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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2부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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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3편 행위의 공로와 과오에 관하여 사람들의 감정에 운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머리말

어떤 행위에 돌아갈 수 있는 칭찬이나 비난은 무엇이든, 첫째로 그 행위가 흘러나오는 가슴의 의도 또는 정서에 돌아가거나, 둘째로 이 정서가 계기를 만들어 주는 외적 행위 또는 몸의 움직임에 돌아가거나, 마지막으로 실제로 그리고 사실상 그 행위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서로 다른 세 가지가 그 행위의 본성과 사정 전체를 이루며, 그 행위에 돌아갈 수 있는 어떤 성질이든 그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사정 가운데 뒤의 둘이 어떤 칭찬이나 비난의 바탕도 될 수 없다는 것은 넉넉히 뚜렷하며, 그 반대를 주장한 사람도 여태 없었다. 외적 행위 또는 몸의 움직임은 가장 죄 없는 행위에서나 가장 비난받을 행위에서나 똑같은 경우가 잦다. 새를 쏘는 사람과 사람을 쏘는 사람은 둘 다 똑같은 외적 움직임을 해낸다. 둘이 다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어떤 행위에서 실제로 그리고 사실상 흘러나오게 되는 결과는, 그럴 수 있다면, 몸의 외적 움직임보다도 오히려 칭찬이나 비난에 더욱 대수롭지 않다. 그 결과는 행위자에게 달려 있지 않고 운에 달려 있는 까닭에, 그의 성격과 행동을 대상으로 삼는 어떤 감정에도 적정한 바탕이 될 수 없다.

그가 책임을 질 수 있는 결과, 또는 그것으로 어떤 종류의 시인이나 부인을 받아 마땅해질 수 있는 결과는, 어떻게든 의도된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가 행동할 때 바탕으로 삼은 가슴의 의도에 반가운 성질이나 반갑지 않은 성질이 얼마간 드러나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에 정당하게 돌려질 수 있는 모든 칭찬이나 비난, 모든 종류의 시인이나 부인은 결국 가슴의 의도 또는 정서에, 곧 그 계획의 적정성이나 부적정성에, 그 계획의 선행이나 해로움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격률이 이렇게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말로 내놓아질 때에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것이 스스로 뚜렷하게 정당함은 온 세상이 인정하며, 온 사람들 가운데 딴 소리를 내는 목소리는 하나도 없다. 서로 다른 여러 행위의 우연하고 의도되지 않고 미리 보이지 않은 결과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그 행위들이 일어나온 의도나 정서가 한편으로 똑같이 적정하고 똑같이 선을 베푸는 것이었거나, 다른 한편으로 똑같이 적정하지 못하고 똑같이 악의에 찬 것이었다면, 그 행위의 공로나 과오는 여전히 같으며 행위자는 똑같이 감사 또는 분개의 알맞은 대상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평한 격률을 이렇게 추상적으로 헤아릴 때에는 그 참됨을 아무리 잘 받아들인 듯이 보일지라도, 개별 경우에 이르면 어떤 행위에서 실제로 흘러나오게 된 결과가 그 행위의 공로나 과오에 관한 우리의 감정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며, 거의 언제나 그 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키우거나 줄인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감정을 온전히 다스려야 한다고 인정하는 이 규칙이 실제로 우리의 감정을 온전히 다스리고 있다고 살펴본 뒤에 드러나는 경우는, 아마 단 하나도 좀처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나 느끼면서도 넉넉히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고 인정하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 감정의 불규칙성을 이제 나는 설명해 보려 한다. 그리하여 첫째로 그것에 계기를 만들어 주는 원인, 곧 자연이 그것을 낳아 내는 기제를 살피고, 둘째로 그 영향이 미치는 범위를 살피며, 마지막으로 그것이 이루어 내는 목적, 곧 자연의 창조자가 그것으로 내세운 듯이 보이는 뜻을 살필 것이다.

