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경멸과 미움을 피하는 일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이야기했으니, 나머지는 하나의 일반 원칙 아래 간단히 다루겠다. 그 원칙이란, 앞에서도 일부 말했듯이, 군주는 자신을 미움받게 하거나 경멸받게 하는 일을 피할 궁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피한다면 군주는 제 몫을 다한 셈이고, 다른 오명을 쓰더라도 아무런 위험을 겪지 않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군주가 미움을 사는 까닭은 무엇보다 탐욕스럽게 신민의 재산과 여자를 빼앗는 데 있다. 그러니 이런 짓은 삼가야 한다. 대다수 사람은 재산도 명예도 빼앗기지 않는 한 만족하며 살아가므로, 군주는 소수의 야심과 씨름하기만 하면 되고, 그런 야심은 여러 수단으로 손쉽게 누를 수 있다. 군주가 경멸을 사는 것은 변덕스럽고 경박하고 유약하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들을 때다. 군주는 이것을 암초처럼 피해야 한다. 그리고 제 행동에서 위대함과 기개, 진중함과 굳셈이 드러나도록 애써야 하며, 신민들 사이의 사사로운 일에서는 자기가 내린 판결을 아무도 뒤집을 수 없게 해야 한다. 또 누구도 자신을 속이거나 농락할 생각을 품지 못할 만큼 그런 평판을 굳게 지켜야 한다.
사람들에게 이런 평판을 심어 주는 군주는 명성이 높다. 그리고 명성 높은 자를 상대로는 음모를 꾸미기도 어렵고 공격하기도 어렵다. 다만 그가 뛰어난 인물이고 자기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어야 한다. 군주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안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신민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외국 세력 때문이다. 밖의 위협은 좋은 군대와 좋은 우방으로 막는다. 좋은 군대가 있으면 좋은 우방은 언제나 따라온다. 그리고 밖이 안정되어 있으면 안도 언제나 안정되어 있다. 음모가 안을 어지럽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설령 밖이 흔들리더라도, 군주가 내가 말한 대로 나라를 정비하고 그렇게 살아왔다면, 스스로 주저앉지만 않는 한 어떤 공세든 버텨 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스파르타의 나비스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신민에 관해서는, 밖에서 아무 움직임이 없을 때에도 그들이 몰래 음모를 꾸미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군주가 이 위험에서 확실히 벗어나려면 미움이나 경멸을 피하고 인민이 자신에게 만족하게 하면 된다. 앞에서 길게 말했듯이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다. 음모에 맞서 군주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처방 가운데 하나는 대중에게 미움받지 않는 것이다. 음모를 꾸미는 자는 언제나 군주를 죽이면 인민이 기뻐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민의 노여움을 사리라고 생각하면, 음모자는 그런 일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음모자 쪽에 놓인 어려움은 끝이 없으니까. 경험이 보여 주듯 음모는 많았으나 성공한 것은 드물었다. 음모자는 혼자 일을 꾸밀 수 없고, 불만을 품었다고 믿는 자 말고는 한패로 끌어들일 수도 없다. 그런데 불만을 품은 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순간, 음모자는 그에게 불만을 풀 거리를 쥐여 주는 셈이 된다. 그자로서는 이 비밀을 군주에게 알리기만 하면 온갖 이득을 바랄 수 있음이 뻔하다. 한쪽에서는 이득이 확실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득이 불확실한 데다 위험투성이로 보이니, 그가 음모자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킨다면 그는 보기 드문 친구이거나 군주에게 뼛속 깊이 원한을 품은 원수일 수밖에 없다. 간단히 줄여 말하겠다. 음모자 쪽에는 그를 겁먹게 하는 두려움과 의심, 처벌받으리라는 불안밖에 없다. 반면 군주 쪽에는 군주 자리의 위엄과 법률, 우방과 국가의 방비가 있어 그를 지켜 준다. 그러니 여기에 인민의 호의까지 더해지면 음모를 꾸밀 만큼 무모한 자가 나오기란 불가능하다. 보통 음모자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만 두려워하면 되지만, 이 경우에는 거사를 치른 뒤에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인민이 적이 되어 어디에서도 피난처를 바랄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예를 끝없이 들 수 있지만, 우리 아버지 세대에 일어난 일 하나로 만족하겠다. 지금 살아 있는 안니발레의 할아버지이자 볼로냐의 군주였던 안니발레 벤티볼리오1가 그를 노린 칸네스키 가문의 음모로 살해되었을 때, 그의 혈육이라고는 아직 강보에 싸인 조반니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살인이 벌어지자마자 인민이 들고일어나 칸네스키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는 그 무렵 벤티볼리오 가문이 누리던 인민의 호의에서 나온 일이다. 