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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1부 1편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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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1편 행위의 적정성 / 적정성의 감각

1장 동감에 대하여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본성에는 남의 운수에 마음을 쓰게 만들고 남의 행복을 그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만드는 원리가 분명히 얼마쯤 들어 있다. 그 행복에서 그가 얻는 것이라고는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 없는데도 그렇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또는 연민이 그런 원리에 든다. 이는 남의 비참함을 직접 보거나 아주 생생하게 떠올리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 비참함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가 남의 슬픔에서 흔히 슬픔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어서 이를 증명할 실례를 들 필요조차 없다. 이 감정은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본래의 정념과 마찬가지로 덕 있고 인간애 있는 사람들에게만 갇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그런 사람들이 어쩌면 가장 빼어난 감수성으로 그것을 느낄 뿐이다. 가장 난폭한 자, 사회의 법을 가장 모질게 어기는 자라도 그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우리는 남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하므로, 같은 처지에 놓이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를 떠올려 보는 길 말고는 남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조금도 헤아릴 수 없다. 우리 형제가 고문대에 올라 있어도, 우리 자신이 편안히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감각이 그가 무엇을 겪는지 결코 알려 주지 않는다. 감각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몸 밖으로 데려간 적이 없고 데려갈 수도 없으니, 그의 감각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상을 통해서다. 그리고 그 능력조차, 우리가 그의 처지에 놓인다면 우리 자신의 감각이 어떠할지를 우리 앞에 그려 보이는 길 말고는 달리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의 상상이 베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감각에 새겨진 인상이며 그의 감각에 새겨진 인상이 아니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그의 처지에 놓고, 우리 자신이 똑같은 고통을 다 견디고 있다고 떠올리며, 이를테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얼마쯤은 그 사람이 되고, 그리하여 그의 감각을 어느 정도 헤아리며, 나아가 정도는 약하나마 그 감각과 아주 다르지는 않은 무언가를 느끼기까지 한다. 그의 고뇌가 이렇게 우리 자신에게로 옮겨져 오고 우리가 이렇게 그것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고뇌는 마침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가 느끼는 것을 생각하며 떨고 몸서리친다. 어떤 종류든 아픔이나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이 가장 지나칠 만큼 큰 슬픔을 일으키듯, 우리가 그 속에 있다고 떠올리거나 상상하는 것도 그 떠올림이 생생한가 둔한가에 비례하여 같은 감정을 얼마간 일으킨다.

이것이 남의 비참함을 함께 느끼는 마음의 근원이라는 것, 곧 우리가 당하는 쪽이 느끼는 것을 헤아리게 되거나 그것에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상상 속에서 그와 자리를 바꿔 봄으로써라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분명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여러 관찰로 증명할 수 있다. 남의 다리나 팔을 겨눈 매가 막 떨어지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저절로 움츠러들며 우리 자신의 다리나 팔을 뒤로 뺀다. 그리고 매가 실제로 떨어지면 우리도 얼마쯤 그것을 느끼며, 당하는 쪽과 더불어 우리도 아파한다. 느슨하게 맨 줄 위에서 춤추는 곡예사를 넋 놓고 바라보는 구경꾼 무리는, 그가 하는 것을 보는 대로 또 자기가 그의 처지에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는 대로, 저절로 제 몸을 비틀고 꼬며 가누어 균형을 잡는다.1 살결이 섬세하고 몸이 약한 사람들은 거리의 거지들이 드러내 보이는 상처와 궤양을 바라보노라면 자기 몸의 같은 자리에 가려움이나 불편한 느낌이 일기 쉽다고 하소연한다. 그 불쌍한 이들의 비참함에 그들이 품는 공포는 자기 몸의 다른 어느 곳보다 바로 그 자리를 건드린다. 그 공포는, 자기가 정말로 지금 바라보고 있는 그 불쌍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기 몸의 바로 그 자리가 실제로 그와 똑같이 비참하게 상해 있다면 자기가 무엇을 겪을지를 떠올리는 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떠올림의 힘만으로도 그들의 약한 몸에서는 하소연한 그 가려움이나 불편한 느낌을 낳기에 넉넉하다. 몸이 가장 튼튼한 사람들도 병든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제 눈에 뚜렷한 쓰라림을 느끼는 일이 잦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같은 까닭에서 나온다. 가장 강한 사람에게서도 눈이라는 기관은 가장 약한 사람의 다른 어느 부위보다 섬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느끼는 마음을 불러내는 것이 아픔이나 슬픔을 낳는 사정뿐인 것도 아니다. 어떤 대상에서 당사자에게 일어나는 정념이 무엇이든, 그의 처지를 생각할 때 그에 상응하는 감정이 주의 깊게 보는 모든 관찰자의 가슴에 솟아난다. 비극이나 로맨스에서 우리의 마음을 끄는 주인공들이 구원받을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그들의 고난에 우리가 느끼는 비통만큼이나 진실하며, 그들의 비참함을 함께 느끼는 마음이 그들의 행복을 함께 느끼는 마음보다 더 참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을 버리지 않은 충실한 벗들에게 그들이 품는 감사에 함께 들어가고, 그들을 해치고 버리고 속인 배신자들에게 그들이 품는 분개에 마음으로부터 함께 따라간다. 사람의 마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정념에서, 곁에서 보는 사람의 감정은 그가 그 경우를 자기에게 옮겨 놓고 상상하여 당하는 쪽의 감정이 마땅히 이러할 것이라고 여기는 바에 언제나 대응한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나 연민이라는 낱말은 남의 슬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가리키도록 따로 정해진 말이다. 동감이라는 낱말은 그 뜻이 어쩌면 본래 같은 것이었겠으나, 이제는 그다지 부적정하달 것 없이 어떤 정념이든 그것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나타내는 데 쓸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동감이 남에게서 어떤 감정을 보는 것만으로 일어나는 듯이 보인다. 정념은 어떤 경우에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당사자에게서 무엇이 그 정념을 일으켰는지 알기도 전에 대번에 옮겨 붓듯 건너가는 듯이 보인다. 예컨대 누군가의 얼굴빛과 몸짓에 비통과 기쁨이 강하게 드러나면, 그것은 곧바로 관찰자의 마음을 움직여 그와 비슷한 괴로운 감정이나 즐거운 감정을 얼마간 일으킨다. 웃는 얼굴은 그것을 보는 누구에게나 밝은 대상이고, 거꾸로 슬픈 얼굴은 어두운 대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두루 들어맞는 것은 아니고, 모든 정념에 다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어떤 정념은 그것이 드러나는 모습이 아무런 동감도 일으키지 않고, 무엇이 그 정념을 일으켰는지 알기 전에는 오히려 우리를 역겹게 하여 그 정념에 맞서게 만든다. 분노한 사람이 미친 듯 날뛰는 모습은 우리를 그의 적들에게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 분통 터지게 하기 쉽다. 우리는 그를 부추긴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그의 경우를 우리 자신에게 옮겨 놓을 수도 없고, 그 일이 일으키는 정념 같은 것을 조금도 헤아릴 수도 없다. 반면에 그가 분노하는 상대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그토록 격노한 적수에게서 그들이 어떤 난폭한 짓을 당할 수 있는지는 우리 눈에 뻔히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선선히 그들의 두려움이나 분개에 동감하며, 그들을 그토록 위태롭게 만드는 것으로 보이는 그 사람에게 곧바로 맞서는 편에 선다.

