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언어의 최초 형성에 관한 고찰, 그리고 본래의 언어와 뒤섞여 이루어진 언어가 지닌 서로 다른 성질에 관하여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기 위하여 특정한 이름을 붙이는 일, 곧 명사를 세우는 일은 아마도 언어가 형성되어 가는 첫걸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말하기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이 사람의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자란 두 미개인이라면, 어떤 대상을 가리키려 할 때마다 어떤 소리를 내어 서로의 필요를 상대가 알아듣게 하려 애쓰는 그 언어를 자연히 만들어 내기 시작할 것이다. 고유한 이름을 받은 것은 그들에게 가장 낯익고 또 입에 올릴 일이 가장 잦았던 대상뿐이었다. 그 지붕이 날씨를 막아 준 특정한 굴, 그 열매가 굶주림을 달래 준 특정한 나무, 그 물이 목마름을 가라앉혀 준 특정한 샘이 먼저 굴, 나무, 샘이라는 낱말로, 또는 그 원시의 어설픈 말에서 그것들을 표시하기에 알맞다고 여긴 다른 어떤 이름으로 가리켜졌을 것이다. 그 뒤에 이 미개인들의 경험이 더 넓어져 다른 굴과 다른 나무와 다른 샘을 눈여겨보게 되고 또 살아가는 필요에 밀려 그것들을 입에 올려야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새로운 대상 하나하나에 처음 알게 된 비슷한 대상을 가리키는 데 익어 온 바로 그 이름을 자연히 내려 주었을 것이다. 새로운 대상에는 어느 것도 자기 이름이 없었으나, 그 하나하나는 그런 이름을 가진 다른 대상과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그 미개인들이 옛 대상을 떠올리지 않고서, 또 그 새 대상이 그토록 가깝게 닮은 옛 대상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고서 새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새 대상 가운데 어느 것을 입에 올리거나 서로에게 가리켜 보일 일이 있을 때면 그들은 그에 맞갖은 옛 대상의 이름을 자연히 입에 올렸을 것이고, 그 옛 대상의 관념은 그 순간 그들의 기억에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본디 개체의 고유한 이름이던 낱말들이 하나하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개체를 아우르는 공통의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는 집에 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빠 또는 엄마라 부르며, 그리하여 두 개인에게 붙이도록 배운 그 이름을 온 종족에게 내려 준다. 나는 자기 집 문 앞을 흐르는 강의 고유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시골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그 강이라고 그는 말했고, 다른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겪어 온 바로는 다른 강을 눈여겨볼 일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강이라는 일반적인 낱말은 그가 받아들인 뜻으로는 한 개체를 가리키는 고유한 이름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사람을 다른 강으로 데려갔다면 그는 선선히 그것을 강이라 부르지 않았겠는가? 템스강 언덕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강이라는 일반적인 낱말은 모르고 템스라는 특정한 낱말만 알 만큼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보자. 그를 다른 어떤 강으로 데려갔다면 그는 선선히 그것을 템스라 부르지 않겠는가? 이것은 사실 그 일반적인 낱말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몹시 흔히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인은 어느 외국에서 본 큰 강을 두고 저것은 또 하나의 템스라고 자연히 말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처음 멕시코 해안에 이르러 그 아름다운 나라의 부와 인구와 사람 사는 집들이 얼마 전까지 찾아다녔던 미개한 나라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보고는 이곳은 또 하나의 스페인이라고 외쳤다. 그리하여 그곳은 새 스페인(누에바스페인)이라 불렸고, 이 이름은 그 뒤로 그 불행한 나라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도 이와 같이 영웅을 두고 알렉산드로스라 하고, 웅변가를 두고 키케로라 하고, 철학자를 두고 뉴턴이라 한다1. 문법학자들이 antonomasia2라 부르는 이 말투는 이제 조금도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지극히 흔한데, 사람이 한 대상에게 그와 거의 닮은 다른 대상의 이름을 붙이려는 성향을, 그리하여 본디 한 개체를 나타내려던 낱말로 여러 개체를 이름 부르려는 성향을 얼마나 자연스레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한 개체의 이름을 그 개체의 관념과 그것을 나타내는 이름을 자연히 되불러 오는 닮음을 지닌 수많은 대상에 이렇게 옮겨 쓰는 일, 바로 이것이 본디 학교에서 유(類)와 종(種)이라 부르는 부류와 갈래를 이루어 내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며, 재기 있고 말솜씨 좋은 제네바의 루소 씨34는 그 기원을 설명하지 못해 그토록 애를 먹는다. 한 종을 이루는 것은 다만 서로 얼마간 닮아 있고 그 까닭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대상일 뿐이며, 그 이름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타내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대상의 대부분이 이렇게 저마다 알맞은 부류와 갈래 아래 놓이고 그런 일반적인 이름으로 갈라지게 되었을 때, 각 갈래 또는 종 아래 들어 있는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체의 대부분이 그 종의 일반적인 이름과는 다른 저만의 남다르거나 고유한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대상을 입에 올릴 일이 있을 때면 그것을 같은 일반적인 이름 아래 들어 있는 다른 대상들과 갈라놓는 일이 흔히 필요해졌는데, 그 방편은 첫째로 그 대상의 남다른 성질에 의하거나, 둘째로 그것이 다른 어떤 것과 맺고 있는 남다른 관계에 의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른 두 갈래 낱말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하나는 성질을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관계를 나타내는 낱말이다.
형용사는 성질을 어떤 특정한 주체를 한정하는 것으로, 또는 스콜라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그 주체와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5 여겨 나타내는 낱말이다. 이렇게 green(푸른)이라는 낱말은 어떤 성질을 그것이 붙을 수 있는 특정한 주체를 한정하는 것으로, 곧 그 주체와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여겨 나타낸다. 이런 갈래의 낱말이 특정한 대상을 같은 일반적인 이름 아래 들어 있는 다른 대상들과 갈라놓는 데 쓰일 수 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green tree(푸른 나무)라는 낱말은 어떤 특정한 나무를 말라 버렸거나 벼락 맞은 다른 나무들과 갈라놓는 데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전치사는 관계를 같은 길로, 곧 짝이 되는 대상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여겨 나타내는 낱말이다. 이렇게 of(…의), to(…에게), for(…를 위하여), with(…와 더불어), by(…로써), above(…위에), below(…아래에) 등의 전치사는 그 전치사가 놓인 앞뒤 낱말로 나타내어진 대상들 사이에 있는 어떤 관계를 가리키며, 또한 그 관계가 짝이 되는 대상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여겨졌음을 가리킨다. 이런 갈래의 낱말은 특정한 대상을 저만의 남다른 성질로는 알맞게 짚어 낼 수 없을 때 같은 종의 다른 대상들과 갈라놓는 데 쓰인다. 예를 들어 the green tree of the meadow(초원의 푸른 나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특정한 나무를 그것에 딸린 성질로만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로도 갈라놓는 것이다.
