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4장
라스콜니코프는 소냐가 사는 운하 둑의 그 집으로 곧장 갔다. 3층짜리 낡은 초록색 집이었다. 그는 수위를 찾아내 재봉사 카페르나우모프가 어디쯤 사는지 어렴풋한 이야기를 들었고, 안마당 구석에서 어둡고 좁은 계단으로 드는 입구를 찾아낸 뒤 2층으로 올라가, 안마당 위로 2층 전체를 빙 두르고 있는 복도로 나섰다. 어둠 속을 헤매며 카페르나우모프의 문을 찾자면 어느 쪽으로 돌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세 걸음쯤 떨어진 데서 문 하나가 열렸고 그는 기계적으로 그 문을 붙들었다.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가 불안스레 물었다.
「나요…… 만나러 왔어요.」 라스콜니코프가 대답하고는 비좁은 현관으로 들어섰다.
부서진 의자 위에 찌그러진 구리 촛대에 꽂힌 초가 하나 서 있었다.
「오셨군요! 맙소사!」 소냐가 가냘프게 외치고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방이 어느 쪽이에요? 이쪽?」 그러고는 라스콜니코프가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서둘러 들어갔다.
잠시 뒤 소냐도 초를 들고 들어와 촛대를 내려놓고는,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의 앞에 서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흔들렸고, 뜻밖의 방문에 겁을 집어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핏기 없던 얼굴에 별안간 붉은 기운이 몰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속이 메스껍고 부끄럽고, 또 행복하기도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얼른 고개를 돌려 탁자 옆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재빠른 눈길 하나로 방 안을 훑었다.
크기는 크지만 천장이 지독하게 낮은 방이었고, 카페르나우모프네가 세를 놓은 유일한 방이었으며, 왼쪽 벽에 난 닫힌 문 하나가 그 집 방들로 통했다. 맞은편 오른쪽 벽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는데 늘 잠겨 있었고, 그 문은 옆 셋집으로 통했으며 그쪽은 따로 떨어진 살림이었고, 소냐의 방은 헛간처럼 보였는데 몹시 찌그러진 사각형이어서 그 때문에 방이 기괴한 꼴을 하고 있었다. 운하 쪽으로 창이 셋 난 벽이 비스듬히 뻗어 있어 한쪽 구석은 아주 날카로운 각을 이루었고, 어지간히 밝은 빛이 아니고서는 그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쪽 구석은 어울리지 않게 둔했고, 그 큰 방에 세간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니, 오른쪽 구석에 침대가 하나, 그 옆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푸른 천을 덮은 수수한 전나무 탁자가 같은 벽에 붙어 옆 셋집으로 난 문 가까이 놓여 있었으며, 그 탁자 옆에는 골풀 방석을 깐 의자가 둘 있었다. 맞은편 벽의 날카로운 각 가까이에는 수수한 나무 서랍장이 하나, 마치 허허벌판에 버려진 듯한 꼴로 서 있었고, 방 안에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누렇게 바래고 긁히고 해진 벽지는 구석마다 까맸고, 겨울이면 틀림없이 눅눅하고 연기가 들어찼을 것이었으며, 가난의 표시가 온 데 널려 있어 침대에는 휘장조차 없었다.
소냐는 제 방을 그토록 주의 깊게, 그토록 거리낌 없이 뜯어보는 손님을 말없이 바라보았고, 마침내는 제 심판자, 제 운명을 판가름할 자 앞에 선 사람처럼 공포로 떨기 시작하기까지 했다.
「늦었군요……. 열한 시지요?」 그가 여전히 눈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네.」 소냐가 중얼거렸다. 「아, 네, 그래요.」 그녀는 마치 거기에 빠져나갈 길이라도 있는 듯 황급히 덧붙였다. 「주인집 시계가 방금 쳤어요…… 저도 들었고요…….」
「마지막으로 온 거예요.」 라스콜니코프가 침울하게 말을 이었는데, 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니까요……」
「어디…… 가시나요?」
「모르겠어요…… 내일…….」
「그럼 내일 카테리나 이바노브나한테 안 오시는 거예요?」 소냐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겠어요. 내일 아침이면 알겠지요…….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한마디 하려고 왔어요…….」
그가 생각에 잠긴 눈을 들어 그녀를 보다가, 그녀는 내내 자기 앞에 서 있는데 자기는 앉아 있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다.
「왜 서 있어요? 앉아요.」 그가 달라진 목소리로,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앉았다. 그는 상냥하게, 거의 가엾이 여기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말랐어요! 손이 이게 뭡니까! 훤히 비칠 지경이군요, 죽은 사람 손처럼.」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냐가 희미하게 웃었다.
「늘 이랬어요.」 그녀가 말했다.
