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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3장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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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생존경쟁

자연선택과의 관련. 이 말을 넓은 뜻으로 쓴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힘. 귀화한 동물과 식물의 빠른 증가. 증가를 억제하는 것들의 성질. 경쟁은 어디에나 있다. 기후의 작용. 개체 수가 많은 데서 오는 보호. 자연 전체에 걸친 모든 동물과 식물의 복잡한 관계. 생존경쟁은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와 같은 종의 변종들 사이에서 가장 혹독하며, 같은 속의 종들 사이에서도 흔히 혹독하다. 생물과 생물의 관계는 모든 관계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이 장의 주제로 들어가기 전에, 생존경쟁이 자연선택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보이기 위해 몇 가지 예비적인 말을 해 두어야 한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자연 상태의 생물에게는 얼마간의 개체 변이성이 있으며, 실제로 이 점이 논박된 적이 있다고는 알지 못한다. 수많은 의심스러운 형태를 종이라 부르든 아종이라 부르든 변종이라 부르든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컨대 영국 식물의 의심스러운 형태 200가지에서 300가지가 어떤 등급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지도, 뚜렷한 변종이 하나라도 있음을 인정한다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개체 변이성과 뚜렷한 변종 몇몇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것이 이 작업의 토대로서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나, 종이 자연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몸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또 생활 조건에, 또 어떤 생물이 다른 생물에 들어맞는 그 정교한 적응은 모두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이 아름다운 상호 적응은 딱따구리와 겨우살이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이고, 네발짐승의 털이나 새의 깃에 매달리는 가장 미천한 기생 생물에서도, 물속으로 잠겨 드는 딱정벌레의 구조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바람에도 실려 날아가는 깃털 달린 씨앗에서도 그보다 아주 조금 덜 또렷하게 보인다. 요컨대 우리는 생물계의 어디에서나, 그 모든 부분에서 아름다운 적응을 본다.

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내가 발단기의 종1이라 불러 온 변종이 마침내 어엿하고 뚜렷한 종으로 바뀌는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렇게 된 종들은 대개 같은 종의 변종들끼리보다 서로 훨씬 더 많이 다른데 말이다. 또 뚜렷이 다른 속이라 불리는 것을 이루며 같은 속의 종들끼리보다 서로 더 많이 다른 그 종의 무리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 모든 결과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생존경쟁에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이 생존경쟁 덕분에, 어떤 변이든 그것이 아무리 미미하고 어떤 원인에서 비롯되었든, 어느 종의 한 개체에게 다른 생물들 및 외부 자연과 맺는 무한히 복잡한 관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이롭다면, 그 변이는 그 개체를 보존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고 대개 그 자손에게 유전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손도 살아남을 기회를 더 많이 얻는다. 어느 종이든 때마다 태어나는 수많은 개체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미미한 변이라도 유용하면 보존되는 이 원리를 자연선택이라는 말로 불러 왔는데, 사람이 지닌 선택의 힘과 이 원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우리는 사람이 선택으로 큰 결과를 분명히 낼 수 있음을, 곧 자연의 손이 그에게 준 미미하지만 유용한 변이를 쌓아 생물을 자기 용도에 맞게 바꿀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자연선택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쉼 없이 작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힘이며, 자연의 작품이 기예의 작품보다 그러한 만큼이나 사람의 미약한 노력보다 헤아릴 수 없이 뛰어나다.

이제 생존경쟁을 조금 더 자세히 논하겠다. 앞으로 낼 책에서는 이 주제를 그 값에 어울리게 훨씬 길게 다룰 것이다. 아버지 드 캉돌2과 라이엘3은 모든 생물이 혹독한 경쟁에 놓여 있음을 널리 또 철학적으로 보여 주었다. 식물에 관해서는 맨체스터의 수석사제 W. 허버트4보다 이 주제를 더 기운차고 유능하게 다룬 사람이 없으니, 이는 분명 그의 대단한 원예 지식에서 나온 결과다. 생존경쟁이 어디에나 있다는 진실을 말로 인정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고, 이 결론을 늘 마음에 담아 두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에 철저히 새겨지지 않는다면 자연의 살림 전체가, 분포와 희귀함과 풍부함과 절멸과 변이에 관한 모든 사실과 더불어 흐릿하게 보이거나 아주 잘못 이해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는 자연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한 것을 바라보고 먹이가 넘치도록 많은 것을 자주 본다. 우리 주위에서 한가로이 노래하는 새들이 대개 곤충이나 씨앗을 먹고 살며 그래서 끊임없이 목숨을 빼앗고 있다는 것은 보지 못하거나 잊는다. 또 그 노래하는 새들이, 또는 그 알과 새끼가 맹금과 맹수에게 얼마나 많이 죽는지도 잊는다. 먹이가 지금은 넘치게 많더라도 돌아오는 해의 모든 철에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늘 마음에 두지는 않는다.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생존경쟁이라는 말을 넓고 비유적인 뜻으로 쓴다. 여기에는 한 생물이 다른 생물에 의존하는 것이 들어가며, 더 중요하게는 개체의 목숨뿐 아니라 자손을 남기는 데 성공하는 것까지 들어간다. 먹이가 모자란 때에 개과 짐승 두 마리가 어느 쪽이 먹이를 얻어 살아남을지를 두고 서로 다툰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막 가장자리의 식물이 가뭄에 맞서 생존경쟁을 한다고들 말하는데, 더 알맞게 말하자면 그것은 물기에 의존한다고 해야 한다. 해마다 씨앗 1,000개를 맺지만 그중 평균 하나만 다 자라는 식물이라면, 이미 땅을 덮고 있는 같은 종류와 다른 종류의 식물들과 다툰다고 말하는 편이 더 참에 가깝다. 겨우살이는 사과나무와 그 밖의 몇몇 나무에 의존하지만, 이 나무들과 다툰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끌어다 붙인 뜻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기생 식물이 같은 나무에 너무 많이 자라면 그 나무는 시들어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가지에 바싹 붙어 자라는 어린 겨우살이 여럿이라면 서로 다툰다고 말하는 편이 더 참에 가깝다. 겨우살이는 새가 퍼뜨리므로 그 존재는 새에 달려 있다. 그리고 다른 식물의 씨앗보다 자기 씨앗을 새가 먹어 퍼뜨리도록 꾀려고 열매 맺는 다른 식물들과 다툰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 서로 넘나드는 이 여러 뜻으로, 나는 편의를 위해 생존경쟁이라는 포괄적인 말을 쓴다.

