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잡종성
첫 교배의 불임성과 잡종의 불임성의 구분. 불임성은 정도가 여러 가지이고 보편적이지 않으며, 근친 교배에 영향을 받고, 사육으로 사라진다. 잡종의 불임성을 지배하는 법칙. 불임성은 특별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차이에 딸려 오는 것이다. 첫 교배와 잡종의 불임성의 원인. 생활 조건이 바뀌는 것의 효과와 교배의 효과 사이의 나란함. 변종을 교배했을 때의 가임성과 그 혼종 자손의 가임성은 보편적이지 않다. 가임성을 떼어 놓고 잡종과 혼종을 견줌. 요약.
박물학자들이 흔히 품는 견해는, 종이 서로 교배할 때 모든 생물 형태가 뒤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불임성이라는 성질을 특별히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인다. 같은 나라 안의 종들이 자유롭게 교배할 수 있었다면 뚜렷이 구분된 채로 남아 있기 어려웠을 터이기 때문이다. 잡종이 아주 일반적으로 불임이라는 사실의 중요함은, 내 생각에, 최근의 몇몇 저자에게서 크게 낮추어 평가되어 왔다. 자연선택 이론에서 이 사례는 특히 중요하다. 잡종의 불임성은 잡종 자신에게 아무런 이로움이 될 수 없으므로, 이로운 정도의 불임성이 잇따라 보존되는 것으로는 얻어질 수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불임성이 특별히 얻어지거나 부여된 성질이 아니라 다른 얻어진 차이에 딸려 오는 것임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주제를 다룰 때, 크게 보아 근본적으로 다른 두 부류의 사실이 흔히 한데 뒤섞여 왔다. 곧 두 종을 처음 교배했을 때의 불임성과, 거기서 나온 잡종의 불임성이다.
순수한 종은 물론 생식 기관이 완전한 상태에 있는데도 서로 교배하면 자손을 거의 낳지 못하거나 아예 낳지 못한다. 반면에 잡종은 생식 기관이 기능을 하지 못하는데, 이는 식물에서나 동물에서나 수컷 쪽 요소의 상태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기관 자체는 현미경이 드러내는 한에서는 구조가 완전한데도 그러하다. 앞의 경우에는 배(胚)를 이루러 가는 두 성 요소가 완전하다. 뒤의 경우에는 그것들이 아예 발달하지 않았거나 불완전하게 발달해 있다. 이 구분은 두 경우에 공통된 불임성의 원인을 따져야 할 때 중요하다. 이 구분은 아마도 대충 덮이고 넘어갔을 것이다. 두 경우의 불임성이 다 우리 추론 능력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특별히 주어진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변종, 곧 공통의 어버이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거나 그렇게 믿어지는 형태들을 서로 교배했을 때의 가임성과, 마찬가지로 그 혼종 자손의 가임성은 내 이론에서 종의 불임성과 똑같이 중요하다. 그것이 변종과 종 사이에 넓고 뚜렷한 구분을 짓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종을 교배했을 때의 불임성과 그 잡종 자손의 불임성을 보자. 이 주제에 거의 일생을 바친 저 성실하고 훌륭한 두 관찰자, 쾰로이터1와 게르트너2의 여러 논문과 저작을 읽고서 어느 정도의 불임성이 매우 일반적이라는 데 깊은 인상을 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쾰로이터는 이 규칙을 보편적인 것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매듭을 잘라 버린다. 대다수 저자가 별개의 종으로 보는 두 형태가 서로 아주 가임인 것을 찾아낸 열 가지 경우에,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변종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게르트너도 이 규칙을 똑같이 보편적인 것으로 삼으며, 쾰로이터가 든 열 가지 경우가 완전히 가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경우들과 다른 많은 경우에 게르트너는 어느 정도의 불임성이 있음을 보이려고 씨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세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언제나 두 종을 교배했을 때와 그 잡종 자손이 맺은 씨의 최대 수를, 두 순수한 어버이 종이 자연 상태에서 맺는 평균 수와 견준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오차의 원인이 끼어드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잡종으로 만들 식물은 수술을 떼어 내야 하고, 흔히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곤충이 다른 식물에서 꽃가루를 날라 오지 못하도록 따로 가두어 두어야 한다. 게르트너가 실험한 식물은 거의 다 화분에 심겨 있었고, 보아하니 그의 집 안의 방에 두어져 있었다. 이런 처리가 흔히 식물의 가임성을 해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게르트너가 제 표에 수술을 떼어 내고 제 꽃가루로 인공 수정을 한 식물의 사례를 스무 가지쯤 싣고 있는데, (손질이 어렵다고 인정되는 Leguminosæ3 같은 경우를 모두 빼면) 이 스무 가지 식물 가운데 절반이 가임성이 어느 정도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르트너는 여러 해에 걸쳐 프림로즈와 카우슬립4을 거듭 교배했는데, 이 둘은 변종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가 있는데도 가임인 씨를 얻는 데 한두 번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또 가장 뛰어난 식물학자들이 변종으로 자리매김하는 흔한 붉은 Anagallis와 파란 Anagallis(Anagallis arvensis와 coerulea)5가 서로 완전히 불임임을 그는 찾아냈다. 그리고 비슷한 다른 여러 경우에도 그는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다른 많은 종이 서로 교배했을 때 정말로 게르트너가 믿는 만큼 불임인지 우리가 의심해 보아도 좋으리라고 내게는 보인다.
한편으로 여러 종을 교배했을 때의 불임성이 정도가 하도 다르고 하도 알아챌 수 없이 등급을 지으며 옅어진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순수한 종의 가임성이 하도 쉽게 온갖 사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실제로 쓰이는 모든 목적에서 완전한 가임성이 어디서 끝나고 불임성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말하기가 몹시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껏 살았던 가장 경험 많은 두 관찰자, 곧 쾰로이터와 게르트너가 바로 같은 종을 두고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보다 더 나은 증거를 구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어떤 미심쩍은 형태를 종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변종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두고 우리의 가장 뛰어난 식물학자들이 내놓은 증거를, 서로 다른 잡종 연구자들이 또는 같은 저자가 서로 다른 해에 한 실험에서 끌어온 가임성의 증거와 견주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다만 여기서는 자세히 들어갈 지면이 없다. 그리하여 불임성도 가임성도 종과 변종 사이에 아무런 뚜렷한 구분을 주지 못한다는 것, 이 출처에서 나온 증거도 등급을 지으며 옅어지고 체질과 구조의 다른 차이에서 끌어온 증거와 똑같은 정도로 미심쩍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잇따른 세대에서 잡종의 불임성은 어떠한가. 게르트너는 어떤 잡종들을 두 순수한 어버이 어느 쪽과도 교배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지키면서 여섯 세대나 일곱 세대까지, 한 경우에는 열 세대까지 길러낼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그것들의 가임성이 결코 늘지 않았고 대개 크게 줄었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나는 대개 그러하다는 것과, 가임성이 첫 몇 세대에서 흔히 갑자기 줄어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모든 실험에서 가임성이 따로 있는 원인, 곧 근친 교배 때문에 줄었다고 믿는다. 나는 근친 교배가 가임성을 떨어뜨린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별개의 개체나 변종과 이따금 교배하는 것이 가임성을 높인다는 것을 보이는 사실을 하도 많이 모아 놓아서, 사육가들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이 믿음이 옳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실험하는 이들이 잡종을 많은 수로 길러내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어버이 종이나 가까운 다른 잡종이 대개 같은 정원에서 자라므로 꽃이 피는 철에는 곤충이 찾아오는 것을 조심스레 막아야 한다. 따라서 잡종은 대개 세대마다 제 개체의 꽃가루로 수정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잡종이라는 출신 때문에 이미 줄어든 그것들의 가임성을 해치리라고 확신한다. 이 확신은 게르트너가 거듭 내놓은 놀라운 진술로 더 굳어진다. 곧 덜 가임인 잡종이라 해도 같은 종류의 잡종 꽃가루로 인공 수정을 해 주면, 손질이 흔히 나쁜 영향을 미치는데도 그 가임성이 때때로 뚜렷이 늘고 또 계속 늘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 수정에서는 (내가 직접 겪어 아는 바로는) 꽃가루를 수정시킬 그 꽃 자체의 꽃밥에서 가져오는 만큼이나 자주 우연히 다른 꽃의 꽃밥에서 가져오게 된다. 그리하여 두 꽃 사이의 교배가, 아마도 같은 그루 위의 꽃이겠지만,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게다가 복잡한 실험이 진행될 때에는 게르트너만큼 조심스러운 관찰자라면 제 잡종의 수술을 떼어 냈을 터이고, 이는 세대마다 같은 그루의 다른 꽃이든 같은 잡종 성질을 지닌 다른 그루의 꽃이든 별개의 꽃에서 온 꽃가루와 교배되도록 보장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공 수정된 잡종의 잇따른 세대에서 가임성이 늘어난다는 이상한 사실은, 내 생각에, 근친 교배를 피한 덕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제 세 번째로 경험 많은 잡종 연구자, 곧 존경하는 W. 허버트6 목사가 이른 결과로 눈을 돌려 보자. 어떤 잡종은 완전히 가임이며 순수한 어버이 종만큼이나 가임이라는 그의 결론은, 별개의 종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불임성이 있다는 것이 자연의 보편 법칙이라는 쾰로이터와 게르트너의 결론만큼이나 단호하다. 그는 게르트너가 실험한 바로 그 종들 가운데 몇 가지를 실험했다. 그들의 결과가 갈린 것은, 내 생각에, 허버트의 뛰어난 원예 솜씨와 그가 온실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는 사정으로 얼마쯤 설명될 수 있다. 그의 많은 중요한 진술 가운데 여기서는 한 가지만 보기로 들겠다. 곧 "C. revolutum으로 수정한 Crinum capense의 꼬투리 안에 든 밑씨는 하나하나가 모두 한 그루의 식물이 되었는데, (그의 말로는) 이 식물이 자연 상태로 수정되는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결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별개의 두 종 사이의 첫 교배에서 완전한 가임성을, 아니 여느 때의 완전함을 넘어서는 가임성마저 보게 된다.
