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적용
이 글에 주장된 원리들이 세부를 논하는 바탕으로 좀 더 널리 인정되고 나서야, 그 원리들을 정부와 도덕의 여러 갈래 부문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하는 일을 어떤 이득을 기대하며 시도해 볼 수 있다. 내가 세부 문제에 관하여 하려는 몇 마디 언급은 그 원리들을 귀결까지 따라가려는 것이라기보다 원리들을 예시하려는 것이다. 내가 내놓는 것은 적용이라기보다 적용의 표본이며, 이 글의 교설 전체를 함께 이루는 두 준칙의 뜻과 한계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그 사안에 적용되는지 의심스러워 보이는 경우에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판단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다.
그 준칙은 이러하다. 첫째, 개인은 자기 행동이 자기 말고 어느 누구의 이익에도 관계되지 않는 한 그 행동에 대하여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충고와 가르침과 설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좋음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길 경우의 회피가, 사회가 그의 행위에 대한 싫음이나 못마땅함을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둘째, 남의 이익을 해치는 행동에 대해서는 개인이 책임을 지며, 자기를 보호하는 데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이 사회의 의견이라면 그는 사회적 처벌이나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첫째로, 남의 이익에 손해가 가거나 손해가 갈 개연성이 있다는 것만이 사회의 간섭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러므로 그것이 언제나 그런 간섭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많은 경우에 개인은 정당한 목적을 추구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서 정당하게, 남에게 고통이나 손실을 끼치거나 그들이 얻으리라고 마땅히 바랄 수 있었던 좋은 것을 가로챈다. 개인들 사이의 이런 이익 충돌은 나쁜 사회 제도에서 생겨나는 일이 잦지만 그 제도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고, 어떤 제도 아래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더러 있다. 사람이 넘치는 직업에서, 또는 경쟁 시험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누구든, 둘이 다 바라는 대상을 놓고 벌이는 어떤 겨룸에서 남보다 앞선 사람은 누구든, 남의 손실에서, 남의 헛된 노력과 남의 실망에서 이익을 거둔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귀결에 겁먹지 않고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일반 이익에 더 낫다는 것은 두루 인정되는 바다. 달리 말하면 사회는 실망한 경쟁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괴로움을 면할 법적 권리도 도덕적 권리도 인정하지 않으며, 일반 이익에 어긋나기에 허용할 수 없는 성공 수단이 쓰였을 때, 곧 속임수나 배신, 그리고 완력이 쓰였을 때에만 간섭에 나서야 한다고 느낀다.
다음으로, 거래는 사회적 행위다. 어떤 종류의 물건이든 대중에게 팔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사회 일반의 이익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행위는 원리상 사회의 관할 안에 들어온다. 그래서 한때는 중요하다고 여겨진 모든 경우에 값을 정하고 제조 과정을 규제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오랜 싸움을 거친 뒤에야 그렇게 되었지만, 물건의 값이 싼 것과 품질이 좋은 것은 생산자와 판매자를 완전히 자유롭게 두고 사는 사람들이 다른 데서 사들일 동등한 자유만을 유일한 견제로 삼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확보된다는 것이 인정된다. 이것이 이른바 자유무역의 교설이며, 이 교설은 이 글에서 주장한 개인의 자유의 원리와는 다르면서도 그만큼 단단한 근거에 서 있다. 거래에 대한 제한, 또는 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에 대한 제한은 확실히 구속이며, 모든 구속은 구속인 한에서(quâ restraint)1 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구속은 사회가 구속할 자격이 있는 행위의 부분만을 건드리며, 그것들이 잘못된 것은 오직 그것들로써 낳으려는 결과를 실지로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의 원리가 자유무역의 교설에 걸려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교설의 한계에 관하여 일어나는 문제들의 대부분에도 그것은 걸려 있지 않다. 예를 들면 불순물을 섞는 속임수를 막기 위해 어느 만큼의 공적 통제가 허용될 수 있는가, 위생상의 예방 조치나 위험한 직업에 고용된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고용주에게 어느 정도까지 강제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다. 이런 문제들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cæteris paribus)2 사람들을 저들에게 맡겨 두는 것이 통제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낫다는 한에서만 자유에 관한 고려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정당하게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은 원리상 부정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거래에 대한 간섭과 관련된 문제들 가운데 본질적으로 자유의 문제인 것들이 있다. 이미 언급한 메인주 금주법3, 중국에 아편을 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4, 독극물 판매의 제한, 요컨대 간섭의 목적이 어떤 특정한 물건을 얻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데 있는 모든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간섭들이 못마땅한 것은 생산자나 판매자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는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 보기들 가운데 하나, 곧 독극물 판매의 경우는 새로운 문제를 연다. 경찰의 기능이라 부를 만한 것의 올바른 한계, 곧 범죄나 사고를 막기 위해 자유가 어디까지 정당하게 침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범죄가 저질러진 뒤에 그것을 찾아내고 벌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저질러지기 전에 미리 대비하여 막는 일도 정부의 이론 없는 기능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정부의 예방 기능은 처벌 기능보다 자유를 해치는 쪽으로 남용되기가 훨씬 더 쉽다. 사람의 정당한 행동의 자유 가운데, 어떤 형태든 비행을 저지르기 쉽게 만든다고 그것도 그럴듯하게 그려 낼 수 없는 부분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적 권위가, 심지어 사인이라도, 누군가 범죄를 저지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면, 범죄가 저질러질 때까지 손을 놓고 바라볼 의무는 없으며 그것을 막으려고 끼어들 수 있다. 독극물이 살인을 저지르는 목적 말고는 어떤 목적으로도 결코 사들여지지도 쓰이지도 않는다면 그 제조와 판매를 금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해롭지 않은 목적뿐 아니라 유용한 목적으로도 필요할 수 있으며, 한쪽 경우에 제한을 두면 다른 쪽 경우에도 그 제한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사고를 막는 일은 공적 권위의 마땅한 직무다. 공무원이든 다른 누구든 안전하지 않다고 확인된 다리를 건너려는 사람을 보았고 그 위험을 그에게 알릴 시간이 없다면, 그를 붙잡아 되돌려 세워도 그의 자유를 실제로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란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하는 데 있고, 그는 강에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악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해악의 위험이 있을 뿐일 때에는, 그가 그 위험을 무릅쓰게 만드는 동기가 충분한지를 그 사람 자신 말고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그는 (그가 아이이거나, 헛소리를 하는 상태이거나, 숙고하는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없는 어떤 흥분이나 몰입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위험을 경고받아야 할 뿐이며, 자기를 그 위험에 내놓는 일을 강제로 막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슷한 고려를 독극물 판매와 같은 문제에 적용하면, 있을 수 있는 여러 규제 가운데 어느 것이 원리에 어긋나고 어느 것이 어긋나지 않는지 우리가 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약물에 그 위험한 성질을 나타내는 말을 적어 붙이게 하는 것과 같은 예방 조치는 자유를 어기지 않고 강제할 수 있다. 사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물건에 독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싶어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의사의 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용도로 그 물건을 얻는 일을 때로는 불가능하게, 언제나 값비싸게 만들 것이다. 독성 물질을 다른 목적으로 원하는 이들의 자유를 고려할 만한 정도로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 수단을 통해 저질러지는 범죄의 길에 어려움을 놓을 수 있는, 내게 보이는 유일한 길은 벤담의 적절한 표현으로 「미리 마련해 둔 증거」(preappointed evidence)5라 불리는 것을 갖추어 두는 데 있다. 이 장치는 계약의 경우에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계약이 맺어질 때, 뒷날 다툼이 생기는 경우에 그 계약이 실제로 맺어졌다는 것과 그것을 법적으로 무효로 만들 만한 것이 정황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가 있게 하기 위하여, 법이 이행을 강제하는 조건으로 서명이나 증인의 인증과 같은 일정한 형식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통상적이고 옳은 일이다. 그 효과는 거짓 계약, 또는 알려진다면 그 효력을 없앨 만한 정황에서 맺어진 계약의 길에 큰 장애를 놓는 데 있다. 이와 비슷한 성질의 예방 조치를 범죄의 도구가 되기에 알맞은 물건의 판매에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판매자에게 거래의 정확한 시각, 사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 판 것의 정확한 종류와 양을 장부에 적어 넣게 하고, 무엇에 쓰려는지 묻고 받은 대답을 기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의 처방이 없을 때에는, 뒷날 그 물건이 범죄의 목적에 쓰였다고 믿을 이유가 생기는 경우에 그 사실을 산 사람에게 확실히 결부시킬 수 있도록, 제삼자의 참석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런 규제는 대체로 그 물건을 얻는 데는 이렇다 할 장애가 되지 않겠지만, 발각되지 않고 그것을 부당하게 쓰는 데는 아주 상당한 장애가 될 것이다.
