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4편 여러 저자가 도덕의 실천 규칙을 다루어 온 방식에 대하여
이 논의의 제3부에서 지적하였듯이, 도덕의 규칙 가운데 정확하고 딱 맞는 것은 정의의 규칙뿐이고 다른 모든 덕의 규칙은 헐겁고 모호하며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앞의 것은 문법 규칙에 견줄 수 있고 뒤의 것은 글에서 숭고하고 우아한 것을 이루어 내는 길로 비평가들이 내놓는 규칙에 견줄 수 있으니, 그런 규칙들은 우리가 겨누어야 할 완전함에 관한 일반적인 관념을 보여 주기는 하되 그것을 얻어 내기 위한 확실하고 틀림없는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도덕의 여러 규칙이 이처럼 서로 다른 정도의 정확함만을 허락하는 까닭에, 그것들을 모아 정리하여 체계로 삼으려 애쓴 저자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한 무리는 어느 한 종류의 덕을 살피는 데서 자연히 이끌려 간 그 헐거운 방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루 따랐고, 다른 한 무리는 규칙 가운데 일부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정확함을 자기 계율 전체에 들여놓으려 그만큼이나 두루 애썼다. 앞의 사람들은 비평가처럼 썼고 뒤의 사람들은 문법가처럼 썼다.
1. 앞의 사람들, 곧 옛 도덕론자 모두를 여기에 셀 수 있는 그 사람들은 여러 악덕과 덕을 일반적으로 그려 내고 한쪽 기질의 추함과 비참함을, 또 다른 쪽 기질의 적정성과 행복을 짚어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였으며, 낱낱의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들어맞을 정확한 규칙을 많이 세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언어가 밝혀낼 수 있는 한에서, 첫째로 낱낱의 덕이 바탕을 두고 있는 그 마음의 감정이 무엇에 있는지, 곧 우정과 인간애와 도량과 정의와 아량, 그리고 다른 모든 덕과 그에 맞서는 악덕의 본질을 이루는 내면의 느낌 또는 감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밝히려 애썼고, 둘째로 그 감정 하나하나가 우리를 이끌어 갈 일반적인 행동의 길, 곧 처신의 여느 가락과 흐름은 어떤 것인지, 다시 말해 벗을 아끼는 사람, 도량이 큰 사람, 용감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 인간애가 있는 사람이 여느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기를 고르는지를 밝히려 애썼다.
낱낱의 덕이 바탕을 두고 있는 그 마음의 감정을 그려 내는 일은 섬세하면서도 정확한 붓을 요구하기는 하되, 그래도 얼마간의 엄밀함을 갖추어 해낼 수 있는 일이다.1 참으로 사정이 달라질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따라 감정 하나하나가 실제로 겪는, 또는 겪어야 마땅한 그 모든 변화를 다 말로 나타내기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끝이 없고 언어에는 그것들을 가리켜 부를 이름이 모자란다. 예컨대 우리가 늙은 사람에게 느끼는 우정의 감정은 젊은 사람에게 느끼는 것과 다르고, 엄격한 사람에게 품는 것은 더 부드럽고 온화한 몸가짐을 지닌 사람에게 느끼는 것과 다르며, 그것은 또 밝고 생기 있고 기운찬 사람에게 느끼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남자에게 품는 우정은 여자가 우리를 움직여 일으키는 우정과 다른데, 거기에 더 거친 정념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을 때조차 그러하다. 어떤 저자가 이것들과, 또 이 감정이 겪을 수 있는 다른 무한한 온갖 변화를 다 늘어놓고 밝혀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모두에 공통된 우정과 친밀한 애착의 일반적인 감정은 그래도 넉넉한 정도의 정확함을 갖추어 밝혀낼 수 있다. 그것을 그려 낸 그림은 언제나 여러 점에서 온전하지 못할 것이나, 그래도 우리가 그 본래의 것을 만났을 때 알아보게 할 만큼, 나아가 그것과 상당히 닮은 다른 감정들, 곧 호의나 존경이나 존중이나 감탄과 갈라낼 수 있게 할 만큼은 닮아 있을 수 있다.
