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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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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유럽의 옛 상태에서 농업이 눌린 사정에 대하여

독일과 스키타이의 여러 민족이 로마제국의 서쪽 속주들을 휩쓸었을 때, 그토록 큰 격변에 뒤따른 혼란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야만인들이 예부터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휘두른 노략과 폭력은 도시와 시골 사이의 교역을 끊어 놓았다. 도시는 버려졌고 시골은 경작되지 않은 채 남았으며, 로마제국 아래에서 꽤 큰 넉넉함을 누렸던 유럽의 서쪽 속주들은 가난과 야만의 가장 낮은 상태로 떨어졌다. 그 혼란이 이어지는 동안 그 여러 민족의 우두머리와 주된 지도자들은 그 여러 나라의 토지 가운데 큰 몫을 얻거나 제 것으로 빼앗았다. 그 가운데 큰 몫은 경작되지 않은 땅이었으나, 경작된 것이든 경작되지 않은 것이든 임자 없이 남은 땅은 한 조각도 없었다. 그 모두가 독차지되었고, 그 큰 몫은 몇 사람 안 되는 큰 임자들이 독차지하였다.

경작되지 않은 토지를 처음에 이렇게 독차지한 것은 큰 해악이기는 하였으나 지나가는 해악에 그칠 수도 있었다. 그 땅은 상속으로든 양도로든 머지않아 다시 갈리어 작은 몫으로 쪼개질 수도 있었다. 장자 상속법은 그것이 상속으로 갈리는 것을 막았고, 한사 상속이 들어온 것은 그것이 양도로 작은 몫으로 쪼개지는 것을 막았다.1

토지를 동산처럼 생계와 즐김의 수단으로만 볼 때에는, 상속의 자연스러운 법이 동산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집안의 모든 자식에게 나누어 준다. 아버지에게는 그 모든 자식의 생계와 즐김이 똑같이 소중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연스러운 상속의 법이 로마인들 사이에서 자리 잡았으니, 그들은 토지를 물려받는 데서 우리가 동산을 나누는 데서 그러는 것보다 더 형과 아우를 가리거나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토지가 생계의 수단일 뿐 아니라 힘과 보호의 수단으로 여겨지게 되자, 그것이 갈리지 않은 채로 한 사람에게 내려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그 어지러운 시절에 큰 지주는 누구나 조그만 군주와 같았다. 그의 차지인은 그의 백성이었다. 그는 그들의 재판관이었고 어떤 점에서는 평화로울 때에는 그들의 입법자였으며 싸울 때에는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제 뜻대로 싸움을 벌였는데, 잦게는 이웃을 상대로 그리하였고 더러는 제 주권자를 상대로도 그리하였다. 그러므로 토지 재산의 안전, 곧 그 임자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보호는 그 크기에 달려 있었다. 그것을 나누는 것은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이었고, 그 모든 조각을 이웃이 쳐들어와 짓누르고 삼켜 버리도록 내놓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자 상속법은, 참으로 곧바로는 아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지 재산의 상속에 자리 잡게 되었는데, 왕국의 상속에서 그것이 대개 자리 잡은 것과 같은 까닭에서였다. 물론 왕국에서도 처음 세워질 때부터 언제나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다. 왕국의 힘, 따라서 왕국의 안전이 나뉘어 약해지지 않게 하려면 그것은 자식 가운데 한 사람에게 온전히 내려가야 한다. 그토록 중요한 우선권을 그 가운데 누구에게 줄 것인가는, 사람의 됨됨이가 나은지 못한지를 가리는 의심스러운 구별에 기대지 않고 다툴 여지가 없는 뻔하고 또렷한 차이에 기대는 어떤 일반 규칙으로 정해야 한다. 같은 집안의 자식들 사이에 다툴 여지가 없는 차이란 성별과 나이밖에 없다. 남자는 어디서나 여자보다 앞세워지고, 다른 모든 것이 같으면 어디서나 형이 아우를 앞선다. 여기서 장자 상속권과 이른바 직계 상속이 비롯되었다.

법은 그것을 처음 생기게 한 사정, 그리고 그것만이 그 법을 이치에 닿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정이 이미 사라진 뒤에도 오래도록 효력을 이어 가는 일이 잦다. 오늘날 유럽의 상태에서는 땅 한 에이커를 가진 임자도 100,000에이커를 가진 임자와 똑같이 자기 소유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 그런데도 장자 상속권은 여전히 존중받고 있으며, 모든 제도 가운데 집안의 지체를 내세우는 자랑을 떠받치기에 가장 알맞은 것이므로 앞으로도 여러 세기를 이어 갈 듯하다. 그 밖의 모든 점에서는, 한 사람을 넉넉하게 만들려고 나머지 자식을 모두 거지로 만드는 권리만큼 자식 많은 집안의 참된 이익에 어긋나는 것이 없다.

한사 상속은 장자 상속법이 자연스럽게 낳은 결과다. 그것은 장자 상속법이 처음 떠올리게 한 어떤 직계 상속을 지켜 내고, 본래의 재산 가운데 어느 조각도 증여로든 유언 처분으로든 양도로든, 또 그 뒤를 이은 임자 가운데 누군가의 어리석음이나 불운으로든 미리 정해 놓은 계통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로마인들에게는 아예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의 후계 지정도 신탁 유증도 한사 상속과 조금도 닮은 데가 없다. 프랑스의 몇몇 법률가가 오늘날의 제도를 그 옛 제도의 말과 옷으로 꾸며 놓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기는 하였다.

큰 토지 재산이 일종의 공국이었을 때에는 한사 상속이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떤 왕국의 이른바 기본법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수천 사람의 안전이 한 사람의 변덕이나 낭비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자주 막아 주었을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재산도 큰 재산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법에서 안전을 얻는 오늘날 유럽의 상태에서는 그보다 더 어이없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모든 가정 가운데 가장 어이없는 가정, 곧 잇따라 오는 세대의 사람들이 땅과 땅이 지닌 모든 것에 대하여 똑같은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가정, 오늘 세대의 소유가 아마 5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의 생각대로 얽매이고 다스려져야 한다는 가정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도 한사 상속은 유럽의 큰 몫에서 여전히 존중받는데, 특히 귀한 태생이 문관이나 무관의 명예를 누리는 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격인 나라에서 그러하다. 한사 상속은 나라의 큰 벼슬과 명예를 귀족이 독차지하는 이 특권을 지켜 내는 데 꼭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며, 그 신분이 나머지 동료 시민에게서 옳지 않은 이로움 하나를 이미 빼앗아 가진 터에 그들의 가난이 그것을 우습게 만들지 않도록 또 하나를 가지는 것이 이치에 닿는다고 여겨진다. 참으로 잉글랜드의 관습법은 영구 구속을 몹시 꺼린다고 하며, 그에 따라 그곳에서는 유럽의 어느 왕국보다 그것이 더 좁게 갇혀 있다. 물론 잉글랜드에도 그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나라 안 온 토지의 5분의 1 넘게, 아마 3분의 1 넘게가 오늘날 엄격한 한사 상속 아래 놓여 있다고 여겨진다.

