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오디세이아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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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권

1 오디세우스는 포구를 떠나 숲이 우거진 땅을 지나 산마루를 넘는 험한 오솔길을 올라갔다. 아테나가 고귀한 돼지치기가 있는 곳이라고 일러 준 길이었는데, 그 돼지치기는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손수 얻은 종들 가운데 주인의 살림을 누구보다 잘 돌보는 사람이었다.

5 오디세우스는 그가 문간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는 사방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높은 울타리를 둘러친 안뜰이 있었는데, 크고 아름다우며 빙 둘러 돌아갈 수 있게 지은 것이었다. 주인이 떠나고 없는 동안 돼지치기가 안주인이나 늙은 라에르테스의 도움 없이 혼자서 돼지들을 위해 지은 것으로, 날라 온 돌로 쌓고 그 위에 가시덤불로 담을 얹었다. 바깥쪽에는 참나무의 검은 속살을 빙 둘러 쪼개 낸 말뚝을 촘촘하고 빽빽하게, 이쪽저쪽 끝까지 박아 두었다. 안뜰 안에는 돼지들의 잠자리로 우리 열두 개를 서로 붙여 지었는데, 우리마다 땅바닥에서 자는 돼지 쉰 마리, 새끼를 낳는 암퇘지들이 갇혀 있었다. 수퇘지들은 밖에서 잤고 수가 훨씬 적었으니, 신에 버금가는 구혼자들이 먹어 치워 그 수를 줄인 까닭이었다. 돼지치기가 살진 돼지들 가운데 가장 좋은 놈을 늘 그들에게 보내야 했으니, 이제 수퇘지는 삼백예순 마리였다. 곁에는 일꾼들의 우두머리인 돼지치기가 기른 개 네 마리가 늘 엎드려 자고 있었는데, 들짐승처럼 사나웠다. 돼지치기는 빛깔 좋은 쇠가죽을 잘라 제 발에 맞게 신을 짓고 있었다. 다른 일꾼 셋은 떼 지어 모은 돼지들을 몰고 저마다 이리저리 흩어져 나가 있었고, 넷째 일꾼은 돼지치기가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보냈는데, 돼지 한 마리를 몰고 가서 방자한 구혼자들이 그것을 잡아 고기로 배를 채우게 해야 했다.

29 갑자기 짖어 대는 개들이 오디세우스를 보았다. 개들은 요란하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오디세우스는 꾀를 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지팡이가 손에서 떨어졌다. 하마터면 그는 제 농장 곁에서 험한 꼴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돼지치기가 날랜 발로 재빨리 뒤쫓아 문간으로 뛰쳐나왔고, 그 바람에 손에 들었던 가죽이 떨어졌다. 그는 개들을 큰 소리로 꾸짖고 돌멩이를 잇따라 던져 이리저리 쫓아 버렸다. 그러고는 주인에게 말했다.

37 "노인장, 하마터면 개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당신을 물어뜯을 뻔했구려. 그랬다면 당신이 내게 수치를 뒤집어씌웠을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신들께서 내게 다른 고통과 한숨을 내려 주셨으니, 나는 신에 버금가는 주인을 그리며 슬퍼하고 애태우며 여기 앉아, 남들이 먹을 살진 돼지를 기르고 있소. 그런데 그분은 아직 살아서 햇빛을 보고 계신다 해도, 아마 먹을 것을 애타게 찾으며 말이 다른 사람들의 고장과 도시를 떠돌고 계실 것이오. 자, 따라오시오. 오두막으로 갑시다, 노인장. 빵과 포도주로 마음껏 배를 채운 다음, 당신도 어디서 왔으며 어떤 시름을 견뎌 왔는지 말해 주시오."

48 이렇게 말하고 고귀한 돼지치기는 오두막으로 앞장서 갔다. 그는 손님을 데리고 들어가 앉게 했다. 무성한 잎가지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털이 덥수룩한 들염소의 가죽을 펼쳤는데, 크고 털이 수북한 그 가죽은 그가 깔고 자던 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그가 이렇게 맞아 주는 것이 기뻐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53 "주인장, 당신이 이렇게 기꺼이 나를 맞아 주었으니, 제우스와 다른 불사의 신들께서 당신이 가장 바라는 것을 주시기를 비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손님, 당신보다 더 못한 사람이 찾아온다 해도 손님을 업신여기는 것은 내게 도리가 아니오. 나그네와 거지는 모두 제우스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니 말이오. 우리가 주는 것은 작아도 정이 담겨 있소. 젊은 주인들이 휘두르는 집에서 늘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종들의 법도라서 그렇소. 신들께서 그분의 귀향을 막아 버리셨소. 그분이 계셨더라면 나를 살뜰히 아껴 주시고, 마음 넉넉한 주인이 제 종에게 주듯 내게도 집과 땅과 많은 이가 탐내는 아내를, 그런 살림을 마련해 주셨을 것이오. 종이 주인을 위해 애써 일하고 신께서 그 일을 키워 주시면 주인은 그렇게 해 주기 마련이오. 내가 맡아 일하는 이 일도 그렇게 늘어 가고 있소. 그러니 그분이 여기서 늙으셨다면 내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을 것이오. 그러나 그분은 돌아가셨소. 헬레네의 족속은 숱한 사내들의 무릎을 풀어 놓았으니, 차라리 무릎이 꺾여 송두리째 망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분도 아가멤논의 명예를 위해 트로이인들과 싸우러 좋은 말이 많은 일리오스로 가셨소."