그 호의가 얼마나 컸던지, 안니발레가 죽은 뒤 볼로냐에는 나라를 맡을 만한 가문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피렌체에 그때까지 대장장이의 아들로 알려져 있던 벤티볼리오 가문의 핏줄이 하나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볼로냐 사람들은 피렌체까지 그를 찾아가 도시의 통치를 맡겼다.2 그는 조반니가 다스릴 만한 나이가 될 때까지 그 도시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결론을 말하자면, 인민이 호의를 품고 있는 한 군주는 음모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민이 적대하고 미워한다면 모든 일, 모든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잘 짜인 국가와 지혜로운 군주는 귀족을 절망으로 몰지 않으면서 인민을 만족시키고 흡족하게 해 두는 데 온 정성을 기울여 왔다. 이것이야말로 군주가 다룰 가장 중요한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잘 짜이고 잘 다스려지는 왕국으로는 프랑스가 있다. 그곳에는 좋은 제도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왕의 자유와 안전이 거기에 달려 있다. 그 가운데 으뜸은 고등법원(parlamento)과 그 권위다.3 까닭은 이렇다. 그 왕국의 제도를 세운 사람은 세력가들의 야심과 오만을 알았고,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중이 귀족을 두려워한 나머지 미워한다는 것도 알았고, 대중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왕이 직접 떠맡게 하지 않았다. 인민 편을 들면 귀족에게, 귀족 편을 들면 인민에게 원망을 살 수 있으니, 왕에게서 그 짐을 덜어 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제삼의 심판자를 세워, 왕이 원망을 사지 않고도 귀족을 누르고 힘없는 이들을 돕게 했다. 이보다 더 훌륭하고 더 현명한 제도는 있을 수 없었고, 왕과 왕국의 안전에 이보다 크게 이바지하는 것도 없다. 여기서 새겨 둘 교훈을 하나 더 끌어낼 수 있다. 군주는 원망을 살 일은 남에게 맡기고, 은혜를 베풀 일은 몸소 해야 한다. 다시 결론을 말하자면, 군주는 귀족을 존중해야 하지만 인민에게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
로마 황제 몇몇의 삶과 죽음을 살펴본 많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내 견해와 어긋나는 사례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줄곧 훌륭하게 살며 정신의 큰 역량을 보여 주었는데도 제국을 잃거나, 자기 사람들이 꾸민 음모로 죽임을 당한 황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반론에 답하고자 몇몇 황제의 자질을 논하면서, 그들이 몰락한 원인이 내가 앞에서 제시한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이겠다. 아울러 그 시대의 행적을 읽는 사람이 눈여겨볼 만한 점들도 함께 짚어 보겠다. 철학자 마르쿠스부터 막시미누스까지 제위를 이은 황제들을 모두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마르쿠스, 그의 아들 콤모두스, 페르티낙스, 율리아누스, 세베루스, 그의 아들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마크리누스,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막시미누스가 그들이다.4 먼저 짚어 둘 것이 있다. 다른 군주국에서는 귀족의 야심과 인민의 오만만 상대하면 되었지만, 로마 황제들에게는 세 번째 어려움이 있었다. 병사들의 잔인함과 탐욕까지 견뎌야 했다.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어서 많은 황제가 그 때문에 몰락했다. 병사와 인민을 함께 만족시키기란 어려웠다. 인민은 평온을 사랑해서 온건한 군주를 좋아했고, 병사들은 무인 기질에 오만하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군주를 좋아했으니까. 병사들은 군주가 그런 기질을 인민에게 휘둘러 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봉급을 두 배로 받고 자기들의 탐욕과 잔인함을 마음껏 풀 수 있었다. 그 결과, 타고난 성품으로든 수완으로든 양쪽을 다 휘어잡을 만큼 큰 명성을 얻지 못한 황제들은 언제나 몰락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황제, 특히 신흥 인물로서 군주 자리에 오른 이들은 서로 다른 이 두 기질을 함께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병사들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돌아섰으며, 인민을 해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선택은 어쩔 수 없었다. 