이 Crinum의 사례는 나를 매우 기묘한 사실로 이끈다. 곧 어떤 Lobelia 종들과 Hippeastrum속의 모든 종에서처럼, 제 꽃가루보다 다른 별개 종의 꽃가루로 훨씬 더 쉽게 수정되는 개체 식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식물들은 제 꽃가루로는 아주 불임인데도 별개 종의 꽃가루에는 씨를 맺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 꽃가루도 완전히 멀쩡하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그러한데, 그 꽃가루가 별개의 종을 수정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개체 식물과 어떤 종의 모든 개체는 실제로 제 꽃가루로 수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잡종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예컨대 Hippeastrum aulicum의 비늘줄기 하나가 꽃 네 송이를 냈다. 허버트는 그 가운데 셋을 제 꽃가루로 수정시켰고, 넷째는 그 뒤에 별개의 다른 세 종에서 내려온 겹잡종의 꽃가루로 수정시켰다. 그 결과는 이러했다. "먼저 수정한 세 송이의 씨방은 곧 자라기를 멈추었고 며칠 뒤 완전히 죽어 버린 반면, 잡종의 꽃가루로 수정된 꼬투리는 힘차게 자라 빠르게 익어 갔고 좋은 씨를 맺었으며 그 씨는 잘 싹텄다." 1839년에 내게 보낸 편지에서 허버트 씨는 그때까지 다섯 해 동안 이 실험을 해 보았다고 말했고, 그 뒤로도 여러 해 동안 계속해 보았는데 언제나 같은 결과였다. 이 결과는 Hippeastrum과 그 아속의 경우, 그리고 Lobelia, Passiflora, Verbascum 같은 다른 몇몇 속의 경우에도 다른 관찰자들이 확인했다. 이 실험의 식물들은 완전히 건강해 보였고 같은 꽃의 밑씨와 꽃가루가 둘 다 다른 종에 대해서는 완전히 멀쩡했는데도, 서로에 대한 작용에서는 기능이 불완전했으므로 우리는 그 식물들이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고 미루어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사실들은, 종을 교배했을 때의 가임성이 같은 종이 제 꽃가루로 수정되었을 때와 견주어 더 낮거나 더 높은 것이 때때로 얼마나 사소하고 알 수 없는 원인에 달려 있는지를 보여 준다.
원예가들의 실제 실험은 과학다운 정밀함을 갖추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얼마쯤 눈여겨볼 만하다. Pelargonium, Fuchsia, Calceolaria, Petunia, Rhododendron 따위의 종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교배되어 왔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럼에도 이 잡종 가운데 많은 것이 씨를 잘 맺는다. 예컨대 허버트는 전반적인 생김새가 가장 크게 다른 두 종인 Calceolaria integrifolia와 plantaginea에서 나온 잡종이 "칠레의 산에서 온 자연의 종인 양 완전하게 제 스스로를 번식시켰다"고 주장한다. 나는 Rhododendron의 복잡한 교배 가운데 몇 가지의 가임성 정도를 확인하느라 얼마쯤 애를 썼는데, 그 가운데 많은 것이 완전히 가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들었다. 예컨대 C. 노블7 씨는 Rhododendron Ponticum과 Catawbiense 사이의 잡종에서 접붙일 대목을 길러낸다고, 그리고 이 잡종은 "상상할 수 있는 만큼 잘 씨를 맺는다"고 내게 알려 왔다. 게르트너가 그러하다고 믿는 대로, 잡종이 공정하게 다루어졌을 때 잇따른 세대마다 가임성이 계속 줄었다면 그 사실은 묘목업자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원예가들은 같은 잡종을 큰 모판으로 길러내는데, 그런 것만이 공정하게 다루어진 것이다. 곤충의 손을 빌려 같은 잡종 변종의 여러 개체가 서로 자유롭게 교배하도록 허락되고, 그리하여 근친 교배의 해로운 영향이 막히기 때문이다. 누구든 꽃가루를 내지 않는 더 불임인 종류의 잡종 Rhododendron의 꽃을 살펴보면 곤충의 손이 얼마나 잘 듣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암술머리에서 다른 꽃에서 날라 온 꽃가루를 잔뜩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에서는 식물에서보다 훨씬 적은 수의 실험만이 조심스럽게 시도되었다. 우리의 분류 체계를 믿을 수 있다면, 곧 동물의 속들이 식물의 속들만큼이나 서로 구분된다면, 우리는 자연의 사다리에서 더 멀리 떨어진 동물이 식물의 경우보다 더 쉽게 교배될 수 있다고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잡종 자체는, 내 생각에, 더 불임이다. 완전히 가임인 잡종 동물의 사례로서 충분히 잘 입증되었다고 볼 만한 것이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가두어 기를 때 자유롭게 번식하는 동물이 적은 탓에 공정하게 시도된 실험이 적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카나리아는 되샛과의 다른 아홉 종과 교배되었으나, 이 아홉 종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갇힌 상태에서 자유롭게 번식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것들과 카나리아 사이의 첫 교배나 그 잡종이 완전히 가임이리라고 기대할 권리가 없다. 또한 더 가임인 잡종 동물의 잇따른 세대에서 가임성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근친 교배의 나쁜 영향을 피하려고 같은 잡종의 두 집안을 서로 다른 어버이에게서 동시에 길러낸 보기를 나는 거의 알지 못한다. 오히려 사육가라면 누구나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훈계와 반대로, 잇따른 세대마다 대개 남매끼리 교배되어 왔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잡종이 본디 지닌 불임성이 계속 늘어 간 것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우리가 이렇게 하여, 어떤 까닭으로든 불임으로 기우는 경향을 조금이라도 지닌 순수한 동물에게 남매를 짝지어 준다면, 그 품종은 틀림없이 아주 몇 세대 안에 사라질 것이다.
완전히 가임인 잡종 동물의 충분히 잘 입증된 사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Cervulus vaginalis와 Reevesii에서 나온 잡종, 그리고 Phasianus colchicus와 P. torquatus, P. versicolor 사이에서 나온 것이 완전히 가임이라고 믿을 만한 얼마쯤의 이유는 있다. 흔한 거위와 중국 거위(A. cygnoides)는 서로 하도 달라 대개 별개의 속으로 자리매김되는 종인데, 그 사이에서 나온 잡종은 이 나라에서 두 순수한 어버이 어느 쪽과도 자주 새끼를 쳤고, 딱 한 사례에서는 저희끼리 새끼를 쳤다. 이는 에이턴8 씨가 이루어낸 것인데, 그는 같은 어버이에게서 나왔으나 부화한 때가 다른 잡종 두 마리를 길러냈다. 그리고 이 두 마리 새에게서 한 둥지에 무려 여덟 마리의 잡종(순수한 거위의 손자)을 길러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이 교배된 거위가 훨씬 더 가임임이 틀림없다. 판단 능력이 뛰어난 두 사람, 곧 블라이스 씨와 허턴 대위9에게서 나는 이 교배된 거위의 무리가 통째로 그 나라 여러 곳에서 길러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두 순수한 어버이 종이 어느 쪽도 없는 곳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길러지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매우 가임일 것이다.