미리 막는 예방 조치로 자기에게 저질러지는 범죄를 물리칠, 사회에 본디 있는 권리는, 순전히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비행은 예방이나 처벌로써 간섭할 수 없다는 준칙에 뚜렷한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하는 일은 통상의 경우에 입법으로 간섭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술기운에 남에게 폭력을 쓴 행위로 한 번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법적 제한 아래 두는 것, 그가 뒷날 취한 것이 발각되면 벌을 받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면 그 다른 범죄로 받게 될 처벌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나는 여길 것이다. 취기가 남에게 해를 끼치도록 부추기는 사람의 경우에 스스로 취하는 일은 남에게 저지르는 범죄다. 마찬가지로 게으름은, 대중의 부조를 받는 사람의 경우나 그것이 계약 위반을 이루는 경우를 빼면, 횡포를 부리지 않고서는 법적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게으름 때문이든 피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원인 때문이든 어떤 사람이 남에 대한 자기 법적 의무를, 예컨대 자기 자녀를 부양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다른 수단이 없을 때 강제 노동으로 그 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은 횡포가 아니다.
다음으로, 직접적으로는 행위자 자신에게만 해로우므로 법으로 금해서는 안 되지만 공공연히 행해질 경우 좋은 예의를 어기는 것이 되고 그리하여 남에게 저지르는 위반의 범주에 들어오므로 정당하게 금할 수 있는 행위가 많다. 이런 종류에 속하는 것이 품위를 어기는 위반이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으며, 더구나 그것이 우리 주제와는 간접적으로만 이어져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 자체로 비난받을 만하지도 않고 비난받을 만하다고 여겨지지도 않는 많은 행위의 경우에도 공공연히 하는 데 대한 반대는 똑같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놓아 온 원리들과 어긋나지 않는 답을 찾아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비난받을 만하다고 여겨지지만 거기서 직접 나오는 악이 온전히 행위자에게 떨어지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존중이 사회로 하여금 막지도 벌하지도 못하게 하는 개인의 행위가 있을 때, 행위자가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자유로이 권하거나 부추길 수 있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권유하는 경우는 엄밀히 말해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위의 경우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거나 유인을 내놓는 것은 사회적 행위이며, 따라서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행위 일반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첫인상이 바로잡힌다. 그 경우가 개인의 자유라는 정의 안에 엄밀히 들어오지는 않는다 해도 개인의 자유의 원리가 근거로 삼는 이유들은 그 경우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일이라면 무엇에서든 사람들이 스스로 위험을 감당하며 자기에게 가장 좋게 보이는 대로 행동하도록 허락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기에 알맞은 일이 무엇인지 서로 의논하고, 의견을 나누고, 제안을 주고받는 것도 똑같이 자유로워야 한다. 하도록 허락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도록 권하는 일도 허락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의심스러워지는 것은 오직 부추기는 사람이 자기 충고에서 개인적 이익을 얻을 때, 곧 사회와 국가가 악이라고 여기는 것을 밀어 주는 일을 먹고살기 위해서나 금전상의 이득을 위해 자기 생업으로 삼을 때다. 그때에는 정말로 새로운 복잡함의 요소가 끼어든다. 곧 대중의 복리라고 여겨지는 것과 어긋나는 이해를 지니고 그것을 거스르는 데 자기 생활의 근거를 두는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간섭해야 하는가, 그러지 않아야 하는가? 예를 들어 혼외 성관계6는 용인되어야 하고 도박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포주가 되거나 도박장을 여는 일이 자유로워야 하는가? 이 사안은 두 원리 사이의 바로 그 경계선에 놓인 것들 가운데 하나여서, 둘 가운데 어느 쪽에 제대로 속하는지 단번에 분명해지지 않는다. 양쪽에 다 논거가 있다. 용인하는 쪽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생업으로 삼아 그 일을 해서 먹고살거나 이득을 본다는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면 허용될 만한 일을 범죄로 만들 수는 없다. 그 행위는 일관되게 허용되거나 일관되게 금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여태 옹호해 온 원리들이 참이라면, 사회는 사회로서 오직 개인에게만 관계되는 일을 잘못이라고 판정할 자격이 없다. 사회는 말려서 그만두게 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으며, 한 사람이 설득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말리는 것만큼 자유로워야 한다. 이에 맞서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대중이나 국가가 억압이나 처벌을 목적으로, 개인의 이익에만 영향을 끼치는 이러저러한 행위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권위 있게 판정할 자격은 없다 해도, 그들이 그것을 나쁘다고 본다면 그것이 나쁜지 아닌지가 적어도 다툴 만한 문제라고 전제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다. 그리고 이것이 전제된다면, 사심 없지 않은 권유, 곧 도저히 공정할 수 없는 부추기는 자들의 영향을 물리치려고 애쓰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그들은 한쪽에 직접적인 개인의 이해를 걸고 있고, 그 한쪽이 바로 국가가 잘못이라고 믿는 쪽이며, 그들이 그것을 오직 개인적 목적으로 밀어 준다는 것은 그들 자신도 인정하는 바다.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이해를 노리고 남의 성향을 자극하는 자들의 술책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벗어나, 지혜롭든 어리석든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택하도록 일을 정돈한다고 해서 잃는 것이 있을 수도 없고 좋음이 희생될 것도 없다고 다그쳐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불법 도박에 관한 법령들이 도무지 옹호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곧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서나 서로의 집에서, 또는 자기들의 회비로 세우고 회원과 그 방문자에게만 열린 어떤 모임 장소에서 도박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해도, 공공 도박장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 금지가 결코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경찰에게 얼마만큼의 횡포한 권력을 주더라도 도박장은 언제나 다른 명목 아래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도박장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은밀함과 알 수 없음을 지니고 일을 벌이도록 강제할 수는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찾는 이들 말고는 아무도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사회는 이보다 더한 것을 겨냥해서는 안 된다. 이 논거들에는 상당한 힘이 있다. 주범은 풀려나도록 허락되는데(또 허락되어야 하는데) 종범을 벌하는 도덕적 변칙, 또는 혼외 성관계를 한 사람은 두고 알선한 자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가두고 도박한 자는 두고 도박장을 지킨 자에게 그렇게 하는 도덕적 변칙을 정당화하기에 그 논거들이 충분한지 나는 감히 판정하지 않겠다. 사고파는 통상의 행위에 이와 비슷한 근거로 간섭하는 일은 더욱더 있어서는 안 된다. 사고파는 물건은 거의 모두 지나치게 쓰일 수 있고, 판매자에게는 그 지나침을 북돋울 금전상의 이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삼아, 예컨대 메인주 금주법에 찬성하는 논거를 세울 수는 없다. 