성질도 관계도 따로 떼어 추상된 채로는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것들이 언제나 있는 그대로 보는 모습, 곧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여겨 그것들을 가리키는 낱말이, 우리가 그것들이 있는 모습으로 결코 보지 못하는 모습, 곧 추상된 것으로 여겨 그것들을 나타내는 낱말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졌으리라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다. green(푸른)과 blue(파란) 같은 낱말은 아마 greenness(푸름)와 blueness(파랑) 같은 낱말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고, above(위에)와 below(아래에)는 superiority(우위)와 inferiority(하위)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다. 뒤쪽 갈래의 낱말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앞쪽 갈래의 낱말을 만들어 내는 데보다 훨씬 큰 추상의 힘이 든다. 그러므로 그런 추상적인 술어는 훨씬 뒤에 세워졌을 법하다. 실제로 그 어원은 대체로 그러함을 보여 주는데, 그것들은 대개 구체적인 다른 낱말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형용사를 만들어 내는 일이 그것에서 갈라져 나온 추상적인 명사를 만들어 내는 일보다 훨씬 자연스럽다고는 해도, 그 일 또한 적잖은 정도의 추상과 일반화를 요구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green, blue, red와 그 밖의 빛깔 이름을 처음 만들어 낸 이들은 수많은 대상을 눈여겨보고 서로 견주었을 것이고, 빛깔이라는 성질에서 그것들이 닮은 데와 닮지 않은 데를 살폈을 것이고, 그 닮음과 닮지 않음에 따라 제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서로 다른 부류와 갈래로 갈라 놓았을 것이다. 형용사는 본성으로 보아 일반적이고 얼마간은 추상적인 낱말이며, 어떤 종 또는 갈래의 사물이 있어 그 모두에 똑같이 붙을 수 있다는 관념을 반드시 앞세운다. green이라는 낱말은 굴이라는 낱말에서 그러했으리라고 우리가 짐작해 본 것처럼 본디 한 개체의 이름이었다가 나중에 문법학자들이 antonomasia라 부르는 것을 거쳐 한 종의 이름이 될 수는 없었다. green이라는 낱말은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실체의 남다른 성질을 가리키므로 맨 처음부터 일반적인 낱말이었을 것이고, 같은 성질을 지닌 다른 어떤 실체에도 똑같이 붙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green이라는 수식어로 처음 갈라놓은 사람은 green하지 않은 다른 대상들을 눈여겨보고 이 이름으로 그것과 갈라 놓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을 세우는 일은 견줌을 앞세운다. 그것은 또한 얼마간의 추상을 앞세운다. 이 이름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은 그 성질을 그것이 딸린 대상에서 갈라내었을 것이고, 그 대상이 그 성질 없이도 있을 수 있다고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단순한 형용사조차 만들어 내는 데에는 우리가 흔히 알아차리는 것보다 많은 형이상학이 들었을 것이다. 모든 형용사 가운데 형이상학이 가장 덜 든 빛깔 이름조차 세워지기 전에, 갈라 놓기 또는 부류 짓기와 견줌과 추상이라는 서로 다른 마음의 작용이 모두 쓰였을 것이다. 이 모두에서 나는 언어가 이루어지기 시작할 무렵에 형용사가 결코 가장 먼저 만들어진 낱말은 아니었으리라고 헤아린다.
서로 다른 실체의 서로 다른 성질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방편이 있는데, 그것은 추상도 성질을 주체에서 갈라내어 떠올리는 일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형용사를 만들어 내는 일보다 자연스러워 보이며, 그런 까닭에 언어가 처음 이루어질 때 형용사보다 먼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방편은 명사가 지닌 서로 다른 성질에 따라 명사 자체에 어떤 변화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언어에서 성별이 있음과 성별이 없음이라는 성질은 그렇게 한정된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의 서로 다른 어미로 나타내어진다. 예를 들어 라틴어에서 lupus, lupa(수컷 이리, 암컷 이리), equus, equa(수말, 암말), juvencus, juvenca(수송아지, 암송아지), Julius, Julia, Lucretius, Lucretia 등은 그런 이름이 딸린 짐승과 사람의 수컷과 암컷이라는 성질을 이를 위한 형용사를 덧붙일 필요 없이 가리킨다. 다른 한편 forum(광장), pratum(초원), plaustrum(수레)이라는 낱말은 그 남다른 어미로써 그것들이 가리키는 여러 실체에 성별이 도무지 없음을 가리킨다. 성별이 있음과 성별이 도무지 없음은 둘 다 그것들이 딸린 특정한 실체를 한정하며 그 실체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성질로 자연히 여겨지므로, 이 남다른 갈래의 성질을 나타내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낱말로 그것을 나타내기보다 명사에 변화를 주어 나타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하면 표현이 그것이 가리키는 관념 또는 대상에 다른 길로 할 때보다 훨씬 꼭 맞는 유비를 이루는 것이 분명하다. 성질은 자연에서 실체의 한 변형으로 나타나며, 언어에서도 그 실체를 가리키는 명사의 한 변형으로 이렇게 나타내어지므로, 이 경우에는 굳이 말한다면 성질과 주체가 표현 안에서 한데 녹아 있는데, 그것은 대상 안에서, 또 관념 안에서 그 둘이 한데 있어 보이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모든 고대 언어의 남성·여성·중성이라는 성이 생겨났다6. 이것으로써 모든 구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곧 실체를 산 것과 죽은 것으로 가르는 구별과 짐승을 수컷과 암컷으로 가르는 구별이 형용사의 도움도, 이 가장 널리 미치는 갈래의 한정을 가리키는 어떤 일반적인 이름의 도움도 없이 넉넉히 표시된 듯하다.
내가 아는 어느 언어에도 이 세 가지 성 말고 다른 성은 없다. 다시 말해 명사의 형태만으로는, 형용사가 곁들지 않고서는 위에 말한 세 가지 성질, 곧 수컷임과 암컷임과 수컷도 암컷도 아님 말고 다른 성질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언어에서 명사의 서로 다른 형태가 다른 여러 성질을 나타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어와 몇몇 다른 언어의 여러 축소형은 사실 그런 변화를 겪는 명사가 가리키는 실체에 아주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변형을 때로 나타내어 준다.
그러나 명사가 본래의 꼴을 통째로 잃지 않고서, 때에 따라 그것들을 밝혀 가르는 데 필요할 만한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질을 나타내기에 넉넉할 만큼 많은 변화를 겪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명사의 서로 다른 형태가 얼마 동안은 형용사를 만들어 낼 필요를 미리 막아 주었을지라도, 그 필요를 끝내 아주 막아 버릴 수는 없었다. 형용사가 만들어지게 되었을 때, 그것이 수식하거나 한정해 줄 명사와 어느 정도 닮은 꼴로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형용사를 처음 붙인 명사와 같은 어미를 자연히 그것에 주었을 것이고, 소리가 닮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같은 음절이 되돌아오는 데서 오는 즐거움에서, 곧 모든 언어에서 유비의 바탕이 되는 그 마음에서, 같은 형용사를 남성 명사에 붙이는가 여성 명사에 붙이는가 중성 명사에 붙이는가에 따라 그 어미를 바꾸기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큰 수컷 이리, 큰 암컷 이리, 큰 초원을 나타내려 할 때 magnus lupus, magna lupa, magnum pratum이라 말했을 것이다.
모든 고대 언어에서 일어나는 이 일, 곧 명사의 성에 따라 형용사의 어미가 바뀌는 일은 주로 어떤 소리의 닮음, 사람의 귀에 본래 그토록 맞갖은 어떤 갈래의 운을 위하여 들어온 듯하다. 성은 형용사에 제대로 딸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데, 형용사의 뜻은 어떤 갈래의 명사에 붙든 언제나 고스란히 같기 때문이다. a great man(위대한 남자), a great woman(위대한 여자)이라 말할 때 great라는 낱말은 두 경우에 고스란히 같은 뜻이며, 그것이 붙는 주체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은 그 뜻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Magnus, magna, magnum도 이와 같이 고스란히 같은 성질을 나타내는 낱말이며, 어미가 바뀌어도 뜻에는 아무런 변화가 따르지 않는다. 성별과 성은 실체에 딸리는 성질이지만 실체의 성질에는 딸릴 수 없다. 대체로 어떤 성질이든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곧 어떤 특정한 주체를 한정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에는 그 자체가 다른 어떤 성질의 주체로 떠올려질 수 없으나, 추상된 것으로 여겨질 때에는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형용사도 다른 형용사를 한정할 수 없다. a great good man(위대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하면서 또한 선한 사람을 뜻한다. 두 형용사는 다 명사를 한정하며, 서로를 한정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the great goodness of the man(그 사람의 큰 선함)이라 말할 때 goodness라는 낱말은 추상된 것으로 여겨진 성질을 가리키며 그 자체가 다른 성질의 주체가 될 수 있으므로, 그런 까닭에 great라는 낱말로 한정될 수 있다.