생존경쟁은 모든 생물이 증가하려는 비율이 높다는 데서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타고난 수명 동안 알이나 씨앗을 여럿 내놓는 생물은 저마다 그 삶의 어느 시기에, 또 어느 철이나 이따금 오는 어느 해에 파괴를 겪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기하급수적 증가의 원리에 따라 그 수가 금세 터무니없이 커져 어느 나라도 그 산물을 떠받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개체가 태어나는 만큼, 어느 경우에나 생존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같은 종의 다른 개체와 다투거나, 다른 종의 개체들과 다투거나, 삶의 물리적 조건과 다투는 것이다. 이것은 맬서스5의 학설을 동물계와 식물계 전체에 여러 배의 힘으로 적용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먹이를 인위적으로 늘릴 수도 없고, 앞날을 헤아려 혼인을 미루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종들이 다소 빠르게 수를 늘리고 있을지 몰라도 모든 종이 그럴 수는 없다. 세계가 그것들을 담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은 본래 증가율이 너무 높아서 파괴되지 않는다면 한 쌍에서 나온 자손만으로도 곧 지구가 덮일 것이라는 규칙에는 예외가 없다. 번식이 느린 사람조차 25년에 두 배가 되었고, 이 속도라면 몇천 년 안에 그 자손이 설 자리조차 말 그대로 없을 것이다. 린네6는 한해살이 식물이 씨앗을 둘만 맺고(이만큼 열매를 못 맺는 식물은 없다) 이듬해 그 어린싹들이 다시 둘씩 맺고 이렇게 이어진다면 20년 뒤에는 100만 그루가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코끼리는 알려진 모든 동물 가운데 번식이 가장 느린 것으로 여겨지는데, 나는 그 자연 증가율의 최솟값을 어림잡느라 적잖이 애를 썼다. 코끼리가 30살에 번식을 시작해 90살까지 번식을 이어 가며 그 사이에 새끼 세 쌍을 낳는다고 보면 실제보다 낮게 잡은 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세기가 지난 끝에는 첫 한 쌍에서 내려온 코끼리가 1,500만 마리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는 한갓 이론적 계산보다 나은 증거가 있다. 두세 철 잇달아 사정이 유리했을 때 자연 상태의 여러 동물이 놀랍도록 빠르게 늘어난 사례가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욱 두드러진 증거는 세계 여러 곳에서 야생으로 돌아간 여러 종류의 가축에서 나온다. 번식이 느린 소와 말이 남아메리카에서, 그리고 근래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늘어난 비율에 관한 보고가 잘 입증되지 않았다면 도무지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도 그렇다. 들여온 식물이 10년도 안 되는 동안 섬 전체에 흔해진 사례를 들 수 있다. 라플라타의 넓은 들판에서 지금 수가 가장 많은 식물 몇 가지는, 다른 식물을 거의 다 밀어내며 수 제곱 리그7의 땅을 덮고 있는데, 유럽에서 들어온 것이다. 또 팰코너8 박사에게 듣기로, 지금 인도에서 케이프 코모린9부터 히말라야까지 퍼져 있는 식물들이 있는데, 이는 아메리카가 발견된 뒤로 그곳에서 들여온 것이다. 이런 경우에(이런 예는 끝없이 들 수 있다) 이 동물이나 식물의 번식력이 갑자기 일시적으로, 알아챌 만한 정도로 높아졌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뻔한 설명은 생활 조건이 매우 유리했고 그 결과 늙은 것과 어린 것이 덜 죽었으며 어린 것이 거의 다 번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기하급수적 증가 비율이, 그 결과는 언제나 놀랍기 마련인데, 귀화한 생물이 새 터전에서 유별나게 빠르게 늘고 널리 퍼지는 것을 그대로 설명해 준다.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모든 식물이 씨앗을 맺고, 동물 가운데 해마다 짝을 짓지 않는 것은 아주 적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식물과 동물이 기하급수적 비율로 증가하려는 경향이 있고, 어떻게든 살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 가장 빠르게 채울 것이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려는 이 경향이 삶의 어느 시기에 파괴로 억제될 수밖에 없음을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우리가 큰 가축에 익숙한 것이 우리를 잘못 이끄는 듯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큰 파괴가 닥치는 것을 보지 못하며, 해마다 수천 마리가 먹이로 도살된다는 것과 자연 상태라면 그만한 수가 어떻게든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