독한 술을 다루는 부류의 사람들은 그것의 남용에 이해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정당한 사용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인들이 절제 없음을 북돋우는 데 지닌 이해는 실제의 악이며, 그 정당화가 없다면 정당한 자유의 침해가 될 제한을 국가가 부과하고 보증을 요구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국가가 어떤 행위를 허용하면서도 그것이 행위자의 최선의 이익에 어긋난다고 여길 때 그것을 간접적으로 억눌러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가 취하는 데 쓰이는 수단의 값을 더 비싸게 만들거나, 파는 곳의 수를 제한하여 그것을 구하기 어렵게 만드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실천적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여러 구별이 필요하다. 자극물을 얻기 더 어렵게 만드는 것만을 목적으로 그것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금지하는 것과 정도에서만 다른 조치이며, 그 금지가 정당할 경우에만 정당할 것이다. 값이 오르는 것은 모두, 그 오른 값에 재력이 미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금지이며, 재력이 미치는 이들에게는 특정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데 대하여 물리는 벌이다. 국가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의무와 도덕적 의무를 다한 뒤에 그들이 어떤 즐거움을 고르고 어떻게 소득을 쓰는가는 그들 자신에게 관계되는 일이며, 그들 자신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이런 고려는 첫눈에는 세수를 목적으로 자극물을 특별한 과세 대상으로 고르는 일을 나무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재정을 위한 과세는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 과세의 상당한 부분이 간접세여야 한다는 것, 따라서 국가는 어떤 소비 물품의 사용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에게는 금지나 다름없을 벌을 물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금을 물릴 때 소비자가 가장 없이 지낼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더욱 강한 이유로(à fortiori)7 아주 적당한 양을 넘어서면 그 사용이 확실히 해롭다고 여기는 것들을 앞세워 고르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그러므로 자극물에 대한 과세는 가장 많은 세수를 낳는 지점까지는 (국가가 그것이 내놓는 세수를 다 필요로 한다고 할 때) 허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찬성할 만한 것이다.
이 물건들의 판매를 어느 정도 배타적인 특권으로 만드는 문제는 그 제한이 무슨 목적에 봉사하도록 의도되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답해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든 곳은 경찰의 단속을 필요로 하며, 이런 종류의 곳은 특히 그렇다. 사회에 저지르는 위반이 거기서 비롯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물건들을 (적어도 그 자리에서 소비할 것으로) 팔 권한을 행실의 훌륭함이 알려졌거나 보증된 사람들에게 한정하는 것, 공적인 감시에 필요한 만큼 여닫는 시간에 관한 규제를 두는 것, 그리고 그 집을 지키는 자의 묵인이나 무능으로 치안을 어기는 일이 되풀이되거나 그곳이 법을 어길 일을 꾸미고 준비하는 만남의 장소가 될 경우 허가를 거두는 것은 알맞은 일이다. 그보다 더한 제한은 원리상 정당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맥주집과 술집의 수를 제한하는 일, 그것도 다가가기를 더 어렵게 만들고 유혹의 기회를 줄인다는 명시된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일은, 그 편의를 남용할 사람이 더러 있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을 불편에 놓이게 할 뿐 아니라, 일하는 계급이 드러내어 아이나 야만인처럼 다루어지고 뒷날 자유의 특권을 받기에 알맞게 되도록 구속의 교육 아래 놓이는 사회 상태에나 어울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자유로운 나라에서도 일하는 계급이 그 원칙으로 통치된다고 내놓고 말하는 원칙이 아니다. 그리고 자유에 마땅한 값을 매기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자유에 맞게 교육하고 자유인으로 통치하려는 온갖 노력이 다 소진되고 그들이 아이로서만 통치될 수 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증명된 뒤가 아니라면, 그들이 그렇게 통치되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안을 그저 말해 놓는 것만으로도, 여기서 고려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경우에 그런 노력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드러난다. 오직 이 나라의 제도가 앞뒤 맞지 않는 것들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전제적인, 또는 이른바 가부장적인 정부의 체계에 속하는 것들이 우리 관행 안에 들어올 자리를 얻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우리 제도의 전반적인 자유는 그 구속이 도덕 교육으로서 실제로 어떤 효력을 지니게 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통제를 행하는 일을 막는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지적했듯이, 개인만이 관계되는 일에서 개인이 지니는 자유는, 여럿이 함께 관계되고 그들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계되지 않는 일을 서로의 합의로 규율할, 몇 사람이 되었든 그들에게 있는 그에 걸맞은 자유를 함축한다. 이 문제는 관련된 모든 사람의 뜻이 바뀌지 않는 한 어려움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그 뜻이 바뀔 수 있으므로, 그들만이 관계되는 일에서도 그들이 서로 약정을 맺는 것이 필요한 경우가 잦고, 그렇게 할 때에는 일반 규칙으로서 그 약정이 지켜지는 것이 알맞다. 그러나 아마도 모든 나라의 법에서 이 일반 규칙에는 몇 가지 예외가 있다. 제삼자의 권리를 어기는 약정에 사람들이 얽매이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약정이 그들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이 그 약정에서 그들을 풀어 주는 충분한 이유로 여겨지는 일도 더러 있다. 예를 들어 이 나라와 다른 대부분의 문명한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를 노예로 팔거나 팔리도록 허락하는 약정은 무효이며, 법으로도 의견으로도 강제되지 않는다. 자기 삶의 처지를 자발적으로 처분할 그의 권능을 이렇게 제한하는 근거는 분명하며, 이 극단의 경우에 아주 또렷이 보인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의 자발적인 행위에 간섭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자유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발적인 선택은 그가 그렇게 고른 것이 그에게 바람직하거나 적어도 견딜 만하다는 증거이며, 그의 좋음은 그가 그것을 추구할 자기 자신의 수단을 취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대체로 가장 잘 확보된다. 그러나 자기를 노예로 팔면서 그는 자기 자유를 내던진다. 그 한 번의 행위를 넘어서는 자유의 장래의 사용을 모두 포기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을 처분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바로 그 목적을 자기 경우에 스스로 무너뜨린다. 그는 더는 자유롭지 않고, 그때부터는 그가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주어질 유리한 추정을 더는 지니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 자유의 원리가 그에게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자기 자유를 남에게 넘기도록 허락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이 특이한 경우에 그 힘이 그토록 두드러지는 이 이유들은 분명히 훨씬 더 널리 적용된다. 