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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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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권

1 킬레네의 헤르메스가 구혼자들의 혼백을 불러냈다. 헤르메스는 아름다운 황금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 지팡이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람들의 눈을 홀려 잠들게도 하고 잠든 이들을 다시 깨우기도 했다. 헤르메스가 그 지팡이를 휘둘러 이끌자 혼백들은 찍찍 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기이한 동굴 깊숙한 곳에서 바위에 줄지어 매달려 있던 박쥐 가운데 한 마리가 떨어지면, 박쥐들은 찍찍거리며 날아다니다가 서로 붙잡고 매달린다. 꼭 그처럼 혼백들은 찍찍 소리를 내며 함께 갔고, 어진 헤르메스가 곰팡내 나는 길을 따라 그들을 이끌었다. 그들은 오케아노스의 물줄기와 흰 바위1를 지나고, 해의 문과 꿈들의 고장을 지나, 곧 아스포델 풀밭에 이르렀다. 지쳐 쓰러진 인간들의 허깨비인 혼백들이 사는 곳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혼백과 파트로클로스와 나무랄 데 없는 안틸로코스와 아이아스의 혼백을 만났다. 아이아스는 나무랄 데 없는 펠레우스의 아들 다음으로는 다른 모든 다나오스인 가운데 생김새도 몸집도 가장 빼어난 이였다.

19 그들이 아킬레우스 곁에 모여 있을 때,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혼백이 슬픔에 잠겨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 둘레에는 아이기스토스의 집에서 그와 함께 죽어 최후를 맞은 다른 혼백들이 모여 있었다. 펠레우스의 아들의 혼백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24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우리는 영웅들 가운데 당신이 벼락을 즐기는 제우스에게 언제나 가장 사랑받는다고 여겼소. 우리 아카이아인들이 고통을 겪던 트로이인들의 고장에서 당신이 많은 굳센 사내들을 다스렸으니까. 그러나 태어난 자는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몹쓸 운명이 당신에게도 일찍 닥칠 것이었구려. 당신이 누리던 그 명예를 다 누린 채 트로이인들의 고장에서 죽음과 최후를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온 아카이아인이 당신에게 무덤을 쌓아 주었을 테고, 당신은 아들에게도 뒷날까지 큰 명성을 남겼을 것이오. 그런데 당신은 가장 비참한 죽음에 붙잡힐 운명이었구려." 아트레우스의 아들의 혼백이 말을 받았다. "펠레우스의 복 받은 아들, 신들과 닮은 아킬레우스여, 당신은 아르고스에서 먼 트로이에서 죽었소. 당신 둘레에서는 트로이인과 아카이아인의 가장 뛰어난 아들들이 당신을 두고 싸우다 죽어 갔고, 당신은 소용돌이치는 먼지 속에 큰 몸을 크게 뻗고 누워 말 부리던 재주도 잊었소. 우리는 온종일 싸웠고, 제우스가 폭풍으로 멈추게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싸움을 그치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는 당신을 싸움터에서 배들로 옮겨 와, 따뜻한 물과 기름으로 아름다운 살갗을 깨끗이 씻고 침상에 눕혔소. 다나오스인들은 당신 둘레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머리털을 잘랐소. 당신 어머니는 소식을 듣고 불사의 바다 여신들과 함께 바다에서 올라왔소. 바다 위로 엄청난 울부짖음이 일자 아카이아인들은 모두 떨었소. 그때 옛일을 많이 아는 사내, 전에도 그 계책이 가장 뛰어나 보였던 네스토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카이아인들은 벌떡 일어나 우묵한 배로 달아났을 것이오. 네스토르는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회의에서 말했소."

54 "'멈추시오, 아르고스인들이여, 달아나지 마시오, 아카이아의 젊은이들이여. 저것은 그의 어머니가 불사의 바다 여신들과 함께 바다에서 올라와, 죽은 아들을 만나러 오는 것이오.'"