낱낱의 덕이 우리를 떠밀어 하게 할 여느 행동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일반적으로 그려 내는 일은 그보다 더 쉽다. 사실 그 덕이 바탕을 두고 있는 내면의 감정을 이런 종류의 일을 얼마쯤 하지 않고서 그려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정념의 온갖 서로 다른 변형이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보이지 않는 모습을 언어로 나타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가리켜 서로 갈라낼 다른 길은 없고, 다만 그것들이 밖으로 빚어내는 결과, 곧 그것들이 낯빛과 몸가짐과 겉으로 드러나는 처신에 일으키는 달라짐,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결심, 그것들이 떠밀어 하게 하는 행동을 그려 내는 길밖에 없다. 키케로2가 『의무론』 제1권에서 우리를 네 가지 으뜸 덕의 실천으로 이끌려 애쓰는 것도 이러한 길이며, 아리스토텔레스3가 『윤리학』의 실천을 다루는 대목에서 우리가 처신을 다스리는 데 쓰기를 바라는 여러 습성, 곧 후함과 큰 씀씀이와 아량, 나아가 익살과 유쾌한 기분까지 짚어 보이는 것도 이러한 길이다. 그 너그러운 철학자는 이 성질들이 덕의 목록에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고 여겼으나, 우리가 그것들에 자연히 보내는 시인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 그토록 우러러볼 이름을 붙일 자격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한 저작들은 우리에게 마음에 들고 생생한 몸가짐의 그림을 보여 준다. 그 서술이 생기가 있음으로써 그것들은 우리가 덕을 타고나 사랑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고 악덕에 대한 우리 혐오를 키운다. 또 그 관찰이 섬세하면서도 정당함으로써 그것들은 처신의 적정성에 관한 우리의 타고난 감정을 바로잡고 또 또렷하게 하는 데 자주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섬세하고 까다로운 주의를 여러 가지로 일러 줌으로써 그러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가 떠올리기 쉬웠을 것보다 더 정확하게 반듯한 처신으로 우리를 만들어 준다. 도덕의 규칙을 이렇게 다루는 데에 제대로 윤리학이라 불리는 학문이 있으니, 이 학문은 비평과 마찬가지로 가장 정확한 엄밀함을 허락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매우 쓸모 있고 또 마음에 드는 학문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웅변의 꾸밈을 가장 잘 받아들이며, 그 꾸밈을 통하여 가능한 일이라면 가장 작은 의무의 규칙에까지 새로운 무게를 얹어 줄 수 있다. 그 계율은 이처럼 옷을 입고 꾸밈을 받았을 때 젊음의 휘기 쉬움 위에 가장 고귀하고 가장 오래가는 자취를 남길 수 있으며, 그 도량이 큰 나이가 타고난 아량과 맞아떨어지는 까닭에 적어도 한동안은 가장 영웅다운 결심을 불어넣을 수 있고,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고 가장 쓸모 있는 습성을 세우고 굳히는 쪽으로 기운다. 계율과 권고가 우리를 덕의 실천으로 북돋우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이렇게 전해지는 이 학문이 다 해낸다.
2. 뒤의 도덕론자 무리, 곧 그리스도교 교회의 중세와 그 뒤 여러 세기의 결의론자4 모두와, 이 세기와 지난 세기에 이른바 자연법학5을 다룬 이들 모두를 여기에 셀 수 있는 그 무리는, 자기들이 우리에게 권하려는 그 처신의 흐름을 이처럼 일반적으로 그려 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 처신의 낱낱의 사정을 이끌어 줄 딱 맞고 정확한 규칙을 세우려 애쓴다. 그러한 딱 맞는 규칙이 제대로 주어질 수 있는 덕은 정의뿐이므로, 이 두 갈래 저술가 무리가 주로 살핀 것도 바로 이 덕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다루는 길은 서로 아주 다르다.
법학의 원리를 두고 글을 쓰는 이들은 그 의무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 힘으로 받아 낼 자격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겨야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 곧 어떤 공평한 관찰자라도 그가 그것을 받아 내는 일을 두고 그를 시인해 줄 것이 무엇인지, 또는 그가 자기 사건을 맡긴, 그리고 그에게 정의를 세워 주기로 나선 재판관이나 중재인6이 상대에게 어떤 것을 당하거나 이행하도록 지워야 마땅한지만을 살핀다. 결의론자들은 이와 달리 힘으로 적정하게 받아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보다, 그 의무를 진 사람이 정의의 일반 규칙을 가장 거룩하고 가장 꼼꼼하게 존중하는 마음에서, 또 이웃에게 부당한 일을 하거나 자기 자신의 성격의 온전함을 깨뜨리지 않을까 하는 가장 양심에 따른 두려움에서 자기가 이행할 의무를 진다고 여겨야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 많이 따진다. 재판관과 중재인의 판단을 위한 규칙을 정해 주는 것이 법학의 목적이다. 좋은 사람의 처신을 위한 규칙을 정해 주는 것이 결의론의 목적이다. 법학의 규칙이 아무리 완전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규칙을 모두 지킴으로써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은 겉에서 오는 벌을 면하는 일밖에 없다. 결의론의 규칙이 마땅히 그러해야 할 그대로라고 가정한다면, 그 규칙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우리 처신의 딱 맞고 꼼꼼한 섬세함으로 상당한 칭찬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정의의 일반 규칙을 거룩하고 양심에 따라 존중하는 마음에서, 남이 그에게서 강제로 받아 내려 한다면 가장 큰 불의가 될 만한 일, 또는 어떤 재판관이나 중재인이 그에게 힘으로 지운다면 가장 큰 불의가 될 만한 일을 여러 가지로 이행해야 마땅하다고 스스로 여겨야 하는 경우는 자주 일어날 수 있다. 흔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노상강도가 죽음의 두려움을 들이대어 길 가는 사람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불의한 힘으로 억지로 받아 낸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매우 많이 다투어진 문제다.
