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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2부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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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장

「만일 벌써 수색이 있었다면? 만일 지금 방에서 그자들과 딱 마주친다면?」

그러나 방은 여기 있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스타시야조차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맙소사! 어떻게 그 물건들을 전부 그 구멍 속에 놓아두고 갈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구석으로 달려가 벽지 밑으로 손을 밀어 넣고 물건들을 끄집어내어 주머니마다 채워 넣었다. 물건은 모두 여덟 개였다. 귀고리인지 그 비슷한 것인지가 든 작은 상자 둘,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작은 가죽 상자 넷. 그저 신문지에 싼 사슬이 하나 있었고, 역시 신문지에 싼 또 하나는 훈장 같아 보였다……. 그는 그것들을 외투의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 그리고 바지의 남은 주머니에 나누어 넣으며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지갑도 챙겼다. 그러고는 문을 열어 둔 채 방을 나섰다. 그는 빠르고 단호하게 걸었고, 온몸이 부서진 것 같았으나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는 추적이 두려웠고, 반 시간 뒤면, 어쩌면 십오 분 뒤면 자기를 뒤쫓으라는 지시가 내려질까 봐 두려웠으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전에 모든 흔적을 감추어야 했다. 아직 힘이, 생각할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에 모든 것을 정리해 두어야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은 오래전에 정해져 있었다. 「운하에 던져 버리면 흔적은 전부 물속에 묻히고 일은 끝난다.」 그는 헛소리를 하던 그 밤에, 몇 번이고 일어나 나가서 서둘러 이 모든 것을 치워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을 때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치워 버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예카테리닌스키운하의 둑을 따라 반 시간 남짓 헤매면서 물가로 내려가는 계단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으나 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단 끝에 뗏목이 대어져 있고 그 위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배들이 매여 있고 사람들이 사방에 우글거렸다. 게다가 양쪽 둑 어디에서나 그가 보이고 눈에 띌 수 있었으니, 사내가 일부러 내려가 멈춰 서서 무언가를 물에 던진다면 수상쩍게 보일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상자들이 가라앉지 않고 떠오른다면? 아니, 틀림없이 떠오를 것이었다. 지금도 마주치는 사람마다 달리 할 일이라곤 그를 지켜보는 것밖에 없다는 듯 그를 빤히 보고 돌아보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지, 아니면 내 착각인가?」 그는 생각했다.

마침내 네바강으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거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덜 눈에 띌 것이고 여러모로 더 편할 것이며, 무엇보다 더 멀었다. 이 위험한 반 시간을 걱정과 불안 속에 헤매면서 어째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그는 의아했다. 게다가 그 반 시간을, 헛소리 속에서 떠올렸다는 이유 하나로 터무니없는 계획에 허비한 것이다! 그는 지독하게 멍해지고 잘 잊게 되었으며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서둘러야 했다.

그는 V—— 대로를 따라 네바강 쪽으로 걸었으나, 가는 길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네바강인가? 차라리 멀리 어디로, 다시 섬들로 가서 인적 없는 곳에, 숲속이나 덤불 밑에 물건을 감추고 자리를 표시해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가 또렷하게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느끼면서도 그 생각은 그에게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로 가게 되어 있지 않았다. V—— 대로에서 광장 쪽으로 나오다가 그는 왼쪽에, 창 하나 없는 두 벽 사이로 안뜰로 이어지는 통로를 보았던 것이다. 오른쪽으로는 회칠도 하지 않은 4층 집의 민 벽이 안뜰 깊숙이 뻗어 있었고, 왼쪽으로는 널빤지 울타리가 그와 나란히 스무 걸음쯤 안뜰로 들어가다가 왼쪽으로 급히 꺾였다. 거기는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는, 울로 막힌 버려진 자리였고, 안뜰 끝에서는 어느 작업장의 일부인 듯한, 나지막하고 검게 그을린 돌 헛간의 모퉁이가 울타리 뒤로 내다보였다. 마차 만드는 곳이거나 목수의 헛간인 모양이었고, 입구에서부터 온통 석탄 먼지로 시커멨다. 여기가 던져 버릴 자리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뜰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그는 슬쩍 들어섰고, 대문 가까이에 수채가 있는 것을 곧 보았는데 일꾼이나 마부가 많이 드나드는 뜰에 흔히 놓아두는 그런 것이었다. 그 위 울타리에는 해묵은 익살이 분필로 갈겨져 있었다. 「여기 서 있는 것을 엄금함.」 오히려 잘된 일이었으니, 그가 들어가는 데 수상할 것이 없어진 셈이었다. 「여기다 전부 한 무더기로 던져 놓고 가 버리면 된다!」

