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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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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도덕적 시인과 부인의 감정에 관습과 유행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1장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한 우리 관념에 관습과 유행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이미 열거한 원리들 말고도 인류의 도덕적 감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다른 원리들이 있으며, 무엇이 비난받을 만하고 무엇이 칭찬받을 만한지를 두고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그토록 고르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많은 견해가 퍼져 있는 것도 주로 이 원리들 때문이다. 그 원리란 관습과 유행이며, 이것들은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 판단 위에까지 그 지배를 넓힌다.1

두 대상이 자주 함께 보여 왔으면 상상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쉽게 건너가는 버릇을 얻는다. 첫째 것이 나타나면 우리는 둘째 것이 따라올 것이라고 셈한다. 그것들은 저절로 서로를 우리 마음에 떠올려 주고, 주의는 그것들을 따라 쉽게 미끄러져 간다. 관습과 무관하게 본다면 그 둘의 결합에 참된 아름다움이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관습이 이렇게 그것들을 서로 이어 놓고 나면 우리는 그것들을 떼어 놓는 데서 부적정성을 느낀다.2 한쪽이 늘 따라다니던 짝 없이 나타나면 우리는 그것이 어설프다고 여긴다. 우리는 찾으려 했던 무엇인가를 놓치고, 그 실망으로 우리 관념의 익은 배열이 흐트러진다. 예컨대 한 벌 옷은 늘 따라붙던 가장 하찮은 장식 하나가 없어도 무엇인가 빠진 듯이 보이며, 우리는 허리 뒤의 단추 하나가 없는 것에서조차 비천함이나 어설픔을 찾아낸다. 그 결합에 자연스러운 적정성이 얼마라도 있을 때에는 관습이 그것에 대한 우리 감각을 키워, 다른 배열을 원래 보였을 것보다 더욱 거슬리게 보이도록 만든다. 좋은 심미안으로 차려진 것을 보아 온 이들은 서툴거나 어설픈 것이면 무엇에든 더 크게 역겨움을 느낀다. 그 이음이 적정하지 못한 자리에서는 관습이 그 부적정성에 대한 우리 감각을 줄이거나 아예 앗아 간다. 어수선하고 헐렁한 차림에 익은 이들은 깔끔함이나 우아함에 대한 감각을 모두 잃는다. 낯선 이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가구나 옷의 양식이 그것에 익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거슬림도 주지 않는다.

유행은 관습과 다르며, 오히려 관습의 한 특별한 갈래다. 모두가 입는 것이 유행이 아니라 높은 지위나 인망을 지닌 이들이 입는 것이 유행이다. 큰 사람들의 우아하고 편안하며 위엄 있는 몸가짐에 그들 옷차림의 여느 때와 같은 넉넉함과 화려함이 더해져, 그들이 어쩌다 어떤 모양에 그것을 입혀 주면 그 모양 자체에 우아함이 생긴다. 그들이 그 모양을 계속 쓰는 동안 그것은 우리 상상 속에서 품위 있고 화려한 무엇인가의 관념과 이어져, 그것 자체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해도 이 이어짐 덕분에 그것에도 품위 있고 화려한 무엇인가가 붙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이 그것을 버리는 순간 그것은 앞서 지녔던 것처럼 보였던 우아함을 다 잃고, 이제 낮은 지위의 사람들만 쓰게 되니 그들의 비천함과 어설픔을 얼마쯤 지닌 듯이 보인다.

옷차림과 가구가 온전히 관습과 유행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온 세상이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그 원리들의 영향은 그렇게 좁은 범위에 갇혀 있는 것이 결코 아니고, 어떤 점에서든 심미의 대상이 되는 것이면 무엇에든, 곧 음악에도 시에도 건축에도 뻗어 나간다. 옷차림과 가구의 양식은 끊임없이 바뀌고, 5년 전에 감탄을 받던 유행이 오늘은 우스꽝스러워 보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널리 퍼졌던 것이 주로 또는 온전히 관습과 유행 덕분이었음을 겪어 보아 확신하게 된다. 옷과 가구는 그다지 오래가는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잘 지은 겉옷 한 벌은 열두 달이면 끝나 버려, 자기가 만들어진 그 모양을 유행으로서 더 오래 퍼뜨릴 수 없다. 가구의 양식은 옷차림의 양식보다 덜 빠르게 바뀌는데, 가구가 보통 더 오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5년이나 6년이 지나면 가구도 대개 온전히 한 번 뒤집히고, 사람마다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방면의 유행이 여러 갈래로 바뀌는 것을 본다. 다른 예술이 내놓는 것들은 훨씬 더 오래가고, 다행히 잘 떠올려진 것이라면 그 만듦새의 유행을 훨씬 더 긴 시간 퍼뜨려 갈 수 있다. 잘 지은 건물은 여러 세기를 견딜 수 있고, 아름다운 가락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일종의 전승으로 내려올 수 있으며, 잘 쓰인 시는 세상이 있는 동안 남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가 여러 시대를 잇달아, 자기가 지어진 그 특별한 양식과 그 특별한 심미와 수법에 널리 퍼진 자리를 내어 준다. 자기 시대에 이 예술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유행이 크게 바뀌는 것을 볼 기회를 얻는 사람은 드물다. 먼 시대와 먼 나라에서 행해진 여러 양식을 두루 겪고 알아, 그것들과 온전히 친해지거나 그것들과, 자기 시대 자기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사이를 공평하게 판단할 만한 사람도 드물다. 그러므로 이 예술들 가운데 어느 것이 내놓은 것에서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두고 내리는 자기 판단에 관습이나 유행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인정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그들은 그 하나하나에서 지켜야 한다고 자기가 여기는 모든 규칙이 습관이나 편견에 서 있지 않고 이성과 자연에 서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아주 조금만 주의를 들여도 그들에게 그 반대를 납득시키고, 관습과 유행이 옷차림과 가구에 미치는 영향이 건축과 시와 음악에 미치는 영향보다 더 절대적이지 않음을 그들에게 알려 줄 수 있다.

예컨대 도리스식 주두는 높이가 지름의 여덟 배인 기둥에, 이오니아식 소용돌이는 아홉 배인 기둥에, 코린트식 잎 장식은 열 배인 기둥에 배정되어야 하는 까닭을 무엇으로든 댈 수 있는가?3 그 배정 하나하나의 적정성은 습관과 관습 말고는 아무것에도 서 있을 수 없다. 특정한 비례가 특정한 장식과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아 온 눈은 그 둘이 함께 놓이지 않으면 거슬림을 느낄 것이다. 다섯 주식은 각각 자기만의 장식을 지니고 있어, 건축의 규칙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 모두에게 거슬림을 주지 않고서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 사실 어떤 건축가들의 말에 따르면 고대인들이 주식마다 알맞은 장식을 배정한 판단이 어찌나 섬세한지, 그만큼 잘 어울리는 다른 장식은 찾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양들이 아무리 대단히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그 비례에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모양이라는 것은, 또 굳어진 관습이 있기 전이라면 그것들에 똑같이 잘 맞았을 다른 모양이 오백 가지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은, 헤아리기에 조금 어려운 듯하다. 그러나 관습이 건축의 특정한 규칙을 세워 놓았다면, 그 규칙이 아주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아닌 한, 그저 그만큼 좋을 뿐인 다른 규칙으로, 심지어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점에서 자연히 그것보다 조금 나은 다른 규칙으로 그것을 바꿀 생각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새 옷이 그 자체로 아무리 우아하고 편하다 해도, 사람들이 흔히 입는 것과 아주 다른 한 벌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사람은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새 장식이 그 자체로 흔한 장식보다 얼마쯤 나은 것이라 해도, 관습과 유행이 정해 놓은 것과 아주 다르게 집을 꾸미는 일에도 같은 종류의 터무니없음이 있는 듯하다.

