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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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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우리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관한 우리 판단의 근거, 그리고 의무감에 대하여

1장 칭찬이나 비난을 받아 마땅함을 스스로 아는 것에 대하여

이 논의의 앞선 두 부에서 나는 주로 남의 감정과 행위에 관한 우리 판단의 기원과 근거를 살폈다. 이제 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판단의 기원을 살피려 한다.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시인과 존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 행복에 그토록 중요한 것이건만, 우리 자신을 그 감정들의 정당하고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고 우리 자신의 성격과 행위를 존중과 시인이 자연히 주어지는 그 척도와 규칙에 맞추어 가다듬는 길 말고는 온전히 다 채워질 수 없다. 무지나 착오에서 존중과 시인이 어떻게든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좋게 여겨질 만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진실이 알려지면 정반대의 감정으로 보일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면, 우리의 만족은 온전함에서 한참 멀다. 우리가 하지 않은 행동을 두고, 또는 우리 행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동기를 두고 우리에게 갈채를 보내는 사람은 우리에게 갈채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칭찬에서 어떠한 만족도 끌어낼 수 없다. 우리에게 그것은 어떤 책망보다도 더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며, 모든 성찰 가운데 가장 우리를 낮추는 성찰, 곧 우리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성찰을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불러낼 것이다. 자기 못생김을 감추려 화장하는 여인은 자기 아름다움에 바쳐지는 찬사에서 허영을 거의 얻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 찬사는 자기의 참된 얼굴빛이 불러일으킬 감정을 그에게 떠올리게 하여 그 대비로 그를 더 부끄럽게 만들 것이라고 우리는 여길 만하다. 그런 근거 없는 갈채에 기뻐하는 것은 가장 얄팍한 경솔함과 약함의 증거다. 그것이 바로 적정하게 말해 허영이라 불리는 것이며, 가장 우스꽝스럽고 업신여김을 받을 악덕, 곧 꾸밈과 예사로운 거짓말이라는 악덕의 바탕이다. 경험이 그것이 얼마나 흔한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상식의 작은 불씨만으로도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 낼 것이라고 여길 만한 어리석음이다. 있지도 않았던 모험을 늘어놓아 좌중의 감탄을 불러내려 애쓰는 어리석은 거짓말쟁이, 자기에게 정당한 자격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지위와 신분의 티를 내는 거드름 피우는 멋쟁이, 이 둘은 모두 자기가 받고 있다고 상상하는 갈채에 기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허영은 상상의 그토록 거친 헛것에서 일어나므로, 이성을 가진 어떤 존재가 어떻게 그것에 속을 수 있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들이 자기가 속였다고 상상하는 이들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 볼 때,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높은 감탄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자기가 동료들에게 마땅히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는 그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동료들이 실제로 자기를 그렇게 바라본다고 자기가 믿는 그 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들의 얄팍한 약함과 하찮은 어리석음은 그들이 눈을 안으로 돌리는 것을, 또는 참된 진실이 언젠가 알려진다면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그렇게 보일 것이라고 자기 양심이 일러 줄 그 업신여김 받을 관점에서 자신을 보는 것을 끝내 막아 버린다.

무지하고 근거 없는 칭찬이 단단한 기쁨, 곧 진지한 살핌을 견뎌 낼 만족을 조금도 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꾸로 우리에게 실제로 아무런 칭찬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우리 행위가 그것을 받을 만한 것이었고 칭찬과 시인이 자연히 또 흔히 주어지는 그 척도와 규칙에 모든 점에서 걸맞았다고 돌아보는 일은 흔히 참된 위안을 준다. 우리는 칭찬에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다는 것에도 기뻐한다. 우리는 실제로 어떠한 시인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시인의 자연스러운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를 기뻐하고, 그 감정이 실제로 우리를 향해 발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비난을 정당하게 받을 짓을 했다고 돌아보기를 부끄러워한다. 경험이 대체로 사람들 마음에 든다고 일러 주는 그 행위의 척도를 자기가 정확히 지켰음을 스스로 아는 사람은 자기 행동의 적정성을 만족하며 돌아본다. 공평한 관찰자가 그것을 바라볼 그 빛으로 자기가 그것을 바라볼 때, 그는 그것을 움직인 모든 동기 속으로 온전히 들어간다. 그는 그 하나하나를 즐거움과 시인으로 돌아보며, 인류가 자기가 한 일을 끝내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를 바라보는 그 빛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더 잘 알게 된다면 자기를 바라볼 그 빛에 따라서 자신을 여긴다. 그는 이런 경우에 자기에게 주어질 갈채와 감탄을 미리 맛보며,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으나 오직 세상의 무지만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감정에 동감하여 스스로에게 갈채를 보내고 스스로를 감탄한다. 그는 그 감정이 그런 행위의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결과임을 알고 있고, 그의 상상은 그것을 그 행위와 굳게 이어 놓았으며, 그는 그것을 그 행위에서 자연히 또 적정하게 흘러나와야 할 무언가로 떠올리는 습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은 뒤에는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명성을 얻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 흔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상상은 그 뒤에 자기에게 주어질 그 명예를 미리 맛보고 있었다. 그들이 결코 듣지 못할 그 갈채가 그들의 귓가에 울렸고, 그 효과를 결코 느끼지 못할 그 감탄에 대한 생각이 그들의 가슴 안에서 어른거리며 모든 자연스러운 두려움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을 그들의 가슴에서 몰아내고, 인간 본성이 미치는 데를 넘어선 곳을 겨눈 듯이 보이는 행동을 하도록 그들을 실어 갔다. 그러나 실상으로 보면, 우리가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주어지지 않는 시인과, 실제로는 결코 주어지지 않으나 세상이 우리 행동의 참된 사정을 적정하게 이해하게 된다면 주어질 시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음이 분명하다. 앞의 것이 흔히 그토록 격렬한 결과를 낳는다면, 뒤의 것이 언제나 높이 여겨지는 것을 우리는 이상하게 볼 수 없다.

거꾸로, 자기를 인류의 마음에 들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그 행위의 척도를 모두 깨뜨려 버린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이 모든 사람의 눈에서 영원히 감추어질 것이라는 가장 완전한 확신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 아무 쓸모가 없다. 그것을 돌아보며 공평한 관찰자가 그것을 바라볼 그 빛으로 바라볼 때, 그는 그것을 움직인 동기 가운데 어느 것에도 자기가 들어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그 생각에 낯이 뜨거워지고 갈피를 잃으며, 자기 행동이 언젠가 널리 알려진다면 자기가 당하게 될 그 수치를 매우 높은 정도로 반드시 느낀다. 이 경우에도 그의 상상은, 자기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무지밖에는 아무것도 자기를 건져 주지 못하는 그 업신여김과 비웃음을 미리 맛본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그 감정들의 자연스러운 대상임을 느끼며, 그것이 언젠가 실제로 자기를 향해 발휘된다면 자기가 무엇을 겪을지 생각하며 여전히 떤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것이 단순한 부인의 대상이 되는 부적정성 가운데 하나에 그치지 않고 혐오와 분개를 불러일으키는 그 엄청난 죄악 가운데 하나라면, 감수성이 얼마라도 남아 있는 한 그는 공포와 회한의 고뇌를 모두 느끼지 않고서는 그것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알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고, 그것을 갚아 줄 신이 없다고 스스로 믿게 만들 수조차 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 두 감정을 자기 삶 전체를 쓰디쓰게 만들 만큼은 느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자기를 모든 동료 인간의 미움과 의분의 자연스러운 대상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죄의 습성으로 무디어지지 않았다면, 그 무서운 진실이 언젠가 알려진다면 인류가 자기를 바라볼 그 모습, 그들의 얼굴빛과 눈이 어떠할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두려움과 놀라움 없이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겁에 질린 양심의 이 자연스러운 쓰라림이야말로, 이승에서 죄지은 자를 따라다니며 고요도 안식도 허락하지 않고 흔히 그들을 절망과 정신의 혼란으로 몰아가는 악령이요 앙갚음하는 복수의 여신이다.1 비밀이 지켜진다는 어떤 확신도 그들을 그것으로부터 지켜 주지 못하고, 종교를 저버리는 어떤 원리도 그들을 그것에서 온전히 건져 내지 못하며, 모든 상태 가운데 가장 천하고 가장 비루한 상태, 곧 명예와 오욕에, 악덕과 덕에 완전히 무감각해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그들을 그것에서 풀어놓지 못한다. 가장 혐오스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들, 가장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죄의 의심조차 받지 않도록 그토록 차갑게 일을 꾸민 사람들이, 자기 처지의 공포에 몰려 어떤 인간의 예리함으로도 결코 캐낼 수 없었을 것을 스스로 털어놓은 일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가 욕보인 시민들의 분개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자기가 그 적정한 대상이 되었음을 알고 있는 그 앙갚음을 그렇게 하여 채워 줌으로써, 자기 죽음으로 적어도 자기 상상 속에서나마 인류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화해하기를, 자기를 미움과 분개를 받기에 덜 마땅한 자로 여길 수 있게 되기를, 자기 죄를 얼마쯤 씻기를, 그리고 될 수 있다면 모든 동료 인간의 용서를 받으며 평안히 죽기를 바랐다. 그 일이 드러나기 전에 자기가 느꼈던 것에 견주면, 이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던 듯하다.

2장 우리 자신의 판단이 남의 판단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에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리고 일반 규칙의 기원에 대하여

인간의 행복과 비참함의 큰 부분, 어쩌면 가장 큰 부분은 우리 자신의 지난 행위를 바라보는 데서, 그리고 그것을 헤아리는 데서 우리가 느끼는 시인이나 부인의 정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든, 이런 종류의 우리 감정은 언제나 남의 감정이 실제로 어떠한가, 또는 어떤 조건에서라면 어떠할 것인가, 또는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가에 얼마간 은밀히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공평한 관찰자라면 그것을 이렇게 살필 것이라고 상상하는 대로 그것을 살핀다. 우리 자신을 그의 처지에 놓고서 그 행위를 움직인 모든 정념과 동기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이 가정된 공정한 재판관의 시인에 동감함으로써 그것을 시인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부인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단죄한다.

사람이 자기 종족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어느 외딴 곳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자라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성격을, 자기 감정과 행위의 적정성이나 과오를, 자기 마음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두는 그가 쉽게 볼 수 없고 자연히 바라보지도 않는 대상이며, 그것을 그의 눈앞에 내보여 줄 거울이 그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은 대상이다. 그를 사회 속으로 데려오면, 그에게는 전에 없던 그 거울이 곧바로 주어진다. 그 거울은 그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얼굴빛과 행동 속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의 감정 속으로 들어갈 때와 그의 감정을 부인할 때를 언제나 드러내 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기 정념의 적정성과 부적정성을, 자기 마음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처음으로 바라본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를 모르고 지낸 사람에게는 자기 정념의 대상, 곧 자기를 즐겁게 하거나 아프게 한 외부의 물체가 온 주의를 차지할 것이다. 그 대상이 불러일으킨 정념 자체, 곧 욕망이나 싫어함, 기쁨이나 슬픔은 모든 것 가운데 그에게 가장 직접 닥쳐 있는 것이건만 그의 생각의 대상이 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관념이 그의 주의 깊은 헤아림을 불러낼 만큼 그의 마음을 끄는 일은 결코 없다. 자기 기쁨을 헤아리는 것이 그에게 새로운 기쁨을 불러일으킬 수 없고 자기 슬픔을 헤아리는 것이 새로운 슬픔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정념의 원인을 헤아리는 것은 흔히 그 둘을 다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 그를 사회 속으로 데려오면, 그의 모든 정념은 곧바로 새로운 정념의 원인이 된다. 그는 인류가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시인하고 어떤 것은 역겨워한다는 것을 알아볼 것이다. 앞의 경우에는 마음이 들뜨고 뒤의 경우에는 풀이 꺾일 것이다. 이제 그의 욕망과 싫어함, 기쁨과 슬픔은 흔히 새로운 욕망과 새로운 싫어함,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슬픔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은 그의 마음을 깊이 끌며 흔히 그의 가장 주의 깊은 헤아림을 불러낸다.