「집에서 살 때도요?」
「네.」
「그야 그랬겠지요.」 그가 퉁명스럽게 덧붙였고, 얼굴빛과 목소리가 또 한 번 별안간 달라졌다.
그가 다시 한번 둘레를 둘러보았다.
「이 방은 카페르나우모프네한테서 빌린 거예요?」
「네…….」
「그 사람들은 저 문 너머에 살고요?」
「네……. 이만한 방이 하나 더 있어요.」
「죄다 방 하나에서요?」
「네.」
「나 같으면 밤에 이 방이 무서울 것 같군요.」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아주 좋은 사람들이에요, 아주 친절하고요.」 여전히 어리둥절한 듯한 소냐가 대답했다. 「세간도, 다…… 다 그 집 거예요. 그리고 다들 친절해요, 아이들도 자주 저한테 놀러 오고요.」
「다들 말을 더듬는다면서요?」
「네……. 그이는 말을 더듬고 다리를 절어요. 그 아내도……. 정확히 더듬는 건 아닌데 말을 또렷이 못 해요. 아주 착한 사람이에요. 그이는 전에 집 하인이었고요. 그리고 아이가 일곱인데…… 맏이만 더듬고 나머지는 그냥 몸이 안 좋을 뿐이에요…… 더듬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그녀가 좀 놀란 기색으로 덧붙였다.
「그때 아버지가 이야기해 줬어요. 나한테 다 이야기해 줬지요……. 여섯 시에 나갔다가 아홉 시에 돌아온다는 것도,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도.」
소냐는 당황했다.
「오늘 아버지를 본 것 같았어요.」 그녀가 머뭇머뭇 속삭였다.
「누구를요?」
「아버지요. 거리를 걷고 있었어요, 저 바깥 모퉁이에서, 열 시쯤에요. 그런데 앞서 걸어가고 계신 것 같았어요. 꼭 아버지처럼 보였고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한테 가려던 참이었어요…….」
「거리를 걷고 있었다고요?」
「네.」 소냐가 불쑥 속삭이고는, 다시 당혹에 짓눌려 눈을 내리떴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한테 맞곤 했겠지요?」
「어머,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소냐가 거의 질겁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 사람을 사랑해요?」
「사랑하느냐고요? 그럼요!」 소냐가 애원하듯 힘주어 말하고는 괴로워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아, 모르시는군요……. 아시기만 한다면! 보세요, 그이는 꼭 어린애 같아요……. 정신이 온전치 않아요, 그러니까…… 슬픔 때문에요. 예전엔 얼마나 영리했는지…… 얼마나 너그러웠는지…… 얼마나 착했는지! 아, 모르세요, 모르신다고요!」
소냐는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이렇게 말하며 흥분과 괴로움에 두 손을 쥐어짰고, 핏기 없던 두 볼이 달아올랐으며 두 눈에는 고통스러운 빛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밑바닥까지 흔들렸다는 것, 말하고 싶어, 편들고 싶어, 무언가를 토해 내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것이 분명했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일종의 채울 길 없는 연민이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에 비쳐 있었다.
「저를 때리다니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맙소사, 저를 때리다니요! 설령 때렸다 한들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그게 뭐가 어때서요? 아무것도, 그 일은 아무것도 모르세요……. 그이는 너무 불행해요…… 아, 얼마나 불행한데요! 게다가 병들었고요……. 그이는 올바름을 찾고 있어요, 그이는 깨끗해요. 어디에나 올바름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그렇게나 굳고, 또 그것을 기다려요……. 그이를 고문한다 해도 그이는 그른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이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보고, 그래서 그 일에 화를 내요. 어린애 같아요, 어린애 같다고요. 그이는 착해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소냐가 캐묻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이 죄다 당신 손에 남겨지잖아요. 하기야 전에도 죄다 그 손에 매달려 있었지만……. 게다가 아버지는 술값을 구걸하러 왔고요. 자, 이제 어떻게 될까요?」
「모르겠어요.」 소냐가 서글프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거기 남을까요?」
「모르겠어요……. 방세가 밀렸는데, 주인 여자가 오늘 그 사람들을 내보내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한시도 더 있지 않겠다고 해요.」
「어떻게 그렇게 배짱이 좋을까요? 당신을 믿고 그러는 거예요?」