이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 번 더 둘러보다가 그는 바깥벽에 붙어, 입구와 수채 사이에 놓인, 무게가 아마 60파운드1쯤 되었을 다듬지 않은 큰 돌 하나를 보았다. 벽 저쪽은 거리였다. 그 근처에 늘 많은 행인들의 소리가 들렸으나 누군가 거리에서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입구에서 그가 보일 리는 없었고, 하기야 그런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그는 돌 위로 몸을 굽혀 윗부분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뒤집었고, 돌 밑 땅에는 작은 구덩이가 있어 그는 곧바로 주머니를 그 속에 비웠다. 지갑이 맨 위에 놓였는데도 구덩이는 다 차지 않았고, 그러고서 그는 다시 돌을 붙잡아 한 번에 되돌려 놓았는데 돌은 아주 조금 높아졌을 뿐 도로 같은 자리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둘레의 흙을 긁어모으고 가장자리를 발로 눌러 다졌다.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고서 그는 나와 광장으로 들어섰다. 경찰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강렬한, 거의 견딜 수 없는 기쁨이 한순간 그를 휩쓸었다. 「흔적을 묻어 버렸다! 그리고 누가, 누가 저 돌 밑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겠나? 저 돌은 십중팔구 집이 세워진 뒤로 줄곧 저기 누워 있었고 앞으로도 그만큼 더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찾아낸다 한들 누가 나를 떠올리겠나? 다 끝났다! 단서는 없다!」 그리고 그는 웃었다. 그렇다, 그는 가늘고 신경질적인, 소리 없는 웃음을 웃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했고, 광장을 가로지르는 내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전 그 처녀를 마주쳤던 K—— 가로수길에 이르자 웃음이 별안간 그쳤다. 다른 생각들이 마음속으로 기어들었다. 처녀가 가 버린 뒤 자기가 앉아 곰곰이 생각했던 그 벤치 앞을 지나가는 일이 역겨우리라는 생각이, 그리고 이십 코페이카를 주었던 그 구레나룻 순경을 마주치는 일도 끔찍하리라는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빌어먹을 놈!」

그는 성나고 얼떠 있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이제 그의 모든 생각이 어떤 한 점을 맴도는 것 같았고, 그는 정말로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바로 이제 자기가 그 점과 마주 선 채 남겨졌다는 것을 ― 게다가 실로 최근 두 달 동안 처음으로 ― 느꼈다.

「다 빌어먹어라!」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문득 생각했다. 「시작됐으면 시작된 거다. 새 삶이라니, 집어치워라! 맙소사,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그리고 오늘 내가 무슨 거짓말들을 했던가! 저 형편없는 일리야 페트로비치에게 얼마나 비굴하게 알랑거렸던가! 그러나 그것도 전부 어리석은 짓이다! 그자들이야 나와 무슨 상관이며 내가 알랑거린 것이야 또 무슨 상관인가! 그것이 아니다! 전혀 그것이 아니다!」

별안간 그는 멈춰 섰다. 새롭고 전혀 뜻밖이며 지극히 단순한 물음 하나가 그를 당혹스럽게 하고 쓰라리게 어지럽혔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얼빠진 짓이 아니라 작정하고 한 일이라면, 만일 내게 확실하고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면, 어째서 나는 지갑 속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내가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그것 때문에 이 고통을 겪었고 그것 때문에 이 비열하고 더럽고 천한 짓을 작정하고 떠맡았는데? 게다가 나는 역시 들여다보지도 않은 물건들을 지갑과 함께 한꺼번에 물에 던져 버리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또 어떻게 된 건가?」

그렇다, 그랬다, 전부 그랬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전에도 알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물음이 아니었으니, 그 밤에 망설임도 숙고도 없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달리 될 수는 없다는 듯 그렇게 정해졌을 때조차 그러했다……. 그렇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어제 그가 궤짝 위로 몸을 굽혀 보석 상자들을 끄집어내던 그 순간에 이미 틀림없이 다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랬다.