사람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우리의 첫 관념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외양에서가 아니라 남의 모습과 외양에서 끌어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도 우리에게 같은 비평을 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그들이 우리 모습을 시인하면 우리는 기뻐하고, 그들이 역겨워하는 듯이 보이면 마음이 상한다. 우리는 우리 외양이 그들의 비난이나 시인을 어느 만큼 받을 만한지 알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하나 살피고, 거울 앞에 서거나 그런 방편을 써서 될 수 있는 대로 남이 보는 거리에서 남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려고 애쓴다. 이렇게 살핀 뒤에 우리 외양에 만족하게 되면 우리는 남의 가장 불리한 판단도 더 쉽게 견뎌 낼 수 있다. 거꾸로 우리가 싫어함의 자연스러운 대상임을 알고 있다면, 그들이 부인하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일 때마다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꽤 잘생긴 사람은 자기 몸의 자그마한 흠을 두고 남이 웃는 것을 너그러이 봐주겠지만, 정말로 흉하게 생긴 사람에게는 그런 농담이 하나같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두고 안달하는 것은 오직 그것이 남에게 미치는 효과 때문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사회와 아무 연결도 없다면 우리는 그 둘 어느 쪽에도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첫 도덕 비평은 남의 성격과 행위에 가해지며, 우리는 모두 그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앞장서서 알아보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도 우리 자신의 성격과 행위를 두고 그만큼 거침없다는 것을 곧 배운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의 책망이나 갈채를 어느 만큼 받을 만한지,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그려 내는 그 마음에 드는 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로 우리가 그들에게 반드시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념과 행위를 살피기 시작하고, 우리가 그들의 처지에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헤아려 그것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행동의 관찰자라고 가정하고, 그 행동이 이 빛에서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낼지 상상하려 애쓴다. 이것이 우리가 얼마간이나마 남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행위의 적정성을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거울이다. 이렇게 바라보아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면 우리는 어지간히 만족한다. 우리는 갈채를 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고 남의 책망을 얼마간 업신여길 수 있다. 어떻게 오해되거나 잘못 그려지더라도 우리가 시인의 자연스럽고 적정한 대상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것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흔히 그들의 시인을 얻으려 더욱 안달하게 되고, 흔히 말하는 대로 오욕과 이미 손을 맞잡은 처지가 아닌 한, 그들의 책망을 생각하며 온통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때 그 책망은 두 배로 매섭게 우리를 때리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의 행위를 살피려 애쓸 때, 그것에 판결을 내려 시인하거나 단죄하려 애쓸 때, 그런 모든 경우에 나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두 사람으로 나누며, 살피고 판정하는 나는 그 행위가 살펴지고 판정되는 사람인 저 다른 나와는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이 분명하다. 앞의 나는 관찰자이며, 나는 나 자신을 그의 처지에 놓고 그 특정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내게 어떻게 보일지를 헤아려 나 자신의 행위에 관한 그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려 애쓴다. 뒤의 나는 행위자이며, 내가 적정하게 나 자신이라 부르는 사람이고, 관찰자라는 성격을 띠고서 내가 그 행위에 대해 어떤 의견을 세우려 애쓰고 있던 그 사람이다. 앞의 나는 재판관이고 뒤의 나는 피고다.2 그러나 재판관이 모든 점에서 피고와 같은 것일 수는, 원인이 모든 점에서 결과와 같은 것일 수 없듯이 불가능하다.

사랑을 부르는 것이 되는 일과 공로가 있는 것이 되는 일, 곧 사랑을 받아 마땅하고 보상을 받아 마땅한 것이 되는 일은 덕의 큰 표지이며, 미움을 부르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되는 일은 악덕의 큰 표지다. 그러나 이 표지들은 모두 남의 감정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 덕이 사랑을 부른다거나 공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덕이 그 자신의 사랑이나 그 자신의 감사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덕이 남들의 마음에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덕이 그렇게 좋게 보아 주는 눈길의 대상이라는 자각이 덕에 자연히 따르는 그 내면의 평온과 자기만족의 원천이며, 그 반대라는 의심이 악덕의 괴로움을 불러오는 계기인 것과 같다. 사랑받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사랑받아 마땅함을 아는 것만 한 큰 행복이 무엇이겠는가? 미움받는 것, 그리고 우리가 미움받아 마땅함을 아는 것만 한 큰 비참함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도덕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사람이 책임을 지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임을 지는 존재란 그 낱말이 나타내는 대로 자기 행동을 다른 누군가에게 셈하여 밝혀야 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 다른 이의 마음에 들도록 자기 행동을 다스려야 하는 존재다. 사람은 신과 자기 동료 인간에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사람이 주로 신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틀림없으되, 시간의 순서에서는 그가 신에 대한 관념이나 그 신적 존재가 자기 행위를 판정할 규칙에 대한 관념을 세우기에 앞서 반드시 자기를 동료 인간에게 책임을 지는 자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기가 신에게 책임을 진다는 관념이나 그 신적 존재가 자기 행위를 판정할 규칙에 대한 관념을 세우기 훨씬 전부터 자기를 부모에게 책임을 지는 자로 분명히 떠올리며, 부모의 시인이나 부인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거나 풀이 꺾인다.

세계의 위대한 재판관은 가장 지혜로운 이유에서, 인간 이성의 약한 눈과 자기 영원한 정의의 왕좌 사이에 얼마쯤의 흐릿함과 어두움을 두는 것이 적정하다고 여겼다. 그 흐릿함은 그 위대한 법정을 인류의 눈에서 온전히 가리지는 않으나, 그토록 거대한 대상의 웅대함과 중대함으로 보아 기대할 만한 것에 견주면 그 법정의 인상을 희미하고 힘없는 것으로 만든다. 전능한 이가 자기 뜻에 따르는 자와 그 뜻을 어기는 자에게 마련해 둔 그 무한한 보상과 벌이, 우리가 서로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하찮고 한때뿐인 되갚음을 미리 보는 것만큼 또렷하게 지각된다면, 인간 본성의 약함은 자기 이해력에 그토록 걸맞지 않은 대상의 어마어마함에 놀라 더 이상 이 세상의 자그마한 일들에 마음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섭리의 뜻이 이미 밝혀진 것보다 더 온전히 밝혀졌더라면 사회의 일이 굴러갈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를 이끌 규칙 없이 지내지도 않고 그 규칙을 지키도록 권위로 강제할 재판관 없이 지내지도 않게 하려고, 자연의 창조자는 사람을 인류의 직접적인 재판관으로 삼았으며, 다른 많은 점에서와 같이 이 점에서도 사람을 자기 형상에 따라 지어 형제들의 행동을 살피게 하는 땅 위의 대리자로 세웠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에게 주어진 그 권능과 재판권을 인정하도록, 그리고 자기가 그의 책망을 받을 짓을 했다고 상상하는가 그의 갈채를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상상하는가에 따라 떨거나 기뻐 뛰도록 자연에게서 배운다.

그러나 그들 눈앞에 늘 있는 이 하급 법정의 권위가 어떠하든, 그 법정이 어느 때라도 자연이 그 판단을 다스리도록 세워 둔 그 원리와 규칙에 어긋나게 판결한다면, 사람들은 이 옳지 못한 판결에 항소하여 더 높은 법정, 곧 자기 가슴 속에 세워진 법정에 이 약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의 옳지 못함을 바로잡아 달라고 호소할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행위에 관한 우리 판단을 다스리도록 자연이 세워 둔 일정한 원리가 있다. 우리가 그 원리에 따라 판결하고, 자연이 갈채나 단죄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어 놓지 않은 것에는 갈채도 단죄도 보내지 않으며 자연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정도를 넘어서지도 않는 한, 이 경우 우리 판결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법에 온전히 들어맞는 것이므로 파기도 어떤 종류의 정정도 받을 까닭이 없다. 우리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그 사람 자신도 반드시 그 판단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그가 자기를 우리 처지에 놓으면, 우리가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빛으로 자기 행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공평한 관찰자에게, 우리가 그를 두고 드러내는 그 감정의 자연스럽고 적정한 대상으로 자기가 반드시 보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 감정은 반드시 그에게 온전한 효과를 낼 수밖에 없으며, 그는 자기 눈에 받아 마땅한 갈채로 보이는 것에서 자기 시인이 주는 온갖 승리감을 품게 되고, 마찬가지로 자기가 받아 마땅한 단죄임을 알고 있는 것에서 수치의 온갖 두려움을 품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종류의 모든 것에 관한 우리 판단을 이끌도록 자연이 세워 둔 그 원리와 규칙에 어긋나게 그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그를 단죄했다면 사정이 다르다. 그가 자기를 우리 처지에 놓아 보았을 때 자기 눈에 갈채나 단죄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 일을 두고 우리가 그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그를 단죄했다면, 이 경우 그는 우리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에게 한결같음이나 굳건함이 얼마라도 있다면 그는 그 감정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좋은 판결에 크게 들뜨지도 않고 나쁜 판결에 크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양심이 우리를 단죄한다면 온 세상의 갈채도 거의 쓸모가 없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슴 속 법정이 우리를 풀어 주고 우리 자신의 마음이 인류가 틀렸다고 우리에게 일러 줄 때에는 온 인류의 부인도 우리를 짓누를 수 없다.

그러나 가슴 속의 이 법정이 이렇게 우리 모든 행동의 최고 판정자이고, 우리 성격과 행위에 관한 온 인류의 판결을 뒤집을 수 있으며, 세상의 갈채 가운데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거나 세상의 책망 아래서 우리를 버티게 해 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법정이 세워진 기원을 캐어 보면 그 재판권이 대체로 그것이 그토록 흔히 또 그토록 정당하게 판결을 뒤집는 바로 그 법정의 권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처음 세상에 나올 때 우리는 남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에서,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 모든 사람, 곧 부모와 스승과 동료의 마음에 어떤 행동이 들 만한지를 헤아리는 것에 익숙해진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자신을 맞추며, 얼마 동안은 모든 사람의 호의와 시인을 얻겠다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계획을 애틋하게 좇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루 미치는 시인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임을 경험에서 곧 배운다. 다루어야 할 더 중대한 이해가 생기자마자 우리는, 한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는 일이 거의 틀림없이 일어나고, 한 개인의 기분을 맞춤으로써 흔히 온 백성을 노엽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가장 공정하고 가장 형평에 맞는 행위도 특정한 사람들의 이해를 가로막거나 그들의 성향을 어긋나게 하는 일이 잦은데, 그런 사람들이 우리 동기의 적정성 속으로 들어갈 만한, 또는 이 행위가 그들에게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 처지에는 완전히 걸맞다는 것을 알아볼 만한 솔직함을 갖추는 일은 드물다. 그런 치우친 판단에서 우리를 지키려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 사이에 재판관 한 사람을 우리 마음속에 세우는 법을 곧 배운다. 우리는 아주 솔직하고 형평에 맞는 사람, 우리 자신과도 우리 행위로 이해가 영향을 받는 이들과도 아무런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 그들에게나 우리에게 아버지도 형제도 벗도 아니고 그저 사람 일반인 사람, 곧 우리가 남의 행위를 볼 때와 똑같이 이해관계 없는 눈으로 우리 행위를 헤아리는 공평한 관찰자가 보는 앞에서 우리가 행동하고 있다고 떠올린다. 우리 자신을 그런 사람의 처지에 놓았을 때 우리 자신의 행동이 우리 눈에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보인다면, 그런 관찰자라면 우리를 움직인 모든 동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고 우리가 느낀다면, 세상의 판단이 어떠하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행동에 기뻐할 수밖에 없고 동료들의 책망에도 아랑곳없이 우리 자신을 시인의 정당하고 적정한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거꾸로 가슴 속의 사람이 우리를 단죄한다면, 인류의 가장 큰 환호도 무지와 어리석음의 소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이 공평한 재판관의 성격을 띨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이 싫어함과 못마땅함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약한 사람, 허영 있는 사람, 경솔한 사람은 가장 근거 없는 책망에 부끄러워하고 가장 터무니없는 갈채에 들뜰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마땅히 세워야 할 의견을 두고 안에 있는 재판관에게 물어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자연이 그들의 모든 행동의 최고 재판관으로 세워 둔 이 가슴의 거주자, 이 추상의 사람, 인류의 대표이며 신의 대리자에게 그들이 호소하는 일은 드물다. 그들은 하급 법정의 판결로 만족한다. 자기 동료들, 곧 자기가 함께 살며 말을 주고받아 온 특정한 사람들의 시인이 대체로 그들의 모든 소망의 마지막 대상이었다. 그것을 얻으면 그들의 기쁨은 온전하고, 얻지 못하면 그들은 완전히 낙심한다. 그들은 상급 법정에 항소할 생각을 결코 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 법정의 판결을 알아본 일은 드물고, 그 절차의 규칙과 형식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들을 해칠 때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정의를 베풀 수 없고, 그 결과 반드시 세상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안에 있는 재판관에게 의지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 그리고 세상이 무엇을 시인하고 무엇을 부인하는지가 아니라 이 공평한 관찰자의 눈에 무엇이 시인이나 부인의 자연스럽고 적정한 대상으로 보이는지를 헤아리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자기 행위의 이 최고 판정자의 판단이야말로 그가 주로 얻으려 애써 온 갈채이고, 그가 주로 두려워해 온 책망이다. 이 마지막 판결에 견주면 온 인류의 감정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작은 무게밖에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좋은 판단에 크게 들뜨지도, 가장 불리한 판단에 크게 가라앉지도 못한다.

안에 있는 이 재판관에게 물어봄으로써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련된 모든 것을 그 적정한 모양과 크기로 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이해와 남들의 이해 사이에 적정한 견줌을 세울 수 있다.