1장 운이 이러한 영향을 미치는 원인에 대하여

아픔과 즐거움의 원인은 그것이 무엇이든, 또 어떻게 작용하든, 모든 동물에게서 감사와 분개라는 저 두 정념을 곧바로 일으키는 대상으로 보인다. 그 정념은 살아 있는 대상뿐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대상에게서도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를 아프게 한 돌에게조차 한순간 노여워한다. 아이는 그것을 때리고, 개는 그것을 보고 짖고, 성 잘 내는 사람은 그것에 욕을 퍼붓기 쉽다. 과연 조금만 돌이켜 보아도 이 감정은 바로잡히며, 우리는 느낌이 없는 것이 복수의 몹시 적정하지 못한 대상임을 곧 알게 된다. 그러나 그 해악이 아주 클 때에는 그것을 일으킨 대상이 그 뒤로 줄곧 우리에게 반갑지 않은 것이 되고, 우리는 그것을 불태우거나 부수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우리는 벗의 죽음의 원인이 어쩌다 되어 버린 도구를 이와 같이 대할 것이며, 그것에 이 터무니없는 앙갚음을 풀어놓기를 게을리한다면 우리 자신이 인간애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렀다고 여기는 일이 잦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우리는 우리에게 크거나 잦은 즐거움의 원인이 되어 준 살아 있지 않은 대상에게도 일종의 감사를 품는다. 배가 부서진 자리에서 방금 널빤지 하나에 매달려 빠져나온 뱃사람이 뭍에 올라서기가 무섭게 그 널빤지로 불을 지핀다면, 그는 자연스럽지 못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어느 정도 자기에게 소중한 기념물로 삼아 조심스레 정서를 담아 보존할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할 것이다. 사람은 오래 써 온 코담뱃갑이나 주머니칼이나 지팡이를 아끼게 되고, 그것들에 참된 사랑과 정서 같은 것을 품게 된다. 그것들이 부러지거나 없어지면 그는 그 손실의 값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속이 상한다. 우리가 오래 살아온 집, 그 푸른 잎과 그늘을 우리가 오래 누려 온 나무는 둘 다, 그런 은인에게 돌아가야 할 듯한 일종의 존경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다. 그 집이 낡아 가거나 그 나무가 쓰러지는 일은, 우리가 그 때문에 아무 손실도 입지 않더라도 일종의 우울로 우리를 움직여 놓는다. 나무와 집의 일종의 수호신인 옛사람들의 드리아스와 라레스1는 아마도 그런 미신을 지은 이들이 그런 대상에게 느낀 이런 종류의 정서에서 처음 비롯하였을 것이며, 그 대상들에게 살아 있는 구석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정서는 이치에 닿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감사나 분개의 적정한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즐거움이나 아픔의 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이 다른 성질이 없다면 그 정념들은 그것을 상대로 어떤 만족도 느끼며 풀어낼 수 없다. 그 정념들이 즐거움과 아픔의 원인에서 일어나는 만큼, 그 정념들이 흡족해지는 길도 그 느낌을 일으킨 것에게 그 느낌을 되갚는 데 있는데, 감수성이 없는 것을 상대로 그것을 해 보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동물은 살아 있지 않은 대상보다는 감사와 분개의 대상으로 덜 적정하지 못하다. 무는 개와 뿔로 받는 소는 둘 다 벌을 받는다. 그것들이 어떤 사람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면, 그것들이 이번에는 죽임을 당하지 않는 한 공중도 살해된 사람의 친척도 흡족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살아 있는 이들의 안전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죽은 이가 입은 해에 복수하기 위한 것이다. 반대로 주인에게 두드러지게 쓸모가 있었던 동물은 아주 생생한 감사의 대상이 된다. 『터키 첩자』2에 나오는 저 장교의 잔인함에는 우리도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기를 바닷물 한 갈래를 건너 실어다 준 말을, 그 짐승이 뒤에 어떤 다른 사람을 같은 모험으로 두드러지게 해 줄까 저어하여 찔러 죽였다.

그러나 동물은 즐거움과 아픔의 원인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느낌을 느낄 수도 있으나, 감사나 분개의 온전하고 완전한 대상이 되기에는 여전히 멀며, 그 정념들은 자기네 온전한 흡족에 무엇인가 모자란 것이 있다고 여전히 느낀다. 감사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은인이 이번에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지난날의 행동 덕분에 이 보답을 받는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의식하게 하며, 그 행동을 두고 그가 기뻐하게 하고, 자기가 좋은 일을 베풀어 준 그 사람이 그것을 받기에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음을 그에게 납득시키는 일이다. 우리 은인에게서 우리를 가장 사로잡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격의 값과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존중처럼 우리에게 그토록 가까이 걸린 일을 두고 그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 사이에 이루어지는 화합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값있게 여기는 만큼 우리를 값있게 여기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남과 가려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의로 우리를 나머지 사람들과 가려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몹시 기뻐한다. 그에게서 이 반갑고 우쭐하게 하는 감정을 지켜 나가는 일은 우리가 그에게 갚으려 할 때 내세우는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도량이 큰 마음은 흔히, 감사의 성가신 매달림이라 부를 만한 것으로 은인에게서 새 호의를 짜내려는 사리를 따지는 생각을 업신여긴다. 그러나 그의 존중을 지키고 키우는 일은 가장 위대한 마음도 자기가 마음 쓸 만하지 않다고 여기지 않는, 이해가 걸린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은인의 동기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때, 그의 행동과 성격이 우리의 시인을 받을 만하지 않아 보일 때에는 그가 베푼 일이 아무리 컸다 하더라도 우리의 감사가 언제나 눈에 띄게 줄어든다고 내가 앞서 말한 것도 여기에 바탕을 둔다. 그런 가려냄에 우리는 덜 우쭐해지며, 그토록 약하거나 그토록 값없는 후원자의 존중을 지키는 일은 그 자체를 위하여 뒤쫓을 만하지 않은 목적으로 보인다.