형용사를 처음 만들어 내는 일에 그토록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면, 전치사를 만들어 내는 일에는 그보다 더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모든 전치사는 짝이 되는 대상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여겨진 어떤 관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above라는 전치사는 우위라는 관계를 superiority라는 낱말로 나타내어지듯 추상된 채로 가리키지 않고, 짝이 되는 어떤 대상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채로 가리킨다. 예를 들어 the tree above the cave(굴 위의 나무)라는 어구에서 above라는 낱말은 나무와 굴 사이의 어떤 관계를 나타내며, 그 관계를 짝이 되는 대상인 굴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채로 나타낸다. 이 낱낱의 보기에서 알 수 있듯 전치사는 뜻을 채우기 위하여 언제나 그 뒤에 오는 다른 낱말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낱말을 처음 만들어 내는 일은, 내가 말하려는 바이지만, 형용사를 만들어 내는 일보다 더 큰 추상과 일반화의 힘을 요구했을 것이다. 첫째로 관계는 그 자체가 성질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대상이다. 성질이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는 데 막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관계로 알아듣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성질은 거의 언제나 우리 외부 감각의 대상이지만 관계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한쪽 갈래의 대상이 다른 쪽보다 그토록 더 알아듣기 쉬운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둘째로 전치사는 그것이 가리키는 관계를 언제나 짝이 되는 대상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채로 나타내지만, 그것이 본디 적잖은 추상의 힘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전치사는 관계를 가리키며 관계 말고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관계를, 그리고 관계 말고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 낱말을 세울 수 있기 전에 그들은 얼마간 이 관계를 관계 맺은 대상들에서 떼어 내어 추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상들의 관념은 전치사의 뜻에 어떤 점에서도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낱말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적잖은 정도의 추상이 들었다고 해야 한다. 셋째로 전치사는 그 본성으로 보아 일반적인 낱말이며, 처음 세워질 때부터 그와 닮은 다른 어떤 관계를 가리키는 데에도 똑같이 붙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above라는 낱말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은 우위의 관계를 그렇게 관계 맺은 대상들에서 얼마간 갈라내었을 뿐 아니라, 이 관계를 다른 관계들, 곧 below라는 낱말이 가리키는 하위의 관계나 beside라는 낱말이 나타내는 나란히 있음의 관계 같은 것들과도 갈라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낱말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특정한 갈래 또는 종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떠올렸을 것이며, 이것은 적잖은 견줌과 일반화의 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형용사를 처음 만들어 내는 일을 가로막은 어려움이 무엇이었든, 그와 같은 어려움에 더 많은 어려움이 전치사를 만들어 내는 일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언어를 처음 이루어 갈 때 실체의 이름이 그 가장 중요한 성질 가운데 얼마간에서 달라짐에 따라 그 어미를 바꾸어 얼마 동안 형용사의 필요를 비껴간 듯하다면, 그들은 그와 비슷한 꾀로 더욱 어려운 전치사를 만들어 내는 일을 비껴갈 필요를 훨씬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고대 언어의 여러 격이 바로 그와 똑같은 갈래의 꾀다7.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속격과 여격은 전치사의 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분명하며, 짝이 되는 말에 해당하는 명사에 변화를 주어 그 명사가 가리키는 것과 문장 안의 다른 낱말이 나타내는 것 사이에 있는 관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fructus arboris(나무의 열매), sacer Herculi(헤라클레스께 바친)라는 표현에서 짝이 되는 낱말 arbor와 Hercules에 준 변화는 영어에서 전치사 of와 to로 나타내어지는 것과 같은 관계를 나타낸다.
관계를 이렇게 나타내는 데에는 아무런 추상의 힘도 들지 않았다. 여기에서 관계는 관계를 가리키며 관계 말고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남다른 낱말로 나타내어지지 않고 짝이 되는 말에 준 변화로 나타내어졌다. 여기에서 관계는 자연에 나타나는 그대로, 곧 따로 떼어 내어진 무엇으로가 아니라 짝이 되는 대상과 속속들이 섞이고 녹아든 것으로 나타내어졌다.
관계를 이렇게 나타내는 데에는 아무런 일반화의 힘도 들지 않았다. arboris와 Herculi라는 낱말은 그 뜻 안에 영어의 전치사 of와 to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관계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 전치사처럼 다른 어떤 대상들 사이에 있음이 보이는 같은 관계를 나타내는 데 두루 붙을 수 있는 일반적인 낱말은 아니다.
관계를 이렇게 나타내는 데에는 아무런 견줌의 힘도 들지 않았다. arboris와 Herculi라는 낱말은 그 표현을 만들어 낸 이들이 어떤 갈래의 견줌을 거쳐 다른 모든 갈래의 관계에서 갈라내려 한 특정한 갈래의 관계를 가리키려고 세운 일반적인 낱말이 아니다. 하기야 이 꾀는 그 보기가 머지않아 뒤따라지고, 다른 어떤 대상들 사이에 있는 비슷한 관계를 나타낼 일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짝이 되는 대상의 이름에 비슷한 변화를 주어 그리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 일은 아마도, 아니 오히려 틀림없이 일어났으리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그 보기를 보인 이들의 아무런 뜻이나 앞선 헤아림 없이, 어떤 일반 규칙도 세울 생각이 없던 이들에게서 일어났을 것이다. 일반 규칙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느린 걸음으로 스스로 세워졌을 것이며, 그것은 문법 규칙의 훨씬 많은 부분이 그 위에 서 있는 유비와 소리의 닮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짝이 되는 대상의 이름에 변화를 주어 관계를 나타내는 일은 추상도 일반화도 어떤 갈래의 견줌도 요구하지 않으므로, 처음에는 그 모든 작용을 얼마간 다 요구했을 전치사라는 일반적인 낱말로 관계를 나타내는 일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손쉬웠을 것이다.
격의 수는 언어마다 다르다. 그리스어에는 다섯, 라틴어에는 여섯이 있고, 아르메니아어에는 열이 있다고 한다. 그 자리를 채워 줄 수 있는 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전치사가 만들어지기 전에, 어떤 언어를 처음 이룬 이들이 눈여겨볼 일이 있던 서로 다른 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명사의 어미에 더 많거나 더 적은 수의 변화를 세워 두었는가에 따라 격의 수가 많거나 적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대 언어에서 고대의 격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치사가 모든 전치사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형이상학적이며, 따라서 아마 가장 나중에 만들어졌으리라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어지간히 밝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above라는 전치사가 나타내는 관계가 무엇이냐 물어보라. 그는 선선히 우위의 관계라 답할 것이다. below라는 전치사는 어떠냐고 물으면 그는 그만큼 빠르게 하위의 관계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of라는 전치사가 나타내는 관계가 무엇이냐 물으면, 그가 이런 주제를 미리 꽤 생각해 두지 않았다면 답을 헤아리는 데 한 주일을 주어도 마음 놓아도 좋다. above와 below라는 전치사는 고대 언어에서 격으로 나타내어진 관계 가운데 어느 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of라는 전치사는 고대 언어에서 속격으로 나타내어진 것과 같은 관계를 가리키며, 그 관계가 몹시 형이상학적인 성질의 것임은 알아보기 쉽다. of라는 전치사는 짝이 되는 대상과 구체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여겨진 관계를 일반적으로 가리킨다. 그것은 앞에 오는 명사가 어떻게든 뒤에 오는 명사와 관계 맺고 있음을 표시하되, above라는 전치사가 하는 것처럼 그 관계의 남다른 성질이 무엇인지는 어떤 점에서도 짚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서로 가장 맞선 관계를 나타내는 데에도 흔히 쓰는데, 서로 가장 맞선 관계도 저마다 그 안에 관계라는 일반적인 관념 또는 성질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the father of the son(아들의 아버지)이라 하고 the son of the father(아버지의 아들)라 하며, the fir-trees of the forest(숲의 전나무)라 하고 the forest of the fir-trees(전나무의 숲)라 한다. 아버지가 아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아들이 아버지와 맺고 있는 관계와 아주 맞선 관계임은 분명하며, 부분이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는 전체가 부분과 맺고 있는 관계와 아주 맞선다. 그러나 of라는 낱말은 그 모든 관계를 가리키는 데 매우 잘 쓰이는데, 그것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특정한 관계도 가리키지 않고 다만 관계를 일반적으로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 표현에서 어떤 특정한 관계가 읽혀 나오는 한, 그것은 전치사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 전치사가 놓인 앞뒤 명사의 성질과 배열에서 마음이 헤아려 내는 것이다.