비통과 기쁨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도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감정을 얼마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그 모습이 우리에게 그 사람에게 좋은 운수나 나쁜 운수가 닥쳤다는 대략의 관념을 일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념들에서는 그만한 것으로도 우리에게 작으나마 영향을 미치기에 넉넉하다. 비통과 기쁨의 작용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끝난다. 그것이 드러난 모습은 분개가 드러난 모습과는 달리, 우리가 마음을 쓰게 되고 그 이해가 그 사람의 이해와 맞서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의 관념을 우리에게 일러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운수나 나쁜 운수라는 대략의 관념은 그것을 만난 사람에게 얼마간 마음을 쓰게 하지만, 부추김을 받았다는 대략의 관념은 그것을 받은 사람의 분노에 아무런 동감도 일으키지 않는다. 자연은 이 정념에 함께 들어가기를 더 꺼리도록, 그리고 그 원인을 듣기까지는 오히려 그 정념에 맞서는 편에 서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듯하다.

남의 비통이나 기쁨에 대한 우리의 동감조차, 그 어느 쪽이든 원인을 듣기 전에는 언제나 몹시 불완전하다. 당하는 쪽의 괴로움만을 나타내는 막연한 탄식은, 뚜렷하게 느껴질 만한 실제의 동감을 낳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처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과 그에게 동감하려는 얼마간의 마음가짐을 낳는다. 우리가 가장 먼저 묻는 것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이 나오기까지는, 그의 불운에 대한 희미한 관념 때문에도 마음이 편치 않고 그것이 무엇일지 이리저리 짐작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탓에 더욱 편치 않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 느끼는 마음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그러므로 동감은 정념을 보는 데서 일어나기보다는 그 정념을 일으키는 처지를 보는 데서 일어난다. 우리는 더러 남을 위하여, 그 사람 자신은 전혀 느낄 수 없어 보이는 정념을 느낀다. 우리가 자신을 그의 경우에 놓으면 그 정념이 상상에서 우리 가슴에 일어나기 때문인데, 그의 가슴에서는 실제의 현실에서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남의 뻔뻔함과 무례함에 우리가 낯을 붉히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은 제 행동의 부적정성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데도 그러하다. 우리가 그처럼 어처구니없이 행동했더라면 얼마나 큰 부끄러움에 뒤덮였을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인류를 내놓는 온갖 재난 가운데, 이성을 잃는 일은 인간애의 불씨를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들에게 단연 가장 무서운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인간이 비참해지는 그 마지막 단계를 다른 어떤 것보다 깊은 연민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불쌍한 사람은 어쩌면 웃고 노래하며, 제 비참함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대상을 보고 인간애가 느끼는 괴로움은 당하는 쪽의 어떤 감정이 비쳐 나온 것일 수 없다. 관찰자의 연민은, 자기가 그와 똑같이 불행한 처지로 떨어지고 그러면서도 어쩌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의 이성과 판단으로 그 처지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무엇을 느낄지 헤아려 보는 데서 오로지 일어날 뿐이다.

병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무엇을 느끼는지 말할 수 없는 젖먹이의 신음을 들을 때 어머니가 겪는 아픔은 어떠한가? 아이가 무엇을 겪는지에 대한 어머니의 관념에는, 아이의 실제의 속수무책에 그 속수무책을 어머니 자신이 의식하는 것과 아이의 병이 어떤 결말을 볼지 모른다는 어머니 자신의 두려움이 덧붙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어머니는 자기 자신의 슬픔을 위하여 비참과 고통의 가장 완전한 모습을 지어낸다. 그러나 젖먹이는 지금 이 순간의 불편만을 느낄 뿐이고, 그것은 결코 클 수 없다. 앞날에 대해서라면 아이는 아주 안전하며, 아무 생각 없음과 앞을 내다보는 힘의 결여 속에 두려움과 불안을 막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다. 두려움과 불안은 사람의 가슴을 괴롭히는 큰 것들이니,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이성과 철학이 그 둘로부터 아이를 지켜 주려 애쓰지만 헛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은 이들에게조차 동감하는데, 그들의 처지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 곧 그들을 기다리는 저 경외를 일으키는 앞날은 못 본 채 지나치고, 우리의 감각을 찌르기는 하나 그들의 행복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사정들에 주로 마음이 움직인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햇빛을 빼앗기는 것은 비참하다. 삶에서,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 일에서 내쫓기는 것은 비참하다. 차디찬 무덤에 누워 썩음과 땅속 벌레들의 밥이 되는 것은 비참하다. 이 세상에서 더는 생각되지 않고, 머지않아 가장 가까운 벗들과 친척들의 정서에서, 나아가 그 기억에서도 거의 지워져 버리는 것은 비참하다. 그토록 무서운 재난을 당한 이들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느껴도 지나칠 수 없다고 우리는 정녕 그렇게 상상한다. 모두에게서 잊힐 위험에 놓인 지금, 우리가 함께 느끼는 마음이라는 공물은 그들에게 두 배로 바쳐져야 할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을 기리며 우리가 치르는 헛된 예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위하여 그들의 불운에 대한 우리의 어두운 기억을 애써 억지로 살려 둔다. 우리의 동감이 그들에게 아무런 위로도 줄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재난에 얹히는 또 하나의 재난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다 쓸데없다는 것, 다른 모든 고통을 덜어 주는 것, 곧 벗들의 안타까움과 사랑과 탄식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비참함에 대한 우리의 느낌만 더 사나워질 뿐이다. 그러나 죽은 이들의 행복은 이 사정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아주 확실히 영향받지 않으며,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일이 그들이 쉬는 자리의 깊은 안전을 어지럽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상이 저절로 그들의 처지에 돌리는 그 음울하고 끝없는 어두움의 관념은,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에 그 변화를 우리 자신이 의식하는 것을 우리가 덧붙이는 데서, 우리 자신을 그들의 처지에 놓는 데서,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리의 살아 있는 영혼을 그들의 생명 없는 몸속에 들여놓고 그리하여 이 경우에 우리의 감정이 어떠할지를 헤아리는 데서 오로지 일어난다. 바로 이 상상의 착각에서, 우리 자신이 흩어져 없어질 것을 미리 내다보는 일이 우리에게 그토록 끔찍한 일이 되고, 또 우리가 죽은 뒤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아무런 아픔도 줄 수 없는 그 사정들의 관념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가 일어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행복을 크게 해치는 독이지만 인류의 불의를 크게 붙드는 고삐이며, 개인을 괴롭히고 주저앉히는 한편으로 사회를 지키고 보호한다.