옛 수사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운율이나 시행은 저마다 특정한 갈래의 글에 자연이 배정해 놓은 것이어서, 그 글에서 주로 드러나야 할 성격과 감정과 정념을 자연히 나타낸다고 한다. 한 시행은 무거운 작품에 맞고 다른 시행은 밝은 작품에 맞으며, 그 둘을 서로 바꾸어 쓰면 가장 큰 부적정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그들은 여겼다. 그러나 근래의 경험은 이 원리가 그 자체로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데도 그것과 어긋나는 듯하다. 영어에서 골계시의 시행인 것이 프랑스어에서는 영웅시의 시행이다. 라신의 비극과 볼테르의 『앙리아드』는 다음 시행과 같은 운율로 되어 있다.4

이렇듯 제 귀부인께 말하였다, 근심 가득한 그 기사가.

거꾸로 프랑스어에서 골계시의 시행은 영어에서 열 음절의 영웅시 시행과 거의 같다. 관습은 한쪽 나라로 하여금 무거움과 숭고함과 진지함의 관념을 어떤 운율에 결부하게 만들었는데, 다른 쪽 나라는 바로 그 운율을 밝고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면 무엇에든 이어 놓았다. 영어에서는 프랑스의 알렉상드랭 시행으로 쓰인 비극보다 더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고, 프랑스어에서는 열 음절 시행으로 쓰인 같은 종류의 작품보다 더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뛰어난 예술가는 이 예술들 하나하나에서 굳어진 양식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켜 글이나 음악이나 건축의 새 유행을 들여놓는다. 지위 높고 마음에 드는 사람의 옷차림이 스스로를 내세워, 아무리 별나고 기이하더라도 이내 감탄과 본뜸을 받게 되는 것처럼, 뛰어난 거장의 훌륭함은 그의 별난 점까지 내세워 주고 그의 수법은 그가 하는 예술에서 유행하는 양식이 된다.5 음악과 건축에서 이탈리아인의 심미안은 이 50년 사이에 상당히 바뀌었는데, 그 두 예술에서 몇몇 뛰어난 거장의 별난 점을 본뜬 데서 온 것이다. 세네카는 로마인의 심미안을 망쳐 놓았다는, 그리고 위엄 있는 이치와 사내다운 웅변 자리에 경박한 예쁨을 들여놓았다는 퀸틸리아누스의 비난을 받는다.6 살루스티우스와 타키투스도 다른 이들에게서 똑같은 비난을 받았는데, 다만 그 결이 달랐다. 그들이 어떤 문체에 명성을 주었다는 것인데, 그 문체는 가장 높은 정도로 간결하고 우아하고 표현력 있고 시적이기까지 하면서도 편안함과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 있었고, 누가 보아도 가장 공들이고 벼른 꾸밈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자기 흠까지 이렇게 마음에 들게 만들 수 있는 저술가라면 얼마나 많은 큰 자질을 지녔어야 하는가! 한 나라의 심미안을 세련하게 만들었다는 칭찬 다음으로 어떤 저술가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높은 찬사는 아마 그가 그것을 망쳐 놓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우리 말에서는 포프 씨와 스위프트 박사가 각각 운을 맞추어 쓰인 모든 작품에, 한 사람은 긴 시행에서 다른 한 사람은 짧은 시행에서, 앞서 행해지던 것과 다른 수법을 들여놓았다.7 버틀러의 기묘함은 스위프트의 소박함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드라이든의 거침없는 자유로움과, 애디슨의 바르기는 하나 흔히 지루하고 산문 같은 느른함은 더 이상 본뜸의 대상이 아니고, 이제 모든 긴 시행은 포프 씨의 힘줄 선 정확함이라는 수법에 따라 쓰인다.