72 이렇게 말하고 그는 띠를 둘러 윗옷을 재빨리 여미고, 새끼 돼지 떼가 갇혀 있는 우리로 갔다. 거기서 두 마리를 골라 들고 와서 둘 다 잡았다. 털을 그슬리고 잘게 썰어 꼬챙이에 꿰었다. 고기를 다 구운 다음에는 꼬챙이에 꿴 채 뜨거운 것을 가져다 오디세우스 앞에 놓고, 그 위에 흰 보릿가루를 뿌리고, 나무 사발에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를 섞은 다음, 자신은 손님과 마주 앉아 어서 들라고 권하며 말했다.

80 "손님, 종들에게 있는 새끼 돼지 고기라도 이제 드시오. 살진 돼지는 구혼자들이 먹어 치우니 말이오. 그자들은 신의 눈길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을 가엾게 여길 줄도 모르오. 그러나 복된 신들께서는 모진 짓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올바름과 도리에 맞는 일을 높이 여기시오. 남의 땅을 쳐들어가는 사납고 못된 적들이라도 제우스께서 전리품을 주셔서 배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신의 눈길을 두려워하는 큰 두려움이 그들 마음에도 떨어지기 마련이오. 그런데 이자들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하오. 어떤 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이 비참하게 돌아가신 줄 아는 것이오. 그러니 그자들은 도리에 맞게 구혼하지도 않고 제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으며, 태평하게 남의 재산을 거리낌 없이 마구 먹어 치우며 아끼는 법이 없소. 제우스께서 내리시는 밤과 낮이 몇이든, 그자들은 날마다 제물을 한 마리나 두 마리만 잡는 법이 없고, 포도주도 거리낌 없이 퍼마시며 축내고 있소. 그분의 살림은 정말 엄청났으니 말이오. 검은 뭍에서도, 이타카에서도, 그만한 살림을 가진 영웅은 아무도 없었소. 스무 사람의 재산을 합쳐도 그만큼 많지는 않았소. 내가 당신에게 낱낱이 일러 주겠소. 뭍에 소 떼가 열두 무리 있고, 양 떼도 그만큼, 돼지 떼도 그만큼, 너른 염소 떼도 그만큼 있는데, 남의 땅에서 온 목자들과 그분의 목자들이 치고 있소. 여기 이 섬에도 너른 염소 떼가 모두 열한 무리나 섬 끝자락에서 풀을 뜯고 있고, 믿음직한 사내들이 지키고 있소. 그 목자들이 저마다 날마다 살진 염소들 가운데 가장 좋아 보이는 놈을 한 마리씩 그자들에게 몰고 가오. 나는 여기서 이 돼지들을 지키고 돌보며, 돼지들 가운데 가장 좋은 놈을 잘 골라 그자들에게 보내고 있소."

109 돼지치기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오디세우스는 말없이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구혼자들에게 닥칠 재앙의 씨를 심고 있었다. 그가 저녁을 먹고 먹을 것으로 마음을 든든히 채우자, 돼지치기는 제가 마시던 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워 그에게 건넸다. 오디세우스는 그 잔을 받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115 "여보시오, 당신 말대로 그렇게 큰 부자에 그렇게 힘센 분이었다면, 제 재산으로 당신을 사들인 그분은 대체 누구요? 그분이 아가멤논의 명예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말해 주시오. 혹시 내가 어디선가 그런 분을 알았을지도 모르오. 내가 그분을 보았다고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는 제우스와 다른 불사의 신들께서나 아실 것이오. 나는 숱한 곳을 떠돌았으니 말이오."