이것을 다만 법학의 문제로 살핀다면 그 판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상강도가 상대에게 이행을 강제하려고 힘을 쓸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그 약속을 억지로 받아 낸 일은 가장 큰 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였고, 그 이행을 억지로 받아 내는 일은 앞의 범죄에 새로운 범죄를 하나 더 얹는 것일 뿐일 터이다. 자기가 정당하게 죽일 수도 있었을 사람에게 고작 속임을 당한 자라면 어떠한 상해도 당하였다고 하소연할 수 없다. 재판관이 그러한 약속의 의무를 강제로 이행시켜야 한다거나, 행정관이 그 약속을 근거로 법정에서 소로 다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7 온갖 터무니없는 소리 가운데 가장 우스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법학의 문제로 살핀다면 우리는 그 판단을 두고 조금도 헤맬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결의론의 문제로 살핀다면 그리 쉽게 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 모든 진지한 약속을 지키라고 명하는 저 가장 거룩한 정의의 규칙을 양심에 따라 존중하는 마음에서 스스로 이행할 의무를 진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하는 것은 적어도 훨씬 더 의심스럽다. 그를 이런 처지에 몰아넣은 그 못된 자의 낭패에는 어떠한 존중도 돌아갈 것이 없고, 그 강도에게는 어떠한 상해도 가해지지 않으며, 따라서 힘으로 받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는 어떠한 다툼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자신의 품위와 명예에, 곧 참의 법을 우러르게 하고 배신과 거짓에 가까이 가는 것이면 무엇이든 혐오하게 하는 그 성격의 부분이 지닌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함에는 얼마간의 존중이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더 이치에 맞게 문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의론자들은 이에 관하여 크게 갈린다. 한쪽 편, 곧 옛사람으로는 키케로를, 요즈음 사람으로는 푸펜도르프와 그의 주석자 바르베이락8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경우에 결코 헐거운 결의론자가 아니었던 고 허치슨 박사9를 여기에 셀 수 있는 그 편은, 그러한 약속에는 어떠한 종류의 존중도 돌아갈 것이 없으며 달리 생각하는 것은 한낱 마음의 약함이요 미신일 뿐이라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정한다. 다른 한쪽 편, 곧 교회의 옛 교부 몇몇과 매우 이름난 요즈음 결의론자 몇몇을 여기에 셀 수 있는1011 그 편은 다른 의견을 지녀 왔고, 그러한 약속은 모두 지킬 의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 문제를 인류의 공통된 감정에 따라 살펴본다면, 이런 종류의 약속에조차 얼마간의 존중이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여겨질 것임을,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경우에 들어맞을 어떤 일반 규칙으로 그것이 얼마만큼인지를 정하기는 불가능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약속을 아주 거침없이 선선히 하고 또 그만큼 거리낌 없이 어기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우리 벗이나 동무로 고르지 않을 것이다. 노상강도에게 5파운드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행하지 않는 신사라면 얼마간의 비난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약속한 금액이 매우 컸다면 무엇을 하는 것이 적정한지는 더 의심스러울 수 있다. 예컨대 그것을 치르면 약속한 사람의 집안이 아주 망할 만한 금액이었다면, 또 가장 쓸모 있는 목적을 이루어 내기에 넉넉할 만큼 큰 금액이었다면, 자잘한 격식을 지키자고 그 돈을 그런 쓸모없는 손에 내던지는 일은 얼마쯤 범죄로 보일 것이고 적어도 지극히 부적정해 보일 것이다. 도둑과 맺은 그러한 언약12을 지키자고 스스로 알거지가 되는 사람, 또는 그 막대한 금액을 치를 힘이 있다 하더라도 10만 파운드를 내버리는 사람은 인류의 상식에 터무니없고 지나치기 그지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한 헤픔은 그의 의무와, 곧 그가 자기 자신과 남에게 함께 지고 있는 것과 어긋나 보일 것이며, 그러므로 이렇게 억지로 받아 낸 약속을 존중하는 마음이 결코 허락해 줄 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확한 규칙으로 그것에 어느 정도의 존중을 보내야 마땅한지, 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돌아갈 수 있는 가장 큰 금액이 얼마일지를 딱 정해 두는 일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이것은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그들의 처지에 따라, 그 약속의 엄숙함에 따라, 나아가 그 맞닥뜨림에서 일어난 일들에 따라서까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약속한 사람이, 가장 막돼먹은 성격의 사람에게서도 이따금 만나게 되는 그런 종류의 호협한 대접을 넉넉히 받았다면 다른 경우보다 더 많은 것이 돌아가야 마땅해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더 거룩한 다른 어떤 의무와 어긋나지 않는 한 딱 맞는 적정성은 그러한 약속을 모두 지킬 것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더 거룩한 의무란 공공의 이해에 대한 존중, 그리고 감사나 타고난 정서나 적정한 선행의 법이 우리에게 돌보라고 떠미는 이들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동기를 존중하는 데서 어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나와야 마땅한지를 정할 정확한 규칙은 우리에게 없고, 따라서 그 덕들이 그러한 약속을 지키는 일과 어긋나는 때가 언제인지를 정할 규칙도 없다.