「아,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는 하나예요, 하나처럼 살아요.」 소냐가 다시 흔들렸고 화까지 냈는데, 마치 카나리아나 그 비슷한 작은 새가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이가 달리 뭘 할 수 있었겠어요? 뭘,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녀가 달아오르고 격해져서 물고 늘어졌다. 「오늘 그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아세요! 정신이 온전치 않아요, 못 보셨어요? 어느 순간엔 내일 모든 게 잘되어야 한다고, 점심이며 그런 것들을 두고 어린애처럼 안달하다가……. 그러다 두 손을 쥐어짜고 피를 뱉고 울다가, 별안간 절망해서 벽에 머리를 찧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다 또 마음을 가라앉히고요. 그이는 이제 도와주실 거라고 거기에 온통 희망을 걸고 있고, 그러면 어디선가 돈을 좀 꾸어서 저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 양갓집 딸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차리고 저한테 그 감독을 맡겨서, 우리가 새롭고 훌륭한 삶을 시작할 거라고 해요. 그러고는 저한테 입 맞추고 껴안고 위로해 주는데, 그이는 제 꿈을 그렇게 믿어요, 그렇게 믿는다고요! 거스를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온종일 빨래하고 치우고 기웠어요, 그 가녀린 손으로 빨래통을 방에 끌어들여 놓고는 숨이 차서 침대에 주저앉고요. 오늘 아침엔 폴레치카하고 리다 신을 신발을 사러 가게에 갔어요, 신던 것이 아주 해져서요, 그런데 셈해 둔 돈이 모자랐어요, 어림도 없이 모자랐어요. 그런데 그이가 그렇게 예쁘고 작은 장화를 골랐지 뭐예요, 그이는 안목이 있거든요, 모르시겠지만. 그러고는 가게에서 점원들 앞에서 돈이 모자란다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아, 그걸 보는 게 얼마나 슬프던지…….」
「그렇다면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라스콜니코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가엾지 않으세요? 가엾지 않으시냐고요?」 소냐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저는 알아요, 아무것도 못 보셨으면서도 마지막 한 푼까지 손수 내주셨잖아요, 그러니 죄다 보셨더라면 어땠겠어요, 아이고! 그리고 저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자주 그이를 울렸는지 몰라요! 바로 지난주에도요! 그래요, 제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꼭 일주일 전에요. 저는 모질었어요! 그런 짓을 또 얼마나 자주 했는지! 아, 온종일 그 생각에 비참했어요!」
소냐는 그것을 떠올리는 아픔에 말을 하면서 두 손을 쥐어짰다.
「모질었다고요?」
「네, 저예요 ― 저요. 제가 그 집에 갔어요.」 그녀가 울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뭘 좀 읽어 다오, 소냐, 머리가 아프구나, 읽어 다오, 여기 책이 있다』 하셨어요. 안드레이 세묘노비치 레베쟈트니코프한테서 얻은 책이었는데, 그이가 거기 살거든요, 늘 그런 우스운 책들을 얻어 오곤 했어요, 그래서 제가 『오래 못 있어요』 했어요, 읽고 싶지 않았고, 사실은 카테리나 이바노브나한테 깃을 보여 주려고 간 거였으니까요. 행상 리자베타가 깃하고 소매를 싸게 팔았거든요, 예쁘고 새것이고 수가 놓인 걸로요, 그런데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그것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그걸 두르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고는 무척 기뻐했어요. 『그걸 나한테 주려무나, 소냐』 하고 그이가 말했어요, 『제발 좀』. 『제발 좀』 하고 말했어요, 그렇게나 갖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그걸 언제 두르겠어요? 그저 지나간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리게 할 뿐인데, 그이는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고 흐뭇해했지요, 옷이라고는 아무것도, 제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요, 이 여러 해 동안 없었어요! 그러면서 누구한테 무얼 달라는 법이 없어요, 자존심이 세서 차라리 제 것을 다 내주고 말지요, 그런 그이가 그걸 달라고 했어요,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해서요, 그런데 저는 주기가 아까웠어요. 『그게 카테리나 이바노브나한테 무슨 소용이에요?』 하고 제가 말했어요. 제가 그이한테 그런 말을 한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이가 저를 그런 눈으로 보았고, 그리고 그렇게나 서러워했어요, 제가 거절한 것을 그렇게나 서러워했어요. 그게 보기에 얼마나 슬펐는지……. 그리고 그이가 서러워한 건 깃 때문이 아니라 제가 거절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알아요. 아, 그걸 죄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바꿀 수만 있다면, 그 말을 도로 거둘 수만 있다면! 아, 제가…… 하지만 이런 건 아무 상관도 없으시겠지요!」
「행상 리자베타를 알았어요?」
「네……. 그이를 아셨어요?」 소냐가 좀 놀라서 물었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폐병이에요, 급성 폐병. 곧 죽을 거예요.」 라스콜니코프가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녀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러고는 소냐가 저도 모르게 그의 두 손을 붙잡았는데, 마치 그리되지 않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죽는 편이 나을 거예요.」
「아니에요, 낫지 않아요, 조금도 낫지 않아요!」 소냐가 질겁하여 저도 모르게 되풀이했다.
「그럼 아이들은요? 데려다 함께 사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어요?」
「아, 모르겠어요.」 소냐가 거의 절망하여 외치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 생각이 전에도 아주 여러 번 그녀에게 떠올랐고 그가 그저 그것을 다시 휘저어 놓았을 뿐임이 분명했다.