57 "그가 이렇게 말하자 기상 높은 아카이아인들은 두려움을 멈추었소. 바다 노인의 딸들이 당신 둘레에 서서 애처롭게 울며 당신에게 불멸의 옷을 입혔소. 아홉 무사 여신이 모두 아름다운 목소리로 번갈아 주고받으며 만가를 불렀소. 그때 아르고스인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오. 낭랑한 무사 여신이 그토록 마음을 북받치게 했소. 열이레 동안 밤낮으로 불사의 신들과 죽을 운명의 인간들이 함께 당신을 두고 울었고, 열여드레째에 우리는 당신을 불에 맡기며 당신 둘레에서 아주 살진 양과 뿔 굽은 소를 많이 잡았소. 당신은 신들의 옷에 싸여 많은 기름과 달콤한 꿀과 함께 불탔고, 많은 아카이아 영웅들이 무장한 채 걸어서도 말을 타고도 불타는 화장더미 둘레를 돌며 행진했소. 엄청난 소리가 일었소. 헤파이스토스의 불길이 당신을 다 태우자, 아킬레우스, 우리는 새벽에 당신의 흰 뼈를 물 타지 않은 포도주와 기름 속에 거두었소. 당신 어머니는 손잡이 둘 달린 황금 항아리를 내주었소. 디오니소스의 선물이며 널리 이름난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것이라고 했소. 빛나는 아킬레우스, 그 안에 당신의 흰 뼈가 놓여 있는데 죽은 메노이티오스의 아들 파트로클로스의 뼈가 함께 섞여 있고, 파트로클로스가 죽은 뒤로 다른 모든 전우 가운데 당신이 가장 아꼈던 안틸로코스의 뼈는 따로 놓여 있소. 그 둘레에 우리, 창을 든 아르고스인들의 신성한 군대가 넓은 헬레스폰토스 가에 튀어나온 곶 위에 크고 나무랄 데 없는 무덤을 쌓아 올려, 지금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뒷날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바다에서 멀리 보이게 했소. 당신 어머니는 신들에게 청해 더없이 아름다운 상품을 얻어, 경기장 한가운데 아카이아의 뛰어난 이들 앞에 내놓았소. 당신은 왕이 죽어 젊은이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시합을 준비하는 영웅들의 장례에 여러 번 가 보았을 것이오. 그러나 은빛 발의 여신 테티스가 당신을 위해 내놓은 그 더없이 아름다운 상품을 보았다면 누구보다 마음속으로 놀랐을 것이오. 당신은 신들에게 그토록 사랑받았으니까. 그렇게 당신은 죽어서도 이름을 잃지 않았고, 아킬레우스, 당신의 훌륭한 명성은 언제까지나 모든 사람에게 남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전쟁을 끝내고 나서 무슨 기쁨을 누렸소? 제우스는 내 귀향 길에 아이기스토스와 저주받을 아내의 손으로 비참한 파멸을 꾸몄소."

98 이렇게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아르고스를 죽인 길잡이가 오디세우스에게 죽은 구혼자들의 혼백을 이끌고 그들 가까이 다가왔다. 두 혼백은 그것을 보자 놀라서 곧장 다가갔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혼백이 멜라네우스의 사랑하는 아들, 이름 높은 암피메돈을 알아보았다. 이타카에 집을 두고 살던 암피메돈이 그의 손님 벗이었기 때문이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의 혼백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106 "암피메돈, 어찌 된 일로 당신들은 모두 가려 뽑은 듯 나이도 비슷한 이들끼리 이 어두운 땅 밑으로 내려왔소? 도시 안에서 가장 뛰어난 사내들을 고른다 해도 이렇게 고르지는 못할 것이오. 포세이돈이 거센 바람과 큰 물결을 일으켜 배 위에서 당신들을 쓰러뜨렸소? 아니면 뭍에서 소 떼와 아름다운 양 떼를 몰아가려다 원수들에게 죽었소? 아니면 도시와 여인들을 두고 싸우다 죽었소? 묻는 내게 말해 주시오. 나는 당신의 손님 벗이라 자부하오. 신에 버금가는 메넬라오스와 함께, 오디세우스를 부추겨 갑판 튼튼한 배를 타고 일리오스로 함께 가자고 하러 내가 당신 집에 내려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오? 도시를 무너뜨린 오디세우스를 간신히 설득하느라 우리는 꼬박 한 달 동안 넓은 바다를 다 건너야 했소." 암피메돈의 혼백이 말을 받았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아트레우스의 아들,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여, 제우스가 기른 이여, 당신이 말하는 그 모든 일을 나는 기억하오. 이제 당신에게 우리가 맞은 죽음의 몹쓸 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숨김없이 일러 주겠소. 우리는 오래 집을 떠나 있던 오디세우스의 아내에게 구혼했는데, 그 여인은 끔찍한 혼인을 거절하지도 않고 끝내 매듭짓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 죽음과 검은 죽음의 운명을 꾸미고 있었소. 그 여인은 속으로 이런 꾀도 궁리해 냈소. 홀에 커다란 베틀을 세워 놓고 가늘고도 넓은 천을 짜기 시작하더니, 곧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소."