121 일꾼들의 우두머리인 돼지치기가 대답했다. "노인장, 누가 떠돌다 와서 그분 소식을 전한다 해도 그분의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을 믿게 하지는 못할 것이오. 떠돌이 사내들이란 그저 먹고 잘 곳이 아쉬워 거짓말을 늘어놓을 뿐,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소. 떠돌다가 이타카 고을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 내 안주인을 찾아가 거짓말을 늘어놓고, 안주인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하며 하나하나 캐물으시는데, 슬퍼하시는 그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오. 남편이 먼 데서 죽으면 아내가 그러는 것이 도리이니 말이오. 노인장, 당신도 누가 외투와 윗옷을 옷으로 준다면 금세 이야기를 지어낼 것이오. 그러나 그분은 이미 목숨이 떠나 버렸고, 개들과 날랜 새들이 그 뼈에서 살갗을 뜯어냈을 것이오. 아니면 바다에서 물고기들이 그분을 뜯어먹었고, 그 뼈는 두꺼운 모래에 덮인 채 뭍에 누워 있을 것이오. 이렇게 그분은 그곳에서 돌아가셨고, 사랑하는 이들 모두에게 시름이 남았소. 누구보다 내게 그렇소. 내가 어디를 가든 다시는 그렇게 너그러운 주인을 만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처음 태어나 부모님 손에 자란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렇소. 고향 땅에 돌아가 내 눈으로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제는 그분들 때문에 그리 슬퍼하지 않고, 떠나신 오디세우스를 향한 그리움만이 나를 사로잡고 있소. 손님, 그분이 여기 계시지 않아도 나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가 송구스럽소. 그분이 나를 그토록 아끼고 마음 깊이 돌봐 주셨으니 말이오. 그래서 그분이 멀리 계셔도 나는 그분을 형님이라 부르오."

148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말을 받았다. "여보시오, 당신은 한사코 고개를 젓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더 말하지 않는구려. 당신 마음은 늘 믿으려 들지 않으니 말이오. 그러나 나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맹세를 걸고 말하겠소. 오디세우스는 돌아오고 있소. 그분이 돌아와 자기 집에 들어서는 그때 곧바로 기쁜 소식을 전한 값을 내게 주시오. 외투와 윗옷, 고운 옷을 내게 입혀 주시오. 그 전에는, 아무리 궁하다 해도 아무것도 받지 않겠소. 가난에 굴복해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는 내게 하데스의 문만큼이나 미우니 말이오. 이제 신들 가운데 먼저 제우스께서, 그리고 손님을 맞는 이 식탁과 내가 찾아온 나무랄 데 없는 오디세우스의 화덕이 증인이 되어 주소서. 이 모든 일은 정녕 내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바로 이해 안에, 이 달이 기울고 새 달이 차오를 무렵 오디세우스가 여기 집으로 돌아와, 여기서 그분의 아내와 빛나는 아들을 업신여기는 자는 누구든 벌할 것이오."

165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노인장, 나는 그 기쁜 소식의 값을 치를 일이 없을 것이고, 오디세우스께서도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실 것이오. 그러니 편히 마시오.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이 일은 내게 떠올리게 하지 마시오. 누가 믿음직한 주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내 가슴속 마음이 쓰라리니 말이오. 맹세는 그만둡시다. 다만 나도 페넬로페 마님도, 늙은 라에르테스 어른도, 신을 닮은 텔레마코스도 바라는 대로 오디세우스께서 돌아오시기를 바랄 뿐이오. 이제 나는 오디세우스께서 낳으신 아들 텔레마코스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소. 신들께서 그 아이를 어린나무처럼 길러 주셨으니, 나는 그 아이가 몸과 생김새가 남달리 빼어나서 사내들 가운데 제 사랑하는 아버지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으리라 여겼소. 그런데 불사의 신들 가운데 누가, 아니면 사람들 가운데 누가 그 아이의 반듯한 생각을 흐려 놓았소. 그 아이가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러 성스러운 필로스로 떠났는데, 당당한 구혼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그 아이를 숨어 기다리고 있으니, 신에 버금가는 아르케이시오스의 핏줄이 이타카에서 이름도 없이 끊어지게 하려는 속셈이오. 그러나 그 아이 일도 그만둡시다. 붙잡히든 달아나든, 크로노스의 아들께서 그 아이 위로 손을 펴 주시든 말이오. 자, 노인장, 당신의 시름을 내게 들려주시오. 이것도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내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왔소? 고향은 어디고 부모는 누구요? 무슨 배를 타고 왔소? 뱃사람들이 어떻게 당신을 이타카로 데려왔소?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라고 하던가요? 당신이 걸어서 여기 왔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오."

191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숨김없이 다 말하겠소. 이 오두막 안에서 우리 둘이 오래도록 먹을 것과 달콤한 술을 두고 조용히 잔치를 벌이고 다른 이들은 저마다 일하러 간다 해도, 신들의 뜻으로 내가 겪어 온 마음의 시름을 다 이야기하려면 한 해를 꼬박 들여도 쉽사리 끝내지 못할 것이오."