관습과 유행이 그 지배를 떨치는 것은 예술이 내놓은 것들 위에서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연물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같은 결로 우리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사물의 갈래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고 서로 반대되는 모양들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가? 어떤 동물에게서 감탄을 받는 비례는 다른 동물에게서 높이 여겨지는 비례와 아주 다르다. 사물의 부류마다 시인을 받는 자기만의 짜임새가 있으며, 다른 모든 갈래의 것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학식 있는 한 예수회 사제 뷔피에 신부가 모든 대상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속하는 그 특정한 부류의 사물에게 가장 흔한 모양과 색에 있다고 단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8 그리하여 사람의 모습에서 얼굴 각 부분의 아름다움은 추한 여러 다른 모양에서 똑같이 떨어져 있는 어떤 중간에 있다. 예컨대 아름다운 코는 아주 길지도 아주 짧지도 않고 아주 곧지도 아주 굽지도 않은, 이 모든 극단 사이의 일종의 중간으로서, 그 극단들이 서로 다른 정도보다 그 어느 하나와도 덜 다른 코다. 그것은 자연이 그 모든 코에서 겨냥한 듯한 모양인데, 자연은 매우 여러 갈래로 그것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정확히 맞히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그 모든 벗어남이 여전히 그것과 매우 강하게 닮아 있다. 하나의 본을 따라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면, 그것들이 모두 어떤 점에서는 그 본을 놓친다 하더라도 서로 닮은 것보다 그 본을 더 닮을 것이고, 본의 일반적인 성격이 그 모두를 꿰뚫고 지나갈 것이며, 가장 유별나고 괴상한 것은 그 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일 것이고, 그것을 정확히 옮긴 그림은 아주 적겠지만 가장 꼼꼼히 그린 것이 가장 아무렇게나 그린 것을 닮은 정도는 아무렇게나 그린 것들이 서로 닮은 정도보다 더 클 것이다. 같은 결로 생물의 갈래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갈래의 일반적인 골격을 가장 강하게 지니고 있고, 자기와 한 부류에 드는 개체 대부분과 가장 강하게 닮아 있다. 거꾸로 괴물, 곧 온전히 일그러진 것은 언제나 가장 유별나고 괴상하며, 자기가 속한 갈래의 여느 것들과 가장 덜 닮았다. 그리하여 갈래마다의 아름다움은 한 뜻에서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드문 것인데 이 중간 모양을 정확히 맞히는 개체가 적기 때문이며, 다른 뜻에서는 가장 흔한 것인데 그것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서로 닮은 것보다 그것을 더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사물의 갈래마다 가장 관습적인 모양이 가장 아름다운 모양이다. 그래서 대상의 갈래마다 그 아름다움을 판단하거나 그 중간이자 가장 흔한 모양이 무엇에 있는지 알기 전에, 그것을 바라보는 일에 얼마간의 익힘과 겪음이 필요하다. 사람이라는 갈래의 아름다움에 관한 가장 섬세한 판단도 꽃이나 말이나 다른 어떤 갈래의 사물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기후가 다르고 관습과 살아가는 결이 다른 곳에서는 어떤 갈래의 여느 것들이 그 사정에서 다른 짜임새를 얻으므로 그 아름다움에 관한 다른 관념이 널리 퍼진다. 무어 말의 아름다움은 영국 말의 아름다움과 정확히 같지 않다. 사람의 몸매와 얼굴의 아름다움에 관해 나라마다 얼마나 다른 관념이 만들어지는가? 기니 해안에서는 흰 살빛이 끔찍한 추함이다.9 두꺼운 입술과 납작한 코가 아름다움이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어깨까지 늘어진 긴 귀가 누구나 감탄하는 대상이다. 중국에서는 어떤 여인의 발이 걸어 다닐 만큼 크다면 그는 추함의 괴물로 여겨진다. 북아메리카의 어떤 미개한 민족들은 아이들 머리에 판자 네 개를 둘러 묶어, 뼈가 아직 연하고 무를 때 그것을 거의 완전한 네모꼴로 눌러 넣는다. 유럽인은 이 관습의 터무니없는 야만스러움에 놀라며, 어떤 선교사들은 그것이 퍼져 있는 민족들의 유별난 우둔함을 그 관습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들이 그 미개인들을 나무랄 때, 유럽의 여인들이 바로 이 몇 해 전까지 100년 가까이 자연스러운 제 몸매의 아름다운 둥근 맵시를 같은 종류의 네모꼴로 눌러 넣으려 애써 왔다는 것은 헤아리지 않는다.10 그리고 이 관습이 일으키는 줄 알려진 많은 뒤틀림과 병에도 아랑곳없이, 관습은 그것을 아마도 세상이 일찍이 본 가장 문명화된 몇몇 나라에서 마음에 드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름다움의 본성에 관한 이 학식 있고 재간 있는 신부의 체계는 이러하며, 그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매력은 온전히, 관습이 사물의 갈래마다에 관하여 상상에 새겨 놓은 습관과 맞아떨어지는 데서 일어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 감각조차 온전히 관습에 서 있다고는 믿게 될 수 없다. 어떤 모양의 효용, 곧 그것이 지어진 쓸모 있는 목적에 그것이 들어맞음은 누가 보아도 그것을 내세워 주고, 관습과 무관하게 그것을 우리 마음에 들게 만든다. 어떤 색은 다른 색보다 더 마음에 들고, 눈이 그것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더 큰 기쁨을 준다. 매끄러운 면은 거친 면보다 더 마음에 든다.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은 지루하고 변화 없는 한결같음보다 더 즐겁다. 서로 이어진 여러 가지, 곧 새로 나타나는 것마다 앞서 온 것이 이끌어 낸 듯이 보이고 맞닿은 부분들이 모두 서로 자연스러운 관계를 지닌 듯이 보이는 그런 여러 가지는, 서로 이어지지 않은 대상들이 뿔뿔이 어지럽게 모인 것보다 더 마음에 든다. 그러나 관습이 아름다움의 유일한 원리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는 이 재간 있는 체계의 진실을 다음만큼은 받아들일 수 있다. 곧 겉으로 드러난 모양 가운데, 관습과 아주 반대되고 그 특정한 갈래의 사물에서 우리가 익어 온 것과 아주 다르다면 그래도 마음에 들 만큼 아름다운 것은 거의 없으며, 관습이 그것을 한결같이 받쳐 주어 그 갈래의 개체 하나하나에서 그것을 보도록 우리를 익숙하게 만든다면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을 만큼 일그러진 것도 거의 없다.

2장 도덕적 감정에 관습과 유행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에 관한 우리 감정이 관습과 유행에 그토록 큰 영향을 받으니, 행위의 아름다움에 관한 감정이 그 원리들의 지배에서 온전히 벗어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것들의 영향은 다른 어디에서보다 훨씬 작은 듯하다. 겉으로 드러난 대상의 모양 가운데는 아무리 터무니없고 기이하더라도 관습이 우리를 그것과 친해지게 만들지 못할 것이, 또는 유행이 그것을 마음에 들게까지 만들지 못할 것이 아마 하나도 없다. 그러나 네로나 클라우디우스 같은 자의 성격과 행위는 어떤 관습도 우리를 그것과 친해지게 만들지 못할 것이고 어떤 유행도 그것을 마음에 들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11 한쪽은 언제나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일 것이고 다른 쪽은 업신여김과 비웃음의 대상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 감각이 딸려 있는 상상의 원리들은 매우 섬세하고 연약한 성질의 것이어서 습관과 교육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시인과 부인의 감정은 사람 본성의 가장 강하고 가장 힘찬 정념에 서 있으며, 얼마쯤 뒤틀릴 수는 있어도 온전히 비틀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관습과 유행이 도덕적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어디에서와 완전히 같은 결이다. 관습과 유행이 옳음과 옳지 못함의 자연스러운 원리와 맞아떨어질 때 그것들은 우리 감정의 섬세함을 높이고 악에 가까이 가는 것이면 무엇에든 우리 혐오를 키운다. 세간에서 흔히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벗들 사이에서 길러진 이들, 곧 자기가 높이 여기며 더불어 살던 사람들에게서 정의와 겸손과 인간애와 좋은 질서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데 익은 이들은, 그 덕들이 정해 주는 규칙에 어긋나 보이는 것이면 무엇에든 더 크게 충격을 받는다. 거꾸로 폭력과 방종과 거짓과 옳지 못함 가운데에서 자라나는 불운을 겪은 이들은, 그런 행위의 부적정성에 대한 감각을 다 잃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무서운 엄청남에 대한 감각, 또는 그것에 마땅한 앙갚음과 벌에 대한 감각은 다 잃는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것과 친해져 왔고 관습이 그것을 그들에게 버릇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들은 그것을 이른바 세상이 굴러가는 길,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올곧음에 속는 얼뜨기가 되지 않으려면 해도 되거나 반드시 해야 하는 무엇인가로 여기기가 매우 쉽다.