그러나 알아 둘 것은, 그러한 약속이 어겨질 때에는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그리하였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 약속을 한 사람에게 얼마간의 불명예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약속이 이루어진 뒤에 우리는 그것을 지키는 일의 부적정성을 확신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을 했다는 데에 얼마간의 잘못이 있다. 그것은 적어도 아량과 명예의 가장 높고 가장 고귀한 준칙에서 벗어난 일이다. 용감한 사람이라면 어리석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고 창피를 당하지 않고서는 어길 수도 없는 약속을 하기보다 차라리 죽어야 마땅하다. 이런 종류의 처지에는 언제나 얼마간의 창피가 따르기 때문이다. 배신과 거짓은 그토록 위험하고 그토록 무서운 악덕이면서 동시에 그토록 쉽게, 또 여러 경우에 그토록 안전하게 탐닉할 수 있는 악덕이기에, 우리는 다른 거의 어떤 악덕보다도 그것들을 더 날카롭게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 상상은 어떠한 사정에서도 어떠한 처지에서도 신의를 어기는 모든 일에 수치의 관념을 붙여 둔다. 이 점에서 그것들은 여성의 정결을 어기는 일과 닮았으니, 정결이란 비슷한 이유로 우리가 지나치도록 날카롭게 지키는 덕이며, 이쪽에 대한 우리 감정이 저쪽에 대한 우리 감정보다 더 섬세하지도 않다. 정결을 깨뜨리는 일은 돌이킬 수 없이 명예를 무너뜨린다. 어떠한 사정도 어떠한 졸라 댐도 그것을 덮어 줄 수 없고, 어떠한 슬픔도 어떠한 뉘우침도 그것을 씻어 갚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점에서 그토록 까다로워, 강제로 당한 일조차 명예를 무너뜨리며 마음의 결백함도 우리 상상에서는 몸의 더럽혀짐을 씻어 내지 못한다. 신의를 어기는 일도 마찬가지이니, 그 신의가 인류 가운데 가장 쓸모없는 자에게라도 엄숙하게 걸어 준 것이었다면 그러하다. 신실함은 그토록 없어서는 안 될 덕이어서, 우리는 그것이 다른 아무것도 돌아갈 것이 없는 자들, 곧 우리가 죽이고 멸하여도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들에게조차 두루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어긴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는 목숨을 건지려고 약속하였으며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이 존경을 부르는 다른 어떤 의무와 어긋나기에 그것을 어겼다고 힘주어 말하여도 아무 쓸모가 없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불명예를 덜어 줄 수는 있으나 온전히 씻어 낼 수는 없다. 그는 사람들의 상상에서 얼마간의 수치가 떼어 낼 수 없이 붙어 있는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키겠다고 엄숙히 다짐한 약속을 어겼고, 그의 성격은 돌이킬 수 없이 물들고 더럽혀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온전히 지워 내기가 매우 어려울 비웃음을 하나 붙이게 되었으니, 이런 종류의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떠올려 본다.
이 예는 결의론과 법학이 둘 다 정의의 일반 규칙이 지우는 의무를 살필 때조차 그 둘 사이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실제로 있고 또 본질에 닿는 것이라 하더라도, 또 그 두 학문이 서로 아주 다른 목적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다루는 대상이 같다 보니 그 둘 사이에 그만한 닮음이 생겨나서, 법학을 다루겠노라 내세운 저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기가 살피는 여러 문제를 때로는 그 학문의 원리에 따라, 때로는 결의론의 원리에 따라 판단하였으며, 그것을 갈라 보지도 않았고 어쩌면 자기가 언제 이쪽을 하고 언제 저쪽을 하였는지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결의론자들의 학설은 정의의 일반 규칙을 양심에 따라 존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지를 살피는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의무와 도덕의 의무 가운데 다른 여러 부분까지 아우른다. 이런 종류의 학문이 자라나게 된 계기를 주로 마련해 준 것은 야만과 무지의 시대에 로마 가톨릭의 미신이 들여온 귀 고해13의 관습이었던 듯하다. 그 제도에 따라 사람마다 가장 비밀스러운 행동,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순결함의 규칙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났다고 의심될 만한 생각까지 고해 신부에게 드러내야 하였다. 고해 신부는 고해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의무를 어겼는지, 어떤 점에서 어겼는지, 그리고 노여움을 산 신의 이름으로 그들을 사면해 주기에 앞서 그들이 어떤 보속을 치러야 마땅한지를 알려 주었다.
잘못을 했다는 의식, 나아가 그러지 않았나 하는 의심만으로도 그것은 어느 마음에나 짐이 되며, 오랜 죄악의 습성으로 굳어 버리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는 거기에 불안과 두려움이 따라온다. 사람들은 다른 모든 괴로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괴로움에서도, 비밀을 지켜 주고 사려가 있으리라 믿고 기댈 수 있는 누군가에게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아 자기 생각을 내리누르는 그 억눌림을 벗어 버리려고 자연히 애를 쓴다. 이렇게 털어놓는 데서 그들이 겪는 수치는 속내를 들어 주는 사람의 동감이 좀처럼 빠뜨리지 않고 일으켜 주는 그 편치 않음의 덜어짐으로 넉넉히 메워진다. 자기가 아주 존중받을 값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기의 지난 처신이 어떻게 책망을 받든 지금의 마음가짐만은 적어도 시인을 받으며 어쩌면 그것으로 저쪽을 메우기에, 적어도 그 벗에게 얼마간의 존중을 받으며 지내기에 넉넉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의 마음이 놓인다. 그 미신의 시대에 수가 많고 꾀가 많은 성직자들은 거의 모든 사삿집의 신뢰 속으로 슬며시 스며들어 갔다. 그들은 그 시대가 내놓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학식을 다 지니고 있었고, 그들의 몸가짐은 여러 점에서 거칠고 어지러웠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살던 시대의 몸가짐에 견주면 닦여 있고 반듯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교의 모든 의무뿐 아니라 도덕의 모든 의무까지 이끌어 주는 큰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들과 가깝다는 것은 그 복을 누리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명성을 주었고, 그들이 부인의 표시를 하나라도 내보이면 그것을 받는 불운을 겪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깊은 창피가 찍혔다. 