해마다 알이나 씨앗을 수천 개씩 내놓는 생물과 아주 적게 내놓는 생물의 차이는 오직 하나다. 번식이 느린 쪽은 유리한 조건에서 한 지역 전체를 채우는 데 몇 해가 더 걸린다는 것뿐이며, 그 지역이 아무리 넓어도 그렇다. 콘도르는 알을 두 개 낳고 타조는 스무 개를 낳지만, 같은 나라에서 둘 가운데 콘도르가 더 많을 수도 있다. 풀머갈매기는 알을 하나만 낳는데도 세계에서 수가 가장 많은 새로 여겨진다. 어떤 파리는 알을 수백 개 낳고 Hippobosca10 같은 다른 파리는 하나만 낳지만, 이 차이가 두 종의 개체가 한 지역에서 몇이나 부양될 수 있는지를 정하지는 않는다. 알이 많다는 것은 먹이의 양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데 매인 종에게는 얼마간 중요하다. 그 덕에 수를 빠르게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이나 씨앗이 많다는 것의 참된 중요성은 삶의 어느 시기에 일어나는 큰 파괴를 메우는 데 있고, 그 시기는 거의 모든 경우에 이른 시기다. 동물이 어떻게든 제 알이나 새끼를 지킬 수 있다면 적게 낳고도 평균 개체 수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알이나 새끼가 많이 죽는다면 많이 낳아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 종은 절멸할 것이다. 평균 1,000년을 사는 나무라면 1,000년에 씨앗 하나만 맺어도 그 수를 온전히 유지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그 씨앗이 결코 죽지 않고 알맞은 자리에서 반드시 싹튼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나 동물이든 식물이든 평균 개체 수는 그 알이나 씨앗의 수에 간접으로만 달려 있다.

자연을 바라볼 때에는 앞의 고려들을 늘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곧 우리 주위의 생물 하나하나가 수를 늘리려고 힘껏 애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저마다 삶의 어느 시기에는 다툼으로써 살아간다는 것, 세대마다 또는 되풀이되는 간격을 두고 어린 것이든 늙은 것이든 반드시 큰 파괴를 겪는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 억제를 조금만 덜어 주고 파괴를 아주 조금만 누그러뜨려 보라. 그 종의 수는 거의 순식간에 얼마든지 늘어날 것이다. 자연의 얼굴은 무른 표면에 견줄 수 있다. 그 표면에는 날카로운 쐐기 1만 개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쉼 없는 타격에 안쪽으로 박혀 들어가는데, 어떤 때는 이 쐐기가 맞고 다음에는 다른 쐐기가 더 센 힘으로 맞는다.

종마다 수를 늘리려는 본래의 경향을 무엇이 억제하는지는 아주 모호하다. 가장 왕성한 종을 보라. 그 수가 많이 들끓을수록 증가하려는 경향은 그만큼 더 커진다. 우리는 단 하나의 사례에서도 그 억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떤 동물보다도 비할 수 없이 잘 알려진 사람에 관해서조차 이 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헤아려 보는 사람이라면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는 여러 저자가 유능하게 다루어 왔고, 나도 앞으로 낼 책에서 억제 가운데 몇 가지를 꽤 길게 논하겠으며 특히 남아메리카의 야생화한 동물에 관해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는 주요한 점 몇 가지를 독자의 마음에 되살려 놓기 위해 몇 마디만 하겠다. 알이나 아주 어린 동물이 대개 가장 많이 시달리는 듯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식물에서는 씨앗이 엄청나게 많이 죽지만, 내가 해 본 몇몇 관찰로 보아 가장 크게 시달리는 것은 이미 다른 식물이 빽빽이 들어찬 땅에서 싹트는 어린싹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린싹은 또 여러 적에게 엄청난 수로 죽는다. 예컨대 길이 3피트에 너비 2피트인 땅을 파고 고른 다음, 다른 식물에 눌릴 일이 없는 그곳에서 자생 잡초의 어린싹이 올라오는 대로 모두 표시해 두었는데, 357개 가운데 295개나 죽었으며 주로 민달팽이와 곤충 탓이었다. 오래 깎아 온 풀밭을(네발짐승이 바짝 뜯어 먹은 풀밭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자라게 두면, 더 왕성한 식물이 덜 왕성한 식물을 다 자란 것까지 차츰 죽인다. 그리하여 작은 풀밭 한 구획(3피트에 4피트)에서 자라던 20종 가운데 9종이, 다른 종들이 마음대로 자라도록 허용된 탓에 사라졌다.

