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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2부 2편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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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편 정의와 선행에 대하여

1장 그 두 덕을 견줌

선을 베푸는 쪽으로 기울어 있고 적정한 동기에서 흘러나오는 행위만이 보상을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 행위만이 감사의 시인되는 대상이 되고, 또는 관찰자의 동감에서 비롯한 감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해로운 쪽으로 기울어 있고 적정하지 못한 동기에서 흘러나오는 행위만이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그런 행위만이 분개의 시인되는 대상이 되고, 또는 관찰자의 동감에서 비롯한 분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선행은 언제나 자유롭다. 그것은 힘으로 짜낼 수 없으며, 그저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벌도 받지 않는다. 선행의 단순한 결여는 실제로 있는 나쁜 것을 저지르는 쪽으로 기울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치로 보아 기대할 만하던 좋은 것을 어그러지게 할 수 있고, 그 점에서 싫어함과 부인을 올바르게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함께 갈 만한 어떤 분개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자기에게 그럴 힘이 있고 자기 은인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도 그 은인에게 갚지 않는 사람은 의심할 바 없이 가장 검은 배은망덕의 죄를 지은 것이다. 공평한 관찰자라면 누구나 그 가슴이 그의 동기에 깃든 이기심과 함께 느끼는 마음을 모두 내치며, 그는 가장 높은 정도의 부인의 적정한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누구에게도 실제로 있는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그는 적정성으로 보아 마땅히 해야 했을 그 좋은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미움의 대상이며, 미움은 감정과 몸가짐의 부적정성이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정념이다. 그는 분개의 대상은 아니며, 분개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있는 해를 끼치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행위 말고는 결코 적정하게 불러내어지지 않는 정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감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벌할 수 없다. 감사로 보아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리고 공평한 관찰자라면 누구나 그가 그 일을 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시인할 그 일을 힘으로 억지로 하게 만드는 것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가 그 일을 하기를 등진 것보다 오히려 더 적정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은인이 폭력으로 그에게 감사를 강요하려 든다면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이고, 둘 가운데 어느 쪽의 윗사람도 아닌 제3자가 그 일에 끼어드는 것은 분수를 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의 모든 의무 가운데 감사가 우리에게 권하는 의무는 이른바 완전하고 온전한 책무라는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우정이, 도량이, 자선이 누구나 시인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하도록 몰아가는 일은 그보다 한층 더 자유로우며, 감사의 의무보다도 한층 덜 힘으로 짜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감사의 빚을 말하지만 자선의 빚이나 도량의 빚은 말하지 않으며, 우정이 그저 존중일 뿐이고 좋은 보살핌에 대한 감사로 더 커지거나 얽히지 않았다면 우정의 빚조차 말하지 않는다.

분개는 자연이 우리에게 방어를 위하여, 오직 방어를 위하여서만 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의를 지키는 방패이며 죄 없음을 지켜 주는 보장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저질러지려 하는 해악을 물리치도록, 그리고 이미 저질러진 해악을 되받아 갚도록 우리를 몰아간다. 그리하여 가해자가 자기의 불의를 뉘우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같은 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같은 죄를 짓는 일에서 겁먹고 물러서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껴 두어야 하며, 그것이 다른 어떤 목적으로 쓰일 때에는 관찰자가 결코 그것과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나 선을 베푸는 덕이 그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이치로 보아 기대할 만하던 좋은 것을 우리에게서 어그러지게 할 수는 있으나, 우리가 자신을 방어할 계기를 가질 만한 어떤 해악도 저지르지 않고 저지르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또 하나의 덕이 있으니, 그것을 지키는 일은 우리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맡겨져 있지 않고, 그것은 힘으로 짜낼 수 있으며, 그것을 어기면 분개를 받고 따라서 벌을 받는다. 이 덕이 정의이다. 정의를 어기는 것은 해코지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부인되는 동기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있는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개의, 그리고 분개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벌의 적정한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불의로 저질러진 해를 앙갚음하기 위하여 쓰이는 폭력과 함께 가며 그것을 시인하듯이, 그 해코지를 미리 막고 물리치기 위하여, 그리고 가해자가 자기 이웃을 해치지 못하도록 억누르기 위하여 쓰이는 폭력과는 훨씬 더 함께 가며 그것을 시인한다. 불의를 꾸미는 사람 자신도 이것을 알고 있으며, 자기가 해치려는 사람에 의하여서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서도, 자기 범죄의 실행을 막기 위하여든 자기가 그것을 실행한 뒤에 벌하기 위하여든, 힘이 가장 온전한 적정성을 지니고 쓰일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정의와 다른 모든 사회적 덕 사이의 저 두드러진 구별이 이 위에 세워져 있다. 근래에 아주 크고 독창적인 재능을 지닌 한 저자1가 특별히 강조한 그 구별이란, 우리가 우정이나 자선이나 도량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느끼기보다 정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더 엄격한 책무 아래 놓여 있다고 느낀다는 것, 뒤에 든 이 덕들을 실천하는 일은 얼마쯤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맡겨져 있는 듯이 보이나 어찌 된 일인지 우리는 정의를 지키는 일에는 남다른 결로 매이고 묶이고 책무를 지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앞의 것의 규칙을 지키도록 우리를 억누르는 데에는 힘이 가장 온전한 적정성을 지니고 또 모든 사람의 시인을 받으며 쓰일 수 있으나 뒤의 것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데에는 그럴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탓할 만한 것, 곧 부인의 적정한 대상이 되는 것을, 벌하기 위해서든 미리 막기 위해서든 힘을 쓸 수 있는 것과 늘 조심스럽게 갈라 두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기대하도록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저 적정한 선행의 보통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탓할 만해 보이고, 반대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칭찬할 만해 보인다. 그 보통 정도 자체는 탓할 만하지도 칭찬할 만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에 대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흔히 하는 것보다 더 낫게도 더 못하게도 처신하지 않는 아버지나 아들이나 형제는, 적정하게 말하여 칭찬도 탓도 받아 마땅하지 않아 보인다. 남다르고 뜻밖이면서도 여전히 적정하고 알맞은 친절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람, 또는 반대로 남다르고 뜻밖이며 게다가 알맞지도 않은 매정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람은 앞의 경우에는 칭찬할 만해 보이고 뒤의 경우에는 탓할 만해 보인다.

