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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2부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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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편 공로와 과오에 대하여 / 공로와 과오의 감각에 대하여

머리말

사람의 행위와 행동에는 그 적정성이나 부적정성, 온당함이나 꼴사나움과는 구별되는 또 한 벌의 성질이 돌려지며, 이 성질들은 그와는 별개인 종류의 시인과 부인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곧 공로와 과오, 다시 말해 보상을 받아 마땅한 성질과 벌을 받아 마땅한 성질이다.

어떤 행위든 거기에서 흘러나오고 그 행위의 덕과 악덕 전체가 거기에 달려 있는 가슴의 감정 또는 정서는 서로 다른 두 국면에서, 곧 서로 다른 두 관계 아래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첫째는 그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 또는 대상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그 정서가 내세우는 목적 또는 그것이 낳으려 하는 결과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 정서가 자기를 일으킨 원인 또는 대상에 대하여 지니는 것으로 보이는 알맞음이나 알맞지 않음, 곧 비례나 불비례에 뒤이어 나오는 행위의 적정성이나 부적정성, 온당함이나 꼴사나움이 달려 있고, 그 정서가 내세우거나 낳으려 하는 이로운 결과나 해로운 결과에 그 정서가 계기를 만들어 준 행위의 공로나 과오, 곧 그 행위가 상을 받아 마땅한지 벌을 받아 마땅한지가 달려 있다는 것도 이미 말하였다. 행위의 적정성과 부적정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무엇에 있는지는 이 논의의 앞부분에서 밝혔다. 이제 우리는 행위가 상을 받아 마땅한지 벌을 받아 마땅한지에 대한 그 감각이 무엇에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장 감사의 적정한 대상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보상을 받아 마땅해 보이고, 마찬가지로 분개의 적정한 대상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상을 받아 마땅해 보이는 행위란, 우리로 하여금 남에게 보상하도록, 곧 남에게 좋은 것을 해 주도록 가장 곧바로 그리고 직접 몰아가는 그 감정의 적정하고도 시인되는 대상으로 보이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이는 행위란, 우리로 하여금 남을 벌하도록, 곧 남에게 나쁜 것을 가하도록 가장 곧바로 그리고 직접 몰아가는 그 감정의 적정하고도 시인되는 대상으로 보이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1.

우리로 하여금 보상하도록 가장 곧바로 그리고 직접 몰아가는 감정은 감사이며, 우리로 하여금 벌하도록 가장 곧바로 그리고 직접 몰아가는 감정은 분개이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는 감사의 적정하고도 시인되는 대상으로 보이는 행위가 보상을 받아 마땅해 보일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 분개의 적정하고도 시인되는 대상으로 보이는 행위가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일 수밖에 없다.

보상한다는 것은 갚는 일이고 되돌려 주는 일이며, 받은 좋은 것에 좋은 것으로 되돌려 주는 일이다. 벌한다는 것도 역시 갚는 일이고 되돌려 주는 일이니, 다만 그 갚음의 결이 다를 뿐이다. 그것은 저질러진 나쁜 것에 나쁜 것으로 되돌려 주는 일이다.