개간되지 않은 넓은 땅이 이렇게 특정한 집안에 독차지된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다시 갈릴 수 있는 길까지 될 수 있는 한 영원히 막혔다. 그러나 큰 임자가 크게 개량하는 사람인 일은 좀처럼 없다. 그 야만스러운 제도를 낳은 어지러운 시절에 큰 임자는 자기 땅을 지키거나 이웃의 땅에까지 자기 재판권과 권위를 뻗치는 일에 넉넉히 매여 있었다. 그에게는 토지를 경작하고 개량하는 데 마음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법과 질서가 세워져 그런 겨를이 생겼을 때에는 그럴 마음이 없는 일이 잦았고, 그에 필요한 재주는 거의 언제나 갖추지 못하였다. 집과 몸에 드는 비용이 자기 수입과 맞먹거나 그것을 넘어서면, 그리고 그런 일이 아주 잦았으므로, 그에게는 이렇게 굴릴 자산이 없었다. 그가 살림을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해마다 모은 것을 낡은 재산을 개량하는 데 쓰기보다 새로 사들이는 데 쓰는 것이 대개 더 이롭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모든 사업 계획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개량하여 이윤을 얻으려면 작은 절약과 작은 이익에 빈틈없이 마음을 쏟아야 하는데, 큰 재산을 타고난 사람은 본디 아끼는 성품일지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 아주 드물다. 그런 사람의 처지는 자연히 그를, 쓸 자리가 거의 없는 이윤보다 제 마음에 드는 꾸밈에 마음을 쏟게 만든다. 옷차림과 마차와 집과 살림 도구가 우아한지는 그가 어릴 때부터 얼마쯤 마음을 쓰는 데 익어 온 것들이다. 이 버릇이 자연히 만들어 놓은 마음의 결은 그가 토지 개량을 생각하게 될 때에도 그를 따라온다. 그는 아마 자기 집 근방의 400에이커나 500에이커를 곱게 꾸며 놓는데, 그 개량을 다 하고 난 뒤의 땅값보다 열 배나 되는 비용을 들인다. 그러고는 자기 재산 전체를 그와 같이 개량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는 다른 어떤 길에도 취미가 없으므로, 그 10분의 1을 마치기도 전에 파산할 것임을 알게 된다. 연합 왕국의 두 부분에는 봉건 시대의 무질서 이래로 끊긴 적 없이 같은 집안의 손에 이어져 온 큰 재산이 아직 얼마쯤 남아 있다. 그 재산이 오늘날 어떠한지를 그 근방 작은 임자들의 소유와 견주어 보라. 그러면 그렇게 넓은 소유가 개량에 얼마나 나쁜지를 깨닫는 데 다른 논증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큰 임자들에게서 개량을 바랄 것이 적었다면, 그 아래에서 토지를 차지해 부친 사람들에게서 바랄 것은 더욱 적었다. 유럽의 옛 상태에서 토지를 차지해 부친 사람들은 모두 임의 차지인이었다.2 그들은 모두, 또는 거의 모두 노예였으나, 그들의 노예 상태는 옛 그리스인과 로마인 사이에 알려진 것이나 우리 서인도 식민지에 있는 것보다 부드러운 갈래였다. 그들은 자기 주인에게보다 토지에 더 곧바로 딸린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토지와 함께 팔릴 수 있었으나 따로 팔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주인의 허락을 얻으면 혼인할 수 있었고, 주인은 그 뒤에 그 남자와 그 아내를 서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 그 혼인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가 그들 가운데 누구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면 얼마간의 벌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그 벌은 대개 작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유를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든 주인에게 얻어진 것이었고, 주인은 마음대로 그것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갈 수 있었다. 그런 노예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작과 개량은 무엇이든 제대로 말하면 그들의 주인이 이룬 것이었다. 그 비용은 그가 들였다. 씨앗과 가축과 농사 도구가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 이익도 그에게 돌아갔다. 그런 노예는 날마다 먹고 입는 것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제 토지를 차지해 부친 것은 제대로 말하면 임자 자신이었고, 그는 제 예속민으로 그 땅을 경작한 것이었다. 이 갈래의 노예 상태는 러시아와 폴란드와 헝가리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그리고 독일의 다른 곳에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이 차츰 아예 없어진 곳은 유럽의 서쪽과 남서쪽 속주들뿐이다.

그러나 큰 임자에게서 큰 개량을 바랄 일이 좀처럼 없다면, 그들이 노예를 일꾼으로 부릴 때에는 더욱 바랄 것이 없다.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의 경험은, 노예가 한 일이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비용밖에 들지 않는 듯이 보여도 끝에 가서는 어느 일보다 가장 비싸다는 것을 밝혀 준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 소유도 얻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먹고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일하는 것 말고 다른 이익이 있을 수 없다. 자기가 먹고 입을 것을 살 만한 것을 넘어서는 일은 무엇이든 폭력으로만 그에게서 짜낼 수 있고 그 자신의 이익으로는 짜낼 수 없다. 옛 이탈리아에서 곡물 농사가 노예의 손에 맡겨졌을 때 얼마나 나빠졌는지, 주인에게 얼마나 이윤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는지는 플리니우스와 콜루멜라가 함께 적어 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 때에 옛 그리스에서도 그보다 크게 낫지 않았다. 플라톤의 『법률』에 그려진 이상의 공화국을 말하면서 그는, 놀고 지내는 사람 5000명과 (그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본 전사의 수다) 그들의 여자와 하인들을 먹이려면 바빌론의 들판처럼 끝없이 넓고 걸찬 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자만은 그로 하여금 남을 부리기를 좋아하게 만들며, 아랫사람을 설득하려고 몸을 낮추어야 하는 것만큼 그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법이 그것을 허락하고 일의 성질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는 대개 자유인의 일보다 노예의 일을 고른다. 사탕수수와 담배를 심는 일은 노예를 부려 경작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곡물을 기르는 일은 오늘날에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 같다. 주된 생산물이 곡물인 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일의 훨씬 큰 몫이 자유인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펜실베이니아의 퀘이커 교도들이 요즈음 자기네 흑인 노예를 모두 풀어 주기로 결의한 것은, 그 수가 그리 많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들이 그 소유의 꽤 큰 몫을 이루고 있었다면 그런 결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 사탕수수 식민지에서는 일이 모두 노예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우리 담배 식민지에서는 아주 큰 몫이 그렇다. 우리 서인도 식민지의 어느 곳에서든 사탕수수 개척지의 이윤은 대개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알려진 다른 어떤 경작의 이윤보다 훨씬 크며, 담배 개척지의 이윤은 사탕수수의 것에는 못 미치나 곡물의 것보다는 앞선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둘 다 노예를 부려 경작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으나, 사탕수수가 담배보다 그것을 더 잘 감당한다. 그에 따라 흑인의 수는 백인의 수에 견주어 담배 식민지보다 사탕수수 식민지에서 훨씬 많다.

옛 시절의 노예 경작자들에게 차츰 뒤를 이은 것은 오늘날 프랑스에서 메테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농부의 한 갈래였다.3 라틴어로는 콜로니 파르티아리이라고 한다. 잉글랜드에서는 쓰이지 않게 된 지 오래되어 오늘날 나는 그들을 가리키는 영어 이름을 알지 못한다. 임자는 그들에게 씨앗과 가축과 농사 도구, 곧 한마디로 농장을 경작하는 데 필요한 자산 전체를 대어 주었다. 생산물은 자산을 그대로 지탱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정된 것을 따로 떼어 놓은 뒤에 임자와 농부 사이에 똑같이 갈렸으며, 그 자산은 농부가 농장을 떠나거나 농장에서 내쫓길 때 임자에게 돌려졌다.

