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이론의 난점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의 난점. 이행. 이행 변종이 없거나 드문 것. 생활 습성의 이행. 같은 종 안의 다양하게 갈라진 습성. 가까운 무리와 습성이 크게 다른 종. 극도로 완전한 기관. 이행의 길. 난점이 되는 사례들. Natura non facit saltum1. 중요함이 작은 기관. 모든 경우에 절대적으로 완전하지는 않은 기관. 유형의 단일성과 존재의 조건이라는 법칙을 자연선택 이론이 아우른다는 것.
이 책의 이 대목에 이르기 훨씬 전에 독자에게는 한 무더기의 난점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하도 무거워서 지금도 나는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휘청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 판단이 닿는 한 그 대부분은 겉보기의 난점일 뿐이며, 참된 난점도 내 이론에 치명적이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난점과 반론은 다음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종이 다른 종에서 감지할 수 없을 만큼 고운 등급을 거쳐 내려온 것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행 형태를 어디서나 보지 못하는가? 어째서 자연 전체가 혼돈에 빠져 있지 않고, 우리가 보는 대로 종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는가?
둘째, 예컨대 박쥐의 구조와 습성을 지닌 동물이 습성이 전혀 다른 어떤 동물의 변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자연선택이 한편으로는 파리채 노릇을 하는 기린의 꼬리처럼 하찮은 기관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직도 그 흉내 낼 수 없는 완전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처럼 놀라운 구조의 기관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셋째, 본능이 자연선택을 거쳐 얻어지고 변할 수 있는가? 깊이 있는 수학자들의 발견을 사실상 앞질러 버린 벌집 방을 짓게 하는 저 놀라운 본능을 두고 우리는 무어라 말해야 하는가?
넷째, 종은 교배하면 불임이 되고 불임인 자손을 낳는데 변종은 교배해도 가임성이 손상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앞의 두 항목은 여기서 논하고, 본능과 잡종성은 따로 장을 두어 다룬다.
이행 변종이 없거나 드문 것에 대하여. 자연선택은 오로지 이로운 변화를 보존하는 것으로만 작용하므로, 생물이 가득 찬 지역에서 새 형태는 저마다 자기보다 덜 개량된 어버이나 경쟁에 들어오는 다른 덜 유리한 형태의 자리를 차지하고 끝내 그것을 절멸시키는 쪽으로 기운다. 그리하여 절멸과 자연선택은, 우리가 보았듯이, 손을 맞잡고 간다. 따라서 우리가 각 종을 알려지지 않은 어떤 다른 형태에서 내려온 것으로 본다면, 어버이와 모든 이행 변종은 새 형태가 만들어지고 완전해지는 바로 그 과정 때문에 대개 절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대로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행 형태가 존재했을 터인데, 어째서 우리는 그것들이 지각(地殼) 속에 수없이 묻혀 있는 것을 찾아내지 못하는가? 이 물음은 지질학 기록의 불완전함을 다루는 장에서 논하는 편이 훨씬 편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그 답이 주로 그 기록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비할 바 없이 덜 완전하다는 데 있다고 내가 믿는다는 것만 말해 두겠다. 기록이 불완전한 까닭은 주로 생물이 깊은 바다에 살지 않는다는 데, 또 그 유해가 뒷날까지 묻혀 보존되려면 앞으로 닥칠 엄청난 양의 깎임을 견딜 만큼 두껍고 널리 퍼진 퇴적층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렇게 화석을 품은 덩어리는 얕은 바다 바닥이 천천히 가라앉는 동안 많은 퇴적물이 쌓이는 곳에서만 모일 수 있다. 이런 조건들은 드물게, 그것도 엄청나게 긴 사이를 두고서야 함께 갖추어진다. 바다 바닥이 그대로 있거나 솟아오르는 동안, 또는 퇴적물이 거의 쌓이지 않는 동안 우리의 지질학 역사에는 빈자리가 생긴다. 지각은 거대한 박물관이다. 그러나 그 자연의 수집품은 아득히 먼 시간의 사이를 두고서만 모였다.
그러나 가까운 종 여럿이 같은 땅에 함께 살 때에는 지금도 많은 이행 형태를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다그칠 수 있다. 간단한 경우를 하나 들어 보자. 한 대륙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며 여행하면 우리는 잇따른 구간마다 가까운 종이나 대표 종을 만나는데, 그것들은 그 땅의 자연의 살림에서 거의 같은 자리를 메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대표 종들은 곧잘 만나서 서로 맞물린다. 그리고 한쪽이 점점 드물어지는 동안 다른 쪽이 점점 흔해져 마침내 한쪽이 다른 쪽을 대신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뒤섞이는 곳에서 이 종들을 견주어 보면, 구조의 모든 세부에서 저마다의 본거지에서 가져온 표본만큼이나 절대적으로 서로 구분된다. 내 이론대로라면 이 가까운 종들은 공통의 어버이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저마다 제 지역의 생활 조건에 맞추어졌고, 본래의 어버이와 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있던 모든 이행 변종을 밀어내고 절멸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각 지역에서 수많은 이행 변종을 만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거기 존재했음이 틀림없고 화석 상태로 거기 묻혀 있을 수 있다 해도 그렇다. 그러나 중간의 생활 조건을 지닌 중간 지역에서는 어째서 우리가 지금 둘을 바싹 이어 주는 중간 변종을 찾아내지 못하는가? 이 난점은 오랫동안 나를 아주 당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상당 부분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어떤 지역이 지금 이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오랜 기간 이어져 있었다고 추론하는 데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지질학은 거의 모든 대륙이 후기 제3기2 동안에도 섬으로 쪼개져 있었다고 믿게 이끈다. 그런 섬에서는 중간 지대에 중간 변종이 존재할 가능성 없이 구분되는 종이 따로따로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땅의 모양과 기후가 달라지면서, 지금 이어져 있는 바다 구역도 가까운 시기에 지금보다 훨씬 덜 이어지고 덜 고른 상태로 있었던 적이 많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난점에서 벗어나는 이 길을 지나쳐 가겠다. 엄밀하게 이어진 지역에서도 완전히 뚜렷한 종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이어져 있는 지역이 예전에 쪼개져 있었다는 것이 새 종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으며, 자유로이 교배하고 널리 돌아다니는 동물에서는 더욱 그렇다.
종이 지금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대개 그것이 큰 땅에서는 꽤 많다가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느 정도 갑작스럽게 점점 드물어지고 마침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두 대표 종 사이의 중립 지대는 저마다의 고유한 땅에 견주면 대개 좁다. 산을 오를 때에도 우리는 같은 사실을 보며, 알프. 드 캉돌3이 살핀 대로 흔한 고산 종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사라지는지 자못 놀라울 때가 있다. 포브스4도 준설기로 바다의 깊이를 재면서 같은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후와 생활의 물리적 조건을 분포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 이들에게 이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내야 마땅하다. 기후도 높이도 깊이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고르게 변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이 제 본거지에서조차 경쟁하는 다른 종이 없다면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리라는 것, 거의 모두가 다른 것을 잡아먹거나 다른 것의 먹이가 된다는 것, 요컨대 모든 생물이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가장 중요하게 다른 생물과 얽혀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어느 지역에 사는 것들의 분포 범위가 감지할 수 없이 변해 가는 물리적 조건에만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상당 부분 다른 종이 있고 없음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알아볼 수밖에 없다. 그 다른 종은 이것이 기대어 사는 종이거나, 이것을 죽이는 종이거나, 이것과 경쟁하는 종이다. 그리고 이 종들은 (어떻게 그리되었든) 이미 경계가 뚜렷한 대상이어서 감지할 수 없는 등급을 거쳐 서로 녹아들지 않으므로, 다른 종들의 범위에 달려 있는 어느 한 종의 범위도 또렷하게 그어지는 쪽으로 기운다. 더구나 어떤 종이든 제 범위의 가장자리, 곧 수가 줄어든 곳에서는 적이나 먹이의 수가 출렁이거나 계절이 출렁일 때 아주 쉽게 송두리째 절멸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지리적 범위는 한층 더 또렷하게 그어지게 된다.