감사와 분개 말고도 남의 행복이나 불행에 우리의 이해가 걸리게 하는 정념이 몇 가지 더 있으나,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의 도구가 되라고 우리를 그토록 직접 밀어붙이는 정념은 없다. 서로 알고 지내는 가운데, 그리고 늘 되풀이되는 시인 위에서 자라나는 사랑과 존중은 그처럼 흐뭇한 감정의 대상이 된 사람의 좋은 운수를 반가워하게 만들고, 따라서 그 운수를 밀어 주는 데 선선히 손을 보태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의 좋은 운수가 우리의 도움 없이 이루어져도 넉넉히 채워진다. 이 정념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가 행복한 모습을 보는 일뿐이며, 그 번영을 지은 이가 누구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감사는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큰 신세를 진 사람이 우리의 도움 없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기쁘게 하기는 하나 우리의 감사를 흡족하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그에게 갚기까지, 우리 자신이 그의 행복을 밀어 주는 도구가 되기까지, 우리는 그가 지난날 베풀어 준 것이 우리에게 지워 놓은 그 빚을 여전히 짊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마찬가지로, 늘 되풀이되는 부인 위에서 자라나는 미움과 싫어함은 그처럼 괴로운 정념을 일으키는 행동과 성격을 지닌 사람의 불행에서 짓궂은 즐거움을 얻게 하는 일이 잦다. 그러나 싫어함과 미움이 우리를 굳어지게 하여 어떠한 동감도 들지 못하게 하고 때로는 남의 곤경을 반가워하도록 몰아가기까지 하더라도, 그 일에 분개가 섞여 있지 않다면, 곧 우리도 우리의 벗도 개인적으로 크게 도발을 받은 바가 없다면, 이 정념들은 우리가 그 불행을 불러오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도록 자연스럽게 이끌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 일에 손을 댔다고 해서 어떤 벌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일이 다른 손으로 일어나 주기를 바랄 것이다. 격렬한 미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자기가 몹시 싫어하고 혐오하던 자가 어떤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아마도 반갑게 들릴 법하다. 그러나 그에게 정의의 불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이 정념이 덕에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으나 그 불씨만은 남아 있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이, 그럴 뜻이 없었다 해도, 그 불행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를 견딜 수 없이 아프게 할 것이다. 제 발로 나서서 그 불행을 도왔다는 생각이라면 더더욱 그를 한없이 뒤흔들어 놓으리라. 그는 그처럼 저주스러운 속셈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일조차 끔찍하다며 물리칠 것이며, 자기가 그만한 극악한 짓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면, 자기가 싫어하던 그 사람을 보던 것과 똑같이 밉살스러운 빛으로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분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에게 큰 해를 입힌 사람, 예컨대 우리의 아버지나 형제를 죽인 사람이 얼마 뒤에 열병으로 죽거나 다른 죄로 처형대에 오른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미움은 달래질지 몰라도 우리의 분개는 온전히 흡족해지지 않는다. 분개는 그가 벌을 받기를 바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로 우리의 손으로,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입힌 바로 그 해 때문에 벌받기를 바라게 한다. 분개는 가해자가 이번에는 자기가 슬퍼하게 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서 당한 바로 그 잘못 때문에 슬퍼하게 되지 않는 한 온전히 흡족해지지 못한다. 그는 바로 그 행위를 뉘우치고 애석해하게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같은 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같은 죄를 짓는 일에서 겁먹고 물러서게 되어야 한다. 이 정념이 자연스럽게 흡족해지는 길은 그 자체로 형벌의 정치적 목적 전체, 곧 범죄자의 교정과 공중에 대한 경계를 낳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감사와 분개는 보상과 벌로 가장 곧바로 그리고 직접 몰아가는 감정이다. 따라서 우리 눈에는 감사의 적정하고도 시인되는 대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보상을 받아 마땅해 보이고, 분개의 그러한 대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일 수밖에 없다.

2장 감사와 분개의 적정한 대상에 대하여

감사나 분개의 적정하고도 시인되는 대상이 된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적정해 보이고 또 시인되는 그 감사와 그 분개의 대상이 된다는 뜻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정념도 사람 본성의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공평한 관찰자라면 누구나 그 가슴이 그 정념에 온전히 동감할 때, 이해관계 없이 곁에서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정념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 그것과 함께 갈 때 적정해 보이고 또 시인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에게, 사람의 가슴이라면 누구나 박자를 맞추어 주고 그로써 갈채하게 되는 그런 감사의 자연스러운 대상이 되는 사람은 보상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같은 이치로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에게,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가슴이 선선히 받아들여 동감하게 되는 그런 분개의 자연스러운 대상이 되는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우리 눈에는, 그 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상하고 싶어 하고 따라서 보상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할 그런 행위가 틀림없이 보상을 받아 마땅해 보이고, 그 일을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여워하고 그 때문에 벌받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그런 행위가 그만큼 틀림없이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1. 우리가 잘되어 가는 벗들의 기쁨에 동감하듯이, 그들이 자기네 좋은 운수의 원인이 된 것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때 품는 흐뭇함과 만족에도 우리는 함께 어울린다. 그들이 그것에 대하여 품는 사랑과 정서 속으로 우리도 들어가서 그것을 우리도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없어진다면, 또는 그것이 그들에게서 너무 멀리 놓여 그들의 보살핌과 보호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 버린다면, 설령 그것이 사라져 그들이 잃는 것이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말고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애석해할 것이다. 형제들의 행복을 이루어 준 그 다행한 도구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람일 때에는 이 일이 한결 더 두드러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보호를 받고 구제를 받는 모습을 볼 때, 그 이로움을 받는 사람의 기쁨에 우리가 동감하는 것은 그가 베푼 사람에게 품는 감사와 함께 느끼는 마음을 북돋우는 구실만 한다. 그 즐거움의 원인이 된 사람을, 그가 틀림없이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우리가 상상하는 그 눈으로 바라볼 때, 그의 은인은 가장 마음을 끌고 사랑을 부르는 빛 속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그토록 큰 신세를 진 사람에게 품는 감사에 찬 정서에 선선히 동감하고, 따라서 그가 자기에게 베풀어진 호의에 갚으려 하는 바에 갈채한다. 그러한 갚음이 흘러나오는 그 정서 속으로 우리가 온전히 들어가는 까닭에, 그 갚음은 그 대상에 대하여 어느 모로 보나 적정하고 알맞아 보일 수밖에 없다.