그러나 친절이나 선행의 가장 보통되는 정도조차도 서로 대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힘으로 짜낼 수 없다. 대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각 개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시민 정부라는 제도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해코지로부터 자신을 지킬 권리와 자기에게 저질러진 해코지에 대하여 일정한 정도의 벌을 요구할 권리를 함께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도량이 큰 관찰자라면 누구나 그가 이렇게 할 때 그의 행동을 시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 흔히 그를 돕기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치거나 그의 것을 빼앗거나 그를 죽이려 들 때 이웃들은 모두 놀라 일어서며, 해를 입은 사람을 위하여 복수하러 달려가든 그런 처지에 놓일 위험에 빠진 사람을 지키러 달려가든, 자기들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버이의 정서를 보통 정도로도 보이지 못할 때,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기대할 만한 저 자식으로서의 경모가 결여된 것으로 보일 때, 형제들에게 형제로서의 정서가 보통 정도만큼도 없을 때, 어떤 사람이 연민에 자기 가슴을 닫아걸고 아주 손쉽게 할 수 있는데도 같은 피조물인 이웃의 비참함을 덜어 주기를 마다할 때, 이 모든 경우에 누구나 그 행동을 탓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더 큰 친절을 기대할 이치가 있었을 사람들이 그것을 힘으로 짜낼 권리를 조금이라도 지닌다고 상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당하는 쪽은 오직 한탄할 수 있을 뿐이고, 관찰자는 충고와 설득 말고는 다른 어떤 길로도 끼어들 수 없다. 그러한 모든 경우에 대등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힘을 쓰는 것은 가장 높은 정도의 오만이며 분수를 넘는 짓으로 여겨질 것이다.

과연 윗사람이라면 때로 누구나 시인하는 가운데, 자기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에서 서로에 대하여 일정한 정도의 적정성을 갖추어 처신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문명이 깨어난 모든 나라의 법은 어버이에게 자식을 부양하도록, 자식에게 어버이를 부양하도록 강제하며, 사람들에게 선행의 다른 여러 의무를 지운다. 시민 통치자는 불의를 억눌러2 공공의 평화를 지키는 권한만이 아니라, 좋은 규율을 세우고 온갖 악덕과 부적정성을 억제하여 나라의 번영을 밀어 주는 권한까지 맡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같은 시민끼리 서로 해코지하는 일을 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돕고 보살피는 일을 일정한 정도까지 명하는 규칙을 정할 수 있다. 주권자가 그저 대수롭지 않은 것, 그리고 그의 명령이 있기 전이라면 아무 탓 없이 빠뜨려도 되었을 것을 명할 때,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일은 탓할 만한 것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벌할 만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가 그런 명령이 있기 전이라 하더라도 가장 큰 탓 없이는 빠뜨릴 수 없었을 것을 명할 때, 복종이 결여되어 있는 일은 틀림없이 훨씬 더 벌할 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법을 만드는 사람의 모든 의무 가운데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적정성과 판단을 갖추어 수행하려면 가장 큰 섬세함과 조심스러움을 요구하는 의무일 것이다. 그것을 온통 등지는 것은 나라를 여러 거친 무질서와 사람을 뒤흔드는 극악한 짓에 내놓는 일이고, 그것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가는 것은 모든 자유와 안전과 정의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선행이 그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대등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벌도 받아 마땅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 덕을 더 크게 발휘하는 일은 가장 높은 보상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그것은 가장 큰 좋은 것을 낳는 까닭에 가장 생생한 감사의 자연스럽고도 시인되는 대상이 된다. 반대로 정의를 깨뜨리는 일은 벌을 받지만, 그 덕의 규칙을 지키는 일은 어떤 보상도 받아 마땅하다고 하기 어려워 보인다. 의심할 바 없이 정의를 실천하는 데에는 적정성이 있으며, 그 점에서 그것은 적정성에 돌아가야 할 시인을 모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있는 좋은 것을 해 주지는 않으므로 아주 적은 감사를 받을 자격밖에 없다. 정의만으로는 대부분의 경우 소극적인 덕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이웃을 해치는 일을 막아 줄 뿐이다. 이웃의 몸이나 재산이나 평판을 침해하는 일을 겨우 하지 않고 있을 뿐인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실제로 있는 공로가 아주 적다. 그렇더라도 그는 유달리 정의라고 불리는 것의 모든 규칙을 채우며, 그와 대등한 사람들이 적정성을 갖추어 그에게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일, 또는 하지 않았다고 벌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다. 우리는 흔히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정의의 모든 규칙을 채울 수 있다.