그런 차지인이 차지해 부친 토지는 노예가 부친 토지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말하면 임자의 비용으로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주 요긴한 차이 하나가 있다. 그런 차지인은 자유인이므로 소유를 얻을 수 있으며, 토지 생산물의 일정한 몫을 가지므로 자기 몫이 커지도록 생산물 전체가 될 수 있는 대로 커야 한다는 뻔한 이익을 가진다. 반대로 먹고 입을 것밖에 얻을 수 없는 노예는 그 먹고 입을 것을 넘어서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땅에서 나게 하여 제 편함을 챙긴다. 예속 보유가 유럽의 큰 몫에서 차츰 닳아 없어진 것은, 한편으로는 이 이로움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 영주들을 늘 시새운 주권자들이 자기네 예속 농민으로 하여금 영주의 권위를 밀고 들어가게 차츰 북돋운 것 때문이었던 듯한데, 그 밀고 들어감은 적어도 이 갈래의 예속을 아주 거북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던 것 같다.4 그러나 그토록 중요한 격변이 어느 때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근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대목 가운데 하나다. 로마 교회는 거기에 자기 공이 크다고 주장하며, 참으로 12세기에 이미 알렉산데르 3세가 노예를 널리 풀어 주라는 교서를 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신도들에게 어김없는 복종을 요구하는 법이라기보다 경건한 권고였던 것 같다. 노예 상태는 그 뒤로도 여러 세기에 걸쳐 거의 어디서나 이어졌으며, 마침내 앞에 말한 두 이익, 곧 한편에서는 임자의 이익과 다른 한편에서는 주권자의 이익이 함께 움직인 힘으로 차츰 없어졌다. 자유를 얻으면서 동시에 토지를 그대로 차지하도록 허락된 예속 농민은 제 자산이 없었으므로 지주가 앞당겨 대어 주는 것으로만 그 땅을 경작할 수 있었으며, 그러므로 프랑스 사람들이 메테예라 부르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갈래의 경작자에게도, 생산물 가운데 자기 몫에서 모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자산의 어느 조각을 토지를 더 개량하는 데 들이는 것이 이익일 수는 결코 없었다.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지주가 그 땅에서 난 것이 무엇이든 그 절반을 가져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물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십일조도 개량에 아주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절반에 이르는 세금은 개량을 틀어막는 빗장이었음이 분명하다. 임자가 대어 준 자산으로 땅에서 끌어낼 수 있는 만큼을 나게 하는 것은 메테예의 이익일 수 있었으나, 거기에 제 것을 조금이라도 섞는 것이 그의 이익일 수는 결코 없었다. 온 왕국의 6분의 5가 아직 이 갈래의 경작자에게 차지되어 있다고 하는 프랑스에서 임자들은, 자기네 메테예가 틈만 나면 주인의 가축을 경작보다 짐수레 끄는 데 부린다고 불평한다. 짐수레 일에서는 이윤을 모두 제 것으로 얻으나 경작에서는 그것을 지주와 나누기 때문이다. 이 갈래의 차지인은 스코틀랜드의 몇몇 곳에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을 스틸보 차지인이라 부른다. 수석 배런 길버트와 블랙스톤 박사가 제대로 말하는 농부라기보다 지주의 집사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그 옛 잉글랜드 차지인들도 아마 같은 갈래였을 것이다.

이 갈래의 차지 관계에 뒤를 이은 것은, 아주 느린 걸음이었으나 제대로 말하는 농부, 곧 제 자산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지주에게 일정한 지대를 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농부가 몇 해를 두고 차지 계약을 맺으면, 계약이 끝나기 전에 큰 이윤과 함께 되찾기를 바랄 수 있으므로 자기 자본의 얼마를 농장을 더 개량하는 데 들이는 것이 자기 이익에 맞는다고 더러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농부의 차지조차 오래도록 몹시 위태로웠으며 유럽의 여러 곳에서는 아직도 그렇다. 그들은 기한이 끝나기 전에 새로 땅을 산 사람에게 법에 따라 차지 계약을 빼앗길 수 있었으며, 잉글랜드에서는 커먼 리커버리라는 꾸며 낸 소송으로도 그럴 수 있었다.5 주인의 폭력으로 법에 어긋나게 내쫓기면, 그들이 바로잡음을 얻는 소송은 몹시 어설펐다. 그것이 언제나 그들을 토지의 차지로 되돌려 놓아 주지는 않고 손해 배상을 주었는데, 그 배상이 참된 손실에 이르는 일은 없었다. 요먼층이 유럽에서 아마 어디보다 늘 존중받아 온 나라인 잉글랜드에서도6 점유 회복 소송이 만들어진 것은 헨리 7세 치세 14년쯤에 이르러서였으니,7 그 소송으로 차지인은 손해 배상만이 아니라 차지 자체를 되찾으며, 그의 주장은 단 한 번의 순회 재판이 내리는 못 믿을 판정으로 반드시 끝나 버리지도 않는다. 이 소송이 그토록 효험 있는 구제로 드러났으므로, 오늘날의 관행에서는 지주가 토지의 차지를 되찾으려고 소송할 일이 생기면 지주로서 제게 마땅히 딸린 소송, 곧 권리 영장이나 입회 영장을 쓰는 일이 드물고 자기 차지인의 이름으로 점유 회복 영장을 내어 소송한다. 그러므로 잉글랜드에서 차지인의 안전은 임자의 안전과 맞먹는다. 게다가 잉글랜드에서는 한 해 40실링 값의 종신 차지가 자유 보유지가 되어 그것을 차지받은 사람에게 의회 의원을 뽑는 표를 주며,8 요먼층의 큰 몫이 이런 갈래의 자유 보유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이 그들에게 주는 정치적 무게 덕택에 그 신분 전체가 지주에게 존중받게 된다. 차지 계약을 맺지 않은 토지에 차지인이 집을 짓고, 그렇게 중요한 개량을 지주가 명예를 지켜 이용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보기는 잉글랜드 말고는 유럽 어디에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요먼층에게 그토록 이로운 그 법과 관습은, 자랑거리로 삼는 그들의 모든 교역 규제를 다 합친 것보다 아마 오늘날 잉글랜드의 큰 세력에 더 많이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갈래의 승계자에게도 가장 긴 차지 계약을 지켜 주는 법은 내가 아는 한 영국에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1449년에 벌써 제임스 2세의 법으로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이로운 영향은 한사 상속으로 크게 막혀 왔다. 한사 상속의 상속인은 대개 여러 해를 두고, 잦게는 한 해를 넘겨 차지 계약을 맺어 주는 것을 금하는 굴레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의회 법이 이 점에서 그 굴레를 얼마쯤 늦추어 주었으나 아직도 너무 좁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에서는 차지 보유가 의회 의원을 뽑는 표를 주지 않으므로 요먼층이 이 때문에 잉글랜드에서보다 지주에게 덜 존중받는다.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상속인에게서든 땅을 산 사람에게서든 차지인을 지켜 주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 드러난 뒤에도 그 안전의 기한이 아주 짧은 동안으로 갇혀 있었으니, 프랑스를 보기로 들면 차지 계약을 시작한 때부터 9년이었다. 참으로 그 나라에서 요즈음 그것이 27년으로 늘었으나, 이는 차지인이 가장 중요한 개량을 하도록 북돋우기에는 아직 너무 짧은 동안이다. 옛적에 유럽 어디서나 입법자는 토지의 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토지에 딸린 법은 모두 그들이 임자의 이익이라고 여긴 것에 맞추어 셈되었다. 앞서 있던 누군가가 맺어 준 차지 계약이 자기가 여러 해에 걸쳐 제 토지의 온 가치를 누리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 제 이익이라고 그들은 여겼다. 탐욕과 옳지 않음은 언제나 앞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이 규제가 개량을 얼마나 틀어막고 그리하여 마침내 지주의 참된 이익을 얼마나 해칠 것인지를 미리 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농부는 옛적에 지대를 무는 것 말고도 지주에게 아주 많은 부역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졌는데, 그 부역은 차지 계약에 적히거나 어떤 또렷한 규칙으로 다스려지는 일이 드물고 장원이나 배런 영지의 관례와 버릇에 따랐다.9 그러므로 이 부역은 거의 전부가 제멋대로였으므로 차지인을 여러 괴롭힘에 놓이게 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차지 계약에 또렷하게 정해지지 않은 부역을 모두 없앤 것이 몇 해 안에 그 나라 요먼층의 처지를 아주 크게 낫게 바꾸어 놓았다.