of라는 전치사에 관하여 내가 말한 것은 얼마간 to, for, with, by라는 전치사에, 또 고대의 격이 있던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현대 언어에서 쓰이는 다른 어떤 전치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몹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계를 나타내는데, 그것을 명사로 나타내려고 애써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above라는 전치사가 가리키는 관계를 superiority라는 명사로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어떤 특정한 관계를 나타내므로 어느 것도 of라는 전치사만큼 추상적이지는 않으니, of는 모든 전치사 가운데 단연 가장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의 격이 있던 자리를 채워 줄 수 있는 전치사는 다른 전치사보다 더 추상적이므로 만들어 내기가 자연히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전치사가 나타내는 관계는 우리가 입에 올릴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 잦은 관계다. above(위에), below(아래에), near(가까이), within(안에), without(밖에), against(맞대어) 등의 전치사는 현대 언어에서 of, to, for, with, from, by 같은 전치사보다 훨씬 드물게 쓰인다. 앞쪽 갈래의 전치사는 한 쪽에 두 번도 나오지 않지만, 뒤쪽 갈래의 전치사 하나나 둘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한 문장도 지어내기 어렵다. 그러므로 격의 자리를 채워 주는 이 뒤쪽 전치사가 그 추상성 때문에 만들어 내기 그토록 어려웠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관계를 사람들이 눈여겨볼 일이 잦았던 까닭에 그 자리를 채워 줄 어떤 방편이 없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으뜸이 되는 낱말 가운데 하나의 어미를 바꾸는 것만큼 뚜렷한 방편은 없다.
고대 언어의 격 가운데 몇몇은 특별한 까닭으로 어떤 전치사로도 대신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주격과 대격과 호격이 그것이다. 명사의 어미에 그런 여러 변화를 두지 않는 현대 언어에서는 그에 맞갖은 관계가 낱말의 자리로, 또 문장의 순서와 짜임으로 나타내어진다.
사람들은 하나하나의 대상만이 아니라 여럿을 입에 올릴 일도 잦으므로 수를 나타내는 어떤 길을 가지는 것이 필요해졌다. 수는 수를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특정한 낱말, 곧 many(많은), more(더 많은) 같은 낱말로 나타내어질 수도 있고, 세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낱말에 어떤 변화를 주어 나타내어질 수도 있다. 사람들이 언어의 어린 시절에 손을 뻗었을 법한 것은 이 뒤쪽 방편이다. 수를 세어지는 어떤 특정한 대상의 무리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여기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가장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이제 막 언어를 이루기 시작한 거친 인간에게 선선히 떠오를 관념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의 대상을 말할 때와 여러 대상을 말할 때를 영어의 a, an, many 같은 형이상학적인 형용사로가 아니라 세어지는 대상을 뜻하는 낱말의 어미를 바꾸어 자연히 갈랐을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고대 언어의 단수와 복수가 생겨났으며8, 같은 구별이 모든 현대 언어에도 적어도 낱말의 대부분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본래의 모습을 지녀 뒤섞이지 않은 언어는 모두 복수와 더불어 양수(兩數)를 지닌 듯하다9. 그리스어가 그러하며, 내가 들은 바로는 히브리어와 고딕어와 다른 여러 언어도 그러하다. 사회의 거친 시작 무렵에는 하나와 둘과 그보다 많음이 사람들이 눈여겨볼 일이 있던 수의 구별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것을 하나, 둘, 셋, 넷 같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낱말로 나타내기보다 명사 하나하나에 변화를 주어 나타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 낱말들은 익어 온 버릇이 우리에게 낯익게 만들어 놓았으나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가장 미묘하고 가장 정밀한 추상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누구든 three(셋)라는 낱말로 자기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헤아려 보라. 그것은 3실링도 3펜스도 세 사람도 세 마리 말도 아니라 셋을 일반적으로 뜻한다. 그러면 그토록 형이상학적인 추상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주 뚜렷하거나 아주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일 수 없음을 그는 쉽게 납득할 것이다. 나는 어떤 미개한 나라들에 관하여 그 언어가 처음 세 가지 수의 구별밖에 나타낼 수 없었다고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구별을 세 개의 일반적인 낱말로 나타냈는지, 세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명사에 변화를 주어 나타냈는지를 정할 만한 것은 어디에서도 만나 본 기억이 없다.
하나하나의 대상 사이에 있는 모든 관계가 여러 대상 사이에도 똑같이 있을 수 있으므로, 양수와 복수에도 단수와 같은 수의 격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모든 고대 언어의 격 변화가 지닌 얽히고 복잡한 모습이 비롯한다. 그리스어에는 세 가지 수 각각에 다섯 격이 있으니 모두 합해 열다섯이다.
고대 언어에서 형용사가 그것이 붙는 명사의 성에 따라 어미를 바꾸었듯 격과 수에 따라서도 바꾸었다. 그러므로 그리스어의 형용사는 하나하나가 세 가지 성과 세 가지 수를 지니고 각 수마다 다섯 격을 지니므로 마흔다섯 가지 서로 다른 변화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어를 처음 이룬 이들이 명사의 격과 수에 따라 형용사의 어미를 바꾼 것은 성에 따라 바꾼 것과 같은 까닭, 곧 유비를 사랑하는 마음과 소리의 어떤 가지런함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던 듯하다. 형용사의 뜻에는 격도 수도 없으며, 그런 낱말의 뜻은 온갖 어미를 입고 나타나더라도 언제나 고스란히 같다. Magnus vir, magni viri, magnorum virorum, 곧 위대한 사람, 위대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들의라는 이 모든 표현에서 magnus, magni, magnorum이라는 낱말은 영어의 great라는 낱말과 마찬가지로 고스란히 하나의 같은 뜻을 지니는데, 그것이 붙는 명사는 그렇지 않다. 형용사의 어미가 달라져도 뜻에는 아무런 차이가 따르지 않는다. 형용사는 명사의 한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명사가 때에 따라 놓일 수 있는 서로 다른 관계는 그 한정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 수 없다.
고대 언어의 격 변화가 그토록 복잡하다면 그 활용은 그보다 한없이 더 복잡하다. 그리고 한쪽의 복잡함은 다른 쪽의 복잡함과 같은 원리, 곧 언어의 시작 무렵에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술어를 만들어 내기 어려웠다는 원리 위에 서 있다.
동사는 언어를 이루려는 맨 처음 시도와 반드시 같은 때에 생겼을 것이다. 어떤 동사의 도움 없이는 아무런 단언도 나타낼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있다거나 없다는 우리 생각을 나타내려고 할 때만 말을 한다. 그런데 우리 단언의 주제가 되는 이 사건 또는 이 사실을 가리키는 낱말은 언제나 동사일 수밖에 없다.