「내가 몹시 아프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가 침울하게 단정했다. 「나는 나 자신을 들볶고 괴롭혀 왔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도 그저께도 이 내내 나는 나를 괴롭혀 왔다……. 나으면 괴롭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영영 낫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맙소사, 이 모든 것에 진저리가 난다!」

그는 쉬지 않고 걸었다. 그는 무엇으로든 기분을 돌리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에 손을 대야 할지 알지 못했다. 새로운, 압도적인 감각이 순간순간 점점 더 그를 지배해 갔으니, 그것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거의 육체적인 혐오였고, 고집스럽고 악의에 찬 증오의 감정이었다. 마주치는 사람은 모두 그에게 역겨웠으니 그들의 얼굴이, 그들의 몸짓이, 그들의 손짓이 역겨웠고, 누가 그에게 말이라도 걸었다면 침을 뱉거나 물어뜯었을 것 같았다…….

바실리옙스키섬으로 건너가는 다리 가까이, 작은 네바강 둑으로 나왔을 때 그는 문득 멈춰 섰다. 「아니, 그가 여기 저 집에 살지.」 그는 생각했다. 「아니, 내가 제 발로 라주미힌에게 온 게 아니지 않은가! 또 그때와 똑같은 일이다……. 그래도 꽤 궁금하군. 일부러 온 건가, 아니면 그저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건가? 아무래도 좋다. 그저께 나는 그다음 날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래, 그러면 가겠다! 게다가 지금은 정말로 더 갈 수가 없다.」

그는 5층에 있는 라주미힌의 방으로 올라갔다.

라주미힌은 제 다락방에 있었고 마침 무언가를 부지런히 쓰고 있다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지 못한 지 넉 달째였다. 라주미힌은 다 해진 실내복 차림으로 맨발에 슬리퍼를 꿰고 앉아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수염도 깎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꼴이었으며,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떠올라 있었다.

「너야?」 그가 소리쳤다. 그는 동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까지 쪼들리나! 이 사람아, 나를 아주 눌러 버렸군!」 라스콜니코프의 누더기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자, 앉아, 지쳤을 게 뻔하니.」

그러고서 그가 자기 것보다도 더 못한 꼴의 인조 가죽 소파에 주저앉자, 라주미힌은 이 손님이 병이 났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아니, 너 심하게 아프잖아, 그건 알고 있어?」 그가 맥을 짚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손을 뿌리쳤다.

「괜찮아.」 그가 말했다. 「이것 때문에 왔어. 나한테 과외 자리가 없어서……. 그래서 좀,…… 아니, 사실은 과외 자리는 필요 없어…….」

「아니 이봐! 너 헛소리를 하고 있잖아!」 라주미힌이 그를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아니야.」

라스콜니코프는 소파에서 일어섰는데, 라주미힌의 집으로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그는 자기가 이 친구와 얼굴을 맞대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번개처럼 깨달았다. 그 순간 그가 이 넓은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바로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는 일이라는 것을.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라주미힌의 문지방을 들어서자마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잘 있어.」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서, 서 봐! 이 별난 친구야.」

「싫어.」 상대가 다시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럼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미쳤나,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이건…… 거의 모욕이잖아! 그렇게 가게 둘 수는 없어.」

「그럼 말해 주지, 내가 너를 찾아온 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시작이라도 할 수 있게…… 네가 누구보다 마음이 너그러우니까 ― 아니, 영리하다는 뜻이야, 그리고 판단할 줄 아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들리나? 아무것도 필요 없어…… 누구의 도움도…… 누구의 동정도. 나는 나 혼자야…… 혼자. 됐어, 이만하면 됐어. 나를 내버려 둬.」