131 "'내게 구혼하는 젊은이들이여,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죽었으니 내 혼인을 서두르고 싶더라도 이 천을 다 짤 때까지, 애써 자은 실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기다려 주시오. 이것은 영웅 라에르테스의 수의라오. 긴 슬픔을 안기는 죽음의 운명이 그분을 쓰러뜨릴 때 쓰려는 것이오. 그 많은 재산을 모은 분이 수의도 없이 누워 계신다면, 이 고장 아카이아 여인들 가운데 누가 나를 두고 분개할지도 모르니까.'"

138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하자 우리 굳센 마음도 그 말에 따랐소. 그때부터 페넬로페는 낮에는 커다란 베틀에서 천을 짜고, 밤이면 횃불을 곁에 두고 짠 것을 풀었소. 그렇게 세 해 동안 꾀로 아카이아인들을 속여 넘기고 믿게 했소. 그러나 네 해째가 되어 계절이 돌아오고, 달이 이울며 숱한 날이 다 차자, 사정을 똑똑히 아는 여인 하나가 우리에게 일러 주었고, 우리는 빛나는 천을 풀고 있는 그 자리를 덮쳐 잡았소. 그래서 마지못해, 억지로 천을 다 짜고 말았소."

147 "그 여인이 커다란 베틀에서 천을 다 짜고 빨아서, 해나 달처럼 빛나는 수의를 내보였을 때, 어떤 몹쓸 신이 어디선가 오디세우스를 데려와 돼지치기가 사는 농장 맨 끝에 이르게 했소.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사랑하는 아들도 검은 배를 타고 모래 많은 필로스에서 그곳으로 왔소. 두 사람은 구혼자들에게 몹쓸 죽음을 꾸민 뒤 널리 이름난 도시로 왔는데, 오디세우스는 나중에 오고 텔레마코스가 앞장섰소. 돼지치기가 몸에 초라한 옷을 걸친 오디세우스를 데려왔는데, 그는 비참한 거지, 늙은이와 닮은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몸에는 초라한 옷을 걸치고 있었소. 그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우리 가운데 누구도, 나이 든 사람들조차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소. 우리는 오히려 그를 몹쓸 말로 몰아세우고 물건을 던졌소. 그는 한동안 제 홀에서 얻어맞고 몰아세움을 당하면서도 참는 마음으로 견뎠소. 그러나 아이기스를 지닌 제우스의 뜻이 그를 일깨우자, 그는 텔레마코스와 함께 더없이 아름다운 무구를 들어다 방에 넣고 빗장을 걸어 잠갔소. 그러고는 갖은 꾀를 부려 아내에게 일러, 구혼자들 앞에 활과 잿빛 쇠를 내놓게 했소. 불운한 우리에게는 시합 거리이자 살육의 시작이었소.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 억센 활에 시위를 얹지 못했소. 힘이 한참 모자랐소. 그 큰 활이 오디세우스의 손에 들어가려 할 때, 우리는 모두 그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활을 주지 말라고 소리쳐 꾸짖었지만, 텔레마코스만이 그에게 활을 주라고 재촉하며 일렀소.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활을 손에 받아 손쉽게 시위를 얹고 쇠를 꿰뚫었소. 그러고는 문지방으로 가서 서서 날랜 화살들을 쏟아 놓고 무섭게 사방을 노려보더니, 안티노오스 왕을 쏘았소. 그다음에는 다른 이들을 똑바로 겨누어 신음을 부르는 화살을 날렸고, 그들은 겹겹이 쓰러졌소. 어떤 신이 그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 뚜렷했소. 그들은 곧 기운을 다해 집 안을 누비며 사방으로 돌아서며 죽였소. 머리가 깨지는 처참한 신음이 일었고, 온 바닥이 피로 들끓었소. 아가멤논이여, 우리는 그렇게 죽었소. 우리의 시신은 지금도 돌보는 이 없이 오디세우스의 홀에 누워 있소. 저마다의 집에 있는 가족들은 아직 그 일을 모르오. 알았다면 우리 상처에서 검은 피를 씻어 내고 우리를 눕혀 놓고 곡을 해 주었을 텐데. 그것이 죽은 이들이 받는 몫이니까."