2장 서로 동감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에 대하여

그러나 동감의 원인이 무엇이든, 또 동감이 어떻게 일어나든, 우리 자신의 가슴에 있는 모든 감정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남에게서 보는 것만큼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고, 그 반대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일도 없다. 우리의 모든 감정을 자애심의 어떤 정교한 변형에서 끌어내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 즐거움과 이 아픔을 둘 다 자기네 원리에 따라 설명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여긴다. 그들의 말로는 이러하다. 사람은 제 약함과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남이 자기의 정념을 받아들이는 것을 볼 때마다 기뻐한다. 그때 그 도움을 확실히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대를 볼 때마다 비통해한다. 그때 남이 맞설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그 아픔은 둘 다 언제나 그토록 대번에 느껴지고 흔히 그토록 사소한 일에서 느껴지는 까닭에, 그 어느 것도 그런 사리를 따지는 헤아림에서 나올 수 없음이 분명해 보인다. 사람은 좌중을 웃겨 보려고 애쓴 뒤에 둘러보아 제 농담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는 것을 보면 풀이 꺾인다. 거꾸로 좌중이 웃고 떠들면 그것은 그에게 매우 즐거운 일이며, 그는 남들의 감정이 제 감정과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가장 큰 갈채로 여긴다.

그의 즐거움이 남들의 흥겨움에 동감함으로써 제 흥겨움이 덧얻는 생기에서 온통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아픔이 그 즐거움을 놓쳤을 때 맞닥뜨리는 실망에서 온통 일어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물론 이쪽도 저쪽도 얼마쯤은 그러하다. 우리가 어떤 책이나 시를 하도 여러 번 읽어 혼자 읽어서는 더 이상 아무 재미도 찾을 수 없게 되어도, 그것을 벗에게 읽어 주는 데서는 여전히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에게 그것은 새로움의 온갖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책이 그에게 저절로 일으키는,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제 일으킬 수 없게 된 놀람과 감탄에 함께 들어간다. 그 책이 내놓는 모든 생각을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보이는 빛보다 그에게 보이는 빛으로 헤아리며, 그의 재미에 동감함으로써 재미를 느끼고 그 동감이 이렇게 우리 자신의 재미를 되살린다. 거꾸로 그가 그 책을 재미있어하지 않는 듯이 보이면 우리는 속이 상하고, 그에게 읽어 주는 일에서 더 이상 아무 즐거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도 사정은 같다. 좌중의 흥겨움은 틀림없이 우리 자신의 흥겨움을 돋우고, 좌중의 침묵은 틀림없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한쪽에서 우리가 얻는 즐거움에도 다른 쪽에서 우리가 느끼는 아픔에도 얼마쯤 이바지하기는 하겠으나, 그 어느 것의 유일한 원인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남의 감정이 우리 감정과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즐거움의 원인으로, 그것의 결여는 아픔의 원인으로 보이는데, 이 즐거움과 이 아픔은 그런 헤아림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내 벗들이 내 기쁨에 나타내는 동감은 참으로 그 기쁨을 돋우어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내 비통에 나타내는 동감은, 그것이 그 비통을 돋우는 데만 쓰인다면 나에게 아무런 즐거움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감은 기쁨을 돋우고 비통을 덜어 준다. 동감은 또 하나의 만족의 샘을 내놓음으로써 기쁨을 돋우고, 그때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즐거운 느낌을 마음속에 슬며시 들여놓음으로써 비통을 덜어 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즐거운 정념보다 불쾌한 정념을 벗들에게 알리기를 더욱 애타게 바라고, 즐거운 정념에 대한 벗들의 동감에서보다 불쾌한 정념에 대한 그들의 동감에서 더욱 큰 만족을 얻으며, 그 동감의 결여에 더욱 크게 충격을 받는다.

불운한 사람들이 제 슬픔의 까닭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냈을 때 그들은 얼마나 큰 위안을 얻는가? 그의 동감에 힘입어 그들은 제 고통의 한 몫을 내려놓는 듯이 보인다. 그가 그 고통을 그들과 나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정하지 않다. 그는 그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슬픔을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슬픔의 한 몫을 자기에게로 옮겨 온 듯이, 그가 느끼는 것이 그들이 느끼는 것의 무게를 덜어 주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제 불운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은 얼마쯤 제 비통을 새로 되살린다. 그들은 제 괴로움을 일으킨 그 사정들을 다시 마음속에 떠올린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물은 전보다 더 빨리 흐르고, 그들은 슬픔의 온갖 나약함에 자신을 내던지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에서 즐거움을 얻고, 그로써 뚜렷하게 위안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동감이 지닌 달콤함이, 그 동감을 일으키려고 그들이 이렇게 돋우고 되살려 낸 그 슬픔의 쓰라림을 넘고도 남게 갚아 주기 때문이다. 거꾸로 불운한 사람들에게 안길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모욕은 그들의 재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이 보이는 태도다. 벗들의 기쁨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이 보이는 것은 예의의 결여일 뿐이지만, 그들이 제 괴로움을 이야기할 때 진지한 얼굴을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심한 비인간성이다.