몸의 눈에는 대상이 그 실제 크기에 따라서보다는 그 놓인 자리가 가까운가 먼가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보이는데, 마음의 자연스러운 눈이라 부를 만한 것에도 그와 똑같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기관의 흠을 거의 같은 길로 바로잡는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잔디밭과 숲과 먼 산이 펼쳐진 거대한 풍경이 내가 그 곁에서 글을 쓰는 작은 창을 덮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이며, 내가 앉아 있는 방보다 어림없이 작아 보인다. 그 큰 대상들과 내 주위의 작은 대상들 사이에 정당한 견줌을 세우려면, 적어도 상상 속에서나마 나 자신을 다른 자리로 옮겨 그 자리에서 둘을 거의 같은 거리에서 살펴보고 그리하여 그 실제 비율을 어느 만큼 판정하는 길밖에는 없다. 습성과 경험이 내게 이것을 그토록 쉽고 그토록 대뜸 하도록 가르쳐 놓아서, 나는 내가 그것을 한다는 것조차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상상이 그 실제 크기에 대한 지식에서 그 먼 대상들을 부풀리고 늘려 놓지 않는다면 그것이 눈에 얼마나 작게 보일지를 사람이 온전히 납득하려면 시각의 철학을 얼마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본래적인 정념에는, 우리 자신의 아주 작은 이해를 잃거나 얻는 일이 우리와 아무 특별한 연결도 없는 남의 가장 큰 일보다 헤아릴 수 없이 더 중대해 보이고, 훨씬 더 정념에 찬 기쁨이나 슬픔을, 훨씬 더 불타는 욕망이나 싫어함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이해는 이 자리에서 살펴지는 한 우리 자신의 이해와 결코 저울에 함께 올릴 수 없고, 그에게 아무리 파멸을 가져오는 일이라도 우리 자신의 이해를 밀어 주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는 우리를 결코 막을 수 없다. 이 맞선 이해들을 적정하게 견주려면 우리는 우리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자리에서도 그의 자리에서도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도 그의 눈으로도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어느 쪽과도 특별한 연결이 없고 우리 사이를 공평하게 판정하는 제3자의 자리에서 그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에서도 습성과 경험이 우리에게 이것을 그토록 쉽고 그토록 대뜸 하도록 가르쳐 놓아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한다는 것조차 거의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적정성과 정의의 감각이 그렇지 않았다면 자연스러웠을 우리 감정의 불균등을 바로잡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웃의 가장 큰 일에 얼마나 적은 관심을 두게 될지, 그에게 관련된 무엇에도 얼마나 적게 마음이 움직이게 될지를 우리에게 납득시키려면 얼마쯤의 성찰, 나아가 철학까지도 필요하다.

중국이라는 큰 제국이 그 수많은 주민과 더불어 지진에 갑자기 삼켜졌다고 해 보자. 그리고 세상의 그 지역과 아무런 연결도 없는 유럽의 인간애 있는 사람이 이 무서운 재앙의 소식을 받았을 때 어떻게 마음이 움직일지를 헤아려 보자. 그는 먼저 그 불행한 백성의 불운에 대한 슬픔을 매우 강하게 드러낼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는 인간 삶의 위태로움과, 그렇게 한순간에 없어져 버릴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수고의 헛됨을 두고 우울한 성찰을 여러 가지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사색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이 재난이 유럽의 교역에, 그리고 세계 전체의 무역과 사업에 미칠 효과를 두고 여러 가지로 따져 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훌륭한 철학이 다 끝나고 이 인간애 있는 감정이 한 차례 온당하게 드러난 뒤에는, 그는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편하고 고요하게 자기 일이나 즐거움을 좇고 자기 휴식이나 기분풀이를 취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하찮은 재난이 더 참된 흔들림을 일으킨다. 내일 자기 새끼손가락을 잃게 된다면 그는 오늘 밤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는 자기 형제 1억 명이 죽어 없어진 일을 두고도 가장 깊은 안심 속에서 코를 골 것이며, 그 어마어마한 무리가 멸망한 일은 자기 자신의 시시한 이 불운보다 그의 마음을 덜 끄는 대상으로 뻔히 보인다. 그러면 인간애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닥칠 시시한 이 불운을 막기 위해서라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는 조건에서 자기 형제 1억 명의 목숨을 희생시킬 마음이 들겠는가? 인간 본성은 그 생각에 공포로 흠칫 놀라며, 세상은 가장 타락하고 가장 썩었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악한을 낳은 적이 없다. 그런데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가? 우리가 겪는 감정은 거의 언제나 그토록 더럽고 그토록 이기적인데, 우리의 행하는 원리는 어찌하여 흔히 그토록 도량이 크고 그토록 고귀한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남에 관련된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관련된 무엇에 훨씬 더 깊이 마음이 움직이는데, 도량이 큰 사람을 모든 경우에, 비천한 사람을 많은 경우에 자기 이해를 남의 더 큰 이해에 희생시키도록 몰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자애심의 가장 강한 충동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인간애의 부드러운 힘도 아니고, 자연이 사람의 마음에 켜 놓은 그 힘없는 인애의 불씨도 아니다. 그런 경우에 스스로를 발휘하는 것은 더 강한 힘, 더 힘찬 동기다. 그것은 이성이요 원리요 양심이며, 가슴의 거주자요 가슴 속의 사람이요 우리 행위의 위대한 재판관이며 판정자다. 우리가 남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도록 행동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그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고 그 안의 다른 누구보다 어느 점에서도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토록 부끄럽게 또 그토록 눈멀게 남보다 우리 자신을 앞세울 때에는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적정한 대상이 된다고, 우리 정념 가운데 가장 뻔뻔한 것도 놀라게 할 만한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 바로 그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에 관련된 무엇이든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작은지를 우리가 배우는 것은 오직 그에게서이며, 자애심이 저절로 그려 내는 그릇된 상은 오직 이 공평한 관찰자의 눈으로만 바로잡힐 수 있다. 도량이 큰 것의 적정성과 옳지 못함의 추함을,3 남의 더 큰 이해를 위해 우리 자신의 가장 큰 이해를 내놓는 일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가장 큰 이익을 얻으려고 남에게 가장 작은 해를 끼치는 일의 추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도 바로 그다. 많은 경우에 우리를 그 신적인 덕의 실천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런 경우에 대체로 일어나는 것은 더 강한 사랑, 더 힘 있는 정서, 곧 명예롭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이요 우리 자신의 성격의 웅대함과 품위와 뛰어남에 대한 사랑이다.

남의 행복이나 비참함이 어느 점에서라도 우리 행위에 달려 있을 때, 우리는 자애심이 우리에게 권하는 대로 우리 자신의 어떤 작은 이해를 이웃의 더 큰 이해보다 앞세우지는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형제들의 분개와 의분의 적정한 대상이 될 것임을 느끼며, 이 정서의 부적정성에 대한 감각은 이 경우 그 정서가 불러올 행동의 과오에 대한 더 강한 감각으로 뒷받침되고 살아난다. 그러나 남의 행복이나 비참함이 어느 점에서도 우리 행위에 달려 있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의 이해가 그들의 이해와 온전히 갈라져 떨어져 있어 둘 사이에 연결도 다툼도 없을 때에는, 이 경우 과오의 감각이 끼어들지 않으므로 부적정성의 감각만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을 두고 저절로 안달하는 마음과 남의 일에는 저절로 마음을 쓰지 않는 태도에 우리를 내어 맡기는 것을 막아 내기 어렵다. 가장 세간의 교육도 우리에게 모든 중대한 경우에 우리 자신과 남 사이에 얼마쯤의 공평함을 지키며 행동하도록 가르치며, 세상의 예사로운 교류만으로도 우리의 행하는 원리를 얼마쯤의 적정성에 맞추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감정의 불균등을 바로잡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가장 인위적이고 가장 세련된 교육뿐이며,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가장 깊은 철학이면서 또한 가장 엄격한 철학에 의지해야 한다.

서로 다른 두 무리의 철학자가 도덕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했다. 한 무리는 남의 이해에 대한 우리 감수성을 키우려 힘썼고, 다른 무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에 대한 감수성을 줄이려 힘썼다. 앞의 무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저절로 느끼는 대로 남을 위해 느끼기를 바란다. 뒤의 무리는 우리가 남을 위해 저절로 느끼는 대로 우리 자신을 위해 느끼기를 바란다.

앞의 무리는 그 우울한 도덕론자들이다. 그들은 우리 형제가 그토록 많이 비참함 속에 있는데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우리를 꾸짖으며,45 가난의 시들함 속에서, 병의 고뇌 속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원수의 모욕과 억누름 아래에서 온갖 재앙에 시달리며 매 순간 허덕이는 수많은 불쌍한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번영의 자연스러운 기쁨을 불경하다고 여긴다. 우리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나 언제나 그토록 많은 동료 인간을 덮치고 있음이 틀림없는 그 비참함에 대한 연민이 운 좋은 이들의 즐거움을 가라앉히고 일종의 우울한 풀죽음을 모든 사람에게 습성이 되게 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불운에 대한 이 극단의 동감은 전혀 터무니없고 이치에 닿지 않아 보인다. 온 땅을 고르게 놓고 보면, 아픔이나 비참함을 겪는 한 사람에 대해 번영과 기쁨 속에 있거나 적어도 견딜 만한 사정에 있는 사람 스무 명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스무 명과 함께 기뻐하기보다 그 한 사람과 함께 울어야 할 이유는 분명 하나도 댈 수 없다. 게다가 이 인위적인 연민은 터무니없을 뿐 아니라 전혀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성격을 꾸며 보이는 이들에게는 흔히 일종의 위선에 찬 슬픔밖에 없는데, 그것은 마음에는 이르지 못하면서 얼굴빛과 이야기 자리를 걸맞지 않게 침울하고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드는 데 쓰일 뿐이다.6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마음가짐은 이룰 수 있다 하더라도 완전히 쓸모없을 것이며, 그것을 지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 말고는 어떤 목적에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아무 아는 사이도 연결도 없고 우리 활동의 범위에서 온전히 벗어나 있는 이들의 운수에 우리가 어떤 관심을 두더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도 이롭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에게 안달만 낳을 수 있다. 달에 있는 세계를 두고 우리가 애를 태우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 가장 멀리 있는 이들까지도 우리의 좋은 바람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틀림없고, 우리는 자연히 그들에게 좋은 바람을 보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불운하게 된다면, 그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안달을 안기는 것은 우리 의무의 어떤 부분도 아닌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울 수도 해칠 수도 없고 모든 점에서 우리에게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의 운수에 우리가 조금밖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이 지혜롭게 정해 놓은 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 틀의 본래 구성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바꿈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겪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불균등을, 유독 우리 자신에 관련된 것에 대한 우리 감수성을 줄임으로써 바로잡으려 애쓰는 도덕론자로는 고대의 모든 철학 학파를 꼽을 수 있으나 특히 고대의 스토아 학파를 꼽을 수 있다.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를 갈라져 떨어져 있는 무엇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세계의 시민이요 자연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여겨야 한다. 이 큰 공동체의 이해를 위해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작은 이해가 희생되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 관련된 무엇이든 이 어마어마한 체계의 똑같이 중요한 다른 어느 부분에 관련된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더 움직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 정념이 우리를 놓아두기 쉬운 그 빛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세계의 다른 어느 시민이 우리를 바라볼 그 빛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닥친 일을 우리는 이웃에게 닥친 일처럼 여겨야 하며,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이웃이 우리에게 닥친 일을 여기는 대로 여겨야 한다. “우리 이웃이 아내나 아들을 잃으면, 이것이 사람에게 닥치는 재앙이요 사물의 예사로운 흐름에 따른 온전히 자연스러운 일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에픽테토스7는 말한다. “그러나 같은 일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면, 그때 우리는 가장 무서운 불운을 겪은 것처럼 울부짖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남에게 일어났을 때 우리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기억해야 하며, 그의 경우에 우리가 그러했던 대로 우리 자신의 경우에도 그러해야 한다.” 이 최고 정도의 아량과 굳건함에 이르는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것을 시도하는 것은 결코 터무니없지도 쓸모없지도 않다. 이 완전한 적정성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관념을 지닌 사람은 적지만, 모든 사람은 얼마간 자기를 통제하려 애쓰고 자기 이기적 정념을 이웃이 함께 따라갈 수 있는 무언가로 끌어내리려 애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닥친 일을 이웃이 그것을 바라보기 쉬운 그 빛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는 것만큼 효과 있게 해낼 수는 결코 없다. 이 점에서 스토아 철학은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관념을 펼쳐 보이는 것에 거의 그친다. 그러므로 이 완전한 자기 통제를 겨누는 데에는 터무니없거나 적정하지 못한 것이 전혀 없다. 그것에 이르는 일도 쓸모없지 않을 것이며, 거꾸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이로울 것이다. 그것은 우리 행복을 가장 단단하고 가장 든든한 바탕, 곧 세계를 다스리는 그 지혜와 정의에 대한 굳은 믿음 위에,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에 관련된 무엇이든 자연 안의 이 다스리는 원리의 온전히 지혜로운 처분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일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감정을 이 완전한 적정성에 맞출 수 있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에서 얼마쯤의 어긋남을 우리 자신에게 너그러이 허락하며, 세상조차 우리에게 그것을 너그러이 허락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련된 것에 너무 많이 마음이 움직이고 남에 관련된 것에 너무 적게 마음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언제나 우리 자신과 남 사이에 공평하게 행동하고 남의 어떤 큰 이해도 우리 자신의 어떤 작은 이해에 실제로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용서받는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자기 의무를 하려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남 사이에 이 정도의 공평함만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기는커녕 한참 멀다. 선한 사람에게서도 안에 있는 재판관은 자기 이기적 정념의 난폭함과 옳지 못함에 물들 위험에 흔히 놓이며, 그 사건의 참된 사정이 허락할 만한 것과는 매우 다른 보고를 하도록 흔히 이끌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살피고 공평한 관찰자가 그것을 바라볼 그 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려 애쓰는 경우는 서로 다른 두 가지다. 첫째는 우리가 행동하려 할 때이고, 둘째는 우리가 행동한 뒤다. 우리가 보는 눈은 두 경우 모두 매우 치우쳐 있으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때에 가장 치우쳐 있다.