2. 같은 이치로, 우리가 같은 피조물인 이웃의 곤경을 볼 때마다 그의 슬픔에 동감하듯이, 그 곤경의 계기가 된 것에 대하여 그가 품는 몹시 싫어함과 꺼림 속으로도 우리는 똑같이 들어간다. 우리의 가슴은 그의 비통을 받아들여 거기에 박자를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그 원인을 몰아내거나 뿌리 뽑으려 애쓰는 그 기운으로도 똑같이 북돋워진다. 그의 괴로움에 우리가 동행하게 하는 그 게으르고 겪기만 하는 함께 느끼는 마음은, 그가 그 괴로움을 물리치려고, 또는 그 괴로움의 계기가 된 것에 대한 자기의 꺼림을 흡족하게 하려고 들이는 노력에 우리가 함께 가게 하는 더 힘차고 활발한 감정에 선선히 자리를 내준다. 그 괴로움을 일으킨 것이 사람일 때에는 이 일이 한결 더 두드러진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억눌리거나 해를 입는 모습을 볼 때, 당하는 쪽의 곤경에 대하여 우리가 느끼는 동감은 가해자에 대한 그의 분개와 함께 느끼는 마음을 북돋우는 구실만 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가 이번에는 자기 적수를 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고, 그가 자기를 지키려고, 또는 어느 정도 안에서라면 앙갚음을 하려고 힘을 쓸 때마다 그를 도울 마음이 앞서서 선선히 나선다. 해를 입은 사람이 그 다툼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우리는 그의 벗들과 친척들이 품는 실제의 분개에 동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감정도 사람의 다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된 죽은 이에게 우리가 머릿속에서 빌려 주는 상상의 분개에까지 동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 보고, 말하자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상상 속에서 어느 정도 그 살해된 사람의 일그러지고 찢긴 시신에 다시 기운을 불어넣으며, 그렇게 그의 경우를 우리 가슴으로 데려올 때, 우리는 다른 여러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당사자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을, 그럼에도 그와 착각에 기댄 동감을 나누는 가운데 느낀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가 입은 것으로 보이는 그 엄청나고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두고 우리가 동감하여 흘리는 눈물은, 우리가 그에게 지고 있는 의무의 작은 몫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가 당한 해가 우리의 주의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요구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가 마땅히 느껴야 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분개, 그리고 그의 차갑고 숨 없는 몸에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가 느낄 그 분개를 느낀다. 그의 피가 앙갚음을 큰 소리로 부른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죽은 이의 잿더미조차 자기가 입은 해가 앙갚음 없이 지나가리라는 생각에 뒤척이는 듯하다. 살인자의 잠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는 끔찍한 환영들, 미신이 그려 내는바 자기를 때 이른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에게 앙갚음을 요구하러 무덤에서 일어나는 귀신들은 모두 살해된 사람의 상상의 분개에 대한 이 자연스러운 동감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적어도 모든 죄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이 죄에 관해서라면, 자연은 형벌의 효용을 두고 어떤 헤아림이 있기도 전에 그렇게 사람의 가슴에 가장 강하고 가장 지워지지 않는 글자로 저 신성하고도 없어서는 안 될 보복의 법에 대한 곧바른 본능적 시인을 찍어 놓았다.

3장 이로움을 베푸는 사람의 행동이 시인되지 않는 곳에서는 그 이로움을 받는 사람의 감사에 동감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반대로 해악을 저지르는 사람의 동기가 부인되지 않는 곳에서는 그 해악을 당하는 사람의 분개에 어떠한 동감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알아 두어야 한다. 한편으로 행하는 사람의 행위나 의도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 작용을 받는 쪽인 사람에게 아무리 이로웠다 하더라도, 또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해로웠다 하더라도, 앞의 경우에 행위자의 동기에 적정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면, 곧 그의 행동을 움직인 정서 속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이로움을 받는 사람의 감사에 거의 동감하지 않는다. 또 뒤의 경우에 행위자의 동기에 부적정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면, 그러니까 거꾸로 그의 행동을 움직인 정서가 우리로서는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해를 당하는 사람의 분개에 어떠한 동감도 할 수 없다. 앞의 경우에는 돌아갈 감사가 얼마 되지 않아 보이고, 뒤의 경우에는 어떤 분개든 옳지 않아 보인다. 앞의 행위는 보상을 받을 공로가 거의 없어 보이고, 뒤의 행위는 벌을 받을 까닭이 없어 보인다.