그러나 삶의 필요가 어디서나 그 이유들에 한계를 그어 놓는데, 삶의 필요는 우리가 자유를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에 대한 이런저런 제한에 동의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오직 행위자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모든 일에서 통제받지 않는 행동의 자유를 요구하는 그 원리는, 제삼자에게 관계되지 않는 일에서 서로에게 얽매이게 된 이들이 서로를 그 약정에서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런 자발적인 풀어 줌이 없다 해도, 돈이나 돈으로 값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계약을 빼면, 철회할 자유가 조금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계약이나 약정은 어쩌면 없을 것이다. 빌헬름 폰 훔볼트 남작은 내가 이미 인용한 그 뛰어난 저술에서, 인격적 관계나 봉사를 담은 약정은 한정된 기간을 넘어서는 결코 법적으로 구속력을 지녀서는 안 되며, 이 약정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혼인은 양쪽의 감정이 그것과 어우러지지 않으면 그 목적이 어그러진다는 특이함을 지니므로 그것을 해소하는 데 어느 한쪽의 선언된 뜻 말고는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기 확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곁말로 논하기에는 너무 중요하고 너무 복잡한 주제이므로, 나는 예시의 목적에 필요한 만큼만 그것을 건드린다. 훔볼트 남작의 논술이 간결하고 일반적이어서 이 경우에 그가 전제를 논하지 않고 결론을 밝히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는 이 문제가 자기가 스스로를 한정한 것만큼 단순한 근거로는 판정될 수 없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아보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명시적인 약속으로든 행동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앞으로도 어떤 정해진 길로 계속 행동할 것을 믿게 북돋우고, 그 위에 기대와 계산을 세우고 자기 인생 계획의 어느 부분을 그 전제에 걸게 했을 때, 그에게는 그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일련의 도덕적 의무가 생겨나며, 그 의무는 다른 것에 밀릴 수는 있어도 무시될 수는 없다. 또한 계약을 맺은 두 당사자 사이의 관계에 남에게 미치는 결과가 따랐다면, 그것이 제삼자를 어떤 특이한 처지에 놓았거나 혼인의 경우처럼 제삼자를 아예 세상에 나오게 했다면, 계약을 맺은 양쪽 모두에게 그 제삼자에 대한 의무가 생겨나며, 그 의무의 이행, 또는 적어도 어떻게 이행하느냐는 계약의 본래 당사자 사이의 관계가 이어지는지 끊어지는지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의무들이 마음 내키지 않는 쪽의 행복을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희생시켜 계약을 이행하도록 요구하는 데까지 미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으며, 나도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의무들은 이 문제의 필수 요소다. 그리고 폰 훔볼트가 주장하듯이 그 의무들이 당사자들이 약정에서 스스로를 풀어 낼 법적 자유에 아무 차이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해도(나 역시 그것들이 큰 차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그것들은 도덕적 자유에는 반드시 큰 차이를 만든다. 남의 그토록 중요한 이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걸음을 결심하기 전에 사람은 이 모든 사정을 헤아려야 하며, 그 이익에 마땅한 무게를 주지 않는다면 그는 그 잘못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 나는 자유의 일반 원리를 더 잘 예시하기 위해 이 뻔한 말들을 했으며, 그 개별 문제에 이런 말이 조금이라도 필요하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는 보통 자녀의 이익이 전부이고 어른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논의된다.
인정된 일반 원리가 없기 때문에 자유가 거두어져야 할 곳에서 주어지기도 하고 주어져야 할 곳에서 거두어지기도 하는 일이 잦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유럽 세계에서 자유의 정서가 가장 강한 경우들 가운데 하나는, 내가 보기에 그 정서가 아주 잘못 놓인 경우다. 사람은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남의 일이 자기 일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남을 위해 행동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할 자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각자에게 특별히 관계되는 일에서 각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한편, 국가가 그에게 남에 대하여 지니도록 허락한 어떤 권력을 그가 행사하는 데는 빈틈없는 통제를 유지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는 가족 관계의 경우에 거의 온전히 무시되는데,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에서 이 경우는 다른 모든 경우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거의 전제적인 권력은 여기서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악을 온전히 없애는 데는 아내들이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지니고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는 것 말고는 더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며, 또 여기서는 자리 잡은 불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자유라는 변명을 끌어들이지 않고 권력의 옹호자로 드러내어 나서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관념이 잘못 적용되어 국가가 자기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제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녀의 경우다. 어떤 사람의 자녀가 비유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그 자신의 일부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그가 자녀에 대하여 지닌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통제에 법이 아주 조금이라도 간섭하는 것을 의견이 그토록 시샘하며 지켜보기 때문이고, 그의 자기 행동의 자유에 대한 거의 어떤 간섭보다도 더 시샘하며 지켜보기 때문이다. 인류 일반은 권력보다 자유를 그만큼이나 덜 값있게 여긴다. 예를 들어 교육의 경우를 보라. 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 대하여 국가가 일정한 수준까지 교육을 요구하고 강제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공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 진리를 인정하고 주장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한 사람을 세상에 불러낸 뒤에 그 사람이 남에 대하여 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삶에서 자기 몫을 잘 해내기에 알맞은 교육을 그에게 주는 것이 어버이(또는 법과 관행이 지금 서 있는 대로라면 아버지)의 가장 신성한 의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실로 거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의 의무라고 한목소리로 선언되면서도, 이 나라에서 그에게 그것을 이행하도록 의무를 지운다는 말을 견디고 들을 사람은 거의 없다. 자녀에게 교육을 확보해 주기 위해 어떤 노력이나 희생을 하도록 요구받는 대신, 교육이 공짜로 주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가 그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 아이의 몸에 먹을 것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마음에 가르침과 훈련을 줄 수 있으리라는 온당한 전망 없이 아이를 세상에 나오게 하는 것이 그 불행한 자식에게도 사회에도 저지르는 도덕적 범죄라는 것, 그리고 어버이가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될 수 있는 대로 어버이의 부담으로 그것이 이행되도록 살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다.