우리가 행동하려 할 때에는 정념의 다급함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이해관계 없는 사람의 솔직함으로 헤아리도록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를 뒤흔드는 격렬한 감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남의 처지에 놓고 우리 마음을 끄는 대상을 그에게 자연히 보일 그 빛으로 바라보려 애쓰고 있을 때조차 사물을 보는 우리 눈의 빛깔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 자신의 정념이 날뛰는 힘은 끊임없이 우리를 우리 자신의 자리로 다시 불러들이는데, 그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자애심에 부풀려지고 그릇되게 그려져 보인다. 그 대상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그가 그것을 어떻게 볼지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순간의 엿봄뿐이며,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지속되는 동안에도 온전히 정당하지 않다. 우리는 그 한순간조차 우리 자신의 특이한 처지가 우리에게 불어넣는 그 열기와 날카로움을 온전히 벗어 버릴 수 없고, 우리가 하려는 일을 형평에 맞는 재판관의 완전한 공평함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이런 까닭에 말브랑슈8 신부가 말하듯, 정념은 우리가 그것을 계속 느끼는 한 모두 스스로를 옳다 하며 이치에 닿고 그 대상에 걸맞은 것으로 보인다.

과연 행동이 끝나고 그것을 몰아간 정념이 가라앉은 뒤에는 우리는 이해관계 없는 관찰자의 감정 속으로 더 차갑게 들어갈 수 있다. 전에 우리 마음을 끌던 것이 이제는 그에게 늘 그러했던 만큼이나 우리에게도 이해가 걸리지 않은 것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그의 솔직함과 공평함으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 판단은 전의 판단에 견주면 거의 중요하지 않으며, 가장 엄격하게 공평할 때조차 흔히 헛된 아쉬움과 쓸모없는 뉘우침밖에 낳지 못하고 앞으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우리를 지켜 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판단이 아주 솔직한 일은 드물다. 우리 자신의 성격에 대해 우리가 품는 의견은 전적으로 우리 지난 행위에 관한 우리 판단에 달려 있다. 우리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기에, 우리는 그 판단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는 사정에서 흔히 일부러 눈을 돌린다. 자기 몸에 수술을 할 때 손이 떨리지 않는 외과의는 담대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자기 행위의 추함을 자기 눈에서 가리는 자기 속임의 저 알 수 없는 너울을 벗겨 내기를 망설이지 않는 사람도 흔히 그만큼 담대하다. 우리 자신의 행동을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으로 보기보다는, 우리는 어리석게도 또 약하게도 너무나 흔히 전에 우리를 잘못 이끌었던 그 옳지 못한 정념을 새로 돋구려 애쓴다. 우리는 꾸민 수를 써서 낡은 미움을 깨우고 거의 잊은 분개를 다시 들쑤시려 애쓴다. 우리는 이 비참한 목적을 위해 힘을 쓰기까지 하며, 오직 우리가 한때 옳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러했음을 보기가 부끄럽고 두렵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옳지 못함을 고집한다.

인류가 자기 행위의 적정성을 두고 보는 눈은 행동할 때나 행동한 뒤나 그토록 치우쳐 있고, 이해관계 없는 관찰자라면 그것을 헤아릴 그 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일이 그들에게는 그토록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자기 행위를 판정하는 것이 도덕 감각이라고 가정되는 것과 같은 특이한 능력에 의한 것이라면, 만일 그들에게 정념과 정서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가려내는 특별한 지각의 힘이 주어져 있다면, 자기 정념이 이 능력의 눈에 더 직접 드러날 것이므로 그 능력은 더 멀리서만 바라볼 뿐인 남의 정념에 관해서보다 자기 정념에 관하여 더 정확하게 판정할 것이다.

이 자기 속임, 인류의 이 치명적인 약함이 인간 삶의 어지러움의 절반의 원천이다. 우리가 남이 우리를 보는 그 빛으로, 또는 남이 모든 것을 안다면 우리를 볼 그 빛으로 우리 자신을 본다면 우리는 고쳐지는 일을 대체로 피할 수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 모습을 견뎌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토록 중대한 이 약함을 고칠 길 없이 온전히 내버려 두지 않았고, 우리를 자애심의 헛것에 온전히 내주지도 않았다. 남의 행위를 끊임없이 살펴보는 일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이 하기에 마땅하고 적정한지 또는 무엇이 피하기에 마땅하고 적정한지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 일정한 일반 규칙을 세우도록 이끈다. 그들의 어떤 행동은 우리의 모든 자연스러운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것에 대해 같은 혐오를 드러내는 것을 듣는다. 이것은 그 행동이 추하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각을 더욱 굳히고 돋구기까지 한다. 남들이 그것을 같은 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볼 때, 우리가 그것을 적정한 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만족한다. 우리는 같은 짓을 결코 저지르지 않겠다고, 어떤 까닭으로도 이렇게 우리 자신을 두루 미치는 부인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반 규칙 하나를 자연히 세운다. 곧 그런 행동은 모두 피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를 미움을 부르고 업신여김을 받고 벌을 받아야 하는 자로, 곧 우리가 가장 크게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그 모든 감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거꾸로 다른 행동은 우리 시인을 불러내며,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것에 대해 같은 좋은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듣는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기려 주고 보상해 주려 애쓴다. 그것은 우리가 본성상 가장 강하게 바라는 그 모든 감정, 곧 인류의 사랑과 감사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같은 일을 해내기를 열망하게 되고, 이렇게 우리 스스로 다른 종류의 규칙 하나를 자연히 세운다. 곧 이렇게 행동할 기회는 모두 마음을 써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의 일반 규칙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그 규칙은 끝내 개별의 경우에 우리의 도덕 능력, 곧 공로와 적정성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각이 무엇을 시인하고 무엇을 부인하는지에 대한 경험에 그 바탕을 둔다. 우리는 애초에 개별 행동을, 살펴본 결과 그것이 어떤 일반 규칙에 들어맞거나 어긋나 보인다는 이유로 시인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일반 규칙은 어떤 종류의 행동이나 어떤 사정에 놓인 행동이 모두 시인되거나 부인된다는 것을 경험에서 알아냄으로써 이루어진다. 탐욕이나 시샘이나 옳지 못한 분개에서 저질러진, 그것도 살인자를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을 상대로 저질러진 사람답지 못한 살인을 처음 본 사람,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고뇌를 바라본 사람, 그 사람이 숨을 거두며 자기에게 가해진 난폭함보다 거짓 벗의 배신과 은혜를 모름을 더 탓하는 것을 들은 사람에게는, 그런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헤아리려고 행위의 가장 거룩한 규칙 가운데 하나가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금한 규칙이라는 것, 이것이 그 규칙을 뻔히 어긴 것이라는 것, 따라서 매우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라는 것을 성찰해야 할 까닭이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이 죄악에 대한 그의 혐오는 그가 스스로 그런 일반 규칙을 세우기에 앞서 곧바로 일어났을 것임이 분명하다. 거꾸로 그가 나중에 세울 수 있을 그 일반 규칙은, 이 행동과 같은 종류의 다른 모든 개별 행동을 생각할 때 자기 가슴에서 반드시 일어남을 그가 느낀 그 혐오에 바탕을 둘 것이다.

우리가 역사나 로맨스에서 도량이 큰 행동이나 비루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앞의 것에 우리가 품는 감탄과 뒤의 것에 우리가 느끼는 업신여김은 어느 것도 앞의 종류에 드는 모든 행동은 감탄할 만하고 뒤의 종류에 드는 모든 행동은 업신여길 만하다고 선언하는 일정한 일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성찰하는 데서 일어나지 않는다. 거꾸로 그 일반 규칙은 모두 서로 다른 온갖 종류의 행동이 우리에게 자연히 내는 효과에 대해 우리가 겪어 온 경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랑을 부르는 행동, 존경을 부르는 행동, 무서운 행동은 모두 그것을 해내는 사람에 대한 관찰자의 사랑이나 존경이나 공포를 자연히 불러일으키는 행동이다. 어떤 행동이 그 감정 하나하나의 대상이고 어떤 행동이 그렇지 않은지를 정하는 일반 규칙은, 실제로 또 사실로 어떤 행동이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살펴보는 길 말고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다.

과연 이 일반 규칙이 이루어지고 인류의 한데 모인 감정으로 두루 인정되고 세워진 뒤에는, 우리는 얽혀 있고 아리송한 성질을 지닌 어떤 행동에 돌아가야 할 칭찬이나 비난의 정도를 두고 논할 때 흔히 그 규칙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호소한다. 그 규칙은 이런 경우에 흔히 인간 행위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못한지의 마지막 바탕으로 인용된다. 그리고 이 사정이 매우 뛰어난 몇몇 저자를 잘못 이끌어, 옳고 그름에 관한 인류의 본래 판단이 마치 재판소의 판결처럼 먼저 일반 규칙을 헤아리고 그다음으로 살펴보는 그 개별 행동이 그 규칙의 범위 안에 적정하게 드는지를 헤아려 이루어졌다고 그들이 가정한 듯이 자기 체계를 세우게 만든 듯하다.

행위의 그 일반 규칙이 습관이 된 성찰로 우리 마음에 굳게 박히면, 그것은 우리 개별 처지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적정한지에 관하여 자애심이 그려 내는 그릇된 상을 바로잡는 데 큰 쓸모가 있다. 날뛰는 분개에 찬 사람이 그 정념이 일러 주는 대로 따른다면, 어쩌면 그는 자기가 당했다고 상상하는 잘못에 대해 원수의 죽음조차 작은 갚음으로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은 실은 아주 가벼운 부아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행위를 살펴본 경험은 그에게 그런 피 흘리는 복수가 모두 얼마나 무섭게 보이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의 교육이 매우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런 복수를 모든 경우에 삼가는 것을 어길 수 없는 규칙으로 스스로 세워 두었다. 이 규칙은 그에게 그 권위를 지키며, 그가 그런 난폭한 짓을 저지를 수 없게 만든다. 그렇더라도 그 자신의 기질이 날뛰는 정도가 어찌나 심한지, 만일 그런 행동을 헤아려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을 아주 정당하고 적정한 것으로, 모든 공평한 관찰자가 시인할 만한 것으로 판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경험이 그에게 새겨 놓은 그 규칙에 대한 공경은 그의 정념이 몰아치는 것을 막고, 그렇지 않았다면 자애심이 그의 처지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적정한지를 두고 권했을 너무 치우친 견해를 바로잡도록 그를 돕는다. 그가 정념에 실려 이 규칙을 어길 만큼 자기를 내버려 둔다 하더라도, 이 경우에조차 그는 그 규칙을 대하는 데 익숙해진 그 경외와 존경을 온전히 벗어 버릴 수 없다. 바로 행동하는 그때, 정념이 가장 높이 치솟는 그 순간에 그는 자기가 하려는 일을 생각하며 망설이고 떤다. 그는 자기가 차분할 때면 언제나 결코 어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행위의 척도, 남이 어기는 것을 볼 때마다 가장 높은 부인 없이는 보아 넘긴 적이 없는 그 척도, 그것을 어기면 곧 자기도 같은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의 대상이 될 것임을 자기 마음이 미리 느끼고 있는 그 척도를 자기가 깨뜨리고 있음을 은밀히 스스로 알고 있다. 마지막 치명적인 결심을 하기까지 그는 의심과 확실하지 않음의 온갖 고뇌에 시달린다. 그는 그토록 거룩한 규칙을 어긴다는 생각에 겁을 먹으면서, 동시에 자기 욕망이 날뛰는 힘에 그것을 어기도록 떠밀리고 내몰린다. 그는 순간마다 마음먹은 바를 바꾼다. 어떤 때에는 자기 원리를 굳게 지켜, 수치와 뉘우침의 공포로 자기 남은 삶을 망가뜨릴 수 있는 정념에 자기를 내주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면 그렇게 반대의 행위가 가져올 위태로움에 자기를 내놓지 않기로 정할 때 누릴 그 든든함과 고요함을 앞에 보게 되어, 한순간의 평온이 그의 가슴을 차지한다. 그러나 곧바로 정념이 새로 일어나 새로 날뛰는 힘으로 그를 몰아, 그가 바로 한순간 전에 삼가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저지르게 한다. 이 끊임없는 흔들림에 지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 그는 마침내 일종의 절망에서 마지막 치명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그것은 원수에게서 달아나는 사람이 뒤에서 자기를 쫓아오는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멸망을 만나게 될 것이 뻔한 절벽 아래로 자기를 던질 때와 같은 겁먹음과 얼떨떨함 속에서다. 행동하는 그때에도 그의 감정은 이러하다. 다만 그때 그는 자기 행위의 부적정성을 뒤에 알게 되는 것보다는 덜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뒤에 정념이 채워져 시들해지면 그는 자기가 한 일을 남들이 그것을 바라보기 쉬운 그 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전에는 아주 불완전하게만 미리 내다보았던 것을 실제로 느끼게 되며, 회한과 뉘우침의 쓰라림이 그를 뒤흔들고 괴롭히기 시작한다.