1. 첫째로 내가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행위자의 정서에 우리가 동감할 수 없는 곳에서는, 그의 행동을 움직인 동기에 적정성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는, 그의 행위로 이로움을 받은 사람의 감사 속으로 우리가 들어갈 마음이 덜하다. 가장 하찮은 동기에서 가장 큰 이로움을 베풀고, 어떤 사람의 이름과 성이 마침 자기 것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영지를 내주는 어리석고 헤픈 도량에는, 돌아갈 갚음이 아주 적어 보인다. 그런 베풂은 그에 걸맞은 갚음을 요구하지 않아 보인다. 행위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우리의 업신여김은 그 호의를 받은 사람의 감사 속으로 우리가 속까지 들어가는 일을 막는다. 그의 은인은 그 감사를 받을 만하지 않아 보인다. 신세를 진 사람의 처지에 우리 자신을 놓아 보면 그런 은인에게는 큰 경외를 품을 수 없겠다고 느껴지는 까닭에, 우리는 더 존경을 부르는 인물에게라면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고 여길 그 고개 숙인 경모와 존중의 상당 부분을 그에게서 선선히 면제해 준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약한 벗을 늘 친절과 인간애로 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훌륭한 후원자에게라면 요구할 여러 가지 배려와 예우를 그에게는 면해 주려 한다. 자기 총신들에게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가장 헤프게 쌓아 준 군주들은, 은혜를 더 아껴 쓴 군주들이 흔히 누린 그만한 정도의 인격적 애착을 좀처럼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영국의 제임스 1세2가 사람은 좋으나 분별 없이 헤프게 베푼 일은 아무도 그의 인격에 붙들어 매지 못한 듯하며, 그 군주는 어울림을 좋아하고 해롭지 않은 성향을 지녔음에도 벗 하나 없이 살다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영국의 지주 계층과 귀족은 모두, 평소 몸가짐이 차갑고 거리를 두는 엄격함을 띠었음에도, 더 검약하고 사람을 가려 베푼 그의 아들을 위하여 목숨과 재산을 내걸었다.

2. 둘째로 내가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행위자의 행동이 우리가 속까지 들어가 시인하는 동기와 정서에 전적으로 이끌린 것으로 보이는 곳에서는, 당하는 쪽에게 가해진 해악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그의 분개에 어떠한 동감도 할 수 없다. 두 사람이 다툴 때 우리가 한쪽을 편들어 그의 분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다른 쪽의 분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그 동기와 함께 가며 그래서 옳은 쪽으로 보는 사람에게 품는 동감은, 우리가 잘못한 쪽으로 볼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과 함께 느끼는 마음이 조금도 들지 못하도록 우리를 굳어지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뒤의 사람이 무엇을 당하였든, 그것이 우리 자신이 그가 당하기를 바랐을 만큼에 지나지 않는 동안, 곧 동감에서 비롯한 우리의 의분이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가하도록 몰아갔을 만큼에 지나지 않는 동안, 그 일은 우리를 언짢게 하지도 우리를 노엽게 하지도 못한다. 사람답지 않은 살인자가 처형대에 오를 때, 우리가 그의 비참함에 어느 정도 연민을 느끼기는 하나, 그가 터무니없게도 자기를 고발한 사람이나 재판관에게 분개를 드러낸다면 우리는 그 분개와 함께 느끼는 마음을 조금도 가질 수 없다. 그처럼 비루한 죄인에 대한 그들의 올바른 의분이 자연스럽게 기울어 가는 방향은 과연 그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파멸적이다. 그러나 그 경우를 우리 자신에게 데려와 보면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감정이 기울어 가는 방향을 두고 우리가 언짢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4장 앞 장들을 되짚어 정리함