무인칭 동사10는 하나의 낱말로 하나의 온전한 사건을 나타내고, 대상 안에도 관념 안에도 언제나 있는 그 완전한 단순함과 하나됨을 표현에 지켜 주며, 사건을 주체와 속성이라는 여러 구성 부분으로 추상하거나 형이상학적으로 나누는 일을 앞세우지 않으므로 아마도 가장 먼저 만들어진 갈래의 동사였을 것이다. pluit(비가 온다), ningit(눈이 온다), tonat(천둥이 친다), lucet(날이 밝다), turbatur(어수선하다) 같은 동사는 하나하나가 온전한 단언, 곧 사건의 전체를, 마음이 자연에서 그것을 떠올릴 때의 그 완전한 단순함과 하나됨으로 나타낸다. 그와 달리 Alexander ambulat(알렉산드로스가 걷는다), Petrus sedet(페트루스가 앉는다)라는 어구는 사건을 두 부분, 곧 사람 또는 주체와 그 주체에 관하여 단언된 속성 또는 사실로 갈라 놓는 셈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알렉산드로스가 걷는다는 관념 또는 생각은 알렉산드로스가 걷지 않는다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고 온전하게 하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일은 전적으로 사람이 꾸며 낸 것이며, 언어가 지닌 모자람에서 온 결과다. 언어는 이 자리에서도 다른 여러 자리에서처럼 단언하려는 사실 전체를 한꺼번에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낱말이 없는 것을 여러 낱말로 메운다. pluit라는 자연스러운 표현에 imber decidit(비가 내린다)이나 tempestas est pluvia(날씨가 비 내리는 상태다)라는 더 꾸며진 표현보다 얼마나 더 많은 단순함이 있는지는 누구나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이 마지막 두 표현에서 단순한 사건 또는 사실은 하나에서는 두 부분으로, 다른 하나에서는 세 부분으로 꾸며서 쪼개고 갈라진다. 그 하나하나에서 그것은 일종의 문법적 우회로 나타내어지며, 그 우회가 뜻을 지니는 것은 pluit라는 낱말이 나타내는 관념의 구성 부분을 형이상학적으로 갈라 본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의 시작 무렵에 쓰인 첫 동사는, 어쩌면 첫 낱말조차도 아마 그런 무인칭 동사였을 것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히브리어 문법학자들도 그 언어의 뿌리 낱말, 곧 다른 모든 낱말이 거기에서 갈라져 나온 낱말이 모두 동사이며 무인칭 동사라고 말한다.
언어가 나아가는 가운데 그 무인칭 동사가 어떻게 인칭 동사가 되었는지는 떠올리기 쉽다. 예를 들어 venit(온다)라는 낱말이 본디 무인칭 동사여서 지금처럼 어떤 것이 온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사자 같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 온다는 것을 가리켰다고 해 보자. 언어를 처음 만들어 낸 미개인들은 이 무서운 짐승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서로에게 venit이라고, 곧 사자가 온다고 외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으며, 이 낱말이 다른 어떤 낱말의 도움 없이 온전한 사건을 나타냈다고 해 보자. 그 뒤에 언어가 더 나아가 그들이 특정한 실체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을 때, 다른 어떤 무서운 대상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 대상의 이름을 venit이라는 낱말에 자연히 붙여 venit ursus, venit lupus, 곧 곰이 온다, 이리가 온다고 외쳤을 것이다. 이렇게 차츰 venit이라는 낱말은 사자가 온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무서운 대상이든 온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것은 특정한 대상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갈래의 대상이 온다는 것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 뜻이 더 일반적으로 된 뒤로 그것은 자기 홀로, 그 뜻을 짚어 정해 줄 명사의 도움 없이는 어떤 특정한 사건도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은 무인칭 동사가 아니라 인칭 동사가 되었을 것이다. 사회가 더 나아가는 가운데 그 뜻이 더욱 일반적으로 되어 지금처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무래도 좋은 것이든 무엇이나 가까이 옴을 뜻하게 되었으리라는 것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아마도 대체로 이와 같이 하여 거의 모든 동사가 인칭 동사가 되었고,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건을 수많은 형이상학적 부분으로 쪼개고 가르는 일을 차츰 배웠으며, 그 부분은 모든 어구와 문장의 서로 다른 자리에서 여러 가지로 어우러지는 서로 다른 품사로 나타내어진다.11 말하는 재주에도 글 쓰는 재주와 같은 갈래의 나아감이 있었던 듯하다. 사람들이 처음 자기 관념을 글로 나타내려 해 보았을 때에는 낱낱의 글자가 낱말 하나를 나타냈다. 그러나 낱말의 수가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기억은 붙들고 있어야 할 수많은 글자에 몹시 짐 지고 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필요가 그들에게 낱말을 그 요소로 가르고, 낱말 자체가 아니라 낱말이 이루어진 요소를 나타내는 글자를 만들어 내도록 가르쳤다. 이것이 만들어진 결과로 낱낱의 낱말은 하나의 글자가 아니라 여러 글자로 나타내어지게 되었고, 그것을 글로 적는 일은 예전보다 훨씬 얽히고 복잡해졌다. 그러나 낱낱의 낱말이 이렇게 더 많은 글자로 나타내어졌어도 언어 전체는 훨씬 적은 글자로 나타내어졌으니, 스물네 낱자쯤이 그 전에 있어야 했던 그 엄청난 수의 글자를 대신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이와 같이 언어의 시작 무렵에도 사람들은 눈여겨볼 일이 있던 낱낱의 사건을 그 사건 전체를 한꺼번에 나타내는 낱말 하나로 나타내려 해 본 듯하다. 그러나 사건이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여러 가지인 까닭에 이렇게 하면 낱말의 수도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필요에 밀리고 한편으로는 자연에 이끌려 낱낱의 사건을 이른바 그 형이상학적 요소로 가르고, 사건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이루어진 요소를 가리키는 낱말을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낱낱의 사건을 나타내는 일은 더 얽히고 복잡해졌으나, 언어의 체계 전체는 더 짜임새 있고 더 잘 이어지고 더 쉽게 붙들리고 이해되는 것이 되었다.
동사가 본디 무인칭이던 것에서 사건을 그 형이상학적 요소로 가름으로써 이렇게 인칭 동사가 되었을 때, 그것이 먼저 삼인칭 단수로 쓰였으리라 여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 영어에서는 어떤 동사도 무인칭으로 쓰이지 않으며, 내가 아는 한 다른 어떤 현대어에서도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고대 언어에서는 어떤 동사가 무인칭으로 쓰일 때 그것은 언제나 삼인칭 단수다. 여전히 언제나 무인칭인 동사의 어미는 한결같이 인칭 동사의 삼인칭 단수 어미와 같다. 이 여러 사정을 헤아려 보고 그 일 자체가 자연스럽다는 점을 더하면, 동사가 이제 삼인칭 단수라 불리는 꼴에서 처음 인칭 동사가 되었음을 우리는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사로 나타내어지는 사건 또는 사실은 어떤 제삼의 사람이나 대상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나 말 듣는 사람에 관해서도 단언될 수 있으므로, 사건이 지닌 이 두 남다른 관계를 나타내는 어떤 길을 찾아내는 일이 필요해졌다. 영어에서는 이 일이 흔히 이른바 인칭 대명사를 단언된 사건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낱말 앞에 붙여 이루어진다. I came, you came, he or it came(나는 왔다, 너는 왔다, 그 또는 그것은 왔다)라는 이 어구에서 왔다는 사건은 첫째에서는 말하는 사람에 관하여, 둘째에서는 말 듣는 사람에 관하여, 셋째에서는 다른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관하여 단언된다. 