옳음과 그름을 가리는 큰 재판관으로 여겨졌으므로 그들은 일어나는 모든 꺼림칙함에 관하여 자연히 자문을 받았고, 누구에게나 자기가 그 거룩한 사람들을 그러한 모든 비밀의 속내를 들어 주는 이로 삼았으며 그들의 조언과 시인 없이는 처신에서 중요하거나 섬세한 걸음을 하나도 떼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이, 이미 자기들에게 맡기는 것이 유행이 된 그것을, 또 그러한 규칙이 세워지지 않았더라도 두루 자기들에게 맡겨졌을 그것을 자기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일반 규칙으로 세워 놓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해 신부가 될 자격을 갖추는 일은 교회 사람과 신학자의 공부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 되었고, 그로부터 그들은 이른바 양심의 사례, 곧 처신의 적정성이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를 정하기 어려운 섬세하고 까다로운 상황들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한 저작이 양심을 이끄는 이들에게도 이끌림을 받을 이들에게도 쓸모가 있으리라고 그들은 떠올렸다. 결의론 책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결의론자들이 살핀 도덕의 의무는 주로 적어도 얼마쯤은 일반 규칙 안에 테두리를 그어 넣을 수 있는 의무, 그리고 그것을 어기면 자연히 얼마간의 회한과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얼마간의 두려움이 따르는 의무였다. 그들의 저작에 계기를 준 그 제도가 겨눈 것은 그러한 의무를 어길 때 따라오는 양심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덕이 다 그것의 결여에 이런 종류의 매우 매서운 찔림을 딸려 오게 하는 것은 아니며, 자기 처지에서 할 수 있었던 가장 도량이 큰 행동, 가장 벗을 아끼는 행동, 가장 아량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해 신부에게 사면을 청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종류의 실패에서 어겨지는 규칙은 흔히 그리 확정되어 있지 않고, 또 두루 그런 성질의 것이어서, 그것을 지키면 명예와 상을 받을 자격이 생길 수 있으나 그것을 어겨도 적극적인 비난이나 책망이나 벌에 내놓이지는 않아 보인다. 결의론자들은 그러한 덕을 발휘하는 일을 일종의 여분의 공덕14으로, 곧 그리 엄하게 정해 둘 수 없으므로 자기들이 다룰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긴 듯하다.
그러므로 고해 신부의 법정 앞에 왔고 그 때문에 결의론자들이 다루는 영역에 들어온 도덕의 의무를 어기는 일은 주로 세 가지 서로 다른 종류였다.
첫째이며 으뜸은 정의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다. 여기서 규칙은 모두 또렷하고 정해져 있으며, 그것을 어기면 자연히 신에게서도 사람에게서도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의식과 그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둘째는 정결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다. 이것은 더 거친 모든 경우에 정의의 규칙을 참으로 어기는 일이며, 어느 누구도 남에게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상해를 입히지 않고서 그 죄를 지을 수는 없다. 더 작은 경우, 곧 두 성이 어울려 오가는 데서 지켜야 마땅한 그 딱 맞는 예절을 어기는 데에 그칠 때에는 그것을 정의의 규칙을 어긴 일로 정당하게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두루 꽤 뚜렷한 규칙을 어기는 일이며, 적어도 두 성 가운데 한쪽에서는 그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창피를 가져오는 쪽으로 기울고, 따라서 꺼림칙함을 잘 느끼는 사람에게는 얼마간의 수치와 마음의 참회가 따르는 쪽으로 기운다.
셋째는 진실함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다. 알아 둘 것은, 참을 어기는 일이 여러 경우에는 정의를 어기는 일이 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며, 따라서 언제나 겉에서 오는 어떤 벌에 내놓이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느 거짓말이라는 악덕은 지극히 비참한 비천함이기는 하되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이 경우에는 속임을 당한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앙갚음이나 만족을 요구할 권리가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참을 어기는 일이 언제나 정의를 어기는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매우 뚜렷한 규칙을 어기는 일이며 그 죄를 지은 사람을 수치로 덮어 버리는 쪽으로 자연히 기우는 일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나아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얻는 큰 즐거움은 감정과 의견이 어느 정도 서로 맞아떨어지는 데서, 곧 여러 악기가 서로 음을 맞추고 박자를 맞추듯 마음들이 어느 정도 어우러지는 데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 가장 기분 좋은 어우러짐은 감정과 의견이 거침없이 오가지 않으면 얻어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두 서로가 어떻게 움직여지는지를 느끼고 서로의 가슴 속으로 뚫고 들어가, 거기에 참으로 자리하고 있는 감정과 정서를 살펴보고 싶어 한다. 이 타고난 정념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는 사람, 우리를 자기 마음속으로 불러들이는 사람, 말하자면 자기 가슴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기분 좋은 일종의 후대를 베푸는 듯하다. 여느 좋은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기 참된 감정을 느끼는 그대로, 또 느끼기 때문에 말할 용기가 있다면 남을 기쁘게 하는 데 실패할 수 없다. 아이의 재잘거림까지 마음에 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거리낌 없는 진심이다. 마음을 열어 놓은 사람의 견해가 아무리 약하고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즐거워하며, 할 수 있는 만큼 우리 자신의 이해를 그들의 역량에 맞추어 낮추고 모든 주제를 그들이 그것을 살핀 듯한 그 특정한 빛 아래에서 바라보려 애쓴다. 