가까운 종이나 대표 종이 이어진 지역에 살 때 대개 저마다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그 사이에 견주어 좁은 중립 지대가 있어 거기서 다소 갑작스럽게 점점 드물어진다고 보는 내 믿음이 옳다면, 변종은 본질에서 종과 다르지 않으므로 같은 규칙이 아마 둘 모두에 들어맞을 것이다. 그리고 변이하는 종 하나를 아주 넓은 지역에 맞춘다고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 우리는 변종 둘을 넓은 지역 둘에, 셋째 변종을 좁은 중간 지대에 맞추어야 한다. 따라서 중간 변종은 좁고 작은 지역에 사는 까닭에 더 적은 수로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아낼 수 있는 한 실제로도 이 규칙은 자연 상태의 변종에 들어맞는다. 나는 Balanus5 속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변종들 사이의 중간 변종에서 이 규칙의 두드러진 실례를 만났다. 또 왓슨 씨6와 에이사 그레이 박사7와 월러스턴 씨8가 내게 알려준 바로 보건대, 다른 두 형태 사이의 중간 변종이 나타날 때 그것은 자기가 이어 주는 형태들보다 수에서 훨씬 드문 것이 보통인 듯하다. 이제 이 사실과 추론을 믿어도 좋다면, 그래서 다른 두 변종을 이어 주는 변종이 대개 자기가 잇는 형태들보다 적은 수로 존재해 왔다고 결론지어도 좋다면, 내 생각에 우리는 어째서 중간 변종이 아주 긴 기간 동안 버티지 못하는지, 어째서 그것이 대체로 본래 자기가 이어 주던 형태들보다 먼저 절멸하고 사라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적은 수로 존재하는 형태는 이미 말했듯이 큰 수로 존재하는 형태보다 절멸할 기회가 더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경우에 중간 형태는 그 양쪽에 존재하는 가까운 형태들의 침입에 유난히 쉽게 노출된다. 그러나 내가 믿기에 훨씬 더 중요한 고려는 이것이다. 내 이론에서 두 변종이 구분되는 두 종으로 바뀌고 완전해져 간다고 보는 그 이상의 변화 과정에서, 더 넓은 지역에 살아 더 많은 수로 존재하는 둘이 좁은 중간 지대에 적은 수로 존재하는 중간 변종보다 크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더 많은 수로 존재하는 형태는 주어진 어느 기간 안에 자연선택이 붙잡을 만한 유리한 변이를 더 많이 내놓을 기회가 언제나 더 크고, 적은 수로 존재하는 드문 형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흔한 형태가 삶을 건 경주에서 덜 흔한 형태를 이기고 그 자리를 빼앗는 쪽으로 기운다. 덜 흔한 형태는 더 느리게 변하고 개량되기 때문이다. 2장에서 보인 대로 각 나라에서 흔한 종이 드문 종보다 평균해 더 많은 수의 뚜렷이 구분되는 변종을 내놓는 것도 같은 원리로 설명된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이렇게 그려 볼 수 있다. 양의 변종 셋을 기른다고 하자. 하나는 넓은 산악 지역에, 둘째는 견주어 좁은 구릉지에, 셋째는 그 아래 너른 벌판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은 꾸준함과 솜씨로 선택을 통해 제 가축을 개량하려 한다고 하자. 이때 승산은 산이나 벌판의 큰 목축업자가 중간의 좁은 구릉지에 있는 작은 목축업자보다 제 품종을 더 빨리 개량하는 쪽으로 크게 기운다. 그리하여 개량된 산 품종이나 벌판 품종이 머지않아 덜 개량된 구릉 품종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본래 더 많은 수로 존재하던 두 품종은 밀려난 중간의 구릉 변종이 끼어들지 않은 채 서로 바싹 맞닿게 될 것이다.
간추리자면, 나는 종이 꽤 뚜렷이 구분되는 대상이 되며 어느 한 시기에도 변이하는 것과 중간 고리가 풀 수 없이 뒤엉킨 혼돈을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다. 첫째로는 새 변종이 아주 천천히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변이는 매우 느린 과정이고, 자연선택은 유리한 변이가 우연히 나타나기 전에는, 또 그 지역의 자연의 살림에서 어떤 자리가 주민 하나나 여럿의 어떤 변화로 더 잘 메워질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새 자리는 기후의 느린 변화나 새 주민이 이따금 들어오는 일에 달려 있고, 아마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옛 주민 가운데 얼마가 천천히 변해 가면서 그렇게 생긴 새 형태와 옛 형태가 서로 작용하고 되작용하는 데 달려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시기에 우리는 어느 정도 이어지는 가벼운 구조의 변화를 보이는 종 몇몇만 보아야 하며, 우리가 보는 것이 분명 그러하다.
둘째로, 지금 이어져 있는 지역도 가까운 시기에 따로 떨어진 조각으로 있었던 적이 많았음이 틀림없다. 그런 조각에서는 많은 형태가, 특히 새끼를 얻는 데 암수가 결합하고 널리 돌아다니는 강에 속한 것들이 따로따로 대표 종으로 매길 만큼 충분히 구분되었을 수 있다. 이 경우에 여러 대표 종과 그 공통 어버이 사이의 중간 변종은 예전에 땅의 쪼개진 조각마다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고리들은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밀려나고 절멸했을 터이므로 이제 살아 있는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엄밀하게 이어진 지역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변종이 둘 이상 만들어졌을 때, 중간 변종이 처음에는 중간 지대에 만들어졌을 법하지만 그것은 대개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든 이유로 보아(곧 가까운 종이나 대표 종의 실제 분포에 대해, 또 인정된 변종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로 보아) 이 중간 변종은 중간 지대에서 자기가 이어 주려는 변종들보다 적은 수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까닭만으로도 중간 변종은 우연한 절멸에 노출되기 쉽다. 그리고 자연선택을 거친 그 이상의 변화 과정에서 그것은 자기가 이어 주는 형태들에게 거의 틀림없이 지고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이 형태들은 더 많은 수로 존재하는 까닭에 전체로 보아 더 많은 변이를 내놓고, 그리하여 자연선택을 거쳐 더 개량되고 더 많은 이점을 얻기 때문이다.
끝으로,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모든 시기를 통틀어 본다면, 내 이론이 참이라면 같은 무리의 모든 종을 아주 바싹 이어 주는 수없이 많은 중간 변종이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과정 자체가, 그토록 자주 말한 대로, 어버이 형태와 중간 고리를 끊임없이 절멸시키는 쪽으로 기운다. 따라서 그것들이 예전에 존재했다는 증거는 화석 유해에서만 찾을 수 있을 터인데, 화석은 뒤에 어느 장에서 보이려 하듯 지극히 불완전하고 띄엄띄엄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독특한 습성과 구조를 지닌 생물의 기원과 이행에 대하여. 내가 품은 것과 같은 견해에 맞서는 이들은 이렇게 물어 왔다. 예컨대 뭍에 사는 육식 동물이 어떻게 물에 사는 습성을 지닌 것으로 바뀔 수 있었겠는가? 그 동물이 이행 상태에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같은 무리 안에 참으로 물에 사는 습성과 엄격하게 뭍에 사는 습성 사이의 온갖 중간 등급을 지닌 육식 동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쉽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 생존경쟁으로 살아가므로 저마다 제 습성이 자연에서 차지하는 제자리에 잘 맞추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북아메리카의 Mustela vison(아메리카밍크)을 보라. 이 짐승은 발에 물갈퀴가 있고 털과 짧은 다리와 꼬리 모양이 수달을 닮았다. 여름에는 물에 잠겨 물고기를 잡아먹지만 긴 겨울 동안에는 얼어붙은 물을 떠나 다른 족제비들처럼 쥐와 뭍짐승을 잡아먹는다. 다른 경우를 들어 벌레를 먹는 네발짐승이 어떻게 나는 박쥐로 바뀔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다면 그 물음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고, 나는 아무 답도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런 난점은 무게가 거의 없다.
여기서도 다른 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큰 불리함을 안고 있다. 내가 모아 둔 두드러진 사례가 많은데도, 같은 속의 가까운 종에서 나타나는 이행하는 습성과 구조에 대해, 또 같은 종 안에서 늘 그렇든 이따금 그렇든 다양하게 갈라지는 습성에 대해 한두 가지 실례밖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박쥐 같은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 난점을 덜어 내려면 그런 사례를 길게 늘어놓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다람쥐과를 보라. 여기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고운 등급을 본다. 꼬리가 아주 조금 납작해진 것들에서, 또 J. 리처드슨 경9이 말한 대로 몸 뒤쪽이 제법 넓고 옆구리 살갗이 제법 넉넉한 것들에서, 이른바 날다람쥐까지 이어진다. 날다람쥐는 팔다리와 심지어 꼬리 밑동까지 넓게 펼쳐진 살갗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것이 낙하산 노릇을 하여 나무에서 나무로 놀라운 거리를 미끄러져 갈 수 있게 해 준다. 이 구조 하나하나가 제 나라에서 저마다의 다람쥐에게 쓸모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새나 짐승 사냥꾼을 피하게 해 주거나, 먹이를 더 빨리 모으게 해 주거나, 믿을 만한 까닭이 있듯이 이따금 떨어질 때의 위험을 덜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각 다람쥐의 구조가 온갖 자연 조건 아래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기후와 초목이 달라지게 하고, 경쟁하는 다른 설치류나 새로운 맹수가 들어오게 하거나 옛 맹수가 변하게 해 보라. 그러면 온갖 유추로 보아 다람쥐 가운데 적어도 얼마는, 그에 맞추어 구조가 변하고 개량되지 않는 한, 수가 줄거나 절멸하리라고 우리는 믿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특히 생활 조건이 달라지는 가운데 옆구리 막이 점점 더 넉넉해진 개체들이 잇따라 보존되는 데 아무 난점도 보지 못한다. 그 변화 하나하나가 쓸모 있고 하나하나가 이어져 내려가, 마침내 이 자연선택 과정의 효과가 쌓여 이른바 완전한 날다람쥐가 나온 것이다.