반대로 분개가 무엇보다 겨누는 대상은, 우리 적이 이번에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도, 그가 지난날의 행동 때문에 그것을 느낀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의식하게 하고, 그 행동을 뉘우치게 하며, 자기가 해를 입힌 사람이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지는 않았음을 그가 알게 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해를 입히거나 우리를 업신여기는 사람에게 우리가 무엇보다 노여워하는 것은, 그가 우리를 거의 셈에 넣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 그가 우리보다 자기를 이치에 닿지 않게 앞세우는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언제든 자기의 편리나 기분을 위하여 희생될 수 있다고 여기는 듯이 보이게 하는 저 터무니없는 자애심이다. 이 행동의 눈에 띄는 부적정성, 거기에 들어 있는 듯이 보이는 거친 무람없음과 옳지 못함은, 우리가 당한 모든 해악보다도 더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고 우리를 격하게 만드는 일이 잦다.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에 대한 더 올바른 감각으로 되돌려 놓는 일,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빚졌는지와 그가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을 그가 알게 하는 일이 우리의 복수가 내세우는 주된 목적인 경우가 잦으며, 그 복수는 이 일을 이루어 내지 못할 때 언제나 온전하지 못하다. 우리 적이 우리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은 것으로 보일 때, 그가 아주 적정하게 행동하였음을, 그의 처지에서라면 우리도 똑같이 하였을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서 당한 모든 해악을 우리가 받아 마땅하였음을 우리가 알고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공정함이나 정의의 불씨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분개도 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감사나 분개의 온전하고 적정한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서로 다른 세 가지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로 그것은 앞의 경우에는 즐거움의 원인이어야 하고 뒤의 경우에는 아픔의 원인이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그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그것은 그 느낌을 낳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계획에서, 그것도 앞의 경우에는 시인되고 뒤의 경우에는 부인되는 계획에서 그것을 낳았어야 한다. 어떤 대상이 그 정념들을 일으킬 수 있게 하는 것은 첫째 자격이고, 그것이 어느 모로든 그 정념들을 흡족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둘째 자격이다. 셋째 자격은 그 정념들이 온전히 만족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며, 또 그것이 각별하고도 남다른 즐거움이나 아픔을 주는 까닭에 그 정념들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느 길로든 즐거움이나 아픔을 주는 것이 감사와 분개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인 까닭에, 어떤 사람의 의도가 한편으로 아무리 적정하고 선을 베푸는 것이었거나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적정하지 못하고 악의에 찬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자기가 뜻한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을 낳아 내는 데 실패하였다면, 두 경우 모두 일으키는 원인 하나가 빠져 있으므로 앞의 경우에는 더 적은 감사가 그에게 돌아가야 할 듯이 보이고 뒤의 경우에는 더 적은 분개가 돌아가야 할 듯이 보인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의도에 한편으로 칭찬할 만한 정도의 인애가 없었거나 다른 한편으로 비난할 만한 정도의 악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큰 좋은 것이나 큰 나쁜 것을 낳았다면, 이 두 경우에도 일으키는 원인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앞의 경우에는 그를 향하여 얼마간의 감사가 일어나기 쉽고 뒤의 경우에는 얼마간의 분개가 일어나기 쉽다. 앞의 경우에는 공로의 그늘이, 뒤의 경우에는 과오의 그늘이 그에게 내리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는 온통 운의 지배 아래 있는 까닭에, 거기에서 공로와 과오에 관한 사람들의 감정에 운이 미치는 영향이 나온다.

2장 운이 미치는 이 영향의 범위에 대하여

운이 미치는 이 영향의 결과는, 첫째로 가장 칭찬할 만하거나 가장 비난할 만한 의도에서 일어난 행위가 내세운 결과를 낳는 데 실패할 때 그 행위의 공로나 과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줄이는 것이고, 둘째로 행위가 어쩌다 남다른 즐거움이나 아픔에 계기를 만들어 줄 때 그 행위가 흘러나온 동기나 정서에 돌아가야 할 정도를 넘어서까지 그 공로나 과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1. 첫째로 내가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어떤 사람의 의도가 한편으로 아무리 적정하고 선을 베푸는 것이었거나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적정하지 못하고 악의에 찬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의도가 자기 결과를 낳는 데 실패하면 앞의 경우에 그의 공로는 온전하지 못해 보이고 뒤의 경우에 그의 과오는 덜 갖추어져 보인다. 그리고 이 감정의 불규칙성은 어떤 행위의 결과에 곧바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공평한 관찰자조차 느낀다. 남을 위하여 어떤 자리를 청하였으나 얻어 내지 못한 사람은 그의 벗으로 여겨지며 그의 사랑과 정서를 받아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은 한결 더 각별하게 그의 후원자이자 은인으로 여겨지며 그의 존경과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신세를 진 사람은 얼마간 정당하게 자기가 앞의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다고 여길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뒤의 사람보다 자기가 아래에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를 섬기려고 애써 준 사람에게도 실제로 섬겨 준 사람에게와 똑같이 신세를 졌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흔한 일이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실패한 시도가 있을 때마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지만, 다른 모든 듣기 좋은 말과 마찬가지로 얼마쯤 접어 두고 알아들어야 하는 말이다. 도량이 큰 사람이 실패한 벗에게 품는 감정은 과연 성공한 벗에게 품는 감정과 거의 같을 때가 잦으며, 그가 도량이 클수록 그 감정은 더욱 정확히 같은 자리에 가까워진다. 참으로 도량이 큰 사람들에게는, 자기네가 존중받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존중받는 일이 그런 감정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이득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며 따라서 더 큰 감사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이득을 잃을 때 그들이 잃는 것은 거의 마음에 둘 값도 없는 자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잃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즐거움은, 따라서 그들의 감사도 완전하게 온전하지는 않다. 그러니 실패한 벗과 성공한 벗 사이에 다른 모든 사정이 같다면, 가장 고귀하고 가장 훌륭한 마음에조차 성공한 쪽으로 기우는 얼마간의 작은 정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니, 사람들은 이 점에서 어찌나 옳지 못한지, 뜻한 이로움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특정한 은인의 손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도를 품고서도 그 일을 조금 밀어 주는 것 말고는 더 할 수 없었던 그 사람에게는 더 적은 감사가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기 쉽다. 이 경우 그들의 감사는 자기네 즐거움에 힘을 보탠 여러 사람에게 나뉘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돌아갈 몫은 더 작아 보인다. 그런 사람이 우리를 섬기려 한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그리고 우리는 그가 그 목적을 위하여 자기 힘이 닿는 데까지 애썼다고 참으로 믿는다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로움을 두고 그에게 신세를 진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그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일로도 이 일이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런 헤아림이 공평한 관찰자의 눈에조차 자기들이 그에게 진 빚을 줄여 줄 것이라고 그들은 상상한다. 이로움을 베풀려 애썼으나 이루지 못한 그 사람 자신도, 자기가 신세를 지게 하려 한 사람의 감사에 성공한 경우라면 지녔을 그만한 기댐을 결코 지니지 못하고, 그를 향한 자기 공로에 대한 그만한 감각도 결코 지니지 못한다.