사랑은 즐거운 정념이고 분개는 불쾌한 정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벗들이 우리의 우정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들이 우리의 분개에 함께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그들이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이 보여도 우리는 그것을 용서할 수 있으나, 우리가 입은 해코지를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이 보이면 참을성을 다 잃는다. 우리의 감사에 함께 들어오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내는 분노는, 우리의 분개에 동감하지 않는다고 내는 분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들이 우리 벗의 벗이 되지 않는 것은 쉬우나, 우리와 사이가 틀어진 이들의 적이 되지 않기는 어렵다. 그들이 앞의 사람들, 곧 우리 벗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여 우리가 분개하는 일은 드물며, 다만 그 때문에 더러 서툰 다툼을 벌이는 척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뒤의 사람들, 곧 우리와 틀어진 이들과 벗으로 지내면 우리는 진심으로 그들과 다툰다. 사랑과 기쁨이라는 즐거운 정념은 곁들이는 즐거움이 없어도 마음을 만족시키고 버티어 줄 수 있다. 비통과 분개라는 쓰라리고 괴로운 감정은 동감의 아물려 주는 위로를 더 강하게 요구한다.

어떤 일에 이해가 가장 크게 걸린 사람이 우리의 동감에 즐거워하고 그 결여에 상처를 입듯, 우리 또한 그에게 동감할 수 있을 때 즐거워하고 그럴 수 없을 때 상처를 입는 듯하다. 우리는 잘된 사람을 축하하러 달려갈 뿐 아니라 괴로움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러도 달려간다. 그리고 그 마음의 모든 정념에 우리가 온전히 동감할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얻는 즐거움은, 그의 처지를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그 슬픔의 괴로움을 넘고도 남게 갚아 주는 듯하다. 거꾸로 그에게 동감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언제나 불쾌하며, 동감에서 오는 아픔을 면했다고 즐거워하기는커녕 그의 불편을 나눌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어떤 사람이 제 불운을 큰 소리로 탄식하는 것을 듣고서, 그 경우를 우리 자신에게 옮겨 놓았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토록 격한 작용을 일으킬 수 없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그의 비통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 비통에 함께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것을 비겁함이요 나약함이라 부른다. 거꾸로 남이 작은 행운 하나에 우리 말대로 너무 행복해하거나 너무 들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우리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우리는 그의 기쁨에조차 언짢아지고, 그 기쁨에 함께 따라갈 수 없으므로 그것을 경솔이요 우둔이라 부른다. 벗이 어떤 농담을 그만한 값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곧 우리 자신이 그 농담에 웃을 수 있으리라고 느끼는 것보다 더 크게 또는 더 길게 웃으면 우리는 기분까지 상한다.

3장 남의 정서가 우리 자신의 정서와 어울리는가 어긋나는가로 그 정서의 적정성 또는 부적정성을 판정하는 길에 대하여

당사자의 본래의 정념이 관찰자가 동감하여 느끼는 감정과 완전히 어울릴 때, 그 정념은 관찰자에게 반드시 옳고 적정하며 그 대상에 걸맞은 것으로 보인다. 거꾸로 관찰자가 그 경우를 자기에게 옮겨 놓았을 때 그 정념이 자기가 느끼는 것과 맞지 않음을 알게 되면, 그 정념은 그에게 반드시 옳지 않고 부적정하며 그것을 일으킨 원인에 걸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남의 정념을 그 대상에 걸맞다고 시인한다2는 것은 우리가 그 정념에 온전히 동감함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일이고, 그렇게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정념에 온전히 동감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에게 가해진 해코지에 분개하는 사람이 내가 자기와 똑같이 그것에 분개함을 확인하면 그는 반드시 내 분개를 시인한다. 내 비통에 동감이 박자를 맞추는 사람은 내 슬픔이 온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시나 같은 그림에 감탄하고 그것도 나와 똑같이 감탄하는 사람은 내 감탄이 옳다는 것을 정녕 허락할 수밖에 없다. 같은 농담에 웃고 나와 함께 웃는 사람은 내 웃음이 적정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거꾸로 이 여러 경우에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거나 내 감정에 조금이라도 비례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내 감정이 자기 감정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적의가 내 벗의 의분이 대응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설 때, 내 비통이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연민으로 따라갈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설 때, 내 감탄이 그의 감탄과 맞아떨어지기에는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을 때, 그가 그저 미소 지을 뿐인데 내가 크게 마음껏 웃거나 거꾸로 그가 크게 마음껏 웃는데 내가 미소만 지을 때, 이 모든 경우에 그가 대상을 헤아리던 데서 눈을 돌려 내가 그 대상에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는지를 살피게 되면, 그의 감정과 내 감정 사이의 어긋남이 큰가 작은가에 따라 나는 그의 부인을 크게든 작게든 받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그 자신의 감정이 내 감정을 판정하는 기준이자 척도이다.

남의 의견을 시인한다는 것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당신을 설득한 논거가 나도 똑같이 설득한다면 나는 반드시 당신의 확신을 시인하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반드시 그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한쪽 없이 다른 쪽을 한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해도 떠올릴 수 없다. 그러므로 남의 의견을 시인하거나 부인한다는 것이 그 의견이 우리 의견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런데 남의 감정이나 정념에 대한 우리의 시인이나 부인에서도 사정은 똑같다.