종마다 먹이의 양이 저마다 증가할 수 있는 극단의 한계를 정해 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종의 평균 개체 수를 정하는 것은 먹이를 얻는 일이 아니라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는 일인 경우가 아주 잦다. 그래서 큰 사유지의 자고와 뇌조와 산토끼 수가 주로 해로운 짐승11을 얼마나 잡아 죽였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잉글랜드에서 앞으로 20년 동안 사냥감을 한 마리도 쏘지 않고 동시에 해로운 짐승도 잡아 죽이지 않는다면, 지금 해마다 수십만 마리의 사냥감이 죽임을 당하고 있음에도 사냥감은 지금보다 오히려 줄어들 것이 거의 틀림없다. 반면에 코끼리나 코뿔소처럼 맹수에게 죽는 일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인도의 호랑이조차 어미가 지키는 어린 코끼리를 감히 덮치려 드는 일은 아주 드물다.

기후는 종의 평균 개체 수를 정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며, 극심한 추위나 가뭄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철이 모든 억제 가운데 가장 효과가 크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1854~55년 겨울에 내 집 땅에 살던 새의 5분의 4가 죽었다고 어림잡았다. 사람의 경우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률 10퍼센트가 유별나게 혹독한 수치임을 떠올리면 이는 엄청난 파괴다. 기후의 작용은 언뜻 보면 생존경쟁과는 아주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기후가 주로 먹이를 줄이는 쪽으로 작용하는 한, 그것은 같은 종이든 다른 종이든 같은 종류의 먹이로 살아가는 개체들 사이에 가장 혹독한 다툼을 불러온다. 기후가, 예컨대 극심한 추위가 곧바로 작용할 때조차, 가장 크게 시달리는 것은 가장 덜 왕성한 것들이거나 깊어 가는 겨울 동안 먹이를 가장 적게 얻은 것들일 것이다. 남에서 북으로 가거나 습한 지역에서 마른 지역으로 갈 때, 우리는 어떤 종들이 차츰 드물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는 것을 어김없이 본다. 그리고 기후의 변화가 눈에 띄므로 그 효과 전부를 기후의 직접 작용으로 돌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견해다. 우리는 종마다 가장 많이 사는 곳에서조차 삶의 어느 시기에는 적에게, 또는 같은 자리와 같은 먹이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에게 끊임없이 엄청난 파괴를 겪는다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이 적이나 경쟁자가 기후의 미미한 변화로 조금이라도 유리해지면 그 수가 늘어날 것이고, 어느 지역이든 이미 거주자로 꽉 차 있으므로 다른 종은 줄어들 것이다. 남쪽으로 여행하다 어떤 종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볼 때, 그 원인은 이 종이 해를 입은 데 있는 만큼이나 다른 종이 유리해진 데에도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북쪽으로 갈 때도 그렇지만 그 정도는 조금 덜하다. 북쪽으로 갈수록 온갖 종의 수가, 따라서 경쟁자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쪽으로 가거나 산을 오를 때에는, 남쪽으로 나아가거나 산을 내려갈 때보다 기후가 곧바로 해를 입혀 생긴 왜소한 형태를 훨씬 더 자주 만난다. 북극 지역이나 눈 덮인 산정, 또는 완전한 사막에 이르면 생존경쟁은 거의 오직 자연의 힘을 상대로 벌이는 것이 된다.

기후가 주로 다른 종을 유리하게 함으로써 간접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우리 정원에 있는 엄청난 수의 식물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그 식물들은 우리 기후를 아주 잘 견디면서도 결코 귀화하지 못하는데, 우리 토종 식물과 경쟁할 수 없고 우리 토종 동물에게 죽는 것을 막아 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이 매우 유리한 사정 덕에 좁은 땅에서 수가 터무니없이 늘어나면 전염병이 흔히 뒤따르는데(적어도 우리 사냥감 동물에서는 대개 그러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생존경쟁과 무관하게 수를 제한하는 억제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른바 전염병 가운데 어떤 것들조차 기생충 탓인 듯 보인다. 그 기생충은 어떤 원인으로,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빽빽이 모인 동물들 사이에서 퍼지기 쉬운 덕에 지나치게 유리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기생 생물과 그 먹이 사이의 다툼 같은 것이 끼어든다.