1.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품는 감사에, 그 다른 사람이 그의 좋은 운수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속까지 진심으로 동감하지 않으며, 그가 우리로서도 온전히 함께 갈 수 있는 동기에서 그 원인이 되었을 때에만 그렇게 동감한다. 우리의 가슴은 먼저 행위자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그의 행동을 움직인 모든 정서와 함께 가야 하며, 그러고 나서야 그의 행위로 이로움을 입은 사람의 감사에 온전히 동감하며 거기에 박자를 맞출 수 있다. 은인의 행동에 적정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면, 그 결과가 아무리 이롭더라도 그 행동은 그에 걸맞은 갚음을 요구하지도, 반드시 필요로 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행위가 선을 베푸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데에 그 행위가 흘러나온 정서의 적정성까지 더해질 때, 곧 우리가 행위자의 동기에 온전히 동감하여 그것과 함께 갈 때, 우리가 그 사람 자체를 두고 품는 사랑은 그의 훌륭한 행동에 자기네 번영을 힘입은 사람들의 감사와 함께 느끼는 우리의 마음을 한층 키우고 살려 놓는다. 그때 그의 행위는 그에 걸맞은 갚음을 요구하는 듯이,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큰 소리로 부르는 듯이 보인다. 그때 우리는 그 갚음을 베풀도록 몰아가는 그 감사 속으로 온전히 들어간다. 우리가 그에게 보상하도록 몰아가는 그 감정에 그렇게 온전히 동감하여 그것을 시인할 때, 그 은인은 보상의 적정한 대상으로 보인다. 행위가 흘러나온 그 정서를 시인하여 그것과 함께 갈 때, 우리는 그 행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행위가 향한 사람을 그 행위의 적정하고 알맞은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2. 같은 이치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품는 분개에, 그 다른 사람이 그의 불행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조금도 동감할 수 없고, 그가 우리로서는 들어갈 수 없는 동기에서 그 원인이 되었을 때에만 동감한다. 당하는 쪽의 분개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우리는 행위자의 동기를 부인해야 하고 우리의 가슴이 그의 행동을 움직인 정서에 어떠한 동감도 하지 않겠다고 내치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 동기에 부적정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면, 거기에서 흘러나온 행위가 그것이 향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치명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하더라도, 그 행위는 어떤 벌도 받아 마땅하지 않아 보이고 어떤 분개의 적정한 대상도 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행위의 해로움에 그 행위가 흘러나온 정서의 부적정성까지 더해질 때, 곧 우리의 가슴이 행위자의 동기와 함께 느끼는 마음을 모두 몹시 싫어하며 내칠 때, 우리는 그때 당하는 쪽의 분개에 진심으로 온전히 동감한다. 그때 그런 행위는 그에 걸맞은 벌을 받아 마땅해 보이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 벌을 큰 소리로 부르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벌을 가하도록 몰아가는 그 분개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며 그로써 그 분개를 시인한다. 우리가 벌하도록 몰아가는 그 감정에 그렇게 온전히 동감하여 그로써 그것을 시인할 때, 그 가해자는 벌의 적정한 대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도 행위가 흘러나온 정서를 시인하여 그것과 함께 갈 때, 우리는 그 행위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행위가 겨눈 사람을 그 행위의 적정하고 알맞은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5장 공로와 과오의 감각에 대한 분석

1. 그러므로 행동의 적정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행하는 사람의 정서와 동기에 대한 직접적 동감이라고 내가 부르려는 것에서 일어나듯이, 그 행동의 공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 작용을 받는 쪽인 사람의 감사에 대한 간접적 동감이라고 내가 부르려는 것에서 일어난다.

과연 우리는 은인의 동기를 미리 시인하지 않고서는 그 이로움을 받는 사람의 감사 속으로 속까지 들어갈 수 없으며, 그러한 까닭에 공로의 감각은 복합된 감정으로, 곧 서로 구별되는 두 감정, 다시 말해 행위자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 동감과 그의 행위로 이로움을 받는 사람들의 감사에 대한 간접적 동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러 서로 다른 경우에, 어떤 인물이나 행위가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감각 안에서 그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어우러져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적정하면서도 선을 베푸는 큰 마음이 드러난 행적을 역사에서 읽을 때,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그 뜻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 행적을 이끄는 기개 높은 도량에 우리는 얼마나 북돋워지는가?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며, 그것이 어그러질 때 얼마나 비통해하는가? 상상 속에서 우리는 그 행적이 우리 앞에 그려진 바로 그 사람이 된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자신을 그 멀고 잊힌 모험의 현장으로 옮겨 놓고, 스키피오나 카밀루스, 티몰레온이나 아리스테이데스4의 몫을 연기하는 자신을 그려 본다. 여기까지 우리의 감정은 행하는 사람에 대한 직접적 동감에 바탕을 둔다. 그렇다고 그런 행위로 이로움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간접적 동감이 덜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뒤의 사람들의 처지에 우리 자신을 놓아 볼 때마다, 자기들에게 그토록 요긴하게 이바지해 준 이들에게 그들이 품는 감사 속으로 우리는 얼마나 따뜻하고 정 깊게 함께 느끼는 마음으로 들어가는가? 우리는 말하자면 그들과 더불어 그들의 은인을 껴안는다. 우리의 가슴은 감사에 찬 그들의 정서가 가장 높이 치솟는 대목에까지 선선히 동감한다. 그들이 그에게 바칠 영예도 보상도 지나칠 만큼 크지는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들이 그의 베풂에 이처럼 적정하게 갚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갈채하며 그들과 함께 가지만,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자기들이 입은 은의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한없이 놀라 뒤흔들린다. 요컨대 그런 행위의 공로, 그 행위가 상을 받아 마땅함, 그 행위에 갚아 주고 그 행위를 한 사람이 이번에는 기뻐하게 해 주는 일의 적정성과 알맞음에 대한 우리의 감각 전체는, 당사자들의 처지를 우리 자신의 가슴으로 데려올 때 그처럼 적정하고 고귀한 선행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을 향하여 우리가 자연스럽게 실려 가게 되는 감사와 사랑이라는 동감의 감정에서 일어난다.