199 "나는 넓은 크레타 태생으로, 부잣집 아들이오. 그 집 홀에는 다른 아들들도 많이 태어나 자랐는데, 그들은 정실 아내에게서 난 적자들이었소. 나는 돈으로 사 온 첩이 낳은 아들이었소. 그러나 힐락스의 아들 카스토르는 나를 적자들과 똑같이 귀히 여겼소. 나는 그분의 핏줄이라고 자부하오. 그분은 그 무렵 크레타 고을 사람들에게 넉넉한 복과 재산과 영광스러운 아들들 덕에 신처럼 존경받았소. 그러나 죽음의 운명이 그분을 하데스의 집으로 데려가자, 기세 높은 아들들이 제비를 뽑아 그분의 재산을 나눠 가졌고, 내게는 아주 조금만 주고 집 한 채를 떼어 주었을 뿐이오. 그래도 나는 내 빼어남 덕에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딸을 아내로 맞았소. 나는 쓸모없는 자도, 싸움에서 달아나는 자도 아니었으니 말이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졌소. 그래도 그루터기만 보아도 당신은 나를 알아볼 것이오. 지금은 끔찍한 불행이 나를 짓누르고 있지만 말이오. 아레스와 아테나는 내게 용기와 적진을 뚫는 힘을 주었소. 적들에게 재앙을 심으려 가장 뛰어난 사내들을 골라 매복하러 갈 때면, 내 굳센 마음은 한 번도 죽음을 내다보지 않았소. 나는 언제나 맨 앞장서 뛰어나가 적들 가운데 발이 나만 못한 자를 창으로 잡았소. 싸움터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었소. 그러나 들일이나, 빛나는 자식들을 키우는 집안 살림은 내게 맞지 않았소. 내가 좋아한 것은 언제나 노를 단 배와 싸움과 반들반들 다듬은 투창과 화살이었소. 남들은 몸서리치는 끔찍한 것들이지만, 내게는 어떤 신이 내 마음에 심어 준 그런 것들이 좋았소. 사람마다 즐거워하는 일이 다르니 말이오. 아카이아인의 아들들이 트로이 땅을 밟기 전에, 나는 아홉 번이나 사내들과 날랜 배를 이끌고 남의 땅 사람들을 치러 갔고, 아주 많은 것을 손에 넣었소.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먼저 골랐고, 그 뒤에 제비를 뽑아서도 많이 받았소. 그래서 내 집 살림은 금세 불어났고, 나는 크레타 사람들 사이에서 두려움과 존경을 함께 받는 사람이 되었소. 그러나 멀리 내다보는 제우스께서 숱한 사내들의 무릎을 풀어 놓은 그 끔찍한 원정을 꾸미셨을 때, 사람들은 나와 이름 높은 이도메네우스에게 배를 이끌고 일리오스로 가라고 했소. 거절할 길이 없었소. 고을 사람들의 입이 무서웠으니 말이오. 그곳에서 우리 아카이아인의 아들들은 아홉 해 동안 싸웠고, 열 해째 되는 해에 프리아모스의 도시를 무너뜨리고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소. 그러나 어떤 신이 아카이아인들을 흩어 버렸소. 그런데 가련한 내게 꾀 깊은 제우스께서 재앙을 꾸미셨소. 나는 겨우 한 달 동안만 자식들과 처음 맞은 아내와 재산을 누리며 집에 머물렀소. 그 뒤에 내 마음이 이집트로 배를 타고 가라고 나를 부추겼소. 신에 버금가는 전우들과 함께 배를 잘 차려 가라고 말이오. 나는 배 아홉 척을 차렸고, 사람들이 금세 모여들었소. 그 뒤로 엿새 동안 내 정다운 전우들은 잔치를 벌였고, 나는 신들께 바치고 그들 자신이 잔치를 차릴 수 있도록 제물로 쓸 짐승을 많이 내주었소. 이레째 되는 날 우리는 넓은 크레타를 떠나 세차고 좋은 북풍을 타고 마치 물살을 따라 내려가듯 쉽게 바다를 건넜는데, 내 배는 한 척도 상하지 않았고, 우리는 다치지도 병들지도 않은 채 앉아 있었으며, 바람과 키잡이들이 배를 바로 몰았소."

