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76~150
76 언제나 농담만 하지 말라. 분별(prudencia)은 진지한 데서 드러나고, 진지함은 재치보다 신용이 두텁다. 늘 농담만 하는 사람은 결코 진심인 사람이 못 된다. 이런 사람은 거짓말쟁이와 한가지로 여겨 믿어 주지 않으니, 거짓말쟁이의 말은 거짓일까 염려되고 이들의 말은 놀림일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언제 판단력을 차리고 말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 판단력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칠 줄 모르는 익살만큼 큰 무안은 없다. 어떤 이들은 말재주꾼이라는 명성을 얻고 슬기로운 사람(cuerdo)이라는 신용을 잃는다. 즐거움에는 제 몫의 짧은 때가 있어야 하고, 나머지 때는 모두 진지함의 몫이다.
77 누구에게나 맞출 줄 알라. 사려 깊은 프로테우스1가 되라. 학자와는 학자로, 성자와는 성자로. 모든 사람을 얻는 큰 기술이니, 닮음이 호의를 부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기질을 살펴 저마다의 기질에 자신을 맞추고, 진지한 사람이든 쾌활한 사람이든 그 물결을 따라가며 수완 있게 제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 남에게 기대어 사는 사람에게는 절박한 일이다. 삶의 이 큰 묘수에는 큰 밑천이 든다. 식견으로는 재치가, 안목으로는 천성이 두루 넓은 사내에게는 덜 어렵다.
78 시도의 기술. 어리석음은 늘 불쑥 뛰어든다. 어리석은 자는 모두 뻔뻔하기 때문이다. 그 단순함이 먼저는 걸림돌을 알아채지 못하게 막고, 나중에는 무안을 당해도 아픈 줄 모르게 한다. 그러나 슬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더듬어 들어간다. 살핌과 조심이 척후병이 되어 앞길을 밝혀 나가니, 위험 없이 나아갈 수 있다. 모든 무모함에 사려(discreción)는 추락을 선고한다. 행운이 때로 사면해 주기는 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어 두려운 곳에서는 멈칫멈칫 가야 한다. 영민함이 앞서 더듬고 분별이 한 걸음씩 땅을 얻게 하라. 오늘날 사람 사이의 교제에는 큰 모래톱이 곳곳에 숨어 있으니, 늘 추를 드리워 물 깊이를 재며 나아가야 한다.
79 유쾌한 천성. 절제만 곁들이면 흠이 아니라 자질이다. 익살 한 알이 모든 것에 간을 맞춘다. 가장 큰 사람들도 모든 사람의 호의를 사는 익살이라는 패를 쓴다. 다만 언제나 슬기에 걸맞은 풍모를 지키고, 체통에 먼저 예를 갖춘다. 어떤 이들은 재담 한마디를 곤경에서 벗어나는 지름길로 삼으니, 농담으로 받아넘겨야 할 일이 있고 때로는 상대가 가장 진지하게 여기는 일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익살은 온화함을 드러낸다. 마음을 낚는 갈고리다.
80 전해 들을 때는 주의하라. 사람은 대개 전해 들은 것으로 산다. 제 눈으로 보는 것은 가장 적고, 남의 말을 믿고 산다. 귀는 진실에게는 뒷문이고 거짓에게는 정문이다. 진실은 대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은 드물며, 제 순수한 바탕 그대로 오는 일도 드물어서, 멀리서 올수록 더욱 그러하고, 거쳐 온 감정들에게서 늘 무엇인가 섞여 묻어 온다. 격정은 미워하든 편들든 닿는 것마다 제 빛깔로 물들인다. 격정은 늘 제 인상을 새기려 든다. 칭찬하는 사람은 크게 조심하고, 헐뜯는 사람은 더 크게 조심하라. 이 대목에서는 온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이에 끼어 말을 전하는 사람의 속셈을 찾아내고, 그가 어느 발로 움직였는지 미리 알아야 한다. 되새겨 보는 일이 빠진 것과 거짓된 것을 가려내는 저울이 되게 하라.
81 제 빛남을 새롭게 하라. 불사조의 특권이다. 뛰어남도 늙기 마련이고, 명성도 함께 늙는다. 익숙해지면 감탄이 줄고, 평범한 새것이 늙어 버린 최고의 탁월을 이기곤 한다. 그러니 용기에서, 재치에서, 행운에서, 모든 것에서 다시 태어나라. 늠름한 새로움에 자신을 걸고 해처럼 여러 번 떠오르며 빛낼 무대를 바꾸어, 떠나온 곳에서는 없어진 아쉬움이 그리움을 부르고 새로 선 곳에서는 새로움이 갈채를 부르게 하라.
82 선도 악도 끝까지 몰아가지 말라. 어느 현자2는 온 지혜를 모든 일의 절도 하나로 간추렸다. 지극한 법은 불의가 되고3, 오렌지도 너무 짜면 쓴맛이 난다. 즐거움에서도 결코 극단까지 가서는 안 된다. 재치도 끝까지 짜내면 마르고, 폭군처럼 쥐어짜는 사람은 젖 대신 피를 짜낸다.