반면에 많은 경우에는 같은 종의 개체가 그 적의 수에 비해 많이 있는 것이 그 종의 보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밭에서 곡물12과 유채씨 따위를 넉넉히 길러 낼 수 있는데, 씨앗이 그것을 먹는 새의 수에 비해 크게 남기 때문이다. 또 새들은 이 한 철에 먹이가 넘치도록 많아도 씨앗 공급에 비례해 수를 늘릴 수 없는데, 겨울 동안 그 수가 억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원에서 밀이나 그런 식물 몇 그루에서 씨앗을 얻어 보려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성가신지 안다. 나는 이 경우에 씨앗을 하나도 남김없이 잃었다. 같은 종의 개체가 많아야 그 종이 보존된다는 이 견해는, 내 생각에 자연의 몇몇 유별난 사실을 설명해 준다. 아주 희귀한 식물이 그것이 나는 몇 군데에서는 때때로 대단히 흔하다는 사실, 그리고 무리 지어 사는 식물이 그 분포의 맨 끝 경계에서까지 무리 지어, 곧 개체가 빽빽하게 산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그 식물이 여럿이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생활 조건이 유리한 곳에서만 살 수 있었고 그리하여 서로를 완전한 파괴에서 건져 주었다고 믿어도 좋다. 덧붙이자면 잦은 교잡의 좋은 효과와 가까운 사이의 교배가 낳는 나쁜 효과도 이런 경우 가운데 일부에서는 아마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얽힌 주제는 여기서 늘려 말하지 않겠다.

같은 나라에서 함께 다투어야 하는 생물들 사이의 억제와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뜻밖인지 보여 주는 사례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단 하나의 예만 들겠는데, 단순하기는 하나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스태퍼드셔에 있는 한 친척의 땅에서 나는 조사할 수단을 넉넉히 누렸는데, 거기에는 사람의 손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넓고 지극히 메마른 히스 황야13가 있었다. 그런데 성질이 똑같은 수백 에이커는 25년 전에 울타리가 둘러쳐지고 스코틀랜드소나무14가 심겼다. 나무를 심은 쪽 황야에서 토종 식물이 바뀐 정도는 매우 놀라웠고, 전혀 다른 토양으로 옮겨 갈 때 흔히 보이는 것보다도 더했다. 황야 식물들의 비율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물론이고, 황야에서는 찾을 수 없던 식물 12종이(풀과 사초류15는 세지 않았다) 조림지에서 무성하게 자랐다. 곤충에 미친 효과는 더욱 컸을 것이다. 황야에서는 볼 수 없던 식충성 새 6종이 조림지에서는 아주 흔했고, 황야에는 그와 다른 식충성 새 2종이나 3종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무 한 종을 들여놓은 것의 효과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본다. 그 밖에 한 일이라고는 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땅에 울타리를 둘러친 것뿐이었다. 그러나 울타리를 두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는 서리의 판햄 근처에서 뚜렷이 보았다. 거기에는 넓은 히스 황야가 펼쳐져 있고 멀리 언덕 위에 늙은 스코틀랜드소나무가 몇 무더기 서 있다. 지난 10년 안에 넓은 땅에 울타리가 둘러쳐졌고, 저절로 씨가 떨어져 자란 소나무가 지금 무수히 솟아오르는데 서로 너무 빽빽해 다 살 수는 없다. 이 어린 나무들이 사람이 씨를 뿌리거나 심은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서 그 수에 하도 놀라, 울타리를 두르지 않은 황야 수백 에이커를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지점에 가 보았다. 그런데 예전에 심긴 늙은 무더기를 빼면 스코틀랜드소나무를 말 그대로 한 그루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히스 줄기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소가 끊임없이 뜯어 먹어 온 어린싹과 작은 나무가 무수히 있었다. 늙은 무더기 하나에서 100야드쯤 떨어진 지점의 1제곱야드 안에서 나는 작은 나무 32그루를 헤아렸다. 그중 하나는 나이테로 보아 26년 동안 히스 줄기 위로 머리를 내밀려 애썼으나 실패한 것이었다. 그러니 땅에 울타리를 두르자마자 왕성하게 자라는 어린 소나무가 그곳을 빽빽이 덮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황야는 지극히 메마르고 워낙 넓어서, 소가 먹이를 찾아 그곳을 그토록 촘촘하고 효과적으로 뒤졌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가 스코틀랜드소나무의 존재를 전적으로 정한다는 것을 본다. 그런데 세계 여러 곳에서는 곤충이 소의 존재를 정한다. 이에 관한 가장 기이한 예는 아마 파라과이가 보여 준다. 파라과이에서는 소도 말도 개도 야생으로 돌아간 적이 없는데, 그 남쪽과 북쪽에서는 그것들이 야생 상태로 들끓는다. 아사라16와 렝거17는 이것이 파라과이에 어떤 파리가 더 많은 탓임을 보여 주었다. 그 파리는 이 동물들이 갓 태어났을 때 그 배꼽에 알을 낳는다. 이 파리는 수가 많기는 하나 그 증가가 무언가에 의해 늘 억제될 것이며, 아마도 새에게 억제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식충성 새들이(그 수는 아마 매나 맹수가 조절할 것이다) 파라과이에서 늘어난다면 파리는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소와 말이 야생화할 것이며, 이는 (내가 남아메리카의 여러 곳에서 실제로 관찰한 대로) 식물의 상태를 크게 바꿔 놓을 것이 틀림없다. 이는 또 곤충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곤충은 방금 스태퍼드셔에서 본 대로 식충성 새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렇게 복잡함의 원이 점점 커지며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연쇄를 식충성 새에서 시작했고 다시 그것으로 끝냈다. 자연에서 관계가 이만큼 단순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싸움 속의 싸움이 승패를 달리하며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런데도 긴 흐름으로 보면 힘들이 워낙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아주 사소한 것이 어느 생물에게 다른 생물을 누르는 승리를 안기는 일이 분명 흔할 터인데도 자연의 얼굴은 오랜 기간 한결같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무지는 깊고 우리의 자만은 높아서, 어떤 생물이 절멸했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워한다. 그 원인을 보지 못하니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대격변을 불러들이거나 생명 형태의 존속 기간에 관한 법칙을 지어낸다!