요먼층이 져야 했던 공적인 부역도 사사로운 부역만큼 제멋대로였다. 큰길을 만들고 건사하는 부역은 내가 믿기로 아직 어디서나 남아 있으나 나라마다 짓누르는 정도가 다르며, 그것만이 부역의 전부는 아니었다. 왕의 군대나 그의 집안사람이나 어떤 갈래의 관리가 나라의 어느 곳을 지나갈 때 요먼층은 조달관이 매긴 값으로 그들에게 말과 수레와 식료품을 대어 주어야 했다.10 내가 믿기로 영국은 징발의 억누름이 아예 없어진 유럽의 유일한 왕국이다. 그것은 프랑스와 독일에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이 물어야 했던 공적인 세금도 부역과 마찬가지로 고르지 않고 짓누르는 것이었다. 옛 영주들은 자기가 주권자에게 돈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몹시 꺼렸으나, 주권자가 자기네 차지인에게 그들이 탈라주라 부른 것을 물리는 것은 선선히 허락하였으며, 이것이 마침내 자기네 수입에 얼마나 미칠지를 미리 볼 만한 앎이 없었다.11 프랑스에 아직 남아 있는 타유는 그 옛 탈라주의 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농부가 얻으리라고 여겨지는 이윤에 물리는 세금인데, 그 이윤을 농장에 그가 가진 자산으로 어림한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자산을 적게 가진 듯이 보이는 것, 따라서 경작에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굴리고 개량에는 하나도 굴리지 않는 것이 그의 이익이다. 프랑스 농부의 손에 어떤 자산이 모이기라도 하면, 타유는 그것이 토지에 쓰이는 것을 거의 금하는 것과 맞먹는다. 게다가 이 세금은 그것을 무는 사람을 누구나 욕되게 하여 그를 신사의 지체만이 아니라 도시민의 지체보다도 낮추어 놓는다고 여겨지며, 남의 토지를 빌리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물게 된다. 자산을 가진 신사도, 도시민조차도 이 낮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금은 토지 위에 모이는 자산이 그 개량에 쓰이는 것을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자산을 그 토지에서 몰아낸다. 옛적에 잉글랜드에서 그토록 예사였던 옛 10분의 1세와 15분의 1세도 토지에 미치는 한에서는 타유와 같은 성질의 세금이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억누름 아래에서 토지를 차지해 부친 사람들에게서 개량을 바랄 것은 적었다. 그 무리의 사람들은 법이 줄 수 있는 모든 자유와 안전을 누리더라도 언제나 큰 불리함 아래에서 개량할 수밖에 없다. 임자에 견준 농부는 자기 돈으로 장사하는 상인에 견준, 빌린 돈으로 장사하는 상인과 같다. 둘의 자산이 다 늘 수는 있으나, 처신이 똑같이 좋기만 하다면 한쪽의 자산은 빌린 돈의 이자로 이윤의 큰 몫이 먹히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쪽의 것보다 느리게 늘 수밖에 없다. 농부가 경작하는 토지도 마찬가지로 처신이 똑같이 좋기만 하다면, 생산물의 큰 몫이 지대로 먹히고 농부가 임자였다면 그것을 토지를 더 개량하는 데 굴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임자가 경작하는 토지보다 느리게 개량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농부의 자리는 일의 성질로 보아 임자의 자리보다 낮다. 유럽의 큰 몫에서 요먼층은 나은 편에 드는 소상인과 직공보다도 낮은 지체의 사람들로 여겨지며,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큰 상인과 제조업 고용주보다 낮은 지체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꽤 큰 자산을 가진 사람이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자리에 제 몸을 놓는 일은 좀처럼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럽의 상태에서도 다른 어떤 직업에서 농사의 길로 토지 개량에 흘러들 자산은 적을 듯하다. 영국에서는 아마 어느 나라보다 그런 일이 많으나, 그곳에서도 농사에 굴리는 큰 자산은 대개 농사로 얻은 것이었고, 농사는 아마 모든 생업 가운데 자산이 가장 느리게 모이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임자들 다음으로는 넉넉하고 큰 농부가 어느 나라에서나 주된 개량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유럽의 어느 왕국보다 잉글랜드에 아마 더 많다. 네덜란드와 스위스 베른의 공화 정부 아래에서는 농부가 잉글랜드의 농부에 못지않다고 한다.