257 "닷새째 되는 날 우리는 물이 고운 이집트강에 닿았고, 나는 이집트강에 양 끝이 휜 배들을 세웠소. 그리고 정다운 전우들에게 배 곁에 그대로 머물며 배를 지키라고 이르고, 정찰병들을 망보는 자리로 내보냈소. 그런데 전우들은 오만에 빠져 제 기운만 믿고 날뛰며, 곧바로 이집트 사람들의 더없이 아름다운 들판을 휩쓸었소.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끌고 오고 사내들은 죽였소. 금세 함성이 도시까지 닿았소. 함성을 들은 그곳 사람들이 날이 밝자마자 쳐들어왔소. 온 들판이 보병과 말과 청동의 번득임으로 가득 찼소. 벼락을 즐기는 제우스께서 내 전우들에게 비참한 겁을 불어넣으셔서, 아무도 버티고 맞서 싸우지 못했으니, 재앙이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싼 까닭이었소. 그들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을 날카로운 청동으로 죽였고, 나머지는 산 채로 끌고 가 억지로 종살이를 시켰소. 그때 제우스께서 몸소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을 넣어 주셨소. 차라리 그곳 이집트에서 죽어 내 운명을 맞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직도 재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오. 나는 곧바로 잘 만든 투구를 머리에서 벗고 방패를 어깨에서 내려놓고 창을 손에서 내던졌소. 그러고는 왕의 말 앞으로 나아가 그의 무릎을 잡고 입을 맞추었소. 왕은 나를 구해 주고 가엾게 여겨, 눈물을 흘리는 나를 수레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갔소. 물론 많은 사람이 물푸레나무 창을 들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소. 몹시 노해 있었으니 말이오. 그러나 왕이 그들을 막아섰소. 나쁜 짓을 누구보다 언짢아하시는, 나그네를 지키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오."

285 "나는 그곳에 일곱 해를 머물며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서 재물을 많이 모았소. 모두가 내게 선물을 주었으니 말이오. 그러나 여덟 해째 되는 해가 돌아왔을 때, 속임수에 능한 페니키아 사람 하나가 찾아왔소. 남의 것을 갉아먹는 욕심꾸러기로, 이미 사람들에게 숱한 몹쓸 짓을 저지른 자였소. 그자는 꾀를 부려 나를 꼬드겨 데리고 갔고, 우리는 그자의 집과 재산이 있는 페니키아에 닿았소. 그곳에서 나는 그자 곁에 꼬박 한 해를 머물렀는데, 달과 날이 다 차고 한 해가 다시 돌아와 철이 바뀌자, 그자는 바다를 건너는 배에 나를 태워 리비아로 데려갔소. 거짓을 꾸며, 나더러 자기와 함께 짐을 실어 나르자고 했지만, 실은 그곳에서 나를 팔아 엄청난 값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소. 나는 그런 낌새를 느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자를 따라 배에 올랐소. 배는 세차고 좋은 북풍을 타고 크레타 한복판 위쪽을 지나 내달렸소. 그러나 제우스께서는 그들에게 파멸을 꾸미고 계셨소. 우리가 크레타를 떠나자 다른 땅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하늘과 바다뿐이었소. 그때 크로노스의 아들께서 우묵한 배 위에 검푸른 구름을 드리우셨고, 그 아래로 바다가 어두워졌소. 그와 함께 제우스께서 천둥을 울리며 배에 벼락을 내리치셨소. 제우스의 벼락을 맞은 배는 온통 빙글빙글 돌았고 유황 냄새로 가득 찼으며, 사람들은 모두 배에서 떨어졌소. 그들은 바다까마귀처럼 검은 배 둘레의 물결에 휩쓸려 다녔고, 신께서 그들에게서 귀향을 앗아 가셨소. 그러나 마음에 고통을 품은 나에게는 제우스께서 몸소, 내가 아직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뱃머리가 검푸른 배의 어마어마한 돛대를 손에 쥐여 주셨소. 나는 그 돛대를 끌어안고 사나운 바람에 떠밀려 다녔소. 아흐레 동안 떠밀려 다녔고, 열흘째 되는 캄캄한 밤에 굽이치는 큰 물결이 나를 테스프로티아인의 땅에 닿게 했소. 그곳에서 테스프로티아인의 왕, 영웅 페이돈이 값도 받지 않고 나를 돌보아 주었소.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 찬 바람과 지친 몸에 짓눌린 나를 만나 손을 잡아 일으켜, 제 아버지의 집에 이르기까지 데려갔소. 그리고 외투와 윗옷을 옷으로 입혀 주었소."