팔라스10에게서 비롯된 학설이 현대의 박물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곧 우리 사육 동물 대부분이 둘 이상의 본디 종에서 내려왔으며 그 뒤로 서로 교배하여 뒤섞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대로라면 본디 종들이 처음부터 아주 가임인 잡종을 낳았거나, 아니면 그 잡종이 사육 아래 뒤이은 세대에서 아주 가임이 되었어야 한다. 뒤쪽 갈래가 내게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며, 직접적인 증거에 기대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것이 참이라고 믿는 쪽으로 기운다. 예컨대 나는 우리 개가 여러 야생 혈통에서 내려왔다고 믿는다. 그런데도 남아메리카의 어떤 토박이 집개를 아마 빼고는 모두가 서로 아주 가임이다. 그리고 유추는 나로 하여금 그 여러 본디 종이 처음부터 자유롭게 서로 새끼를 치고 아주 가임인 잡종을 낳았을지를 크게 의심하게 만든다. 또한 우리 유럽 소와 혹이 있는 인도 소가 서로 아주 가임이라고 믿을 이유가 있다. 그러나 블라이스 씨가 내게 전해 준 사실로 보아 나는 그 둘을 별개의 종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육 동물 가운데 많은 것의 기원을 이렇게 보면, 우리는 별개의 동물 종을 교배했을 때 거의 보편적으로 불임이라는 믿음을 버리든가, 아니면 불임성을 지울 수 없는 특징이 아니라 사육으로 없앨 수 있는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
끝으로, 식물과 동물이 서로 교배하는 일에 관해 확인된 모든 사실을 보면, 첫 교배에서나 잡종에서나 어느 정도의 불임성이 지극히 일반적인 결과라는 것, 그러나 우리의 지금 지식 상태에서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보편적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결론지을 수 있다.
첫 교배와 잡종의 불임성을 지배하는 법칙에 대하여. 이제 첫 교배와 잡종의 불임성을 지배하는 사정과 규칙을 조금 더 자세히 따져 보자. 우리의 주된 목적은 그 규칙들이, 종이 서로 교배하여 온통 뒤섞이는 것을 막으려고 이 성질을 특별히 부여받았음을 가리키는지 아닌지를 보는 데 있다. 다음의 규칙과 결론은 주로 식물을 잡종으로 만드는 일에 관한 게르트너의 훌륭한 저작에서 뽑아 온 것이다. 나는 그 규칙이 동물에 얼마나 들어맞는지 확인하느라 많은 애를 썼는데, 잡종 동물에 관한 우리 지식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생각하면, 같은 규칙이 두 계에 얼마나 두루 들어맞는지를 알고 놀랐다.
첫 교배에서나 잡종에서나 가임성의 정도가 0에서 완전한 가임성까지 등급을 이룬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 등급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기묘한 길로 보일 수 있는지는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실의 가장 앙상한 윤곽만 그릴 수 있다. 한 과에 속하는 식물의 꽃가루를 별개의 과에 속하는 식물의 암술머리에 얹으면, 그것은 같은 양의 무기물 먼지보다 나을 것 없는 영향밖에 미치지 못한다. 이 절대의 가임성 0에서부터, 같은 속의 여러 종의 꽃가루를 어느 한 종의 암술머리에 묻히면 맺히는 씨의 수에서 완벽한 등급이 나타나 거의 완전하거나 아주 완전한 가임성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어떤 이상한 경우에는 그 식물 제 꽃가루가 낼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지나친 가임성에까지 이른다. 잡종 자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두 순수한 어버이 어느 쪽의 꽃가루로도 가임인 씨를 하나도 맺은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맺지 못할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몇몇에서는 가임성의 첫 자취를 알아낼 수 있는데, 순수한 어버이 종 가운데 한쪽의 꽃가루가 잡종의 꽃을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 일찍 시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꽃이 일찍 시드는 것은 수정이 시작되었다는 표시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극단의 불임성에서부터, 제 꽃가루로 수정된 잡종이 점점 더 많은 수의 씨를 맺어 완전한 가임성에까지 이르는 것을 우리는 본다.
교배하기가 매우 어렵고 자손을 좀처럼 내지 않는 두 종에서 나온 잡종은 대체로 매우 불임이다. 그러나 첫 교배를 시키는 어려움과 그리하여 나온 잡종의 불임성 사이의 나란함은 (이 두 부류의 사실은 흔히 한데 뒤섞인다) 결코 엄격하지 않다. 두 순수한 종이 유별나게 수월하게 맺어져 잡종 자손을 많이 내는데도 그 잡종이 눈에 띄게 불임인 경우가 많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드물게만 또는 극도로 어렵게만 교배되는 종이 있는데, 그 잡종은 마침내 태어나고 나면 매우 가임이다. 같은 속 안에서도, 예컨대 Dianthus에서 이 두 반대되는 경우가 함께 일어난다.
첫 교배에서나 잡종에서나 가임성은 순수한 종의 가임성보다 더 쉽게 불리한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가임성의 정도는 마찬가지로 타고난 채로 변하기도 한다. 같은 두 종을 같은 사정 아래 교배해도 언제나 같지는 않고, 어쩌다 실험에 뽑힌 개체들의 체질에 얼마쯤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잡종도 그러하다. 같은 삭과에서 나온 씨로 길러내 똑같은 조건에 놓은 여러 개체에서도 가임성의 정도가 크게 다른 일이 흔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분류상의 근연성이라는 말은 종들 사이의 구조와 체질의 닮음을 뜻하며, 특히 생리적으로 중요함이 크고 가까운 종들 사이에서 거의 다르지 않은 부분의 구조가 닮은 것을 뜻한다. 그런데 종들 사이의 첫 교배의 가임성과 거기서 나온 잡종의 가임성은 그 분류상의 근연성에 크게 지배된다. 이는 분류학자들이 별개의 과로 자리매김한 종들 사이에서는 잡종이 한 번도 길러진 적이 없다는 것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가까운 종들이 대체로 수월하게 맺어진다는 것으로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분류상의 근연성과 교배의 수월함 사이의 대응은 결코 엄격하지 않다. 아주 가까운 종인데도 맺어지지 않거나 극도로 어렵게만 맺어지는 경우,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동떨어진 종인데도 더없이 수월하게 맺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들 수 있다. 같은 과 안에 Dianthus처럼 매우 많은 종이 아주 쉽게 교배되는 속이 있는가 하면, Silene처럼 극도로 가까운 종들 사이에서도 더없이 끈질긴 애씀이 잡종 하나 내지 못한 속도 있다. 같은 속 안에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차이를 만난다. 예컨대 Nicotiana의 많은 종은 다른 거의 어떤 속의 종보다도 폭넓게 교배되어 왔는데, 게르트너는 특별히 동떨어진 종도 아닌 N. acuminata가 무려 여덟 가지의 다른 Nicotiana 종을 수정시키거나 그것들에게 수정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는 것을 찾아냈다. 비슷한 사실을 아주 많이 들 수 있다.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형질에서 어떤 종류의, 또 얼마만 한 양의 차이가 있어야 두 종이 교배하지 못하게 되는지는 아무도 짚어 내지 못했다. 생김새와 전반적인 모습이 더없이 다르고 꽃의 모든 부분에서, 심지어 꽃가루와 열매와 떡잎에서까지 뚜렷한 차이를 지닌 식물들이 교배될 수 있음을 보일 수 있다. 한해살이 식물과 여러해살이 식물, 잎 지는 나무와 늘푸른나무, 서로 다른 자리에 살며 극도로 다른 기후에 맞추어진 식물이 흔히 쉽게 교배될 수 있다.