군주는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일을 피할 수 없으므로, 먼저 대다수에게 미움받지 않도록 힘써야 하고, 그럴 수 없을 때는 가장 힘센 집단의 미움만큼은 온갖 수를 다해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 제위에 올라 남다른 지지가 필요했던 황제들은 인민보다 병사들 편에 섰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로웠는지 아닌지는 그 군주가 병사들 사이에서 명성을 지킬 줄 알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앞에서 말한 이런 까닭으로, 마르쿠스와 페르티낙스와 알렉산데르는 모두 절제하며 살았고 정의를 사랑하고 잔인함을 미워했으며 인정 많고 온화했는데도, 마르쿠스를 빼고는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마르쿠스만이 더없이 존경받으며 살다가 죽었다. 그는 세습의 권리로 제위를 이었으므로 병사에게도 인민에게도 제위를 빚질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그를 우러르게 만드는 여러 미덕을 갖추었기에, 살아 있는 동안 병사와 인민 두 계층을 늘 제 분수 안에 묶어 두었고, 한 번도 미움이나 경멸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페르티낙스는 병사들의 뜻을 거슬러 황제가 되었다. 콤모두스 밑에서 방종하게 사는 데 익숙해진 병사들은 페르티낙스가 그들에게 지우려던 반듯한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페르티낙스는 미움을 샀고, 늙었다는 이유로 경멸까지 더해져,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몰락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미움은 악행 못지않게 선행으로도 산다는 점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했듯이, 권력을 지키려는 군주는 선하지 않게 행동하도록 내몰릴 때가 많다. 인민이든 병사든 귀족이든, 군주가 자리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한 집단이 썩어 있다면, 군주는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그 기질을 따를 수밖에 없고, 그럴 때 선행은 오히려 군주의 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알렉산데르로 가 보자. 그는 몹시 선량한 사람이어서, 그에게 돌아가는 여러 찬사 가운데에는 제위에 있던 열네 해 동안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인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유약하고 어머니에게 휘둘리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어 경멸을 샀고, 결국 군대가 음모를 꾸며 그를 죽였다.
이번에는 반대로 콤모두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막시미누스의 자질을 따져 보면, 이들이 더없이 잔인하고 탐욕스러웠음을 알게 된다. 이들은 병사들을 만족시키려고 인민에게 저지를 수 있는 온갖 해악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세베루스를 빼고는 모두 비참하게 끝났다. 세베루스는 역량이 워낙 커서, 인민을 무겁게 짓누르면서도 병사들을 제 편으로 붙잡아 둔 덕에 끝까지 순탄하게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역량은 병사와 인민의 눈에 너무도 놀라워 보여서, 인민은 말하자면 넋을 잃고 얼이 빠졌고, 병사들은 그를 우러르며 흡족해했다. 그의 행적은 신생 군주로서는 위대한 것이었으므로, 그가 여우와 사자의 탈을 얼마나 잘 쓸 줄 알았는지 간단히 보여 주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군주는 이 두 짐승의 본성을 본받아야 한다. 세베루스는 율리아누스 황제가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자신이 지휘관으로 있던 슬라보니아5의 군대에게 로마로 가서 근위대 병사들 손에 죽은 페르티낙스의 원수를 갚는 것이 옳다고 설득했다. 그는 이것을 구실 삼아, 제위를 노리는 기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은 채 로마를 향해 군대를 움직였고, 그가 출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기도 전에 이탈리아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로마에 이르자 원로원은 두려움에 떨며 그를 황제로 선출하고 율리아누스를 죽였다.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지만, 제국 전체의 주인이 되려는 세베루스 앞에는 아직 두 가지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아시아에서 그곳 군대를 거느리고 스스로 황제를 칭한 니게르였고, 다른 하나는 서방에 있으면서 그 역시 제위를 노리던 알비누스였다.6 두 사람 모두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그는 니게르는 치고 알비누스는 속이기로 했다. 그는 알비누스에게 편지를 보내, 원로원이 자신을 황제로 선출했으니 그 지위를 그와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는 카이사르의 칭호를 보내고, 원로원의 결의를 거쳐 그를 동료로 삼았다. 알비누스는 이 모든 것을 참말로 믿었다. 그러나 니게르를 무찔러 죽이고 동방을 평정한 세베루스는 로마로 돌아오자 원로원에서 알비누스를 성토했다. 알비누스가 제게 받은 은혜도 모르고 흉계를 꾸며 자기를 죽이려 했으니, 그 배은망덕을 벌하러 가야만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프랑스7로 알비누스를 찾아가 그의 권력과 목숨을 함께 빼앗았다.