유럽의 옛 정책은 이 모든 것 위에 더하여, 임자가 하든 농부가 하든 토지의 개량과 경작에 이롭지 않았다. 첫째는 특별한 허가 없이는 곡물을 내보내는 것을 널리 금한 것인데 이것은 아주 두루 퍼진 규제였던 것 같고, 둘째는 매점자와 되팔이와 선매자를 막는 어이없는 법과 정기장과 장이 누린 특권으로, 곡물만이 아니라 농장 생산물의 거의 다른 모든 부분에 대해서도 나라 안 교역에 걸어 놓은 굴레다.12 곡물을 내보내는 것을 금하고 아울러 바깥 곡물을 들여오는 것을 얼마쯤 북돋운 것이, 유럽에서 본디 가장 걸차고 그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제국이 자리 잡았던 옛 이탈리아의 경작을 어떻게 틀어막았는지는 이미 살펴보았다. 이 상품의 나라 안 교역에 걸린 그런 굴레가 곡물을 내보내는 것을 널리 금한 것과 어우러져, 덜 걸차고 처지가 덜 좋은 나라의 경작을 얼마나 눌렀을지는 아마 그려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3장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도시가 일어나 뻗어 나간 과정에 대하여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크고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시골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참으로 그들은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옛 공화국에 처음 살던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뒤의 사람들은 주로 토지의 임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나라의 땅이 처음에 갈렸고, 그들은 서로 가까이에 집을 짓고 함께 지키려고 그 집들을 담으로 둘러싸는 것이 편하다고 여겼다. 반대로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토지의 임자들은 대개 제 재산 안에 있는 성채에서 자기 차지인과 딸린 사람들 가운데에 살았던 것 같다. 도시에는 주로 소상인과 직공이 살았는데, 그 시절에 그들은 예속 신분이거나 그에 아주 가까운 처지였던 것 같다. 옛 특허장이 유럽의 주된 도시 몇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준 특권을 보면, 그 허가가 있기 전에 그들이 어떠하였는지가 넉넉히 드러난다. 영주의 허락 없이 제 딸을 혼인시켜 보낼 수 있다는 것, 자기가 죽을 때 영주가 아니라 제 자식이 제 재물을 이어받는다는 것, 제 재산을 유언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을 특권으로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 허가가 있기 전에는 아예 또는 아주 가깝게 시골에서 토지를 차지해 부친 사람들과 같은 예속 농민의 처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참으로 그들은 아주 가난하고 낮은 무리의 사람들로, 오늘날의 행상과 등짐장수처럼 제 물건을 지니고 곳에서 곳으로, 정기장에서 정기장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때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오늘날 아시아의 여러 타타르 정부에서 그러하듯, 길손이 어떤 장원을 지날 때, 어떤 다리를 건널 때, 정기장 안에서 제 물건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때, 그것을 팔려고 그 안에 가게나 좌판을 세울 때 그 사람과 물건에 세금을 물리는 것이 예사였다. 이 여러 세금은 잉글랜드에서 통행세와 교량세와 하물세와 좌판세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13 더러는 왕이, 더러는 어떤 큰 영주가, 어떤 경우에는 그럴 권한이 있었던 듯한데, 특정한 장사꾼에게, 특히 자기 직영지에 사는 장사꾼에게 그런 세금을 두루 면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 장사꾼은 다른 점에서는 예속 신분이거나 그에 아주 가까운 처지였음에도 이 때문에 자유 상인이라 불렸다. 그들은 그 대신에 자기를 지켜 주는 이에게 해마다 일종의 인두세를 무는 것이 예사였다. 그 시절에 보호는 값나가는 대가 없이 주어지는 일이 드물었으며, 이 세금은 아마 그들이 다른 세금을 면제받아 그 후원자가 잃게 될 것에 대한 메움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인두세도 그 면제도 아예 사람에게 딸린 것이어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이나 그들을 지켜 주는 이의 뜻이 이어지는 동안에 특정한 개인에게만 미쳤던 것 같다. 잉글랜드의 여러 도시에 대하여 그 땅과 재산을 1086년에 적어 놓은 대장인 『둠즈데이 북』에서 뽑아 펴낸 아주 어설픈 기록에는, 이런 갈래의 보호를 받으려고 특정한 도시민이 저마다 왕이나 다른 어떤 큰 영주에게 문 세금이 더러 적혀 있고 더러는 그 모든 세금의 전체 액수만 적혀 있다. {브레이디의 『도시와 자치 도시에 대한 역사 논고』 3쪽 등을 보라.}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처지가 처음에 얼마나 예속되어 있었든, 그들이 시골에서 토지를 차지해 부친 사람들보다 훨씬 이르게 자유와 독립에 이르렀다는 것은 또렷이 드러난다. 어느 특정한 도시에서 그런 인두세로 생긴 왕의 수입 가운데 일부는, 몇 해를 두고 일정한 지대를 받는 것으로 더러는 주 장관에게 더러는 다른 사람에게 청부로 넘기는 것이 예사였다.14 도시민 자신이 저마다 그리고 함께 지대 전체를 맡는 것으로 하여, 제 도시에서 나오는 이런 갈래의 수입을 청부받도록 받아들여질 만한 믿음을 얻는 일도 잦았다. {매독스 『퍼르마 부르기』 18쪽. 또 『국고청 역사』 10장 5절 223쪽, 초판을 보라.} 이렇게 청부를 넘기는 것은 내가 믿기로 유럽 여러 나라 주권자들의 예사로운 살림살이에 아주 잘 맞았으며, 그들은 장원 전체를 그 장원의 모든 차지인에게 넘겨 그들이 저마다 그리고 함께 지대 전체를 맡되, 그 대신에 자기네 손으로 그것을 걷고 자기네가 뽑은 집사의 손으로 왕의 국고청에 들여놓도록 하여 왕의 관리들이 부리는 오만에서 아예 벗어나게 해 주는 일이 잦았으니, 그 시절에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처음에는 그 도시의 청부가 아마 다른 청부인에게 그러하였듯이 도시민에게 몇 해를 두고만 넘겨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것을 영구 보유로, 곧 영원히 그들에게 넘겨주고 그 뒤로 결코 늘리지 않을 일정한 지대만 남겨 두는 것이 두루 하는 일이 된 것 같다. 이렇게 그 치름이 영원한 것이 되자, 그 대신으로 주어진 면제도 자연히 영원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 면제는 사람에게 딸린 것이기를 그치고, 그 뒤로는 개인으로서의 개인에게 딸린 것으로 여겨질 수 없고 특정한 자치 도시의 도시민에게 딸린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때문에 그 도시를 자유 도시라 불렀으니 그들을 자유 도시민이나 자유 상인이라 부른 것과 같은 까닭이다.

이 허가와 함께, 앞에 말한 중요한 특권, 곧 제 딸을 혼인시켜 보낼 수 있고 제 자식이 제 것을 이어받으며 제 재산을 유언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특권이 그것을 받은 도시의 도시민에게 대개 주어졌다. 그런 특권이 그전에 장사의 자유와 함께 특정한 도시민에게 개인으로서 예사로 주어졌는지는 내가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그럴 법하지 않다고 여기지는 않으나 그것을 밝힐 곧바른 증거를 내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하였든, 이렇게 예속 농민 신분과 노예 신분의 주된 표지가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므로 그들은 이제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자유라는 낱말로 뜻하는 뜻에서 참으로 자유로워졌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개 같은 때에 하나의 공동체 곧 자치 단체로 세워져, 자기네 행정관과 시 참사회를 두고 자기네 다스림을 위한 조례를 만들고 자기네를 지키려고 담을 쌓으며,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파수와 지킴의 의무를 지워 일종의 군사 규율 아래 두는 특권을 받았으니, 파수와 지킴은 옛적에 이해된 대로는 밤낮으로 그 담을 모든 공격과 기습에서 지키고 막는 것이다.15 잉글랜드에서 그들은 대개 헌드레드 법정과 주 법정에 나갈 의무를 면제받았고, 그들 사이에 생기는 모든 송사는 국왕 소추 사건만 빼고 자기네 행정관의 판정에 맡겨졌다. 다른 나라에서는 훨씬 크고 넓은 재판권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일이 잦았다. {매독스 『퍼르마 부르기』를 보라. 또 프리델의 『프리드리히 2세와 슈바벤 가문의 그 뒤 계승자들 아래에서 일어난 눈에 띄는 일들』을 보라.}