과연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아무런 동감도 감정의 일치도 없이 시인하는 듯이 보이며, 따라서 시인이라는 감정이 그 일치를 알아차리는 일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런 경우에도 우리의 시인이 결국은 그런 종류의 동감이나 일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주 사소한 성질의 일에서 실례를 하나 들겠다. 그런 일에서는 사람들의 판단이 잘못된 체계에 뒤틀릴 염려가 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러 어떤 농담을 시인하고 좌중의 웃음이 아주 옳고 적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웃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지한 기분에 있거나 주의가 마침 다른 대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으로 어떤 종류의 재담이 대개의 경우에 우리를 웃길 수 있는지를 배워 알고 있고, 이것이 그런 종류의 하나임을 알아본다. 그래서 우리는 좌중의 웃음을 시인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우며 그 대상에 걸맞다고 느낀다. 지금의 기분으로는 그 웃음에 쉽게 함께 들어갈 수 없으나, 대개의 경우라면 우리도 아주 마음껏 그 웃음에 끼어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정념에서도 같은 일이 흔히 일어난다. 낯선 사람이 가장 깊은 괴로움의 온갖 표시를 띠고 거리에서 우리 옆을 지나가는데, 그가 방금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우리는 곧바로 듣는다. 이 경우에 우리가 그의 비통을 시인하지 않기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쪽에 인간애의 결함이 조금도 없는데도, 그의 슬픔의 격렬함에 함께 들어가기는커녕 그를 위하는 마음의 첫 움직임조차 거의 떠올리지 못하는 일이 흔히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와 그의 아버지 둘 다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거나, 우리가 마침 다른 일에 매여 있어 그에게 닥쳤을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사정을 상상 속에 그려 볼 겨를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으로 그런 불운이 저절로 그만한 정도의 슬픔을 일으킨다는 것을 배워 알고 있고, 그의 처지를 온전히 그 모든 부분에 걸쳐 헤아릴 겨를을 낸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아주 진심으로 그에게 동감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의 슬픔에 대한 우리의 시인은, 그 동감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도 바로 이 조건부 동감을 의식하는 데 바탕을 둔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 대개 무엇과 맞아떨어지는지에 대한 앞선 경험에서 끌어낸 일반 규칙이,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지금 우리 감정의 부적정성을 바로잡아 준다.

어떤 행위가 흘러나오는 마음의 감정 또는 정서, 그리하여 그 행위의 덕이냐 악덕이냐가 끝내 거기에 달려 있게 되는 그 감정 또는 정서는 서로 다른 두 측면, 곧 서로 다른 두 관계에서 헤아릴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 또는 그것을 생기게 하는 동기와의 관계이고, 둘째는 그것이 내세우는 목적 또는 그것이 낳으려 하는 결과와의 관계이다.

정서가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 또는 대상에 대하여 걸맞은가 걸맞지 않은가, 비례하는가 비례하지 않는가에 그 뒤에 따라오는 행위의 적정성 또는 부적정성, 점잖음 또는 꼴사나움이 있다.

정서가 겨누는, 또는 낳으려 하는 결과가 이로운 성질인가 해로운 성질인가에 그 행위의 공로 또는 과오, 곧 그 행위가 보답을 받을 자격을 얻거나 벌을 받아 마땅해지는 성질이 있다.

철학자들은 근래에 주로 정서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헤아렸고, 정서가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과 어떤 관계에 서 있는가에는 주의를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통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실과 그 행실을 이끈 감정을 판정할 때에는 늘 이 두 측면 모두에서 그것을 헤아린다. 남에게서 사랑이 지나침을, 비통이 지나침을, 분개가 지나침을 비난할 때 우리는 그것이 낳으려 하는 파괴적인 결과만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날 만한 계기가 얼마나 작았는지도 헤아린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아끼는 사람의 공로가 그토록 크지 않고, 그의 불운이 그토록 무섭지 않으며, 그를 부추긴 일이 그토록 대단하지 않으니, 그만큼 격한 정념을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원인이 어느 면에서든 그 감정에 비례했더라면 우리도 그 감정의 격렬함을 눈감아 주었을 것이고 어쩌면 시인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어떤 정서가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에 비례하는가 비례하지 않는가를 이렇게 판정할 때,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그에 대응하는 정서 말고 다른 어떤 규칙이나 표준을 쓴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 경우를 우리 자신의 가슴에 옮겨 놓았을 때 그 경우가 낳는 감정이 우리 감정과 맞고 들어맞음을 알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그 감정을 그 대상에 비례하고 걸맞은 것으로 시인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감정을 터무니없고 비례를 벗어난 것으로 부인한다.

한 사람의 모든 능력은 그가 남의 같은 능력을 판정하는 척도이다. 나는 내 시력으로 당신의 시력을, 내 귀로 당신의 귀를, 내 이성으로 당신의 이성을, 내 분개로 당신의 분개를, 내 사랑으로 당신의 사랑을 판정한다. 그것들을 판정할 다른 길은 내게 없고 있을 수도 없다.

4장 앞 주제에 이어서

남의 감정이 우리 감정과 맞는가 맞지 않는가로 그 감정의 적정성 또는 부적정성을 판정할 수 있는 경우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이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가 감정을 판정하는 그 사람에게도 아무런 특별한 관계 없이 헤아려질 때이고, 둘째는 그 대상이 우리 둘 가운데 어느 한쪽에게 특별히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헤아려질 때이다.

1. 우리 자신에게도 우리가 감정을 판정하는 그 사람에게도 아무런 특별한 관계 없이 헤아려지는 대상에 관해서는, 그의 감정이 우리 감정과 온전히 맞아떨어지는 곳마다 우리는 그에게 심미안과 뛰어난 판단력이라는 성질을 돌린다. 들판의 아름다움, 산의 거대함, 건물의 장식, 그림의 표현, 글의 구성, 제삼자의 행실, 여러 양과 수의 비례,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가 끊임없이 내보이는 온갖 모습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숨은 바퀴와 태엽, 이렇게 학문과 심미의 모든 일반적 주제는 우리와 우리 벗 어느 쪽에도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우리가 여기는 것들이다. 우리 둘은 그것들을 같은 시점에서 바라보며, 이런 것들에 대하여 감정과 정서의 가장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동감이나 동감이 일어나는 바탕인 저 상상 속의 처지 바꿈을 쓸 일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이 흔히 서로 다르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생활 습관이 그 복잡한 대상들의 여러 부분에 쉽게 기울이도록 허락하는 주의의 정도가 다른 데서, 또는 그 대상들이 향하는 마음의 능력이 타고난 예민함의 정도가 다른 데서 일어난다.