「그럼 만일 지금,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당신이 병이 나서 병원에 실려 간다면, 그때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가 가차 없이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럴 리 없어요!」
그리고 소냐의 얼굴이 끔찍한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럴 리 없다고요?」 라스콜니코프가 모진 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그런 일에 보험이라도 들어 두었나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요? 그 사람들은 죄다 거리로 나앉겠지요, 그 여자는 기침을 하며 구걸하고 오늘 그랬듯이 어딘가 담벼락에 머리를 찧을 테고, 아이들은 울어 댈 테고……. 그러다 쓰러져 경찰서로, 병원으로 실려 가서 죽을 테고, 그러면 아이들은……」
「아, 아니에요……. 하느님이 그리되게 두지 않으세요!」 마침내 소냐의 짓눌린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애원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마치 모든 것이 그에게 달려 있기라도 한 듯 말없는 간청으로 두 손을 맞잡은 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가 일어나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일 분이 지났다. 소냐는 두 손과 고개를 떨군 채 끔찍한 낙담 속에 서 있었다.
「저축은 못 해요? 만일을 위해 좀 모아 두는 건?」 그가 별안간 그녀 앞에 멈춰 서며 물었다.
「못 해요.」 소냐가 속삭였다.
「그야 그렇겠지요. 해 보기는 했어요?」 그가 거의 비아냥거리듯 덧붙였다.
「네.」
「그런데 안 됐군요! 그야 그렇지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고.」
그러고는 다시 방 안을 거닐었다. 또 일 분이 지났다.
「날마다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지요?」
소냐는 그 어느 때보다 당황했고 얼굴에 다시 붉은 기운이 몰렸다.
「아니에요.」 그녀가 괴로운 힘을 쥐어짜 속삭였다.
「폴레치카도 틀림없이 마찬가지가 되겠지요.」 그가 불쑥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아니에요!」 소냐가 칼에 찔리기라도 한 듯 절망하여 크게 외쳤다. 「하느님이 그런 끔찍한 일을 허락하지 않으세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허락하던데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느님이 그 애를 지켜 주실 거예요, 하느님이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채 되풀이했다.
「하지만 어쩌면 하느님이란 아예 없을지도 모르지요.」 라스콜니코프가 일종의 악의를 띠고 대답하고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냐의 얼굴이 별안간 달라졌다. 경련이 그 위를 스쳐 갔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책망을 담아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쓰디쓴, 쓰디쓴 울음을 터뜨렸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했지요. 당신 정신도 온전치 않아요.」 그가 잠시 말이 없다가 말했다.
오 분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보지 않은 채 방을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의 두 눈이 번득였다. 그는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눈물에 젖은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는데, 그의 눈은 굳고 뜨겁고 꿰뚫는 듯했으며 그의 입술은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빠르게 몸을 숙여 바닥에 엎드리고는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소냐는 미치광이를 피하듯 그에게서 물러섰고, 과연 그는 미치광이처럼 보였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녀가 창백해지며 중얼거렸고, 별안간 고통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가 곧바로 일어섰다.
「나는 당신한테 절한 게 아니라 인류의 모든 고통에 절한 겁니다.」 그가 사납게 말하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들어 봐요.」 그가 잠시 뒤 그녀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나는 아까 어떤 뻔뻔한 자한테, 그자는 당신 새끼손가락만 한 값어치도 없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내 누이를 당신 옆에 앉힘으로써 누이한테 영예를 베풀었다고요.」
「아, 그 사람들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도 그분 앞에서요?」 소냐가 겁에 질려 외쳤다. 「저하고 같이 앉다니요! 영예라니요! 저는…… 저는 명예가 없는 사람인데요……. 아, 어쩌자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당신을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은 당신의 불명예나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크나큰 고통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큰 죄인이라는 것, 그건 사실이지요.」 그가 거의 엄숙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큰 죄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저버렸다는 겁니다. 그게 끔찍하지 않아요? 그토록 혐오하는 이 더러움 속에서 살면서, 그러면서도 그것으로 아무도 돕지 못하고 아무도 무엇에서 건져 내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게(눈만 뜨면 되는 일이지요) 끔찍하지 않아요? 말해 봐요.」 그가 거의 광란에 빠져 말을 이었다. 「이 수치와 타락이 어떻게 당신 안에서 그와 반대되는 거룩한 감정들과 나란히 있을 수 있지요? 물에 뛰어들어 죄다 끝내는 편이 나아요, 천 배는 낫고 천 배는 지혜롭지요!」