제 수입을 청부받도록 허락된 도시에는 자기네 시민이 치르게 만들 어떤 강제 재판권을 주는 것이 아마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 어지러운 시절에 이런 갈래의 재판을 다른 어떤 법정에서 찾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몹시 거북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의 주권자들이 자기 수입 가운데 아마 다른 어느 갈래보다도 자기 비용이나 마음을 들이지 않고 일이 저절로 흘러가는 동안에 늘어날 법한 갈래를 이렇게 다시는 늘리지 않을 일정한 지대와 맞바꾸고, 게다가 자기 영토의 심장에 일종의 독립한 공화국을 제 뜻으로 세워 준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 시절에 유럽의 어느 나라 주권자도 자기 영토 온 넓이에 걸쳐 제 백성 가운데 약한 쪽을 큰 영주들의 억누름에서 지켜 줄 힘이 아마 없었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법이 지켜 줄 수 없고 제 힘으로 제 몸을 지킬 만큼 세지도 않은 사람들은, 어떤 큰 영주의 보호에 매달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그의 노예나 봉신이 되거나, 아니면 서로 함께 지키려고 서로 돕는 동맹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크고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보면 제 몸을 지킬 힘이 없었으나, 이웃과 서로 돕는 동맹에 들어감으로써 업신여길 수 없는 저항을 할 수 있었다. 영주들은 도시민을 업신여겨 다른 무리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풀려난 노예 떼로, 거의 자기와 다른 종류로 여겼다. 도시민의 넉넉함은 그들의 시새움과 분함을 어김없이 돋우었고, 그들은 틈만 나면 자비도 뉘우침도 없이 도시민을 털었다. 도시민은 자연히 영주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하였다. 왕도 영주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왕은 도시민을 업신여겼을지는 몰라도 미워하거나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므로 서로의 이익이 도시민으로 하여금 왕을 떠받치게 하고 왕으로 하여금 영주들에 맞서 도시민을 떠받치게 하였다. 그들은 왕의 원수의 원수였으니, 그들을 그 원수들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안전하고 독립되게 만드는 것이 왕의 이익이었다. 자기네 행정관을 두는 것, 자기네 다스림을 위한 조례를 만드는 특권, 자기네를 지키려고 담을 쌓는 특권,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을 일종의 군사 규율 아래 두는 특권을 그들에게 주어, 왕은 자기 힘으로 베풀 수 있는 모든 안전의 수단과 배런들에게서 독립할 수단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런 갈래의 규칙 있는 다스림을 세우지 않고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일정한 계획이나 체계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 어떤 권위가 없고서는, 서로 돕는 어떤 자발스러운 동맹도 그들에게 오래가는 안전을 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왕에게 꽤 큰 힘을 보태게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제 도시의 청부를 영구 보유로 넘겨줌으로써 왕은, 자기 벗으로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자기 동맹자로 삼고 싶은 이들에게서, 제 도시의 청부 지대를 올리거나 그것을 다른 청부인에게 넘겨 자기를 언젠가 짓누르려 하지 않을까 하는 시새움과 의심의 모든 바탕을 없애 주었다.

그에 따라 자기 배런들과 가장 나쁜 사이로 지낸 군주들이 자기 자치 도시에 이런 갈래의 허가를 가장 후하게 준 것 같다. 보기를 들면 잉글랜드 왕 존은 자기 도시들에 아주 너그러운 베푸는 이였던 것 같다. {매독스를 보라.} 프랑스의 필리프 1세는 자기 배런들에 대한 권위를 모두 잃었다. 다니엘 신부에 따르면 그의 치세가 저물 무렵 그의 아들 루이, 뒷날 뚱보 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는 왕실 직영지의 주교들과 함께 큰 영주들의 폭력을 누를 가장 알맞은 길을 놓고 의논하였다. 그들의 조언은 두 가지 다른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그의 직영지에 있는 꽤 큰 도시마다 행정관과 시 참사회를 세워 새로운 갈래의 재판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행정관의 지휘 아래 마땅한 일이 생기면 왕을 도우려 나아가게 하여 새로운 민병을 이루는 것이었다. 프랑스 고문서 학자들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도시의 행정관과 참사회라는 제도가 세워진 것은 이때부터로 잡아야 한다. 독일의 자유 도시 대부분이 그 특권을 처음 허가받은 것, 그리고 이름난 한자 동맹이 처음 두려운 세력이 된 것은 슈바벤 가문 군주들의 뜻대로 되지 않던 치세 동안이었다. {프리델을 보라.}

그 시절에 도시의 민병은 시골의 민병에 못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어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더 쉽게 모일 수 있었으므로 이웃 영주들과 다툴 때 그들이 이로운 자리에 서는 일이 잦았다. 이탈리아나 스위스처럼 다스림의 중심에서 멀거나 그 나라 자체가 본디 튼튼하거나 그 밖의 어떤 까닭으로 주권자가 제 권위를 온통 잃게 된 나라에서는, 도시가 대개 독립한 공화국이 되어 근방의 귀족을 모두 이겨 내고 그들에게 시골의 성채를 헐어 내리고 다른 평화로운 주민처럼 도시 안에 와 살도록 시켰다. 이것이 베른 공화국의 짧은 역사이며 스위스의 여러 다른 도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베네치아를 빼면, 그 도시의 역사는 얼마쯤 다르므로 그러하되, 이것은 12세기 끝에서 16세기 처음 사이에 그토록 많이 일어나고 스러진 꽤 큰 이탈리아 공화국 전부의 역사다.

프랑스나 잉글랜드처럼 주권자의 권위가 자주 아주 낮아지기는 하였으나 아예 무너진 적은 없는 나라에서는 도시가 온전히 독립하게 될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큰 세력이 되어, 주권자는 정해진 도시 청부 지대 말고는 그들의 동의 없이 그들에게 어떤 세금도 물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국 신분회에 대표를 보내라는 부름을 받았고, 거기서 성직자와 배런들과 함께 급한 일이 있을 때 왕에게 얼마간의 특별한 도움을 허락하는 데 함께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대개 왕의 힘에 더 호의를 보였으므로, 왕은 그 모임에서 큰 영주들의 권위에 맞서는 저울추로 그들의 대표를 더러 썼던 것 같다. 여기서 유럽의 모든 큰 왕국의 신분회에 자치 도시가 대표를 보내는 일이 비롯되었다.

질서와 좋은 다스림, 그리고 그와 함께 개인의 자유와 안전이 이렇게 도시에 세워진 때에, 시골에서 토지를 차지해 부친 사람들은 온갖 갈래의 폭력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지켜 줄 것이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히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할 생계로 만족한다. 더 얻으면 자기를 짓누르는 이들의 옳지 않음을 부추기기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제 근면의 열매를 누릴 것이 안전하면 그들은 자연히 제 처지를 낫게 하고 살림에 꼭 있어야 할 것만이 아니라 편의와 우아함까지 얻으려고 근면을 쏟는다. 그러므로 꼭 있어야 할 생계를 넘어서 무엇인가를 겨누는 근면은, 시골에서 토지를 차지해 부친 사람들이 그것을 흔히 하게 되기 훨씬 앞서 도시에 세워졌다. 예속 농민의 부림에 짓눌린 가난한 경작자의 손에 자산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주인에게 딸렸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그것을 주인에게서 아주 조심스럽게 숨기고 틈이 나는 대로 도시로 달아났을 것이다. 그때의 법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너그럽고 시골 사람들에 대한 영주의 권위를 줄이려는 마음이 그토록 커서, 그가 거기에서 한 해 동안 제 영주의 뒤쫓음을 벗어나 몸을 숨길 수 있으면 그는 영원히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시골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부지런한 쪽의 손에 모인 자산은 무엇이든 자연히 도시로 피해 들어갔으니, 그것을 얻은 사람에게 그것이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성소가 도시였기 때문이다.