유행도 때로 어느 정도의 흐트러짐에 명성을 주고, 거꾸로 높이 여겨질 만한 자질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찰스 2세의 치세에는 어느 정도의 방종이 자유로운 교육을 받은 사람의 표징으로 여겨졌다.12 그 시대의 관념에 따르면 그것은 도량이 큼과 참됨과 아량과 충성됨에 이어져 있었고,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 청교도가 아니라 신사임을 증명해 주었다. 반면에 몸가짐의 엄격함과 행위의 한결같음은 아주 유행에 어긋났고, 그 시대의 상상에서는 겉치레 말과 꾀바름과 위선과 낮은 몸가짐에 이어져 있었다. 얄팍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큰 사람들의 악덕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그것을 운의 찬란함에만 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윗사람들에게 돌리는 많은 뛰어난 덕에도 이어 놓으니, 곧 자유와 홀로 섬의 기개에, 솔직함과 도량이 큼과 인간애와 예의바름에 이어 놓는다. 거꾸로 낮은 지위 사람들의 덕, 곧 그들의 아끼는 검약과 고된 부지런함과 규칙을 굳게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비천하고 거슬려 보인다. 그들은 그것을 그 자질이 흔히 딸려 있는 지위의 비천함에도, 그리고 그것에 보통 따라다닌다고 자기가 생각하는 많은 큰 악덕, 곧 비굴하고 비겁하고 심술궂고 거짓말하고 좀도둑질하는 성향에도 이어 놓는다.

직업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늘 마주하는 대상이 매우 다르고 그것들이 그들을 매우 다른 정념에 익숙하게 만들므로, 그것은 자연히 그들 안에 매우 다른 성격과 몸가짐을 이루어 놓는다. 우리는 지위와 직업마다, 경험이 우리에게 그것에 딸린 것이라고 가르쳐 준 그런 몸가짐을 얼마쯤 기대한다. 그러나 사물의 갈래마다 우리가 특히 중간의 짜임새, 곧 모든 부분과 모든 모습에서 자연이 그런 종류의 사물에 세워 놓은 듯한 일반적인 기준과 가장 정확히 들어맞는 짜임새에 기뻐하듯이, 지위마다, 또는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사람의 갈래마다, 우리는 그들이 자기 특정한 처지와 사정에 보통 따라다니는 성격을 너무 많이도 너무 적게도 지니지 않았으면 특히 기뻐한다. 사람은 자기 생업과 직업에 걸맞아 보여야 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면서도 직업마다의 현학은 거슬린다. 삶의 시기가 다른 것에도 같은 이유로 다른 몸가짐이 배정되어 있다. 우리는 늙음에서 그 허약함과 오랜 겪음과 다 닳은 감수성이 자연스럽고도 존경을 부르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듯한 그 무거움과 차분함을 기대한다. 그리고 젊음에서는, 마음을 끄는 모든 대상이 삶의 그 이른 시기의 부드럽고 아직 길들지 않은 감각에 남기기 쉬운 생생한 인상에서 나오리라고 경험이 우리에게 기대하도록 가르쳐 준 그 감수성과 그 밝음과 팔팔한 활기를 찾을 것이라고 셈한다. 그러나 그 두 나이는 각각 자기에게 딸린 이런 특색을 너무 많이 지니기도 쉽다. 젊음의 들뜬 경솔함과 늙음의 꿈쩍하지 않는 무감각은 똑같이 거슬린다. 흔히 하는 말대로 젊은이는 그 행동에 늙은이의 몸가짐이 얼마쯤 있을 때 가장 마음에 들고, 늙은이는 젊은이의 밝음을 얼마쯤 지니고 있을 때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다른 쪽의 몸가짐을 너무 많이 지니기도 쉽다. 늙음에서는 용서되는 그 지나친 차가움과 무딘 형식스러움이 젊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젊음에서는 너그럽게 넘겨지는 그 경솔함과 무심함과 헛됨이 늙음을 업신여김을 받게 만든다.