「잠깐 있어 봐, 이 망나니야! 너는 완전히 미친놈이야. 네 마음대로 해, 나야 상관없으니. 나도 과외 자리가 없어, 알겠어? 그리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 헤루비모프라는 책장수가 있는데 ― 그자가 과외 자리 노릇을 해 준다. 과외 다섯 자리를 준대도 그자하고는 안 바꾼다. 그자가 출판이랍시고 일을 벌여서 자연과학 입문서 같은 걸 내는데, 그게 또 얼마나 팔리는지! 제목만 해도 돈값을 한다니까! 너는 늘 나를 바보라고 했지만, 맹세코, 이봐, 나보다 더한 바보들이 있다니까! 지금 그자가 진보적인 축인 양 행세하는데, 뭘 알고 그러는 게 아니지만 나야 물론 부추기지. 여기 독일어 원문 전지2 두 장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가장 조잡한 협잡이야. 『여자는 인간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물론 인간이라는 걸 의기양양하게 증명해 낸다. 헤루비모프는 이걸 여성 문제에 부치는 글로 내놓을 작정이고, 내가 그걸 옮기고 있어. 그자는 이 전지 두 장 반을 여섯 장으로 늘릴 거고, 우리는 반 페이지나 되는 으리으리한 제목을 지어 붙여서 반 루블에 내놓을 거야. 그거면 돼! 그자는 전지 한 장에 6루블을 주니까 일 전체로 15루블쯤 되는데, 나는 벌써 6루블을 선금으로 받았어. 이걸 끝내면 고래에 관한 번역을 시작할 거고, 그다음에는 『Les Confessions』3 제2부에서 가장 따분한 추문 몇 대목을 골라 두었어. 누가 헤루비모프한테 루소가 일종의 라디셰프4 같은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더군. 내가 반박하지 않았을 거야 뻔하지, 빌어먹을 놈 같으니! 그래, 『여자는 인간인가?』 전지 둘째 장을 맡아 볼래? 하겠으면 독일어 원문하고 펜하고 종이를 가져가 ― 그건 다 대 주는 거니까 ― 그리고 3루블을 가져가. 일 전체에 6루블을 선금으로 받았으니 네 몫으로 3루블이 가는 거지. 그리고 그 전지를 끝내면 또 3루블이 네 것이 된다. 그리고 제발 내가 너한테 은혜를 베푸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오히려 정반대야, 네가 들어서자마자 나는 네가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보았으니까. 첫째로 나는 철자에 약하고, 둘째로 독일어에서 아주 헤맬 때가 있어서 대개는 지어내며 나간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편이 틀림없이 더 나아진다는 거지. 하기야 누가 알겠어, 어쩌면 더 나빠질 때도 있겠지. 맡을래?」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독일어 종이를 받아 들고 3루블을 받아 들고는 한마디도 없이 나갔다. 라주미힌은 놀라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다음 거리에 이르렀을 때 돌아서서 다시 라주미힌의 집으로 계단을 올라가 독일어 글과 3루블을 탁자에 놓고는, 역시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다시 나갔다.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라주미힌이 마침내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익살이야? 너 때문에 나까지 돌겠다…… 도대체 뭐 하러 나를 찾아온 거야, 빌어먹을?」

「번역은…… 필요 없어.」 라스콜니코프가 계단에서 중얼거렸다.

「그럼 도대체 뭐가 필요한데?」 라주미힌이 위에서 소리쳤다.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이봐! 어디 사는데?」

대답이 없었다.

「좋아, 그럼 빌어먹어라!」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니콜라옙스키 다리 위에서 그는 불쾌한 사건으로 다시 온전히 정신이 들었으니, 마부 하나가 두세 번 소리를 지르고도 그가 하마터면 말발굽 아래로 들어올 뻔하자 채찍으로 그의 등을 세차게 후려쳤던 것이다. 그 채찍질에 그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난간 쪽으로 뛰어갔다(무슨 까닭인지 그는 마차가 오가는 다리 한복판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성이 나서 이를 악물고 갈았다. 물론 웃음소리가 들렸다.

「꼴좋다!」

「소매치기겠지.」

「취한 척하고 일부러 바퀴 밑으로 들어가는 거라니까. 그러면 이쪽이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게 아주 직업이라니까, 그거야.」

그러나 그가 난간에 기대선 채 멀어지는 마차를 여전히 성나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등을 문지르고 있을 때, 그는 문득 누군가가 제 손에 돈을 쥐여 주는 것을 느꼈다. 그는 보았다. 머릿수건을 쓰고 염소가죽 신을 신은 나이 든 여자였고, 모자를 쓰고 초록색 양산을 든, 아마도 그 딸인 듯한 처녀와 함께 있었다.