이제 Galeopithecus10 곧 날여우원숭이를 보라. 예전에는 이것을 박쥐 무리에 잘못 넣었다. 이 짐승은 옆구리 막이 극도로 넓어서 턱 모서리에서 꼬리까지 뻗어 있고 팔다리와 길게 늘어난 손가락까지 감싼다. 이 옆구리 막에는 펴는 근육도 갖추어져 있다. 공중을 미끄러지는 데 알맞은 구조의 등급진 고리가 지금은 Galeopithecus를 다른 Lemuridæ와 이어 주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고리가 예전에 존재했고 저마다 덜 완전하게 미끄러지는 다람쥐의 경우와 같은 단계를 밟아 만들어졌으며 구조의 등급마다 그 임자에게 쓸모가 있었다고 가정하는 데 아무 난점도 보지 못한다. 또 나는 Galeopithecus의 막으로 이어진 손가락과 앞팔이 자연선택으로 크게 길어질 수 있었으리라고 더 나아가 믿는 데도 넘을 수 없는 난점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는 기관에 관한 한 그것을 박쥐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어깨 꼭대기에서 꼬리까지, 뒷다리까지 아울러 날개막이 펼쳐진 박쥐에서 우리는 어쩌면 본래 나는 데보다 공중을 미끄러지는 데 맞추어 만들어진 장치의 흔적을 보는지도 모른다.
새의 속 열두어 개가 절멸했거나 알려지지 않았다면, 날개를 오로지 물장구치는 데만 쓰는 새(에이턴이 말한 Micropterus, 곧 로거헤드오리11)가, 물속에서는 지느러미로 뭍에서는 앞다리로 쓰는 새(펭귄)가, 돛으로 쓰는 새(타조)가, 기능으로는 아무 데도 쓰지 않는 새(Apteryx, 곧 키위)가 있으리라고 누가 감히 짐작했겠는가. 그런데도 이 새들 하나하나의 구조는 저마다 놓인 생활 조건 아래서 저에게 좋다. 저마다 다투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있을 수 있는 모든 조건 아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한 날개 구조의 등급들이, 어쩌면 모두 쓰이지 않음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를 그 등급들이, 새가 완전한 비행 능력을 얻어 온 자연의 단계를 가리킨다고 이 말에서 추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적어도 이행의 길이 얼마나 다양하게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Crustacea(갑각류)와 Mollusca(연체동물)처럼 물에서 숨 쉬는 강의 몇몇 구성원이 뭍에 살도록 맞추어져 있는 것을 보고, 또 우리에게 나는 새와 나는 젖먹이짐승이 있고 더없이 다양한 유형의 나는 곤충이 있으며 예전에는 나는 파충류가 있었던 것을 보면, 지금 팔락이는 지느러미의 도움으로 조금 솟았다 방향을 틀며 공중을 멀리 미끄러지는 날치가 완전한 날개를 지닌 동물로 변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만하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른 이행 상태에서 그것들이 드넓은 바다에 살았고 우리가 아는 한 오로지 다른 물고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갓 생긴 나는 기관을 썼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새의 날개가 나는 데 그렇듯 어떤 구조가 특정한 습성에 맞추어 고도로 완전해진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구조의 이른 이행 등급을 보이는 동물이 오늘날까지 살아남는 일이 드물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들은 자연선택을 거쳐 완전해지는 바로 그 과정에 밀려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아주 다른 생활 습성에 맞추어진 구조들 사이의 이행 등급이 이른 시기에 많은 수로, 또 여러 하위 형태로 발달한 일은 드물었으리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려 본 날치의 예로 돌아가면, 참으로 날 수 있는 물고기가 그 나는 기관이 높은 완전함에 이르러 삶을 건 싸움에서 다른 동물보다 뚜렷이 유리해지기 전에, 뭍에서도 물에서도 여러 갈래로 온갖 먹이를 잡으려고 여러 하위 형태로 발달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구조의 이행 등급을 지닌 종을 화석 상태에서 찾아낼 기회는, 그것들이 더 적은 수로 존재했던 까닭에, 온전히 발달한 구조를 지닌 종의 경우보다 언제나 더 적을 것이다.
이제 같은 종의 개체에서 습성이 다양하게 갈라지거나 달라진 사례를 두셋 들겠다. 어느 쪽이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자연선택이 구조를 얼마간 변화시켜 그 동물을 달라진 습성에, 또는 여러 다른 습성 가운데 오직 하나에 맞추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습성이 대개 먼저 달라지고 구조가 뒤따르는지, 아니면 구조가 조금 변해서 습성이 달라지는지는 가려내기 어렵고 우리에게 중요하지도 않다. 아마 둘 다 거의 동시에 달라지는 일이 잦을 것이다. 습성이 달라진 사례로는 지금 외래 식물을 먹거나 오로지 인공 물질만 먹는 영국 곤충이 많다는 것을 들기만 해도 넉넉하다. 다양하게 갈라진 습성의 실례는 수없이 들 수 있다. 나는 남아메리카에서 타이란새(Saurophagus sulphuratus)12가 한자리에 떠 있다가 다른 자리로 옮겨 가기를 황조롱이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또 다른 때에는 물가에 꼼짝 않고 서 있다가 물총새처럼 물고기를 향해 내리꽂는 것을 자주 지켜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박새(Parus major)가 나무발발이처럼 가지를 기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때까치처럼 작은 새의 머리를 쳐서 죽이는 일도 잦고, 나는 그것이 가지에서 주목 씨앗을 두드려 동고비처럼 깨뜨리는 것을 여러 번 보고 들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헌13이 검은곰이 입을 활짝 벌린 채 몇 시간이나 헤엄치며 고래처럼 물속의 벌레를 잡는 것을 보았다. 이토록 극단적인 경우에도, 벌레의 공급이 한결같고 더 잘 맞추어진 경쟁자가 그 지역에 이미 있지 않다면, 곰의 한 품종이 자연선택으로 구조와 습성에서 점점 더 물에 사는 쪽으로, 입이 점점 더 커지는 쪽으로 되어 마침내 고래만큼 괴물 같은 생물이 나오는 데 나는 아무 난점도 보지 못한다.
같은 종의 개체가 저희 종의 습성과도 같은 속의 다른 종의 습성과도 크게 다른 습성을 따르는 것을 이따금 보므로, 내 이론에서는 그런 개체가 이따금 새로운 종을 낳아 왔으리라고, 그 종은 남다른 습성을 지니고 구조도 제 본래 유형에서 조금이든 상당히든 변해 있으리라고 기대할 만하다. 그리고 자연에는 그런 실례가 실제로 있다. 나무를 기어오르고 나무껍질 틈에서 벌레를 잡는 딱따구리보다 더 두드러진 적응의 실례를 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북아메리카에는 주로 열매를 먹는 딱따구리가 있고, 날개가 길어 나는 벌레를 쫓는 딱따구리도 있다. 그리고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라플라타의 벌판에는 짜임새의 본질적인 부분마다, 심지어 빛깔과 거친 울음소리와 물결치는 비행에서까지 우리네 흔한 종과 가까운 혈연임을 내게 또렷이 말해 주는 딱따구리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무에 결코 오르지 않는 딱따구리다!
바다제비는 새 가운데 가장 공중과 대양에 매인 무리다. 그런데도 티에라델푸에고의 고요한 물목에 사는 Puffinuria berardi는 전반적인 습성에서, 놀라운 잠수 능력에서, 헤엄치는 모습과 마지못해 날아오를 때 나는 모습에서 누구라도 바다오리나 논병아리로 잘못 볼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본질에서 바다제비이며 다만 짜임새의 많은 부분이 깊이 변해 있다. 한편 아무리 예리한 관찰자라도 물까마귀의 죽은 몸을 살펴서는 그것이 반쯤 물에 사는 습성을 지녔으리라고 결코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엄격하게 뭍에 사는 지빠귀과의 이 남다른 구성원은 오로지 잠수로 살아간다. 발로 돌을 붙잡고 물속에서 날개를 쓰면서 말이다.