이런 종류의 일, 곧 뻔하고 쉬우며 어쩌면 우리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 없는 일에서 우리 벗의 감정이 우리 감정과 맞아떨어질 때, 우리가 틀림없이 그 감정을 시인해야 하기는 하나 그가 그 때문에 어떤 칭찬이나 감탄을 받을 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감정이 우리 감정과 맞아떨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감정을 이끌고 방향을 잡아 줄 때, 그 감정을 지어내는 동안 그가 우리는 못 본 채 지나친 많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그 대상의 온갖 사정에 맞추어 조정한 것으로 보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시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다르고 뜻밖의 예민함과 두루 미침에 경이를 느끼고 놀라며, 그는 매우 높은 정도의 감탄과 갈채를 받을 만해 보인다. 경이와 놀람으로 한층 높아진 시인이 바로 감탄이라고 제대로 불리는 감정을 이루며, 갈채는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모습이다. 빼어난 아름다움이 가장 심한 일그러짐보다 낫다고 판정하는 사람, 또는 2 곱하기 2가 4와 같다고 판정하는 사람의 판단은 온 세상이 반드시 시인할 것이나, 정녕 크게 감탄받지는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과 일그러짐의 미세하여 좀처럼 알아채기 어려운 차이를 가려내는 심미안 있는 사람의 예민하고 섬세한 분별, 가장 얽히고 뒤엉킨 비례를 손쉽게 풀어내는 노련한 수학자의 두루 미치는 정확함, 우리 자신의 감정을 이끌고 몰아 주며 그 재능의 폭과 뛰어난 올바름으로 우리를 경이와 놀람에 빠뜨리는 학문과 심미의 큰 지도자,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감탄을 일으키고 우리의 갈채를 받을 만해 보인다. 그리고 이른바 지성의 덕에 주어지는 칭찬의 대부분은 이 바탕 위에 서 있다.

그런 성질의 효용이 그것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효용에 주의를 돌리게 되면 그것을 헤아리는 일이 틀림없이 그 성질에 새로운 값을 더해 준다. 그러나 본래 우리가 남의 판단을 시인하는 것은 그것이 유용해서가 아니라 옳고 정확하며 진리와 현실에 맞아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판단에 그런 성질을 돌리는 데에는 그것이 우리 판단과 맞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다. 심미안도 마찬가지로 본래 유용하다고 시인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고 섬세하며 그 대상에 정확히 걸맞다고 시인된다. 이런 종류의 모든 성질이 효용을 지닌다는 관념은 분명히 나중에 뒤따라온 생각이며, 그 성질을 우리의 시인에 처음으로 권한 것이 아니다.

2. 우리 자신에게든 우리가 감정을 판정하는 그 사람에게든 특별하게 영향을 미치는 대상에 관해서는, 이 조화와 일치를 지키는 일이 한결 더 어려우면서 동시에 훨씬 더 중요하다. 나에게 닥친 불운이나 나에게 가해진 해코지를 내 벗은 내가 헤아리는 것과 같은 시점에서 바라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들은 나에게 훨씬 더 가까이 닿는다. 우리는 그림이나 시나 철학 체계를 볼 때처럼 같은 자리에서 그것들을 보지 않으므로, 그것들에 우리의 마음이 아주 다르게 움직이기 쉽다. 그러나 나에게도 내 벗에게도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대상에서 감정의 일치가 결여된 것은, 나에게 닥친 불운이나 나에게 가해진 해코지처럼 나에게 이해가 크게 걸린 일에서 그것이 결여된 것보다 훨씬 쉽게 못 본 채 넘길 수 있다. 내가 감탄하는 그림이나 시, 나아가 철학 체계를 당신이 업신여긴다 해도 그 때문에 우리가 다툴 위험은 거의 없다. 우리 둘 가운데 어느 쪽도 그런 것에 이해가 크게 걸려 있다고 할 만한 이유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둘 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견은 맞서더라도 우리의 정서는 여전히 거의 같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나 내가 특별히 영향을 받는 대상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사변에 관한 문제에서 당신의 판단이, 심미에 관한 문제에서 당신의 감정이 내 것과 전혀 맞선다 해도 나는 이 맞섬을 쉽게 못 본 채 넘길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기질이 조금이라도 좋다면 바로 그 주제들에 대해서조차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여전히 어느 정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불운을 당신이 함께 느끼는 마음이 전혀 없거나 나를 갈라놓는 비통에 조금이라도 비례하는 마음이 없다면, 또는 내가 입은 해코지에 당신이 아무런 의분도 없거나 나를 뒤흔드는 분개에 조금이라도 비례하는 의분이 없다면, 우리는 이런 주제들을 더는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견딜 수 없게 된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을 버틸 수 없고 당신도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버틸 수 없다. 당신은 내 격렬함과 정념에 어리둥절해하고, 나는 당신의 차가운 무감각과 느낌의 결여에 격노한다.

그런 모든 경우에 관찰자와 당사자 사이에 감정의 일치가 얼마간이라도 있으려면, 관찰자는 무엇보다 먼저 힘닿는 데까지 자신을 상대의 처지에 놓으려 애쓰고, 당하는 쪽에 닥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사정을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자기에게 옮겨 오려 애써야 한다. 그는 벗의 경우를 아주 작은 일들까지 통째로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동감이 바탕을 두고 있는 저 상상 속의 처지 바꿈을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하게 만들려 힘써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하고 나서도 관찰자의 감정은 여전히 당하는 쪽이 느끼는 것의 격렬함에 미치지 못하기 쉽다. 사람은 본디 동감할 줄 알면서도, 남에게 닥친 일에 대하여 당사자를 저절로 움직이는 그만한 정도의 정념을 결코 떠올리지 못한다. 그들의 동감이 바탕을 두고 있는 저 상상 속의 처지 바꿈은 잠깐뿐이다. 자기는 안전하다는 생각, 자기가 실제로 당하는 쪽은 아니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들에게 끼어든다. 그리고 그 생각이 당하는 쪽이 느끼는 것과 얼마쯤 비슷한 정념을 떠올리는 것을 막지는 않으나, 그와 같은 정도의 격렬함에 가까이 가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은 막는다. 당사자는 이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더 온전한 동감을 애타게 바란다. 관찰자들의 정서가 자기 정서와 온전히 어울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저 위안을 그는 갈망한다. 격하고 불쾌한 정념에서 그들 마음의 감정이 모든 면에서 자기 감정에 박자를 맞추는 것을 보는 일이 그의 유일한 위로를 이룬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얻으리라고 바랄 수 있는 길은, 관찰자들이 그와 함께 따라갈 수 있는 높이로 자기 정념을 낮추는 것뿐이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는 주위 사람들의 감정과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낮추기 위하여 자기 정념의 본래 음조에 서린 날카로움을 눌러 내려야 한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과연 언제나 어떤 면에서는 그가 느끼는 것과 다를 것이며, 연민은 본래의 슬픔과 결코 똑같을 수 없다. 동감의 감정이 일어나는 바탕인 처지 바꿈이 상상일 뿐이라는 은밀한 의식이 그 감정의 정도를 낮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쯤 그 종류까지 달라지게 하고 전혀 다른 꼴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감정이 사회의 조화에 넉넉할 만큼 서로 맞아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둘이 결코 같은 소리가 되지는 못하겠으나 어울리는 화음은 될 수 있으니, 요구되고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다.