191 아트레우스의 아들의 혼백이 말을 받았다. "라에르테스의 복 받은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당신은 참으로 크나큰 빼어남을 지닌 아내를 얻었구려. 나무랄 데 없는 페넬로페, 이카리오스의 딸은 그토록 마음씨가 훌륭했고, 처녀로 맞은 남편 오디세우스를 그토록 잘 기억했소. 그러니 그 빼어남의 명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불사의 신들은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을 위해 분별 있는 페넬로페를 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줄 것이오. 처녀로 맞은 남편을 죽여 못된 짓을 꾸민 틴다레오스의 딸과는 다르오. 그 여자를 두고는 사람들 사이에 끔찍한 노래가 퍼질 것이고, 그 여자는 연약한 여인들 모두에게, 행실 바른 여인에게까지 고약한 평판을 안겨 줄 것이오."

203 이렇게 그들은 대지 깊은 곳, 하데스의 집에 서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205 오디세우스 일행은 도시에서 내려와 곧 라에르테스의 잘 가꾼 아름다운 농장에 이르렀다. 일찍이 라에르테스가 몸소 숱한 고생을 하여 마련한 농장이었다. 거기에 그의 집이 있었고 집 둘레로는 오두막이 사방으로 빙 둘러 있었는데, 그의 마음에 들게 일해 주는, 그에게 매인 종들이 그 오두막에서 먹고 앉고 잠을 잤다. 집 안에는 시켈인 노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도시에서 떨어진 농장에서 노인을 정성껏 돌보았다. 그때 오디세우스가 종들과 아들에게 말했다.

214 "자네들은 이제 잘 지은 집 안으로 들어가, 돼지 가운데 가장 좋은 놈을 골라 어서 저녁 식사로 잡게. 나는 아버지를 시험해 보겠네. 아버지께서 나를 알아보시고 눈으로 알아채실지, 아니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알아보지 못하실지."

219 이렇게 말하고 그는 종들에게 싸움에 쓸 무구를 건넸다. 종들은 곧 집으로 갔고, 오디세우스는 시험해 보려고 열매 많은 과수원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큰 과수원으로 내려갔지만 돌리오스도, 다른 종들도, 그 아들들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과수원의 울타리로 쓸 돌담을 쌓을 돌을 주우러 가 있었고, 노인 돌리오스가 그들의 길을 이끌었다. 그는 잘 가꾼 과수원에서 아버지 혼자 나무 둘레를 파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기운 데를 꿰맨 꼴사나운 더러운 윗옷을 입고, 정강이에는 긁히지 않으려고 꿰맨 쇠가죽 각반을 두르고, 손에는 가시덤불 때문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머리에는 염소 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렇게 슬픔을 키우고 있었다.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늙음에 시달리며 가슴 깊이 큰 슬픔을 품은 아버지를 보자, 키 큰 배나무 아래 멈춰 서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아버지에게 입 맞추고 끌어안고서 자기가 어떻게 고향 땅에 돌아왔는지 낱낱이 말할지, 아니면 먼저 이것저것 물어보며 시험해 볼지 속으로, 또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먼저 빈정대는 말로 시험해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그렇게 마음먹고 곧장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나무 둘레를 파고 있었다. 빛나는 아들이 곁에 서서 말을 걸었다.

244 "노인장, 당신은 과수원을 돌보는 데 서툴지 않구려. 돌봄이 잘 되어 있어서, 나무든 무화과든 포도나무든 올리브든 배나무든 밭이랑이든, 이 동산에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소. 또 한 가지 일러 줄 테니 마음에 노여움을 품지는 마시오. 당신 자신은 잘 돌보지 못하고 있구려. 서글픈 늙음을 짊어진 데다 몹시 꾀죄죄하고 꼴사나운 옷을 입고 있소. 게으르다고 주인이 당신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오. 생김새도 체구도 종처럼 보이지는 않소. 당신은 왕 같은 사내를 닮았소. 그런 사람이라면 목욕하고 먹고 나서 부드럽게 자는 것이 어울리오. 그것이 노인의 법도니까. 자, 이것을 말해 주시오. 숨김없이 낱낱이. 당신은 누구의 종이오? 누구의 과수원을 돌보고 있소? 이것도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내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내가 정말로 이 이타카에 온 것이오? 방금 여기로 오는 길에 만난 저 사람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 사람은 생각이 그리 반듯하지 못해서, 내가 내 손님 벗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아니면 벌써 죽어 하데스의 집에 있는지 물었는데도 하나하나 말해 줄 생각도 내 말을 들어 줄 생각도 하지 않았소. 내 분명히 일러 줄 테니 잘 새겨서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일찍이 나는 사랑하는 고향 땅에서 우리 집에 찾아온 사내를 손님으로 대접했소. 멀리서 온 손님 가운데 그만큼 정다운 이가 내 집에 온 적은 없었소. 그는 이타카 태생이라고 자랑하며, 아르케이시오스의 아들 라에르테스가 자기 아버지라고 했소. 나는 그를 집에 데려가 잘 대접하고, 집에 있는 많은 것으로 정성껏 아껴 주었고, 마땅한 손님 선물도 주었소. 잘 다듬은 황금 일곱 탈란톤을 주었고, 꽃무늬를 새긴 온통 은으로 된 술동이를 주었소. 홑겹 외투 열두 벌, 깔개 열두 장, 고운 겉옷 열두 벌, 윗옷도 그만큼 주었고, 그 밖에 나무랄 데 없는 솜씨를 지닌 아리따운 여인 넷을 그가 손수 고르게 하여 주었소."