자연의 계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식물과 동물이 복잡한 관계의 그물로 서로 얽혀 있음을 보여 주는 예를 하나 더 들고 싶다. 나는 뒤에, 외래종인 Lobelia fulgens가 잉글랜드의 이 지역에서는 곤충의 방문을 전혀 받지 못하며 그 결과 그 독특한 구조 때문에 씨앗을 결코 맺을 수 없음을 보일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 난과 식물 가운데 많은 것은 꽃가루덩이를 옮겨 수정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나방의 방문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 나는 뒝벌18이 Viola tricolor(삼색제비꽃)의 수정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믿을 근거가 있는데, 다른 벌은 이 꽃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해 본 실험으로 나는 벌의 방문이 우리 토끼풀류의 수정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는 아니어도 적어도 매우 이롭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흔한 Trifolium pratense(붉은토끼풀)는 뒝벌만이 찾는데, 다른 벌은 그 꿀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뒝벌 속 전체가 잉글랜드에서 절멸하거나 아주 드물어진다면 삼색제비꽃과 붉은토끼풀이 아주 드물어지거나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어느 지역이든 뒝벌의 수는 그 벌집과 둥지를 망가뜨리는 들쥐의 수에 크게 달려 있다. 뒝벌의 습성을 오래 살펴 온 H. 뉴먼19 씨는 “잉글랜드 전역에서 뒝벌의 3분의 2가 넘게 그렇게 죽는다”고 믿는다. 그런데 쥐의 수는 누구나 알듯이 고양이의 수에 크게 매여 있다. 뉴먼 씨는 “마을과 작은 도시 근처에서 나는 뒝벌의 둥지가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는데, 이는 쥐를 잡는 고양이가 많은 탓이라고 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느 지역에 고양이과 동물이 많이 있다는 것이, 먼저 쥐를 거치고 다음에 벌을 거쳐 그 지역에 어떤 꽃이 얼마나 흔한지를 정할 수도 있다는 말은 충분히 믿을 만하다!

종마다 삶의 서로 다른 시기에, 또 서로 다른 철이나 해에 작용하는 여러 억제가 아마 함께 작용할 것이다. 대개 어느 하나나 몇몇 억제가 가장 강력하겠지만, 그 모두가 함께 그 종의 평균 개체 수나 심지어 그 종의 존재 자체를 정한다. 어떤 경우에는 같은 종에 서로 크게 다른 억제가 지역에 따라 작용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뒤엉킨 둑을 덮고 있는 풀과 떨기나무를 볼 때 우리는 그 비율과 종류를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것에 돌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견해인가! 아메리카의 숲을 베어 내면 아주 다른 식물이 솟아난다는 말은 누구나 들어 보았다. 그런데 미국 남부의 오래된 인디언 봉분20 위에 지금 자라는 나무들이 주위의 처녀림과 똑같이 아름다운 다양성과 종류의 비율을 보인다는 관찰이 있다. 여러 종류의 나무가 저마다 해마다 씨앗을 수천 개씩 흩뿌리며 긴 세기 동안 여기서 얼마나 다투었겠는가. 곤충과 곤충 사이에, 또 곤충과 달팽이와 그 밖의 동물이 새와 맹수를 상대로 얼마나 싸웠겠는가. 모두가 늘어나려고 애쓰며, 모두가 서로를 먹거나 나무를, 또는 그 씨앗과 어린싹을, 또는 처음 땅을 덮어 나무의 성장을 억제한 다른 식물을 먹고 살았을 것이다! 깃털 한 줌을 위로 던져 보라. 모두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여러 세기에 걸쳐 그 오래된 인디언 유적 위에 지금 자라는 나무의 비율과 종류를 정해 온 무수한 식물과 동물의 작용과 반작용에 비하면 이 문제가 얼마나 단순한가!