321 "나는 거기서 오디세우스 소식을 들었소. 왕은 오디세우스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그를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고 했소.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모은 재물, 청동과 황금과 공들여 벼린 쇠를 내게 보여 주었소. 왕의 홀에 쌓여 있는 그 보물은 열 대째 자손까지도 먹여 살릴 만큼 많았소. 왕의 말로는 오디세우스가 도도나에 갔다고 했소. 잎이 높이 우거진 신의 참나무에서 제우스의 뜻을 들으려고 간 것인데, 오래 떠나 있던 터라 기름진 이타카 고을로 드러내 놓고 돌아가야 할지 몰래 돌아가야 할지 물으려 한다는 것이었소. 왕은 집에서 신께 술을 따라 바치며 내 앞에서 맹세했소. 배를 이미 바다에 띄워 두었고, 그를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데려다줄 전우들도 채비를 마쳤다고 말이오. 그러나 왕은 나를 먼저 보냈소. 마침 테스프로티아인들의 배가 밀이 많이 나는 둘리키온으로 떠나려던 참이었소. 왕은 그들에게 나를 아카스토스 왕에게 정성껏 데려다주라고 일렀소. 그런데 그들 마음에는 나를 두고 나쁜 꾀가 들어, 내가 고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하려 했소. 바다를 건너는 배가 뭍에서 멀리 떠나오자, 그들은 곧바로 나를 종으로 만들 궁리를 했소. 내 외투와 윗옷을 벗기고, 다른 고약한 누더기와 윗옷을 걸쳐 주었소. 지금 당신이 눈앞에 보는 이 해진 옷이오. 저녁 무렵 그들은 멀리서도 환히 보이는 이타카의 밭에 닿았소. 그곳에서 그들은 갑판 튼튼한 배 안에 나를 잘 꼰 밧줄로 단단히 묶어 두고, 자기들은 배에서 내려 바닷가에서 서둘러 저녁을 먹었소. 그러나 신들께서 몸소 내 묶인 줄을 쉽게 풀어 주셨소. 나는 누더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반들반들한 키를 타고 내려가 가슴을 바다에 댄 다음, 두 팔로 물을 헤치며 헤엄쳐 금세 그들에게서 멀리 벗어났소. 그러고는 꽃이 만발한 덤불숲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소. 그들은 크게 아쉬워하며 이리저리 찾아다녔지만, 더 멀리 뒤져 봐야 득 될 것이 없어 보였는지 다시 우묵한 배로 돌아갔소. 신들께서 몸소 나를 쉽게 숨겨 주시고, 이렇게 사리를 아는 사람의 농장으로 데려다주셨소. 내게는 아직 살아갈 몫이 남아 있는가 보오."

360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 가엾은 손님, 당신이 겪은 일과 떠돌아다닌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니 내 마음이 몹시 흔들렸소. 그러나 오디세우스 이야기만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소. 그 말로는 나를 믿게 하지 못할 것이오. 당신 같은 처지의 사람이 무엇 하러 쓸데없이 거짓말을 하오? 내 주인의 귀향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분은 모든 신들에게 단단히 미움을 받았소. 그러니 트로이인들 사이에서 쓰러지게 하지도 않고, 전쟁을 끝낸 뒤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서 숨지게 하지도 않았소. 그랬다면 온 아카이아인이 그분께 무덤을 쌓아 드렸을 테고, 그분은 아들에게도 뒷날까지 큰 명성을 남기셨을 것이오. 그런데 이제는 회오리바람이 그분을 아무 영광도 없이 낚아채 가 버렸소. 나는 돼지들 곁에 떨어져 살며 도시에도 가지 않소. 어디서 소식이 왔을 때 사려 깊은 페넬로페 마님이 와 보라고 하시면 모를까. 그러면 거기 사람들이 곁에 앉아 이것저것 캐묻소. 오래전에 떠나신 주인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도 있고, 그분의 살림을 값도 치르지 않고 먹어 치우며 즐거워하는 자들도 있소. 그러나 나는 아이톨리아 사람 하나가 이야기로 나를 속인 뒤로는 무엇을 캐묻고 따질 마음이 없소. 그자는 사람을 죽이고 숱한 땅을 떠돌다가 내 집에 왔고, 나는 그를 반갑게 맞았소. 그자는 크레타 사람들 가운데 이도메네우스의 집에서 그분이 폭풍에 부서진 배를 고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고, 여름이나 가을이면 신에 버금가는 전우들과 함께 재물을 잔뜩 싣고 돌아오실 거라고 했소. 시름 많은 노인장, 당신도 어떤 신이 내게로 이끌어 주었으니 거짓말로 내 비위를 맞추려 하거나 나를 홀리려 들지 마시오. 내가 당신을 받들고 아끼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나그네를 지키는 제우스를 두려워하고 당신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이오."

390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당신 가슴속 마음은 정말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구려. 맹세까지 했는데도 당신을 돌려세우지 못하고 믿게 하지도 못하니 말이오. 자, 그러면 이제 우리 약속을 합시다. 올림포스에 사는 신들께서 앞으로 우리 둘의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이오. 당신 주인이 이 집에 돌아오면, 당신은 내게 외투와 윗옷을 옷으로 입혀 내가 마음 두고 있는 둘리키온으로 보내 주시오. 그러나 내가 말한 대로 당신 주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종들을 시켜 나를 큰 바위에서 내던지게 하시오. 그러면 다른 거지도 남을 속이지 않으려 조심할 것이오."