보편 교육을 강제할 의무가 한번 인정되고 나면, 국가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관한 어려움은 끝이 날 것이다. 그 어려움이 지금 이 문제를 종파와 당파의 한갓 싸움터로 바꾸어 놓고, 교육하는 데 쓰였어야 할 시간과 노력을 교육을 놓고 다투는 데 헛되이 쓰이게 만든다. 정부가 모든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요구하기로 마음을 굳힌다면, 그 교육을 제공하는 수고는 스스로 덜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어버이들이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대로 교육을 얻도록 맡겨 두고, 더 가난한 계급의 아이들의 수업료를 돕고 대신 낼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이들의 학교 비용 전부를 대는 데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교육에 대하여 이유를 갖추어 제기되는 반대들은 국가가 교육을 강제하는 일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그 교육을 지휘하는 일을 스스로 떠맡는 데 적용되며,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인민의 교육 전체나 그 가운데 큰 부분이 국가의 손에 있어야 한다는 데는 나도 누구에게 못지않게 반대한다. 성격의 개별성이, 그리고 의견과 행동 방식의 다양함이 중요하다고 말해 온 모든 것은 교육의 다양함도 똑같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일반적인 국가 교육은 사람들을 서로 똑같이 되도록 빚어내려는 한갓 방편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을 부어 넣는 거푸집은 정부 안의 우세한 권력이 좋아하는 거푸집이며, 그 권력이 군주든 사제 집단이든 귀족 계급이든 지금 세대의 다수든 마찬가지이므로, 그 교육이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만큼 그것은 정신에 대한 전제를 세우고 자연스러운 경향에 따라 몸에 대한 전제로 이어진다. 국가가 세우고 통제하는 교육은, 아예 있어야 한다면, 서로 겨루는 여러 실험 가운데 하나로서만 있어야 하며, 다른 것들을 일정한 훌륭함의 수준에 머물게 하기 위한 본보기와 자극의 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물론 사회 일반이 너무 뒤처진 상태8에 있어서 정부가 그 일을 맡지 않으면 스스로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을 갖출 수 없거나 갖추려 하지 않을 경우는 예외다. 그럴 때에는 정부가 두 큰 악 가운데 덜한 것으로서 학교와 대학의 일을 스스로 떠맡을 수 있으며, 산업의 큰 사업을 맡기에 알맞은 모습의 민간 기업이 그 나라에 없을 때 합본 회사의 일을 떠맡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체로 그 나라에 정부의 후원 아래 교육을 제공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충분히 많다면, 바로 그 사람들이 교육을 의무로 만드는 법과 비용을 댈 수 없는 이들에 대한 국가의 보조가 함께 보장해 주는 보수 아래에서, 자발성의 원칙에 따라 똑같이 좋은 교육을 줄 수 있고 또 주려 할 것이다.
그 법을 강제하는 수단은 모든 아이에게 미치고 어린 나이에 시작되는 공적인 시험 말고는 다른 것일 수 없다. 모든 아이가 글을 읽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험을 받아야 하는 나이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읽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면, 아버지에게 충분한 변명의 근거가 없는 한 그에게 알맞은 정도의 벌금을 물릴 수 있고, 필요하다면 그의 노동으로 그것을 갚게 할 수 있으며, 아이는 그의 비용으로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해마다 한 번씩 시험을 되풀이하고 과목의 범위를 차츰 넓혀서, 일정한 최소한의 일반 지식을 모두가 얻는 것과, 더 나아가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을 사실상 의무로 만들어야 한다. 그 최소한을 넘어서는 모든 과목에 대해서는 자발적인 시험이 있어야 하고, 거기서 일정한 숙달의 수준에 이른 이는 누구나 증명서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이런 장치를 통하여 의견에 부당한 영향을 끼치는 일을 막기 위해, 시험에 합격하는 데 요구되는 지식은 (언어와 그 사용처럼 단순히 도구가 되는 지식의 부분을 넘어서면) 더 높은 등급의 시험에서조차도 오직 사실과 실증 과학에만 한정되어야 한다. 종교나 정치, 또는 다투어지는 다른 주제에 관한 시험은 의견의 참과 거짓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의견이 이러저러한 근거로 이러저러한 저자나 학파나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묻는 것이어야 한다. 이 제도 아래에서 자라나는 세대는 다투어지는 모든 진리에 관하여 지금보다 나쁜 처지에 놓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처럼 국교회 신자로든 비국교도로든9 길러질 것이고, 국가는 다만 그들이 배운 국교회 신자, 배운 비국교도가 되도록 살필 뿐이다. 어버이가 그러기를 고른다면 그들이 다른 것을 배우는 바로 그 학교에서 종교를 배우는 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투어지는 주제에 관하여 국가가 자기 시민의 결론을 한쪽으로 기울이려는 온갖 시도는 악이다. 그러나 국가가 어떤 주제에 관하여 한 사람의 결론이 귀 기울일 만한 것이 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그가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해 주겠다고 내놓는 것은 아주 마땅한 일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는 둘 가운데 어느 쪽 편을 들든, 심지어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든, 로크와 칸트10 양쪽에 대한 시험을 다 견뎌 낼 수 있다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무신론자에게 그리스도교의 증거들에 관한 시험을 치르게 하는 데에도, 그가 그것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도록 요구받지 않는 한, 이치에 닿는 반대가 없다. 그러나 더 높은 갈래의 지식에 관한 시험은 온전히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격이 모자란다는 주장을 근거로 어떤 사람을 직업에서, 심지어 교사라는 직업에서 배제하도록 정부에 허락한다면 그것은 정부에 너무 위험한 권력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빌헬름 폰 훔볼트와 함께, 학위나 학문상 직업상의 습득을 증명하는 다른 공적인 증명서는 시험에 나와서 그 시험을 견뎌 낸 모든 이에게 주어져야 하지만, 그런 증명서가 그 증언에 여론이 붙여 줄 무게 말고는 겨루는 이들에 대하여 어떤 이점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유라는 관념이 잘못 놓여, 어버이 쪽의 도덕적 의무가 인정되는 것을 막고 법적 의무가 부과되는 것을 막는 일은 교육의 문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앞의 것에는 늘 가장 강한 근거가 있고 뒤의 것에도 많은 경우에 그러하다. 한 사람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 자체는 인간 삶의 범위 안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행위 가운데 하나다. 그 삶을 받을 존재가 적어도 바람직한 삶을 누릴 통상의 기회를 갖지 못할 터인데도 이 책임을 떠맡는 것, 곧 저주가 될 수도 있고 축복이 될 수도 있는 삶을 내주는 것은 그 존재에게 저지르는 범죄다. 그리고 사람이 넘치거나 넘칠 위협을 받는 나라에서 아주 적은 수를 넘어 자녀를 낳아 그들의 경쟁으로 노동의 보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자기 노동의 보수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저지르는 중대한 위반이다.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당사자가 가족을 부양할 수단이 있음을 보일 수 없으면 혼인을 금하는 법들11은 국가의 정당한 권한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법이 편의에 맞는지 아닌지는 (주로 그 지역의 사정과 감정에 달린 문제다) 제쳐 두고, 그 법들이 자유를 어기는 것으로서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그런 법은 해로운 행위, 곧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금하기 위한 국가의 간섭이며, 그 행위는 법적 처벌을 덧붙이는 것이 편의에 맞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에도 비난과 사회적 낙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행위다. 그런데도 오늘날 통용되는 자유의 관념은,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일에서 개인의 자유가 실제로 침해되는 데는 그토록 쉽게 굽히면서도, 그 성향을 마음껏 따른 결과가 자식에게 비참하고 타락한 삶이 되고 그 행위에 어떻게든 영향을 받을 만큼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여러 겹의 악이 되는 때에, 그 성향에 어떤 구속을 두려는 시도는 밀어낼 것이다. 인류가 자유에 바치는 이상한 존중을 자유에 대한 그들의 이상한 존중 없음과 견주어 보면, 사람에게는 남에게 해를 끼칠 없어서는 안 될 권리가 있고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를 즐겁게 할 권리는 조금도 없다고 상상해도 될 듯하다.