두 종 사이의 상호 교배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것은, 예컨대 수말을 먼저 암나귀와 교배시키고 다음에 수나귀를 암말과 교배시키는 경우다. 그러면 이 두 종은 서로 엇바꾸어 교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상호 교배를 시키는 수월함에는 흔히 더없이 큰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두 종이 교배할 수 있는 능력이 흔히 그 분류상의 근연성이나 짜임새 전체에서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차이와도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경우는 교배 능력이, 우리가 알아챌 수 없고 생식 계통에만 국한된 체질의 차이와 이어져 있음을 뚜렷이 보여 준다. 같은 두 종 사이의 상호 교배에서 결과가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은 오래전에 쾰로이터가 관찰했다. 한 가지 보기를 들면, Mirabilis jalappa는 M. longiflora의 꽃가루로 쉽게 수정될 수 있고 그리하여 나온 잡종은 넉넉히 가임이다. 그러나 쾰로이터는 여덟 해에 걸쳐 이백 번이 넘게 M. longiflora를 M. jalappa의 꽃가루로 서로 엇바꾸어 수정시키려 했으나 완전히 실패했다. 이만큼 두드러진 다른 경우도 여럿 들 수 있다. 튀레11는 어떤 바닷말, 곧 Fuci에서 같은 사실을 관찰했다. 게다가 게르트너는 상호 교배를 시키는 수월함의 이런 차이가 정도는 덜하더라도 지극히 흔하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는 많은 식물학자가 변종으로만 자리매김하는 Matthiola annua와 glabra처럼 아주 가까운 형태들 사이에서도 그것을 관찰했다. 또 눈에 띄는 사실은, 상호 교배에서 길러낸 잡종은 물론 바로 같은 두 종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한쪽 종이 먼저 아비로 쓰인 다음 어미로 쓰였을 뿐인데도, 대체로 가임성이 조금씩, 이따금은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게르트너에게서 기묘한 규칙을 여럿 더 가져올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종은 다른 종과 교배하는 힘이 눈에 띄게 세다. 같은 속의 다른 종은 제 모습을 잡종 자손에게 새겨 넣는 힘이 눈에 띄게 세다. 그러나 이 두 힘이 반드시 함께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잡종은 보통처럼 두 어버이 사이의 중간 형질을 지니는 대신 언제나 한쪽을 바싹 닮는다. 그리고 그런 잡종은 순수한 어버이 종 한쪽과 겉으로 그토록 닮았는데도 드문 예외를 빼면 극도로 불임이다. 또한 보통은 어버이 사이의 중간 구조를 지니는 잡종 가운데 이따금 예외적이고 이상한 개체가 태어나 순수한 어버이 한쪽을 바싹 닮는 일이 있다. 그리고 이런 잡종은 같은 삭과에서 나온 씨로 길러낸 다른 잡종이 꽤 높은 정도의 가임성을 지닐 때조차 거의 언제나 완전히 불임이다. 이 사실들은 잡종의 가임성이, 두 순수한 어버이 어느 쪽과 겉으로 닮았는가와 얼마나 완전히 무관한지를 보여 준다.
이제까지 든 여러 규칙, 곧 첫 교배와 잡종의 가임성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헤아려 보면 우리는 다음을 알게 된다. 훌륭하고 별개인 종으로 보아야 하는 형태들이 맺어질 때 그 가임성은 0에서 완전한 가임성까지, 나아가 어떤 조건에서는 지나친 가임성에까지 등급을 이룬다. 그 가임성은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에 몹시 민감할 뿐 아니라 타고난 채로 변하기도 한다. 그것은 첫 교배에서와 그 교배에서 나온 잡종에서 결코 언제나 같은 정도가 아니다. 잡종의 가임성은 그것이 어느 한쪽 어버이와 겉모습에서 닮은 정도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끝으로, 어떤 두 종 사이에 첫 교배를 시키는 수월함이 언제나 그 분류상의 근연성이나 서로 닮은 정도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마지막 진술은 같은 두 종 사이의 상호 교배로 뚜렷이 증명된다. 한쪽 종과 다른 쪽 종 가운데 어느 것을 아비로 쓰고 어느 것을 어미로 쓰는가에 따라, 맺어짐을 이루는 수월함에 대체로 얼마쯤 차이가, 이따금은 더없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호 교배에서 나온 잡종은 흔히 가임성이 다르다.
그런데 이 복잡하고 기묘한 규칙들은, 종이 자연에서 서로 뒤섞이는 것을 막으려고 오로지 그 목적으로 불임성을 부여받았음을 가리키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러 종을 교배할 때 불임성의 정도가 어째서 그토록 극도로 달라야 하는가? 우리는 그 종들이 모두 뒤섞이지 않게 지켜지는 것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정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어째서 불임성의 정도가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타고난 채로 달라야 하는가? 어째서 어떤 종은 수월하게 교배되면서도 매우 불임인 잡종을 내고, 다른 종은 극도로 어렵게 교배되면서도 꽤 가임인 잡종을 내야 하는가? 어째서 같은 두 종 사이의 상호 교배의 결과에 그토록 큰 차이가 흔히 있어야 하는가? 나아가 어째서 잡종이 생기는 것이 허락되었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종에게 잡종을 낳는 특별한 힘을 주어 놓고서, 그다음에 그 어버이들의 첫 맺어짐의 수월함과 엄격하게 관계되지도 않는 여러 정도의 불임성으로 그 이상의 번식을 막는다는 것은 이상한 배치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앞서 든 규칙과 사실은, 첫 교배의 불임성과 잡종의 불임성이 다만 교배되는 종의 알려지지 않은 차이, 주로 생식 계통의 차이에 딸려 오거나 거기에 달려 있음을 뚜렷이 가리키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그 차이가 하도 독특하고 한정된 성질의 것이어서, 두 종 사이의 상호 교배에서 한쪽의 수컷 쪽 성 요소가 흔히 다른 쪽의 암컷 쪽 성 요소에 자유롭게 작용하면서도 그 반대 방향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불임성이 특별히 부여된 성질이 아니라 다른 차이에 딸려 오는 것이라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보기를 들어 조금 더 넉넉히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한 식물이 다른 식물에 접붙여지거나 눈접이 될 수 있는 능력은 자연 상태에서 그 식물이 잘 사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으므로, 아무도 이 능력이 특별히 부여된 성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두 식물의 성장 법칙의 차이에 딸려 오는 것이라고 인정하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붙지 않는 까닭을 우리는 때때로 자라는 속도의 차이, 목질의 단단함의 차이, 수액이 흐르는 시기나 성질의 차이 따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경우에 우리는 아무런 까닭도 대지 못한다. 두 식물의 크기가 크게 다른 것, 한쪽은 나무이고 다른 쪽은 풀인 것, 한쪽은 늘푸른나무이고 다른 쪽은 잎 지는 나무인 것, 그리고 크게 다른 기후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언제나 둘이 서로 접붙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잡종을 만드는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접붙이기에서도 그 능력은 분류상의 근연성에 매인다. 아주 별개인 과에 속하는 나무를 서로 접붙이는 데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까운 종과 같은 종의 변종은 대개,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쉽게 접붙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능력도 잡종을 만드는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코 분류상의 근연성에 절대적으로 지배되지 않는다. 같은 과 안의 별개인 속들이 서로 접붙여진 일이 많은데도, 다른 경우에는 같은 속의 종들이 서로 붙지 않는다. 배나무는 같은 속에 드는 사과나무보다 별개의 속으로 자리매김되는 마르멜로12에 훨씬 더 쉽게 접붙여질 수 있다. 배나무의 여러 변종조차 마르멜로에 서로 다른 정도의 수월함으로 붙는다.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의 여러 변종도 자두나무의 어떤 변종에 그러하다.
게르트너가 같은 두 종의 서로 다른 개체 사이에 교배에서 타고난 차이가 때때로 있음을 찾아냈듯이, 사주레13는 같은 두 종의 서로 다른 개체가 서로 접붙여지는 일에서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상호 교배에서 맺어짐을 이루는 수월함이 흔히 결코 같지 않듯, 접붙이기에서도 때때로 그러하다. 예컨대 흔한 구스베리는 커런트에 접붙일 수 없는데, 커런트는 어렵기는 해도 구스베리에 붙는다.