「받아요, 젊은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가 받아 쥐자 그들은 지나갔다. 이십 코페이카짜리였다. 옷차림과 행색으로 보아 그들은 그를 거리에서 동냥하는 거지로 여겼음직했고, 이십 코페이카를 준 것은 틀림없이 그 채찍질 덕분이었으니 그 일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는 이십 코페이카를 손에 꼭 쥔 채 열 걸음쯤 걷다가 네바강 쪽으로, 궁전 쪽을 바라보며 돌아섰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물은 네바강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거의 새파랬다. 다리에서 예배당으로부터 스무 걸음쯤 되는 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대성당의 둥근 지붕이 햇빛에 반짝였고, 맑은 공기 속에서 그 위의 장식 하나하나까지 또렷이 분간할 수 있었다. 채찍 맞은 자리의 아픔은 가셨고 라스콜니코프는 그것을 잊었다. 불안하고 그리 뚜렷하지도 않은 생각 하나가 이제 그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오래도록 뚫어지게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는 그에게 유난히 낯익은 곳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그는 수백 번이나 ― 대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 바로 이 자리에 멈춰 서서 참으로 장엄한 이 광경을 바라보았고, 그때마다 그 광경이 그의 안에 불러일으키는 어떤 막연하고 알 수 없는 감정에 거의 언제나 놀라워하곤 했다. 그 광경은 그를 이상하리만큼 차갑게 내버려 두었다. 이 화려한 그림은 그에게 텅 비어 있고 생명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그 음울하고 수수께끼 같은 인상에 매번 의아해하면서도, 스스로를 믿지 못해 그 까닭을 찾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그는 그 옛 의심과 당혹을 생생하게 떠올렸고, 지금 그것을 떠올린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예전과 똑같은 자리에 멈춰 섰다는 것이 그에게 기이하고 괴이하게 느껴졌다. 마치 자기가 정말로 예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예전에 자기의 관심을 끌던 것과 똑같은 이론과 그림에 관심을 둘 수 있다고 여기기라도 하는 듯이…… 그토록 짧은 시간 전에 말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거의 우습게까지 느껴졌고, 그러면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 그에게는 깊은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저 멀리에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 그의 옛 과거도, 옛 생각도, 옛 문제와 이론도, 옛 인상도, 그 그림도, 그 자신도, 전부, 전부……. 그는 자기가 위로 날아오르고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무심코 손을 움직이다가 그는 주먹 안에 든 동전을 문득 알아차렸다. 그는 손을 펴서 동전을 들여다보았고, 팔을 휘둘러 그것을 물속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집으로 갔다. 그 순간 자기가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잘라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이르렀을 때는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는 여섯 시간쯤 걸어 다닌 셈이었다. 어떻게 어디로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옷을 벗고 혹사당한 말처럼 몸을 떨면서 그는 소파에 누워 외투를 끌어다 덮고는 이내 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