3장 도덕의 일반 규칙이 지닌 영향과 권위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이 신의 법으로 여겨지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에 대하여

행위의 그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이 바로 적정하게 말해 의무감이라 불리는 것이며, 인간 삶에서 가장 큰 무게를 지닌 원리이고, 인류의 대부분이 자기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원리다. 많은 사람이 아주 반듯하게 행동하고 평생 이렇다 할 비난을 받지 않고 지내지만, 그런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우리 시인을 그 적정성 위에 세우는 그 감정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이 다만 자기가 보아 온 행동의 확립된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행동한 것일 수도 있다. 남에게서 큰 이로움을 받은 사람이 자기 기질이 본디 차가운 탓에 감사의 감정을 아주 조금밖에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덕 있게 교육받았다면, 이 감정의 결여를 드러내는 행동이 얼마나 미움을 부르는 것으로 보이는지, 그 반대되는 행동은 얼마나 사랑을 부르는지를 흔히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감사하는 정서로 따뜻해지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렇게 된 것처럼 행동하려 힘쓰고 가장 생생한 감사가 권할 만한 존중과 살핌을 자기 은인에게 모두 바치려 애쓸 것이다. 그는 규칙적으로 그를 찾아뵙고, 그에게 존경을 다해 처신하며, 그를 두고 말할 때에는 언제나 가장 높은 존중과 자기가 그에게 진 많은 신세를 나타내는 말로만 말한다. 더구나 그는 지난 도움에 적정하게 갚을 기회를 하나하나 마음을 써서 붙잡을 것이다. 그는 이 모두를 어떤 위선이나 비난받을 만한 속임 없이, 새로운 호의를 얻으려는 어떤 이기적 의도 없이, 자기 은인이나 세상을 속이려는 어떤 계획 없이 할 수도 있다. 그 행동의 동기는 확립된 의무의 규칙에 대한 공경, 곧 모든 점에서 감사의 법에 따라 행동하려는 진지하고 간절한 욕망 말고는 다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둘 사이에 있는 관계에 걸맞은 그 따뜻한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덕 있게 교육받았다면, 그것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려, 마음을 쓰고 남을 살피며 애쓰고 충실하고 참되려, 부부의 정서라는 감정이 하도록 몰아갔을 그 살핌 가운데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으려 애쓸 것이다. 그런 벗과 그런 아내는 둘 다 그 종류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은 아닌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둘 다 자기 의무의 모든 부분을 다하려는 가장 진지하고 간절한 욕망을 지녔다 하더라도, 섬세하고 미묘한 존중의 여러 가지에서 어긋날 것이고, 자기 처지에 적정한 감정을 지녔더라면 결코 놓쳐 버릴 수 없었을 도와줄 기회를 여러 번 놓칠 것이다. 그러나 그 종류 가운데 첫째는 아니라 해도 그들은 어쩌면 둘째이며, 행위의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매우 강하게 새겨져 있다면 둘 다 자기 의무의 어떤 본질적인 부분에서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복된 틀로 지어진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자기 감정과 행동을 처지의 가장 작은 차이에까지 정확히 알맞게 맞출 수 없고, 모든 경우에 가장 미묘하고 가장 정확한 적정성으로 행동할 수 없다. 인류의 대부분이 지어진 거친 진흙으로는 그런 완전함까지 다듬어 올리지 못한다. 그러나 훈련과 교육과 본보기로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을 새겨 받아 거의 모든 경우에 어지간히 반듯하게 행동하고 평생 이렇다 할 비난을 받지 않고 지낼 수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반 규칙을 거룩하게 존중하는 이 마음이 없다면, 그 행위를 크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리와 명예를 지닌 사람과 쓸모없는 자를 가르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를 이루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앞의 사람은 모든 경우에 자기 격률을 한결같이 또 단단히 지키며, 평생 행위의 고른 결 하나를 지켜 낸다. 뒤의 사람은 그때그때 기분이나 성향이나 이해 가운데 무엇이 위에 올라오는가에 따라 이리저리 우연히 행동한다. 아니, 모든 사람이 겪는 기분의 고르지 못함이 어찌나 심한지, 이 원리가 없다면 차분할 때에는 행위의 적정성에 가장 미묘한 감수성을 지녔던 사람조차 가장 하찮은 경우에 터무니없이 행동하도록 흔히 이끌릴 수 있고, 그렇게 행동한 데 어떤 진지한 동기도 댈 수 없을 때조차 그럴 수 있다. 마침 그를 맞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분에 있을 때 당신의 벗이 당신을 찾아온다. 지금의 기분에서는 이 예의가 걸맞지 않은 끼어듦으로 보이기가 매우 쉽다. 그리고 이때 떠오르는 대로 사물을 보는 눈에 당신이 자기를 내준다면, 기질로는 예의 있는 사람이라도 당신은 그를 차갑게 또 업신여기며 대할 것이다. 당신이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금하는 예의와 손님 대접의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밖에 없다. 지난 경험이 당신에게 그 규칙에 대해 가르쳐 준 그 습관이 된 공경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모든 경우에 거의 고른 적정성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며, 모든 사람이 겪는 기질의 고르지 못함이 당신 행위에 뚜렷할 만큼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아 준다. 그러나 이 일반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지키기 쉽고 어길 진지한 동기가 거의 있을 수 없는 예절의 의무조차 그토록 자주 어겨질 것이니, 지키기가 흔히 그토록 어렵고 어길 강한 동기가 그토록 많을 수 있는 정의와 진실과 정절과 충실의 의무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데 이 의무가 어지간히 지켜지는 데 인간 사회의 존재 자체가 달려 있으며, 인류가 대체로 그 중대한 행위 규칙에 대한 공경을 새겨 받지 않았다면 그 사회는 바스러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이 공경은 처음에는 자연이 새겨 주고 뒤에는 추론과 철학이 굳혀 주는 하나의 의견으로 더욱 높아진다. 곧 도덕의 그 중대한 규칙은 신의 명령이요 법이며, 신은 끝내 순종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자기 의무를 어기는 자에게 벌을 준다는 의견이다.

이 의견 또는 이 감지는, 내가 말하지만, 처음에는 자연이 새겨 주는 듯하다.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든 종교적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그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어떤 것이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감정과 정념을 모두 돌리도록 자연히 이끌린다. 그들에게 돌릴 다른 것이 사람들에게는 없고, 다른 것을 헤아릴 수도 없다. 그들이 상상하기는 하나 보지는 못하는 그 알 수 없는 지성은 그들이 경험으로 아는 지성과 얼마쯤 닮게 그려질 수밖에 없다. 이교의 미신이 무지하고 어두웠던 동안, 인류는 자기 신들의 관념을 그토록 섬세하지 못하게 세운 듯하다. 그들은 인간 본성의 모든 정념을 가리지 않고 신들에게 돌렸으며, 우리 종에게 가장 명예가 되지 않는 정념, 곧 색욕과 굶주림과 탐욕과 시샘과 복수 같은 것까지 빼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본성의 뛰어남에 여전히 가장 높은 감탄을 품고 있던 그 존재들에게, 인류의 큰 장식이며 인류를 신적 완전함과 닮은 데까지 높여 주는 듯한 그 감정과 성질, 곧 덕과 선행을 사랑하는 마음과 악덕과 옳지 못함을 혐오하는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해를 입은 사람은 자기에게 가해진 잘못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유피테르9를 불렀으며, 옳지 못한 일이 저질러질 때 그것을 지켜보는 인류 가운데 가장 비천한 자에게도 일어날 그 의분과 똑같은 의분으로 그 신적 존재가 그것을 바라볼 것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해를 끼친 사람은 자기가 인류의 혐오와 분개의 적정한 대상임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자연스러운 두려움은 그가 그 앞을 피할 수도 없고 그 힘에 맞설 수도 없는 그 경외를 일으키는 존재들에게 같은 감정을 돌리도록 그를 이끌었다. 이 자연스러운 바람과 두려움과 의심은 동감으로 퍼지고 교육으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신들은 두루 인간애와 자비에 상을 주는 이요 배신과 옳지 못함을 갚는 이로 그려지고 그렇게 믿어졌다. 이렇게 종교는 가장 거친 모습에서도 인위적인 추론과 철학의 시대가 오기 훨씬 전부터 도덕의 규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종교의 공포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의무감을 다잡아 주는 일은 인류의 행복에 너무나 중대한 것이어서, 자연이 그것을 철학적 탐구의 느림과 확실하지 않음에 맡겨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 그것은 자연의 그 본래의 예견을 굳혀 주었다. 우리 도덕 능력이 무엇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우리가 가정하든, 곧 이성의 어떤 변형에 두든 도덕 감각이라 불리는 본래의 본능에 두든 우리 본성의 다른 어떤 원리에 두든, 그것이 이 생에서 우리 행위를 이끌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음은 의심할 수 없다. 그 능력은 이 권위의 가장 뚜렷한 표지를 지니고 있는데, 그 표지는 그것이 우리 모든 행동의 최고 판정자가 되도록, 우리 모든 감각과 정념과 욕구를 살피도록, 그리고 그 하나하나를 어디까지 풀어 주어야 하고 어디까지 억눌러야 하는지를 판정하도록 우리 안에 세워졌음을 나타낸다. 우리 도덕 능력은, 어떤 이들이 주장한 대로 이 점에서 우리 본성의 다른 능력과 욕구와 같은 자리에 있어서 뒤의 것이 앞의 것을 억누를 권리 이상으로는 앞의 것도 뒤의 것을 억누를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식이 결코 아니다. 다른 어떤 능력이나 행동의 원리도 다른 어떤 것을 판정하지 않는다. 사랑이 분개를 판정하지 않고, 분개가 사랑을 판정하지 않는다. 그 두 정념은 서로 맞설 수 있으나, 어떤 적정성으로도 서로를 시인하거나 부인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판정하는 일, 곧 우리 본성의 다른 모든 원리에 책망이나 갈채를 내리는 일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그 능력의 고유한 직무다. 그것은 그 원리를 대상으로 삼는 일종의 감각으로 여길 수 있다. 모든 감각은 자기 대상에 대해 최고다. 빛깔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눈의 판정에 항소할 곳이 없고, 소리의 어울림에 관하여 귀의 판정에 항소할 곳이 없고, 맛의 좋음에 관하여 미각의 판정에 항소할 곳이 없다. 그 감각 하나하나가 자기 대상을 최종으로 판정한다. 미각을 채워 주는 것은 무엇이든 달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아름다우며, 귀를 달래 주는 것은 무엇이든 어울린다. 그 성질 하나하나의 본질 자체는 그것이 향하는 감각을 즐겁게 하기에 알맞다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언제 귀를 달래 주어야 하고 언제 눈을 흐뭇하게 해 주어야 하고 언제 미각을 채워 주어야 하는지, 우리 본성의 다른 모든 원리를 언제 어디까지 풀어 주거나 억눌러야 하는지를 정하는 일은 우리 도덕 능력에 속한다. 우리 도덕 능력의 마음에 드는 것은 하기에 마땅하고 옳고 적정하며, 그 반대되는 것은 그르고 마땅하지 않고 적정하지 않다. 그 능력이 시인하는 감정은 우아하고 걸맞은 것이며, 그 반대되는 감정은 우아하지 못하고 걸맞지 않은 것이다.10 옳다, 그르다, 마땅하다, 적정하지 않다, 우아하다, 걸맞지 않다 하는 그 낱말들 자체가 뜻하는 것은 오직 그 능력을 즐겁게 하는 것과 즐겁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능력이 인간 본성을 다스리는 원리가 되도록 뻔히 뜻해져 있었으니, 그것이 정해 주는 규칙은 신의 명령이요 법으로, 곧 신이 이렇게 우리 안에 세워 둔 그 대리자들이 널리 알린 것으로 여겨야 한다. 모든 일반 규칙은 흔히 법이라 불린다. 그래서 물체가 운동을 주고받을 때 지키는 일반 규칙을 운동의 법칙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 도덕 능력이 자기 살핌에 놓인 어떤 감정이나 행동을 시인하거나 단죄할 때 지키는 그 일반 규칙은 훨씬 더 정당하게 그렇게 불릴 수 있다. 그것은 적정하게 말해 법이라 불리는 것, 곧 주권자가 자기 백성의 행위를 이끌기 위해 세워 놓는 그 일반 규칙과 훨씬 더 닮았다. 그 법과 같이 이 규칙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이끄는 규칙이다. 그것은 가장 확실하게 합법적인 상위자가 정해 준 것이며, 상과 벌의 제재가 그것에 따라 붙는다. 우리 안에 있는 그 신의 대리자들은 그 규칙을 어긴 것을 내면의 수치와 자기 단죄의 괴로움으로 반드시 벌하며, 거꾸로 순종은 언제나 마음의 고요함과 흡족함과 자기만족으로 보상한다.