사람이 하는 대로 그에게도 그대로 행하여질 것이니, 되받아 갚음이야말로 자연이 우리에게 내려 준 큰 법으로 보인다. 선행과 도량은 도량이 크고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가슴이 인간애의 느낌에 결코 열리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같은 결로 같은 피조물인 이웃 모두의 정서에서 내쫓겨, 자기를 돌보아 줄 사람도 자기를 찾아 물어 줄 사람도 없는 넓은 사막에 있는 것처럼 사회 한가운데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정의의 법을 어긴 사람은 자기가 남에게 저지른 그 나쁜 것을 스스로 느끼게 만들어야 하며, 형제들의 괴로움에 대한 어떤 헤아림도 그를 억누를 수 없으므로 자기 자신의 괴로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를 눌러 두어야 한다. 겨우 죄 없기만 한 사람, 남에 대하여 정의의 법을 지키기만 하고 이웃을 해치는 일을 그저 하지 않고 있을 뿐인 사람은, 자기 이웃들이 이번에는 자기의 죄 없음을 존중해 주고 자기에 대하여도 같은 법이 경건하게 지켜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받아 마땅하지 않다.

2장 정의의 감각, 회한, 그리고 공로의 의식에 대하여

우리 이웃을 해칠 만한 적정한 동기란 있을 수 없고, 남에게 나쁜 것을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함께 갈 만한 것이란 그 남이 우리에게 저지른 나쁜 것에 대한 올바른 의분 말고는 있을 수 없다. 그의 행복이 우리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행복을 흩뜨리는 것, 그에게 실제로 요긴한 것이 우리에게도 그만큼 또는 더 요긴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것, 또는 이런 결로 남을 희생시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의 행복보다 자기 행복을 앞세우는 저 자연스러운 편애를 마음껏 풀어 놓는 것은, 어떤 공평한 관찰자도 함께 갈 수 없는 일이다. 의심할 바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성상 먼저 그리고 주로 자기 자신의 보살핌에 맡겨져 있으며, 그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에 더 알맞은 까닭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알맞고 옳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보다 자기 자신에게 곧바로 관계되는 일에 훨씬 더 깊이 이해가 걸려 있다. 그리고 우리와 별다른 연이 없는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일은 아마도 우리 자신에게 닥친 아주 하찮은 재난보다 우리에게 걱정을 덜 안기고, 우리의 입맛을 덜 망치고, 우리의 쉼을 훨씬 덜 깨뜨릴 것이다. 그러나 이웃이 파멸하는 일이 우리 자신의 아주 작은 불행보다 우리를 훨씬 덜 움직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작은 불행을 막기 위하여 그를 파멸시켜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도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비치는 그 빛에 따라서보다 남에게 자연스럽게 비치는 그 빛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속담대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는 온 세상일 수 있으나,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는 그 세상의 가장 하찮은 한 부분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이 그에게는 그 밖의 온 세상의 행복보다 더 중요할 수 있으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다른 어떤 사람의 행복보다 더 무게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자기 가슴 속에서는 온 인류보다 자기 자신을 자연스럽게 앞세운다는 것이 사실일지 몰라도,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보며 자기가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고 떳떳이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는 이 편애에서 그들이 자기와 결코 함께 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에게 아무리 자연스럽더라도 그들에게는 늘 지나치고 터무니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남들이 자기를 바라볼 것이라고 스스로 의식하는 그 빛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그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고 그 안의 다른 어떤 사람보다 어느 모로도 더 낫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다. 공평한 관찰자가 자기 행동의 원칙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행동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인데, 그는 이 경우에도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애심의 오만을 낮추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내려야 한다. 그들은 그가 다른 어떤 사람의 행복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더 걱정하고 더 간절한 부지런함으로 좇는 것까지는 너그럽게 받아 준다. 여기까지라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의 처지에 놓아 볼 때마다 선선히 그와 함께 갈 것이다. 재물과 명예와 출세를 놓고 벌이는 달리기에서 그는 겨루는 이들을 모두 앞지르려고 있는 힘껏 달리며 온 신경과 온 근육을 다 쏟아도 좋다. 그러나 그가 그들 가운데 누구를 밀치거나 넘어뜨린다면 관찰자들의 너그러움은 온통 끝이 난다. 그것은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정당한 겨룸의 침해이다. 이 사람은 그들에게 어느 모로 보나 그와 똑같이 훌륭하다. 그들은 그가 이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그토록 앞세우게 만드는 저 자애심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그가 그를 해치게 한 그 동기와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해를 입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분개에 선선히 동감하며, 가해자는 그들의 미움과 의분의 대상이 된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감정들이 사방에서 자기에게 터져 나오려 하고 있음을 느낀다.

저질러진 나쁜 것이 더 크고 더 돌이킬 수 없을수록 당하는 쪽의 분개가 자연스럽게 더 높이 치솟듯이, 관찰자의 동감에서 비롯한 의분도, 그리고 행위자 안의 죄의식도 마찬가지로 더 높이 치솟는다. 죽음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나쁜 것이며, 죽임을 당한 사람과 곧바로 연이 이어진 사람들에게 가장 높은 정도의 분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살인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서도 그것을 저지른 사람 자신의 눈으로 보아서도, 개인에게만 미치는 모든 죄 가운데 가장 잔학한 것이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는 일은 우리가 기대만 품고 있는 것을 어그러뜨리는 일보다 더 큰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가는 재산의 침해, 곧 절도와 강도는 우리가 기대하던 것을 어그러뜨리기만 하는 계약의 침해보다 더 큰 죄가 된다. 그러므로 정의의 가장 거룩한 법, 곧 그것을 어기는 일이 앙갚음과 벌을 가장 크게 부르는 듯이 보이는 법은 우리 이웃의 목숨과 몸을 지키는 법이다. 그다음은 그의 재산과 소유를 지키는 법이고, 맨 마지막에 오는 것은 이른바 그의 인적 권리, 곧 남들의 약속으로 그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지키는 법이다.