관습이 우리를 이끌어 지위와 직업마다에 배정하게 하는 그 특유한 성격과 몸가짐은 때로 아마 관습과 무관한 적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삶의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히 영향을 미치는 온갖 사정을 우리가 다 헤아려 넣는다면 그것 자체를 위해 우리가 시인할 그런 것이다. 어떤 사람 행동의 적정성은 그것이 그의 사정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 걸맞은가에 딸려 있지 않고, 그의 처지를 우리 자신에게 가져와 볼 때 자연히 그의 주의를 불러야 한다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사정에 걸맞은가에 딸려 있다. 그가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 너무 사로잡혀 나머지를 온전히 소홀히 하는 듯이 보이면, 우리는 그의 행위를 우리가 온전히 함께 갈 수 없는 것으로서 부인하는데, 그의 처지의 모든 사정에 적정하게 맞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주의를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라면, 그가 자기를 주로 사로잡는 대상을 두고 드러내는 그 감정은 우리가 온전히 동감하고 시인할 만한 것을 넘어서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삿집에 사는 어버이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서 비통과 애틋함을 얼마쯤 드러내도 나무람을 받지 않을 수 있으나, 군대를 이끄는 장군에게서는, 영예와 나라의 안전이 그의 주의를 그토록 크게 요구하는 터에 그것이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여느 때에는 직업이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서로 다른 대상이 차지해야 하듯이, 서로 다른 정념이 자연히 그들에게 버릇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들의 처지를 우리 자신에게 가져와 볼 때, 우리는 어떤 일이든 그것이 일으키는 감정이 그들 마음의 굳은 습관과 기질과 맞아떨어지는가 어긋나는가에 따라 자연히 그들에게 더 크게든 더 작게든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된다. 삶의 밝은 즐거움과 놀이에 장교에게서 셈하는 것과 같은 감수성을 성직자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기다리는 그 경외를 일으키는 뒷날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자기 특유한 일이고, 의무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일마다 어떤 끔찍한 결과가 따를 수 있는지를 알려야 하며, 자기가 가장 정확히 그에 따르는 본을 보여야 하는 사람은, 경솔하게도 대수롭지 않은 듯이도 적정하게 전할 수 없는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인 듯하다. 그의 마음은 너무 크고 엄숙한 것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어서, 헤픈 이들과 밝은 이들의 주의를 채우는 그 경박한 대상들의 인상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습과 무관하게, 관습이 이 직업에 배정해 놓은 몸가짐에 적정성이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성직자의 행동에서 기대하도록 익어 온 그 무겁고 그 엄정하고 초연한 엄격함보다 성직자의 성격에 더 걸맞은 것이 없음을 선선히 느낀다. 이 성찰들은 너무나 뻔한 것이어서, 언젠가 한 번쯤 그것을 해 보고 이 직분의 여느 성격을 자기가 시인하는 까닭을 이렇게 스스로에게 설명해 보지 않았을 만큼 생각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른 몇몇 직업의 관습적인 성격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는 그만큼 뻔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우리 시인은 온전히 습관에 서 있어서 이런 종류의 성찰로 굳어지거나 살아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관습에 이끌려 군인이라는 직업에 밝음과 경솔함과 팔팔한 거침없음을, 그리고 얼마쯤의 헤픔까지 붙여 놓는다. 그러나 어떤 마음결이나 기질의 가락이 이 처지에 가장 걸맞을지를 헤아려 본다면, 우리는 아마도 가장 진지하고 생각 깊은 마음의 결이 삶이 끊임없이 남다른 위험에 놓여 있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죽음과 그 뒤에 오는 것을 더 줄곧 생각해야 할 이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리라고 단정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정이야말로 그 반대되는 마음결이 이 직업의 사람들 사이에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까닭일 법하다. 죽음을 흔들림 없이 주의하여 바라볼 때 그 두려움을 이기려면 그토록 큰 애씀이 드니, 줄곧 죽음에 놓여 있는 이들은 생각을 아예 그것에서 돌려 버리고 걱정 없는 안심과 무심함에 자신을 감싸며, 이를 위하여 온갖 놀이와 헤픔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편이 더 쉽다고 여긴다. 진영은 생각 깊거나 시름 잠긴 사람의 터가 아니다. 사실 그런 결의 사람들은 흔히 마음을 넉넉히 굳히며, 큰 애씀으로 피할 길 없는 죽음까지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맞아 갈 수 있다. 그러나 덜 급박하다 해도 끊임없는 위험에 놓여 있는 것, 이 애씀을 오랫동안 얼마쯤 들여야 하는 것은 마음을 지치게 하고 짓눌러, 마음이 어떠한 행복도 누림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예 애쓸 일이 없는 밝고 걱정 없는 이들, 앞을 내다보지 않기로 아주 작정하고 끊임없는 즐거움과 놀이 속에서 자기 처지에 대한 모든 불안을 잃어버리는 이들이 그런 사정을 더 쉽게 견딘다. 어떤 특별한 사정으로 장교가 남다른 위험에 놓이게 되리라고 셈할 이유가 없을 때에는, 그는 자기 성격의 밝음과 헤픈 생각 없음을 잃기가 매우 쉽다. 도시 수비대의 대장은 보통 나머지 시민들과 다름없이 착실하고 조심스럽고 아끼는 짐승이다. 같은 이유로 오랜 평화는 민간의 성격과 군인의 성격 사이의 차이를 줄이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이 직업 사람들의 여느 처지는 밝음과 얼마쯤의 헤픔을 그토록 크게 그들의 여느 성격으로 만들어 놓고, 관습은 우리 상상 속에서 이 성격을 이 삶의 처지와 그토록 강하게 이어 놓았으므로, 우리는 자기 특유한 성미나 처지 때문에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기가 매우 쉽다. 우리는 도시 수비대의 무겁고 조심스러운 얼굴을 보고 웃는데, 그것이 자기 직업의 얼굴과 그토록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흔히 자기 몸가짐의 한결같음을 부끄러워하는 듯하고, 자기 생업의 유행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자기에게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그 경솔함을 지어 보이기를 좋아한다. 존경을 부르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보아 온 처신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 상상 속에서 그 부류와 그토록 이어져 버려, 한쪽을 볼 때마다 우리는 다른 쪽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셈하며, 실망할 때는 찾으려 했던 무엇인가를 놓친다. 우리는 낯이 뜨거워지고 멈추어 서서, 우리가 넣어 두려 했던 부류와는 다른 갈래에 속하기를 드러내 놓고 꾀하는 성격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대와 나라가 다른 서로 다른 처지는 같은 결로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여느 이들에게 다른 성격을 주기 쉽고, 비난받을 만하거나 칭찬받을 만한 자질 하나하나의 특정한 정도에 관한 그들의 감정은 자기 나라에서 자기 시대에 흔한 그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러시아에서라면 매우 높이 여겨질, 아니 어쩌면 사내답지 못한 아첨으로 여겨질 그런 정도의 예의바름이 프랑스 궁정에서는 거칢과 야만스러움으로 여겨질 것이다. 폴란드 귀족에게서라면 지나친 인색으로 여겨질 그런 정도의 질서와 검약이 암스테르담 시민에게서는 헤픔으로 여겨질 것이다. 시대와 나라마다 자기들 사이에서 높이 여겨지는 이들에게 흔히 보이는 그 자질 하나하나의 정도를 그 특정한 재능이나 덕의 황금의 중용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의 서로 다른 사정이 서로 다른 자질을 그들에게 더 크게든 더 작게든 버릇으로 만드는 데 따라 이것이 달라지므로, 성격과 행동의 정확한 적정성에 관한 그들의 감정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문명화된 나라들 사이에서는 인간애에 서 있는 덕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정념을 다스리는 것에 서 있는 덕보다 더 가꾸어진다. 거칠고 야만스러운 나라들 사이에서는 아주 달라, 자기를 부정하는 덕이 인간애의 덕보다 더 가꾸어진다. 예의와 정중함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안전과 행복은 위험을 업신여기는 일에, 수고와 배고픔과 고통을 참아 내는 일에 거의 연습할 거리를 주지 않는다. 가난은 쉽게 피할 수 있고, 그러므로 그것을 업신여기는 일은 덕이기를 거의 그친다. 즐거움을 삼가는 일이 덜 필요해지고, 마음은 더 자유롭게 스스로를 늘어뜨려 이 모든 특정한 점에서 자기 자연스러운 성향에 몸을 맡긴다.