나는 정부의 간섭의 한계에 관한 큰 부류의 문제들을 마지막 자리로 미루어 두었는데, 그 문제들은 이 글의 주제와 가깝게 이어져 있으면서도 엄밀히 말하면 그 주제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간섭에 반대하는 이유가 자유의 원리에 달려 있지 않은 경우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들의 행동을 구속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돕는 일이다. 곧 그들의 이익을 위한 어떤 일을, 그들이 개인으로든 자발적인 결합으로든 스스로 하도록 맡겨 두는 대신 정부가 해야 하는지, 또는 되게 해야 하는지가 물어진다.
정부의 간섭이 자유의 침해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일 때, 그 간섭에 대한 반대는 세 종류일 수 있다.
첫째는 해야 할 일이 정부보다 개인들이 더 잘할 법할 때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어떤 일을 해 나가거나 그 일을 어떻게 또 누가 해 나갈지 정하는 데 그 일에 직접 이해가 걸린 이들만큼 알맞은 사람은 없다. 이 원칙은 한때 그토록 흔했던, 입법부나 정부 관리가 산업의 통상적인 과정에 간섭하는 일을 나무란다. 그러나 주제의 이 부분은 정치경제학자들이 충분히 길게 다루었고, 이 글의 원리들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다.
둘째 반대는 우리 주제에 더 가깝게 이어져 있다. 많은 경우에 개인들이 그 특정한 일을 평균적으로는 정부 관리만큼 잘하지 못할지라도, 그 일이 정부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그럼에도 바람직하다. 그것이 그들 자신의 정신을 교육하는 수단, 곧 그들의 활동하는 능력을 강하게 하고 그들의 판단을 연습시키며 그렇게 그들에게 맡겨진 사안들에 대한 친숙한 지식을 그들에게 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적이지 않은 사건에서) 배심 재판, 자유롭고 민중이 참여하는 지방 제도와 시 제도, 자발적인 결사에 의한 산업 사업과 자선 사업의 운영을 권할 주된 이유이며,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이것들은 자유의 문제가 아니고 먼 경향으로만 그 주제에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발달의 문제다. 이것들을 국민 교육의 부분으로서, 곧 실로 시민을 기르는 고유한 훈련이자 자유로운 인민의 정치 교육의 실천적인 부분으로서 길게 논하는 일은 지금과는 다른 자리에 속한다. 그 훈련은 그들을 개인과 가족의 이기심이라는 좁은 울에서 끌어내어 공동의 이익을 이해하고 공동으로 관계되는 일을 관리하는 데 익숙해지게 하며, 공적인 또는 반쯤 공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고 서로를 떼어 놓는 대신 하나로 묶는 목표로 자기 행위를 이끌도록 길들인다. 이런 습관과 힘이 없으면 자유로운 헌정은 운용될 수도 지켜질 수도 없으며, 지방의 여러 자유라는 충분한 바탕에 정치적 자유가 놓이지 않은 나라에서 그 자유가 너무나도 자주 한때에 그치고 마는 것이 그 보기다. 순전히 지방의 일을 그 지방이 관리하고 산업의 큰 사업을 금전상의 수단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이들의 결합이 관리하는 것은, 발달의 개별성과 행동 방식의 다양함에 속한다고 이 글에서 밝혀 온 모든 이점이 더욱 권하는 바다. 정부의 활동은 어디서나 똑같아지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개인과 자발적인 결사에서는 여러 갈래의 실험이 있고 경험의 다양함이 끝이 없다. 국가가 유용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은 시도에서 나온 경험의 중앙 보관소가 되고, 그 경험을 활발하게 돌리고 퍼뜨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국가의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실험 말고는 어떤 실험도 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험하는 이마다 남의 실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부의 간섭을 제한할 셋째이자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정부의 권력을 불필요하게 늘리는 데서 오는 큰 악이다. 정부가 이미 행하고 있는 기능에 새 기능이 하나씩 덧붙을 때마다 희망과 두려움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더 널리 퍼지고, 대중 가운데 활동적이고 야심 있는 부분이 점점 더 정부의 식객, 또는 정부가 되기를 노리는 어떤 당파의 식객으로 바뀐다. 도로와 철도와 은행과 보험 회사와 큰 합본 회사와 대학과 공공 자선 기관이 모두 정부의 갈래라면, 게다가 시 자치 단체와 지방 위원회가 지금 그들에게 맡겨진 모든 것과 함께 중앙 행정의 부서가 된다면, 이 모든 서로 다른 사업의 직원들이 정부에 의해 임명되고 정부에서 보수를 받으며 삶에서 올라서는 일마다 정부를 바라본다면, 언론의 온갖 자유와 입법부의 민중적 구성으로도 이 나라나 다른 어떤 나라를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은 행정 기구가 더 효율적이고 더 과학적으로 짜일수록, 곧 그것을 움직일 가장 잘 자격을 갖춘 손과 머리를 얻기 위한 장치가 더 능숙할수록 더 커질 것이다. 잉글랜드에서는 근래에 정부의 문관직 구성원 전원을 경쟁 시험으로 뽑아 그 일자리에 구할 수 있는 가장 총명하고 가장 잘 배운 사람을 얻자는 제안이 나왔고12, 이 제안에 찬성하고 반대하는 말과 글이 많았다. 반대하는 이들이 가장 힘주어 내세우는 논거 가운데 하나는, 국가의 상임 관리라는 생업은 가장 높은 재능을 끌어들일 만큼 보수와 중요함의 전망을 내놓지 못하며 그런 재능은 언제나 전문 직업에서, 또는 회사와 다른 공적 단체의 일에서 더 끌리는 경력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거를 그 제안에 우호적인 이들이 그 제안의 주된 어려움에 대한 답으로 썼더라면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하는 이들에게서 나왔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반대의 이유로 내세워지는 것이 바로 그 제안된 제도의 안전판이다. 정말로 그 나라의 높은 재능을 모두 정부의 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쪽으로 기우는 제안은 불안을 자아낼 만하다. 조직된 협력이나 크고 넓은 시야를 요구하는 사회의 모든 일이 정부의 손에 있고 정부의 관직이 두루 가장 유능한 사람들로 채워진다면, 순전히 사변적인 것을 빼고는 그 나라의 넓어진 교양과 숙련된 지성이 모두 수많은 관료 집단에 모일 것이며, 공동체의 나머지는 모든 것을 오직 그들에게서 바라볼 것이다. 뭇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모든 일에서 지시와 명령을 바랄 것이고, 유능하고 뜻이 큰 이들은 자기 자신의 출세를 바랄 것이다. 이 관료 집단의 서열에 받아들여지는 것, 그리고 받아들여진 뒤에는 그 안에서 올라가는 것이 야망의 유일한 대상이 될 것이다. 이 체제 아래에서는 바깥의 대중이 실천적 경험이 없어서 관료 집단이 일해 나가는 길을 비판하거나 견제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제 정치의 우연이나 민중적 제도의 자연스러운 작동이 이따금 개혁하려는 성향을 지닌 통치자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을 정점에 올려놓는다 해도 관료 집단의 이해에 어긋나는 개혁은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의 침울한 형편이 그러하며, 관찰할 기회를 충분히 가진 이들의 보고가 그것을 보여 준다. 차르 자신도 관료 조직에 맞서서는 무력하다. 그는 그들 가운데 누구든 시베리아로 보낼 수 있지만, 그들 없이 또는 그들의 뜻을 거슬러 통치할 수는 없다. 그의 모든 명령에 대하여 그들은 그것을 실행하기를 그저 삼가는 것만으로 말없는 거부권을 지닌다. 