이 어울림을 이루기 위하여 자연은 관찰자들에게 당사자의 사정을 제 것으로 삼도록 가르치고, 또한 당사자에게도 얼마쯤 관찰자들의 사정을 제 것으로 삼도록 가르친다. 그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그의 처지에 놓고 그리하여 그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떠올리듯, 그도 그만큼 끊임없이 자신을 그들의 처지에 놓고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 운수를 바라볼 때 지닐 것임을 자기가 알고 있는 저 차분함을 얼마간 떠올린다. 그들이 자기가 실제로 당하는 쪽이라면 무엇을 느낄지 끊임없이 헤아리듯, 그도 그만큼 끊임없이 자기가 제 처지를 보는 관찰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라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지 상상하게 된다. 그들의 동감이 그들로 하여금 얼마쯤 그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하듯, 그의 동감도 그로 하여금 얼마쯤 그들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데, 특히 그들 앞에 있고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동할 때에 그러하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떠올리는 반사된 정념은 본래의 정념보다 훨씬 약하므로, 그들 앞에 나오기 전에, 그들의 마음이 그 일에 어떻게 움직일지를 되새기며 자기 처지를 이 거짓 없고 공평한 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기 전에 그가 느꼈던 것의 격렬함을 반드시 누그러뜨린다.

그러므로 마음이 아무리 어지러워졌다 해도 벗과 함께 있는 것이 마음을 어느 정도 평정과 차분함으로 되돌려 주지 못할 만큼인 경우는 드물다. 우리가 그 앞에 나서는 순간 가슴은 얼마쯤 가라앉고 가지런해진다. 우리는 그가 우리 처지를 어떤 빛으로 바라볼지 곧바로 떠올리게 되고, 우리 자신도 같은 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동감의 작용은 대번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벗에게서보다 그저 아는 사람에게서 동감을 덜 기대한다. 벗에게 펼쳐 놓을 수 있는 그 사소한 사정들을 그저 아는 사람에게는 다 털어놓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앞에서 더 큰 평정을 꾸며 지니고, 그가 헤아려 줄 만한 우리 처지의 대략적인 윤곽에 생각을 붙들어 두려 애쓴다. 낯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동감을 더욱 덜 기대하므로, 우리는 그들 앞에서 더욱 큰 평정을 꾸며 지니며, 우리가 함께 있는 그 특정한 자리가 따라와 줄 만한 높이로 우리 정념을 늘 낮추려 애쓴다. 그리고 이것은 꾸며 낸 겉모습만이 아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의 주인이라면, 그저 아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벗이 곁에 있는 것보다 더욱 우리를 실제로 가라앉히고, 낯선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아는 사람 하나가 곁에 있는 것보다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교와 대화는, 마음이 어느 때 불행히도 평정을 잃었을 때 그것을 되돌리는 가장 힘센 약이며, 아울러 자기 만족과 삶의 누림에 그토록 필요한 저 고르고 행복한 기질을 지켜 주는 가장 좋은 보약이다. 집에 들어앉아 비통이나 분개를 곱씹기 쉬운, 물러나 사색하는 사람들은 흔히 더 큰 인간애와 더 큰 도량과 더 섬세한 명예 감각을 지녔을지 몰라도,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흔한 저 기질의 고름은 좀처럼 지니지 못한다.

5장 사랑을 부르는 덕과 존경을 부르는 덕에 대하여

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애씀, 곧 관찰자가 당사자의 감정에 함께 들어가려는 애씀과 당사자가 관찰자가 따라올 수 있는 데까지 자기 감정을 낮추려는 애씀 위에 서로 다른 두 갈래의 덕이 서 있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랑을 부르는 덕, 곧 거짓 없이 스스로 낮추어 대함과 너그러이 감싸는 인간애의 덕은 앞의 애씀 위에 서 있다. 크고 경외를 일으키며 존경을 부르는 덕, 곧 자기를 누름과 자기를 다스림의 덕, 우리 본성의 모든 움직임을 우리 자신의 품위와 명예와 우리 자신의 행실의 적정성이 요구하는 것에 따르게 하는 저 정념에 대한 다스림의 덕은 뒤의 애씀에서 그 근원을 얻는다.

동감하는 마음이 함께 이야기하는 이들의 모든 감정을 되울리는 듯한 사람, 그들의 재난에 비통해하고 그들이 입은 해코지에 분개하며 그들의 좋은 운수에 기뻐하는 사람은 얼마나 사랑을 부르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의 벗들의 처지를 우리 자신에게 옮겨 놓으면 우리는 그들의 감사에 함께 들어가고, 그토록 정 깊은 벗의 부드러운 동감에서 그들이 얼마나 큰 위로를 얻을지를 느낀다. 그리고 거꾸로 된 이유에서, 굳고 완고한 마음이 자기만을 위해 느끼고 남의 행복이나 비참함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쾌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이 경우에도 우리는 그가 곁에 있음으로써 그와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 특히 우리가 가장 동감하기 쉬운 사람들, 곧 불운한 이들과 해코지를 입은 이들이 받을 아픔에 함께 들어간다.

다른 한편, 자기 자신의 일에서 모든 정념의 품위를 이루고 그 정념을 남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낮추어 주는 저 되새김과 자기 통제를 발휘하는 사람들의 행실에서 우리는 얼마나 고귀한 적정성과 우아함을 느끼는가? 우리는 아무런 섬세함도 없이 한숨과 눈물과 성가신 탄식을 앞세워 우리의 연민을 불러내는 저 요란한 비통에 역겨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눈이 붓는 데서, 입술과 뺨이 떨리는 데서, 그리고 온 몸가짐의 멀찍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차가움에서만 드러나는 저 삼가는, 저 말 없고 위엄 있는 슬픔을 우러른다. 그 슬픔은 우리에게도 같은 침묵을 지운다. 우리는 그것을 존경하는 주의로 바라보며, 어떤 부적정성으로 그토록 큰 애씀을 들여야 지탱되는 저 애써 지어낸 평정을 어지럽히지나 않을까 하여 우리의 온 몸가짐을 애타는 마음으로 살핀다.