401 고귀한 돼지치기가 대답했다. "손님, 내가 당신을 오두막에 데려와 손님 선물을 주고 나서 다시 당신을 죽여 그 목숨을 빼앗는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도 앞으로도 내 좋은 평판과 빼어남이 참으로 대단하겠구려. 그러고 나서야 나는 기꺼이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께 빌 수 있겠소! 이제 저녁 먹을 때가 되었소. 동료들이 어서 돌아와야 오두막에서 맛있는 저녁을 지을 텐데."

409 이렇게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돼지들과 돼지 치는 사내들이 가까이 돌아왔다. 그들은 돼지들을 늘 자던 우리에 가두어 재웠고, 우리에 갇히는 돼지들이 한없이 꽥꽥거렸다. 고귀한 돼지치기가 동료들을 불러 말했다.

414 "돼지들 가운데 가장 좋은 놈을 데려오게. 먼 데서 오신 손님을 위해 잡으려 하네. 우리도 덕을 좀 보세. 흰 엄니의 돼지들 때문에 우리는 오랫동안 고생을 견뎌 왔는데, 남들이 값도 치르지 않고 우리 수고를 먹어 치우고 있으니 말일세."

418 이렇게 말하고 그는 무자비한 청동 도끼로 장작을 팼다. 일꾼들은 아주 살진 다섯 살배기 돼지를 끌고 들어와 화덕 곁에 세웠다. 돼지치기는 불사의 신들을 잊지 않았다.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흰 엄니 돼지의 머리털을 잘라 불 속에 던지고, 지혜 많은 오디세우스가 제 집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모든 신들께 빌었다. 그러고는 쪼개지 않고 남겨 둔 참나무 장작을 높이 쳐들어 돼지를 내리쳤고, 돼지는 목숨이 끊어졌다. 일꾼들이 돼지의 멱을 따고 털을 그슬려 곧바로 각을 떴다. 돼지치기는 모든 부위에서 맏몫으로 조금씩 떼어 낸 날고기를 기름진 비계 위에 얹어 신께 바치고, 그것에 보릿가루를 뿌려 불 속에 던졌다. 그들은 나머지 고기를 잘게 썰어 꼬챙이에 꿰고 정성껏 구워서 모두 꼬챙이에서 빼냈다. 그리고 그것을 고기 판 위에 한데 모아 쏟자, 돼지치기가 고기를 나누려고 일어섰다. 그는 무엇이 도리에 맞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 고기를 모두 일곱 몫으로 갈랐다. 한 몫은 님프들과 마이아의 아들 헤르메스께 기도하며 바쳐 두고, 나머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흰 엄니 돼지의 등심을 통째로 주어 그를 높였고, 그것으로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그에게 말했다.

440 "에우마이오스,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좋은 몫으로 높여 주니, 당신이 내게 그렇듯 아버지 제우스께도 사랑받기를 비오."

442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어서 드시오, 이상한 손님. 여기 있는 것으로나마 즐기시오. 신께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이것은 주시고 저것은 거두시니 말이오. 그분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소."

446 그는 이렇게 말하고 영원히 사는 신들께 맏물을 태워 바쳤고, 반짝이는 포도주를 신께 따라 바친 다음 도시를 무너뜨린 오디세우스의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제 몫 앞에 앉았다. 메사울리오스가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 주인이 떠나고 없는 동안 돼지치기가 안주인이나 늙은 라에르테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얻은 종이었다. 타포스인들에게서 제 재산을 들여 사 온 것이었다. 그들은 앞에 차려진 음식에 손을 뻗었다. 실컷 먹고 마셔 더 바랄 것이 없게 되자 메사울리오스가 빵을 치웠고, 그들은 빵과 고기로 배를 채운 뒤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457 달도 없는 사나운 밤이 찾아왔다. 제우스는 밤새 비를 뿌렸고, 늘 물기를 머금은 서풍이 거세게 불었다. 오디세우스가 돼지치기를 떠보려고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돼지치기가 그를 그토록 아껴 주었으니, 혹시 제 외투를 벗어 주거나 동료 가운데 누구에게 그러라고 이르지 않을까 해서였다.