280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손님, 당신이 묻는 땅에 온 것은 맞소. 그러나 오만하고 무모한 사내들이 이 땅을 차지하고 있소. 당신이 아낌없이 내준 그 선물은 헛되이 베푼 것이 되었소. 먼저 베푼 이에게는 그렇게 갚는 것이 도리이니, 그가 이타카 고장에 살아 있는 것을 당신이 만났더라면 그는 당신에게 선물로 잘 보답하고 융숭하게 대접해서 떠나보냈을 것이오. 자, 이것을 말해 주시오. 숨김없이 낱낱이. 당신이 그 사람을, 불운한 당신의 손님 벗을, 내 아들을, 정말 그런 아이가 있었다면 그 기구한 내 아들을 대접한 것이 몇 해 전이오? 그 아이는 아마 사랑하는 이들과 고향 땅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물고기들에게 먹혔거나, 뭍에서 짐승과 새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오. 그 아이를 낳은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 아이에게 수의를 입혀 곡하지 못했고, 많은 구혼 선물을 받고 맞아들인 아내, 분별 있는 페넬로페도 침상 곁에서 마땅히 그래야 하듯 남편의 눈을 감겨 주며 곡하지 못했소. 그것이 죽은 이들이 받는 몫인데. 이것도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내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왔소? 고향은 어디고 부모는 누구요? 당신과 신에 버금가는 전우들을 이리로 데려온 날랜 배는 어디에 대어 두었소? 아니면 남의 배에 길손으로 타고 왔는데, 그들은 당신을 내려놓고 떠나 버렸소?"

302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모든 것을 숨김없이 낱낱이 말해 주겠소. 나는 알리바스에서 왔고, 그곳 이름난 집에 살고 있소. 폴리페몬의 아들 아페이다스 왕의 아들이오. 내 이름은 에페리토스요. 그런데 어떤 신이 나를 시카니아에서 떠돌게 하여, 원치도 않았는데 이리로 오게 되었소. 내 배는 저기 도시에서 떨어진 들판에 대어 두었소. 오디세우스로 말하면, 그가 그곳을 떠나 내 고향을 떠나간 지 벌써 다섯 해째요. 기구한 사람이오. 그가 떠날 때 오른쪽에서 길한 새들이 날았소. 나는 기뻐하며 그를 떠나보냈고 그도 기뻐하며 떠났으며, 우리 둘은 다시 만나 손님으로 사귀며 빛나는 선물을 주고받기를 마음속으로 바랐소."

315 그가 이렇게 말하자 슬픔의 검은 구름이 라에르테스를 덮었고, 라에르테스는 두 손으로 그을음 섞인 먼지를 움켜쥐어 깊이 신음하며 잿빛 머리 위에 부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오디세우스는 마음이 북받쳐 벌써 콧날이 시큰해지며 날카로운 기운이 치밀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끌어안고 입 맞추며 말했다.

321 "아버지,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스무 해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울음과 눈물 섞인 탄식을 그치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몹시 서둘러야 합니다. 저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모욕과 못된 짓을 앙갚음하려고 우리 집에서 구혼자들을 죽였습니다."

327 라에르테스가 대답했다. "당신이 정녕 내 아들 오디세우스로서 여기 돌아온 것이라면, 내가 믿을 수 있게 뚜렷한 표지를 하나 말해 보시오."

330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먼저 이 흉터를 눈으로 살펴보십시오. 제가 파르나소스산에 갔을 때 멧돼지가 흰 엄니로 찢어 놓은 흉터입니다. 아버지와 존귀한 어머니께서 저를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버지 아우톨리코스께 보내셨지요. 그분이 이곳에 오셨을 때 제게 약속하시고 고개를 끄덕이신 선물을 받아 오라고 말입니다. 자, 또 잘 가꾼 과수원의 나무들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나무들입니다. 어린 제가 동산에서 아버지 뒤를 따라다니며 나무마다 하나하나 달라고 졸랐지요. 우리는 그 나무들 사이를 걸었고, 아버지께서는 나무마다 이름을 부르며 일일이 일러 주셨습니다. 배나무 열세 그루와 사과나무 열 그루와 무화과나무 마흔 그루를 주셨고, 포도나무 쉰 줄을 주시겠다고 이렇게 이름을 대셨는데, 줄마다 열매가 익는 때가 달랐고, 거기에는 온갖 포도송이가 달렸습니다. 제우스의 계절들이 위에서 무겁게 내리누를 때면 말입니다."