분노의 오만함과 잔인함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광포함을 막지도 붙들지도 않고 내버려 둘 때에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밉살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저 고귀하고 도량이 큰 분개에 감탄한다. 그것은 가장 큰 해코지를 갚으려는 자신의 추구를, 그 해코지가 당하는 쪽의 가슴에 일으키기 쉬운 격노가 아니라 공평한 관찰자의 가슴에 저절로 불러내는 의분으로 다스린다. 그것은 이 더 공정한 감정이 명하는 것을 넘어서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도 새어 나가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 속에서조차, 이해관계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행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만한 것보다 더 큰 복수를 시도하지 않고 더 큰 벌을 안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남을 위해서는 많이 느끼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우리의 이기적인 정서는 억누르고 인애로운 정서는 마음껏 펴는 것이 인간 본성의 완성을 이루며, 오직 그것만이 사람들 사이에 저 감정과 정념의 조화를 낳을 수 있다. 사람들의 온갖 우아함과 적정성은 그 조화에 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큰 법이듯,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만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우리 이웃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만큼만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자연의 큰 가르침이다.

심미안과 뛰어난 판단력이 칭찬과 감탄을 받을 만한 성질로 헤아려질 때 흔히 만날 수 없는 감정의 섬세함과 이해의 예민함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듯, 감수성과 자기 통제의 덕도 그런 성질의 보통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다른 정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간애라는 사랑을 부르는 덕은 정녕 거칠고 세간에 흔한 사람들이 지닌 것을 훨씬 넘는 감수성을 요구한다. 아량이라는 크고 높은 덕은 틀림없이 가장 약한 사람들이 발휘할 수 있는 정도의 자기 통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성의 성질이 보통 정도에 머무는 곳에 재능이라 할 것이 없듯, 도덕의 성질이 보통 정도에 머무는 곳에 덕이라 할 것이 없다. 덕은 뛰어남이며, 남다르게 크고 아름다운 무엇이니, 세간에 흔하고 보통인 것 위로 훨씬 높이 솟는다. 사랑을 부르는 덕은 그 빼어나고 뜻밖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정도의 감수성에 있다. 경외를 일으키고 존경을 부르는 덕은 인간 본성에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정념을 놀랍도록 뛰어넘음으로써 사람을 아연하게 하는 정도의 자기 통제에 있다.

이 점에서 덕과 한갓 적정성 사이에는, 곧 감탄받고 기려질 만한 성질과 행위와 그저 시인받을 만한 성질과 행위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많은 경우에 가장 완전한 적정성을 지니고 행동하는 데에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못난 자들도 지니고 있는 저 보통의 평범한 정도의 감수성이나 자기 통제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그만한 정도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아주 낮은 실례를 하나 들자면, 배고플 때 먹는 것은 평범한 경우에 확실히 온전히 옳고 적정하며, 누구에게나 그런 것으로 시인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덕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꾸로 가장 완전한 적정성에 미치지 못하는 행위에도 적지 않은 정도의 덕이 흔히 있을 수 있다. 완전함에 이르기가 그토록 지극히 어려운 경우에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그 행위가 여전히 완전함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통제를 가장 크게 발휘해야 하는 경우에 이런 일이 매우 흔히 있다. 어떤 처지는 인간 본성을 그토록 모질게 짓눌러, 사람처럼 불완전한 피조물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정도의 자기 다스림으로도 인간의 나약함이 내는 소리를 온통 눌러 죽일 수 없고, 정념의 격렬함을 공평한 관찰자가 그것에 온전히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절도의 높이로 낮출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에 당하는 쪽의 몸가짐이 가장 완전한 적정성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얼마간의 갈채를 받을 만하고 어떤 뜻에서는 덕이 있다고 불릴 수도 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람들 대부분이 할 수 없는 도량과 아량의 애씀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절대의 완전함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토록 시련이 되는 경우에 흔히 볼 수 있거나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는 완전함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경우에, 어떤 행위에 돌아가야 할 것으로 보이는 비난이나 갈채의 정도를 정할 때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기준을 매우 흔히 쓴다. 첫째는 온전한 적정성과 완전함의 관념인데, 그 어려운 처지에서 어떤 인간의 행실도 여태 거기에 이른 적이 없고 이를 수조차 없으며, 그것에 견주면 모든 사람의 행위가 언제까지나 비난받을 만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둘째는 사람들 대부분의 행위가 흔히 이르는, 이 온전한 완전함에 얼마나 가깝거나 먼가 하는 정도의 관념이다. 이 정도를 넘어서는 것은 절대의 완전함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갈채를 받을 만해 보이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비난을 받을 만해 보인다.

상상에 호소하는 모든 기예의 작품을 우리가 판정할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비평가가 시나 회화의 어느 큰 거장의 작품을 살필 때, 그는 더러 자기 마음속에 있는 완전함의 관념으로 그것을 살피는데, 그 작품도 다른 어떤 인간의 작품도 그 관념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기준에 그 작품을 견주는 동안에는 거기에서 흠과 불완전함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작품이 같은 종류의 다른 작품들 가운데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지를 헤아리게 되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아주 다른 기준, 곧 이 특정한 기예에서 흔히 이르게 되는 보통 정도의 뛰어남에 견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척도로 그것을 판정할 때, 그 작품은 그와 겨룰 수 있는 작품들 대부분보다 완전함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이유로 가장 높은 갈채를 받을 만해 보이는 일이 흔히 있다.

주

  1. 1. 옮긴이 — 느슨하게 맨 줄 위에서 몸을 가누며 재주를 부리는 곡예(slack-rope dancing). 팽팽히 맨 줄을 쓰는 줄타기와 달리 줄이 늘어져 흔들리므로 균형을 잡는 동작이 훨씬 크다. 18세기 영국의 장터와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구경거리였다.

  2. 2. 옮긴이 — 시인(是認)과 부인(否認). 「옳다고 여겨 받아들임」과 「옳지 않다고 여겨 물리침」을 뜻한다. 「죄를 시인하다」처럼 사실을 사실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도덕 판단의 두 방향을 가리키는 짝말로 끝까지 이 뜻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