어떤 사고가 그 결과를 낳지 못하게 막아 버린 재능과 능력의 공로조차, 그것이 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온전히 납득한 사람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온전하지 못해 보인다. 대신들의 시샘 때문에 자기 나라의 적들에게서 어떤 큰 이득을 얻어 내는 일을 막힌 장군은 그 기회를 놓친 것을 그 뒤로 줄곧 애석해한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애석해하는 것은 나라 때문만이 아니다. 자기 눈에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눈에도 자기 성격에 새로운 빛을 더해 주었을 행위를 해내는 일을 막혔다고 그는 한탄한다. 계획이나 구상만이 자기에게 달린 몫이었다는 것, 그것을 실행하는 데는 그것을 짜내는 데 필요하였던 것보다 더 큰 역량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 자기가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어느 모로 보나 갖추었다고 인정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나아가도록 허락되었더라면 성공은 어김없었으리라는 것을 돌이켜 보아도 그 자신도 남들도 흡족해지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아량 있고 위대한 구상에 돌아가야 할 모든 시인을 받아 마땅하였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행위를 실제로 해냈다는 공로는 갖지 못하였다. 공중에 관한 어떤 일을 거의 끝맺기에 이른 사람에게서 그 일의 처리를 빼앗는 것은 가장 시샘에 찬 옳지 못함으로 여겨진다. 그가 그토록 많은 일을 해냈으니 그 일을 끝맺는 온전한 공로를 얻도록 허락되어야 하였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가 거둔 승리에 얹혀 들어와 다른 사람의 운과 용맹에 돌아가야 할 그 월계관을 거두어 갔다는 비난을 받았다3. 자기의 처신과 용기로 거의 누구나 끝맺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그 정복을 마무리하도록 허락되지 못하였을 때, 루쿨루스의 영광은 그 자신의 벗들이 보기에조차 덜 온전하였던 듯하다. 건축가는 자기 도면이 아예 실행되지 않거나 건물의 효과를 망치도록 크게 바뀌어 버리면 마음이 상한다. 그러나 도면만이 그 건축가에게 달린 몫이다. 그의 천재 전체는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 실제의 실행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면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그러나 도면은 가장 이치를 아는 사람에게조차 고귀하고 웅장한 건물과 똑같은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앞의 것에서도 뒤의 것에서만큼 심미안과 천재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여전히 아주 크게 다르며, 앞의 것에서 얻는 재미는 뒤의 것이 때로 일으키는 놀람과 감탄에 결코 가까이 가지 못한다. 많은 사람을 두고 우리는 그들의 재능이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로스4의 재능보다 뛰어나며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한결 더 위대한 행위를 해낼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 두 영웅이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에서 받아 온 그런 경탄과 감탄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마음의 차분한 판단은 그들을 더 시인할지 모르나, 그 판단의 눈을 부시게 하고 그것을 실어 갈 위대한 행위의 찬란함이 그들에게는 없다. 덕과 재능의 뛰어남은 그 뛰어남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업적의 뛰어남과 똑같은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

좋은 일을 하려 한 시도가 실패하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그 공로가 그 실패 때문에 줄어드는 듯이 보이듯이, 나쁜 일을 하려 한 시도가 실패할 때에도 그 과오가 마찬가지로 줄어든다. 죄를 저지르려는 계획은 아무리 뚜렷하게 밝혀지더라도 실제로 그것을 저지른 경우와 똑같은 엄함으로 벌해지는 일이 좀처럼 없다. 아마도 대역죄의 경우가 유일한 예외이다. 그 죄는 정부 자체의 존립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정부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더 시샘하며 지킨다. 대역죄를 벌할 때 주권자는 자기에게 곧바로 저질러진 해에 분개하고, 다른 죄를 벌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저질러진 해에 분개한다. 앞의 경우에 그가 마음껏 풀어놓는 것은 자기 자신의 분개이고, 뒤의 경우에 그가 동감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기 백성의 분개이다. 그러므로 앞의 경우에 그는 자기 자신의 일을 재판하는 까닭에 공평한 관찰자가 시인할 수 있는 정도보다 더 거칠고 피를 많이 흘리는 벌을 내리기 쉽다. 게다가 그의 분개는 여기에서 더 작은 계기에도 일어나며, 다른 경우처럼 죄가 저질러지기까지, 또는 그것을 저지르려는 시도가 있기까지 언제나 기다리지도 않는다. 대역의 모의는 그것에 따라 아무 일도 행해지지 않고 시도조차 없었다 하더라도, 아니 대역의 대화조차 여러 나라에서 실제로 대역을 저지른 것과 똑같이 벌해진다. 다른 모든 죄에 관해서라면, 시도가 뒤따르지 않은 계획만으로는 벌해지는 일이 드물고 엄하게 벌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 과연 죄를 지으려는 계획과 죄를 짓는 행위가 반드시 같은 정도의 타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같은 벌을 받아야 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막상 그때에 이르면 우리 자신이 도무지 해낼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많은 일을 결심할 수도 있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손을 쓸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이 마지막 시도에까지 이르고 나면 이 까닭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자기 적을 향하여 권총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한 사람은 어느 나라의 법으로도 좀처럼 죽음으로 벌해지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옛 법으로는5 그가 적에게 상처를 입혔다 하더라도 일정한 기간 안에 죽음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자에게 마지막 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죄를 향한 사람들의 분개는 어찌나 높이 치솟고,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사람에 대한 그들의 끔찍함은 어찌나 큰지, 그것을 저지르려는 시도만으로도 모든 나라에서 사형에 해당하여야 마땅할 정도이다. 더 작은 죄를 저지르려는 시도는 거의 언제나 아주 가볍게 벌해지고 때로는 아예 벌해지지 않는다. 이웃의 주머니에서 아무것도 꺼내기 전에 손을 잡힌 도둑은 창피를 당하는 것만으로 벌해진다. 그가 손수건 하나를 가져갈 틈이 있었더라면 그는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웃의 창에 사다리를 걸치다가 들킨 집털이는 아직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사형에 놓이지 않는다. 겁탈하려는 시도는 겁탈로 벌해지지 않는다. 남의 아내를 꾀려는 시도는 아예 벌해지지 않으나, 꾀어낸 일은 엄하게 벌해진다. 해악을 저지르려고 시도만 한 사람에 대한 우리의 분개는, 그가 실제로 그것을 저질렀다면 마땅하였으리라고 우리가 여길 그 똑같은 벌을 그에게 내리도록 우리를 버텨 줄 만큼 강한 경우가 드물다. 앞의 경우에는 우리가 벗어났다는 기쁨이 그의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덜어 주고, 뒤의 경우에는 우리가 겪은 불행의 비통이 그것을 키운다. 그러나 그의 실제 과오는 의심할 바 없이 두 경우에 똑같으니, 그의 의도는 똑같이 죄를 지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의 감정에 불규칙성이 있고, 그에 따라 내가 믿기로는 가장 문명화된 나라에서나 가장 야만스러운 나라에서나 모든 나라의 법에 기율의 느슨해짐이 있다. 문명화된 백성의 인간애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의분이 죄의 결과로 부추겨지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벌을 면하게 하거나 가볍게 하도록 그들을 이끈다. 반대로 야만인들은 어떤 행위에서 실제로 아무 결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동기를 두고 그리 섬세하게 따지거나 캐묻지 않기 쉽다.