언어를 처음 이룬 이들도 같은 일을 하여 앞의 두 인칭 대명사를 같은 길로 삼인칭 단수를 나타내는 동사의 같은 어미 앞에 붙여 ille venit 또는 illud venit과 마찬가지로 ego venit, tu venit이라 말했을 수도 있으리라 여겨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동사의 이 관계를 나타낼 일이 처음 있었을 때 그들의 언어에 ego나 tu 같은 낱말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려 보려 애쓰는 언어의 이 이른 시기에 그런 낱말이 알려져 있었으리라는 것은 지극히 있을 법하지 않다. 익어 온 버릇이 이제 그것을 우리에게 낯익게 만들어 놓았으나 그 둘은 다 지극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I(나)라는 낱말은 아주 남다른 갈래의 낱말이다.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 인칭 대명사로 자기를 가리킬 수 있다. 그러므로 I라는 낱말은 논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헤아릴 수 없이 여러 가지 대상에 관하여 서술될 수 있는 일반적인 낱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모든 일반적인 낱말과 이 점에서 다르니, 그것이 관하여 서술될 수 있는 대상이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어떤 특정한 종의 대상을 이루지 않는다. I라는 낱말은 man(사람)이라는 낱말처럼 저만의 남다른 성질로 다른 모든 것과 갈라지는 특정한 부류의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한 종의 이름이기는커녕 오히려 쓰일 때마다 언제나 정확한 한 개체, 곧 그때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을 가리킨다. 그것은 논리학자들이 말하는 단일한 말이면서 또한 그들이 말하는 공통의 말이라 할 수 있으며, 가장 정확한 개체성과 가장 널리 미치는 일반화라는 겉보기에 서로 맞선 성질을 그 뜻 안에 아울러 지닌다 하겠다. 그러므로 이 낱말은 그토록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나타내므로 언어를 처음 이룬 이들에게 쉽게도 선선히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인칭 대명사는 아이들이 쓰기를 가장 늦게 배우는 낱말에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는 자기를 두고 말할 때 I walk, I sit(나는 걷는다, 나는 앉는다) 대신 Billy walks, Billy sits(빌리는 걷는다, 빌리는 앉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시작 무렵에 사람들이 적어도 더 추상적인 전치사를 만들어 내는 일을 비껴가고 이제 그것이 가리키는 것과 같은 관계를 짝이 되는 말의 어미를 바꾸어 나타낸 듯하듯, 그들은 마찬가지로 동사가 나타내는 사건이 일인칭이나 이인칭이나 삼인칭에 관하여 단언되려는가에 따라 동사의 어미를 바꾸어 그 더 추상적인 대명사를 만들어 낼 필요를 비껴가려 자연히 해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모든 고대 언어에 두루 있는 일인 듯하다. 라틴어에서 veni, venisti, venit은 다른 어떤 것을 덧붙이지 않고도 영어의 I came, you came, he or it came이라는 어구가 나타내는 서로 다른 사건을 넉넉히 가리킨다. 같은 까닭으로 동사는 사건이 일인칭이나 이인칭이나 삼인칭 복수에 관하여 단언되려는가에 따라 그 어미를 바꾸었을 것이며, 영어의 we came, ye came, they came(우리는 왔다, 너희는 왔다, 그들은 왔다)이라는 어구가 나타내는 것은 라틴어의 venimus, venistis, venerunt이라는 낱말로 가리켜졌을 것이다. 또 수를 가리키는 이름을 만들어 내기 어려운 까닭에 명사의 격 변화에 복수와 더불어 양수를 들여놓았던 그 본래의 언어들은 아마도 유비에 따라 동사의 활용에서도 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모든 본래의 언어에서 우리는 동사 하나하나의 어미에, 그것이 가리키는 사건이 일인칭이나 이인칭이나 삼인칭의 단수나 양수나 복수에 관하여 단언되려는가에 따라 적어도 여섯, 어쩌면 여덟이나 아홉 가지 변화가 있음을 볼 것으로 기대할 만하다. 이 변화가 또 다른 변화와 더불어 그 모든 서로 다른 시제와 법과 태를 두루 되풀이되었으니, 그것이 활용을 격 변화보다 더욱 얽히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었을 수밖에 없다.
여러 민족이 서로 섞이는 데서 비롯한 여러 언어의 뒤섞임으로 언어가 그 짜임에서 더 복잡해지지 않았더라면, 언어는 아마 어느 나라에서나 이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고 그 격 변화와 활용이 더 단순해지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언어가 어릴 때 그것을 배운 이들만이 말하는 것이었던 동안에는 그 격 변화와 활용이 얽혀 있어도 큰 곤란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을 말할 일이 있던 이들의 훨씬 많은 부분은 삶의 아주 이른 시기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느린 걸음으로 그것을 익혔으므로 그 어려움을 알아차린 일조차 거의 없었다. 그러나 두 민족이 정복이나 이주로 서로 섞이게 되었을 때에는 사정이 아주 달랐을 것이다. 두 민족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나누어야 하는 상대에게 자기 말을 알아듣게 하려고 저마다 상대의 언어를 배워야 했다. 또 새 언어를 배우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 밑바탕과 으뜸 원리로 되올라가 재주 있게 배우지 않고 귀로 들은 대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데서 흔히 들은 대로 배우므로 그 격 변화와 활용이 얽혀 있는 데 지극히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을 언어가 내줄 수 있는 어떤 수단으로든 메우려 애썼을 것이다. 격 변화를 모르는 것은 자연히 전치사를 써서 메웠다. 라틴어를 말해 보려는 롬바르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로마의 시민이라거나 로마에 은혜를 베푼 이라는 것을 나타내려 할 때 Roma라는 낱말의 속격과 여격을 마침 알지 못한다면, 그는 자연히 주격 앞에 ad와 de라는 전치사를 붙여 Romæ 대신 ad Roma, de Roma라 말했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이탈리아인, 곧 옛 롬바르드인과 로마인의 후손은 이 관계와 그 밖의 비슷한 모든 관계를 al Roma, di Roma로 나타낸다. 이렇게 하여 전치사가 옛 격 변화의 자리에 들어온 듯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터키인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한 뒤로 그리스어에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낱말은 얼마간 예전과 같으나 문법은 아주 잃어버렸고, 옛 격 변화의 자리에 전치사가 들어왔다. 이 변화는 밑바탕과 원리의 점에서 언어가 단순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아주 여러 가지 격 변화 대신 하나의 두루 쓰이는 격 변화를 들여오는데, 그것은 어떤 성이든 수든 어미든 모든 낱말에서 같다.
그와 비슷한 방편이 위에 말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활용의 얽힌 모습을 거의 다 떨어 버리게 해 준다. 어느 언어에나 존재 동사12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사가 하나 있으니, 라틴어에서는 sum이고 영어에서는 I am이다. 이 동사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음을 가리키지 않고 있음 자체를 일반적으로 가리킨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모든 동사 가운데 가장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따라서 결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낱말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지게 된 뒤로는 다른 어떤 동사와 마찬가지로 온갖 시제와 법을 지녔으므로, 수동 분사와 어우러져 수동태 전체의 자리를 채워 줄 수 있었고 활용의 이 부분을 전치사가 격 변화를 그렇게 만든 것처럼 단순하고 고르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I am loved(나는 사랑받는다)라 말하고 싶으나 amor라는 낱말을 떠올릴 수 없었던 롬바르드 사람은 ego sum amatus라고 말하여 자기가 모르는 것을 자연히 메우려 애썼다. 위에 말한 영어 어구에 맞갖은 이탈리아어 표현이 오늘날의 Io sono amato다.