345 그가 이렇게 말하자 라에르테스는 무릎과 가슴이 그 자리에서 풀려 버렸다. 오디세우스가 틀림없이 일러 준 표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라에르테스는 사랑하는 아들의 목에 두 팔을 둘렀고,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정신을 잃어 가는 아버지를 제 몸에 끌어안았다. 라에르테스는 숨을 돌리고 정신이 가슴속으로 되돌아오자, 다시 그에게 대답했다.

351 "아버지 제우스여, 구혼자들이 정녕 무모한 오만의 값을 치렀다면, 신들께서는 아직 높은 올림포스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타카 사람들이 모두 곧 이리로 몰려오고, 케팔레니아인들의 도시마다 두루 전령을 보내 부추기지나 않을까 속으로 몹시 두렵구나."

356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안심하십시오. 그런 일로 마음 쓰지 마십시오. 자, 과수원 가까이 있는 집으로 가시지요. 텔레마코스와 소치기와 돼지치기를 그리로 먼저 보내, 되도록 빨리 저녁을 차리게 해 두었습니다."

361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아름다운 집으로 갔다. 살기 좋은 집에 이르자, 텔레마코스와 소치기와 돼지치기가 고기를 많이 썰고 반짝이는 포도주에 물을 타고 있었다. 그사이 시켈인 시녀가 제 집에 있는 기개 높은 라에르테스를 씻기고 올리브기름을 발라 주었다.

367 그리고 고운 외투를 입혀 주었다. 아테나가 곁에 다가서서 백성의 목자의 팔다리를 북돋아, 전보다 더 크고 더 다부져 보이게 했다. 라에르테스가 욕조에서 나오자, 사랑하는 아들은 아버지가 불사의 신들과 꼭 닮은 모습을 마주 보고 놀랐다. 아들은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373 "아버지, 영원히 사는 신들 가운데 어느 분이 아버지의 생김새와 체구를 더 훌륭해 보이게 해 주셨나 봅니다." 의젓한 라에르테스가 대답했다. "아버지 제우스와 아테나와 아폴론이시여, 부디 내가 케팔레니아인들을 다스리며 뭍의 곶에 있는 잘 지은 도시 네리코스를 함락했을 때처럼, 그런 모습으로 어제 우리 집에서 어깨에 무구를 메고 너와 함께 서서 구혼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홀에서 그 숱한 자들의 무릎을 풀어 버렸을 테고, 너는 속으로 기뻐했을 텐데."

383 이렇게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다른 이들은 일을 마치고 잔치를 차려 긴 의자와 팔걸이의자에 차례로 앉았다. 그들이 막 저녁 식사에 손을 대려는데, 늙은 돌리오스가 그 아들들과 함께 가까이 왔다. 일하느라 지쳐서 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을 기르고, 늙음이 덮친 노인을 정성껏 돌보는 시켈인 노파, 그들의 어머니가 나가서 그들을 불러왔다. 그들은 오디세우스를 보고 마음속으로 알아보자, 놀라서 홀 안에 우뚝 섰다. 오디세우스가 부드러운 말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394 "노인장, 놀라움은 잊고 앉아서 식사하게. 우리는 식사에 손을 대고 싶었지만 줄곧 자네들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홀에 머물러 있었네."

397 그가 이렇게 말하자 돌리오스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곧장 다가와 오디세우스의 손을 잡고 손목에 입 맞추며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400 "주인님, 저희가 몹시 바라면서도 더는 기대하지 않던 차에 돌아오셨으니, 신들께서 몸소 주인님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신들께서 주인님께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이것도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사려 깊은 페넬로페 님께서는 주인님이 이리로 돌아오신 것을 벌써 똑똑히 아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전령을 보내야 합니까?"

406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노인장, 벌써 알고 있네. 자네가 그런 일에 애쓸 까닭이 있겠나?"

408 그가 이렇게 말하자 돌리오스는 반들반들 다듬은 걸상에 다시 앉았다. 돌리오스의 아들들도 그와 똑같이 이름난 오디세우스를 둘러싸고 말로 반기며 그의 손을 꼭 잡았고, 저희 아버지 돌리오스 곁에 차례로 앉았다.