참으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네 생계와 자기네 근면의 모든 재료와 수단을 시골에서 얻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닷가나 배가 다닐 수 있는 강가에 놓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드시 제 근방의 시골에서만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훨씬 넓은 자리가 있어서, 제 근면으로 만든 제조품과 바꾸어서든, 멀리 떨어진 나라들 사이에서 나르는 일을 맡아 한 나라의 생산물을 다른 나라의 생산물과 바꾸어서든, 세상의 가장 먼 구석에서 그것을 끌어올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어떤 도시는 제 근방의 시골만이 아니라 그가 거래하는 모든 나라가 가난과 궁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큰 넉넉함과 빛남에 이를 수 있었다. 그 나라들은 하나하나 따로 보면 아마 그 도시의 생계나 일거리 가운데 작은 몫밖에 댈 수 없었을 것이나, 모두 합치면 큰 생계와 큰 일거리를 다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교역이 미치는 좁은 테두리 안에도 넉넉하고 부지런한 나라가 얼마쯤 있었다. 그리스 제국은 그것이 버티고 있는 동안 그러하였고 아바스 왕조 치세의 사라센도 그러하였다. 이집트도 튀르크인에게 정복될 때까지 그러하였고, 바르바리 해안의 얼마와 무어인의 다스림 아래 있던 스페인의 모든 속주도 그러하였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유럽에서 교역으로 꽤 큰 넉넉함에 이른 첫 도시였던 것 같다. 이탈리아는 그때 세상에서 개량되고 문명을 이룬 쪽의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십자군은 그것이 일으킨 자산의 큰 낭비와 사람의 죽음으로 유럽의 큰 몫이 나아가는 것을 늦추었음이 분명하나, 몇몇 이탈리아 도시가 나아가는 데에는 몹시 이로웠다. 성지를 얻으려고 온갖 곳에서 나아간 큰 군대는, 더러는 그들을 거기로 실어 나름으로써 언제나 그들에게 식료품을 대어 줌으로써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피사의 배에 여느 때 없는 북돋움을 주었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들은 그 군대의 병참을 맡은 이들이었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 닥친 것 가운데 가장 파괴스러운 미친 짓이 그 공화국들에는 넉넉함의 샘이 되었다.

거래하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더 넉넉한 나라의 개량된 제조품과 값비싼 사치품을 들여옴으로써 큰 임자들의 헛된 자랑에 얼마쯤 먹이를 주었고, 큰 임자들은 제 땅의 원생산물을 많이 내어 그것을 다투어 사들였다. 그에 따라 그 시절 유럽의 큰 몫에서 교역은 주로 제 원생산물을 더 문명을 이룬 나라의 제조품과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잉글랜드의 양모는 프랑스의 포도주와 플란데런의 고운 옷감과 맞바꾸는 것이 예사였으니, 오늘날 폴란드의 곡물을 프랑스의 포도주와 브랜디,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비단과 우단과 맞바꾸는 것과 같다.

이렇게 바깥과의 교역이, 그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던 나라에 더 곱고 더 개량된 제조품을 좋아하는 취미를 들여왔다. 그러나 이 취미가 꽤 큰 수요를 일으킬 만큼 두루 퍼지자, 상인들은 나르는 비용을 아끼려고 자연히 같은 갈래의 제조업을 제 나라에 세우려 애썼다. 여기서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유럽의 서쪽 속주들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멀리 팔려 나갈 것을 만드는 첫 제조업이 비롯되었다.

어떤 큰 나라도 그 안에서 얼마간의 제조업이 이루어지지 않고서 버틴 적이 없고 버틸 수도 없었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 제조업이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더 곱고 더 개량된 제조업, 또는 멀리 팔기에 알맞은 제조업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어느 큰 나라에서나 사람들 가운데 훨씬 큰 몫의 옷과 살림 도구는 그들 자신의 근면이 낸 생산물이다. 제조업이 없다고 흔히 말하는 그 가난한 나라에서는, 제조업이 넘친다고 말하는 그 넉넉한 나라에서보다 이것이 더욱 두루 그러하다. 뒤의 나라에서는 가장 낮은 지체의 사람들이 입는 옷과 쓰는 살림 도구에서도 앞의 나라에서보다 바깥 생산물의 몫이 훨씬 큰 것을 대개 보게 될 것이다.

멀리 팔기에 알맞은 제조업은 두 가지 다른 길로 여러 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더러는 앞에 말한 길로,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특정한 상인과 사업가의 자산이 거센 힘으로 밀어붙여 들어왔으니, 그들은 같은 갈래의 바깥 제조업을 본떠 그것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런 제조업은 바깥과의 교역이 낳은 자식이며, 13세기에 루카에서 번성한 비단과 우단과 금실 옷감의 옛 제조업이 그러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그린 영웅 가운데 하나인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폭정으로 그곳에서 쫓겨났다. 1310년에 900 집안이 루카에서 몰려났고 그 가운데 31 집안이 베네치아로 물러가 그곳에 비단 제조업을 들여놓겠다고 내놓았다. {산디 『베네치아 시민사』 2부 1권 247쪽과 256쪽을 보라.}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많은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졌으며, 그들은 일꾼 300명으로 그 제조업을 시작하였다. 플란데런에서 옛적에 번성하여 엘리자베스 치세 처음에 잉글랜드로 들어온 고운 옷감의 제조업도 그러하였던 것 같고, 오늘날 리옹과 스피털필즈의 비단 제조업도 그러하다. 이렇게 들어온 제조업은 바깥 제조업을 본뜬 것이므로 대개 바깥 재료로 이루어진다. 베네치아의 제조업이 처음 세워졌을 때 재료는 모두 시칠리아와 레반트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루카의 더 오래된 제조업도 마찬가지로 바깥 재료로 이루어졌다.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를 치는 일은 16세기 앞에는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재주는 샤를 9세 치세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에 들어왔다. 플란데런의 제조업은 주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양모로 이루어졌다. 스페인 양모는 잉글랜드의 첫 털옷감 제조업의 재료는 아니었으나 멀리 팔기에 알맞은 첫 제조업의 재료였다. 리옹 제조업 재료의 절반 넘는 것이 오늘날 바깥 비단이며, 그것이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전부나 거의 전부가 그러하였다. 스피털필즈 제조업의 재료는 어느 부분도 잉글랜드의 생산물이 될 것 같지 않다. 그런 제조업은 대개 몇몇 사람의 계획과 기획으로 들어오므로, 그 자리가 더러는 바닷가 도시에 더러는 내륙 도시에 잡히는데 그들의 이익이나 판단이나 변덕이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른다.