정념 때문에, 또는 나쁜 패거리의 영향 때문에 어떤 죄를 저지르기로 결심하고 어쩌면 손까지 써 두었으나, 그 일을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게 만든 어떤 사고 덕분에 다행히 막힌 사람은, 그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뒤 평생 이 일을 크고 뚜렷한 구원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그는 자기가 막 뛰어들려 하였던 그 죄에서 자기를 건져 주고 남은 평생을 끔찍함과 회한과 뉘우침의 장면으로 만들지 않게 막아 주신 것을 그렇게 어여삐 여겨 주셨다는 데 하늘에 감사를 돌리지 않고서는 그것을 결코 떠올릴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손은 죄가 없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 가슴이 그토록 굳게 결심하였던 것을 실제로 실행하였을 경우와 똑같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자기의 어떤 덕에서 온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죄가 실행되지는 않았다고 헤아리는 일은 그의 양심을 크게 편하게 해 준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벌과 분개를 덜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며, 이 좋은 운수는 죄를 지었다는 감각을 모두 줄여 주거나 아예 지워 준다. 자기가 그 일을 얼마나 굳게 결심하였는지를 떠올리는 일은, 자기가 벗어난 것을 그만큼 더 크고 더 기적 같은 일로 여기게 만드는 효과밖에 없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벗어났다고 여기며, 안전한 곳에 있는 사람이 이따금 절벽에서 떨어질 뻔하였던 위험을 떠올리며 그 생각에 몸을 떠는 것과 같은 그런 끔찍함으로 자기 마음의 평안이 놓여 있던 위험을 돌아본다.

2. 운이 미치는 이 영향의 둘째 결과는, 행위가 어쩌다 남다른 즐거움이나 아픔에 계기를 만들어 줄 때 그 행위가 흘러나온 동기나 정서에 돌아가야 할 정도를 넘어서까지 그 공로나 과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행위의 반갑거나 반갑지 않은 효과는, 행위자의 의도에 칭찬이나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거나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내려 주기 쉬운 그 정도로 받아 마땅한 것은 없었다 하더라도, 흔히 그에게 공로나 과오의 그늘을 드리운다. 그리하여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심부름꾼조차 우리에게 반갑지 않고, 반대로 우리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일종의 감사를 느낀다. 한순간 우리는 그 둘을 각각 우리의 좋은 운수와 나쁜 운수를 지은 이로 보며, 그들이 전하기만 한 그 일을 실제로 이루어 낸 것처럼 어느 정도 그들을 바라본다. 우리 기쁨을 처음 지은 이는 자연스럽게 잠깐 스치는 감사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따뜻함과 정서를 담아 그를 껴안으며, 우리가 잘되어 가는 그 순간에는 어떤 두드러진 섬김에 대한 것처럼 그에게 보상하고 싶어진다. 모든 궁정의 관례로 승전 소식을 가져오는 장교는 상당한 승진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장군은 언제나 자기가 아끼는 이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토록 반가운 심부름을 보낸다. 반대로 우리 슬픔을 처음 지은 이는 그만큼 자연스럽게 잠깐 스치는 분개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를 언짢음과 불편함으로 바라보는 일을 좀처럼 비껴갈 수 없으며, 거칠고 잔인한 사람들은 그가 전한 소식이 계기를 만들어 준 그 짜증을 그에게 풀어놓기 쉽다. 아르메니아의 왕 티그라네스6는 무서운 적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처음 가져온 사람의 목을 베어 버렸다. 나쁜 소식을 가져온 사람을 이렇게 벌하는 일은 야만스럽고 사람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좋은 소식을 가져온 심부름꾼에게 상을 주는 일은 우리에게 반갑지 않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왕의 넉넉함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쪽에 잘못이 없다면 다른 쪽에도 공로가 없을 터인데, 우리는 왜 이런 차이를 두는가? 그것은 사회적이고 인애로운 정서를 내보이는 일이라면 어떤 종류의 까닭이라도 넉넉히 그것을 허락해 주는 듯이 보이지만, 비사회적이고 악의에 찬 정서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려면 가장 단단하고 알찬 까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비사회적이고 악의에 찬 정서 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리며, 그 정서가 향해진 상대의 악의에 차고 옳지 못한 의도가 그를 그 정서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그 정서가 흡족해지는 것을 결코 시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칙으로 세워 두고 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이 엄함을 누그러뜨린다. 한 사람의 부주의가 다른 사람에게 뜻하지 않은 손해를 일으켰을 때, 우리는 당하는 쪽의 분개 속으로 어지간히 들어가, 그런 운수 없는 결과가 뒤따르지 않았더라면 그 잘못이 받아 마땅해 보였을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벌을 그가 가해자에게 내리는 것을 시인한다.