생식 기관이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잡종의 불임성이, 생식 기관이 완전한 두 순수한 종을 맺게 하는 어려움과는 아주 다른 경우임을 우리는 보았다. 그런데도 이 별개인 두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 나란히 간다. 접붙이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투앵14은 제 뿌리로는 씨를 잘 맺고 다른 종에 그리 어렵지 않게 접붙일 수 있는 Robinia 세 종이 그렇게 접붙여지고 나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Sorbus의 어떤 종은 다른 종에 접붙여졌을 때 제 뿌리로 있을 때보다 두 배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이 뒤의 사실은, 제 꽃가루로 수정될 때보다 별개 종의 꽃가루로 수정될 때 훨씬 더 잘 씨를 맺은 Hippeastrum과 Lobelia 따위의 별난 경우를 우리에게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접붙인 대목이 그저 들러붙는 것과 생식이라는 행위에서 수컷 쪽 요소와 암컷 쪽 요소가 맺어지는 것 사이에 뚜렷하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도, 접붙이기의 결과와 별개의 종을 교배하는 것의 결과 사이에 거친 정도의 나란함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나무들이 서로 접붙여지는 수월함을 지배하는 기묘하고 복잡한 법칙을 우리가 그 영양 계통의 알려지지 않은 차이에 딸려 오는 것으로 보아야 하듯, 첫 교배의 수월함을 지배하는 한층 더 복잡한 법칙도 주로 생식 계통의 알려지지 않은 차이에 딸려 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차이는 두 경우 모두 어느 정도까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분류상의 근연성을 따른다. 분류상의 근연성이란 생물들 사이의 온갖 종류의 닮음과 닮지 않음을 나타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들은 여러 종을 접붙이거나 교배하는 것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특별히 부여된 것임을 결코 가리키지 않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다만 교배의 경우에 그 어려움은 종이라는 형태가 견디고 안정되게 남는 데 중요한 데 반해, 접붙이기의 경우에 그것은 나무가 잘 사는 데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첫 교배와 잡종의 불임성의 원인에 대하여. 이제 첫 교배와 잡종의 불임성의 그럴듯한 원인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이 두 경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방금 말했듯이 두 순수한 종이 맺어질 때에는 수컷과 암컷의 성 요소가 완전한 데 반해, 잡종에서는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첫 교배에서조차 맺어짐을 이루는 어려움이 크고 작은 것은 보아하니 별개의 여러 원인에 달려 있다. 때때로 수컷 쪽 요소가 밑씨에 닿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있음이 틀림없다. 꽃가루관이 씨방에 닿기에 암술이 너무 긴 식물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또 한 종의 꽃가루를 멀리 떨어진 종의 암술머리에 얹으면 꽃가루관이 뻗어 나오기는 해도 암술머리의 겉면을 뚫지 못한다는 것도 관찰되었다. 또 수컷 쪽 요소가 암컷 쪽 요소에 닿고서도 배가 발달하게 만들지 못할 수도 있는데, Fuci에 대한 튀레의 실험 가운데 몇몇이 그런 경우였던 듯하다. 이 사실들에 대해서는 어떤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접붙여질 수 없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설명도 내놓을 수 없다. 끝으로, 배가 발달했다가 이른 시기에 죽어 버릴 수도 있다. 이 뒤쪽 갈래는 충분한 눈길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닭목의 새를 잡종으로 만드는 데 경험이 많은 휴잇15 씨가 내게 전해 준 관찰로 보아, 나는 배가 일찍 죽는 것이 첫 교배에서 불임성의 매우 잦은 원인이라고 믿는다. 나는 처음에 이 견해를 믿기를 몹시 꺼렸다. 흔한 노새의 경우에서 우리가 보듯이, 잡종은 한번 태어나고 나면 대체로 건강하고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잡종이 놓인 사정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뒤가 다르다. 두 어버이가 살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 때 그것들은 대체로 알맞은 생활 조건에 놓인다. 그러나 잡종은 제 어미의 본성과 체질을 절반만 나누어 가지므로, 태어나기 전에 어미의 배 속에서나 어미가 낳은 알이나 씨 안에서 길러지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알맞지 않은 조건에 놓일 수 있고, 따라서 이른 시기에 죽기 쉽다. 더구나 아주 어린 생물은 모두 해롭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생활 조건에 몹시 민감한 듯하니 더욱 그러하다.
성 요소가 불완전하게 발달한 잡종의 불임성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나는 동물과 식물을 그 자연의 조건에서 옮겨 놓으면 생식 계통이 심하게 영향을 받기 극도로 쉽다는 것을 보이는 사실을 많이 모아 두었는데, 그것을 한 번 넘게 언급한 바 있다. 사실 이것이 동물을 길들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렇게 일으켜진 불임성과 잡종의 불임성 사이에는 닮은 점이 많다. 두 경우 모두 불임성은 전반적인 건강과 무관하며 흔히 몸집이 지나치게 크거나 몹시 무성해지는 것을 함께 지닌다. 두 경우 모두 불임성은 여러 정도로 나타난다. 두 경우 모두 수컷 쪽 요소가 가장 영향을 받기 쉬우나, 때로는 암컷 쪽이 수컷 쪽보다 더 그러하다. 두 경우 모두 그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분류상의 근연성을 따라간다. 같은 자연스럽지 못한 조건에 동물과 식물의 무리 전체가 생식 능력을 잃고, 또 종의 무리 전체가 불임인 잡종을 내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 무리 안의 어느 한 종은 때때로 조건이 크게 바뀌어도 가임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 견딜 것이다. 그리고 한 무리 안의 어떤 종은 유난히 가임인 잡종을 낼 것이다. 어떤 동물이 갇힌 채로 새끼를 칠지, 어떤 식물이 가꾸어지며 씨를 잘 맺을지는 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한 속의 어떤 두 종이 더 불임이거나 덜 불임인 잡종을 낼지도 해 보기 전에는 말할 수 없다. 끝으로, 생물을 여러 세대에 걸쳐 그것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조건에 두면 변하기 극도로 쉬운데, 이는 내가 믿기로 그 생식 계통이 특별히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불임성이 뒤따를 때보다는 정도가 덜할 뿐이다. 잡종도 그러하다. 실험하는 이라면 누구나 관찰했듯이 잇따른 세대의 잡종은 변하기 몹시 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물이 새롭고 자연스럽지 못한 조건에 놓일 때, 그리고 두 종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교배하여 잡종이 생길 때, 전반적인 건강 상태와는 무관하게 생식 계통이 매우 비슷하게 불임성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본다. 앞의 경우에는 생활 조건이 어지럽혀졌는데, 흔히 우리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그 정도가 작기는 하다. 뒤의 경우, 곧 잡종의 경우에는 바깥 조건은 그대로였으나 서로 다른 두 구조와 체질이 하나로 섞이는 바람에 짜임새가 어지럽혀졌다. 두 짜임새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여러 부분과 기관이 서로에 대해, 또는 생활 조건에 대해 맺는 발달이나 주기적인 작용이나 상호 관계에 아무런 어지럽힘도 일어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잡종이 저희끼리 새끼를 칠 수 있을 때, 그것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같은 합쳐진 짜임새를 제 자손에게 물려준다. 그러므로 그 불임성이 어느 정도 변하기는 해도 좀처럼 줄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잡종의 불임성에 관한 여러 사실을 우리가 막연한 가설에 기대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고백해야 한다. 예컨대 상호 교배에서 나온 잡종의 가임성이 같지 않다는 것, 또는 이따금 예외적으로 순수한 어버이 어느 한쪽을 바싹 닮는 잡종에서 불임성이 더 커진다는 것이 그러하다. 또 앞의 말들이 문제의 뿌리에까지 닿는다고 나는 내세우지 않는다. 어떤 생물이 자연스럽지 못한 조건에 놓였을 때 어째서 불임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내놓지 못했다. 내가 보이려 한 것은 다만, 어떤 점에서 서로 가까운 두 경우에 불임성이 공통된 결과라는 것뿐이다. 한 경우에는 생활 조건이 어지럽혀졌기 때문이고, 다른 경우에는 두 짜임새가 하나로 합쳐지는 바람에 짜임새가 어지럽혀졌기 때문이다.