같은 결론을 굳혀 주는 다른 헤아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류의 행복, 그리고 이성을 지닌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은 자연의 창조자가 그들을 있게 할 때 뜻한 본래의 목적이었던 듯하다. 우리가 반드시 그에게 돌리는 그 최고의 지혜와 신적인 자애로움에 걸맞은 다른 목적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무한한 완전함을 추상으로 헤아리는 데서 우리가 이끌려 가는 이 의견은, 모두 행복을 밀어 주고 비참함을 막으려 뜻해진 듯한 자연의 작품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굳어진다. 그런데 우리 도덕 능력이 일러 주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반드시 인류의 행복을 밀어 줄 가장 효과 있는 수단을 좇게 되며, 따라서 어떤 뜻에서는 신과 더불어 일하고 우리 힘이 미치는 데까지 섭리의 계획을 밀고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달리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의 창조자가 세계의 행복과 완전함을 위해 세워 둔 그 구상을 얼마간 가로막는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리 자신을 얼마간 신의 원수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경우에는 그의 남다른 호의와 보상을 바라도록, 뒤의 경우에는 그의 앙갚음과 벌을 두려워하도록 자연히 이끌린다.

그 밖에도 같은 유익한 가르침을 굳히고 마음에 새겨 넣는 쪽으로 기우는 다른 이유와 다른 자연스러운 원리가 많이 있다. 이 생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번영과 역경이 흔히 나뉘어 주어지는 일반 규칙을 헤아려 보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어지러워 보이는데도 여기에서조차 모든 덕이 자연히 그 적정한 보상, 곧 그 덕을 북돋우고 밀어 주기에 가장 알맞은 갚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도 어찌나 확실한지, 그것을 온전히 어그러뜨리려면 사정이 매우 남다르게 겹쳐야 한다. 부지런함과 신중과 조심스러움을 북돋우기에 가장 적정한 보상은 무엇인가? 온갖 종류의 일에서 이루는 성공이다. 그런데 이 덕이 평생에 걸쳐 그것을 얻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와 겉으로 드러나는 명예가 그 덕의 적정한 갚음이며, 그 덕이 좀처럼 얻지 못할 수 없는 갚음이다. 진실과 정의와 인간애의 실천을 밀어 주기에 가장 적정한 보상은 무엇인가?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신뢰와 존중과 사랑이다. 인간애는 위대해지기를 바라지 않고 사랑받기를 바란다. 진실과 정의가 기뻐하는 것은 부유해지는 데 있지 않고 신뢰받고 믿어지는 데 있으며, 그것은 그 덕이 거의 언제나 얻게 되는 갚음이다. 매우 남다르고 운 없는 사정으로 선한 사람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죄악을 의심받게 되고, 그 때문에 남은 평생 인류의 공포와 싫어함에 가장 옳지 못하게 내놓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사고로 그는 자기 온전함과 옳음에도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할 수 있으며, 조심스러운 사람이 온갖 조심을 다했는데도 지진이나 큰물에 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앞의 종류의 사고는 뒤의 종류보다 어쩌면 더욱 드물고 사물의 예사로운 흐름에 더욱 어긋난다. 그리고 진실과 정의와 인간애의 실천이 그 덕이 주로 겨누는 것, 곧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신뢰와 사랑을 얻는 확실하고 거의 틀림없는 길이라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사람이 어떤 개별 행동을 두고 잘못 그려지는 일은 매우 쉽게 있을 수 있으나, 자기 행위의 전반적인 결을 두고 그렇게 되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죄 없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드물게 일어난다. 거꾸로 그의 몸가짐이 죄 없다는 굳어진 의견은, 그가 실제로 잘못했을 때조차 매우 강한 심증이 있음에도 그를 풀어 주도록 우리를 흔히 이끈다. 마찬가지로 못된 자가 자기 행위가 이해되지 않은 어떤 개별의 못된 짓을 두고 책망을 벗어나거나 갈채를 받기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습성으로 그런 자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의 두루 그런 자로 알려지게 되고, 실제로는 완전히 죄가 없을 때조차 흔히 죄를 의심받게 된다. 그리고 악덕과 덕이 인류의 감정과 의견으로 벌받거나 보상받을 수 있는 한, 그 둘은 사물의 예사로운 흐름에 따라 여기에서조차 정확하고 공평한 정의보다 조금 더한 것을 만난다.

그러나 번영과 역경이 흔히 나뉘어 주어지는 일반 규칙이 이 차갑고 철학적인 빛에서 헤아릴 때에는 이 생에서 인류의 처지에 완전히 걸맞아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 가운데 어떤 것에는 결코 걸맞지 않다. 어떤 덕에 대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랑과 감탄이 어찌나 큰지, 우리는 그 덕에 온갖 종류의 명예와 보상을 내려 주고 싶어 하며, 그 덕에 늘 함께 따르지는 않는 다른 성질의 적정한 갚음이라고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까지도 내려 주고 싶어 한다. 거꾸로 어떤 악덕에 대한 우리의 혐오가 어찌나 큰지, 우리는 그 악덕에 온갖 종류의 오욕과 재난을 쌓아 올리고 싶어 하며, 아주 다른 성질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까지도 빼놓지 않는다. 아량과 도량이 큼과 정의는 그토록 높은 정도의 감탄을 불러내므로, 우리는 그것이 부와 권력과 온갖 종류의 명예로 관 씌워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부와 권력과 명예는 신중과 부지런함과 열심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그 덕이 떼려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는 성질이 아니다. 다른 한편 속임과 거짓과 짐승 같음과 난폭함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그토록 큰 멸시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므로, 그것이 더러 함께 따르는 부지런함과 근면으로 어떤 뜻에서는 받을 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이로움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의분이 일어난다. 부지런한 못된 자는 땅을 갈고, 게으른 선한 사람은 땅을 놀린다. 누가 그 수확을 거두어야 하는가? 누가 굶주려야 하고 누가 넉넉하게 살아야 하는가?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못된 자에게 유리하게 정하고, 인류의 자연스러운 감정은 덕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정한다. 사람은 앞의 자가 지닌 좋은 성질이 그것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그 이로움으로 너무 넘치게 갚아진다고 판정하고, 뒤의 사람이 하지 않은 일들이 그것이 그에게 자연히 가져오는 곤궁으로 너무나 지나치게 벌받는다고 판정한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의 결과인 사람의 법은 부지런하고 조심스러운 배신자의 목숨과 재산을 몰수하며,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조심성 없는 선한 시민의 충실함과 공공의 정신에는 남다른 갚음으로 보상한다. 이렇게 사람은 자연이 그러지 않았다면 스스로 했을 그 사물의 나눔을 얼마간 바로잡도록 자연에게서 이끌린다. 이 목적을 위해 자연이 그에게 따르도록 권하는 규칙은 자연 자신이 지키는 규칙과 다르다. 자연은 모든 덕과 모든 악덕에 앞의 것을 북돋우거나 뒤의 것을 억누르기에 가장 알맞은 바로 그만큼의 보상이나 벌을 내린다. 자연은 오직 이 헤아림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이 사람의 감정과 정념 속에서 지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공로와 과오의 서로 다른 정도에는 거의 마음을 쓰지 않는다. 거꾸로 사람은 오직 이것에만 마음을 쓰며, 모든 덕의 처지를 자기가 그 덕에 품는 사랑과 존중의 정도에 정확히 걸맞게 만들려, 모든 악덕의 처지를 자기가 그 악덕에 품는 멸시와 혐오의 정도에 정확히 걸맞게 만들려 애쓸 것이다. 자연이 따르는 규칙은 자연에게 알맞고, 사람이 따르는 규칙은 사람에게 알맞다. 그러나 둘은 다 같은 큰 목적, 곧 세계의 질서와 인간 본성의 완전함과 행복을 밀어 주도록 헤아려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자연의 일들을 저절로 놓아두면 이루어질 그 사물의 나눔을 바꾸는 데 쓰인다 하더라도, 시인들의 신들처럼 남다른 수단으로 덕을 편들고 악덕에 맞서 끊임없이 끼어든다 하더라도, 그 신들처럼 옳은 자의 머리를 겨눈 화살은 돌려놓으려 애쓰고 못된 자를 향해 치켜든 멸망의 칼은 더 빨리 내리치게 하려 애쓴다 하더라도, 사람은 그 어느 쪽의 운수도 자기 감정과 바람에 온전히 걸맞게 만들지는 결코 못한다.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사람의 무력한 애씀으로 온전히 다스려질 수 없다. 그 물결은 그가 막기에는 너무 빠르고 너무 세다. 그리고 그 흐름을 이끄는 규칙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좋은 목적을 위해 세워진 듯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더러 그의 모든 자연스러운 감정을 흔들어 놓는 결과를 낳는다. 사람이 크게 뭉친 편이 작게 뭉친 편을 이긴다는 것, 미리 생각하고 필요한 준비를 다 갖추어 일에 나서는 이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그들에게 맞서는 이들을 이긴다는 것, 그리고 모든 목적은 자연이 그것을 얻도록 세워 둔 수단으로만 얻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반드시 그러해야 하고 피할 수 없는 규칙일 뿐 아니라 인류의 부지런함과 마음 씀을 일으키는 데 쓸모 있고 적정한 규칙으로도 보인다. 그렇더라도 이 규칙의 결과로 난폭함과 꾸민 수가 참됨과 정의를 이길 때, 그것이 인간애 있는 모든 관찰자의 가슴에 어떤 의분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죄 없는 이들이 겪는 괴로움에 어떤 슬픔과 연민을, 억누르는 자의 성공에 어떤 날뛰는 분개를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우리는 저질러진 그 잘못에 비통해하기도 하고 격노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우리 힘으로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일임을 흔히 알게 된다. 옳지 못함의 승리를 막을 수 있는 어떤 힘도 땅 위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이렇게 절망할 때, 우리는 자연히 하늘에 호소하며, 우리 행위를 이끌도록 그가 우리에게 준 모든 원리가 여기에서조차 우리에게 시도하도록 권하는 것을 우리 본성의 위대한 창조자가 뒤에 몸소 이루어 줄 것을, 그가 이렇게 우리에게 시작하도록 가르쳐 준 그 계획을 그가 온전히 이루어 줄 것을, 그리고 올 생에서 각 사람에게 그가 이 세상에서 한 일에 따라 돌려줄 것을 바란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 본성의 약함과 바람과 두려움으로만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속하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좋은 원리로, 곧 덕을 사랑하는 마음과 악덕과 옳지 못함을 혐오하는 마음으로 오는 세상에 대한 믿음에 이끌린다.

“신의 위대함에 걸맞은 일인가”라고, 웅변에 뛰어나고 철학하는 클레르몽의 주교11는 더러 온당함의 한계를 넘어서는 듯이 보이는 그 정념에 찬 과장된 상상의 힘으로 말한다. “자기가 지은 세계를 그토록 두루 어지러운 채로 내버려 두는 것이 신의 위대함에 걸맞은 일인가? 못된 자가 거의 언제나 옳은 자를 이기는 것, 죄 없는 이가 왕위를 빼앗는 자에게 쫓겨나는 것, 아버지가 사람답지 못한 아들의 야망에 희생되는 것, 남편이 야만스럽고 신실하지 못한 아내의 손에 숨을 거두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그러한가? 신은 자기 위대함의 높이에서 그 우울한 일들을 아무런 몫도 맡지 않고 허깨비 같은 놀이처럼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가 위대하다는 이유로 약하거나 옳지 못하거나 야만스러워야 하는가? 사람이 작다는 이유로 벌 없이 방종하거나 보상 없이 덕 있는 것이 사람에게 허락되어야 하는가? 아, 신이시여, 이것이 당신의 최고 존재의 성격이라면, 우리가 그토록 무서운 관념 아래에서 흠숭하는 이가 당신이라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내 아버지로, 내 보호자로, 내 슬픔을 위로하는 이로, 내 약함을 받쳐 주는 이로, 내 충실함에 보상하는 이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기 뻔뻔한 허영에 인류를 희생시키는 자, 자기 한가로움과 변덕의 놀잇거리로 쓰려고 인류를 무에서 불러낸 게으르고 허깨비 같은 폭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행동의 공로와 과오를 정하는 일반 규칙이 이렇게, 우리 행위를 지켜보며 올 생에서 그 규칙을 지킨 것에는 상을 주고 그것을 깨뜨린 것에는 벌을 줄 전능한 존재의 법으로 여겨지게 되면, 그 규칙은 이 헤아림에서 반드시 새로운 거룩함을 얻는다. 신의 뜻을 존중하는 마음이 우리 행위의 최고 규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그 안에 가장 충격스러운 부적정성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힘이 자기에게 내린 명령에 맞서거나 그것을 소홀히 하는 일이 사람에게 얼마나 헛되고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이겠는가! 그것을 어겨도 아무런 벌이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 창조자의 무한한 선함이 자기에게 정해 준 가르침을 공경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얼마나 불경하게 은혜를 모르는 일이겠는가. 여기에서는 적정성의 감각도 자기 이해라는 가장 강한 동기로 잘 뒷받침된다. 우리가 사람의 눈을 아무리 벗어나고 사람이 주는 벌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 놓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옳지 못함을 갚는 위대한 이인 신의 눈 아래에서 행동하고 있고 그의 벌에 내놓여 있다는 관념은, 적어도 끊임없는 성찰로 그 관념을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만든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집스러운 정념도 억누를 수 있는 동기다.