무시무시한 비명에 잠이 깼을 때는 어스름이었다. 맙소사, 그 무슨 비명이었던가!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소리를, 그런 울부짖음과 통곡과 이 가는 소리와 눈물과 매질과 욕설을 그는 여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런 잔혹함을, 그런 광란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포에 질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괴로움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싸우고 통곡하고 욕하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러다 몹시 놀랍게도 그는 하숙집 여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녀는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고 통곡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빠르고 급하고 두서가 없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틀림없이 때리지 말아 달라고 빌고 있었을 것이니 계단에서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때리는 자의 목소리는 악의와 분노로 너무나 끔찍해서 거의 쉰 소리에 가까웠는데, 그자 역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그 역시 빠르고 불분명하게, 서두르며 침을 튀기며 말하고 있었다. 별안간 라스콜니코프가 몸을 떨었다. 그 목소리를 알아본 것이다 ― 일리야 페트로비치의 목소리였다.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여기서 하숙집 여주인을 때리고 있다니! 그자가 그녀를 걷어차고 그녀의 머리를 계단에 짓찧고 있다 ― 그건 분명하다, 소리로, 비명으로, 쿵쿵 울리는 소리로 알 수 있다. 어찌 된 일인가,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는 모든 층에서 모든 계단에서 사람들이 떼 지어 달려 나오는 소리를 들었고, 목소리와 외침과 문 두드리는 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왜,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그는 자기가 정말로 미쳐 버렸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되풀이했다. 그러나 아니다, 그는 너무나 또렷하게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그에게로 올 것이다, 「틀림없이…… 다 그 일 때문이지…… 어제 일 때문이야……. 맙소사!」 그는 문을 걸쇠로 걸어 잠그고 싶었으나 손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포가 얼음처럼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그를 고문하고 마비시켰다……. 그러나 십 분쯤 이어지던 이 소동도 마침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숙집 여주인은 신음하고 끙끙거렸다.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여전히 위협과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마저 잠잠해진 듯했고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가 버렸나? 맙소사!」 그렇다, 그리고 이제 여주인도 여전히 울고 신음하며 가고 있다…… 그러더니 그녀의 문이 쾅 닫혔다……. 이제 사람들이 외치고 다투고 서로를 부르며, 목소리를 고함으로 높였다가 다시 속삭임으로 떨어뜨리면서 계단에서 저마다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숫자가 꽤 많았을 것이다 ―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그리고 왜, 왜 그자가 여기 왔던 것인가!」

라스콜니코프는 기진해서 소파에 쓰러졌으나 눈을 감을 수가 없었고, 반 시간 동안 이제껏 겪어 본 적 없는 고통 속에, 견딜 수 없는 끝없는 공포의 감각 속에 누워 있었다. 별안간 밝은 빛이 그의 방으로 비쳐 들었다. 나스타시야가 촛불과 수프 한 접시를 들고 들어온 것이다. 그를 찬찬히 살펴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녀는 촛불을 탁자에 놓고 가져온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빵, 소금, 접시, 숟가락.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겠지, 틀림없이. 하루 종일 쏘다니고서는 열이 나서 덜덜 떨고 있고.」

「나스타시야…… 주인아주머니를 왜 때린 거예요?」

그녀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주인아주머니를 때려?」

「아까요…… 반 시간쯤 전에, 부서장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계단에서요……. 왜 그렇게 그 사람을 함부로 다뤘고, 그리고…… 왜 여기 왔던 거예요?」

나스타시야는 말없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그를 뜯어보았고, 그 살핌은 오래 이어졌다. 그는 그녀의 캐는 듯한 눈길에 불편해졌고 겁까지 났다.

「나스타시야, 왜 말을 안 해요?」 그가 마침내 겁먹은 듯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 때문이지.」 그녀가 마침내 혼잣말하듯 나직이 대답했다.

「피라니? 무슨 피요?」 그가 하얗게 질려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중얼거렸다.

나스타시야는 여전히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주인아주머니를 때리지 않았어.」 그녀가 마침내 단호하고 결연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들었어요……. 자고 있지 않았어요…… 일어나 앉아 있었어요.」 그가 한결 더 겁먹은 듯 말했다.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어요. 부서장이 왔어요……. 집집마다 사람들이 죄다 계단으로 뛰어나왔고요.」

「여기 아무도 안 왔어. 그건 네 귓속에서 피가 우는 소리야. 빠져나갈 데가 없어서 엉겨 붙으면 별게 다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지……. 뭘 좀 먹을 테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스타시야는 여전히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마실 것 좀 줘요…… 나스타시야.」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흰 오지 물병에 물을 담아 돌아왔다. 그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목에 좀 흘린 것만을 기억했다. 그다음에는 망각이 뒤따랐다.

주

  1. 1. 60파운드 ― 약 27킬로그램. 저본은 러시아 도량형이 놓일 자리에 영국 단위를 넣어 옮겼다.

  2. 2. 전지(全紙) ― 인쇄용 큰 종이 한 장. 접어서 열여섯 면을 만들었으므로 원고와 번역의 분량을 세는 단위로도 쓰였다. 저본의 signature가 이것이며, 서명(署名)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3. 3. 『Les Confessions』 ― 장자크 루소의 자서전 『고백록』(1782~1789).

  4. 4. 라디셰프(1749~1802) ―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으로 농노제와 전제정을 고발했다가 유형에 처해진 러시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