모든 생물이 지금 우리가 보는 대로 창조되었다고 믿는 이는, 습성과 구조가 전혀 들어맞지 않는 동물을 만났을 때 이따금 놀랐을 것이다. 오리와 거위의 물갈퀴 달린 발이 헤엄치라고 만들어졌다는 것보다 더 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물갈퀴 달린 발을 지녔으면서 물가에 거의, 또는 아예 가지 않는 고지대거위14가 있다. 그리고 네 발가락 모두에 물갈퀴가 있는 군함조가 바다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본 사람은 오듀본15 말고는 없다. 한편 논병아리와 물닭은 발가락에 막이 가장자리로만 붙어 있는데도 유난히 물에 산다. 섭금류16의 긴 발가락이 늪과 떠 있는 풀 위를 걷도록 만들어졌다는 것보다 더 뻔해 보이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쇠물닭은 물닭에 못지않게 물에 살고, 흰눈썹뜸부기는 메추라기나 자고새에 못지않게 뭍에 산다. 이런 경우에,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습성은 구조가 그에 맞추어 달라지지 않은 채로 달라졌다. 고지대거위의 물갈퀴 달린 발은 구조에서는 아니라도 기능에서는 흔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군함조에서는 발가락 사이의 깊이 파인 막이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따로따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창조 행위가 있었다고 믿는 이는, 이런 경우에 한 유형의 생물이 다른 유형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 창조주의 뜻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사실을 점잖은 말로 다시 말하는 것일 뿐이다.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의 원리를 믿는 이는 모든 생물이 끊임없이 수를 늘리려 애쓴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생물이든 습성에서든 구조에서든 아주 조금이라도 변하여 그 지역의 다른 주민보다 유리해지면 제자리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 주민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갈퀴 달린 발을 지니고도 마른 땅에 살거나 물에 아주 드물게 내려앉는 거위와 군함조가 있다는 것에, 늪 대신 풀밭에 사는 발가락 긴 흰눈썹뜸부기가 있다는 것에,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곳에 딱따구리가 있다는 것에, 잠수하는 지빠귀와 바다오리의 습성을 지닌 바다제비가 있다는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극도로 완전하고 복잡한 기관에 대하여. 초점을 여러 거리에 맞추고,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하며, 구면수차와 색수차를 바로잡는 그 흉내 낼 수 없는 온갖 장치를 갖춘 눈이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솔직히 고백하건대, 더할 나위 없이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성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완전하고 복잡한 눈에서 아주 불완전하고 단순한 눈에 이르는 수많은 등급이 존재하고 그 등급마다 제 임자에게 쓸모가 있음을 보일 수 있다면, 나아가 눈이 실제로 아주 조금이라도 변이하고 그 변이가 유전된다면(이것은 확실히 그러하다), 또 생활 조건이 달라지는 가운데 그 기관의 어떤 변이나 변화가 동물에게 쓸모 있는 일이 있다면, 완전하고 복잡한 눈이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 데 따르는 난점은 우리 상상으로는 넘을 수 없다 해도 참된 난점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이다. 신경이 어떻게 빛에 민감해지는가 하는 것은 생명 자체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보다 더 우리 일이 아니다. 다만 여러 사실이 내게, 어떤 민감한 신경이든 빛에, 또 소리를 내는 저 거친 공기의 떨림에도 민감해질 수 있으리라는 짐작을 품게 한다는 것만 말해 두겠다.
어떤 종에서 한 기관이 완전해져 온 등급을 찾을 때 우리는 오로지 그 직계 조상만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경우마다 같은 무리의 종, 곧 같은 본래 어버이 형태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후손을 볼 수밖에 없다. 어떤 등급이 있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또 계승의 이른 단계에서 온 어떤 등급이 변하지 않았거나 거의 변하지 않은 상태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보기 위해서다. 지금 있는 Vertebrata(척추동물) 가운데서 우리는 눈의 구조에서 아주 적은 등급만 찾아낼 뿐이고, 화석 종에서는 이 점에 대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이 큰 강에서 눈이 완전해져 온 이른 단계를 찾아내려면 우리는 아마 알려진 가장 낮은 화석층보다 훨씬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Articulata17에서 우리는 색소만 덮여 있고 다른 장치는 전혀 없는 시신경에서 시작하는 계열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이 낮은 단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줄기로 갈라지는 수많은 구조의 등급이 존재함을 보일 수 있어, 제법 높은 단계의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예컨대 어떤 갑각류에는 이중의 각막이 있는데, 안쪽 것은 낱낱의 면으로 나뉘고 그 면마다 안에 렌즈 모양으로 부푼 것이 있다. 다른 갑각류에서는 색소로 덮여 있어 본래는 옆에서 들어오는 빛다발을 막는 구실만 하는 투명한 원뿔이 위쪽 끝에서 볼록해 빛을 모으는 구실을 할 수밖에 없고, 아래쪽 끝에는 불완전한 유리체 같은 것이 있는 듯하다. 여기서 너무 짧고 불완전하게 든 이 사실들은 살아 있는 갑각류의 눈에 등급진 다양함이 많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물의 수가 절멸한 것들에 견주어 얼마나 적은지를 떠올리면, 색소만 덮이고 투명한 막에 싸인 시신경이라는 단순한 장치를 자연선택이 저 큰 Articulata 강의 어느 구성원이 지닌 것만큼 완전한 광학 기구로 바꾸어 놓았다고 믿는 데 나는 아주 큰 난점을 보지 못한다. 다른 많은 구조의 경우보다 더 큰 난점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따라온 이가 이 논저를 끝까지 읽고서 달리 설명할 길 없는 많은 사실이 계승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는 더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하며 독수리의 눈만큼 완전한 구조조차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경우에 그가 이행 등급을 하나도 알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 그의 이성은 그의 상상을 이겨야 한다. 다만 나 자신이 이 난점을 너무나 사무치게 느껴 왔으므로, 자연선택의 원리를 이토록 놀라운 데까지 밀고 가는 것을 누가 얼마만큼 망설이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눈을 망원경에 견주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이 기구가 가장 높은 인간 지성의 오랜 노력으로 완전해졌음을 알고, 자연스레 눈도 얼마간 비슷한 과정으로 만들어졌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이 추론은 주제넘은 것이 아닌가? 창조주가 사람의 것과 같은 지적 능력으로 일한다고 가정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눈을 굳이 광학 기구에 견주어야 한다면, 우리는 머릿속으로 투명한 조직의 두꺼운 층을 하나 놓고 그 아래에 빛에 민감한 신경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 층의 모든 부분이 밀도에서 끊임없이 천천히 달라져 밀도와 두께가 다른 여러 층으로 나뉘고, 그 층들이 서로 다른 거리를 두고 놓이며, 층마다 겉면의 모양이 천천히 달라진다고 가정해야 한다. 나아가 투명한 층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우연한 변화 하나하나를 언제나 골똘히 지켜보면서, 여러 사정 아래서 어떻게든 또 어느 정도로든 더 또렷한 상을 맺게 하는 변화를 하나하나 정성껏 골라내는 힘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 기구의 새로운 상태 하나하나가 백만 배로 불어나고, 더 나은 것이 나올 때까지 저마다 보존되었다가 더 나은 것이 나오면 옛것이 사라진다고 가정해야 한다. 살아 있는 몸에서는 변이가 그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생식이 그것을 거의 끝없이 불리며, 자연선택이 어긋남 없는 솜씨로 개량을 하나하나 골라낼 것이다. 이 과정이 수백만 년에 수백만 년을 거듭하도록 두자. 그리고 해마다 여러 종류의 수백만 개체에서 일어나도록 두자. 그러면 유리로 만든 기구보다 나은 살아 있는 광학 기구가, 창조주의 작품이 사람의 작품보다 나은 그만큼 나은 기구가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우리가 믿어도 좋지 않겠는가?
잇따른 수많은 가벼운 변화로는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었을 복잡한 기관이 존재함을 보일 수 있다면 내 이론은 절대적으로 무너진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우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이행 등급을 알지 못하는 기관이 많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특히 내 이론대로라면 그 둘레에서 절멸이 많이 일어났을 아주 고립된 종을 볼 때 그렇다. 또는 큰 강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된 기관을 볼 때도 그렇다. 뒤의 경우에 그 기관은 지극히 먼 시기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 뒤로 그 강의 많은 구성원이 모두 발달해 왔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기관이 거쳐 온 이른 이행 등급을 찾아내려면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절멸한 매우 오래된 조상 형태를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기관이 어떤 종류의 이행 등급으로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고 결론짓는 데 우리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하등 동물에서는 같은 기관이 동시에 전혀 다른 기능을 하는 경우를 수없이 들 수 있다. 잠자리 애벌레와 Cobites18라는 물고기에서 소화관은 숨쉬고 소화하고 배설한다. Hydra(히드라)에서는 몸을 뒤집을 수 있어서, 그러면 바깥 면이 소화하고 위가 숨을 쉰다. 이런 경우에 자연선택은,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있다면, 두 기능을 하던 부분이나 기관을 한 기능만 하도록 쉽게 특수화해 감지할 수 없는 단계로 그 성질을 온통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구분되는 두 기관이 한 개체에서 같은 기능을 동시에 하는 일도 있다. 한 가지 실례를 들면, 아가미로 물에 녹은 공기를 마시면서 동시에 부레로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는 물고기가 있는데, 이 뒤의 기관에는 공기를 대어 주는 ductus pneumaticus19가 있고 안은 핏줄이 많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다. 이런 경우에 두 기관 가운데 하나가 손쉽게 변하고 완전해져서 그 일을 혼자 다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 변화의 과정 동안 다른 기관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 다른 기관은 아주 다르고 전혀 별개인 목적에 맞추어 변하거나 아주 사라질 수 있다.