그러니 그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그가 더없이 사나운 사자이자 더없이 교활한 여우였음을 알 것이다. 또 그가 모든 이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받으면서도 군대에게는 미움받지 않았음을 볼 것이고, 신흥 인물인 그가 그토록 큰 제국을 지킬 수 있었다는 데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엄청난 명성이, 약탈 때문에 인민이 그에게 품었을 법한 미움에서 그를 언제나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안토니누스도 아주 뛰어난 자질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 자질 덕에 인민의 눈에 경이로운 인물이었으며 병사들에게도 환영받았다. 그는 타고난 무인으로서 어떤 고생도 잘 견뎠고, 맛난 음식이든 그 밖의 어떤 안락함이든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모든 군대가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도 그의 포악함과 잔인함은 너무도 심하고 전례가 없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하나하나 죽인 끝에 로마 인민의 상당수와 알렉산드리아 인민 전부를 죽였고8, 그 때문에 온 세상의 미움을 샀다. 측근들마저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자기 군대 한가운데서 한 백인대장의 손에 죽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이처럼 굳게 마음먹은 한 사람이 작정하고 저지르는 살해는 군주로서도 피할 길이 없다. 제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든 군주를 해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아주 드물기 때문에 군주가 크게 두려워할 까닭은 없다. 군주는 다만 자기가 부리는 사람, 곧 곁에 두고 군주 자리를 받드는 일을 맡긴 사람에게 큰 모욕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면 된다. 안토니누스는 바로 그 짓을 저질렀다. 그는 그 백인대장의 형제를 욕보여 죽였고 백인대장 본인도 날마다 위협했으면서도, 그를 자기 경호원으로 곁에 두었다. 이는 무모하고 파멸을 부르는 처사였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파멸했다.
이제 콤모두스를 보자. 그는 마르쿠스의 아들로서 세습의 권리로 제위를 얻었으니 제국을 지키기가 아주 쉬웠다. 아버지의 발자취만 따라갔어도 병사와 인민을 모두 만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잔인하고 짐승 같은 심성을 지닌 그는 인민에게 마음껏 탐욕을 부리려고 군대의 비위를 맞추며 방종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체통을 지키지 않았다. 툭하면 경기장에 내려가 검투사들과 싸웠고, 그 밖에도 황제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천한 짓을 일삼다가 병사들 눈에 경멸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미움을, 다른 쪽에서는 경멸을 받은 그는 결국 음모에 걸려 죽었다.
남은 것은 막시미누스의 자질을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는 더없이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앞에서 말한 알렉산데르의 나약함에 진저리가 난 군대는 알렉산데르가 죽자 그를 황제로 뽑았다. 그러나 그는 제위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두 가지 일로 미움과 경멸을 샀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가 한때 트라키아에서 양을 쳤다는 비천한 내력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여서 누구나 그를 몹시 깔보았다. 다른 하나는 즉위하자마자 로마로 가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미루는 동안, 휘하의 장관들을 시켜 로마와 제국 곳곳에서 숱한 잔학 행위를 저질러 더없이 잔인한 자라는 평판을 얻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비천한 핏줄을 업신여기는 마음과 그의 포악함을 두려워하는 데서 나온 미움으로 온 세상이 들끓었다. 먼저 아프리카가 반란을 일으켰고9, 이어 원로원이 로마 인민 전체와 함께 들고일어났으며, 이탈리아 전체가 그에게 맞서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그의 군대마저 가세했다. 아퀼레이아를 포위하고도 함락하지 못해 애를 먹던 군대는 그의 잔인함에 진저리를 쳤고, 적이 그토록 많은 것을 보고는 그를 덜 두려워하게 되어 마침내 그를 죽였다.
