들은 만티네이아인과 메네다이오스와 그 밖의 펠로폰네소스인 지휘관들과 유력자들에게는 지체 없이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몰래 주었다. 암브라키아인과 이방인 용병 무리에게서 그들을 받쳐 주는 자들을 떼어 내고자 했고, 무엇보다 그 일대의 그리스인에게 스파르타인과 펠로폰네소스인이 배신자이며 제 이익만 챙기는 자들이라는 평판을 얻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적이 제 주검을 거두어 할 수 있는 대로 급히 묻고 허락을 얻은 자들이 몰래 퇴각을 꾸미던 동안, 데모스테네스와 아카르나니아인에게 소식이 들어왔다. 도시의 암브라키아인이 올파이에서 처음 온 전갈에 따라 총동원 병력을 이끌고 암필로키아를 지나 올파이의 동포와 합치러 행군해 오고 있으며, 그동안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치러 갈 준비를 했고, 그러는 동안 곧바로 강한 부대를 앞서 보내 길을 막고 요긴한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그사이 그 합의에 든 만티네이아인과 그 밖의 사람들은 풀과 땔나무를 모으러 간다는 구실로 밖에 나가 둘씩 셋씩 몰래 빠져나갔고, 가는 길에 나온 목적이라고 내세운 것들을 실제로 뜯어 모으면서 올파이에서 얼마간 멀어질 때까지 그리하다가 그다음에는 걸음을 빨리했다. 암브라키아인과 그들과 함께 더 큰 무리로 나온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서둘러 나아가며 따라잡으려고 달렸다. 아카르나니아인은 처음에 모두가 똑같이 허락 없이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펠로폰네소스인을 쫓기 시작했고, 자기들이 배신당하고 있다고 믿어, 그들을 막으며 허락이 주어진 것이라고 알려 준 자기들의 장군 몇에게 투창을 한두 자루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끝내는 만티네이아인과 펠로폰네소스인을 지나가게 하고 암브라키아인만 죽였는데, 어떤 사람이 암브라키아인인지 펠로폰네소스인인지 가려내는 일에 다툼과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게 죽은 수는 200명쯤이었다. 나머지는 이웃한 아그라이아 땅으로 달아나 아그라이아인의 우호적인 왕 살린티오스에게서 피할 곳을 얻었다.
그동안 도시에서 온 암브라키아인은 이도메네에 이르렀다. 이도메네는 높은 언덕 둘로 되어 있는데, 데모스테네스가 앞서 보낸 병력이 날이 저문 뒤 그 가운데 높은 쪽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암브라키아인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암브라키아인은 그동안 낮은 쪽으로 올라가 그 아래에서 야영하고 있었다. 데모스테네스는 저녁을 먹고 날이 저물자 곧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떠났는데, 자기는 병력의 절반을 데리고 좁은 길목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암필로키아의 언덕을 넘어가게 했다. 새벽에 그는 아직 자리에 누워 있고 그동안 일어난 일을 모르는 암브라키아인을 덮쳤는데, 그들은 다가오는 것이 제 동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데모스테네스가 일부러 메세니아인을 앞에 세우고 도리스 방언으로 말을 걸게 했기 때문이며, 아직 밤이어서 파수병들은 그들을 볼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여 믿음을 심어 주려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치자마자 그들의 군대를 무너뜨렸고, 대부분을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나머지는 언덕을 넘어 달아나 흩어졌다. 그러나 길은 이미 막혀 있었고, 암필로키아인은 자기 땅을 알았으나 암브라키아인은 알지 못해 어느 쪽으로 돌아야 할지 가릴 수 없었으며, 게다가 가볍게 무장한 적을 상대로 무거운 무장을 걸치고 있었으므로 협곡으로, 그리고 자기들을 노려 놓아둔 매복으로 떨어져 들어가 거기서 죽었다. 온갖 방도로 벗어나려 애쓰던 가운데 더러는 멀지 않은 바다로 향했고, 싸움이 벌어지는 바로 그때 아테네 함선이 해안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그리로 헤엄쳐 갔으니, 그 겁에 질린 가운데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야만스럽고 미움받는 암필로키아인의 손보다는 아테네인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무너진 암브라키아의 큰 병력 가운데 도시에 무사히 닿은 것은 몇 사람뿐이었다. 아카르나니아인은 주검에서 무구를 벗겨 내고 전승 기념물을 세운 뒤 아르고스로 돌아갔다.