「하지만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소냐가 고통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힘없이 물었으나, 그의 제안에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라스콜니코프가 야릇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얼굴에서 그 모든 것을 읽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 생각을 이미, 어쩌면 여러 번 했던 것이고, 절망 속에서 어떻게 끝낼지를 그토록 골똘히 궁리해 두었던 것이며, 어찌나 골똘했던지 이제는 그의 제안에 놀라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말이 모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책망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가 그녀의 수치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남다른지도 물론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것 또한 그에게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제 처지가 치욕스럽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그녀를 얼마나 끔찍하게 괴롭히고 있는지, 또 오래도록 괴롭혀 왔는지를 보았다. 「무엇이, 무엇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여태 그녀가 그것을 끝내지 못하게 막아 왔을까?」 그제야 그는 저 가엾은 어린 고아들과, 폐병을 앓으며 벽에 머리를 찧는 저 가련한 반미치광이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소냐에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게는 다시 분명해졌으니, 그녀의 성격과 그녀가 어쨌든 받은 만큼의 교육으로는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에 뛰어들 마음을 먹지 못했다면 어떻게 정신이 나가지 않고 그 처지에 그토록 오래 머물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 여전히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물론 그는 소냐의 처지가, 불행하게도 유례가 없지도 않고 드물지도 않은 일이기는 하나, 예외적인 경우임을 알고 있었으되, 바로 그 예외성이, 그녀에게 스민 얼마간의 교양이, 그녀가 지나온 삶이, 저 역겨운 길의 첫걸음에서 그녀를 죽여 버렸을 법하다고 여길 만했다. 무엇이 그녀를 버티게 했는가 ― 설마 타락은 아닐 테고? 그 모든 치욕이 그녀에게 닿은 것은 오로지 기계적으로였을 뿐, 진짜 타락은 한 방울도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지 못했음이 분명했으니, 그는 그것을 보았다. 그는 제 앞에 서 있는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
「그 앞에는 세 갈래 길이 있다.」 그는 생각했다. 「운하냐, 미치광이 병원이냐, 아니면…… 끝내 정신을 흐리고 마음을 돌로 만드는 타락 속에 가라앉는 것이냐.」
마지막 생각이 가장 역겨웠으나, 그는 회의하는 자였고 젊고 추상적이었으며 그러므로 모질었고, 그래서 마지막 끝이 가장 그럼 직하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참일 수 있나?」 그는 속으로 외쳤다. 「아직도 제 넋의 깨끗함을 지켜 온 저 피조물이 끝내 제 눈으로 알면서 저 더러움과 죄악의 구덩이 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 과정이 벌써 시작된 것은 아닐까? 여태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이 그저 악덕이 그녀에게 덜 역겨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는 방금 소냐가 그랬듯이 외쳤다. 「아니야, 여태 그녀를 운하에서 붙들어 둔 것은 죄라는 생각과 저들, 저 아이들이야……. 그리고 만일 그녀의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면…… 그런데 누가 그녀의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고 하던가? 그녀가 제정신인가? 제정신인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따질 수 있나? 제가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저 역겨움의 구렁 가장자리에 앉아서, 위험하다고 일러 주는데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적을 기다리는 것인가? 틀림없이 그렇겠지. 그 모든 것이 곧 광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는 그 생각에 고집스럽게 머물렀다. 실은 그 설명이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를 더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를 많이 하는군요, 소냐?」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소냐는 말이 없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 곁에 서 있었다.
「하느님이 없다면 제가 무엇이겠어요?」 그녀가 빠르고 힘 있게 속삭이며, 별안간 번득이는 눈으로 그를 흘깃 보고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아, 그렇단 말이지!」 그는 생각했다.
「그럼 하느님이 당신을 위해 무얼 해 주지요?」 그가 그녀를 더 찔러 보며 물었다.
소냐는 대답할 수 없기라도 한 듯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 약한 가슴이 격정으로 연방 들먹였다.
「잠자코 계세요! 묻지 마세요!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녀가 별안간 외치며, 준엄하고 노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거야, 바로 그거야.」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모든 것을 해 주세요.」 그녀가 다시 눈을 내리뜨고 빠르게 속삭였다.
「저게 빠져나갈 길이로군! 저게 설명이야.」 그는 이렇게 단정하고는, 새롭고 낯설고 거의 병적인 느낌을 품은 채 게걸스러운 호기심으로 그녀를 뜯어보았다. 그는 그 핏기 없고 마르고 고르지 못하고 모진 작은 얼굴을, 그런 불길을 그런 준엄한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 그 부드러운 푸른 눈을, 분노와 노여움으로 아직도 떨고 있는 그 작은 몸을 바라보았다 ― 그러자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갈수록 더 낯설고 거의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였다. 「종교광이야!」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서랍장 위에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그는 방을 오르내릴 때마다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이제 그가 그것을 집어 들여다보았다. 러시아어 역본 신약1이었다. 가죽으로 매어진, 낡고 해진 책이었다.