83 가벼운 실수 하나쯤은 허락하라. 소홀함 하나가 때로는 자질을 가장 잘 추천해 주기 때문이다. 시샘에게도 저만의 도편추방이 있어서, 죄가 무거울수록 더 점잖은 얼굴을 한다. 너무 완전한 것을 두고 죄짓지 않는 것이 죄라고 고발하고,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는 이유로 모든 면에서 유죄를 선고한다. 아주 좋은 것의 흠을 찾을 때는 아르고스4가 된다. 위안이라도 얻으려고. 비난은 벼락처럼 가장 높이 솟은 돋보임을 친다. 그러니 호메로스도 때로는 졸게 하고5, 재치나 용기에서는 소홀한 척도 해 보되 슬기에서만은 결코 그러지 말아서, 적의를 달래 독을 품고 터지지 않게 하라. 시샘이라는 소에게 망토를 던져 주고 불멸을 건지는 셈이다.
84 적을 쓸 줄 알라. 모든 것은 다치게 할 칼날 쪽이 아니라 지켜 줄 칼자루 쪽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경쟁심은 더욱 그렇다. 어리석은 자가 벗에게서 얻는 것보다 지혜로운 사내가 적에게서 얻는 것이 더 많다. 총애라면 손대기를 망설였을 어려움의 산을 적의가 평지로 만들곤 한다. 많은 이의 위대함을 지어 준 것은 그를 미워한 자들이었다. 아첨은 증오보다 사납다. 아첨이 덮어 주는 흠을 증오는 확실하게 고쳐 주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앙심을 거울로 삼는다. 애정이 비추는 거울보다 정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헐뜯는 말이 나오기 전에 흠을 미리 막거나 고친다. 경쟁심이나 적의와 국경을 맞대고 살 때는 조심이 커지는 법이다.
85 말리야6가 되지 말라. 많이 쓰이다가 마침내 함부로 쓰이게 되는 것이 뛰어난 것들의 흠이다. 모두가 탐내다 보니 결국 모두를 질리게 한다. 아무 데도 쓸모없는 것은 큰 불행이다. 어디에나 쓰이려 드는 것도 그 못지않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 많이 얻으려다 잃고, 앞서 바람을 받던 만큼 뒤에는 미움을 받는다. 온갖 완전함에서 이런 말리야들이 닳아 해진다. 드물다는 처음의 존중을 잃고, 흔하다는 업신여김을 얻는다. 모든 극단의 유일한 처방은 빛남에서 중간을 지키는 것이다. 넘침은 완전함에 두고, 절제는 드러냄에 두어야 한다. 횃불은 밝게 탈수록 더 빨리 닳고 더 짧게 간다. 겉으로 아낀 것은 존중이라는 이자로 돌아온다.
86 나쁜 소문을 미리 막으라. 범속한 무리는 머리가 많으니, 악의를 품은 눈도 많고 헐뜯는 혀도 많다. 그 무리 사이에 나쁜 소문 하나가 돌아 가장 큰 신용에도 흠을 내는 일이 있고, 그것이 범속한 별명으로 굳으면 명망은 끝장난다. 대개는 눈에 띄는 무안이나 우스운 흠이 빌미가 되어 뒷공론에서 갈채받는 거리가 되지만, 어느 한 사람의 경쟁심이 일부러 지어내 범속한 악의에 던져 주는 흠도 있다. 적의의 입이 따로 있어서, 큰 명성을 무너뜨리는 데 대놓고 하는 욕설보다 농담 한마디가 더 빠르다. 나쁜 명성은 얻기가 아주 쉽다. 나쁜 것은 잘 믿기고 지우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기로운 사내는 이런 무안을 피하고, 주의로 범속한 무례에 맞서야 한다. 고치는 것보다 막는 것이 쉽다.
87 교양과 단정함. 사람은 야만인으로 태어나, 자신을 갈고닦아 짐승에서 벗어난다. 교양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클수록 더욱 그렇다. 그리스는 교양을 믿고 나머지 온 세상을 야만이라 부를 수 있었다. 무지는 몹시 거칠다. 앎만큼 사람을 가꾸는 것은 없다. 그러나 지혜조차 다듬지 않으면 투박하다. 생각하는 것만 다듬을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도 다듬어야 하고, 말을 나누는 것은 더욱 다듬어야 한다. 타고나기를 단정한 사람들이 있으니, 안팎이 다 아름다워서 생각과 말에서, 나무껍질과 같은 몸의 차림새에서, 열매와 같은 영혼의 자질에서 모두 단정하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너무 투박해서, 제 모든 것을, 때로는 탁월한 점까지도 참을 수 없이 야만스러운 지저분함으로 빛바래게 했다.