남의 참된 감정을 알아내려는 이 정념은 타고나 그토록 강하여, 흔히 이웃이 숨길 만한 매우 정당한 이유를 지닌 그 비밀을 들여다보려는 귀찮고 주제넘은 호기심으로 떨어져 버리며, 여러 경우에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이 정념을 다스려 어떤 공평한 관찰자라도 시인할 수 있는 그 높이로 낮추는 데에는 신중과 적정성에 대한 강한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호기심이 적정한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고 숨길 정당한 이유가 있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겨누지 않을 때, 그것을 낭패시키는 일도 이번에는 그만큼 마음에 거슬린다. 우리의 가장 순한 물음을 슬쩍 피하는 사람, 우리의 가장 거슬릴 것 없는 물음에 아무 만족도 주지 않는 사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둠 속에 대놓고 자기를 감싸는 사람은 말하자면 자기 가슴 둘레에 담을 쌓는 듯하다. 우리는 해 될 것 없는 호기심의 열의를 다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달려 나가다가, 느닷없이 가장 거칠고 가장 거슬리는 힘에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숨기는 일이 그토록 마음에 거슬린다면, 우리를 속이려 하는 일은 그 속임이 성공하여도 우리가 아무 해도 입지 않을 수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보다 더 역겹다. 우리 동무가 우리를 속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보게 되면, 그가 입에 올리는 감정과 의견이 분명히 자기 것이 아닌 듯이 보이면,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얻어 낼 수 없다. 그리고 거짓과 꾸밈이 사람 마음을 감싸 둘 수 있는 그 모든 덮개를 뚫고 인간 본성의 무엇인가가 이따금 새어 나오지 않는다면, 나무 인형도 자기가 움직여진 그대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만큼이나 기분 좋은 동무일 것이다. 가장 대수롭지 않은 일을 두고 속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에게 상해와 같은 무엇인가를 끼치고 있다는 의식이 없는 사람은 없고, 들킬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생각만으로도 속으로 얼굴이 붉어지며 수치와 당황으로 움츠러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진실함을 어기는 일에는 언제나 얼마간의 회한과 스스로를 꾸짖는 마음이 따르는 까닭에, 그것은 자연히 결의론자들이 다루는 영역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결의론자들의 저작이 다룬 주된 주제는 정의의 규칙에 돌아가야 마땅한 양심에 따른 존중, 곧 우리가 이웃의 목숨과 재산을 어디까지 존중해야 마땅한가, 반환의 의무, 정결과 겸양의 법, 그리고 그들의 말로 이른바 정욕의 죄15라 불리는 것이 무엇에 있었는가, 또 진실함의 규칙과 서약과 약속과 온갖 종류의 계약이 지우는 의무였다.16
결의론자들의 저작에 관하여 두루 말할 수 있는 것은, 느낌과 감정만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을 그들이 정확한 규칙으로 이끌어 보려 하였으나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정의에 대한 섬세한 감각이 낱낱의 경우에 어느 지점에서 자잘하고 약한 양심의 꺼림칙함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는지를 규칙으로 딱 밝혀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비밀을 지킴과 말을 아낌이 어느 때에 속내를 감추는 일로 자라나기 시작하는가? 마음에 드는 반어를 어디까지 밀고 갈 수 있으며, 딱 어느 지점에서 그것이 증오스러운 거짓말로 떨어지기 시작하는가? 처신의 거침없음과 편안함이 우아하고 걸맞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어디이며, 그것이 어느 때에 처음으로 게으르고 생각 없는 방종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는가? 그러한 모든 일에서 어느 한 경우에 들어맞을 것이 다른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딱 들어맞기는 어려우며, 처신의 적정성과 행복을 이루는 것은 사정이 아주 조금만 달라져도 경우마다 달라진다. 그러므로 결의론 책은 흔히 지루한 만큼이나 두루 쓸모가 없다. 그 판단이 정당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책들은 어떤 경우에 그것을 찾아보는 사람에게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 안에 모아 놓은 사례가 수없이 많다 하더라도 있을 수 있는 사정은 그보다도 더 다양하기에, 그 모든 사례 가운데 지금 살피고 있는 경우와 딱 나란한 것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그것은 요행일 터이기 때문이다. 자기 의무를 다하려고 참으로 애태우는 사람이 그 책들이 자기에게 크게 쓸 데가 있다고 떠올릴 수 있다면 그는 매우 약한 사람일 것이고, 의무를 게을리하는 사람으로 말하자면 그 글들의 문체는 그를 깨워 더 주의하게 만들 만한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를 도량이 크고 고귀한 것으로 북돋우는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를 부드럽고 인간애 있는 것으로 누그러뜨리는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우리 자신의 양심을 두고 억지 트집을 부리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쪽으로 기울며, 그 헛된 세밀함으로 우리 의무의 가장 본질에 닿는 조항을 두고 빠져나갈 구멍을 내는 무수한 정교함을 허락해 주는 구실을 한다.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주제에 그들이 들여놓으려 한 그 자잘한 정확함은 거의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그 위험한 잘못으로 빠뜨렸고, 동시에 그들의 저작을 메마르고 마음에 거슬리는 것으로, 곧 알아듣기 어려운 형이상학의 구별로 가득하면서도 도덕 책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된 쓸모로 삼는 그 감정 가운데 어느 것도 마음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도덕철학에서 쓸모 있는 두 부분은 윤리학과 법학이다. 결의론은 아주 물리쳐야 마땅하며,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러한 섬세한 엄밀함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고 정의와 겸양과 진실함이 바탕을 두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또 그 덕들이 흔히 우리를 떠밀어 하게 할 여느 행동의 길이 무엇인지를 일반적으로 그려 내는 것으로 만족한 옛 도덕론자들이 훨씬 더 잘 판단하였던 듯하다.