물고기의 부레를 든 실례는 좋은 실례다. 본래 한 목적, 곧 뜨는 데 맞추어 만들어진 기관이 전혀 다른 목적, 곧 숨 쉬는 데 쓰이는 기관으로 바뀔 수 있다는 지극히 중요한 사실을 또렷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부레는 어떤 물고기에서 듣는 기관에 딸린 부속으로 끌어들여지기도 했다. 아니면 듣는 장치의 한 부분이 부레를 보충하는 것으로 끌어들여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어느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모든 생리학자는 부레가 고등 척추동물의 허파와 자리와 구조에서 상동이며 「관념상 닮은꼴」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므로 자연선택이 실제로 부레를 허파로, 곧 오로지 숨 쉬는 데만 쓰이는 기관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믿는 데 내가 보기에 큰 난점은 없다.
참된 허파를 지닌 모든 척추동물이,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옛 원형에서, 뜨는 장치 곧 부레를 갖춘 그 원형에서 보통의 생식을 거쳐 내려왔다는 것을 나는 참으로 거의 의심할 수 없다. 오언 교수20가 이 부분을 흥미롭게 기재한 것에서 내가 추론하건대, 우리는 그리하여 이상한 사실 하나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삼키는 음식과 마실 것의 알갱이 하나하나가 기관(氣管)의 입구를 지나가야 하며, 성문이 닫히는 아름다운 장치가 있는데도 허파로 떨어질 위험을 얼마간 안는다는 사실이다. 고등 Vertebrata에서 아가미는 아주 사라졌고, 목 옆의 틈과 고리처럼 돌아가는 동맥이 배(胚)에서 그 옛 자리를 아직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사라진 아가미가 자연선택으로 전혀 다른 목적에 서서히 끌어들여졌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박물학자들이 품은 견해대로 환형동물의 아가미와 등 비늘이 곤충의 날개와 딱지날개와 상동이라면, 아주 오래된 시기에 숨 쉬는 데 쓰이던 기관이 실제로 나는 기관으로 바뀌었을 법한 것과 마찬가지다.
기관의 이행을 살필 때 한 기능에서 다른 기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일이 하도 중요하므로 실례를 하나 더 들겠다. 자루 있는 만각류21에는 살갗이 접힌 아주 작은 주름 둘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포란대라 불렀고 이것은 끈적한 분비물로 알이 주머니 안에서 깰 때까지 붙들어 두는 구실을 한다. 이 만각류에는 아가미가 없고, 작은 포란대를 아울러 몸과 주머니의 온 겉면이 숨 쉬는 구실을 한다. 한편 Balanidæ 곧 고착 만각류에는 포란대가 없고 알은 잘 닫힌 껍데기 안에서 주머니 바닥에 헐겁게 놓이는데, 이것들에는 크게 접힌 아가미가 있다. 이제 한 과의 포란대가 다른 과의 아가미와 엄밀하게 상동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들은 서로 등급을 이루며 이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본래 포란대 노릇을 하면서 숨 쉬는 일도 아주 조금 거들던 작은 살갗 주름이, 크기가 커지고 달라붙게 하는 샘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자연선택을 거쳐 서서히 아가미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루 있는 만각류가 모두 절멸했다면, 그리고 그것들은 이미 고착 만각류보다 훨씬 많이 절멸을 겪었는데, 뒤의 과에 있는 아가미가 본래 알이 주머니 밖으로 쓸려 나가지 않게 막는 기관으로 존재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떤 기관이 잇따른 이행 등급으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었다고 결론짓는 데 극도로 조심해야 하지만, 그래도 무거운 난점이 되는 사례가 있는 것은 틀림없으며 그 가운데 몇몇은 앞으로 낼 저작에서 논하겠다.
가장 무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중성 곤충의 사례다. 그것들은 수컷과도 번식력 있는 암컷과도 아주 다르게 생긴 일이 많은데, 이 경우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물고기의 발전 기관은 또 하나의 특별한 난점이 되는 사례다. 이 놀라운 기관이 어떤 단계를 밟아 생겨났는지는 생각해 볼 길이 없다. 그러나 오언과 다른 이들이 말한 대로 그 속내 구조는 보통의 근육과 아주 비슷하다. 그리고 최근에 가오리가 발전 장치와 아주 비슷한 기관을 지녔으면서도 마테우치22가 단언하듯이 전기를 내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이행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발전 기관은 또 다른, 그리고 한층 더 심각한 난점을 내놓는다. 그것은 열두어 종의 물고기에만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몇몇은 서로 유연(類緣)이 아주 멀기 때문이다. 대개 같은 기관이 같은 강의 여러 구성원에게 나타날 때, 특히 생활 습성이 아주 다른 구성원에게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이 있는 것을 공통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돌리고 몇몇 구성원에게 없는 것은 쓰이지 않음이나 자연선택으로 잃은 것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발전 기관이 그것을 갖춘 하나의 옛 조상에게서 유전되었다면, 우리는 전기를 내는 모든 물고기가 서로 특별히 가까우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또 지질학은 예전에 대부분의 물고기가 발전 기관을 지녔고 그 변화한 후손 대부분이 그것을 잃었다고 믿게 이끌지도 않는다. 서로 다른 과와 목에 속하는 몇몇 곤충에게 발광 기관이 있는 것도 난점이 되는 비슷한 사례다. 다른 사례도 들 수 있다. 예컨대 식물에서 꽃가루 덩이가 자루에 실리고 그 끝에 끈적한 샘이 달린 매우 기묘한 장치가 Orchis와 Asclepias에서 똑같은데, 이 둘은 꽃 피는 식물 가운데 거의 더없이 먼 속이다. 겉보기에 같은 남다른 기관을 갖춘 아주 다른 두 종의 이 모든 사례에서, 기관의 전반적인 모습과 기능은 같을지라도 근본적인 차이를 대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나는 두 사람이 때로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똑같은 발명을 해내듯이, 자연선택도 생물 하나하나의 이로움을 위해 일하며 비슷한 변이를 이용해서 구조를 같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는 두 생물의 두 부분을 때때로 거의 똑같이 변화시켜 왔다고 믿는 쪽으로 기운다.
어떤 기관이 어떤 이행을 거쳐 지금 상태에 이르렀는지 헤아리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살아 있고 알려진 형태가 절멸하고 알려지지 않은 형태에 견주어 지극히 적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로 이끄는 이행 등급이 하나도 알려지지 않은 기관을 꼽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나는 놀랐다. 이 말이 참임은 박물학의 저 오랜 격률 Natura non facit saltum이 실제로 보여 준다. 우리는 경험 많은 박물학자라면 거의 누구의 글에서나 이 인정을 만난다. 밀른 에드워즈23가 잘 말했듯이 자연은 다양함에는 후하지만 새로움에는 인색하다. 창조 이론에서는 어째서 이러해야 하는가? 저마다 자연에서 제자리에 맞게 따로 창조되었다는 많은 독립된 생물의 모든 부분과 기관이 어째서 그토록 한결같이 등급진 단계로 서로 이어져 있어야 하는가? 어째서 자연은 구조에서 구조로 비약하지 않았는가? 자연선택 이론에서 우리는 자연이 어째서 그러지 않는지 또렷이 이해할 수 있다. 자연선택은 잇따른 가벼운 변이를 이용해서만 작용할 수 있고, 결코 비약할 수 없으며 가장 짧고 가장 느린 걸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중요함이 작은 기관에 대하여. 자연선택은 삶과 죽음으로, 곧 유리한 변이를 지닌 개체를 보존하고 구조가 불리하게 어긋난 개체를 없애는 것으로 작용하므로, 나는 이따금 단순한 부분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꼈다. 그 중요함이 잇따라 변이하는 개체를 보존하게 할 만큼 충분해 보이지 않는 부분들 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이따금 눈처럼 완전하고 복잡한 기관의 경우에 느낀 것만큼 큰 어려움을 느꼈다. 종류는 아주 달랐지만 말이다.