종교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의무감을 다잡아 준다. 그래서 인류는 종교적 감정이 깊이 새겨진 듯한 사람들의 정직함에 큰 신뢰를 두는 쪽으로 대체로 기울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다스리는 끈 말고도 또 하나의 끈 아래에서 행동한다고 사람들은 상상한다. 명성뿐 아니라 행동의 적정성을 존중하는 마음, 남의 갈채뿐 아니라 자기 가슴의 갈채를 존중하는 마음은 종교적인 사람에게도 세속의 사람에게와 같은 영향을 미친다고 그들은 가정한다. 그러나 앞의 사람은 또 하나의 억누름 아래에 있어서, 자기 행위에 따라 끝내 자기에게 갚아 줄 그 위대한 상위자가 보는 앞에 있는 것처럼 하지 않고서는 결코 마음먹고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의 행위의 한결같음과 정확함에 더 큰 믿음이 놓인다. 그리고 종교의 자연스러운 원리가 쓸모없는 어떤 파당의 당파심과 편들기 열기에 물들지 않은 곳에서는, 종교가 요구하는 첫째 의무가 도덕의 모든 책무를 다하는 것인 곳에서는, 사람들이 하찮은 의례를 정의와 선행의 행위보다 더 직접적인 종교의 의무로 여기도록, 또 희생과 예식과 헛된 간구로 속임과 배신과 난폭함을 두고 신과 흥정할 수 있다고 상상하도록 가르침받지 않는 곳에서는, 세상이 이 점에서 옳게 판정하는 것이 틀림없으며 종교적인 사람의 행동이 바르다는 것에 두 배의 신뢰를 두는 것이 정당하다.

4장 어떤 경우에 의무감이 우리 행위의 유일한 원리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것이 다른 동기와 함께 작용해야 하는가

종교는 덕의 실천에 그토록 강한 동기를 주고 악덕의 유혹에서 그토록 힘 있는 억누름으로 우리를 지켜 주므로, 많은 사람이 종교적 원리만이 행동의 칭찬받을 만한 동기라고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말하기로는, 우리는 감사에서 보상해서도 안 되고 분개에서 벌해서도 안 되며, 자연스러운 정서에서 우리 아이들의 힘없음을 보호해서도 안 되고 우리 부모의 약함을 받쳐 주어서도 안 된다. 개별 대상을 향한 모든 정서는 우리 가슴에서 꺼져야 하고, 하나의 큰 정서가 다른 모든 정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곧 신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을 신의 마음에 들게 만들려는 욕망, 모든 점에서 신의 뜻에 따라 우리 행위를 이끌려는 욕망이다. 우리는 감사에서 감사해서는 안 되고, 인간애에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되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공공의 정신을 지녀서도 안 되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도량이 크고 옳아서도 안 된다. 그 서로 다른 의무를 모두 해내는 데서 우리 행위의 유일한 원리이며 동기는 신이 우리에게 그것을 하라고 명령했다는 감각이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의견을 하나하나 따져 볼 시간을 들이지 않겠다. 다만 다음 한 가지만 말해 두려 한다. 우리 주인 신을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첫째 가르침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둘째 가르침인 종교를 자기 종교라고 밝히는 어떤 분파가 그런 의견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고, 다만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의무감이 우리 행위의 유일한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스리고 주관하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철학이 일러 주는 대로이며 과연 상식이 일러 주는 대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우리 행동이 주로 또는 온전히 의무감에서, 또는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 다른 어떤 감정이나 정서가 함께 작용하여 주된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는 물어볼 만한 일이다.

어쩌면 아주 큰 정확성으로는 내릴 수 없을 이 물음에 대한 판정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정에 달려 있다. 첫째는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과 무관하게 우리를 어떤 행동으로 몰아갈 감정이나 정서가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가 추한가에 달려 있고, 둘째는 일반 규칙 자체가 촘촘하고 정확한가 아니면 느슨하고 부정확한가에 달려 있다.

1. 첫째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 행동이 어디까지 그 정서에서 일어나야 하는가 또는 온전히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하는가는 그 정서 자체가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가 추한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애로운 정서가 우리를 몰아갈 그 우아하고 감탄을 받는 행동은 모두, 행위의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만큼이나 그 정념 자체에서도 나와야 한다. 은인은 자기가 도움을 베푼 사람이 다만 차가운 의무감에서, 자기 사람됨에 대한 아무런 정서 없이 그것을 갚는다면 자기가 제대로 갚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가장 고분고분한 아내라도 그 행위가 자기가 놓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존중하는 마음 말고는 다른 어떤 원리로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기면 만족하지 못한다. 아들이 자식의 의무라는 직무를 하나도 어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가 느끼는 것이 그토록 걸맞은 그 정서에 찬 공경이 그에게 결여되어 있다면 부모는 그가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탓할 만하다. 또한 아들도 자기 처지의 모든 의무를 해내었으되 자기에게서 기대할 만했던 그 아버지다운 애틋함이 조금도 없는 부모에게 온전히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인애롭고 사회적인 정서 모두에 관해서는, 의무감이 그 정서를 살아나게 하기보다는 억누르는 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몰아가기보다는 우리가 너무 많이 하는 것을 막는 데 쓰이는 것을 보는 편이 마음에 든다. 아버지가 자기 애틋함을 억눌러야 하는 것, 벗이 자기 타고난 도량에 한계를 그어야 하는 것, 이로움을 받은 사람이 자기 기질의 너무 뜨거운 감사를 억눌러야 하는 것을 보는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악의에 찬 정념과 비사회적 정념에 관해서는 그 반대의 격률이 들어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감사와 도량에서, 아무런 꺼림 없이, 또 보상하는 일의 적정성이 얼마나 큰지를 성찰하지 않아도 되는 채로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벌할 때에는 언제나 꺼리면서, 복수하려는 어떤 야만스러운 성향에서보다 벌하는 일의 적정성에 대한 감각에서 더 많이 벌해야 한다. 가장 큰 해악에 분개하는 것으로 보이되 그 마음에 들지 않는 정념이 날뛰는 힘을 자기가 느끼는 데서보다 그 해악이 분개를 받아 마땅하고 분개의 적정한 대상이라는 감각에서 더 많이 그렇게 하는 사람, 재판관처럼 개별의 잘못마다 어떤 앙갚음이 돌아가야 하는지를 정하는 일반 규칙만을 헤아리는 사람, 그 규칙을 집행할 때 자기가 당한 것보다 그 잘못한 자가 당하게 될 것을 더 마음에 두는 사람, 노여워하면서도 자비를 잊지 않고 그 규칙을 가장 부드럽고 가장 너그럽게 풀이하며 가장 솔직한 인간애가 좋은 상식과 어긋나지 않게 인정할 수 있는 모든 덜어 줌을 허락하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의 행동보다 더 우아한 것은 없다.

앞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이기적 정념이 다른 점에서 사회적 정서와 비사회적 정서 사이의 중간쯤 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같이, 이 점에서도 그러하다. 사사로운 이해의 대상을 좇는 일은 흔하고 자그마하고 예사로운 모든 경우에 그 대상 자체에 대한 어떤 정념에서보다 그런 행위를 정해 주는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러나 더 중대하고 남다른 경우에는 그 대상 자체가 우리를 상당한 정도의 정념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색하고 맹맹하고 우아하지 못해 보일 것이다. 단돈 1실링을 벌거나 아끼려고 안달하거나 꾀를 꾸미는 것은 가장 세간의 장사꾼조차 모든 이웃의 의견에서 깎아내릴 것이다.12 그의 사정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런 자그마한 일 자체를 위하여 그것에 마음을 쓰는 일이 그의 행위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의 처지가 가장 엄격한 절약과 가장 정확한 부지런함을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절약과 부지런함을 하나하나 발휘할 때에는 그 개별의 아낌이나 벌이를 존중하는 마음에서보다 그에게 그런 행위의 결을 가장 엄하게 정해 주는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오늘 그가 아끼는 것이 그렇게 해서 아낄 그 3펜스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고, 그가 가게를 지키는 것이 그렇게 해서 벌 그 10펜스에 대한 정념에서 일어나서도 안 된다. 그 둘은 다 오직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하며, 그 규칙은 그와 같은 처지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행위의 계획을 가장 굽힘 없이 엄하게 정해 준다. 구두쇠의 성격과 정확한 절약과 부지런함을 지닌 사람의 성격을 가르는 차이가 여기에 있다. 앞의 사람은 자그마한 일을 그 일 자체를 위하여 안달하고, 뒤의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세워 둔 삶의 구상에 따라서만 그 일에 마음을 쓴다.

자기 이해의 더 남다르고 더 중대한 대상에 관해서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그것을 그 자체를 위하여 얼마쯤의 간절함으로 좇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비천해 보인다. 우리는 한 지방을 정복하거나 지켜 내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군주를 업신여길 것이다. 우리는 비천함도 옳지 못함도 없이 재산이나 상당한 관직을 얻을 수 있을 때 그것을 얻으려 힘쓰지 않는 사사로운 신사에게 존경을 거의 품지 않을 것이다. 자기 선거를 두고 아무런 열의도 보이지 않는 의회 의원은 자기 벗들의 애착을 받을 만한 값이 전혀 없다고 여겨져 그들에게 버림받는다. 장사꾼조차 사람들이 남다른 일거리라 부르는 것이나 흔치 않은 이로움을 얻으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이웃들 사이에서 기백 없는 자로 여겨진다. 이 기백과 열의가 진취적인 사람과 무디게 한결같은 사람을 가르는 차이를 이룬다. 그것을 잃거나 얻는 일이 그 사람의 지위를 아주 바꾸어 놓는 자기 이해의 그 큰 대상들은 적정하게 말해 야망이라 불리는 정념의 대상이다. 이 정념은 신중과 정의의 한계 안에 머무를 때에는 세상에서 언제나 감탄을 받으며, 그 두 덕의 한계를 넘어서 옳지 못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기까지 할 때에도 더러 상상을 어지럽게 홀리는 일종의 어긋난 위대함을 지닌다. 그래서 영웅과 정복자에 대한, 나아가 그 계획이 정의는 전혀 없으되 매우 담대하고 널리 뻗은 정치가에 대한 두루 미치는 감탄이 있다. 리슐리외 추기경과 레츠 추기경의 계획 같은 것이 그러하다.13 탐욕의 대상과 야망의 대상은 그 크기에서만 다르다. 구두쇠가 반 페니를 두고 날뛰는 것은 야망 있는 사람이 한 왕국을 정복하는 일을 두고 날뛰는 것과 같다.

2. 둘째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 행위가 어디까지 온전히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하는가는 얼마쯤은 그 일반 규칙 자체가 촘촘하고 정확한가 아니면 느슨하고 부정확한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덕의 일반 규칙, 곧 신중과 자비와 도량과 감사와 우정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정하는 일반 규칙은 여러 점에서 느슨하고 부정확하며 예외를 많이 허락하고 손질을 하도 많이 요구하므로,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만으로 우리 행위를 온전히 다스리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신중에 관한 흔한 속담 격률은 두루 미치는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어쩌면 신중에 관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반 규칙이다. 그러나 그것을 매우 엄격하게 또 글자 그대로 따르는 척하는 것은 뻔히 가장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현학이 된다. 내가 방금 말한 모든 덕 가운데 어쩌면 감사가 그 규칙이 가장 촘촘하고 예외를 가장 적게 허락하는 덕이다. 우리가 받은 도움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같은 값, 될 수 있으면 더 높은 값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은 꽤 뻔한 규칙이며 예외를 거의 허락하지 않는 규칙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얄팍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이 규칙은 가장 높은 정도로 느슨하고 부정확하며 만 가지 예외를 허락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당신의 은인이 당신이 병들었을 때 당신을 돌보아 주었다면, 그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그를 돌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종류로 갚아서 감사의 책무를 다할 수 있는가? 당신이 그를 돌보아야 한다면 얼마나 오래 돌보아야 하는가? 그가 당신을 돌본 것과 같은 기간인가, 아니면 더 오래인가, 그리고 얼마나 더 오래인가? 당신의 벗이 당신이 곤궁할 때 당신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면, 그가 곤궁할 때 당신은 그에게 돈을 빌려주어야 하는가? 얼마를 빌려주어야 하는가? 언제 빌려주어야 하는가? 지금인가, 내일인가, 다음 달인가? 그리고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인가? 이 물음 어느 하나에도 모든 경우에 촘촘한 답을 줄 수 있는 일반 규칙은 세울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의 성격과 당신의 성격, 그의 사정과 당신의 사정 사이의 차이가 어찌나 클 수 있는지, 당신이 온전히 감사하면서도 그에게 반 페니조차 빌려주기를 정당하게 거절할 수 있다. 거꾸로 당신이 그가 당신에게 빌려준 액수의 열 배를 빌려주려, 나아가 주려 하면서도 가장 검은 은혜 모름을, 곧 자기가 진 책무의 백분의 일도 다하지 않았음을 정당하게 탓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감사의 의무가 어쩌면 선을 베푸는 덕이 우리에게 정해 주는 모든 의무 가운데 가장 거룩한 것이듯, 그것을 정하는 일반 규칙도 내가 앞에서 말한 대로 가장 정확하다. 우정과 인간애와 손님 대접과 도량이 요구하는 행동을 정하는 규칙은 더욱 흐릿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일반 규칙이 그것이 요구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하나하나 가장 정확하게 정해 주는 덕이 하나 있다. 이 덕은 정의다. 정의의 규칙은 가장 높은 정도로 정확하며, 그 규칙 자체만큼 정확하게 정해질 수 있는 예외나 손질, 그리고 과연 대체로 그 규칙과 똑같은 원리에서 흘러나오는 예외나 손질 말고는 어떤 예외도 손질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10파운드를 빚졌다면, 정의는 내가 약속한 때에 또는 그가 요구할 때에 그에게 정확히 10파운드를 갚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얼마를 해야 하는지, 언제 어디에서 해야 하는지, 곧 정해진 그 행동의 성질과 사정 전체가 모두 촘촘하게 고정되고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신중이나 도량의 흔한 규칙을 너무 엄격하게 따르는 척하는 것은 어색하고 현학적일 수 있으되, 정의의 규칙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데에는 현학이 없다. 거꾸로 그 규칙에는 가장 거룩한 존중이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덕이 요구하는 행동은, 그것을 해내는 으뜸 동기가 그것을 요구하는 그 일반 규칙에 대한 공경에 찬 종교적인 존중일 때만큼 적정하게 해내어지는 일이 결코 없다. 다른 덕을 실천할 때 우리 행위는 촘촘한 격률이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보다는 적정성에 대한 어떤 관념, 어떤 행위의 결에 대한 어떤 심미안으로 이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규칙 자체보다 그 규칙의 목적과 바탕을 헤아려야 한다. 그러나 정의에 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정의에서 가장 적게 따지고 들며 일반 규칙 자체를 가장 고집스럽게 한결같이 지키는 사람이 가장 칭찬받을 만하고 가장 믿을 만하다. 정의의 규칙의 목적이 우리가 이웃을 해치지 못하게 막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이치를 내세우는 어떤 구실로 이 개별의 위반은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규칙을 어기는 것은 흔히 죄악일 수 있다.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서만이라도 이렇게 잔꾀를 부리기 시작하는 순간 흔히 악한이 된다. 그 어길 수 없는 가르침이 자기에게 정해 주는 것을 가장 굳건하고 분명하게 지키는 데서 벗어날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가 어느 정도의 죄까지 이르게 될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도둑은 부자에게서 그들이 쉽게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자기가 짐작하는 것, 어쩌면 그들이 자기에게서 도둑맞았다는 것조차 결코 알지 못할 것을 훔칠 때 자기가 아무런 악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간음하는 자는 자기 벗의 아내를 타락시킬 때, 자기 밀통을 그 남편의 의심에서 감추고 그 집안의 평화를 흩뜨리지 않는다면 자기가 아무런 악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그런 따지고 듦에 한번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면, 우리가 저지를 수 없을 만큼 거친 엄청난 짓은 하나도 없다.