참으로 결의론자들의 학설과 아주 다르지 않은 무엇인가를 여러 철학자가 시도한 듯하다. 키케로의 『의무론』 제3권에 이런 종류의 무엇인가가 있으니, 거기서 그는 적정성의 지점이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를 정하기 어려운 섬세한 여러 경우에 우리 처신에 관한 규칙을 결의론자처럼 주려고 애쓴다. 또 같은 책의 여러 대목으로 보아 그보다 앞서 다른 철학자 몇몇이 같은 종류의 무엇인가를 시도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도 그들도 이런 종류의 온전한 체계를 내놓으려 겨눈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다만 여느 경우에 의무의 규칙이 되는 것을 지키는 데에 처신의 가장 높은 적정성이 있는지 아니면 그것에서 물러나는 데에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이려 한 것일 뿐이다.
실정법17의 모든 체계는 자연법학의 체계를 향한, 곧 정의의 낱낱의 규칙을 늘어놓는 일을 향한 얼마간 온전하지 못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정의를 어기는 일은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결코 참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므로, 공공의 행정관은 이 덕의 실천을 강제하려고 국가의 힘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비가 없다면 시민 사회는 피와 어지러움의 무대가 되어, 사람마다 자기가 상해를 입었다고 여길 때마다 제 손으로 복수를 할 것이다. 사람마다 스스로 정의를 세우는 데 따라올 혼란을 막으려고, 상당한 권위를 얻은 모든 정부에서 행정관은 모두에게 정의를 세워 주는 일을 맡아 나서며 상해에 대한 모든 하소연을 들어 주고 바로잡아 주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잘 다스려지는 모든 나라에서는 개인들의 다툼을 판단하도록 재판관을 두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재판관들의 판단을 다스릴 규칙까지 정해 놓으며, 이 규칙은 두루 자연적 정의의 규칙과 맞아떨어지도록 뜻해진 것이다. 참으로 그것이 낱낱의 모든 경우에 그렇게 되는 일이 늘 일어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이른바 나라의 국체, 곧 정부의 이해가, 때로는 정부를 제멋대로 휘두르는 특정한 계층 사람들의 이해가 그 나라의 실정법을 자연적 정의가 정해 줄 것에서 비틀어 놓는다. 어떤 나라에서는 백성의 거칢과 야만이, 정의에 대한 타고난 감정이 더 문명한 나라에서 자연히 이르는 그 정확함과 엄밀함에 이르지 못하게 막는다. 그들의 법은 그들의 몸가짐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투박하며 가릴 줄을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는 백성의 몸가짐이 나아져 가장 정확한 체계까지 받아들일 만하다 하더라도, 그 재판 법정의 불운한 얼개가 반듯한 법학의 체계가 그들 사이에 자리 잡는 일을 끝내 막는다. 어느 나라에서도 실정법의 판단이 정의에 대한 타고난 감각이 일러 줄 규칙과 낱낱의 모든 경우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실정법의 체계는 서로 다른 시대와 나라에서 인류가 지닌 감정의 기록으로서 가장 큰 권위를 받아 마땅하다 하더라도, 자연적 정의의 규칙을 담은 정확한 체계로는 결코 볼 수 없다.
여러 나라 법의 온전하지 못한 점과 나아진 점을 두고 법률가들이 펼친 논의가, 모든 실정 제도와 상관없이 자연적 정의의 규칙이 무엇인지를 캐묻는 일에 계기를 주었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이 논의가 그들을 이끌어, 제대로 자연법학이라 불릴 만한 것의 체계, 곧 모든 나라의 법을 꿰고 흘러 그 바탕이 되어야 마땅한 일반 원리의 이론을 세우는 일을 겨누게 하였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률가들의 논의가 이런 종류의 무엇인가를 낳기는 하였고, 또 어떤 특정한 나라의 법을 체계 있게 다루면서 자기 저작에 이런 종류의 관찰을 여러 가지로 섞어 넣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반 체계가 떠올려지기까지, 또 법의 철학이 그 자체로, 그리고 어느 한 나라의 특정한 제도와 상관없이 다루어지기까지는 세상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옛 도덕론자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서도 정의의 규칙을 낱낱이 늘어놓으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 없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 다른 모든 덕을 다루는 것과 똑같이 일반적으로 정의를 다룬다. 키케로와 플라톤18의 『법률』에서는 모든 나라의 실정법이 강제해야 마땅한 그 자연적 형평의 규칙을 늘어놓으려는 시도를 얼마간 자연히 기대할 수도 있었겠으나, 거기에도 이런 종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법은 치안 행정의 법이지19 정의의 법이 아니다. 모든 나라의 법을 꿰고 흘러 그 바탕이 되어야 마땅한 그 원리의 체계 같은 것을 세상에 내놓으려 시도한 첫 사람은 그로티우스20였던 듯하며, 전쟁과 평화의 법에 관한 그의 논고는 온갖 온전하지 못한 점을 지녔음에도 아마 오늘날까지 이러한 주제를 두고 나온 가장 온전한 저작일 것이다. 나는 다른 논의에서 법과 통치의 일반 원리, 그리고 그것들이 사회의 서로 다른 시대와 시기에 겪어 온 여러 변혁을 정의에 관한 것뿐 아니라 치안 행정과 세입과 군비에 관한 것, 또 그 밖에 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아울러 설명해 보려 애쓸 것이다.21 그러므로 지금은 법학의 역사에 관하여 더 자세한 데로 들어가지 않겠다.