첫째로 우리는 어느 한 생물의 살림 전체에 대해서도 너무나 무지해서, 어떤 가벼운 변화가 중요하고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은지 말할 수 없다. 앞의 어느 장에서 나는 더없이 하찮은 형질의 실례를 들었다. 열매에 난 솜털이나 살의 빛깔 같은 것인데, 이것이 벌레의 공격을 좌우하거나 체질의 차이와 상관되어 있어 자연선택이 틀림없이 작용할 수 있다. 기린의 꼬리는 사람이 만든 파리채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파리를 쫓는다는 그토록 하찮은 목적에 맞추어, 조금씩 나아지는 잇따른 가벼운 변화로 지금 쓰임에 맞추어졌다는 것은 언뜻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경우에도 너무 단정하기 전에 멈추어야 한다. 남아메리카에서 소와 다른 짐승이 퍼져 사는 것과 아예 살아남는 것이 벌레의 공격을 견디는 힘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이 작은 적에게서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개체는 새 목초지까지 퍼져 나가 크게 유리해질 것이다. 큰 네발짐승이 파리에게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드물게 그런 일이 있기는 하다), 끊임없이 시달려 힘이 빠지고 그래서 병에 더 잘 걸리거나, 먹이가 모자란 때가 오면 먹이를 찾는 데나 맹수에게서 달아나는 데 그만큼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지금은 중요함이 하찮은 기관도 어떤 경우에는 옛 조상에게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선 시기에 천천히 완전해진 뒤로 거의 같은 상태로 전해져 왔을 것이다. 이제는 그 쓰임이 아주 작아졌는데도 그렇다. 그리고 그 구조에서 실제로 해로운 어긋남은 자연선택이 언제나 막아 왔을 것이다. 꼬리가 대부분의 물에 사는 동물에게 얼마나 중요한 운동 기관인지를 보면, 허파나 변화한 부레로 제 물속 기원을 드러내는 그 많은 뭍짐승에게 꼬리가 널리 있고 여러 목적에 쓰이는 것도 아마 이렇게 설명될 것이다. 물에 사는 동물에게서 잘 발달한 꼬리가 만들어진 뒤에 그것은 온갖 목적으로, 곧 파리채로, 붙잡는 기관으로, 또는 개에서처럼 방향을 트는 데 거드는 것으로 끌어들여졌을 수 있다. 다만 그 도움은 작을 것이다. 꼬리가 거의 없는 산토끼도 충분히 재빠르게 몸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실제로는 거의 중요하지 않고 자연선택과 관계없이 아주 부차적인 원인에서 생겨난 형질에 이따금 중요함을 돌린다. 우리는 기후와 먹이 따위가 아마 짜임새에 얼마간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 형질이 되돌아감의 법칙으로 다시 나타난다는 것, 성장의 상관이 여러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지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 끝으로 성선택이 의지를 지닌 동물에서 수컷 하나가 다른 수컷과 싸우거나 암컷을 매혹하는 데 유리하도록 겉으로 드러나는 형질을 크게 변화시킨 일이 잦았으리라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더구나 구조의 변화가 위에 든 원인이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원인에서 처음 생겨났을 때, 그것은 처음에는 그 종에게 아무 이점도 아니었다가 나중에 새로운 생활 조건 아래서 새로 얻은 습성을 지닌 그 종의 후손에게 이용되었을 수 있다.
이 뒤의 말을 밝혀 줄 실례를 몇 가지 들겠다. 청딱따구리만 있었고 검거나 얼룩덜룩한 종류가 많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다면, 우리는 그 푸른빛이 나무에 사는 이 새를 적에게서 숨겨 주는 아름다운 적응이라고, 따라서 중요한 형질이며 자연선택으로 얻어졌을 법하다고 생각했으리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그러나 실상 나는 그 빛깔이 전혀 다른 원인, 아마 성선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말레이 제도의 덩굴 대나무는 가지 끝 둘레에 모여 난 정교한 갈고리의 도움으로 가장 높은 나무를 타고 오르며, 이 장치가 그 식물에게 더없이 요긴하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덩굴이 아닌 많은 나무에도 거의 비슷한 갈고리가 있는 것을 보면, 대나무의 갈고리는 알려지지 않은 성장의 법칙에서 생겨났고 나중에 그 식물이 더 변해 덩굴이 되면서 이용되었을 수 있다. 독수리 머리의 벗은 살갗은 대개 썩은 것에 몸을 담그는 데 맞춘 직접적인 적응으로 여겨지며, 그럴 수도 있고 썩은 물질의 직접 작용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깨끗한 것을 먹는 수컷 칠면조의 머리 살갗도 마찬가지로 벗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런 추론을 끌어내는 데 매우 조심해야 한다. 어린 젖먹이짐승 머리뼈의 봉합선은 새끼를 낳는 일을 거드는 아름다운 적응이라고 제시되어 왔고, 그것이 이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은, 또는 이 일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깨진 알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는 어린 새와 파충류의 머리뼈에도 봉합선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 구조가 성장의 법칙에서 생겨나 고등 동물이 새끼를 낳는 데 이용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가볍고 중요하지 않은 변이를 낳는 원인에 대해 우리는 깊이 무지하다. 여러 나라에서, 특히 인위선택이 거의 없었던 덜 문명화된 나라에서 우리가 기르는 동물의 품종이 서로 다른 것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곧바로 이를 깨닫는다. 주의 깊은 관찰자들은 축축한 기후가 털의 자람에 영향을 미치고 털과 함께 뿔이 상관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산악 품종은 언제나 저지대 품종과 다르다. 그리고 산이 많은 지역은 뒷다리를 더 많이 쓰게 해서 뒷다리에, 어쩌면 골반의 모양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면 상동 변이의 법칙에 따라 앞다리와 심지어 머리까지 아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 골반의 모양은 압력으로 태 안에 있는 새끼의 머리 모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높은 지대에서 힘겹게 숨 쉬는 일은 가슴통의 크기를 키울 것이라 믿을 만한 까닭이 우리에게 있으며, 여기서 다시 상관이 작용할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미개인24이 기르는 동물은 곧잘 제 먹이를 얻으려고 다투어야 하고, 따라서 어느 정도 자연선택에 노출될 것이며, 체질이 조금씩 다른 개체가 서로 다른 기후에서 가장 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체질과 빛깔이 상관되어 있다고 믿을 까닭이 있다. 또 한 뛰어난 관찰자는 소에서 파리의 공격을 잘 받는 성질이 빛깔과 상관되어 있으며 어떤 식물에 중독되기 쉬운 성질도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니 빛깔도 그렇게 자연선택의 작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려진 변이의 법칙과 알려지지 않은 변이의 법칙이 저마다 얼마나 중요한지 헤아려 볼 수 있을 만큼도 되지 못할 만큼 무지하다. 여기서 그것들을 언급한 것은 다만 이것을 보이기 위해서다. 우리가 기르는 품종들의 특징적인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런데도 그 차이가 보통의 생식을 거쳐 생겨났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인정하는데, 종들 사이의 비슷하고 작은 차이의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고 해서 그 무지에 너무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목적으로 나는 사람의 여러 인종25 사이의 차이를 끌어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차이는 아주 두드러지게 구분된다. 덧붙이자면 이 차이의 기원에도 주로 특별한 종류의 성선택을 거쳐 약간의 빛을 던질 수 있어 보이지만, 여기서 넉넉한 세부에 들어가지 않으면 내 논증이 하찮아 보일 것이다.
앞의 말들에 이어, 최근에 어떤 박물학자들이 구조의 모든 세부가 그 임자의 이로움을 위해 생겨났다는 공리주의적 교설에 맞서 내놓은 항의에 대해 몇 마디 하겠다. 그들은 매우 많은 구조가 사람 눈에 아름답도록, 또는 그저 다양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이 교설이 참이라면 내 이론에는 절대적으로 치명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많은 구조가 그 임자에게 직접 쓸모가 없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한다. 물리적 조건은 아마 그리하여 얻는 이로움과 전혀 상관없이 구조에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성장의 상관도 지극히 중요한 몫을 한 것이 틀림없고, 한 부분의 쓸모 있는 변화가 다른 부분에 직접 쓸모없는 온갖 변화를 딸려 오게 한 일이 잦았을 것이다. 또 예전에는 쓸모 있었거나 예전에 성장의 상관이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원인에서 생겨난 형질이 지금은 직접 쓸모가 없는데도 되돌아감의 법칙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성선택의 효과도 암컷을 매혹하는 아름다움으로 드러날 때에는 어지간히 억지를 부려야만 쓸모 있다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고려는 모든 생물의 짜임새의 주된 부분이 그저 유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물이 자연에서 제자리에 잘 들어맞는 것은 틀림없지만, 많은 구조는 이제 각 종의 생활 습성과 직접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지대거위나 군함조의 물갈퀴 달린 발이 이 새들에게 특별히 쓸모 있다고 거의 믿을 수 없다. 원숭이의 팔과 말의 앞다리와 박쥐의 날개와 물범의 지느러미발에 있는 같은 뼈들이 이 동물들에게 특별히 쓸모 있다고 우리는 믿을 수 없다. 이 구조들은 유전으로 돌려도 안전하다. 그러나 고지대거위와 군함조의 조상에게 물갈퀴 달린 발은 지금 가장 물에 사는 새들에게 그런 것만큼이나 쓸모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물범의 조상에게는 지느러미발이 아니라 걷거나 붙잡기에 알맞은 다섯 발가락의 발이 있었다고 우리는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원숭이와 말과 박쥐의 팔다리에 있는, 공통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여러 뼈도 예전에는 그 조상이나 그 조상의 조상에게, 지금 이토록 다양하게 갈라진 습성을 지닌 이 동물들에게보다 더 특별한 쓸모가 있었다고 더 나아가 감히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러 뼈가, 예전에도 지금처럼 유전과 되돌아감과 성장의 상관 따위 여러 법칙에 놓인 채로, 자연선택으로 얻어졌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의 구조의 모든 세부는 (물리적 조건의 직접 작용을 얼마간 감안한다면) 어떤 조상 형태에게 특별히 쓸모가 있었거나, 지금 그 형태의 후손에게 직접으로든 복잡한 성장의 법칙을 거쳐 간접으로든 특별히 쓸모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선택은 어느 한 종에 오로지 다른 종의 이로움만을 위한 변화를 결코 일으킬 수 없다. 자연 곳곳에서 한 종이 다른 종의 구조를 끊임없이 이용하고 거기서 이득을 얻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연선택은 다른 종을 직접 해치는 구조를 일으킬 수 있고 실제로 자주 일으킨다. 살무사의 독니에서, 또 다른 곤충의 살아 있는 몸에 알을 낳는 맵시벌의 산란관에서 우리가 보는 대로다. 어느 한 종의 구조의 어느 부분이라도 오로지 다른 종의 이로움만을 위해 만들어졌음이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이론을 없애 버릴 것이다. 그런 것은 자연선택으로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박물학 저작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나는 내가 보기에 조금이라도 무게가 있는 것을 단 하나도 찾지 못한다. 방울뱀이 제 몸을 지키고 먹이를 죽이려고 독니를 지녔다는 것은 인정된다. 그런데 어떤 저자들은 이 뱀이 동시에 제게 해가 되도록, 곧 먹이에게 달아나라고 알리려고 방울을 갖추었다고 가정한다. 그럴 바에는 나는 차라리 고양이가 덮치려고 몸을 사릴 때 운명 지어진 쥐에게 알리려고 꼬리 끝을 말아 올린다고 믿겠다. 그러나 여기서 이 문제와 그런 다른 사례에 들어갈 자리가 내게 없다.