「이건 어디서 났어요?」 그가 방 저쪽에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탁자에서 세 걸음 떨어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누가 갖다줬어요.」 그녀가 마지못한 듯, 그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누가 갖다줬는데요?」
「리자베타요, 제가 달라고 했어요.」
「리자베타라니! 묘하군.」 그는 생각했다.
소냐에 관한 모든 것이 순간순간 그에게 더 낯설고 더 놀랍게 여겨졌고, 그는 책을 촛불 가까이 가져가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나사로 이야기가 어디 있지요?」 그가 불쑥 물었다.
소냐는 고집스럽게 바닥을 보며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에 옆으로 서 있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어디 있어요? 찾아 줘요, 소냐.」
그녀가 그를 몰래 흘깃 보았다.
「거기가 아니에요……. 네 번째 복음서에 있어요.」 그녀가 그를 보지 않은 채 준엄하게 속삭였다.
「찾아서 읽어 줘요.」 그가 말했다. 그는 팔꿈치를 탁자에 괴고 머리를 손에 기댄 채 앉아, 들을 채비를 하고 침울하게 눈을 돌렸다.
「삼 주 뒤면 미치광이 병원에서 나를 반겨 주겠군! 더 나쁜 데 있지 않다면 거기 있을 테고.」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청을 미심쩍게 듣고는 머뭇거리며 탁자 쪽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그녀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읽어 보지 않으셨어요?」 그녀가 탁자 너머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갈수록 준엄해졌다.
「오래전에……. 학교 다닐 때. 읽어요!」
「교회에서 들어 보지도 않으셨고요?」
「나는…… 안 다녔어요. 자주 가요?」
「아-니요.」 소냐가 속삭였다.
라스콜니코프가 웃었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아버지 장례에도 안 가겠군요?」
「아니요, 갈 거예요. 지난주에도 교회에 갔었어요…… 위령 기도2를 올렸고요.」
「누구를 위해서요?」
「리자베타요. 도끼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의 신경이 갈수록 팽팽해졌다.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리자베타하고 가까웠어요?」
「네……. 착한 사람이었어요…… 오곤 했어요…… 자주는 못 오고…… 올 수가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같이 읽고…… 이야기했어요. 그이는 하느님을 뵐 거예요.」
그 마지막 말이 그의 귀에 낯설게 들렸다. 그리고 여기 또 새로운 것이 있었으니, 리자베타와의 은밀한 만남, 그리고 둘 다 ― 종교광이라는 것.
「나도 곧 종교광이 되겠군! 옮는 거야!」
「읽어요!」 그가 짜증스럽고도 다그치듯 외쳤다.
소냐는 여전히 망설였고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으며, 그녀는 그에게 읽어 줄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는 그 「불행한 미치광이」를 거의 격분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엇 하러요? 믿지 않으시면서?……」 그녀가 부드럽게, 그러나 숨이 막힌 듯 속삭였다.
「읽어요! 읽어 달라니까요.」 그가 물고 늘어졌다. 「리자베타한테도 읽어 줬잖아요.」
소냐가 책을 펴서 그 자리를 찾았으나, 그녀의 두 손은 떨렸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 두 번이나 시작하려 했으면서도 첫 음절조차 내뱉지 못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그녀가 마침내 억지로 읽어 냈으나, 세 번째 낱말에서 지나치게 죈 현처럼 목소리가 끊어졌다. 숨이 걸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가 어째서 제게 읽어 줄 마음을 먹지 못하는지 얼마쯤 알아차렸고, 그것을 알아차릴수록 더 거칠고 더 짜증스럽게 읽으라고 다그쳤다. 그는 제 것인 그 모든 것을 내보이고 벗겨 보이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는 이 감정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녀의 은밀한 보물이며, 불행한 아버지와 슬픔에 미쳐 버린 계모와 함께, 굶주리는 아이들과 차마 듣기 어려운 욕설과 책망 한가운데서 살아오는 동안, 어쩌면 여러 해를,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이제 알았고 확실히 알았으니, 그것이 그녀를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가득 채우면서도 그녀에게는 읽고 싶은, 그것도 그가 듣도록 바로 그에게 읽어 주고 싶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금 읽고 싶은 애타는 열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그녀의 눈에서 읽었고 그녀의 북받친 격정에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잡아 목에 걸린 경련을 누르고 요한복음 11장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녀는 19절에 이르렀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라.」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그분을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당신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당신께서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느님이 당신께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러고는 목소리가 또 떨리고 끊어지리라는 부끄러운 느낌에 그녀가 다시 멈추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그분께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가 그분께 가로되」
(그러고는 고통스레 숨을 몰아쉬며, 소냐는 마치 뭇사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기라도 하는 듯 또렷하고 힘 있게 읽었다.)