미개인과 야만인 사이에서는 아주 다르다. 미개인은 누구나 일종의 스파르타식 훈육을 겪으며, 자기 처지의 필요에 따라 온갖 고난에 단련된다.13 그는 끊임없는 위험에 놓여 있다. 그는 흔히 가장 심한 배고픔의 극단에 놓이고, 자주 순전한 결여로 죽는다. 그의 사정은 그를 온갖 괴로움에 익숙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 괴로움이 일으키기 쉬운 정념 가운데 어느 것에도 자리를 내어 주지 않도록 그를 가르친다. 그는 그런 약함에 대해 자기 동족에게서 어떤 동감이나 너그러움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남을 위해 많이 느낄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이 얼마쯤 편안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비참이 우리를 매우 심하게 조이면 우리는 이웃의 비참을 살필 겨를이 없다. 그리고 모든 미개인은 자기 자신의 결여와 필요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그것에 많은 주의를 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미개인은 자기 괴로움의 성질이 무엇이든 주위 사람들에게서 아무 동감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약함이 새어 나가게 하여 자기를 드러내기를 떳떳하지 않게 여긴다. 그의 정념은 아무리 거세고 격렬하더라도 그 얼굴빛의 고요함이나 행위와 행동의 차분함을 흐트러뜨리도록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북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가장 철저한 무심함을 지어 보이며, 사랑에든 비통에든 분개에든 어떤 점에서라도 자기가 사로잡힌 것으로 보이면 자기가 낮아졌다고 여길 것이라고 전한다. 이 점에서 그들의 아량과 자기 통제는 유럽인이 헤아릴 수 있는 바를 거의 넘어선다. 지위와 운에 관해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있는 나라에서는 혼인에서 양쪽이 서로에게 기울어지는 마음만이 헤아려지고 아무런 통제도 없이 따라지리라고 기대할 만하다. 그러나 이 나라야말로 모든 혼인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버이들이 짜 맞추는 나라이고, 젊은 남자가 한 여자를 다른 여자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티를 내거나 자기가 언제 누구와 혼인하게 될지를 두고 가장 완전한 무심함을 드러내지 않으면 자기가 영원히 창피를 당했다고 여길 나라다. 인간애와 정중함의 시대에 그토록 크게 너그럽게 넘겨지는 사랑의 약함은 미개인들 사이에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무름으로 여겨진다. 혼인한 뒤에도 양쪽은 그토록 더러운 필요에 서 있는 이어짐을 부끄러워하는 듯하다. 그들은 함께 살지 않는다. 그들은 몰래만 서로 만난다. 둘은 계속 각자 아버지의 집에 머물며,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나무람 없이 허락되는 두 성의 드러난 함께 살기가 여기에서는 가장 점잖지 못하고 사내답지 못한 육욕으로 여겨진다. 그들이 이 마음에 드는 정념에 대해서만 이 절대적인 자기 통제를 떨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흔히 동족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상해와 꾸짖음과 가장 거친 모욕을 가장 완전한 무감각의 모습으로, 조금의 분개도 드러내지 않고 견딘다. 미개인이 전쟁 포로가 되어 여느 때와 같이 정복자들에게서 죽음의 선고를 받으면, 그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들으며, 그 뒤에 가장 무서운 고문에 자기를 내어 주면서도 결코 자기를 두고 슬퍼하거나 적을 업신여기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정념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어깨로 매달려 뭉근한 불 위에 있으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을 비웃고, 자기 손에 떨어진 그들 동족을 자기는 얼마나 더 재간 있게 괴롭혔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한다. 몸에서 가장 부드럽고 가장 뚜렷하게 느끼는 온갖 자리가 여러 시간에 걸쳐 그슬리고 타고 찢긴 뒤에는, 그의 비참을 늘이려고 흔히 잠깐의 숨 돌림이 허락되어 그를 말뚝에서 내려 준다. 그는 이 틈을 이런저런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쓰며, 나라의 소식을 묻고, 오직 자기 처지 말고는 아무것에도 무심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관찰자들도 같은 무감각을 드러낸다. 그토록 끔찍한 대상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 아무 인상도 남기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그를 괴롭히는 데 손을 빌려 줄 때 말고는 그 포로를 거의 보지도 않는다. 다른 때에는 담배를 피우고 아무 흔한 대상으로나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데, 마치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미개인은 누구나 가장 어린 젊음부터 이 무서운 끝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는 이를 위하여 그들이 죽음의 노래라 부르는 것을 지어 놓는데, 그것은 자기가 적의 손에 떨어져 그들이 가하는 고문 아래 숨을 거두어 갈 때 부를 노래다.14 그것은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모욕으로 되어 있고, 죽음과 고통에 대한 가장 높은 업신여김을 드러낸다. 그는 남다른 경우마다 이 노래를 부르니, 싸움에 나갈 때, 들에서 적을 만날 때, 또는 자기가 가장 무서운 불운에 자기 상상을 익숙하게 만들어 놓았고 사람에게 일어날 어떤 일도 자기 결심을 겁먹게 하거나 자기 뜻을 바꾸어 놓을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할 때마다 부른다. 죽음과 고문에 대한 같은 업신여김이 다른 모든 미개한 민족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다. 아프리카 연안에서 온 흑인 가운데, 이 점에서 자기 더러운 주인의 넋이 헤아리기조차 흔히 힘겨워하는 정도의 아량을 지니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다. 운이 사람들 위에 자기 제국을 이보다 더 잔인하게 떨친 적이 없었으니, 그 영웅들의 민족을 유럽 감옥의 쓰레기에게, 곧 자기가 떠나온 나라의 덕도 자기가 가는 나라의 덕도 지니지 못한 자들, 그 경솔함과 짐승 같음과 천함이 정복당한 이들의 업신여김을 그토록 마땅히 받는 자들에게 내어 맡긴 때가 그러하다.15

자기 나라의 관습과 교육이 미개인마다에게 요구하는 이 영웅적이고 이길 수 없는 굳건함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살도록 자라난 이들에게는 요구되지 않는다. 뒤의 이들이 아플 때 하소연하고, 괴로울 때 비통해하고, 사랑에 사로잡히거나 분노로 흐트러지도록 자기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쉽게 용서된다. 그런 약함이 그들 성격의 본질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들이 정의나 인간애에 어긋나는 어떤 일을 하도록 자기를 실려 가게 하지 않는 한, 그들 얼굴빛의 고요함이나 말과 행동의 차분함이 얼마쯤 헝클어지고 흐트러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명성을 조금밖에 잃지 않는다. 남의 정념에 더 큰 감수성을 지닌, 인간애가 있고 다듬어진 사람들은 활기차고 정념에 찬 행동에 더 선선히 들어갈 수 있고 얼마쯤의 작은 지나침을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다. 당사자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재판관들의 공평함을 확신하므로 더 강한 정념의 표현에 자기를 맡기고, 자기 감정의 격렬함으로 그들의 업신여김을 사게 되는 것을 덜 두려워한다. 우리는 낯선 사람 앞에서보다 벗 앞에서 더 많은 감정을 드러내기를 무릅쓸 수 있는데, 저쪽보다 이쪽에서 더 큰 너그러움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결로 문명화된 나라들 사이의 예법은 야만인들 사이에서 시인되는 것보다 더 활기찬 행동을 허락한다. 앞의 이들은 벗의 열린 마음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뒤의 이들은 낯선 사람의 사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대륙에서 가장 다듬어진 두 나라인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끄는 일에 대해 자기를 드러낼 때의 그 감정과 활기는, 우연히 그들 사이를 여행하게 된 낯선 이들, 곧 더 둔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나 자기 나라에서는 그런 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이 정념에 찬 행동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을 처음에는 놀라게 한다. 젊은 프랑스 귀족은 연대 하나를 얻지 못하면 온 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뒤 보 신부의 말로는, 이탈리아인은 20실링의 벌금을 선고받으며 영국인이 사형 선고를 받으며 드러내는 것보다 더 많은 감정을 드러낸다.16 로마의 정중함이 가장 높던 때에 키케로는 자기를 낮추는 일 없이 온 원로원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슬픔의 온갖 쓰라림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었으니, 그가 거의 모든 연설의 끝에서 그렇게 했음이 분명하다. 로마의 더 이르고 더 거친 시대의 연설가들은 아마 그 시대의 몸가짐에 맞추어 그토록 많은 감정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스키피오 집안과 라일리우스 집안과 대 카토가 그토록 많은 애틋함을 사람들 눈앞에 드러내는 일은 자연과 적정성을 깨뜨리는 것으로 여겨졌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 옛 무사들은 질서와 무거움과 좋은 판단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었으나, 키케로가 태어나기 몇 해 전에 그라쿠스 형제와 크라수스와 술피키우스가 로마에 처음 들여온 그 숭고하고 정념에 찬 웅변에는 낯설었다고 한다.17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며 오랫동안 행해져 온 이 활기찬 웅변이 영국에는 이제 막 들어오기 시작했을 뿐이다. 문명화된 나라와 야만스러운 나라에서 요구되는 자기 통제의 정도 사이의 차이가 이토록 크며, 그들이 행동의 적정성을 판단하는 기준도 그토록 다르다.