412 그렇게 그들이 홀에서 식사에 힘쓰는 동안, 소문이 전령이 되어 구혼자들의 끔찍한 죽음과 죽음의 운명을 알리며 도시 곳곳을 재빨리 누볐다.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저마다 사방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며 오디세우스의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집에서 시체를 날라 저마다 묻었고, 다른 도시에서 온 이들은 날랜 배에 실어 어부들에게 맡겨 저마다 제 집으로 데려가게 한 다음, 가슴이 쓰라린 채 모두 함께 회의장으로 갔다. 그들이 모여 한자리에 다 모이자, 에우페이테스가 일어나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아들 안티노오스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슬픔이 그의 가슴에 놓여 있었다.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맨 먼저 죽인 아들이었다. 에우페이테스는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회의에서 말했다.

426 "벗들이여, 이 사내가 아카이아인들에게 엄청난 짓을 꾸몄소. 많고도 훌륭한 사내들을 배에 태워 데려가더니 우묵한 배들도 잃고 백성들도 잃었고, 돌아와서는 케팔레니아인 가운데 단연 으뜸인 자들을 죽였소. 자, 이자가 서둘러 필로스나 에페이오이족이 다스리는 고귀한 엘리스로 건너가기 전에 갑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두고두고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오. 우리가 아들들과 형제들을 죽인 자에게 앙갚음하지 않는다면, 뒷날 태어날 사람들이 들어도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오. 나는 살아 있어도 마음이 달갑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당장 죽어 죽은 이들 사이에 끼고 싶소. 자, 갑시다. 저들이 먼저 바다를 건너 달아나지 못하게."

438 그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자 아카이아인들은 모두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메돈과 신과 같은 노래꾼이 잠에서 깨어나 오디세우스의 홀에서 나와 그들 가까이 다가와 그들 한가운데 서자, 사람마다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생각 깊은 메돈이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443 "이타카 사람들이여, 이제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오디세우스는 불사의 신들의 뜻을 거슬러 이런 일을 꾸미지 않았소. 나는 오디세우스 곁에 서 있던 불사의 신을 내 눈으로 보았소. 그 신은 모든 면에서 멘토르를 닮았소. 불사의 신은 어떤 때는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나 그를 북돋았고, 어떤 때는 홀 안을 휩쓸며 구혼자들을 몰아붙였고, 구혼자들은 겹겹이 쓰러졌소."

450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 모두 새파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들 가운데서 마스토르의 아들, 늙은 영웅 할리테르세스가 말했다. 그만이 앞일도 지난 일도 내다보았다. 할리테르세스는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회의에서 말했다.

454 "이타카 사람들이여, 이제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시오. 벗들이여, 이 일은 당신들의 못남 때문에 일어났소. 당신들은 내 말도, 백성의 목자 멘토르의 말도 듣지 않고 당신들 아들들의 어리석은 짓을 말리지 않았소. 그들은 몹쓸 무모한 짓으로 엄청난 일을 저질렀소. 가장 뛰어난 사내의 재산을 거덜 내고 그 아내를 업신여겼소. 그 사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오. 그러니 이제 이렇게 합시다. 내 말을 따르시오. 가지 맙시다. 누가 제 손으로 불러들인 재앙을 만나지 않도록 말이오."

463 그가 이렇게 말하자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고, 나머지는 한데 모여 그 자리에 남았다. 일어난 이들은 할리테르세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에우페이테스를 따랐고, 곧바로 무구를 향해 내달렸다. 그들은 번쩍이는 청동을 몸에 두르고 나서, 땅이 넓은 도시 앞에 한데 모였다. 에우페이테스가 어리석게도 그들을 이끌었으니, 그는 아들의 죽음에 앙갚음하겠다고 했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다.

472 아테나가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에게 말했다. "크로노스의 아드님, 우리 아버지, 다스리는 이들 가운데 가장 높으신 분이시여, 여쭙는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속에 어떤 뜻을 감추고 계십니까? 몹쓸 전쟁과 무서운 싸움을 더 이어 가시렵니까, 아니면 양편 사이에 우애를 맺어 주시렵니까?"