「주여 그러하외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녀는 멈추고 얼른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스스로를 다잡고 계속 읽어 나갔다. 라스콜니코프는 팔꿈치를 탁자에 괸 채 눈을 돌리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32절까지 읽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어 그분께 가로되 주여 당신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저희가 그분께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분이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분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라스콜니코프가 돌아앉아 격정에 차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진짜 육신의 열병에 걸린 듯 떨고 있었고 그는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큰 기적의 이야기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엄청난 승리감이 그녀를 덮쳤으며, 그녀의 목소리가 종처럼 울렸고 승리와 기쁨이 그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글줄이 눈앞에서 춤추었으나 그녀는 제가 읽는 것을 외고 있었다. 마지막 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분이……」에 이르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잠시 뒤면 벼락에 맞은 듯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흐느끼며 믿게 될 저 눈멀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의심과 책망과 비난을 뜨겁게 되살려 냈다……. 「그리고 저이도, 저이도 ― 눈이 멀었고 믿지 않는다, 저이도 들을 것이고 저이도 믿을 것이다, 그래, 그래! 당장, 지금 곧」 하는 것이 그녀가 꿈꾸고 있던 것이었고, 그녀는 행복한 기다림에 떨고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이 그 위에 놓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그분께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이제는 냄새가 나나이다.」
그녀는 「나흘」이라는 낱말에 힘을 주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저희가 죽은 자 누웠던 곳에서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당신께서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당신께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당신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분이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부르시되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라.」
「죽은 자가 나오더라.」
(그녀는 마치 눈앞에서 그것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싸늘하게 식어 황홀에 떨며 큰 소리로 읽었다.)
「수족을 베로 동인 채요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이에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분을 믿었더라.」
그녀는 더 읽지 못하고 책을 덮고는 의자에서 얼른 일어섰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그녀가 준엄하게, 그리고 불쑥 속삭이고는, 몸을 돌려 그에게 눈을 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꼼짝 않고 서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열병처럼 떨고 있었다. 촛동강이 찌그러진 촛대 속에서 꺼져 가며, 가난에 찌든 그 방 안에서 그토록 기이하게 영원한 책을 함께 읽고 있던 살인자와 창녀를 흐릿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 분, 아니 그보다 더 지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어요.」 라스콜니코프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 내어 말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냐에게 갔고 그녀는 말없이 그에게 눈을 들었는데, 그의 얼굴은 유난히 준엄했고 거기에는 일종의 사나운 결의가 서려 있었다.
「나는 오늘 내 가족을 버렸어요.」 그가 말했다. 「어머니와 누이를요. 이제 그 사람들을 보러 가지 않아요. 아주 끊었어요.」
「왜요?」 소냐가 놀라서 물었다. 얼마 전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만난 일이 그녀에게는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는 큰 자국을 남겨 놓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 소식을 거의 공포에 질려 들었다.
「이제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어요.」 그가 덧붙였다. 「같이 갑시다……. 당신한테 왔어요, 우리는 둘 다 저주받았으니, 같이 우리 길을 갑시다!」
그의 눈이 번득였는데, 「꼭 미친 사람 같다」고 이번에는 소냐가 생각했다.
「어디로 가요?」 그녀가 놀라서 물으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다만 같은 길이라는 것만 알아요, 그것만 알고 그 이상은 몰라요. 같은 목적지예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끔찍하게, 끝없이 불행하다는 것뿐이었다.
「그 사람들 중 누구도, 말해 봐야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이해했어요. 나한테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당신한테 온 거예요.」
「모르겠어요.」 소냐가 속삭였다.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당신도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넘었어요…… 넘을 힘이 있었지요. 스스로에게 손을 댔어요, 한 생명을 죽였어요…… 제 것을요(다 같은 겁니다!). 넋과 깨달음으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건초 시장에서 끝나고 말겠지요……. 하지만 견뎌 내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혼자 남으면 나처럼 정신이 나갈 거예요. 이미 미친 사람 같아요. 그러니 우리는 같은 길을 함께 가야 해요! 갑시다!」
「무엇 하러요? 이게 다 무엇 하러요?」 그의 말에 야릇하고도 격렬하게 흔들린 소냐가 말했다.