이 차이는 그만큼 본질적인 다른 많은 차이를 낳는다. 다듬어진 사람들은 자연의 움직임에 얼마쯤 자리를 내어 주는 데 익숙해져 솔직하고 열려 있고 참되게 된다. 거꾸로 야만인들은 정념마다의 드러남을 짓누르고 감추어야 하므로 반드시 거짓과 속임의 버릇을 얻는다. 아시아에서든 아프리카에서든 아메리카에서든 미개한 민족들과 사귀어 본 이들은 모두, 그들이 똑같이 속을 알 수 없으며 진실을 감추려 마음먹으면 어떤 따져 묻기로도 그것을 끌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가장 공교로운 물음으로도 낚이지 않는다. 고문 자체도 그들이 말할 마음이 없는 것을 자백하게 만들 수 없다. 미개인의 정념 또한 아무런 밖으로 드러난 감정으로도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당하는 쪽의 가슴에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모두 가장 높은 격노의 자리에 올라 있다. 그는 분노의 낌새를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의 앙갚음은 그가 그것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될 때 언제나 피를 부르고 무섭다. 아주 작은 모욕도 그를 절망으로 몰아간다. 사실 그의 얼굴빛과 말은 여전히 착실하고 차분하며 마음의 가장 완전한 고요함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흔히 가장 거세고 가장 격렬하다. 북아메리카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어린 나이와 더 겁 많은 성의 사람들이 어머니에게서 가벼운 꾸짖음 하나를 받고 물에 몸을 던지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그것도 아무 정념도 드러내지 않고 「당신에게는 이제 딸이 없을 것이오」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한다. 문명화된 나라들에서는 사람들의 정념이 보통 그토록 거세거나 그토록 앞뒤를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흔히 소리가 크고 요란하지만 좀처럼 크게 해롭지 않으며, 자기가 그토록 크게 움직인 것이 옳다는 것을 관찰자에게 납득시키고 그의 동감과 시인을 얻어 내는 만족 말고는 다른 어떤 만족도 자주 겨냥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관습과 유행이 인류의 도덕적 감정에 미치는 이 모든 작용은 그것들이 다른 몇몇 경우에 낳는 것에 견주면 대수롭지 않다. 그리고 그 원리들이 판단의 가장 큰 비틀림을 낳는 것은 성격과 행동의 일반적인 결에 관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관행의 적정성이나 부적정성에 관해서다.

관습이 우리에게 직업과 삶의 처지에 따라 시인하도록 가르치는 서로 다른 몸가짐은 가장 중요한 일에 관계되지 않는다. 우리는 젊은이에게서만큼 늙은이에게서도, 장교에게서만큼 성직자에게서도 진실과 정의를 기대하며, 그들 각각의 성격을 가르는 표징을 찾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일 뿐이다. 이런 일에서도 흔히 눈에 띄지 않는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것을 살펴본다면 관습과 무관하게, 관습이 우리에게 직업마다에 배정하도록 가르쳐 온 그 성격에 적정성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우리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비틀림이 매우 크다고 하소연할 수 없다. 나라마다의 몸가짐이 자기들이 높이 여길 만하다고 여기는 성격에서 같은 자질의 서로 다른 정도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여기에서조차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한 덕의 의무가 때로 늘어나 다른 덕의 경계를 조금 침범하는 것이다. 폴란드인 사이에 유행하는 시골스러운 손님 대접은 아마 알뜰한 살림과 좋은 질서를 조금 침범한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높이 여겨지는 검약은 도량이 큼과 좋은 어울림을 조금 침범한다. 미개인에게 요구되는 단단함은 그들의 인간애를 줄인다. 그리고 문명화된 나라들에서 요구되는 섬세한 감수성은 아마 때로 성격의 사내다운 굳건함을 무너뜨린다. 대체로 어떤 나라에서 자리를 차지한 몸가짐의 결은 보통 전체로 보아 그 처지에 가장 걸맞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단함은 미개인의 사정에 가장 걸맞은 성격이고, 감수성은 매우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사람의 사정에 가장 걸맞은 성격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조차 우리는 사람들의 도덕적 감정이 매우 거칠게 비틀렸다고 하소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관습이 행위의 자연스러운 적정성에서 가장 크게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행위나 행동의 일반적인 결에서가 아니다. 특정한 관행에 관해서는 그 영향이 흔히 좋은 도덕을 훨씬 더 크게 무너뜨리며, 옳음과 옳지 못함의 가장 뻔한 원리를 뒤흔드는 특정한 행동을 옳고 나무랄 데 없는 것으로 세워 놓을 수도 있다.

예컨대 젖먹이를 해치는 것보다 더 큰 야만스러움이 있을 수 있는가? 그 어찌할 수 없음과 그 죄 없음과 그 사랑을 부름은 적의 연민까지 불러내며, 그 부드러운 나이를 아끼지 않는 것은 격노한 잔인한 정복자의 가장 거센 짓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거센 적조차 침범하기를 두려워하는 그 약함을 해칠 수 있는 어버이의 가슴이 어떠할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해야 하는가? 그런데도 갓난아이를 내버리는 일, 곧 그들을 죽이는 일은 그리스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정중하고 문명화된 아테나이인 사이에서조차 허락된 관행이었다.18 그리고 어버이의 사정이 아이를 길러 내기에 마땅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 아이를 배고픔이나 들짐승에게 내버리는 일이 나무람이나 꾸짖음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 관행은 아마 가장 미개한 야만의 시대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상상은 사회의 그 가장 이른 시기에 처음 그것과 친해졌고, 그 관습이 한결같이 이어진 탓에 그들은 그 뒤로 그것의 엄청남을 알아채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이 관행이 모든 미개한 민족 사이에 널리 퍼져 있음을 본다. 그리고 사회의 그 가장 거칠고 가장 낮은 상태에서는 그것이 다른 어떤 상태에서보다 의심 없이 더 용서할 만하다. 미개인의 지나친 궁핍은 흔히 그 자신이 배고픔의 가장 심한 극단에 자주 놓일 만큼이고, 그는 흔히 순전한 결여로 죽으며, 자기와 자기 아이를 함께 먹여 살리기가 자주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그가 아이를 내버린다 해서 우리가 놀랄 수는 없다. 맞설 수 없는 적에게서 달아나면서 젖먹이가 자기 달아남을 늦추기에 그것을 내려놓는 사람은 분명히 용서받을 만할 것이다. 그것을 살리려 애쓴다 해서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과 함께 죽는 위안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이 상태에서 어버이가 자기 아이를 길러 낼 수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허락되었다는 것이 우리를 그토록 크게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의 뒷시대에는 같은 일이 멀리 내다본 이익이나 편함을 헤아려 허락되었으니, 그것으로는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끊이지 않은 관습이 이때에 이르러 그 관행을 그토록 철저히 옳은 것으로 세워 놓았으므로, 세상의 헐거운 격언만 이 야만스러운 특권을 견디어 준 것이 아니라 더 옳고 더 정확해야 했을 철학자들의 가르침조차 굳어진 관습에 끌려가, 이 경우에도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끔찍한 잘못을 꾸짖는 대신 멀리서 끌어온 공공의 효용을 들어 그것을 받쳐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행정을 맡은 이가 많은 경우에 권해야 할 것으로 이야기한다. 인간애가 있는 플라톤도 같은 생각이며, 그의 모든 글에 생기를 주는 듯한 그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을 지녔으면서도 이 관행에 부인의 표를 어디에도 붙이지 않는다.19 관습이 인간애를 그토록 무섭게 깨뜨리는 일에 허가를 줄 수 있다면, 관습이 허락할 수 없을 만큼 거친 특정한 관행은 거의 없다고 우리는 넉넉히 상상할 만하다. 어떤 일이 흔히 행해진다고 사람들이 날마다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듣는데, 그들은 그 자체로 가장 옳지 못하고 가장 이치에 닿지 않는 행위를 두고 이것이 넉넉한 변명이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관습이 행위와 행동의 일반적인 결이나 성격에 관한 우리 감정을, 특정한 관행의 적정성이나 옳지 못함에 관해서만큼 비틀어 놓는 일이 결코 없는 데에는 뻔한 이유가 있다. 그런 관습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의 행위와 행동의 여느 흐름이 내가 방금 말한 그 끔찍한 관행과 한 결인 사회는 한순간도 버티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주