공상처럼 보일지 모르나, 나는 비슷한 나란함이 가깝기는 해도 매우 다른 한 부류의 사실에까지 뻗어 있다고 짐작한다. 생활 조건의 작은 변화가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 이롭다는 것은 오래되고 거의 보편적인 믿음이며, 내 생각에 꽤 많은 증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농부와 정원사가 씨와 덩이줄기 따위를 이 흙이나 기후에서 저 흙이나 기후로 자주 옮겼다가 다시 되옮기는 데서 이것이 실행되는 것을 본다. 동물이 병에서 회복되는 동안, 우리는 생활 습성이 거의 어떻게 바뀌든 거기서 큰 이로움이 온다는 것을 뚜렷이 본다. 또한 식물에서나 동물에서나 같은 종의 아주 동떨어진 개체 사이의 교배, 곧 서로 다른 계통이나 아품종의 구성원 사이의 교배가 자손에게 기운과 가임성을 준다는 증거가 넘친다. 실제로 우리 4장에서 언급한 사실로 보아 나는 자웅동체에서조차 어느 정도의 교배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척끼리 여러 세대에 걸쳐 근친 교배를 이어 가면, 특히 그것들이 같은 생활 조건 아래 길러진다면, 언제나 그 자손에게 허약함과 불임성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생활 조건의 작은 변화가 모든 생물에게 이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은 교배, 곧 변하여 조금 달라진 같은 종의 수컷과 암컷 사이의 교배가 자손에게 기운과 가임성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변화, 또는 특별한 성질의 변화가 흔히 생물을 어느 정도 불임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았다. 또 더 큰 교배, 곧 크게 달라졌거나 종으로서 달라진 수컷과 암컷 사이의 교배가 대체로 어느 정도 불임인 잡종을 낳는다는 것도 보았다. 나는 이 나란함이 우연이거나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다. 두 계열의 사실은 어떤 공통되지만 알려지지 않은 끈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끈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원리와 관계되어 있다.
변종을 교배했을 때의 가임성과 그 혼종 자손의 가임성에 대하여. 종과 변종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구분이 있음이 틀림없으며 앞의 모든 말에는 어떤 잘못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매우 힘 있는 논증으로서 다그칠 수 있다. 변종은 겉모습에서 서로 아무리 많이 다르더라도 완전히 수월하게 교배하여 완전히 가임인 자손을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거의 언제나 그러하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한다. 그러나 자연 아래에서 생긴 변종을 보면 우리는 곧바로 가망 없는 난점에 빠진다. 여태 변종으로 여겨지던 둘이 서로 조금이라도 불임인 것이 발견되면, 대다수 박물학자는 그것들을 즉시 종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가장 뛰어난 식물학자 가운데 많은 이가 변종으로 보는 파란 Anagallis와 붉은 Anagallis, 프림로즈와 카우슬립을 두고 게르트너는 교배했을 때 아주 가임이지는 않다고 말하며, 따라서 그것들을 의심할 여지 없는 종으로 자리매김한다. 우리가 이렇게 순환 논법을 편다면, 자연 아래에서 생긴 모든 변종이 가임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
사육 아래 생겼거나 생겼다고 여겨지는 변종으로 눈을 돌려도 우리는 여전히 의심에 빠져 있다. 예컨대 독일 스피츠 개가 다른 개보다 여우와 더 쉽게 맺어진다거나, 남아메리카의 어떤 토박이 집개가 유럽 개와 쉽사리 교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때, 누구에게나 떠오를 설명이자 아마도 참된 설명은, 이 개들이 본디 별개였던 여러 종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겉모습에서 서로 크게 다른 그토록 많은 사육 변종, 예컨대 비둘기나 양배추의 변종이 완전히 가임이라는 것은 눈에 띄는 사실이다. 서로 더없이 바싹 닮았는데도 교배하면 완전히 불임인 종이 얼마나 많은지를 헤아려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몇 가지를 헤아려 보면 사육 변종의 가임성은 처음에 보이는 것만큼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첫째로, 두 종 사이의 한낱 겉모습의 다름이 교배했을 때의 불임성 정도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뚜렷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규칙을 사육 변종에 적용할 수 있다. 둘째로, 몇몇 뛰어난 박물학자는 오랜 사육의 과정이, 처음에는 조금만 불임이었던 잡종의 잇따른 세대에서 불임성을 없애는 쪽으로 기운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하다면 거의 같은 생활 조건 아래에서 불임성이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을 우리가 보리라고 기대해서는 분명 안 될 것이다. 끝으로, 그리고 이것이 내게는 단연 가장 중요한 고려로 보이는데, 동물과 식물의 새 품종은 사육 아래 사람이 제 쓰임과 즐거움을 위해 체계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힘으로 생긴다. 사람은 생식 계통의 작은 차이나 생식 계통과 상관된 다른 체질의 차이를 골라내고자 하지도 않고 골라낼 수도 없다. 그는 제 여러 변종에게 같은 먹이를 주고 거의 같게 다루며 그것들의 전반적인 생활 습성을 바꾸고자 하지 않는다. 자연은 아득한 시간에 걸쳐 짜임새 전체에 고르게 또 천천히, 각 생물 자신에게 좋을 수 있는 어떤 길로든 작용한다. 그리하여 자연은 곧바로, 또는 더 그럴듯하게는 상관을 거쳐 에둘러, 어느 한 종에서 내려온 여러 후손의 생식 계통을 바꿀 수 있다. 사람이 하는 선택과 자연이 하는 선택의 과정에 이런 차이가 있음을 보면, 그 결과에 얼마쯤 차이가 있다는 데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나는 여태 같은 종의 변종은 서로 교배하면 언제나 가임인 것처럼 말해 왔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경우에 어느 정도의 불임성이 있다는 증거를 물리치기란 내게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것을 짧게 간추려 보겠다. 그 증거는 적어도 우리가 수많은 종의 불임성을 믿게 하는 증거만큼은 좋다. 게다가 그 증거는 적대하는 증인들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들은 다른 모든 경우에 가임성과 불임성을 종의 구분을 가리는 안전한 기준으로 여긴다. 게르트너는 여러 해 동안 노란 씨가 달리는 키 작은 옥수수와 붉은 씨가 달리는 키 큰 변종을 제 정원에 가까이 붙여 길렀다. 그런데 이 식물들은 암수가 나뉘어 있는데도 자연 상태로는 결코 교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쪽의 꽃 열세 송이를 다른 쪽의 꽃가루로 수정시켰다. 그러나 이삭 하나만이 씨를 맺었고, 이 이삭 하나가 맺은 것도 낟알 다섯 개뿐이었다. 이 경우 손질이 해로웠을 수는 없는데, 그 식물은 암수가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옥수수 변종들이 별개의 종이라고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길러낸 잡종 식물 자체가 완전히 가임이었다는 것을 눈여겨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게르트너조차 그 두 변종을 종으로서 별개라고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루 드 뷔자랭그16는 옥수수처럼 암수가 나뉘어 있는 박의 세 변종을 교배했는데, 그것들이 서로 수정하는 일은 서로 다른 정도가 클수록 그만큼 덜 쉽다고 주장한다. 이 실험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실험된 그 형태들은, 주로 불임성이라는 시험으로 제 분류를 세우는 사주레가 변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다음의 경우는 훨씬 더 눈에 띄며 처음에는 아주 믿기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게르트너만큼 훌륭한 관찰자이자 적대하는 증인이 여러 해에 걸쳐 Verbascum의 아홉 종을 두고 행한 놀라운 수의 실험에서 나온 결과다. 곧 같은 Verbascum 종의 노란 변종과 흰 변종을 서로 교배하면, 어느 쪽 색깔의 변종이든 제 색깔의 꽃에서 온 꽃가루로 수정되었을 때보다 씨를 덜 맺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 종의 노란 변종과 흰 변종을 별개 종의 노란 변종과 흰 변종과 교배하면, 색깔이 서로 다른 꽃 사이의 교배보다 색깔이 같은 꽃 사이의 교배에서 씨가 더 많이 맺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Verbascum 변종들은 한낱 꽃의 색깔 말고는 아무런 다른 차이도 보이지 않으며, 한 변종이 때때로 다른 변종의 씨에서 길러져 나올 수 있다.
접시꽃의 어떤 변종을 두고 내가 한 관찰로 보아, 나는 그것들도 비슷한 사실을 보인다고 짐작하는 쪽으로 기운다.