정의의 더 거룩한 법을 어긴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품을 수밖에 없는 감정을 돌이켜 볼 때마다 부끄러움과 끔찍함과 당혹의 고뇌를 모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정념이 채워지고 그가 자기 행동을 차갑게 돌이켜 보기 시작할 때, 그는 그 행동을 움직인 동기 가운데 어느 것 속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그 동기들은 이제 그에게도, 남들에게 늘 그러하였던 것과 똑같이 저주스럽게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품을 수밖에 없는 미움과 혐오에 동감함으로써, 그는 얼마쯤은 자기 자신의 미움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의 불의로 고통을 당한 사람의 처지는 이제 그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불러낸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며 비통해하고, 자기 행동이 낳은 불행한 결과를 애석해하며, 동시에 그 결과가 자기를 사람들의 분개와 의분의, 그리고 분개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앙갚음과 벌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음을 느낀다. 이 생각이 끊임없이 그를 떠나지 않으며 그를 무서움과 놀라움으로 가득 채운다. 그는 이제 사회의 얼굴을 마주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기가 말하자면 내쳐져 온 인류의 정서에서 쫓겨났다고 상상한다. 그는 자기의 이 가장 크고 가장 무서운 고통 속에서 동감의 위로를 바랄 수 없다. 그의 죄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같은 피조물인 이웃들의 가슴에서 그와 함께 느끼는 마음을 모두 닫아걸어 버렸다. 그들이 자기에 대하여 품는 감정이야말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다. 모든 것이 적대적으로 보이며, 그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않고 사람들의 낯빛에서 자기 죄에 대한 단죄를 읽지 않아도 될 어느 메마른 사막으로 달아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홀로 있음은 사람들 가운데 있음보다 한층 더 무섭다. 그 자신의 생각은 검고 불운하고 참담한 것, 곧 헤아릴 수 없는 비참과 파멸에 대한 서늘한 예감 말고는 아무것도 그에게 내놓지 못한다. 홀로 있음의 끔찍함이 그를 사람들 가운데로 되몰아, 그는 다시 사람들 앞에 나아가되, 그들 앞에 선다는 데 놀라고 부끄러움을 짐처럼 지고 두려움에 넋을 잃은 채, 자기를 이미 하나같이 단죄해 버렸음을 스스로 아는 바로 그 재판관들의 낯빛에서 얼마간의 보호나마 구걸하려고 나아간다. 적정하게 말하여 회한이라고 불리는 그 감정의 본성은 이러하며, 그것은 사람의 가슴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지난 행동의 부적정성에 대한 감각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그 행동이 낳은 결과에 대한 비통과, 그 행동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함과, 이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의 올바르게 도발된 분개를 의식하는 데서 오는 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와 맞선 몸가짐은 자연스럽게 그와 맞선 감정을 불어넣는다. 가벼운 변덕에서가 아니라 적정한 동기에서 도량이 큰 행위를 한 사람은, 자기가 이바지해 준 사람들을 앞으로 바라볼 때 자기 자신이 그들의 사랑과 감사의 자연스러운 대상이며 또 그들에 대한 동감을 통하여 온 인류의 존중과 시인의 자연스러운 대상임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가 행동한 그 동기를 뒤로 돌아 바라보며 이해관계 없는 관찰자가 그것을 살펴볼 그 빛으로 그것을 살펴볼 때, 그는 여전히 그 동기 속으로 들어가며, 이 가정된 공평한 재판관의 시인에 동감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갈채한다. 이 두 가지 보는 자리 모두에서 그 자신의 행동은 그에게 어느 모로 보나 마음에 맞아 보인다. 그것을 생각하매 그의 마음은 밝음과 고요함과 차분함으로 가득 찬다. 그는 온 인류와 벗이 되어 어울리며, 자기가 그들의 가장 호의로운 눈길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든든히 여기면서 같은 피조물인 이웃들을 자신감과 인애로운 만족으로 바라본다. 이 모든 감정이 어우러진 데에 공로의 의식, 곧 보상을 받아 마땅하다는 의식이 있다.