  1. 1.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custom and faction(관습과 당파)으로 적었다. 이 부 전체가 관습과 유행을 다루고 바로 다음 대목부터 유행을 논하므로 fashion 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

  2. 2.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reparation(보상)으로 적었다. 앞뒤가 함께 이어 놓은 것을 떼어 놓는다는 말이므로 separation(떼어 놓음)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

  3. 3. 옮긴이 — 고전 건축의 다섯 주식(五柱式)은 토스카나식·도리스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복합식이다. 주두(柱頭)는 기둥머리의 장식, 소용돌이는 이오니아식 기둥머리 양쪽에 감긴 나선 무늬, 잎 장식은 코린트식 기둥머리를 덮는 아칸서스 잎 무늬를 가리킨다.

  4. 4. 옮긴이 — 장 라신(1639~1699)은 프랑스의 비극 작가이고, 볼테르(1694~1778)의 『앙리아드』(1723)는 앙리 4세를 노래한 서사시다. 아래 인용된 것은 영어 골계시의 한 행으로, 스미스는 영어에서 우스개에 쓰이는 이 경쾌한 가락이 프랑스에서는 비극에 쓰이는 영웅시 시행, 곧 12음절의 알렉상드랭과 같은 운율임을 말하고 있다.

  5. 5.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eminent matter(뛰어난 사안)로 적었다. 앞에 나온 지위 높은 사람의 옷차림과 짝을 이루는 자리이므로 eminent master(뛰어난 거장)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

  6. 6. 옮긴이 — 세네카(기원전 4년경~기원후 65), 퀸틸리아누스(35년경~100년경), 살루스티우스(기원전 86~기원전 35년경), 타키투스(56년경~120년경). 모두 로마의 저술가이며 퀸틸리아누스는 수사학 교사였다.

  7. 7. 옮긴이 — 알렉산더 포프(1688~1744),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 새뮤얼 버틀러(1613~1680), 존 드라이든(1631~1700), 조지프 애디슨(1672~1719). 모두 영국의 시인이자 문인이다.

  8. 8. 옮긴이 — 클로드 뷔피에(1661~1737). 프랑스의 예수회 사제로 『제1진리론』(1724)에서 아름다움을 논했다.

  9. 9. 옮긴이 — 기니 해안은 당시 유럽에서 서아프리카 연안, 곧 오늘날의 기니만 일대를 부르던 이름이다. 앞에 나온 「무어 말」의 무어는 당시 유럽에서 북아프리카 일대와 그곳 사람을 가리켜 쓴 말이다.

  10. 10. 옮긴이 — 아이의 머리를 판자로 눌러 모양을 바꾸는 관습은 당시 유럽의 여행기와 선교 보고가 북아메리카 원주민 일부 집단에 관해 전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유럽 여성의 관습은 고래뼈를 넣어 몸통을 곧게 조이던 스테이즈, 곧 코르셋을 가리킨다.

  11. 11. 옮긴이 — 네로(37~68)와 클라우디우스(기원전 10~기원후 54)는 로마 황제다.

  12. 12. 옮긴이 — 찰스 2세(1630~1685)는 1660년 왕정이 복고되면서 영국 왕위에 올랐다.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를 더 철저히 개혁하려 한 개신교도를 가리키며, 앞선 공화정 시기에 세력을 쥐었다.

  13. 13. 옮긴이 — 이 대목의 「미개인」(savage)과 「야만인」(barbarian)은 18세기 유럽 저술에서 유럽식 정착 사회 밖에 사는 사람들을 두고 쓴 말이다. 스미스가 드는 예는 주로 당시 여행기와 선교 보고가 전한 북아메리카 원주민이다. 스파르타식 훈육은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에서 소년들에게 시킨 엄격한 공동 군사 교육을 가리킨다.

  14. 14. 옮긴이 — 죽음의 노래. 북아메리카 원주민 여러 집단에서 싸움에 나갈 때나 죽음을 앞두고 부른 노래를 당시 유럽의 기록이 이렇게 옮겨 적은 것이다.

  15. 15. 옮긴이 — 이 대목은 대서양 노예무역을 가리킨다. 「유럽 감옥의 쓰레기」는 유럽에서 죄를 지어 식민지로 보내지거나 흘러들어 간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16. 16. 옮긴이 — 장바티스트 뒤 보(1670~1742).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문인으로 『시와 회화에 관한 비평적 고찰』을 썼다. 20실링은 1파운드에 해당한다.

  17. 17. 옮긴이 —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 스키피오 집안과 라일리우스 집안은 기원전 2세기 로마의 이름난 가문이고, 대 카토(기원전 234~기원전 149)는 그 시대의 정치가다.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크라수스, 술피키우스는 기원전 2세기 말에서 1세기 초의 로마 연설가다.

  18. 18. 옮긴이 — 갓난아이 내버리기.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집 밖에 내다 놓아 죽게 하거나 남이 데려가게 한 일을 가리킨다. 아테나이는 아테네의 옛 이름이다.

  19. 19. 옮긴이 —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와 플라톤(기원전 427년경~기원전 347년경). 스미스가 가리키는 대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플라톤의 『국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