같은 길로 모든 언어에 두루 흐르며 소유 동사라는 이름으로 갈라 불리는 또 하나의 동사가 있으니, 라틴어에서는 habeo이고 영어에서는 I have다. 이 동사 또한 지극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질의 사건을 가리키므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낱말이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지게 된 뒤로는 수동 분사에 붙여 씀으로써, 존재 동사가 수동태 전체를 채워 준 것처럼 능동태의 많은 부분을 채워 줄 수 있었다. I had loved(나는 사랑했었다)라 말하고 싶으나 amaveram이라는 낱말을 떠올릴 수 없었던 롬바르드 사람은 ego habebam amatum이나 ego habui amatum이라 말하여 그 자리를 메우려 애썼을 것이다. 오늘날 그에 맞갖은 이탈리아어 표현이 Io avevá amato 또는 Io ebbi amato다. 이렇게 하여 여러 민족이 서로 뒤섞이면서 활용은 여러 조동사의 힘으로 격 변화의 단순함과 고름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격언을 세울 수 있겠다. 어떤 언어든 그 짜임이 더 단순할수록 그 격 변화와 활용은 더 복잡할 수밖에 없고, 거꾸로 그 격 변화와 활용이 더 단순할수록 그 짜임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어는 얼마간 단순하고 뒤섞이지 않은 언어로 보이며, 그리스 민족이 거기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저 떠돌이 미개인, 곧 옛 헬레니아인과 펠라스고이인13의 원시의 어설픈 말에서 이루어진 언어로 보인다. 그리스어의 모든 낱말은 삼백쯤의 뿌리 낱말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그리스인이 자기 언어를 거의 전적으로 자기들 사이에서 이루었으며 새 낱말이 필요할 때 우리처럼 어떤 외국어에서 빌려 오는 데 익지 않고 자기 언어의 다른 어떤 낱말에서 합치거나 갈라내어 만드는 데 익어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다. 그러므로 그리스어의 격 변화와 활용은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유럽 언어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라틴어는 그리스어와 옛 토스카나어14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격 변화와 활용은 그리스어의 것보다 훨씬 덜 복잡하니, 둘 다에서 양수를 떨어 버렸다. 그 동사에는 남다른 어미로 갈라지는 기원법이 없다. 미래는 하나뿐이다. 완료과거와 구별되는 부정과거가 없고 중간태가 없으며, 수동태의 시제 가운데 많은 것조차 현대 언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동 분사에 붙은 존재 동사의 도움으로 이어 붙여진다. 두 태 모두에서 부정사와 분사의 수는 라틴어가 그리스어보다 훨씬 적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는 저마다 뒤섞여 이루어진 언어로, 하나는 라틴어와 옛 프랑크인의 언어가, 다른 하나는 같은 라틴어와 옛 롬바르드인의 언어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둘은 다 라틴어보다 그 짜임이 더 복잡한 만큼 그 격 변화와 활용에서는 더 단순하다. 격 변화를 보면 둘 다 격을 아주 잃어버렸고, 활용을 보면 둘 다 동사의 수동태 전체와 능동태의 얼마간을 잃어버렸다. 수동태가 없는 것은 수동 분사에 붙은 존재 동사로 온전히 메우고, 능동태의 얼마간도 같은 길로 소유 동사와 그 같은 수동 분사의 도움으로 채워 낸다.
영어는 프랑스어와 옛 색슨어가 합쳐진 것이다. 프랑스어는 노르만인의 정복으로 브리튼에 들어와 에드워드 3세15 때까지 법의 유일한 언어이자 궁정의 으뜸 언어였다. 그 뒤에 말해지게 되고 이제도 말해지고 있는 영어는 옛 색슨어와 이 노르만 프랑스어가 섞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어는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보다 그 짜임이 더 복잡한 만큼 그 격 변화와 활용에서는 더 단순하다. 그 두 언어는 적어도 성의 구별을 얼마간 지니고 있으며, 그 형용사는 남성 명사에 붙는가 여성 명사에 붙는가에 따라 어미를 바꾼다. 그러나 영어에는 그런 구별이 없고 그 형용사는 어미의 어떤 변화도 받지 않는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는 둘 다 활용의 남은 자취를 지니고 있어, 수동 분사에 붙은 소유 동사로 나타낼 수 없는 능동태의 모든 시제와 또 그렇게 나타낼 수 있는 시제의 많은 것까지 그 언어에서는 으뜸 동사의 어미를 바꾸어 표시된다. 그러나 그 밖의 시제는 영어에서 거의 다 다른 조동사로 이어 붙여지므로 이 언어에는 활용의 자취조차 거의 없다. I love, I loved, loving이 영어 동사의 대부분이 받는 어미 변화의 전부다. 이 세 어미로 나타낼 수 없는 뜻의 온갖 변형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 붙은 서로 다른 조동사로 채워 내야 한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의 활용에 모자란 것은 조동사 둘이 다 채워 주지만, 영어의 모자란 것을 채우는 데에는 여섯을 넘는 조동사가 드니, 영어는 존재 동사와 소유 동사 말고도 do, did와 will, would와 shall, should와 can, could와 may, might를 쓴다.
이렇게 하여 언어는 그 짜임이 더 복잡해지는 것에 정확히 견주어 그 밑바탕과 원리에서 더 단순해지며, 기계 장치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언어에서도 일어났다. 모든 기계는 처음 만들어질 때 대개 그 원리에서 지극히 복잡하며, 그것이 해내야 할 낱낱의 움직임마다 흔히 따로 하나씩 움직임의 원리가 있다. 뒤이어 손을 보는 이들은 하나의 원리를 잘 쓰면 그 움직임 가운데 여럿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눈여겨보며, 그리하여 기계는 차츰 더 단순해지고 더 적은 바퀴와 더 적은 움직임의 원리로 그 효과를 낸다. 언어에서도 이와 같이 명사 하나하나의 격 하나하나와 동사 하나하나의 시제 하나하나가 본디 이 목적에만 쓰이고 다른 데에는 쓰이지 않는 특정한 낱말로 나타내어졌다. 그러나 뒤이은 살핌이 한 무리의 낱말이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낱말 전부의 자리를 채워 줄 수 있음을, 또 네다섯 개의 전치사와 여섯 개의 조동사가 고대 언어의 모든 격 변화와 모든 활용이 하던 일을 다 해낼 수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언어가 이렇게 단순해지는 일은 아마도 비슷한 원인에서 비롯하기는 하되, 그에 맞갖은 기계의 단순해짐과 결코 비슷한 결과를 내지 않는다. 기계가 단순해지는 것은 기계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지만, 언어의 밑바탕이 이렇게 단순해지는 것은 언어를 더욱 불완전하게, 언어가 해야 할 여러 일에 덜 알맞게 만든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언어는 이렇게 단순해짐으로써 더 늘어지게 되는데, 전에는 하나의 낱말로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데 여러 낱말이 있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라틴어의 Dei와 Deo라는 낱말은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도 그것이 뜻하는 대상이 문장 안의 다른 낱말이 나타내는 대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는지를 넉넉히 보여 준다. 그러나 영어와 다른 모든 현대 언어에서 같은 관계를 나타내려면 우리는 적어도 두 낱말을 써서 of God(신의), to God(신께)이라 해야 한다. 그러므로 격 변화에 관한 한 현대 언어는 고대 언어보다 훨씬 늘어진다. 활용에서는 그 차이가 더욱 크다. 로마인이 amavissem이라는 한 낱말로 나타낸 것을 영국인은 I should have loved(나는 사랑했을 것이다)라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낱말로 나타내야 한다. 이 늘어짐이 모든 현대 언어의 웅변을 얼마나 힘 빠지게 만들 수밖에 없는지를 애써 보일 필요는 없다. 어떤 표현의 아름다움이 그 간결함에 얼마나 많이 달려 있는지는 글짓기를 겪어 본 이들이라면 잘 알고 있다.
둘째로 언어의 원리가 이렇게 단순해지는 것은 언어를 귀에 덜 맞갖게 만든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격 변화와 활용으로 생긴 어미의 여러 가지는 우리 영어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감미로움을, 또 다른 어떤 현대 언어도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를 그 언어에 준다. 감미로움의 점에서는 이탈리아어가 아마 라틴어를 넘어서고 그리스어에 거의 맞먹을지 모르나, 여러 가지의 점에서는 둘보다 크게 못하다.
셋째로 이렇게 단순해지는 것은 우리 영어의 소리를 귀에 덜 맞갖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가 지닌 소리를 가장 맞갖은 자리에 놓는 것조차 막는다. 그것은 많은 낱말을 특정한 자리에 붙들어 매는데, 그 낱말은 흔히 다른 자리에 놓으면 훨씬 아름다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는 형용사와 명사가 서로 떨어져 있어도 그 어미가 서로 맞갖음을 보여 주어 둘이 서로를 가리킨다는 것을 드러냈으므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반드시 어떤 갈래의 헷갈림을 낳지는 않았다. 이렇게 베르길리우스16의 첫 행을 보자.