누구에게도 손해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얼마간의 징벌을 받아 마땅해 보일 정도의 부주의가 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이들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어디에 떨어질 법한지 살피지도 않은 채 큰 돌을 담 너머 공공의 거리로 던진다면,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얼마간의 징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아주 빈틈없는 치안 행정이라면 그토록 터무니없는 행위를 아무 해악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벌할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남의 행복과 안전을 무람없이 업신여기는 태도를 드러낸다. 그의 행동에는 실제의 옳지 못함이 있다. 그는 제정신이라면 아무도 자기 자신을 내놓기로 하지 않을 것에 아무 까닭도 없이 이웃을 내놓으며, 정의와 사회의 바탕이 되는, 같은 피조물인 이웃에게 무엇이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저 감각이 그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러므로 중대한 과실7은 법에서 악의에 찬 계획과 거의 같다고 이야기된다8. 그런 부주의에서 어떤 운수 없는 결과가 일어날 때,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흔히 그가 실제로 그 결과를 뜻하였던 것처럼 벌해지며, 생각이 없고 무람없었을 뿐이며 얼마간의 징벌을 받아 마땅하였던 그의 행동은 끔찍한 것으로, 가장 엄한 벌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신중하지 못한 행위로 그가 어쩌다 사람을 죽인다면, 그는 여러 나라의 법으로, 특히 스코틀랜드의 옛 법으로 마지막 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지나치게 엄하지만, 우리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아주 어긋나는 것만도 아니다. 그의 행동의 어리석음과 인간애 없음을 향한 우리의 올바른 의분은 불행을 당한 쪽에 대한 우리의 동감으로 더욱 격해진다. 그러나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고 거리에 돌을 부주의하게 던졌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처형대에 올리는 일보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공평 감각에 더 충격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의 행동의 어리석음과 인간애 없음은 똑같을 터인데, 그래도 우리의 감정은 아주 다를 것이다. 이 차이를 헤아려 보면, 관찰자의 의분조차 행위의 실제 결과로 얼마나 크게 부추겨지기 쉬운지를 우리는 납득할 수 있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이런 종류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나라의 법에 큰 정도의 엄함이 있음이 드러날 것이며, 그와 반대되는 종류의 경우에는 기율이 아주 널리 느슨해져 있음을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어떠한 종류의 옳지 못함도 안에 품고 있지 않은 또 다른 정도의 부주의가 있다.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이웃을 자기 자신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대하며, 누구에게도 해를 뜻하지 않고, 남의 안전과 행복을 무람없이 업신여기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자기 행동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조심스럽고 두루 살피지 않았으며, 이 점에서 얼마간의 비난과 책망을 받아 마땅하나 어떠한 벌도 받아 마땅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과실9로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손해를 일으킨다면, 그는 내가 믿기로는 모든 나라의 법으로 그것을 메워 줄 의무를 진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실제의 벌이며, 그의 행동이 계기를 만들어 준 그 운수 없는 사고가 없었더라면 죽을 사람 누구도 그에게 그것을 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법의 이러한 판정은 온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시인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부주의로 손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비난받을 만한 부주의가 일으킨 손해는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이 메워야 한다는 것보다 더 정당한 일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또 다른 종류의 과실10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행위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과를 두고 가장 애타게 두려워하며 두루 살피는 일의 결여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괴로운 주의의 결여는, 그것에서 나쁜 결과가 뒤따르지 않을 때에는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성질이 그런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저 겁 많은 살핌은 결코 덕으로 여겨지지 않고, 다른 어떤 성질보다도 행동과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성질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지나친 조심의 결여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쩌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일으킬 때, 그는 흔히 법으로 그것을 메워 줄 의무를 진다. 그리하여 아퀼리우스법11에 따르면 어쩌다 놀란 말을 다스리지 못하여 이웃의 노예를 말로 치어 쓰러뜨리게 된 사람은 그 손해를 메워 줄 의무를 진다. 이런 종류의 사고가 일어날 때 우리는 그가 그런 말을 타지 말았어야 하였다고 여기고 그런 말을 타려 한 일을 용서할 수 없는 가벼움으로 보기 쉬우나, 이 사고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그것을 마다하는 일을 겁 많은 약함, 곧 알아 두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한갓 일어날 수 있을 뿐인 일을 두고 애타게 걱정하는 마음의 결과로 보았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고로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그 사람 자신도, 그에 대하여 자기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감각을 얼마간 지니는 듯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당하는 쪽에게 달려가 벌어진 일에 대한 자기의 걱정을 드러내고 자기 힘이 닿는 온갖 인사를 다한다. 그에게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당하는 쪽의 가슴에 일어나기 쉬우리라고 자기가 알고 있는 저 동물적 분개를 달래기 위하여 그 손해를 메워 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를 반드시 바란다. 아무 사과도 하지 않고 아무 속죄도 내놓지 않는 일은 가장 큰 잔인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왜 그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사과를 해야 하는가? 그는 곁에서 보는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죄가 없었는데, 왜 그가 온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홀로 뽑혀 남의 나쁜 운수를 메우게 되어야 하는가? 공평한 관찰자조차 그 다른 사람의 옳지 못한 분개라 볼 만한 것에 얼마간 너그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 짐은 분명히 결코 그에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3장 이러한 감정의 불규칙성이 지닌 목적인(目的因)에 대하여