한 생물이 다른 생물에 의존하는 것은, 기생 생물이 그 먹이에 의존하는 것처럼, 대개 자연의 계단에서 멀리 떨어진 생물들 사이에 있다. 메뚜기와 풀을 먹는 네발짐승의 경우처럼, 엄격한 뜻에서 서로 생존을 다툰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흔히 그렇다. 그러나 그 다툼은 거의 언제나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서 가장 혹독할 것이다. 그들은 같은 지역을 드나들고 같은 먹이를 필요로 하며 같은 위험에 놓이기 때문이다. 같은 종의 변종들 사이에서도 그 다툼은 대개 거의 그만큼 혹독할 것이며, 우리는 때때로 그 겨룸이 금세 결판나는 것을 본다. 예컨대 밀의 여러 변종을 함께 뿌리고 그 섞인 씨앗을 다시 뿌리면, 토양이나 기후에 가장 잘 맞거나 본래 번식력이 가장 좋은 몇몇 변종이 다른 변종을 이겨 씨앗을 더 많이 내고, 그 결과 몇 해 안에 다른 변종을 완전히 밀어낼 것이다. 빛깔이 여러 가지인 스위트피처럼 지극히 가까운 변종들조차 섞인 채로 유지하려면 해마다 따로 거두어들여 씨앗을 알맞은 비율로 섞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약한 종류는 꾸준히 수가 줄어 사라질 것이다. 양의 변종도 그렇다. 어떤 산지 변종은 다른 산지 변종을 굶겨 몰아내므로 함께 기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다. 약용 거머리의 서로 다른 변종을 함께 두었을 때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우리 재배 식물이나 가축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그 변종들이 힘과 습성과 체질이 그토록 정확히 같아서, 자연 상태의 생물처럼 서로 다투도록 두고 씨앗이나 어린 것을 해마다 골라 주지 않아도 섞인 개체군의 본래 비율이 여섯 세대 동안 유지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같은 속의 종들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나 대개 습성과 체질이 얼마간 비슷하고 구조는 언제나 비슷하므로, 서로 경쟁하게 될 때 그 다툼은 대개 다른 속의 종들 사이보다 같은 속의 종들 사이에서 더 혹독할 것이다. 제비 한 종이 근래 미국의 여러 지역으로 퍼지면서 다른 종이 줄어든 데서 이를 본다. 근래 스코틀랜드 여러 곳에서 미슬지빠귀21가 늘어나자 노래지빠귀가 줄어들었다. 쥐 한 종이 서로 아주 다른 기후에서 다른 종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는가! 러시아에서는 작은 아시아 바퀴가 같은 속의 덩치 큰 바퀴를 어디서나 앞으로 밀어냈다. 들갓 한 종이 다른 종을 밀어내며, 다른 경우도 그렇다. 자연의 살림에서 거의 같은 자리를 채우는 가까운 형태들 사이에서 경쟁이 가장 혹독할 까닭은 희미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삶의 큰 싸움에서 어느 종이 다른 종을 누르고 이긴 까닭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앞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귀결을 끌어낼 수 있다. 곧 모든 생물의 구조는 먹이나 거처를 두고 경쟁하게 되는 다른 모든 생물, 또는 자기가 벗어나야 하는 생물, 또는 자기가 잡아먹는 생물의 구조와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흔히 드러나지 않게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의 구조에서, 또 호랑이 몸의 털에 매달리는 기생 생물의 다리와 갈고리의 구조에서 뻔히 드러난다. 그러나 민들레의 아름다운 깃털 달린 씨앗에서, 또 물방개의 납작하고 털이 줄지어 난 다리에서는 그 관계가 처음에는 공기와 물이라는 요소에만 국한된 듯 보인다. 그런데도 깃털 달린 씨앗의 이점은 땅이 이미 다른 식물로 빽빽이 덮여 있다는 사실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놓여 있음이 틀림없다. 그래야 씨앗이 널리 퍼져 비어 있는 땅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방개의 다리 구조는 물속으로 잠겨 들기에 아주 잘 맞아서, 그 덕에 물방개는 다른 물속 곤충과 경쟁하고 제 먹이를 사냥하며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많은 식물의 씨앗 안에 쌓여 있는 양분은 언뜻 보면 다른 식물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씨앗에서(완두와 콩이 그렇다) 나온 어린 식물이 긴 풀 속에 뿌려졌을 때 힘차게 자라는 것으로 보아, 씨앗 속 양분의 주된 쓸모는 어린싹이 사방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다른 식물과 다투는 동안 그 성장을 돕는 데 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분포 범위의 한가운데에 있는 식물을 보라. 그것은 왜 그 수를 두 배나 네 배로 늘리지 않는가? 우리는 그 식물이 조금 더한 더위나 추위, 습기나 건조함을 아주 잘 견딜 수 있음을 안다. 다른 곳에서는 조금 더 덥거나 춥고 더 습하거나 마른 지역까지 퍼져 있으니 말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 식물에게 수를 늘릴 힘을 주고자 한다면 그 경쟁자나 그것을 잡아먹는 동물보다 나은 어떤 이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 지리적 범위의 경계에서는 기후에 대한 체질의 변화가 이 식물에게 분명 이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기후의 혹독함만으로 죽는 자리까지 퍼져 나가는 식물이나 동물은 몇 되지 않는다고 믿을 근거가 있다. 생명의 맨 끝 경계, 곧 북극 지역이나 완전한 사막의 가장자리에 이르기까지 경쟁은 그치지 않는다. 땅이 지극히 춥거나 마를 수는 있으나, 그래도 가장 따뜻하거나 가장 습한 자리를 두고 몇몇 종 사이에, 또는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 경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새로운 경쟁자들 사이로 새 나라에 놓이면 기후가 이전 터전과 똑같더라도 그 생활 조건은 대개 본질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새 터전에서 평균 개체 수를 늘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본래 살던 나라에서 했을 것과는 다르게 바꿔 놓아야 한다. 다른 경쟁자나 적의 무리보다 나은 어떤 이점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상 속에서 어떤 형태에게 다른 형태보다 나은 이점을 주어 보려 애쓰는 것은 좋다. 아마도 우리는 단 하나의 사례에서도 성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시도는 모든 생물의 상호 관계에 관해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킬 것이다. 이 납득은 얻기 어려워 보이는 만큼이나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물 하나하나가 기하급수적 비율로 늘어나려 애쓰고 있다는 것, 저마다 삶의 어느 시기에, 한 해의 어느 철에, 세대마다 또는 간격을 두고 생존을 다투어야 하고 큰 파괴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흔들림 없이 마음에 담아 두는 것뿐이다. 이 다툼을 헤아릴 때 우리는 자연의 전쟁이 쉼 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고, 죽음은 대개 빠르게 오며, 힘센 것과 건강한 것과 행복한 것이 살아남아 번식한다는 온전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해도 좋다.