477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가 대답했다. "내 딸아, 어찌하여 그런 것을 내게 묻고 캐묻느냐?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저들에게 앙갚음하게 하자는 그 뜻을 네가 몸소 꾸미지 않았느냐? 네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 그러나 마땅한 바를 일러 주마.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에게 앙갚음했으니, 그들은 굳은 맹세의 제물을 잡아 맹세를 맺고, 오디세우스가 언제까지나 왕으로 다스리게 하라. 우리는 아들들과 형제들이 살해된 일을 잊게 해 주자. 그들이 예전처럼 서로 아끼고, 부와 평화가 넉넉하기를."

487 이렇게 말하여 제우스는 전부터 하고 싶어 안달하던 아테나를 부추겼다. 여신은 올림포스의 봉우리에서 내리달려 내려갔다.

489 그들이 꿀처럼 달콤한 음식을 실컷 먹어 더 바랄 것이 없게 되자,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누가 나가서 저들이 벌써 가까이 오고 있지 않은지 보게."

492 그가 이렇게 말하자 돌리오스의 아들 하나가 시킨 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문지방으로 가서 서서, 그들이 모두 가까이 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오디세우스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저들이 벌써 가까이 와 있습니다. 어서 무장하시지요."

496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일어나 무구를 입었다. 오디세우스 쪽 네 사람과 돌리오스의 여섯 아들이었다. 라에르테스와 돌리오스도 머리가 희었지만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라 무구를 입었다. 그들은 번쩍이는 청동을 몸에 두르고 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오디세우스가 앞장섰다.

502 그때 제우스의 딸 아테나가 모습도 목소리도 멘토르를 닮은 채 그들 가까이 다가왔다.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여신을 보고 반가워하며, 곧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말했다.

506 "텔레마코스, 사내들이 싸우며 가장 뛰어난 자가 가려지는 자리에 몸소 나서고 보면 너도 이제 알 게다. 예전부터 온 땅에서 힘과 용맹으로 이름을 떨쳐 온 네 조상의 가문을 조금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버지, 원하신다면 보십시오. 아버지 말씀대로, 저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버지의 가문을 조금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513 그가 이렇게 말하자 라에르테스가 기뻐하며 말했다. "정다운 신들이여, 오늘은 내게 무슨 날인가? 참으로 기쁘구나. 내 아들과 손자가 용맹을 두고 겨루다니."

516 빛나는 눈의 아테나가 그 곁에 다가서서 말했다. "아르케이시오스의 아들이여, 내 모든 벗 가운데 단연 가장 정다운 이여, 빛나는 눈의 처녀 신과 아버지 제우스께 기도하고 나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창을 어서 휘둘러 던지시오."

520 팔라스 아테나는 이렇게 말하고 그에게 큰 기운을 불어넣었다. 라에르테스는 큰 제우스의 딸에게 기도하고 나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창을 어서 휘둘러 던져, 청동 볼가리개를 단 투구를 뚫고 에우페이테스를 맞혔다. 투구는 창을 막지 못했고, 청동이 꿰뚫고 나갔다. 에우페이테스는 쿵 하고 쓰러졌고, 그 위로 무구가 덜그럭 울렸다. 오디세우스와 빛나는 아들이 앞줄의 싸우는 자들에게 덤벼들어 칼과 양쪽에 날이 선 창으로 내리찔렀다. 아이기스를 지닌 제우스의 딸 아테나가 소리를 질러 온 무리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적을 모두 죽여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531 "이타카 사람들아, 괴로운 싸움을 멈추어라. 피를 흘리지 말고 어서 서로 갈라서라."

533 아테나가 이렇게 말하자 새파란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겁에 질려 손에서 무구를 놓쳤고, 여신의 목소리가 울리자 무구는 모두 땅에 떨어졌다. 그들은 목숨을 건지려고 도시 쪽으로 돌아섰다.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무시무시하게 고함을 지르며,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덮쳐 들었다. 그때 크로노스의 아들이 연기 나는 벼락을 내던졌고, 벼락은 힘센 아버지의 딸, 빛나는 눈의 여신 앞에 떨어졌다. 그러자 빛나는 눈의 아테나가 오디세우스에게 말했다.

542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멈추어라.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치는 싸움의 다툼을 그쳐라. 크로노스의 아들, 멀리 내다보는 제우스가 그대에게 노하지 않도록."

545 아테나가 이렇게 말하자 오디세우스는 그 말을 따르며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그 뒤로 아이기스를 지닌 제우스의 딸 팔라스 아테나가 두 편 사이에 맹세를 맺어 주었다. 모습도 목소리도 멘토르를 닮은 채였다.

주

  1. 1. 그리스어 레우카스 페트레(Leukas petrē)를 옮긴 말이다. 오케아노스의 물줄기 곁,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바위로, 이오니아해의 섬 레우카스를 가리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