뒤이은 모든 관찰자가 그 정확함을 확인해 준 쾰로이터는 눈에 띄는 사실 하나를 증명했다. 곧 흔한 담배의 한 변종이 아주 동떨어진 종과 교배했을 때 다른 변종들보다 더 가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흔히 변종으로 여겨지는 다섯 형태를 실험했고, 그것들을 가장 혹독한 시험, 곧 상호 교배로 검사했는데 그 혼종 자손이 완전히 가임임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 다섯 변종 가운데 하나는 아비로 쓰이든 어미로 쓰이든 Nicotiana glutinosa와 교배했을 때 언제나, 다른 네 변종을 N. glutinosa와 교배해서 나온 것만큼 불임이지는 않은 잡종을 냈다. 그러므로 이 한 변종의 생식 계통은 어떤 길로 어느 정도 변형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사실들로 보아, 또 자연 상태에 있는 변종의 불임성을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으로 보아(변종이라고 여겨지던 것이 조금이라도 불임이면 대체로 종으로 자리매김될 터이므로), 또 사람이 가장 동떨어진 사육 변종을 만들 때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만을 골라낸다는 것과 생식 계통에서 숨어 있고 기능에 관계된 차이를 만들고자 하지도 않고 만들 수도 없다는 것으로 보아, 이 여러 고려와 사실로 보아, 나는 변종이 매우 일반적으로 가임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도, 그것이 변종과 종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을 이룬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변종이 일반적으로 가임이라는 것은, 첫 교배와 잡종의 매우 일반적이지만 한결같지는 않은 불임성에 대해 내가 취한 견해, 곧 그것이 특별히 부여된 것이 아니라 교배되는 형태들의 생식 계통에서 특히 천천히 얻어진 변형에 딸려 오는 것이라는 견해를 뒤엎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가임성을 떼어 놓고 잡종과 혼종을 견줌에 대하여. 가임성의 물음을 떼어 놓고 보면, 종을 교배했을 때의 자손과 변종을 교배했을 때의 자손은 다른 여러 점에서 견주어 볼 수 있다. 종과 변종 사이에 뚜렷한 구분선을 긋고자 하는 바람이 강했던 게르트너는, 이른바 종의 잡종 자손과 이른바 변종의 혼종 자손 사이에서 아주 적은 수의, 그리고 내가 보기에 아주 중요하지 않은 차이밖에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둘은 매우 많은 중요한 점에서 더없이 바싹 일치한다.
나는 여기서 이 주제를 지극히 짧게 논하겠다. 가장 중요한 구분은 첫 세대에서 혼종이 잡종보다 더 잘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게르트너는 오래 가꾸어진 종에서 나온 잡종도 첫 세대에서 흔히 잘 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사실의 두드러진 보기를 본 적이 있다. 게르트너는 나아가 아주 가까운 종들 사이의 잡종이 아주 동떨어진 종에서 나온 것보다 더 잘 변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이는 변하기 쉬운 정도의 차이가 등급을 지으며 옅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혼종과 더 가임인 잡종을 여러 세대에 걸쳐 번식시키면 그 자손이 극도로 잘 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잡종과 혼종 가운데 몇몇은 형질의 한결같음을 오래 지킨 경우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잇따른 세대에서 변하기 쉬운 정도는 아마도 잡종에서보다 혼종에서 더 클 것이다.
혼종이 잡종보다 더 잘 변한다는 것은 내게 조금도 놀랍지 않다. 혼종의 어버이는 변종이며 대개는 사육 변종이기 때문이다(자연의 변종을 두고 시도된 실험은 아주 적다). 그리고 이는 대개 최근에 변하는 일이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변하기 쉬움이 흔히 이어지고, 거기에 한낱 교배라는 행위에서 생기는 변하기 쉬움이 덧붙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첫 교배에서 나온 잡종, 곧 첫 세대의 것이 변하는 정도가 작은 것은, 뒤이은 세대에서 그것이 극도로 잘 변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기묘한 사실이며 눈여겨볼 만하다. 그것이 보통의 변하기 쉬움의 원인에 대해 내가 취한 견해와 관계되며 그 견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생식 계통이 생활 조건의 어떤 변화에도 몹시 민감한 탓이며, 그리하여 생식 계통이 흔히 무력해지거나 적어도 어버이 형태와 똑같은 자손을 낸다는 제 본래의 구실을 해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그런데 첫 세대의 잡종은 (오래 가꾸어진 것을 빼면) 생식 계통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종에서 내려온 것이므로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잡종 자체는 생식 계통이 심하게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후손은 매우 잘 변한다.
그러나 혼종과 잡종을 견주는 일로 돌아가자. 게르트너는 혼종이 잡종보다 어느 한쪽 어버이 형태로 되돌아가기 더 쉽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이라 해도 분명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게르트너는 나아가, 어떤 두 종이 서로 더없이 가깝더라도 세 번째 종과 교배되면 그 잡종들이 서로 크게 다른 데 반해, 한 종의 아주 동떨어진 두 변종을 다른 종과 교배하면 그 잡종들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우긴다. 그러나 이 결론은 내가 알아낼 수 있는 한 단 한 번의 실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쾰로이터가 한 여러 실험의 결과와 정면으로 어긋나 보인다.
게르트너가 잡종 식물과 혼종 식물 사이에서 짚어 낼 수 있는 중요하지 않은 차이란 이것들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혼종과 잡종이 저마다의 어버이를 닮는 일은, 특히 가까운 종에서 나온 잡종에서, 게르트너에 따르면 같은 법칙을 따른다. 두 종이 교배될 때 한쪽이 때때로 제 모습을 잡종에게 새겨 넣는 우세한 힘을 지닌다. 그리고 식물의 변종에서도 그러하다고 나는 믿는다. 동물에서는 한 변종이 다른 변종에 대해 분명 흔히 이 우세한 힘을 지닌다. 상호 교배에서 나온 잡종 식물은 대체로 서로 바싹 닮는다. 상호 교배에서 나온 혼종도 그러하다. 잡종도 혼종도 잇따른 세대에서 어느 한쪽 어버이와 되풀이해 교배하면 그 순수한 어버이 형태로 되돌릴 수 있다.
이 여러 말은 동물에도 들어맞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제가 지나치게 복잡한데, 한편으로는 2차 성징 형질이 있기 때문이고, 더 크게는 한 종을 다른 종과 교배할 때에나 한 변종을 다른 변종과 교배할 때에나 모습을 물려주는 우세함이 한쪽 성에서 다른 쪽 성에서보다 더 강하게 흐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귀가 말에 대해 우세한 힘을 지녀서 노새도 버새17도 말보다 나귀를 더 닮는다고 주장하는 저자들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그 우세함은 암나귀에서보다 수나귀에서 더 강하게 흐르므로, 수나귀와 암말의 자손인 노새가 암나귀와 수말의 자손인 버새보다 더 나귀를 닮는다.
어떤 저자들은 혼종 동물만이 어느 한쪽 어버이를 바싹 닮게 태어난다고 여겨지는 사실을 크게 힘주어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잡종에서도 때때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물론 잡종에서는 혼종에서보다 훨씬 덜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한쪽 어버이를 바싹 닮은 교배 동물의 사례로 내가 모아 놓은 것을 보면, 그 닮음은 주로 성질이 거의 괴물 같고 갑자기 나타난 형질에 한정되어 있는 듯하다. 백색증, 흑색증, 꼬리나 뿔이 없는 것,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더 있는 것 따위가 그러하며, 선택으로 천천히 얻어진 형질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어느 한쪽 어버이의 완전한 형질로 갑자기 되돌아가는 일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생긴 종에서 내려온 잡종에서보다, 흔히 갑자기 생기고 형질이 반쯤 괴물 같은 변종에서 내려온 혼종에서 더 일어나기 쉬울 것이다. 대체로 나는 프로스페르 뤼카18 박사에게 온전히 동의하는데, 그는 동물에 관한 엄청난 양의 사실을 정리한 뒤, 자식이 제 어버이를 닮는 법칙은 두 어버이가 서로 많이 다르든 적게 다르든, 곧 같은 변종의 개체가 맺어지든 서로 다른 변종의 개체가 맺어지든 별개의 종이 맺어지든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임성과 불임성의 물음을 제쳐 두면, 다른 모든 점에서 교배된 종의 자손과 교배된 변종의 자손 사이에는 전반적이고 가까운 닮음이 있는 듯하다. 우리가 종을 특별히 창조된 것으로 보고 변종을 이차적인 법칙으로 생긴 것으로 본다면, 이 닮음은 놀라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과 변종 사이에 본질적인 구분이 없다는 견해와는 완벽하게 어울린다.