엘라가발루스나 마크리누스, 율리아누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들은 철저히 경멸받았기에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보다는 이 논의의 결론으로 가겠다. 내 말은 이렇다. 우리 시대의 군주들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병사들을 각별히 만족시켜야 하는 이 어려움을 덜 겪는다. 병사들을 어느 정도 배려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 문제는 금방 풀린다. 오늘날의 군주들 가운데 누구도, 로마 제국의 군대처럼 여러 속주의 통치와 행정에 오래 뿌리박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 인민보다 병사들을 더 만족시켜야 했던 것은 병사들이 인민보다 힘이 셌기 때문이다. 지금은 튀르크 술탄과 이집트 술탄10을 빼면 모든 군주가 병사보다 인민을 더 만족시켜야 한다. 인민이 병사보다 힘이 세니까. 내가 튀르크 술탄을 예외로 두는 까닭은, 그가 늘 곁에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있고 왕국의 안전과 힘이 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통치자는 다른 모든 고려를 제쳐 두고 그들을 제 편으로 붙잡아 두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술탄의 왕국도 전부 병사들 손에 있으므로, 그 역시 인민은 아랑곳하지 말고 병사들을 제 편으로 붙잡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집트 술탄의 이 국가가 다른 모든 군주국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국가는 그리스도교의 교황 자리와 비슷해서, 세습 군주국이라고도 신생 군주국이라고도 부를 수 없다. 옛 군주의 아들들이 상속자가 되어 주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럴 권한을 지닌 자들이 그 지위에 뽑아 올린 사람이 주인이 된다. 또 이 제도는 오래된 것이어서 신생 군주국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신생 군주국이 겪는 어려움이 그곳에는 하나도 없다. 군주는 새사람이라도 그 국가의 제도는 오래되었고, 그를 마치 대대로 이어 온 주인처럼 맞아들이도록 짜여 있다.
그러나 우리 주제로 돌아가자.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위의 논의를 곰곰이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앞서 이름을 든 황제들을 몰락시킨 원인이 미움 아니면 경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렇게, 일부는 정반대로 처신했는데, 어느 쪽에서든 한 사람은 행복하게, 나머지는 불행하게 끝난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페르티낙스와 알렉산데르는 신생 군주였으므로, 세습의 권리로 군주 자리에 있던 마르쿠스를 본받으려 한 것이 쓸모없을 뿐 아니라 해로웠다. 마찬가지로 카라칼라와 콤모두스와 막시미누스에게는 세베루스를 본받으려 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따를 만큼 역량이 넉넉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므로 신생 군주국의 신생 군주는 마르쿠스의 행적을 본받을 수 없고, 그렇다고 세베루스의 행적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세베루스에게서는 자기 국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부분을 취하고, 마르쿠스에게서는 이미 자리 잡고 굳건해진 국가를 지키는 데 알맞고 영예로운 부분을 취해야 한다.
주
1.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 1445년 볼로냐의 경쟁 가문인 칸네스키(칸네톨리) 가문에게 살해되었다. "지금의 안니발레"는 그의 손자 안니발레 2세(1469~1540)다.
2. 산테 벤티볼리오(1463년 사망). 1446년 피렌체에서 볼로냐로 불려 와 죽을 때까지 도시를 다스렸고, 그 뒤를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1443~1508)가 이었다.
3. 프랑스의 최고 사법 기관인 파를망(parlement). 파리 고등법원이 으뜸이었다. 이름과 달리 의회가 아니라 법원이다.
4. 재위 연도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콤모두스(180~192), 페르티낙스(193), 디디우스 율리아누스(19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카라칼라(211~217), 마크리누스(217~218), 엘라가발루스(218~222), 알렉산데르 세베루스(222~235), 막시미누스 트락스(235~238). 마키아벨리는 주로 그리스 역사가 헤로디아노스의 기록을 따랐다. 본문은 마르쿠스가 "세습의 권리로" 제위를 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였다.
5. 로마 시대의 판노니아 지방(도나우강 중류). 세베루스는 193년 그곳 총독으로 있었다.
6.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시리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브리타니아 총독이었다. 니게르는 194년 싸움에 져 죽었다.
7. 로마 시대의 갈리아. 알비누스는 197년 루그두눔(지금의 리옹) 근처 싸움에서 져 죽었다.
8. 215년의 알렉산드리아 주민 학살. 카라칼라는 217년 메소포타미아 원정 중에 살해되었다.
9. 238년 아프리카 속주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가 황제로 추대되었고 원로원이 그를 인정했다. 막시미누스는 그해 아퀼레이아를 포위하던 중 자기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10.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술탄. 노예 출신 군인(맘루크) 집단이 술탄을 뽑았다. 이 왕조는 《군주론》 집필 뒤인 1517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