3장 이러한 자연의 짜임이 갖는 효용에 대하여

이렇게 하여, 오직 사회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그것을 위하여 지어진 그 처지에 자연이 맞추어 놓은 것이다. 사람의 사회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또한 서로 해코지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 필요한 도움이 사랑에서, 감사에서, 우정과 존중에서 서로에게 베풀어지는 곳에서 사회는 번영하고 행복하다. 그 서로 다른 모든 구성원은 사랑과 정서라는 반가운 끈으로 함께 묶이며, 말하자면 서로 돕고 보살피는 하나의 공통된 중심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그 필요한 도움이 그처럼 도량이 크고 사심 없는 동기에서 베풀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정서가 없다 하더라도, 그 사회는 덜 행복하고 덜 반갑기는 할지언정 반드시 허물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서로 다른 상인들 사이에서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어떤 사랑이나 정서 없이 그 효용에 대한 감각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의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어떤 책무를 지지 않고 감사로 묶여 있지 않더라도, 그 사회는 합의된 값에 따라 서로 보살핌을 돈으로 주고받는 일로도 버텨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언제든 서로를 해치고 해코지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어질 수 없다. 해코지가 시작되는 순간, 서로에 대한 분개와 적의가 자리를 잡는 순간, 사회의 모든 끈은 끊어져 갈라지고, 사회를 이루던 서로 다른 구성원들은 말하자면 서로 어긋나는 그들의 정서가 지닌 격렬함과 맞섬에 흩어져 사방으로 뿔뿔이 흩뿌려진다. 강도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무슨 사회가 있다면, 흔히 하는 말대로 그들은 적어도 서로를 털고 서로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존립하는3 데에 선행은 정의만큼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니다. 사회는 선행이 없어도, 가장 편안한 상태는 아닐지언정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불의가 널리 퍼지면 사회는 온통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자연은 보상을 받아 마땅하다는 즐거운 의식으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도록 권하기는 하나, 그것이 등져졌을 경우에 마땅한 벌이라는 무서움으로 그 실천을 지키고 강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여겼다. 선행은 건물을 꾸미는 장식이지 그것을 받치는 기초가 아니며, 그러므로 권하기만 하면 넉넉하였고 결코 억지로 지울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정의는 그 건물 전체를 받쳐 세우는 주된 기둥이다. 그것을 치워 버린다면, 사람의 사회라는 저 크고 어마어마한 구조물,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이 세상에서 그것을 일으켜 세우고 받치는 일이 자연의 남다르고 아끼는 보살핌이었던 듯이 보이는 그 구조물은 한순간에 가루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의를 지키게 하려고 자연은 사람의 가슴에, 약한 이를 지키고 난폭한 이를 억누르고 죄지은 이를 벌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을 지켜 주는 큰 방패로서,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저 의식, 그것을 어길 때 따라오는 마땅한 벌에 대한 저 무서움을 심어 놓았다. 사람은 본성상 동감할 줄 아는 존재이기는 하나, 자기와 별다른 연이 없는 남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느끼는 것에 견주면 너무나 적게 느끼고, 그저 같은 피조물일 뿐인 어떤 이의 비참함은 자기 자신의 작은 편의에 견주어서조차 그에게 너무나 적게 중요하며, 그를 해칠 힘은 그의 손에 너무나 많이 쥐어져 있고 그렇게 하도록 꼬드기는 것도 너무나 많을 수 있는 까닭에, 만일 이 원리가 그들 안에서 일어나 그를 지켜 주지 않고 그 죄 없음을 존중하도록 그들을 눌러 두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들짐승처럼 언제든 그에게 덤벼들 태세가 되어 있을 것이고, 사람은 사자굴에 들어가듯이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주의 어느 부분에서나 우리는 수단이 그것이 낳으려는 목적에 가장 섬세한 솜씨로 맞추어져 있음을 알아보며, 식물이나 동물의 몸이라는 기계 장치에서는 개체를 지탱하는 일과 종을 번식시키는 일이라는 자연의 두 큰 목적을 밀어 주기 위하여 모든 것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에 감탄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에서도, 그리고 그와 같은 모든 대상에서도 우리는 그 여러 움직임과 구조의 작용인과 목적인을 여전히 갈라 놓는다. 음식의 소화, 피의 돌기, 그리고 피에서 뽑아내어지는 여러 액의 분비는 모두 동물의 삶이 지닌 큰 목적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작용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 목적을 그 작용의 작용인으로 삼아 그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고, 피가 제 힘으로 돌거나 음식이 제 힘으로 소화된다고, 그것도 돌기나 소화라는 목적을 내다보거나 뜻하여 그렇게 한다고 상상하지도 않는다. 시계의 톱니바퀴는 모두 그 시계가 만들어진 목적, 곧 시각을 가리키는 일에 놀랄 만큼 잘 맞추어져 있다. 그 여러 가지 움직임은 모두 가장 섬세한 결로 어우러져 이 결과를 낳는다. 그것들에게 그 결과를 낳으려는 욕구와 의도가 주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욕구나 의도를 결코 톱니바퀴에 돌리지 않고 시계를 만든 사람에게 돌리며, 톱니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태엽임을, 그리고 그 태엽 역시 톱니바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낳는 결과를 조금도 뜻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물체의 작용을 설명할 때에는 이런 결로 작용인과 목적인을 가르는 일을 결코 빼놓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작용을 설명할 때에는 우리가 그 서로 다른 두 가지를 서로 뒤섞어 버리기 아주 쉽다. 가다듬어지고 깨어난 이성이라면 우리에게 권할 만한 목적을 우리가 자연스러운 원리에 이끌려 밀어 줄 때, 우리는 그 목적을 밀어 주게 하는 감정과 행동을 그 이성에 그 작용인으로서 돌리기 아주 쉽고, 실제로는 신의 지혜인 것을 사람의 지혜라고 상상하기 아주 쉽다. 얕게 보면 이 원인은 그것에 돌려지는 결과를 낳기에 넉넉해 보이며, 사람 본성의 체계도 그 서로 다른 모든 작용이 이런 결로 하나의 원리에서 끌어내어질 때 더 단순하고 더 그럴듯해 보인다.