2. 행동의 부적정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동감의 결여에서, 또는 행위자의 정서와 동기에 대한 직접적 반감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 행동의 과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여기에서도 내가 당하는 쪽의 분개에 대한 간접적 동감이라고 부르려는 것에서 일어난다.

과연 우리의 가슴이 미리 행위자의 동기를 부인하고 그것과 함께 느끼는 마음을 모두 내치지 않고서는 당하는 쪽의 분개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그러한 까닭에 과오의 감각도 공로의 감각과 마찬가지로 복합된 감정으로, 곧 서로 구별되는 두 감정, 다시 말해 행위자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 반감과 당하는 쪽의 분개에 대한 간접적 동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여러 서로 다른 경우에, 어떤 인물이나 행위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감각 안에서 그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어우러져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보르자나 네로5의 배신과 잔학을 역사에서 읽을 때, 우리의 가슴은 그들의 행동을 움직인 혐오스러운 감정에 맞서 일어서며, 그처럼 저주스러운 동기와 함께 느끼는 마음을 모두 끔찍함과 진저리 속에서 내친다. 여기까지 우리의 감정은 행위자의 정서에 대한 직접적 반감에 바탕을 둔다. 그리고 당하는 쪽의 분개에 대한 간접적 동감은 한결 더 뚜렷하게 느껴진다. 인류에게 재앙이던 그 자들이 모욕하고 죽이고 배신한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 자신에게 데려올 때, 땅 위의 그처럼 오만하고 사람답지 않은 압제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의분을 느끼지 않겠는가? 죄 없이 당한 사람들이 피할 수 없었던 곤경에 우리가 품는 동감은, 그들의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분개와 함께 느끼는 우리의 마음보다 더 참되지도 더 생생하지도 않다. 앞의 감정은 뒤의 감정을 높여 줄 뿐이며, 그들의 곤경을 떠올리는 일은 그 곤경을 빚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적의를 불붙이고 부풀리는 구실만 한다. 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의 압제자에 맞서 한결 간절하게 그들을 편들며, 그들이 세우는 앙갚음의 계획 하나하나에 한결 앞장서서 들어가고, 사회의 법을 그처럼 짓밟은 자들에게 동감에서 비롯한 우리의 의분이 그들의 죄에 마땅하다고 말해 주는 그 벌을 상상 속에서 순간순간 퍼붓는다고 느낀다. 그런 행동의 끔찍함과 무서운 잔학함에 대한 우리의 감각, 그것이 적정하게 벌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가 누리는 기쁨, 그것이 마땅한 응보를 벗어날 때 우리가 느끼는 의분, 요컨대 그 행동이 벌을 받아 마땅함과, 그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나쁜 것을 가하여 이번에는 그가 슬퍼하게 하는 일의 적정성과 알맞음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느낌 전체는, 관찰자가 당하는 쪽의 경우를 자기에게 속속들이 데려올 때마다 그의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는, 동감에서 비롯한 의분에서 일어난다6.