주
1.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a talk 으로 찍었으나 문맥으로 보아 a task(일)의 오식으로 읽었다.
2. 옮긴이 —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43). 로마의 정치가·웅변가·철학 저술가. 여기서 『의무론』이라 옮긴 것은 그의 라틴어 저작 De Officiis 다.
3. 옮긴이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여기서 『윤리학』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가리킨다.
4. 옮긴이 — 결의론(casuistry)은 중세 이래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분야로, 도덕의 일반 규칙을 낱낱의 구체적 사례에 적용하여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가려 주는 학문이었다. 고해 신부가 쓸 사례집을 엮는 일에서 자라났다.
5. 옮긴이 — 자연법학(natural jurisprudence)은 17~18세기에 그로티우스·푸펜도르프 등이 세운 분야로, 어느 나라의 실정법과도 상관없이 사람의 본성에서 곧바로 끌어낼 수 있는 권리와 의무의 체계를 세우려 한 학문이다.
6. 옮긴이 — 원문은 arbiter. 다투는 두 쪽이 스스로 사건을 맡겨 그 판단에 따르기로 한 사람을 뜻하며, 오늘날의 중재인에 해당한다.
7. 옮긴이 — 원문은 the magistrate ought to allow them to sustain an action at law 다. 18세기 영어의 magistrate 는 오늘날의 치안판사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의 공권력을 쥔 관원을 두루 가리켰으며 재판권까지 아울렀다. sustain an action at law 는 그 약속을 근거로 법정에 소를 내어 다툴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니, 오늘날의 소권(訴權)을 인정하는 일에 해당한다.
8. 옮긴이 —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 1632~1694). 독일의 법학자로 자연법학의 체계를 세웠다. 저본의 철자는 Puffendorf 다. 장 바르베이락(Jean Barbeyrac, 1674~1744)은 푸펜도르프를 프랑스어로 옮기고 주석을 붙인 법학자다.
9. 옮긴이 —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 글래스고 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스미스의 스승이었다. 스미스가 이 책을 쓸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고」를 붙여 적었다.
10. 성 아우구스티누스, 라 플라세트.
11. 옮긴이 — 원저자 주에 든 두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와 장 라 플라세트(Jean La Placette, 1639~1718)다. 앞은 초기 교회의 교부이고, 뒤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목사로 양심의 사례를 다룬 저작을 남겼다.
12. 옮긴이 — 원문은 parole. 당대에 이 낱말은 명예를 걸고 말로 한 약속을 뜻하였고, 특히 포로가 풀려나면서 하는 언약을 가리켰다.
13. 옮긴이 — 원문은 auricular confession. 고해하는 사람이 신부의 귀에 대고 은밀히 죄를 아뢰는 제도로, 오늘날 가톨릭의 고해성사에 해당한다. 아래의 「보속」(penance)은 사면을 받기에 앞서 치러야 하는 벌 또는 기도와 선행을 뜻한다.
14. 옮긴이 — 원문은 works of supererogation, 라틴어 opera supererogationis. 가톨릭 신학에서 의무로 명해진 것을 넘어 더 하는 선행을 뜻한다.
15. 옮긴이 — 원문은 the sins of concupiscence, 라틴어 peccata concupiscentiae. 신학에서 육신의 욕망에서 비롯한 죄를 한데 모아 부르는 말이다.
16. 옮긴이 — 원문의 the duty of restitution, oaths, contracts 는 각각 오늘날의 반환 의무(라틴어 restitutio), 선서 또는 서약(iuramentum), 계약(contractus)에 해당한다.
17. 옮긴이 — 실정법(positive law, 라틴어 ius positivum)은 사람이 제정하여 실제로 시행되는 법을 뜻하며, 사람의 본성에서 끌어낸다고 여겨진 자연법(ius naturale)과 대비된다.
18. 옮긴이 — 플라톤(Plato, 기원전 428?~347?).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여기서 『법률』은 플라톤의 『법률』과 키케로의 『법률론』(De Legibus)을 함께 가리킨다.
19. 옮긴이 — 저본의 police. 18세기 영어에서 이 낱말은 오늘날의 경찰이 아니라 도로·물가·위생·질서를 아우르는 치안 행정 전반을 뜻했다.
20. 옮긴이 —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 1583~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로 자연법학의 틀을 세웠다. 통용 표기는 그로티우스다. 여기서 말하는 논고는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 1625)이다.
21. 옮긴이 — 스미스가 여기서 예고한 저작은 끝내 한 권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입과 군비를 다루는 부분은 1776년 『국부론』으로 이루어졌고, 법과 통치를 다루는 부분은 글래스고 대학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필기가 『법학 강의』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