문명이 더 앞서고 봉기하는 기질이 더 강한 나라에서는, 모든 일이 국가에 의해 자기들을 위해 행해지기를 기대하는 데, 또는 적어도 국가에 그 일을 해도 좋다는 허락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묻지 않고서는 스스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익숙해진 대중이 자기들에게 닥치는 모든 악에 대하여 자연히 국가에 책임을 묻고, 그 악이 자기들의 참을성의 양을 넘어서면 정부에 맞서 일어나 이른바 혁명을 일으킨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국민에게서 정당한 권위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그 자리에 뛰어올라 관료 집단에 자기 명령을 내리고, 모든 일이 전과 거의 다름없이 이어진다. 관료 집단은 그대로이고, 다른 누구도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데 익숙한 인민 사이에서는 아주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프랑스에서는 인민의 큰 부분이 군대에 복무했고 그 가운데 많은 이가 적어도 하사관의 계급을 지녔으므로, 민중이 일어나는 모든 봉기에 앞장설 수 있고 그럭저럭 괜찮은 행동 계획을 즉석에서 꾸릴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있다. 프랑스인이 군사에 관한 일에서 그러한 것을 미국인은 모든 종류의 민간 일에서 그러하다. 그들을 정부 없이 놓아두어 보라. 미국인의 어떤 무리든 정부를 즉석에서 꾸릴 수 있고, 그 일이든 다른 어떤 공적인 일이든 충분한 정도의 지성과 질서와 결단으로 해 나갈 수 있다. 자유로운 인민이라면 누구나 이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럴 수 있는 인민은 반드시 자유롭다. 그런 인민은 어떤 사람이나 사람의 무리가 중앙 행정의 고삐를 붙잡고 당길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스스로를 노예로 내주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어떤 관료 집단도 이런 인민에게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거나 겪게 하기를 바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일이 관료 집단을 통해 행해지는 곳에서는 관료 집단이 실제로 싫어하는 일은 아무것도 행해질 수 없다. 그런 나라의 헌정은 국민의 경험과 실천적 능력을 나머지를 통치할 목적으로 훈련된 하나의 조직으로 짜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조직이 그 자체로 더 완전할수록, 공동체의 모든 서열에서 가장 큰 능력을 지닌 이들을 자기에게 끌어들이고 자기를 위해 교육하는 데 더 성공할수록, 관료 집단의 구성원까지 포함하여 모두의 예속이 더 완전해진다. 통치받는 이들이 통치하는 이들의 노예인 것과 똑같이 통치하는 이들도 자기 조직과 규율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만다린13도 가장 낮은 농사꾼과 똑같이 전제의 도구이고 피조물이다. 예수회의 한 수사는 더할 수 없이 낮추어진 정도로 자기 수도회의 노예이지만, 그 수도회 자체는 구성원의 집단적인 권력과 중요함을 위해 존재한다.
또한 그 나라의 주요한 능력을 모두 통치 조직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 이르든 늦든 그 조직 자체의 정신의 활동과 진보하는 성질에 치명적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한데 뭉쳐 있고 모든 체계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정도로 고정된 규칙에 따라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체계를 움직이고 있으므로, 이 관리 조직은 게으른 관행 속으로 가라앉거나, 이따금 그 연자방아 도는 자리를 벗어날 때에는 그 집단의 어떤 지도적인 구성원의 마음에 들었던 반쯤만 살펴본 설익은 것으로 뛰어들려는 끊임없는 유혹 아래 있다. 그리고 겉으로는 반대인 듯하지만 서로 가깝게 이어진 이 두 경향에 대한 유일한 견제, 그 조직 자체의 능력을 높은 수준에 머물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자극은, 조직 밖에 있는 대등한 능력의 눈 밝은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능력을 길러 내고, 큰 실천적 사안을 올바로 판단하는 데 필요한 기회와 경험을 그 능력에 갖추어 줄 수단이 정부와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가 능숙하고 효율적인 관리 조직을, 무엇보다 개선을 스스로 시작할 수 있고 개선을 받아들이려 하는 조직을 오래도록 지니려 한다면, 우리 관료제가 학자 관료제14로 타락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 조직이 인류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빚고 길러 내는 일자리를 모두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자유와 전진에 그토록 무서운 이 악들이 어느 점에서 시작되는지, 아니 그보다 사회의 행복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치우기 위해 사회가 인정된 우두머리 아래 자기 힘을 모아 쓰는 데 따르는 이로움을 어느 점에서 그 악들이 앞지르기 시작하는지 정하는 일, 그리고 일반 활동의 너무 큰 부분을 정부의 물길로 돌리지 않으면서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중앙에 모인 권력과 지성의 이점을 확보하는 일은 통치의 기술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복잡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상당한 정도로 세부의 문제이며, 거기서는 많고도 여러 갈래인 고려를 시야에 두어야 하고 절대적인 규칙을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안전이 깃든 실천적 원칙, 시야에 두어야 할 이상, 그 어려움을 넘어서려고 마련한 모든 장치를 시험할 기준은 이 말로 전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곧 효율과 어긋나지 않는 한 권력을 가장 널리 흩어 놓을 것, 그러나 정보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크게 중앙에 모으고 그것을 중앙에서 퍼뜨릴 것. 그러므로 시의 행정에서는 뉴잉글랜드의 여러 주에서처럼, 직접 이해가 걸린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은 모든 일이 그 지방에서 뽑은 별개의 관리들 사이에 아주 세밀하게 나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도 지방 사무의 부문마다 일반 정부의 한 갈래를 이루는 중앙의 감독이 있을 것이다. 이 감독의 기관은 모든 지방에서 그 갈래의 공적인 일을 해 나가는 데서 나온 여러 갈래의 정보와 경험을, 외국에서 행해지는 비슷한 모든 것에서 나온 것과 정치학의 일반 원리에서 나온 것과 함께, 한 초점에 모으듯 모아들일 것이다. 이 중앙 기관은 행해지는 모든 일을 알 권리를 지녀야 하고, 한 곳에서 얻은 지식을 다른 곳에서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그 특별한 의무여야 한다. 그 높은 자리와 넓은 관찰의 영역 덕분에 한 지방의 좀스러운 편견과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그 기관의 충고는 자연히 큰 권위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상설 기구로서 그것이 실제로 지니는 권력은 지방의 관리들이 그들의 지침으로 놓인 법을 지키게 강제하는 데 한정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 규칙으로 정해지지 않은 모든 일에서 그 관리들은 자기를 뽑아 준 이들에게 책임을 지면서 자기 자신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규칙을 어긴 데 대해서는 그들이 법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규칙 자체는 입법부가 놓아야 하며, 중앙의 행정 권위는 그 규칙의 집행을 지켜볼 뿐이고, 규칙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면 사안의 성질에 따라 법을 집행하도록 법정에 호소하거나 그 정신에 따라 규칙을 집행하지 않은 관리를 물러나게 하도록 그를 뽑은 이들에게 호소해야 한다. 