원저자 주 2에서 이어지는 부분

또 이런 점도 헤아려 보아야 한다. 분개는 우리가 너무 자주 보게 되는 그런 정도에 이르면 아마도 모든 정념 가운데 가장 밉살스러운 것이겠으나, 알맞게 누그러져 관찰자의 동감에서 비롯한 의분의 수준까지 온전히 내려왔을 때에는 부인되지 않는다. 곁에서 보는 사람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적의가 당하는 쪽의 적의와 온전히 맞아떨어진다고 느낄 때, 그의 분개가 어느 모로도 우리의 분개를 넘어서지 않을 때, 우리가 박자를 맞출 수 있는 것보다 더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도 그에게서 새어 나오지 않을 때, 그리고 그가 가하려는 벌이 우리로서도 가해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만한 것, 또는 그 때문이라면 우리 자신이 그 벌을 가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기까지 할 만한 것을 결코 넘어서지 않을 때, 우리가 그의 감정을 온전히 시인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경우 우리 자신의 감정은 우리 눈에 그의 감정을 의심할 바 없이 정당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런 절도를 지킬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분개의 거칠고 다스려지지 않은 충동을 그 걸맞은 기질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를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까닭에, 우리는 자기 본성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정념 가운데 하나를 그만큼 자기 통제로 눌러 낼 수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상당한 정도의 존중과 감탄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당하는 쪽의 적의가,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설 때에는 우리가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상상에서 비롯한 거의 다른 어떤 정념이 그만큼 지나친 경우보다도 그것을 더 심하게 부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처럼 너무 격렬한 분개는 우리를 함께 실어 가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체가 우리의 분개와 의분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이 옳지 못한 감정의 대상이 되어 그로부터 해를 입을 처지에 놓인 사람의 맞선 분개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분개가 지나쳐 넘친 것인 복수는 모든 정념 가운데 가장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이며, 누구에게나 끔찍함과 의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정념이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 절도를 지키는 경우가 한 번이라면 지나친 경우가 백 번인 까닭에, 우리는 그것을 아주 쉽게 온통 밉살스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가장 흔히 나타나는 모습에서 그것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타락한 상태에 있을 때조차, 어느 모로 보나 온통 나쁘기만 한 원리, 곧 어떤 정도로도 어떤 방향으로도 칭찬과 시인의 적정한 대상이 될 수 없는 원리를 우리에게 심어 줄 만큼 우리를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지는 않은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도, 대체로 너무 강한 이 정념이 너무 약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때로 어떤 사람이 기개를 너무 적게 드러내고 자기가 입은 해를 너무 적게 느낀다고 불평하며, 이 정념이 지나치다고 그를 미워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모자란다고 그를 업신여기기도 선선히 한다.

영감을 받은 저자들7이 그 정념들을 어떤 정도로든 악덕이며 나쁜 것으로, 사람처럼 그렇게 약하고 불완전한 피조물에게서조차 그러하다고 여겼다면, 신의 진노와 분노를 그토록 자주, 그토록 강하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이런 점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지금의 탐구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당위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완전한 존재라면 어떤 원리에 따라 나쁜 행위를 벌하는 일을 시인할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약하고 불완전한 피조물이 실제로 사실상 어떤 원리에 따라 그것을 시인하는지를 살피고 있다. 내가 방금 말한 원리들이 그의 감정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은 지혜로운 일로 보인다.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받을 까닭도 없고 도발도 없이 품는 악의가 알맞은 벌로 억눌려야 하고, 따라서 그 벌을 가하는 일이 적정하고 칭찬할 만한 행위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성상 사회의 복리와 보존을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자연의 창조자는 벌을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그 목적을 이루는 알맞은 수단인지를 알아내는 일을 그의 이성에 맡겨 두지 않았고, 그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정한 바로 그 적용을 곧바로 본능적으로 시인하는 마음을 그에게 심어 주었다. 이 점에서 자연의 운용은 다른 여러 경우에 그러한 것과 정확히 한 덩이를 이룬다. 그 각별한 중요성 때문에, 그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자연이 아끼는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모든 목적에 관하여, 자연은 늘 그렇게 사람들에게 자기가 내세우는 목적을 향한 욕구를 심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향한 욕구까지, 그 수단 자체를 위하여, 그리고 그것이 그 목적을 낳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사정과는 따로, 심어 주었다. 이렇게 자기 보존과 종의 번식은 자연이 모든 동물을 지을 때 내세운 것으로 보이는 큰 목적이다. 사람들은 그 목적을 바라는 마음과 그 반대를 꺼리는 마음을, 곧 삶을 사랑하는 마음과 흩어져 사라지는 일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종이 이어지고 길이 남기를 바라는 마음과 종이 온통 끊어진다는 생각을 꺼리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그 목적을 아주 강하게 바라는 마음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룰 알맞은 수단을 알아내는 일은 우리 이성의 느리고 불확실한 판단에 맡겨지지 않았다. 자연은 그 수단의 대부분으로 본래의 곧바른 본능을 통하여 우리를 이끌었다. 굶주림과 목마름, 두 성을 맺어 주는 정념, 즐거움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픔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그 수단 자체를 위하여, 그리고 자연의 위대한 주재자가 그 수단으로 낳으려 한 저 선한 목적으로 그것이 기울어 있다는 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은 채 그 수단을 쓰도록 우리를 몰아간다.