462 "에우마이오스,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모두 이제 들어 보시오. 자랑 삼아 이야기를 하나 하겠소. 사람을 홀리는 포도주가 시키는구려. 포도주는 아무리 지혜 많은 사람도 큰 소리로 노래하게 하고 실없이 웃게 하며, 춤까지 추게 하고,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말도 내뱉게 하오. 그러나 이미 큰 소리로 말을 꺼냈으니 숨기지 않겠소. 트로이 아래에서 매복을 짜서 이끌고 가던 그때처럼 내가 젊고 힘이 든든하다면 좋으련만. 그때 오디세우스와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이끌었고, 셋째로 나도 함께 지휘했소. 그들이 나를 불러 주었기 때문이오. 우리가 도시와 높은 성벽에 이르자, 우리는 성 둘레 빽빽한 덤불 속, 갈대밭과 늪지에 무기를 둘러쓰고 웅크리고 누워 있었소. 북풍이 몰아치며 꽁꽁 얼어붙는 사나운 밤이 찾아왔소. 위에서는 서리처럼 차가운 눈이 내렸고, 방패마다 얼음이 엉겨 붙었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외투와 윗옷이 있어서 방패로 어깨를 감싼 채 편히 잠들었소. 그러나 나는 얼어붙을 줄은 몰랐던 터라 어리석게도 길을 나설 때 외투를 동료들에게 맡겨 두고 왔고, 그래서 방패와 반짝이는 허리띠만 차고 따라나섰소. 그러다 밤이 세 토막으로 나뉘어 마지막 토막에 들어서고 별들이 기울었을 때, 나는 가까이 있던 오디세우스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말을 건넸고, 그는 곧바로 귀를 기울였소."

486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나는 이제 산 사람들 틈에 더는 있지 못할 것 같소. 추위가 나를 짓누르고 있소. 외투가 없으니 말이오. 어떤 신이 나를 속여 윗옷 한 벌만 입고 오게 했소. 이제는 피할 길이 없소.'"

490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곧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었소. 그는 꾀를 내는 데도 싸우는 데도 그런 사람이었소.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소. '쉿, 다른 아카이아인이 자네 말을 듣지 못하게 조용히 하게.'"

494 "그러더니 그는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들어 말했소. '벗들이여, 들어 보게. 잠결에 신이 보낸 꿈이 내게 찾아왔네. 우리가 배에서 너무 멀리 나와 있네. 누가 가서 백성의 목자,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에게 배 곁에서 더 많은 사람을 보내 달라고 일러 줄 수 없겠나?'"

499 "그가 이렇게 말하자 안드라이몬의 아들 토아스가 재빨리 일어나 붉은 외투를 벗어 놓고 배를 향해 달려갔소. 나는 그의 옷을 덮고 기쁘게 누워 있었고, 이윽고 황금 옥좌의 새벽 여신이 빛을 비추었소. 그때처럼 내가 젊고 힘이 든든하다면 좋으련만. 그러면 이 돼지 농장에서도 누군가가 외투를 내주었을 것이오. 훌륭한 사내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말이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몸에 누더기를 걸쳤다고 모두 나를 업신여기는구려."

507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노인장,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나무랄 데가 없고, 도리에 어긋나거나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그러니 고생에 지친 탄원자가 찾아왔을 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라면, 옷이든 다른 무엇이든 오늘 밤은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그러나 내일 아침이 되면 당신은 다시 그 누더기를 걸치고 다녀야 하오. 여기에는 갈아입을 외투와 윗옷이 많지 않고, 사람마다 한 벌씩밖에 없으니 말이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면, 그 아이가 몸소 당신에게 외투와 윗옷을 옷으로 주고, 당신 마음과 가슴이 가라는 곳으로 보내 줄 것이오."

518 이렇게 말하고 그는 벌떡 일어나 불 가까이에 손님의 잠자리를 마련하고, 그 위에 양가죽과 염소 가죽을 깔았다. 오디세우스가 거기 눕자, 에우마이오스는 그 위에 두툼하고 큰 외투를 덮어 주었다. 무서운 폭풍이 일 때 입으려고 갈아입을 옷으로 곁에 두었던 외투였다.

523 이렇게 오디세우스는 그곳에 누워 잠이 들었고, 젊은 일꾼들도 그 곁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돼지치기는 돼지들과 떨어져 그곳에서 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고, 오디세우스는 자기가 멀리 떠나 있는데도 그가 이토록 살림을 극진히 돌보는 것이 기뻤다. 돼지치기는 먼저 날카로운 칼을 튼튼한 어깨에 둘러메고, 바람을 막아 주는 아주 두툼한 외투를 걸쳤다. 잘 자란 큰 염소의 가죽을 집어 들고, 개와 사람을 막아 줄 날카로운 투창도 챙겼다. 그러고는 흰 엄니의 돼지들이 북풍을 피해 우묵한 바위 밑에서 자고 있는 곳으로 잠을 자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