정의의 법이 온전히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가 이어질 수 없듯이, 그리고 서로 해코지하는 일을 대체로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면 사회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듯이, 이 없어서는 안 됨을 헤아리는 일이 곧 우리가 정의의 법을 어긴 자들을 벌하여 그 법을 강제하는 일을 시인하는 바탕이라고 여겨져 왔다. 사람은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본성으로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의 결합이 그 자체를 위하여 지켜지기를 바라며, 그 결합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이로움도 얻지 못할 경우에도 그러하다고 말하여져 왔다. 사회가 질서 있고 번영하는 상태는 그의 마음에 맞으며,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얻는다. 반대로 사회의 무질서와 어지러움은 그가 꺼리는 대상이며, 그는 그것을 낳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에나 속이 상한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이해가 사회의 번영과 이어져 있으며, 자기 존재의 행복과 어쩌면 그 보존까지도 사회의 보존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점으로 보나 그는 사회를 무너뜨릴 쪽으로 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에나 혐오를 품으며, 그토록 미운, 그토록 무서운 일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쓴다. 불의는 반드시 사회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러므로 불의가 드러날 때마다 그는 놀라 일어서며,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대로 나아가도록 내버려 두면 자기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이내 끝장낼 그것의 걸음을 멈추게 하려고 달려간다. 부드럽고 정당한 수단으로 그것을 억누를 수 없다면 그는 힘과 폭력으로 그것을 눌러 내려야 하며, 어떻게든 그것이 더 나아가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정의의 법을 어긴 자들을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여 그 법을 강제하는 일을 흔히 시인하게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로써 공공의 평화를 흩뜨리는 자는 이 세상에서 치워지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운명에 겁먹어 그의 본을 따르는 일에서 물러선다.

불의에 대한 벌을 우리가 시인하는 일을 두고 흔히 주어지는 설명은 이러하다. 그리고 이 설명은, 우리가 벌의 적정성과 알맞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각을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데 그것이 얼마나 없어서는 안 되는지를 돌이켜 봄으로써 굳히는 계기를 자주 갖는다는 정도까지는 의심할 바 없이 참이다. 죄지은 사람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의분이 그의 죄에 돌아가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는 저 올바른 되받아 갚음을 곧 당하려 할 때, 그의 불의가 지녔던 오만이 다가오는 벌의 무서움에 꺾이고 낮추어질 때, 그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게 될 때, 도량이 크고 인간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그가 곧 당할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가 계기를 만들어 준 남들의 괴로움에 대한 그들의 분개가 꺼져 버린다. 그들은 그를 너그럽게 보아 주고 용서하려 하며, 차분한 때에는 늘 그런 죄에 돌아가야 할 응보로 여겼던 그 벌에서 그를 건져 주려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들은 사회의 일반적 이해에 대한 헤아림을 자기를 돕도록 불러들이는 계기를 갖는다. 그들은 이 약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인간애의 충동을 더 도량이 크고 더 넓게 감싸는 인간애의 명령으로 맞받아 누른다. 죄지은 자에 대한 자비가 죄 없는 이에 대한 잔혹이라는 것을 그들은 돌이켜 보며,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느끼는 연민의 감정에 온 인류에 대하여 느끼는 한결 넓어진 연민을 맞세운다.

때로 우리는 정의의 일반 규칙을 지키는 일의 적정성을, 그 규칙이 사회를 받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는 헤아림으로 옹호하는 계기를 갖기도 한다. 우리는 젊고 방종한 자들이 도덕의 가장 거룩한 규칙을 비웃으며, 때로는 마음이 썩어서, 그러나 더 자주는 마음이 허영에 들떠서 가장 혐오스러운 처신의 격언을 떳떳이 내세우는 것을 자주 듣는다. 우리의 의분이 일어서고, 우리는 그처럼 저주스러운 원칙을 논박하여 드러내려고 앞선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를 그 원칙에 맞서 불붙게 하는 것은 그것이 본래 밉고 저주스럽다는 사실인데도,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그것을 단죄하는 유일한 이유로 내세우기를, 또는 그저 우리 자신이 그것을 미워하고 저주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를 마다한다. 그 이유는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 미움과 저주의 자연스럽고 적정한 대상이기 때문이라면, 어찌하여 결정적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어찌하여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느냐는 물음을 받을 때, 그 물음 자체가 이미 그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 자체로 그러한 감정의 자연스럽고 적정한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다른 무엇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대체로 다른 논거를 이리저리 찾게 되며,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헤아림은 그런 짓이 두루 퍼지면 사회에 닥칠 무질서와 어지러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논제를 내세우는 일을 좀처럼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방종한 짓이 사회의 복리를 무너뜨리는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알아보는 데에는 흔히 큰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애초에 우리를 그 짓에 맞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이 헤아림인 경우는 드물다. 모든 사람은, 가장 미욱하고 생각 없는 사람까지도 속임과 배신과 불의를 혐오하며 그것이 벌받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사회가 존재하는 데 정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돌이켜 본 사람은 적으니, 그 없어서는 안 됨이 아무리 뻔해 보이더라도 그러하다.