그 일반적인 구상에서, 구빈법 위원회가 전국의 구빈세15 관리자들에 대하여 행하도록 의도된 중앙의 감독이 그러한 것이다. 그 위원회가 이 한계를 넘어 행하는 권한이 무엇이든, 그 특이한 경우에 그것들은 옳고도 필요했다. 지방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깊이 영향을 끼치는 일에서 뿌리내린 잘못된 행정의 습관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방도 잘못된 관리로 스스로를 빈궁의 소굴로 만들어, 그것이 다른 지방으로 넘쳐 들어가 일하는 공동체 전체의 도덕적 상태와 신체적 상태를 손상시키게 할 도덕적 권리는 없다. 구빈법 위원회가 지닌 행정상의 강제와 하위 입법의 권한은 (그 주제에 관한 의견의 상태 때문에 그들이 그 권한을 아주 인색하게만 행사하기는 하지만) 국민 전체의 이익이 으뜸으로 걸린 경우에는 완전히 정당하다 해도, 순전히 지방에 국한된 이익을 감독하는 데서는 아주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방을 위한 정보와 가르침의 중앙 기관은 행정의 모든 부문에서 똑같이 값질 것이다. 개인의 노력과 발달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돕고 자극하는 종류의 활동이라면 정부가 그것을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칠 수 없다. 해악이 시작되는 것은 정부가 개인과 단체의 활동과 힘을 불러내는 대신 그들의 활동을 자기 활동으로 갈음할 때, 알려 주고 충고하고 경우에 따라 규탄하는 대신 그들을 족쇄를 찬 채로 일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비켜서라 명하고 그들의 일을 대신 해 버릴 때다. 국가의 값어치는 길게 보면 그 국가를 이루는 개인들의 값어치다. 그리고 일의 세부에서 얻는 행정의 솜씨를, 또는 손에 익은 데서 생기는 그 솜씨의 겉모습을 조금 더 얻으려고 개인들의 정신이 넓어지고 높아지는 일의 이익을 뒤로 미루는 국가, 이로운 목적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자기 손안에서 더 고분고분한 도구가 되도록 자기 사람들을 왜소하게 만드는 국가는, 작은 사람들로는 어떤 큰 일도 실제로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가 모든 것을 희생해 바친 그 기계의 완전함도 기계가 더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스스로 내쫓기를 택한 그 살아 있는 힘이 없기에 마침내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
1. 옮긴이 주. 원문 quâ restraint. 라틴어 quâ는 「…인 자격으로」, 「…인 한에서」를 뜻한다. 구속이 무슨 목적에 쓰이는지를 따지기 전에 구속이라는 그 성질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원문을 그대로 두고 옮김을 덧붙였다.
2. 옮긴이 주. 원문 cæteris paribus.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곧 나머지 사정에 변화가 없다면이라는 뜻의 라틴어 표현이다. 원문을 그대로 두고 옮김을 덧붙였다.
3. 옮긴이 주. 원문 the Maine Law. 1851년 미국 메인주가 제정한 주류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다. 다른 여러 주와 영국의 금주 운동이 이 법을 본보기로 삼았다. 「이미 언급한」은 밀이 4장에서 이 법과 금주 동맹(Alliance)을 다룬 것을 가리킨다.
4. 옮긴이 주. 원문 the prohibition of the importation of opium into China. 청 정부가 아편 수입을 금지한 일을 가리킨다. 이 금령의 집행을 둘러싸고 영국과 청 사이에 1839년부터 1842년까지, 다시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전쟁이 벌어졌다. 이 글은 두 번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859년에 나왔다.
5. 옮긴이 주. 원문 preappointed evidence. 제러미 벤담(1748~1832)의 표현으로, 뒷날 다툼이 생길 때 쓰이도록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점에 미리 갖추어 두게 하는 증거를 말한다. 벤담은 영국의 법학자이자 공리주의의 창시자이며,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과 가까웠고 밀 자신도 그의 저작을 편집했다. 원문을 그대로 두고 옮김을 덧붙였다.
6. 옮긴이 주. 원문 fornication. 혼인하지 않은 남녀의 성관계를 가리킨다. 당대 영국에서는 법률·도덕 용어였고 한국어로는 「사통(私通)」으로 옮겨 왔으나, 오늘날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라 뜻이 바로 통하도록 옮겼다. 뒤에 나오는 the fornicator도 같은 말이다.
7. 옮긴이 주. 원문 à fortiori. 앞의 근거가 성립하면 더욱 강한 이유로 다음 것도 성립한다는 뜻의 라틴어 논증 용어다. 원문을 그대로 두고 옮김을 덧붙였다.
8. 옮긴이 주. 원문 in so backward a state. 1장의 those backward states of society와 같은 표현이며, 그 대목에 관한 자세한 것은 1장의 옮긴이 주에 있다. 고치거나 덜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옮겼다.
9. 옮긴이 주. 원문 churchmen or dissenters. 「국교회 신자」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에 속한 사람을, 「비국교도」는 장로교·회중교회·침례교·퀘이커 등 국교회 밖의 프로테스탄트 교파에 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이 구별은 교육과 공직 자격에 실제로 영향을 주었다.
10. 옮긴이 주. 원문 both in Locke and in Kant. 존 로크(1632~1704)는 잉글랜드의 철학자로 경험론의 대표자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프로이센의 철학자다. 밀은 인식의 근원을 놓고 갈라서는 두 편의 이름으로 이 두 사람을 든다.
11. 옮긴이 주. 원문 The laws which, in many countries on the Continent, forbid marriage unless the parties can show that they have the means of supporting a family. 19세기 전반 독일 여러 나라와 오스트리아 등에서 부양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혼인 허가를 내주지 않은 법을 가리킨다. 「유럽 대륙」은 밀이 쓴 the Continent로, 영국에서 본 유럽 본토를 말한다.
12. 옮긴이 주. 원문 In England it has of late been proposed that all the members of the civil service of government should be selected by competitive examination. 1854년 노스코트·트리벨리언 보고서가 정실 임용을 대신할 공개 경쟁 시험을 제안한 뒤 벌어진 논쟁을 가리킨다. 1855년에 문관 시험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시험을 통한 임용이 모든 부처로 넓혀진 것은 1870년이다. 밀은 1823년부터 1858년까지 동인도회사에서 일했다.
13. 옮긴이 주. 원문 A Chinese mandarin. 「만다린」은 유럽에서 중국의 문무 관리를 부르던 말이다. 과거를 거쳐 임용된 청나라의 관리를 가리킨다. 밀이 쓴 낱말을 그대로 옮겼다.
14. 옮긴이 주. 원문 a pedantocracy. 「관료제」(bureaucracy)를 비틀어 만든 말로, 현학적인 전문가 집단이 지배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밀이 쓴 낱말을 그대로 두고 「학자 관료제」로 새겼다.
15. 옮긴이 주. 원문 the Poor Law Board와 the Poor Rate. 「구빈법 위원회」는 1847년에 설치되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빈민 구제 행정을 중앙에서 감독한 기구다. 「구빈세」는 각 교구가 빈민 구제 비용을 대기 위해 걷은 지방세다. 두 제도 모두 1834년의 신구빈법 체제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