자연선택은 어떤 생물에게도 제게 해로운 것을 결코 일으키지 않는다. 자연선택은 오로지 저마다의 이로움으로, 또 그 이로움을 위해 작용하기 때문이다. 페일리26가 말한 대로, 고통을 일으키거나 제 임자를 해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기관은 없다. 각 부분이 일으키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공평하게 견주어 보면 저마다 전체로 보아 이롭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생활 조건이 달라지는 가운데 어떤 부분이 해로워지면 그것은 변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생물은 수없이 많은 것이 절멸했듯이 절멸할 것이다.
자연선택은 각 생물을 같은 지역에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는 다른 주민들만큼, 또는 그보다 조금 더 완전하게 만드는 쪽으로만 기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자연 아래서 이르는 완전함의 정도임을 본다. 예컨대 뉴질랜드의 고유한 산물은 저희끼리 견주면 완전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금 유럽에서 들어온 식물과 동물의 밀려오는 군단 앞에서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자연선택은 절대적인 완전함을 만들어 내지 않으며,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자연 아래서 그런 높은 기준을 늘 만나지도 않는다. 빛의 수차를 바로잡는 것은 저 가장 완전한 기관인 눈에서조차 완전하지 않다고 권위 있는 이가 말한다. 우리 이성이 자연에서 흉내 낼 수 없는 수많은 장치에 열광하며 감탄하도록 이끈다면, 바로 그 이성이 다른 어떤 장치는 덜 완전하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물론 우리는 양쪽 모두에서 쉽게 그르칠 수 있다. 말벌이나 꿀벌의 침이 완전하다고 우리가 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공격하는 많은 동물에게 쓰면 뒤로 난 톱니 때문에 빼낼 수 없어, 내장이 뜯겨 나와 그 벌레가 죽는 일을 피할 수 없게 하는데 말이다.
꿀벌의 침을 먼 조상에게서 본래 뚫고 톱니가 난 도구로 존재했던 것으로, 곧 같은 큰 목의 그 많은 구성원에게 있는 것과 같은 도구로 보고, 그것이 지금 쓰임에 맞추어 변했으나 완전해지지는 않았으며 본래 벌레혹을 만드는 데 맞추어졌던 독이 나중에 세졌다고 본다면, 우리는 아마 침을 쓰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자주 그 벌레 자신의 죽음을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 쏘는 능력이 전체로 보아 그 무리에 쓸모 있다면 그것은 자연선택의 요구를 모두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구성원의 죽음을 부르더라도 말이다. 많은 곤충의 수컷이 제 암컷을 찾아내는 참으로 놀라운 냄새 맡는 능력에 우리가 감탄한다면, 오로지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수천 마리의 수벌이 나오는 것에도 감탄할 수 있겠는가? 그 수벌들은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그 무리에 아무 쓸모가 없고 끝내는 부지런하고 새끼를 낳지 못하는 제 누이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말이다.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우리는 여왕벌의 저 사나운 본능적 미움에도 감탄해야 한다. 그것은 제 딸인 어린 여왕들이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죽이라고, 아니면 그 싸움에서 제가 죽으라고 여왕벌을 몰아세운다. 이것이 그 무리의 이로움을 위한 것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미의 사랑이든 어미의 미움이든, 다행히 뒤의 것은 매우 드물지만, 가차 없는 자연선택의 원리에는 매한가지다. 난초와 다른 많은 식물의 꽃이 곤충을 거쳐 수정되는 저 여러 정교한 장치에 우리가 감탄한다면, 우리 전나무가 알갱이 몇 개를 우연한 바람에 실어 밑씨에 보내려고 짙은 구름 같은 꽃가루를 만들어 내는 것도 똑같이 완전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장의 요약. 이 장에서 우리는 내 이론에 맞서 제기될 수 있는 난점과 반론 가운데 몇 가지를 논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이 매우 무겁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논의에서 몇몇 사실에 빛이 던져졌으며, 그 사실들은 따로따로 창조 행위가 있었다는 이론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종이 어느 한 시기에 끝없이 변이하지 않으며 수많은 중간 등급으로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연선택의 과정이 언제나 매우 느리고 어느 한 때에 아주 적은 수의 형태에만 작용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선택의 과정 자체가 앞선 등급과 중간 등급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절멸시키는 것을 거의 함의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어진 지역에 사는 가까운 종들은 그 지역이 이어져 있지 않았을 때, 곧 생활 조건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감지할 수 없이 이어지며 달라지지 않았을 때 만들어진 일이 잦았음이 틀림없다. 이어진 지역의 두 구역에서 두 변종이 만들어질 때 중간 지대에 맞추어진 중간 변종이 곧잘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미 든 이유로 그 중간 변종은 대개 자기가 이어 주는 두 형태보다 적은 수로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그 두 형태는 더 변해 가는 동안 더 많은 수로 존재하는 까닭에 수가 적은 중간 변종보다 크게 유리하며, 그리하여 대체로 그것을 밀어내고 절멸시키는 데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이 장에서 아주 다른 생활 습성이 서로 이어지며 달라질 수 없다고 결론짓는 데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보았다. 예컨대 박쥐가 처음에는 공중을 미끄러질 수만 있던 동물에서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질 수 없었다고 말하는 데 말이다.
우리는 어떤 종이 새로운 생활 조건 아래서 습성을 바꾸거나 다양하게 갈라진 습성을 지닐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어떤 습성은 가장 가까운 같은 속의 종들과 아주 다를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이 제가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살려고 애쓰고 있음을 떠올리면, 물갈퀴 달린 발을 지닌 고지대거위와 땅에 사는 딱따구리와 잠수하는 지빠귀와 바다오리의 습성을 지닌 바다제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눈처럼 완전한 기관이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믿음은 누구라도 휘청이게 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어떤 기관이든 복잡함에서 길게 이어지는 등급을 우리가 알고 그 등급마다 제 임자에게 좋다면, 생활 조건이 달라지는 가운데 생각해 볼 수 있는 어떤 정도의 완전함이든 자연선택으로 얻는 데 논리적인 불가능은 없다. 중간 상태나 이행 상태를 우리가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경우에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결론짓는 데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많은 기관의 상동과 그 중간 상태가 기능의 놀라운 탈바꿈이 적어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레는 공기로 숨 쉬는 허파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같은 기관이 아주 다른 기능을 동시에 하다가 한 기능에 특수화된 일, 또 아주 다른 두 기관이 같은 기능을 동시에 하다가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도움을 받으며 완전해진 일이 이행을 크게 거들었음이 틀림없다.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는 너무나 무지해서, 어떤 부분이나 기관이 한 종의 안녕에 하도 중요하지 않아 그 구조의 변화가 자연선택으로 천천히 쌓일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성장의 법칙에서 비롯되어 처음에는 어떤 종에게도 아무 이점이 아니던 많은 변화가 나중에 더 변화한 그 종의 후손에게 이용되었다고 자신 있게 믿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예전에 매우 중요했던 부분이 (물에 사는 동물의 꼬리가 뭍에 사는 그 후손에게 남아 있듯이) 곧잘 남아 왔다고 믿을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상태로는 자연선택으로, 곧 오로지 생존경쟁에서 이로운 변이를 보존하는 것으로만 작용하는 그 힘으로 얻어질 수 없을 만큼 하찮아졌는데도 말이다.