이튿날 올파이에서 아그라이아인에게로 달아난 암브라키아인이 보낸 전령이 와서, 첫 싸움 뒤에 쓰러진 주검을 거두게 해 달라고 청했다. 만티네이아인과 그 일행이 진영을 떠날 때 그들처럼 허락을 받지는 못한 채 함께 나섰다가 쓰러진 자들이었다. 도시에서 온 암브라키아인의 무구를 보고 전령은 그 수에 놀랐는데, 그 참변을 아무것도 모른 채 그것이 제 편 사람들의 무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에게 무엇에 그토록 놀랐느냐고, 그들 가운데 몇이 죽었느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또 이 전령이 이도메네의 병력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전령이 답했다. “200명쯤이오.” 그러자 물은 사람이 말을 받았다. “아니, 여기 보이는 무구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의 것이오.” 전령이 되물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와 함께 싸운 자들의 무구가 아니오?” 상대가 답했다. “그들의 것이오. 적어도 그대들이 어제 이도메네에서 싸웠다면 말이오.” “그러나 우리는 어제 아무와도 싸우지 않았소. 그저께 물러나는 길에 싸웠을 뿐이오.” “그것이 어떻든, 우리는 어제 암브라키아 도시에서 그대들을 보강하러 온 자들과 싸웠소.” 전령이 이 말을 듣고 도시에서 온 원군이 몰살했음을 알자 통곡을 터뜨렸고, 눈앞의 재앙이 얼마나 큰지에 넋을 잃고 제 일을 이루지도, 주검을 다시 청하지도 않은 채 곧바로 떠나갔다. 실로 이것은 이 전쟁 동안 같은 날수 안에 어느 한 그리스 도시에 닥친 재앙 가운데 단연 가장 큰 것이었다. 죽은 사람의 수를 내가 적지 않은 것은, 전하는 수가 그 도시의 크기에 비해 너무 어울리지 않아 믿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내가 안다. 아카르나니아인과 암필로키아인이 아테네인과 데모스테네스가 권한 대로 암브라키아를 빼앗으려 했다면 한 번 치지 않고도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테네인이 그곳을 쥐면 지금보다 더 나쁜 이웃이 될까 두려워했다.
그 뒤 아카르나니아인은 전리품의 3분의 1을 아테네인에게 몫으로 주고 나머지는 자기들의 여러 도시에 나누었다. 아테네인의 몫은 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빼앗겼다. 지금 아티카의 신전들에 봉납되어 있는 무구는 아카르나니아인이 데모스테네스를 위해 따로 떼어 둔 무구 일습6 300벌이며, 그가 몸소 아테네로 가져온 것이다. 아이톨리아의 재앙을 겪은 뒤 그가 조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 공적으로 덜 위태로워졌다. 함선 20척의 아테네인도 나우팍토스로 떠났다. 아카르나니아인과 암필로키아인은 데모스테네스와 아테네인이 떠난 뒤, 살린티오스와 아그라이아인에게 피해 있던 암브라키아인과 펠로폰네소스인에게 오이니아다이에서 자유로이 물러가도록 허락했으니, 그들은 살린티오스의 땅에서 그곳으로 옮겨 가 있었다. 그리고 앞날을 위해 암브라키아인과 100년 기한의 조약과 동맹을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맺었다.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의 동맹이어야 했다. 암브라키아인은 아카르나니아인과 함께 펠로폰네소스인을 치러 나아가도록 요구받을 수 없고, 아카르나니아인도 암브라키아인과 함께 아테네인을 치러 나아가도록 요구받을 수 없었다. 그 밖에 암브라키아인은 암필로키아인에게서 쥐고 있던 땅과 인질을 내놓아야 했고, 아카르나니아인과 원수가 된 아낙토리온을 돕지 않아야 했다. 이 합의로 그들은 전쟁을 끝냈다. 그 뒤 코린트인은 자기 시민으로 이루어진 수비대를 암브라키아에 보냈는데, 중장보병 300명이었고 에우티클레스의 아들 크세노클레이데스가 이끌었으며, 본토를 가로지르는 힘든 길을 지나 목적지에 닿았다. 암브라키아 사건의 역사는 이러했다.