주

  1. 1. 발단기의 종 — 다윈이 변종을 가리켜 쓴 표현(incipient species). 아직 종으로 굳어지지 않은 단계라는 뜻이다.

  2. 2. 드 캉돌 — 오귀스탱 피람 드 캉돌(1778~1841). 스위스의 식물학자로 식물의 분포와 식물 사이의 경쟁을 논했다. 원문의 "아버지 드 캉돌"은 아들 알퐁스와 구별하려는 표현이다.

  3. 3. 라이엘 — 찰스 라이엘(1797~1875). 영국의 지질학자이며 《지질학 원리》의 저자로, 다윈이 가장 많이 의지한 동시대 학자다.

  4. 4. 허버트 — 윌리엄 허버트(1778~1847). 맨체스터 교회의 수석사제이자 원예가로 구근 식물 연구로 알려졌다.

  5. 5. 맬서스 —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1766~1834).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했다. 뒤의 "앞날을 헤아려 혼인을 미루는 일"은 맬서스가 사람에게 권한 억제책을 가리킨다.

  6. 6. 린네 — 칼 린네(1707~1778). 스웨덴의 박물학자로 생물 이름에 두 낱말을 쓰는 명명법을 세웠다. 원문 표기는 Linnæus다.

  7. 7. 제곱 리그 — 리그는 당시 쓰인 거리 단위로 1리그는 대략 4.8킬로미터다.

  8. 8. 팰코너 — 휴 팰코너(1808~1865).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이자 고생물학자로 인도에서 오래 일했다.

  9. 9. 케이프 코모린 — 인도 아대륙의 최남단 곶. 오늘날의 칸야쿠마리다.

  10. 10. Hippobosca — 짐승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파리의 한 속. 원문에는 소문자 hippobosca로 적혀 있다.

  11. 11. 해로운 짐승 — 원문의 vermin. 당시 영국의 사냥터 관리에서 사냥감을 해치는 육식 조수(여우·족제비·매 따위)를 통틀어 부른 말이다.

  12. 12. 곡물 — 원문의 corn. 영국에서 corn은 옥수수가 아니라 밀이나 보리 같은 곡류를 가리킨다.

  13. 13. 히스 황야 — 히스와 낮은 관목이 자라는 메마른 산성 토양의 벌판. 잉글랜드에 널리 퍼져 있다.

  14. 14. 스코틀랜드소나무 — 원문의 Scotch fir. 학명은 Pinus sylvestris이며, 당시 영국에서는 전나무를 뜻하는 fir를 붙여 불렀다.

  15. 15. 사초류 — 원문의 carices는 Carex(사초속)의 복수형이다.

  16. 16. 아사라 — 펠릭스 데 아사라(1746~1821). 스페인의 군인이자 박물학자로 파라과이와 라플라타의 동물을 기록했다.

  17. 17. 렝거 — 요한 루돌프 렝거(1795~1832). 스위스의 의사이자 박물학자로 파라과이의 포유류를 기록했다.

  18. 18. 뒝벌 — 원문의 humble-bee. 오늘날 영어로는 bumble-bee라 부른다.

  19. 19. 뉴먼 — 다윈이 인용한 H. 뉴먼. 잉글랜드에서 뒝벌의 습성을 오래 관찰한 사람이다.

  20. 20. 인디언 봉분 — 원문은 Indian mounds.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쌓아 올린 흙 무덤과 토루를 가리킨다. 「인디언」은 다윈 당시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통틀어 부르던 말이며, 오늘날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 하거나 체로키·라코타처럼 개별 집단의 고유 명칭으로 부른다. 당대의 사고를 보이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21. 21. 미슬지빠귀 — 원문의 missel-thrush. 겨우살이 열매를 먹는 데서 온 이름이며, 뒤에 나오는 노래지빠귀(song-thrush)와는 다른 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