개인에게 저질러진 죄를 벌하는 일에 애초에 우리의 이해가 걸리게 하는 것이 사회의 보존에 대한 헤아림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뻔한 헤아림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개인의 운수와 행복에 기울이는 걱정은 보통의 경우 우리가 사회의 운수와 행복에 기울이는 걱정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죽거나 없어지는 일을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사회의 구성원이나 한 부분이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사회가 무너지는 일을 걱정할 것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1기니4를 잃는 일을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그 1기니가 1000기니 가운데 한 부분이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그 돈 전부를 잃는 일을 걱정할 것이기 때문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경우에도 개별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헤아림이 여럿에 대한 우리의 헤아림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경우 모두에서 여럿에 대한 우리의 헤아림이야말로 그것을 이루는 서로 다른 개별적인 것 하나하나에 대하여 우리가 느끼는 낱낱의 헤아림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적은 돈을 불의하게 빼앗겼을 때 우리가 그 해코지를 법에 걸어 따지는 것이 우리의 재산 전부를 지키려는 헤아림에서라기보다 우리가 잃은 바로 그 돈에 대한 헤아림에서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해를 입거나 죽임을 당하였을 때 우리가 그에게 저질러진 잘못에 대한 벌을 요구하는 것도 사회의 일반적 이해에 대한 걱정에서라기보다 해를 입은 바로 그 개인에 대한 걱정에서이다. 그러나 다음을 알아 두어야 한다. 이 걱정이 반드시 그 안에, 흔히 사랑과 존중과 정서라고 불리며 우리가 그것으로 우리의 특별한 벗과 아는 사람을 가려내는 저 섬세한 감정을 어느 정도로든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하여 요구되는 걱정은 우리가 그저 그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품는 저 일반적인, 함께 느끼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밉살스러운 사람이라도 자기가 도발한 바 없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을 때에는 우리는 그의 분개 속으로도 들어간다. 이 경우 그의 평소 성격과 행동에 대한 우리의 부인이 그의 자연스러운 의분과 함께 느끼는 우리의 마음을 온통 막지는 못한다. 다만 몹시 열린 마음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 또는 자기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일반 규칙으로 바로잡고 다스리는 데 익숙해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부인이 그 마음을 아주 쉽게 가라앉혀 버린다.

과연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사회의 일반적 이해만을 내다보고 벌하기도 하고 벌을 시인하기도 하니, 그 이해가 달리는 지켜질 수 없다고 우리가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치안 행정5이나 군율을 깨뜨린 데 대하여 가해지는 벌은 모두 이런 종류이다. 그러한 죄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도 곧바로 또는 직접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멀리 가서 낳는 결과가 사회에 상당한 불편이나 큰 무질서를 실제로 낳거나 낳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초소에서 잠들어 버린 보초는 군법에 따라 죽음을 당하는데, 그런 소홀함이 군대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혹독함은 여러 경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일 수 있고, 그 이유로 올바르고 적정해 보일 수 있다. 한 개인을 지키는 일이 여럿의 안전과 맞설 때, 하나보다 여럿을 앞세우는 것보다 더 올바른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이 벌은 아무리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 하더라도 늘 지나치게 혹독해 보인다. 그 죄가 본래 지닌 잔학함은 너무나 작고 벌은 너무나 큰 까닭에, 우리의 가슴이 거기에 화해하기는 몹시 어렵다. 그런 소홀함이 몹시 탓할 만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죄를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그처럼 무서운 복수를 하도록 몰아갈 만한 분개를 자연스럽게 일으키지는 않는다. 인간애 있는 사람은 그 벌을 스스로 가하거나 남이 그것을 가할 때 그것과 함께 갈 수 있기까지,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고 애를 써야 하며 자기의 굳셈과 결단을 다 끌어내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은혜를 모르는 살인자나 어버이를 죽인 자에게 내리는 올바른 벌을 바라보는 결은 이와 같지 않다. 이 경우에 그의 가슴은 그처럼 저주스러운 죄에 돌아가야 할 듯이 보이는 올바른 되받아 갚음에 뜨겁게, 나아가 황홀해하며 갈채하고, 어떤 뜻하지 않은 일로 그 죄가 그 갚음을 벗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는 몹시 격노하고 낙담할 것이다. 관찰자가 그 서로 다른 벌을 바라보는 감정이 그토록 다르다는 것은, 그가 앞의 벌을 시인하는 일이 뒤의 벌을 시인하는 일과 같은 원리 위에 세워져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가 된다. 그는 보초를 불운한 희생으로 바라보며, 과연 그가 여럿의 안전에 바쳐질 수밖에 없고 또 바쳐져야 마땅하기는 하나 그렇더라도 자기 가슴으로는 그를 건져 주고 싶어 하며, 다만 여럿의 이해가 그것을 가로막는 것을 애석해할 뿐이다. 그러나 살인자가 벌을 벗어난다면 그것은 그의 가장 높은 의분을 일으킬 것이고, 그는 사람들의 불의가 이 땅에서 벌하기를 등진 그 죄를 저세상에서 앙갚음해 달라고 신을 부를 것이다.