자연선택은 한 종에게 오로지 다른 종의 이로움이나 해로움만을 위한 것을 결코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다른 종에게 매우 쓸모 있거나 없어서는 안 되거나 매우 해로운 부분과 기관과 분비물을 일으킬 수는 있으며, 그 모든 경우에 그것은 동시에 제 임자에게도 쓸모가 있다. 생물이 가득 찬 지역마다 자연선택은 주로 주민들 사이의 경쟁을 거쳐 작용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완전함이나 삶을 건 싸움에서 내는 힘을 오직 그 지역의 기준에 맞추어서만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지역, 대개 더 작은 지역의 주민은 다른, 대개 더 큰 지역의 주민에게 곧잘 무너질 것이며 실제로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본다. 더 큰 지역에는 더 많은 개체와 더 다양하게 갈라진 형태가 존재했을 것이고 경쟁도 더 혹독했을 터이므로 완전함의 기준이 더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이 반드시 절대적인 완전함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우리의 한정된 능력으로 판단하는 한, 절대적인 완전함을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선택 이론에서 우리는 박물학의 저 오랜 격률 Natura non facit saltum의 온전한 뜻을 또렷이 이해할 수 있다. 이 격률은 지금 이 세계에 사는 것들만 본다면 엄밀하게 옳지 않다. 그러나 지나간 시대의 모든 것을 아울러 본다면 내 이론에서 그것은 엄밀하게 참일 수밖에 없다.
모든 생물이 두 큰 법칙, 곧 유형의 단일성과 존재의 조건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널리 인정된다. 유형의 단일성이란 같은 강의 생물에서 우리가 보는, 그리고 그 생활 습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구조의 근본적인 일치를 뜻한다. 내 이론에서 유형의 단일성은 계승의 단일성으로 설명된다. 저 빛나는 퀴비에27가 그토록 자주 힘주어 말한 존재의 조건이라는 표현은 자연선택의 원리 안에 온전히 담긴다. 자연선택은 각 생물의 변이하는 부분을 지금 그 생물의 유기적인 생활 조건과 무기적인 생활 조건에 맞추거나, 아니면 아득히 지나간 시기 동안 이미 맞추어 놓은 것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적응은 어떤 경우에는 쓰임과 쓰이지 않음의 도움을 받고, 바깥 생활 조건의 직접 작용에 조금 영향을 받으며, 모든 경우에 여러 성장의 법칙에 놓인다. 그러므로 실은 존재의 조건의 법칙이 더 높은 법칙이다. 그것은 예전의 적응이 유전되는 것을 거쳐 유형의 단일성의 법칙까지 품기 때문이다.
주
1. Natura non facit saltum —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는 뜻의 라틴어 격률이다. 린네가 《식물철학》(1751)에서 쓴 뒤 19세기 박물학에서 널리 인용되었다. 다윈은 이 장에서 이 말을 두 번 끌어오며 자연선택이 어째서 비약할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격률이므로 원문을 그대로 두었다.
2. 제3기 — 원문은 tertiary. 다윈 당시의 지질 구분으로, 지금의 신생대 가운데 제4기 이전의 시기를 가리켰다. 「후기 제3기」는 그 뒤쪽을 말한다.
3. 알프. 드 캉돌 — 알퐁스 드 캉돌(Alphonse de Candolle, 1806~1893). 스위스의 식물학자로 식물의 지리적 분포를 연구했다. 원문의 Alph.는 이름의 줄임이다. 2장에서 이미 나왔다.
4. 포브스 — 에드워드 포브스(Edward Forbes, 1815~1854). 영국의 박물학자로 준설기로 바다 밑을 훑어 수심에 따른 생물 분포를 조사했다.
5. Balanus — 따개비의 한 속이다. 다윈은 1846년부터 1854년까지 만각류를 연구해 네 권짜리 논저를 냈고, 이 장과 뒤의 여러 장에서 그 관찰을 끌어온다.
6. 왓슨 씨 — 휴엣 코트렐 왓슨(Hewett Cottrell Watson, 1804~1881). 영국의 식물학자로 대브리튼의 식물 분포를 구역별로 정리했다.
7. 에이사 그레이 박사 — 에이사 그레이(Asa Gray, 1810~1888). 미국의 식물학자로 북아메리카 식물을 정리했으며 다윈과 오래 편지를 주고받았다.
8. 월러스턴 씨 — 토머스 버논 월러스턴(Thomas Vernon Wollaston, 1822~1878). 영국의 곤충학자로 마데이라와 대서양 섬들의 딱정벌레를 조사했다.
9. J. 리처드슨 경 — 존 리처드슨(John Richardson, 1787~1865). 스코틀랜드의 해군 군의관이자 박물학자로 북극 탐험에 참여해 북아메리카의 동물을 기록했다.
10. Galeopithecus — 다윈이 「날여우원숭이」(flying lemur)라는 당시의 통용명을 함께 붙여 놓은 짐승이다. 오늘날에는 여우원숭이와 갈라 피익목(Dermoptera)으로 따로 세우고 날원숭이라 부른다. 바로 아래의 Lemuridæ는 여우원숭이과다.
11. 로거헤드오리 — 원문은 logger-headed duck. 남아메리카 남단에 사는 날지 못하는 큰 오리로 영어권에서는 뒤에 steamer duck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어 통용명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원어를 그대로 음으로 옮겼다. 에이턴(Thomas Campbell Eyton, 1809~1880)은 잉글랜드의 박물학자로 다윈의 벗이며 오리류를 다룬 논저를 냈다.
12. 타이란새 — 원문은 tyrant flycatcher. 아메리카에 사는 타이란새과(Tyrannidae)의 새를 가리킨다. 다윈이 든 Saurophagus sulphuratus는 비글호 항해에서 그가 직접 지켜본 종이다.
13. 헌 — 새뮤얼 헌(Samuel Hearne, 1745~1792). 영국의 탐험가로 허드슨만 회사에서 일하며 북아메리카 북부를 답사하고 여행기를 남겼다.
14. 고지대거위 — 원문은 upland goose. 남아메리카 남부의 풀밭에 사는 거위로, 다윈이 비글호 항해에서 보았다. 한국어 통용명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원문의 뜻을 살려 옮겼다.
15. 오듀본 — 존 제임스 오듀본(John James Audubon, 1785~1851). 미국의 조류학자이자 화가로 《미국의 새》를 냈다.
16. 섭금류 — 원문은 grallatores. 당시 분류에서 물가를 걸어 다니는 다리 긴 새들을 묶어 부르던 이름이며, 한국어로는 섭금류라 한다.
17. Articulata — 퀴비에가 세운 네 큰 갈래 가운데 하나로, 몸이 마디로 나뉜 동물을 묶었다. 오늘날의 절지동물과 환형동물이 여기 들어갔다. 당시의 분류명이므로 라틴어를 그대로 두었다.
18. Cobites — 미꾸라짓과의 민물고기다. 초판의 표기가 이러하며 오늘날 쓰이는 속명 표기는 Cobitis다.
19. ductus pneumaticus — 부레와 소화관을 잇는 관이다. 당시 해부학의 라틴어 용어이므로 그대로 두었다.
20. 오언 교수 — 리처드 오언(Richard Owen, 1804~1892). 영국의 해부학자이자 고생물학자로 당대 비교해부학의 권위자였다. 다윈은 그의 기재를 자주 인용하지만 오언은 뒤에 《종의 기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21. 만각류 — 원문은 cirripede. 따개비와 거북손처럼 껍데기 안에 자리 잡고 사는 갑각류 무리다. 「자루 있는」과 「고착」은 몸을 붙드는 자루의 있고 없음으로 가른 것이다. 「포란대」는 다윈이 ovigerous frena라 이름 붙인 것을 옮긴 말이다.
22. 마테우치 — 카를로 마테우치(Carlo Matteucci, 1811~1868).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로 동물의 전기를 연구했다. 초판 본문의 표기는 Matteuchi다.
23. 밀른 에드워즈 — 앙리 밀른 에드워즈(Henri Milne Edwards, 1800~1885). 프랑스의 동물학자로 갑각류와 산호를 연구했다.
24. 미개인(savages) — 다윈 당시 유럽 박물학자들이 문자를 쓰지 않는 수렵·채집 사회의 사람을 가리켜 쓰던 말이다. 오늘날에는 쓰지 않으며, 수렵채집민이라 부르거나 야간족·셀크남족처럼 개별 집단의 고유 명칭으로 부른다. 당대의 사고를 보이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25. 사람의 여러 인종 — 원문은 the races of man. 이 책에서 race는 생물의 계통을 뜻할 때 모두 「품종」으로 옮겼으나, 다윈이 사람 집단을 가리켜 쓴 세 자리(6장·11장·13장)만은 「인종」으로 옮겼다. 사람에게 「품종」을 쓰면 원문에 없는 뜻이 실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성선택에 따른 설명은 뒤에 《인간의 유래》(1871) 제2부에서 자세히 펼쳐진다.
26. 페일리 —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 영국의 신학자로 《자연신학》(1802)에서 생물의 정교한 구조를 설계자가 있다는 증거로 들었다. 다윈은 케임브리지에서 그의 책을 읽었고 이 장에서 그의 말을 끌어온다.
27. 퀴비에 —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 프랑스의 박물학자로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을 세웠다. 「존재의 조건」은 몸의 각 부분이 그 생물이 살아가는 조건에 들어맞아야 한다는 그의 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