다른 때에는 멀리 팔기에 알맞은 제조업이, 가장 가난하고 가장 거친 나라에서도 어느 때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그 집안 제조업과 거친 제조업이 차츰 고와짐으로써 자연히, 이를테면 저절로 자라난다. 그런 제조업은 대개 그 나라가 내는 재료로 이루어지며, 바다에서 아주 멀지는 않으나 꽤 떨어져 있고 더러는 물길이 아예 닿지 않는 내륙 나라에서 처음 고와지고 나아진 일이 잦았던 것 같다. 본디 걸차고 경작하기 쉬운 내륙 나라는 경작자를 먹이는 데 필요한 것을 넘어 식료품을 많이 남기는데, 땅으로 나르는 비용과 강으로 배를 다니게 하는 데 따르는 거북함 때문에 이 남는 것을 바깥으로 보내기가 어려운 일이 잦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넉넉함이 식료품을 값싸게 만들고, 제 근면이 다른 곳에서보다 그곳에서 살림에 꼭 있어야 할 것과 편의를 더 많이 얻어 줄 수 있음을 아는 일꾼을 많이 근방에 자리 잡게 북돋운다. 그들은 그 땅이 내는 제조 재료를 다루어 놓고, 다 만든 물건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 값을 더 많은 재료와 식료품과 바꾼다. 그들은 원생산물 가운데 남는 몫을 물가나 멀리 떨어진 장으로 나르는 비용을 아껴 줌으로써 그것에 새 가치를 주고, 경작자에게는 그 대신에 그들에게 쓸모 있거나 마음에 맞는 것을 전보다 쉬운 값으로 대어 준다. 경작자는 남는 생산물에 더 나은 값을 받고 자기가 쓸 일이 있는 다른 편의를 더 값싸게 살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토지를 더 개량하고 더 낫게 경작하여 이 남는 생산물을 늘리도록 북돋아지고 또 그럴 수 있게 된다. 땅의 걸참이 그 제조업을 낳았듯이, 제조업이 나아가는 것이 다시 땅에 되돌아 작용하여 그 걸참을 더욱 늘린다. 제조업자는 먼저 근방에 물건을 대고, 그 뒤에 제 일이 나아지고 고와지는 대로 더 멀리 떨어진 장에 댄다. 원생산물도, 거친 제조품조차도 땅으로 꽤 멀리 나르는 비용을 아주 큰 어려움 없이는 감당할 수 없으나, 곱고 개량된 제조품은 쉽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은 부피 안에 많은 양의 원생산물 값을 담는 일이 잦다. 보기를 들어 무게가 80파운드밖에 되지 않는 고운 옷감 한 필은 그 안에 양모 80파운드의 값만이 아니라 더러는 곡물 몇천 파운드의 값, 그리고 여러 일하는 사람과 그들을 바로 부리는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값까지 담고 있다. 제 모습 그대로는 바깥으로 나르기 어려웠을 곡물이 이렇게 하여 완성된 제조품의 모습으로 사실상 내보내지며,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쉽게 보내질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리즈와 핼리팩스와 셰필드와 버밍엄과 울버햄프턴의 제조업이 자연히, 이를테면 저절로 자라났다. 그런 제조업은 농업이 낳은 자식이다. 유럽의 근대사에서 그것이 뻗어 나가고 나아진 것은 대개 바깥과의 교역이 낳은 제조업이 그리한 것보다 뒤였다. 잉글랜드가 스페인 양모로 만든 고운 옷감의 제조업으로 이름났던 것은, 앞에 말한 곳에서 오늘날 번성하는 제조업 가운데 어느 것이 바깥에 팔기에 알맞게 되기보다 100년도 더 앞선 일이었다. 뒤의 것이 뻗어 나가고 나아진 것은 농업이 뻗어 나가고 나아진 결과로만 일어날 수 있었으니, 농업의 그것은 바깥과의 교역, 그리고 그것이 곧바로 들여온 제조업이 낸 마지막이자 가장 큰 결과이며, 이제 그것을 밝혀 나가려 한다.

주

  1. 1. 옮긴이 — 장자 상속은 토지를 갈라 주지 않고 맏아들 한 사람에게 온전히 물려주는 제도다. 한사 상속은 물려받은 사람이 그 토지를 팔거나 갈라 내지 못하게 하여 미리 정해 둔 계통 안에만 머물게 얽어 두는 제도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18세기까지 널리 쓰였다.

  2. 2. 옮긴이 — 임의 차지인은 기한을 정하지 않고 땅을 부치는 사람으로, 지주가 마음먹으면 언제든 내보낼 수 있었다. 몇 해를 정해 맺는 차지 계약과 달리 차지인에게 아무 보장이 없었다.

  3. 3. 옮긴이 — 메테예는 임자가 씨앗과 가축과 농기구를 다 대어 주고 생산물을 절반씩 나누는 차지인이다. 라틴어 콜로니 파르티아리이도 같은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 중부와 남부에 20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4. 4. 옮긴이 — 예속 농민은 영주의 땅에 얽매여 영주의 허락 없이는 그곳을 떠날 수 없고 부역을 지던 농민이다. 노예와 달리 제 집과 세간을 가질 수 있었으나 몸이 땅에 딸려 있었다. 예속 보유는 그런 조건으로 땅을 부치는 것을 말한다.

  5. 5. 옮긴이 — 커먼 리커버리는 한사 상속으로 얽힌 땅을 풀거나 차지 계약을 깨뜨리려고 당사자끼리 짜고 벌인 꾸며 낸 소송이다. 점유 회복 소송은 땅에서 쫓겨난 차지인이 손해 배상만이 아니라 땅 자체를 되찾게 해 준 소송이고, 권리 영장과 입회 영장은 지주가 쓰던 더 오래되고 느린 소송 방법이다.

  6. 6. 옮긴이 — 요먼층은 잉글랜드에서 제 땅을 가지거나 땅을 빌려 스스로 농사하던 사람들의 층을 가리킨다. 귀족과 날품팔이 사이에 놓인 층으로, 스미스는 이 장에서 농부와 차지인을 아울러 이 말로 부른다.

  7. 7. 옮긴이 — 영국의 법령과 사건은 국왕이 자리에 오른 뒤 몇 해째인가로 가리킨다. 헨리 7세 치세 14년은 1498년이다.

  8. 8. 옮긴이 — 자유 보유지는 기한 없이 제 것으로 가지는 토지 보유다. 잉글랜드에서는 한 해 40실링 값이 넘는 자유 보유지를 가진 사람에게 주 선거구의 의회 의원을 뽑는 표가 주어졌다. 1430년에 정해진 이 기준이 1832년까지 이어졌다.

  9. 9. 옮긴이 — 봉건 부역은 차지인이 지대와 따로 지주에게 바치던 몸으로 하는 일로, 밭갈이와 짐수레와 수확 돕기 따위였다. 장원은 영주의 재판권이 미치는 토지 단위이고, 배런 영지는 배런이 국왕에게서 직접 받은 영지다.

  10. 10. 옮긴이 — 징발은 국왕의 행차나 군대가 지날 때 말과 수레와 식료품을 시세보다 낮은 값으로 내놓게 하던 권한이고, 조달관은 그 값을 매기고 걷는 관리였다. 잉글랜드에서는 1660년에 없어졌다.

  11. 11. 옮긴이 — 탈라주는 영주나 국왕이 차지인에게 마음대로 물리던 옛 세금이고, 타유는 그것에서 자란 프랑스의 직접세다. 신분에 따라 면제가 있어 귀족과 성직자는 물지 않았고 1789년까지 이어졌다.

  12. 12. 옮긴이 — 매점자는 곡물을 사 모아 두었다가 되파는 사람, 되팔이는 같은 장에서 산 것을 그 자리에서 다시 파는 사람, 선매자는 물건이 장에 나오기 전에 길에서 미리 사들이는 사람이다. 중세 잉글랜드는 이 셋을 모두 법으로 벌하였다.

  13. 13. 옮긴이 — 통행세는 장원을 지날 때, 교량세는 다리를 건널 때, 하물세는 물건을 옮길 때, 좌판세는 장에 가게나 좌판을 세울 때 물던 세금이다.

  14. 14. 옮긴이 — 여기서 청부는 세금이나 지대를 걷을 권리를 일정한 액수를 받는 조건으로 남에게 넘기는 것을 말한다. 원문의 farm 은 농장을 뜻하는 낱말과 같고 청부받은 사람을 farmer 라 불렀으므로, 이 대목의 「청부인」은 농부가 아니다.

  15. 15. 옮긴이 — 원문의 corporation 은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동업조합, 곧 길드를 뜻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도시가 하나의 단체로 세워져 제 행정관과 참사회와 조례를 가지게 된 것을 말하므로 갈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