행위의 좋은 결과나 나쁜 결과가 그 행위를 해낸 사람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은 이러하다. 그리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운은 우리가 운에게 어떤 영향도 가장 내주고 싶지 않은 곳에서 얼마간 영향을 미치며, 자기 자신과 남의 성격과 행동에 관한 사람들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이끈다. 세상이 구상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한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한탄이었고 덕을 크게 낙담시키는 일이다. 결과는 행위자에게 달려 있지 않으므로 그의 행동의 공로나 적정성에 관한 당신의 감정에 어떤 영향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일반 격률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개별의 일에 이르면 우리의 감정이 이 공평한 격률이 이끄는 바에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는 단 하나도 좀처럼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어떤 행위가 다행한 결과를 낳았는지 잘되지 못한 결과를 낳았는지는 그 일이 어느 정도의 신중으로 처리되었는지에 대하여 좋은 견해나 나쁜 견해를 우리에게 갖게 하기 쉬울 뿐 아니라, 거의 언제나 우리의 감사나 분개, 곧 그 구상의 공로나 과오에 대한 우리의 감각까지 부추긴다.

그러나 자연이 사람의 가슴에 이 불규칙성의 씨앗을 심어 놓았을 때12, 자연은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종의 행복과 완전함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구상의 해로움과 정서의 악의가 우리의 분개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이라면, 우리는 그런 구상이나 정서가 가슴에 품겨 있다고 의심하거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것이 어떤 행위로도 터져 나온 적이 없더라도 그 정념의 온갖 광포함을 느낄 것이다. 감정과 생각과 의도가 벌의 대상이 될 것이며, 사람들의 의분이 그것을 향하여 행위를 향한 것과 똑같이 높이 치솟는다면, 아무 행위도 낳지 않은 생각의 비루함이 세상의 눈에 행위의 비루함과 똑같이 앙갚음을 큰 소리로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면, 모든 재판정은 진짜 종교 재판소가 될 것이다. 가장 죄 없고 가장 두루 살피는 행동에도 안전이 있을 수 없다. 나쁜 바람, 나쁜 뜻, 나쁜 구상은 여전히 의심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나쁜 행동과 똑같은 의분을 일으키고 나쁜 의도가 나쁜 행위와 똑같이 분개를 받는 동안, 그것은 그 사람을 벌과 분개에 똑같이 내놓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창조자는 실제의 나쁜 것을 낳거나 그것을 낳으려고 시도하여 그로써 우리를 그것에 대한 곧바른 두려움에 놓는 행위만을 사람의 벌과 분개의 유일하게 적정하고 시인되는 대상으로 삼아 놓았다. 차분한 이성에 따르자면 사람의 행위는 그 공로나 과오 전체를 감정과 구상과 정서에서 끌어내지만, 가슴을 살피시는 위대한 심판자는 그것을 사람의 모든 재판권의 한계 밖에 놓고 그 자신의 어긋남 없는 법정의 판별을 위하여 남겨 두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생애에서 자기 행위에 대하여만 벌을 받을 수 있고 자기 구상과 의도에 대하여는 받지 않는다는 저 반드시 있어야 할 정의의 규칙은, 처음 보기에 그토록 터무니없고 알 수 없어 보이는, 공로와 과오에 관한 사람 감정의 이 유익하고 쓸모 있는 불규칙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부분은 주의 깊게 둘러볼 때 그 창조자의 섭리에 찬 보살핌을 똑같이 드러내 보이며, 우리는 사람의 약함과 어리석음에서조차 신의 지혜와 선함을 감탄할 수 있다.

섬기려 한 시도가 실패하였을 때 그 공로가, 그리고 한갓 좋은 마음과 친절한 바람의 공로는 한결 더, 온전하지 못해 보이게 만드는 저 감정의 불규칙성도 효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행동하도록, 그리고 자기 능력을 내보여 자기 자신과 남의 바깥 사정에 모두의 행복에 가장 이로워 보이는 변화를 불러오도록 지어졌다. 그는 게으른 인애로 흡족해서는 안 되고, 마음속으로 세상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이유로 자기가 사람들의 벗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온 기운을 불러내고 온 힘줄을 다 쓰게 하여 자기 존재의 뜻인 저 목적을 밀고 나아가도록, 자연은 그가 그 목적을 실제로 낳아 내지 않는 한 자기 자신도 사람들도 자기 행동에 온전히 흡족할 수 없고 그것에 온전한 정도의 갈채를 내려 줄 수도 없다고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좋은 일을 실제로 해낸 공로가 없는 좋은 의도에 대한 칭찬만으로는 세상의 가장 큰 갈채를 일으키기에도, 가장 높은 정도의 자기 갈채를 일으키기에도 거의 쓸모가 없다는 것을 그는 알도록 되어 있다. 대단한 행위를 단 하나도 해내지 않았으나 그 온 말씨와 몸가짐이 가장 올바르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도량이 큰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자기가 쓸모없었던 것이 섬길 기회의 결여 말고는 다른 아무 까닭도 없다 하더라도 그리 높은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비난받지 않고 그것을 그에게 거절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하였는가? 그토록 큰 갚음을 받을 자격을 얻으려면 당신은 어떤 실제의 섬김을 내놓을 수 있는가? 우리는 당신을 존중하고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에게 빚진 것은 없다. 과연 섬길 기회의 결여 때문에만 쓸모없었던 저 숨은 덕에 보상하는 일, 어느 정도 그것이 받아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적정하게 주장할 수는 없었던 저 명예와 승진을 그것에 내려 주는 일은 가장 신성한 인애의 결과이다. 반대로 아무 죄도 저질러지지 않은 곳에서 가슴의 정서만을 두고 벌하는 일은 가장 무람없고 가장 야만스러운 폭정이다. 인애로운 정서는 그것이 스스로 나서지 않는 것이 거의 죄가 될 지경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지 않을 때 가장 큰 칭찬을 받아 마땅해 보인다. 반대로 악의에 찬 정서는 아무리 늦어도, 아무리 더디어도, 아무리 뜸을 들여도 지나칠 수 없다.