정의의 규칙은 문법 규칙에 견줄 수 있고, 다른 덕의 규칙은 비평가들이 글짓기에서 숭고하고 우아한 것에 이르기 위해 세우는 규칙에 견줄 수 있다. 앞의 것은 촘촘하고 정확하며 없어서는 안 된다. 뒤의 것은 느슨하고 흐릿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겨누어야 할 완전함에 이르는 확실하고 틀림없는 지침을 주기보다는 그 완전함에 대한 대략의 관념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사람은 규칙으로 문법에 맞게 글 쓰는 법을 가장 온전히 틀림없이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옳게 행동하는 법도 그렇게 가르침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면 글쓰기에서 우아함이나 숭고함에 이르도록 틀림없이 우리를 이끌어 줄 규칙은 없다. 다만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완전함에 대해 품었을 흐릿한 관념을 바로잡고 분명히 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될 수 있는 규칙이 얼마쯤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우리가 모든 경우에 신중하게, 정당한 아량으로, 적정한 선행으로 행동하도록 틀림없이 가르침받을 수 있는 규칙도 없다. 다만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덕에 대해 품었을 불완전한 관념을 여러 점에서 바로잡고 분명히 할 수 있게 해 주는 규칙이 얼마쯤 있을 뿐이다.

시인을 받아 마땅하게 행동하려는 가장 진지하고 간절한 욕망을 품고서도 우리가 행위의 적정한 규칙을 잘못 알고, 그리하여 마땅히 우리를 이끌어야 할 바로 그 원리에 잘못 이끌리는 일이 더러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 인류가 우리 행동을 온전히 시인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되다. 그들은 우리를 움직인 그 터무니없는 의무의 관념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것에서 나오는 행동 가운데 어느 것에도 함께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그릇된 의무감으로, 또는 잘못된 양심이라 불리는 것으로 악덕에 넘겨진 사람의 성격과 행동에는 여전히 존경을 부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가 그것에 아무리 치명적으로 잘못 이끌렸더라도, 도량이 크고 인간애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미움이나 분개의 대상이기보다 연민의 대상이다. 그들은 우리가 가장 참되게 완전함을 뒤따라 애쓰고 우리를 이끌 수 있는 가장 좋은 원리에 따라 행동하려 애쓰는 동안에조차 그런 불행한 헛것에 우리를 내놓는 인간 본성의 약함을 탄식한다. 이렇게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매우 거칠게 비틀어 놓을 수 있는 원인은 거의 종교에 대한 그릇된 관념뿐이다. 그리고 의무의 규칙에 가장 큰 권위를 주는 그 원리만이 그 규칙에 대한 우리 관념을 상당한 정도로 일그러뜨릴 수 있다. 다른 모든 경우에는 상식만으로도 우리를 이끌기에 넉넉한데, 행위의 가장 정묘한 적정성까지는 못 되더라도 그것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무언가로는 이끈다. 그리고 우리가 간절히 잘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우리 행동은 전체로 보아 언제나 칭찬받을 만할 것이다.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의무의 첫째 규칙이라는 데에는 모든 사람이 뜻을 같이한다. 그러나 그 뜻이 우리에게 내릴 수 있는 개별의 계명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서로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는 가장 큰 서로 간의 참아 줌과 관용이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사회를 지키는 일이 죄악을 어떤 동기에서 나온 것이든 벌할 것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선한 사람은 그것이 종교적 의무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서 나온 것이 뻔한 때에는 언제나 꺼리면서 벌할 것이다. 그는 그런 죄악을 저지른 이들에게 다른 죄인들에게 느끼는 그 의분을 결코 느끼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 죄악을 벌하는 바로 그때에 그들의 불운한 굳건함과 아량을 안타까워하고 더러 감탄하기까지 할 것이다. 볼테르 씨의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비극 『무함마드』에는 그런 동기에서 나온 죄악에 대하여 우리 감정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가 잘 그려져 있다.14 그 비극에서 가장 죄 없고 덕 있는 성향을 지녔으며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 곧 우리에게 그들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 그것 말고는 다른 어떤 약함도 없는 남녀 두 젊은이가 그릇된 종교의 가장 강한 동기에 부추김을 받아 인간 본성의 모든 원리를 흔들어 놓는 무서운 살인을 저지른다. 그 둘 모두에게 가장 따뜻한 정서를 드러내었던 존경스러운 노인, 그들의 종교에 드러내어 맞선 원수였음에도 그 둘 모두가 가장 높은 공경과 존중을 품었던 노인, 그리고 그들은 알지 못했으나 실은 그들의 아버지였던 노인이 신이 자기들의 손으로 바치라고 분명히 요구한 희생으로 그들에게 지목되며, 그들은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죄악을 저지르려 할 때 그들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의무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관념과, 다른 한편으로는 연민과 감사와 나이에 대한 공경과 자기들이 죽이려는 그 사람의 인간애와 덕에 대한 사랑 사이의 다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고뇌에 시달린다. 이것을 무대에 올려 보이는 일은 어느 극장에 올려진 것 가운데 가장 마음을 끄는, 그리고 어쩌면 가장 가르침이 되는 광경 하나를 내보인다. 그러나 의무감이 마침내 인간 본성의 모든 사랑스러운 약함을 이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내려진 그 죄악을 저지른다. 그러나 곧바로 자기들의 잘못과 자기들을 속인 그 속임을 알아차리고, 공포와 회한과 분개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불행한 세이드와 팔미라에게 우리 감정이 그러한 대로, 이런 식으로 종교에 잘못 이끌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우리는 그렇게 느껴야 한다. 다만 그를 잘못 이끄는 것이 참으로 종교이고, 인간의 가장 나쁜 정념 가운데 어떤 것을 덮는 가리개로 쓰이는 종교의 겉치레가 아님을 우리가 확신할 때에 그렇다.

사람이 그릇된 의무감을 따라 잘못 행동할 수 있듯이, 더러 자연이 이겨서 그 의무감에 맞서 그를 옳게 행동하도록 이끌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마땅히 이겨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동기가 이기는 것을 보며 마음이 상할 수 없다. 그 사람 자신은 약해서 달리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원리의 결과가 아니라 약함의 결과이므로, 우리는 그것에 온전한 시인에 가까운 무엇을 내려 주기에는 한참 멀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때 연민에 사로잡혀, 자기가 죽이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한 불행한 신교도 몇을 구해 준 고집스러운 로마 가톨릭 신자는, 그가 온전한 자기 시인과 더불어 그 같은 도량을 발휘했다면 우리가 그에게 내려 주었을 그 높은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15 우리는 그의 기질의 인간애에 기뻐할 수는 있겠으나, 여전히 그를 완전한 덕에 돌아가야 할 감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종의 측은함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정념에서도 사정은 같다. 의무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그 사람에게 그 정념을 억누르도록 일러 줄 때에조차, 우리는 그 정념이 적정하게 발휘되는 것을 보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한쪽 뺨을 맞고서 다른 쪽 뺨을 내미는 대신, 우리 구주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던 것을 잊을 만큼 되어 자기를 욕보인 그 짐승 같은 자에게 제대로 한 차례 버릇을 가르쳐 준 매우 경건한 퀘이커 교도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사람이 아닐 것이다.16 우리는 웃으며 그의 기백을 재미있어할 것이고,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경우에 무엇이 하기에 적정한지에 대한 정당한 감각에서 적정하게 행동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것으로 보이는 그 존경과 존중으로 그를 바라보지는 결코 않을 것이다. 자기 시인의 감정이 함께 따르지 않는 행동은 어떤 것도 적정하게 덕 있다고 불릴 수 없다.

주

  1. 1. 옮긴이 — 복수의 여신(the Furies).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특히 피붙이를 해친 죄인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여신들이다. 그리스어로는 에리니에스, 라틴어로는 푸리아이라 부른다.

  2. 2. 옮긴이 — 저본의 pannel. 스코틀랜드 법에서 법정에 선 피고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3. 3.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generality(일반성)로 적었다. 바로 뒤의 「옳지 못함의 추함」과 짝을 이루는 자리이고 다른 판본은 generosity(도량이 큼)로 읽으므로 그에 따라 옮겼다.

  4. 4. 톰슨의 『사계』 「겨울」을 보라. “아, 즐겁고 방종한 오만한 이들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등. 파스칼도 보라.

  5. 5. 옮긴이 — 원저자 주에 나오는 톰슨은 제임스 톰슨(1700~1748), 『사계』(1730)를 쓴 스코틀랜드 시인이다. 파스칼은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이다.

  6. 6.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convocation(소집)으로 적었다. 얼굴빛과 나란히 놓인 자리이므로 conversation(이야기 나눔)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

  7. 7. 옮긴이 — 에픽테토스(약 50~약 135).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로, 노예로 지내다 풀려난 뒤 가르쳤다. 그의 말은 제자 아리아노스가 적어 전한다.

  8. 8. 옮긴이 — 니콜라 말브랑슈(1638~1715). 프랑스 오라토리오회 사제이자 철학자. 『진리의 탐구』를 썼다.

  9. 9. 옮긴이 — 유피테르. 로마 신화의 최고 신으로, 맹세와 약속을 지켜보며 그것을 어긴 자를 벌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 해당한다.

  10. 10.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그 능력이 시인하는 감정은 우아하고 걸맞지 않다」로 적어 뜻이 통하지 않는다. 다른 판본은 「…우아하고 걸맞으며, 그 반대되는 감정은 우아하지 못하고 걸맞지 않다」로 읽으므로 그에 따라 옮겼다.

  11. 11. 옮긴이 — 장바티스트 마시용(1663~1742). 프랑스의 설교가로 1717년부터 클레르몽 주교를 지냈다. 인용된 대목은 그의 설교에서 온 것이다.

  12. 12. 옮긴이 — 18세기 영국 화폐. 1파운드는 20실링, 1실링은 12펜스였고, 반 페니가 가장 작은 동전 단위였다.

  13. 13. 옮긴이 — 리슐리외 추기경(아르망 장 뒤 플레시, 1585~1642)은 루이 13세의 재상이었다. 레츠 추기경(장프랑수아 폴 드 공디, 1613~1679)은 프롱드의 난을 이끈 인물로 『회상록』을 남겼다.

  14. 14. 옮긴이 — 볼테르(1694~1778)의 비극 『무함마드, 또는 광신』(1741). 뒤에 나오는 세이드와 팔미라가 그 작품의 두 주인공이다.

  15. 15. 옮긴이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1572년 8월 파리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각지로 번진 신교도 학살 사건이다.

  16. 16. 옮긴이 — 퀘이커 교도.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개신교의 한 갈래로,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을 엄격히 지켰다.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은 『마태오 복음』의 가르침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