같은 겨울에 시칠리아의 아테네인은 내륙에서 히메라의 국경을 넘어 들어간 시켈인과 힘을 합해 배에서 내려 히메라 땅에 상륙했고, 아이올로스의 섬들로도 항해해 갔다. 레기온으로 돌아와서는 이솔로코스의 아들 아테네 장군 피토도로스가 라케스를 대신해 함대의 지휘를 맡으러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시칠리아의 동맹이 아테네로 건너가 더 많은 배를 도우러 보내도록 아테네인을 움직여 놓은 것이었다. 이미 육지를 장악한 시라쿠사인이 몇 척 안 되는 배에 더는 바다에서 막히지 않으려고 해군을 모으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그들은 지적했다. 아테네인은 그들에게 보낼 함선 40척에 사람을 채우기 시작했는데, 그리하면 시칠리아의 전쟁이 더 빨리 끝나리라 생각했고 아울러 자기들의 해군을 훈련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에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인 피토도로스가 배 몇 척을 이끌고 먼저 파견되었고, 소스트라티데스의 아들 소포클레스7와 투클레스의 아들 에우리메돈이 본대를 이끌고 뒤따를 예정이었다. 그동안 피토도로스는 라케스의 함선을 지휘하게 되었고, 겨울이 끝날 무렵 전에 라케스가 빼앗았던 로크리스의 요새를 치러 갔으나 싸움에서 로크리스인에게 패한 뒤 돌아왔다.
이 봄의 첫 며칠 사이에 전에도 그랬듯이 에트나에서 불의 흐름이 흘러나와 에트나산에 사는 카타나인의 땅 얼마를 망가뜨렸다. 에트나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산이다. 전하는 바로는 지난번 분출에서 50년이 지났고, 그리스인이 시칠리아에 산 뒤로 모두 세 번 있었다고 한다. 그해 겨울의 일은 이러했고, 투키디데스가 그 역사를 기록한 이 전쟁의 여섯째 해가 그와 함께 끝났다.
주
1. 스파르타 시민 — 스파르타 사회는 완전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 시민, 주변 자유민, 헬롯으로 나뉘었다. 원문에서 저자는 이 좁은 뜻의 '스파르타 시민'과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스파르타(라케다이몬)'를 구분해 쓴다.
2. 페리오이코이 — 스파르타 주변의 자유민. 스파르타에 딸린 도시에 살며 군역을 졌으나 완전시민권은 없었다.
3. 약 4.5마일 — 크롤리가 원문의 스타디온을 영국식 단위로 옮긴 것이다. 이 번역은 크롤리의 영역본을 저본으로 삼았으므로 그 표기를 따랐다. 이 장의 다른 거리 표기도 모두 같다.
4. 5년제 축제 — 크롤리는 이 축제를 quinquennial(5년마다)이라고 옮겼다. 그리스인은 해를 셀 때 시작하는 해와 끝나는 해를 모두 넣었으므로, 실제로는 4년마다 열린 축제였다. 올림피아 경기를 헤아리던 셈법과 같다.
5. 키오스 — 크롤리의 시구는 이 섬을 Scio라고 적었다. 중세 이래 서양에서 키오스를 부른 이름이다. 눈먼 노인은 호메로스 자신을 가리킨다.
6. 무구 일습 — 중장보병 한 사람이 갖추는 무구 전부를 한 벌로 헤아린 것이다. 방패와 투구와 가슴받이와 정강이받이에 창과 검이 딸렸다. 싸움에서 거둔 무구를 신전에 봉납하는 것이 관례였다.
7. 소포클레스 — 아테네 장군으로, 같은 이름의 비극 작가와는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