구상 없이 저질러진 나쁜 것이 당하는 쪽에게만이 아니라 저지른 쪽에게도 불행으로 여겨지는 일까지 쓸모가 있다. 그로써 사람은 형제들의 행복을 경외하기를, 모르는 가운데서라도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떨기를, 그리고 구상 없이 자기가 그들의 재난의 불행한 도구가 된다면 자기를 향하여 터져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기가 느끼는 저 동물적 분개를 두려워하기를 배운다.

그러나 이 모든 겉보기의 감정 불규칙성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불행히도 자기가 뜻하지 않은 저 나쁜 것에 계기를 만들어 주거나 자기가 뜻한 저 좋은 것을 낳는 데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연은 그의 죄 없음을 위로가 아예 없는 채로 두지 않았고 그의 덕을 보상이 아예 없는 채로 두지도 않았다. 그때 그는 우리 행동에 달려 있지 않았던 결과는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존중을 줄여서는 안 된다는 저 올바르고 공평한 격률을 자기를 도우라고 불러낸다. 그는 자기의 아량과 영혼의 굳셈을 온통 불러 모아, 자기를 지금 자기가 드러나 보이는 빛으로가 아니라 마땅히 드러나 보여야 하는 빛으로, 곧 자기의 도량 있는 구상이 성공의 관을 썼더라면 드러나 보였을 빛으로, 그리고 그 구상이 실패하였더라도 사람들의 감정이 온전히 공정하고 공평하거나 적어도 완전히 앞뒤가 맞기만 하다면 여전히 드러나 보일 그 빛으로 보려고 애쓴다. 사람들 가운데 더 공정하고 인간애가 있는 쪽은 그가 이렇게 자기 자신의 견해 안에서 자기를 버티려고 들이는 노력과 온전히 함께 간다. 그들은 자기네 도량과 마음의 큼을 온통 내보여 사람 본성의 이 불규칙성을 자기네 안에서 바로잡으며, 운이 따라 주지 않은 그의 아량을, 그것이 성공하였더라면 그런 도량의 노력 없이도 자기네가 자연스럽게 여기려 하였을 그 빛과 똑같은 빛으로 보려고 힘쓴다.

주

  1. 1. 옮긴이 — 드리아스(Dryads)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무에 깃든 정령이고, 라레스(Lares)는 로마에서 집과 가문을 지킨다고 여긴 신들이다.

  2. 2. 옮긴이 — 『터키 첩자』(L'Espion Turc / The Turkish Spy). 조반니 파올로 마라나(1642~1693)가 쓴 서간체 저작으로, 파리에 머무는 튀르크인 첩자가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유럽 풍속을 논한다. 18세기에 널리 읽혔다.

  3. 3. 옮긴이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기원전 106~48)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기원전 118년경~57년경). 루쿨루스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거둔 성과를 거두어 마무리하는 지휘권이 기원전 66년에 폼페이우스에게 넘어갔다.

  4. 4. 옮긴이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와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

  5. 5. 옮긴이 — 스미스가 말하는 스코틀랜드의 옛 법은 1707년 잉글랜드와 합친 뒤에도 따로 남은 스코틀랜드 형사법의 전래 규칙을 가리킨다. 상해를 입힌 뒤 일정한 기간 안에 죽음이 뒤따라야 살인으로 다루었다.

  6. 6. 옮긴이 —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기원전 140년경~55, 재위 기원전 95~55). 로마와 싸워 크게 졌다.

  7. 7. 옮긴이 — 로마법은 과실을 세 등급으로 갈랐다. 중대한 과실(라틴어 culpa lata), 경과실(라틴어 culpa levis), 극히 가벼운 과실(라틴어 culpa levissima)이다. 이 문단과 다음 두 문단에 스미스가 차례로 달아 놓은 원저자 주 3·4·5가 바로 그 세 등급을 라틴어로 가리킨 것이다.

  8. 8. Lata culpa prope dolum est. (중대한 과실은 고의에 가깝다.)

  9. 9. Culpa levis. (경과실.)

  10. 10. Culpa levissima. (극히 가벼운 과실.)

  11. 11. 옮긴이 — 아퀼리우스법(라틴어 lex Aquilia). 기원전 286년경 로마에서 제정된 법으로, 남의 노예나 가축을 죽이거나 재물을 해친 자에게 손해를 메울 책임을 지웠다. 뒤에 로마법 손해배상 법리의 바탕이 되었다.

  12. 12. 옮긴이 — 저본에는 이 자리가 when the implanted 로 인쇄되어 있다. 이 책은 자연을 she 로 받으므로 when she implanted 의 오식으로 보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