Tityre tu patulæ recubans sub tegmine fagi.17
tu가 recubans를 가리키고 patulæ가 fagi를 가리킴을 우리는 쉽게 알아보는데, 그 관계된 낱말들이 여러 다른 낱말이 끼어들어 서로 떨어져 있음에도 그러하다. 어미가 그 격이 서로 맞갖음을 보여 주어 둘이 서로를 가리킨다는 것을 정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행을 영어로 낱말 그대로 옮겨 Tityrus, thou of spreading reclining under the shade beech라 한다면 오이디푸스18라 해도 그 뜻을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어느 형용사가 어느 명사에 딸리는지를 정해 줄 어미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동사에서도 사정은 같다. 라틴어에서 동사는 불편이나 두 가지 뜻으로 읽힐 여지 없이 흔히 문장의 어느 자리에나 놓일 수 있다. 그러나 영어에서 그 자리는 거의 언제나 정확히 정해져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동사는 어구의 주어 부분을 뒤따르고 목적어 부분 앞에 와야 한다. 이렇게 라틴어에서는 Joannem verberavit Robertus라 하든 Robertus verberavit Joannem이라 하든 뜻은 고스란히 같으며, 어미가 두 경우 모두에서 요한네스를 당하는 쪽으로 정해 준다. 그러나 영어에서 John beat Robert(요한이 로버트를 때렸다)와 Robert beat John(로버트가 요한을 때렸다)은 결코 같은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구의 세 으뜸 부분의 자리는 영어에서, 또 같은 까닭으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서 거의 언제나 정확히 정해져 있으나, 고대 언어에서는 더 큰 자유가 허락되어 그 부분의 자리가 흔히 얼마간 대수롭지 않다. 밀턴이 낱말 그대로 옮긴 것의 어떤 부분은 호라티우스19에게 되돌아가야 풀이할 수 있다.
Who now enjoys thee credulous all gold,
Who always vacant, always amiable
Hopes thee; of flattering gales
Unmindful.20
이것은 우리 영어의 어떤 규칙으로도 풀이할 수 없는 시행이다. 우리 영어에는 첫 행의 credulous가 thee가 아니라 who를 가리킨다는 것, all gold가 무엇에 걸리기는 한다는 것, 넷째 행의 unmindful이 셋째 행의 thee가 아니라 둘째 행의 who를 가리킨다는 것, 거꾸로 둘째 행의 always vacant, always amiable이 같은 행에 있는 who가 아니라 셋째 행의 thee를 가리킨다는 것을 누구든 알아낼 수 있는 규칙이 없다. 그러나 라틴어에서는 참으로 이 모든 것이 넉넉히 뚜렷하다.
Qui nunc te fruitur credulus aureâ,
Qui semper vacuam, semper amabilem
Sperat te; nescius auræ fallacis.21
라틴어에서는 어미가 형용사 하나하나가 제 명사를 가리킴을 정해 주기 때문인데, 영어에서는 어떤 것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낱말의 순서를 뒤바꿀 수 있는 이 힘이 옛사람들의 글짓기를 운문에서나 산문에서나 얼마나 쉽게 해 주었을지는 좀처럼 떠올릴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의 시 짓기를 크게 쉽게 해 주었을 것임은 굳이 눈여겨볼 필요가 없다. 또 산문에서도 한 문장의 여러 부분을 배열하고 짜는 데 달린 아름다움이라면 무엇이든, 현대 언어의 늘어짐과 얽매임과 단조로움에 그 표현이 끊임없이 갇혀 있는 이들보다 그들에게 훨씬 쉽게, 또 훨씬 더 온전하게 얻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주
1. 옮긴이 —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기원전 356~323),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43), 뉴턴(Isaac Newton, 1642~1727).
2. 옮긴이 — antonomasia. 한 개체의 고유한 이름을 그와 닮은 여러 대상에 옮겨 쓰는 말투를 가리키는 수사학 용어다.
3.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제1부, 376~377쪽, 암스테르담판 『장자크 루소 잡저집』.
4. 옮긴이 —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제네바 태생의 저술가. 스미스가 가리키는 글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다.
5. 옮긴이 — 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성질을 그것이 딸린 주체와 함께 놓고 보는 것(in concreto)과 주체에서 떼어 내어 따로 보는 것(in abstracto)을 가른다.
6. 옮긴이 — 한국어에는 문법적 성이 없다. 짐승의 수컷과 암컷은 「수·암」 같은 접두사로, 사람의 성별은 따로 된 낱말로 나타내며 명사의 어미가 바뀌지 않는다.
7. 옮긴이 — 한국어는 격을 어미의 변화가 아니라 조사로 표시한다. 「나무의 열매」의 「의」와 「헤라클레스께」의 「께」가 라틴어의 속격·여격 어미가 맡는 자리를 맡는다.
8. 옮긴이 — 한국어에서 복수를 나타내는 「들」은 반드시 붙이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 왔다」는 하나에도 여럿에도 쓸 수 있다.
9. 옮긴이 — 양수(兩數)는 둘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별개의 수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남아 있다.
10. 옮긴이 — 무인칭 동사는 주어를 요구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건 전체를 나타내는 동사다. 한국어의 「비가 온다」는 「비」라는 주어를 세우지만 라틴어 pluit는 낱말 하나로 같은 일을 한다.
11. 오늘날 동사의 훨씬 많은 부분이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속성을 나타내며 따라서 그 뜻을 채우기 위하여 주어 곧 주격을 요구하므로, 자연의 이 나아감에 눈여겨보지 않고 자기들의 일반 규칙을 아주 두루 통하며 아무런 예외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 어떤 문법학자들은 모든 동사가 드러나 있든 숨어 있든 주격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리하여 여전히 온전한 사건을 나타내므로 주격을 뚜렷이 받지 않는 그 몇몇 동사에 억지스러운 주격을 찾아내려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예를 들어 pluit는 산크티우스에 따르면 pluvia pluit, 곧 영어로 the rain rains(비가 비를 내린다)를 뜻한다. 산크티우스의 『미네르바』 3권 1장을 보라.
12. 옮긴이 — 있음 자체를 나타내는 동사를 가리키는 당대 문법 용어(substantive verb)로, 라틴어 sum과 영어 be가 이에 든다.
13. 옮긴이 — 헬레니아인과 펠라스고이인. 그리스인보다 앞서 그 땅에 살았다고 고대 저술가들이 전한 종족의 이름이다.
14. 옮긴이 — 라틴어보다 먼저 이탈리아 중부에서 쓰인 말을 가리키는 당대 표현으로, 오늘날 에트루리아어라 부르는 말에 해당한다.
15. 옮긴이 —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1377). 잉글랜드 왕으로 1327년부터 137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16. 옮긴이 — 베르길리우스(Virgil, 기원전 70~19). 로마의 시인. 인용된 행은 『목가』 제1가의 첫 행이다.
17. 옮긴이 — 「티티루스여, 너는 넓게 퍼진 너도밤나무 그늘 아래 누워」라는 뜻이다. tu(너는)는 recubans(누워)와 짝을 이루고, patulæ(넓게 퍼진)는 fagi(너도밤나무의)와 짝을 이룬다.
18. 옮긴이 — 오이디푸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19. 옮긴이 — 호라티우스(Horace, 기원전 65~8). 로마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그 『송가』 1권 5가의 한 대목을 영어로 낱말 그대로 옮긴 것을 스미스가 인용하고 있다.
20. 옮긴이 — 「지금 너를 누리는 이는 곧이 믿어 네가 온통 황금인 줄 알고, 네가 언제나 비어 있고 언제나 사랑을 부르리라 바라며, 속이는 바람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영어만으로는 credulous가 who에 걸리는지 thee에 걸리는지 가려낼 길이 없다.
21. 옮긴이 — 호라티우스 『송가』 1권 5가의 9~11행. 라틴어에서는 credulus의 어미가 남성 주격이므로 qui에 걸리고, aureâ와 vacuam과 amabilem의 어미가 여성이므로 te에 걸림이 뚜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