다음은 마땅히 눈여겨볼 만하다. 우리는 달리는 지킬 수 없는 사회의 질서 때문에만 불의가 이 삶에서 벌받아야 한다고 상상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자연은 우리에게 불의가 오는 삶에서까지 벌받을 것이라고 바라도록 가르치고 종교는 우리가 그렇게 기대해도 된다고 우리에게 허락해 준다고 우리는 여긴다. 불의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우리의 감각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무덤 너머까지 그것을 따라간다. 저세상에서 벌받는 그 본보기가, 그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이곳에서 같은 짓을 저지르는 일을 막아 주지는 못하는데도 그러하다. 그렇더라도 신의 정의는, 이곳에서 그토록 자주 벌 없이 모욕당하는 과부와 아비 없는 아이가 입은 해코지를 신이 이 뒤에 앙갚음해 주기를 여전히 요구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신이 덕을 사랑하고 악덕을 미워하는 것이 쾌락을 좇는 사람이 재물을 사랑하고 가난을 미워하는 것과 같아서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낳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결과 때문이라는 것, 신이 앞의 것을 사랑하는 까닭은 오직 그것이 사회의 행복을 밀어 주기 때문이고 그 행복은 신의 인애가 그것을 바라도록 몰아가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신이 뒤의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오직 그것이 사람들의 비참함을 불러오기 때문이고 그 비참함은 같은 신적 성질이 그것을 신이 꺼리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 이는 배우지 않은 자연의 가르침이 아니라 이성과 철학이 사람의 손으로 가다듬어 낸 것의 가르침이다. 배우지 않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모두 다음과 같이 믿도록 우리를 몰아간다. 완전한 덕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듯 신에게도 그 자체를 위하여, 그리고 더 내다보는 것 없이 사랑과 보상의 자연스럽고 적정한 대상으로 반드시 보일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덕도 미움과 벌의 그러한 대상으로 반드시 보일 것이다. 신들은 분개하지도 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옛 철학의 서로 다른 모든 학파가 함께 지녔던 격언이었다. 그리고 분개한다는 말로 사람의 가슴을 흔히 넋 잃게 하고 어지럽히는 저 격렬하고 질서 없는 요동을 뜻한다면, 또는 해친다는 말로 적정성이나 정의를 헤아리지 않고 제멋대로 해악을 저지르는 일을 뜻한다면, 그런 약함은 의심할 바 없이 신의 완전함에 걸맞지 않다. 그러나 악덕이 신에게 그 자체를 위하여 혐오와 꺼림의 대상으로,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하여 벌받는 것이 알맞고 옳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이 격언이 참이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몇 가지 느낌에 어긋나는 듯하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에 물어보면, 우리는 신의 거룩함 앞에서 악덕이 벌받을 만해 보이는 정도가 사람의 덕이 지닌 약함과 불완전함이 보상받을 만해 보일 수 있는 정도보다 더 크지 않을까 두려워하기까지 쉽다. 사람이 끝없이 완전한 존재 앞에 나아가려 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의 공로나 자기 행동이 지닌 불완전한 적정성에 거의 자신감을 느낄 수 없다. 같은 피조물인 이웃 앞에서라면 그는 자기를 올바르게 높일 수도 있고, 그들의 한층 더 큰 불완전함에 견주어 자기 자신의 성격과 행동을 높이 여길 이치를 흔히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끝없는 창조자 앞에 나아가려 할 때에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그러한 존재에게는 자기의 작음과 약함이 존중의 적정한 대상으로도 보상의 적정한 대상으로도 좀처럼 보일 수 없으리라고 그는 두려워한다. 그러나 자기가 저지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무 위반이 어떻게 자기를 꺼림과 벌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 것인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고 스스로 상상하는 저 비천한 벌레 같은 것에 신의 의분이 아무 거리낌 없이 풀려 내리지 않을 이유를 자기로서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행복을 바라려 한다면 그것을 신의 정의에게 요구할 수는 없고 신의 자비에게 애원해야 한다고 그는 짐작한다. 그러한 까닭에 지난 행동을 생각하며 품는 뉘우침과 슬픔과 낮춤과 통회가 그에게 어울리는 감정으로 보이며, 자기가 올바르게 도발하였음을 스스로 아는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는 이 모든 것의 효험조차 믿지 못하며, 신의 지혜가 사람의 약함과는 달라서 죄지은 자의 가장 끈질긴 애통으로도 그 죄를 용서하도록 움직여지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두려워한다. 신의 정의가 지닌 깨끗함이 자기의 여러 갈래 잘못과 화해할 수 있기까지는,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다른 어떤 중재, 다른 어떤 희생, 다른 어떤 속죄가 자기를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는 상상한다. 계시의 가르침은 어느 모로 보나 자연이 미리 내다본 그 본래의 것과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우리 자신의 덕이 지닌 불완전함에 우리가 얼마나 적게 기댈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한편, 동시에 가장 힘 있는 중재가 이루어졌고 우리의 여러 갈래 어그러짐과 불의를 위하여 가장 무서운 속죄가 치러졌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주

  1. 1. 옮긴이 — 스미스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오늘날 주석자들은 대개 헨리 홈, 곧 케임스 경(1696~1782)의 『도덕과 자연종교의 원리에 관한 논고』(1751)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2. 2. 옮긴이 — 저본에는 이 자리가 retraining 으로 인쇄되어 있다. restraining(억누르는)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

  3. 3. 옮긴이 — 저본에는 이 자리가 exigence 로 인쇄되어 있다. 바로 다음 문장이 「사회는 선행이 없어도 이어질 수 있다」이므로 existence(존립)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

  4. 4. 옮긴이 — 기니(guinea)는 당시 영국의 금화로 21실링, 곧 1파운드 1실링에 해당하였다.

  5. 5. 옮긴이 — 원문은 civil police 이다. 18세기 영어의 police 는 오늘날의 경찰 조직이 아니라 도시의 질서와 위생, 물가, 도로 따위를 다스리는 시민 행정 전반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