「무엇 하러냐고요? 이대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예요! 이제는 일을 똑바로 마주 봐야 해요, 어린애처럼 울면서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외칠 게 아니라. 만일 정말로 내일 병원에 실려 가면 어떻게 되지요? 그 여자는 미쳤고 폐병을 앓고 있으니 곧 죽을 텐데 아이들은요? 폴레치카한테 화가 닥치지 않을 거라고 말할 셈이에요? 이 거리 모퉁이마다 제 어미가 구걸하라고 내보낸 아이들을 못 봤어요? 나는 그 어미들이 어디서 어떤 꼴로 사는지 알아냈어요. 거기서는 아이가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어요! 일곱 살이면 벌써 못되고 도둑질을 해요. 그런데 아이들이란, 알다시피, 그리스도의 형상이지요. 『천국은 그들의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분은 우리더러 아이들을 공경하고 사랑하라 하셨어요, 아이들은 앞으로 올 인류니까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소냐가 히스테리에 빠져 울면서 두 손을 쥐어짜며 되풀이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부서져야 할 것을 단번에 부수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그리고 그 고통을 제 몸에 지는 거고요. 뭐라고요, 모르겠다고요?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자유와 힘, 무엇보다도 힘! 벌벌 떠는 온 피조물과 저 개미 떼 전부를 딛고 선 힘!…… 그게 목적지예요, 그걸 기억해 둬요! 이게 내 작별 인사예요. 어쩌면 당신한테 말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요. 내가 내일 오지 않거든 죄다 전해 듣게 될 테고, 그때 이 말을 기억해요. 그리고 언젠가 나중에, 여러 해가 지나고 나면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될지도 모르지요. 내가 내일 오거든, 누가 리자베타를 죽였는지 말해 줄게요……. 잘 있어요.」
소냐가 공포로 흠칫했다.
「아니, 누가 그이를 죽였는지 아세요?」 그녀가 공포에 얼어붙어 물으며,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알아요, 그리고 말할 거예요…… 당신한테, 당신한테만. 나는 당신을 골라냈어요. 용서를 빌러 당신한테 오는 게 아니라 그저 말하러 오는 거예요. 나는 오래전에 이 이야기를 들을 사람으로 당신을 골라 놓았어요, 당신 아버지가 당신 이야기를 할 때, 그리고 리자베타가 살아 있을 때 그 생각을 했지요. 잘 있어요, 악수는 하지 말아요. 내일!」
그가 나갔다. 소냐는 미치광이를 보듯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녀 자신도 정신 나간 사람 같았고 스스로도 그것을 느꼈다. 머리가 돌고 있었다.
「맙소사, 저이가 누가 리자베타를 죽였는지 어떻게 알까? 그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끔찍해!」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생각은 그녀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순간도! 「아, 저이는 틀림없이 끔찍하게 불행한 거야!…… 어머니와 누이를 버렸다니…….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저이 마음속에 있던 것은 무엇일까? 저이가 자기한테 무슨 말을 했던가? 저이가 자기 발에 입을 맞추고 말했지…… 말했어(그래, 저이가 똑똑히 말했어) 자기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아, 자비로우신 하느님!」
소냐는 밤새도록 열에 들떠 헛것을 보았다. 이따금 벌떡 일어나 울면서 두 손을 쥐어짜다가 다시 열에 들뜬 잠에 빠졌고, 폴레치카와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와 리자베타를, 복음서를 읽던 일을, 그리고 저이를…… 핏기 없는 얼굴에 타는 눈을 한 저이가…… 제 발에 입을 맞추며 우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오른쪽 문 너머, 소냐의 방과 레슬리히 부인의 셋집을 가르고 있는 그 문 너머에는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이 하나 있었고, 대문에는 딱지가 붙어 있었으며 운하 쪽으로 난 창에는 세를 놓는다는 쪽지가 꽂혀 있었다. 소냐는 그 방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에 오래전부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내 스비드리가일로프 씨는 그 빈방의 문에 붙어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가 나가자 그는 그대로 선 채 잠시 생각하더니, 발끝으로 걸어 그 빈방에 잇닿은 제 방으로 가서 의자를 하나 가져다가 소리 없이 소냐의 방으로 통하는 문가에 놓았다. 그 이야기가 그에게는 흥미롭고 놀라웠고 그는 그것을 무척이나 즐겼는데 ― 어찌나 즐거웠던지, 앞으로, 이를테면 내일 같은 때에 한 시간을 내리 서 있어야 하는 불편을 겪지 않고 편히 들을 수 있도록 의자를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주
1. 소냐의 책은 본문에서 「러시아어 역본 신약」으로 밝혀져 있다. 당시 러시아에서 읽히던 것은 1862년에 나온 시노드역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가장 새로운 구어체 번역이었다. 그러나 저본인 가넷의 영역본은 뒤이어 오는 요한복음 11장 낭독을 1611년 흠정역의 문어체로 그대로 받아 옮겼다(낭독되는 스물세 절 가운데 스물한 절이 흠정역과 어절 단위로 일치한다). 한국어판은 이 어긋남을 고르지 않고 저본을 따라, 본문의 「러시아어 역본」이라는 말은 그대로 두고 낭독 대목만 문어체로 옮긴다.
2. 위령 기도 ― 정교회의 파니히다(панихида). 죽은 이를 위해 따로 올리는 짧은 추도 예식으로, 장례와 무관하게 언제든 청할 수 있다. 가넷은 이를 가톨릭·성공회 용어인 「레퀴엠」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