이 장의 요약. 종으로 자리매김할 만큼 충분히 동떨어진 형태들 사이의 첫 교배와 그 잡종은 매우 일반적으로,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아니게, 불임이다. 그 불임성은 온갖 정도로 나타나며 흔히 하도 옅어서, 지금껏 살았던 가장 조심스러운 두 실험가가 이 시험으로 형태들을 자리매김하면서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을 정도다. 그 불임성은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타고난 채로 변하며,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에 몹시 민감하다. 불임성의 정도는 분류상의 근연성을 엄격하게 따르지 않고, 기묘하고 복잡한 여러 법칙에 지배된다. 그것은 같은 두 종 사이의 상호 교배에서 대체로 다르며 때로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첫 교배에서와 그 교배에서 나온 잡종에서 언제나 같은 정도인 것은 아니다.
나무를 접붙이는 일에서 한 종이나 변종이 다른 것에 붙을 수 있는 능력이 대체로 알려지지 않은 그 영양 계통의 차이에 딸려 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배에서도 한 종이 다른 종과 맺어지는 수월함의 크고 작음은 알려지지 않은 그 생식 계통의 차이에 딸려 오는 것이다. 종이 자연에서 서로 교배하여 뒤섞이는 것을 막으려고 여러 정도의 불임성을 특별히 부여받았다고 생각할 이유는, 나무가 우리 숲에서 서로 맞붙어 자라는 것을 막으려고 서로 접붙이기 어려운 여러 정도의 어려움을, 그것도 얼마쯤 비슷한 어려움을 특별히 부여받았다고 생각할 이유보다 조금도 더 낫지 않다.
생식 계통이 완전한 순수한 종들 사이의 첫 교배의 불임성은 여러 사정에 달려 있는 듯하며, 어떤 경우에는 배가 일찍 죽는 것에 크게 달려 있다. 생식 계통이 불완전하고 별개의 두 종이 합쳐진 탓에 이 계통과 짜임새 전체가 어지럽혀진 잡종의 불임성은, 순수한 종이 그 자연의 생활 조건이 어지럽혀졌을 때 그토록 자주 겪는 저 불임성과 바싹 가까운 듯하다. 이 견해는 또 다른 종류의 나란함으로 뒷받침된다. 곧 조금밖에 다르지 않은 형태끼리의 교배가 그 자손의 기운과 가임성에 이롭다는 것, 그리고 생활 조건의 작은 변화가 보아하니 모든 생물의 기운과 가임성에 이롭다는 것이다. 두 종을 맺게 하는 어려움의 정도와 그 잡종 자손의 불임성의 정도가 서로 다른 원인에서 오는데도 대체로 대응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둘 다 교배되는 종들 사이의 어떤 종류의 차이의 양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첫 교배를 이루는 수월함과, 거기서 나온 잡종의 가임성과, 서로 접붙여질 수 있는 능력이 (이 마지막 능력은 분명 크게 다른 사정에 달려 있지만) 모두 실험에 놓인 형태들의 분류상의 근연성과 어느 정도까지 나란히 간다는 것도 놀랍지 않다. 분류상의 근연성이란 모든 종 사이의 온갖 종류의 닮음을 나타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변종으로 알려진 형태들, 또는 변종으로 볼 만큼 충분히 비슷한 형태들 사이의 첫 교배와 그 혼종 자손은 매우 일반적으로 가임이지만, 아주 보편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렇게 거의 일반적이고 완전한 가임성도, 자연 상태의 변종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순환 논법에 빠지기 쉬운지를 떠올리면, 또 변종의 대다수가 사육 아래 생식 계통의 차이가 아니라 한낱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선택하는 것으로 생겨났음을 떠올리면 놀랍지 않다. 가임성을 빼면 다른 모든 점에서 잡종과 혼종 사이에는 전반적으로 가까운 닮음이 있다. 그러니 끝으로, 이 장에서 짧게 든 사실들은 내게 종과 변종 사이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는 견해에 어긋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
1. 쾰로이터 — 요제프 고틀리프 쾰로이터(Joseph Gottlieb Kölreuter, 1733~1806). 독일의 식물학자로 식물의 인공 교배 실험을 체계적으로 처음 해냈고, 꽃가루를 곤충이 옮긴다는 것을 밝혔다.
2. 게르트너 — 카를 프리드리히 폰 게르트너(Carl Friedrich von Gärtner, 1772~1850). 독일의 식물학자이자 의사로, 만 가지가 넘는 교배 실험을 기록한 《식물계의 잡종 생성에 관한 실험과 관찰》(1849)을 냈다. 다윈이 이 장에서 드는 자료는 거의 다 이 책과 쾰로이터의 논문에서 온 것이다.
3. Leguminosæ — 콩과 식물을 묶은 당시의 분류명이다. 꽃의 구조 때문에 수술을 떼어 내고 인공 수정을 시키기가 까다롭다. 당시의 표기이므로 라틴어를 그대로 두었다.
4. 프림로즈와 카우슬립 — 둘 다 Primula속의 풀로, 프림로즈는 Primula vulgaris, 카우슬립은 Primula veris에 해당한다. 한국어에 굳어진 통용명이 없어 원문의 영어 이름을 소리대로 옮겼다.
5. Anagallis — 원문의 이름은 pimpernel이다. 한국어에 굳어진 통용명이 없어 다윈이 괄호 안에 함께 적은 학명을 그대로 두었다.
6. 허버트 — 윌리엄 허버트(William Herbert, 1778~1847). 영국의 성직자이자 식물학자로 맨체스터 참사회장을 지냈다. 수선화과 식물의 교배 연구로 이름났으며 다윈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7. C. 노블 — 찰스 노블(Charles Noble). 서리주 배그숏에서 묘목장을 운영하던 원예가로, 다윈에게 Rhododendron 교배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
8. 에이턴 — 토머스 캠벨 에이턴(Thomas Campbell Eyton, 1809~1880). 영국의 박물학자로 다윈의 케임브리지 시절 친구이며 조류를 연구했다.
9. 블라이스 씨와 허턴 대위 — 에드워드 블라이스(Edward Blyth, 1810~1873)는 영국의 동물학자로 캘커타의 아시아학회 박물관에서 일했으며 인도의 동물에 관한 자료를 다윈에게 많이 보냈다. 토머스 허턴(Thomas Hutton, 1807~1874)은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 장교이자 박물학자다.
10. 팔라스 — 페터 지몬 팔라스(Peter Simon Pallas, 1741~1811). 독일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답사한 박물학자다. 사육 동물이 여러 야생 종에서 나왔다는 그의 주장을 다윈은 1장에서도 다룬다.
11. 튀레 — 귀스타브 튀레(Gustave Thuret, 1817~1875). 프랑스의 식물학자로 바닷말의 생식을 연구해 수정이 일어나는 과정을 직접 관찰해 보였다.
12. 마르멜로 — 원문은 quince이며 Cydonia oblonga다. 배나무와 같은 장미과에 들지만 별개의 속이다. 한국어의 모과나무(Pseudocydonia sinensis)와는 다른 나무다.
13. 사주레 — 오귀스탱 사주레(Augustin Sageret, 1763~1851). 프랑스의 원예학자로 박과 식물의 교배를 연구했다.
14. 투앵 — 앙드레 투앵(André Thouin, 1747~1824). 프랑스의 식물학자로 파리 식물원의 재배 책임자였고 접붙이기를 폭넓게 실험했다.
15. 휴잇 — 에드워드 휴잇(Edward Hewitt). 버밍엄의 가금 사육가로, 꿩과 닭 무리의 교배에 관한 관찰을 다윈에게 전했다.
16. 지루 드 뷔자랭그 — 샤를 지루 드 뷔자랭그(Charles Girou de Buzareingues, 1773~1856). 프랑스의 농학자로 가축과 작물의 생식과 유전을 연구했다.
17. 노새와 버새 —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난 것이 노새(mule), 암나귀와 수말 사이에서 난 것이 버새(hinny)다. 둘은 같은 두 종을 서로 엇바꾸어 교배한 결과이므로, 다윈이 앞에서 말한 상호 교배의 보기가 된다.
18. 프로스페르 뤼카 — 프로스페르 뤼카(Prosper Lucas, 1808~1885). 프랑스의 의사로 《자연 유전에 관한 철학적·생리학적 논고》(1847~1850)를 냈다. 다윈은 유전의 법칙을 다룰 때 이 책을 자주 끌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