이 각주8를 맺기 전에 나는 적정성에 대한 시인과 공로 또는 선행에 대한 시인 사이의 차이를 짚어 두어야 한다. 어떤 사람의 감정을 그 대상에 적정하고 알맞다고 시인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와 똑같이 움직여지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와 우리 사이에 감정의 이러한 조화와 일치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내 벗에게 닥친 불행을 듣고 내가 그가 내어 주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걱정을 품는다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전해 듣기까지, 곧 그의 감정과 나의 감정 사이의 조화를 내가 알아차리기까지, 나는 그의 처신을 움직이는 감정을 시인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정성에 대한 시인은 우리가 행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동감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 사이에 이러한 완전한 화합이 있음을 우리가 알아차릴 것을 요구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로움이 베풀어졌다는 말을 들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사람이 제 마음대로 어떻게 움직여지든, 그의 경우를 나 자신에게 데려와 봄으로써 내 가슴에서 감사가 일어나는 것을 내가 느낀다면, 나는 그 은인의 행동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공로가 있는 것이자 보상의 적정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 이로움을 받은 사람이 감사를 품는지 품지 않는지는, 그것을 베푼 사람의 공로에 관한 우리의 감정을 어느 정도로도 바꾸어 놓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감정의 실제적 일치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가 감사할 마음을 지녔다면 두 감정이 일치하였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넉넉하다. 그리고 공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흔히, 남의 경우를 우리 자신에게 데려올 때 당사자로서는 그렇게 움직여질 수 없는 결로 우리가 움직여지곤 하는 저 착각에 기댄 동감 가운데 하나에 바탕을 둔다. 과오에 대한 우리의 부인과 부적정성에 대한 부인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차이가 있다.

주

  1. 1. 옮긴이 — 저본에는 이 자리가 publish(공표하다)로 인쇄되어 있다. 앞 문장의 reward(보상하다)와 짝을 이루는 대구이고 바로 다음 문단이 punish를 되받으므로 punish(벌하다)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

  2. 2. 옮긴이 — 제임스 1세(1566~1625).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로는 1567년부터, 잉글랜드 왕으로는 1603년부터 재위하였다. 뒤에 나오는 「그의 아들」은 찰스 1세(1600~1649)이며, 지주 계층과 귀족이 목숨과 재산을 내걸었다는 대목은 잉글랜드 내전을 가리킨다.

  3. 3. 옮긴이 — 저본에는 이 문단의 번호 「1.」이 빠져 있다. 뒤에 「2.」로 시작하는 문단이 오고 2장·3장·5장이 모두 1과 2의 짝으로 되어 있으므로 번호를 되살려 옮겼다.

  4. 4. 옮긴이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기원전 236~183),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기원전 446년경~365), 티몰레온(기원전 411년경~337), 아리스테이데스(기원전 530년경~468). 모두 고대의 이름난 장군이거나 정치가이다.

  5. 5. 옮긴이 — 체사레 보르자(1475년경~1507)와 네로(37~68, 재위 54~68).

  6. 6. 사람의 행위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각을 이렇게 당하는 쪽의 분개에 대한 동감으로 돌리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 감각을 격하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분개는 흔히 워낙 밉살스러운 정념으로 여겨지므로, 악덕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는 감각처럼 그토록 칭찬할 만한 원리가 어느 모로든 분개에 바탕을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기 쉽다. 그들은 아마도, 좋은 행위의 공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그 행위로 이로움을 받는 사람들의 감사에 대한 동감에 바탕을 둔다는 말이라면 더 선선히 받아들일 것이다. 감사는 다른 모든 인애로운 정념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부르는 원리로 여겨지며, 그 위에 세워진 것에서 어떤 값도 덜어 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와 분개가 어느 모로 보나 서로 짝을 이루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공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앞의 것에 대한 동감에서 일어난다면, 과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뒤의 것과 함께 느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일은 좀처럼 비껴갈 수 없다.

  7. 7. 옮긴이 — 성서를 쓴 사람들을 가리킨다.

  8. 8. 옮긴이 — 「이 각주」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이 문단과 앞의 세 문단은 본래 5장에 달린 긴 원저 각주의 뒷부분이고 그 첫머리가 아래 각주 2이다. 저본을 파일로 나눌 때 뒷부분이 본문 문단으로 놓였으므로 문단 구분을 그대로 두고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