88 교제는 크게 하고, 그 안에서 높음을 꾀하라. 큰 사람는 처신이 잘아서는 안 된다. 일을 너무 시시콜콜 따져서는 안 되고 달갑지 않은 일은 더욱 그러하니, 무심한 듯 모든 것을 알아채는 것은 이점이지만 일부러 모든 것을 캐내려 드는 것은 이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귀족다운 대범함으로 처신해야 한다. 그것이 아량의 한 가지다. 모른 체하는 것이 다스림의 큰 몫이다. 대부분의 일은 그냥 넘겨야 한다. 집안사람 사이에서, 벗 사이에서, 적 사이에서는 더욱. 지나친 꼼꼼함은 모두 짜증스럽고, 성품이 그러면 견디기 힘들다. 언짢은 일에 자꾸 들락거리는 것은 일종의 광증이다. 대개 사람의 처신은 그 사람의 마음과 그릇을 그대로 닮는다.
89 자기를 아는 일. 천성과 재치에서, 소견과 감정에서. 먼저 자기를 알지 못하면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얼굴을 비추는 거울은 있어도 마음을 비추는 거울은 없다. 자기를 사려 깊게 돌아보는 일이 그 거울이 되게 하라. 바깥 모습은 잊더라도 속 모습은 간직하라. 바로잡고 더 낫게 하기 위해서다. 일을 벌이려면 제 슬기와 묘수의 힘을 알고, 일에 몸을 던지려면 제 성내는 힘을 가늠해 보라. 모든 일에 앞서 제 깊이를 재고 제 밑천을 달아 두라.
90 오래 사는 기술은 잘 사는 것이다. 목숨을 일찍 끝내는 것이 둘 있다. 어리석음과 비열함. 어떤 이는 지킬 줄 몰라서, 어떤 이는 지킬 마음이 없어서 목숨을 잃었다. 덕이 제 자신의 상이듯, 악덕은 제 자신의 벌이다. 악덕 속에서 서둘러 사는 사람은 두 갈래로 일찍 끝나고, 덕 속에서 서둘러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마음의 올곧음은 몸에도 옮아간다. 좋은 삶은 깊이에서만이 아니라 길이에서도 길게 여겨진다.
91 늘 무분별의 꺼림칙함 없이 행하라. 실행하는 사람에게 실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이미 확신이다. 지켜보는 사람이 맞수라면 더욱 그렇다. 격정이 뜨거울 때부터 소견이 꺼림칙해한다면, 나중에 격정이 식으면 명백한 어리석음이라고 판결할 것이다. 분별이 의심스러운 행동은 위험하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슬기는 개연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제나 이성의 빛이 한낮일 때 걷는다. 품기만 했을 뿐인데 벌써 경계심이 유죄를 선고하는 일이 어찌 잘될 수 있겠는가? 마음속에서 반대 하나 없이 통과한 가장 높은 결단도 흔히 불행하게 끝나는데, 이성에서 비틀거리며 시작하고 소견에게서 흉한 점괘를 받은 결단은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92 두루 미치는 지각. 모든 일에서 말이다. 행동과 말의 첫째이자 으뜸가는 규칙이며, 직분이 크고 높을수록 더욱 당부되는 규칙이다. 묘수 몇 짐보다 슬기 한 톨이 낫다. 갈채는 덜 받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길이다. 그러나 슬기롭다는 명망은 명성의 개선 행진이니, 그 한 표가 성취를 가리는 시금석인 슬기로운 사람들만 만족시키면 충분하다.
93 두루 갖춘 사람. 온갖 완전함으로 이루어져 여러 사람 몫을 한다. 삶을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고, 그 즐거움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완전함을 갖춘 다채로움은 삶의 즐거운 소일거리다. 좋은 것을 모두 얻을 줄 아는 것은 큰 기술이니, 자연이 사람을 뛰어나게 지어 자연 만물의 요약으로 만들었다면, 기술은 안목과 지성을 닦고 가꾸어 사람을 하나의 우주로 만들라.
94 다 헤아릴 수 없는 밑천. 주의 깊은 사내가 모든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 싶다면, 앎이든 값어치든 남이 제 바닥을 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게는 하되, 다 헤아리게 하지는 말라. 누구도 그 그릇의 끝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라. 깨어남(desengaño)의 위험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밑천은 아무리 크더라도 훤히 드러날 때보다 어디까지 닿는지 짐작하고 의심할 때 더 큰 우러름을 낳으니, 누가 그 전부를 알아챌 틈은 결코 주지 말라.
95 기대를 붙들어 둘 줄 알라. 늘 먹이를 주어 키우라. 많이 보여 준 것이 더 많은 것을 약속하게 하고, 가장 좋은 행동으로 더 큰 판돈을 걸라. 첫판에 남은 판돈을 모두 걸어서는 안 된다. 힘에서도 앎에서도 자신을 조절할 줄 알고, 이룬 것을 조금씩 앞으로 내놓아 가는 것이 큰 수다.
96 큰 양식(良識, sindéresis). 이성의 옥좌요 분별의 주춧돌이니, 그것만 믿으면 맞히기가 어렵지 않다. 하늘이 내린 운수이고, 가장 먼저이자 가장 좋은 것이기에 가장 바라는 운수다. 그것은 갑옷의 첫 조각이어서 그 절실함이 대단하니, 다른 어떤 조각이 없어도 모자란 사람이라 불리지 않지만 이것만은 모자라면 더 눈에 띈다. 삶의 모든 행동이 그 힘에 달려 있고, 모두 그 인정을 구한다. 모든 일은 지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치에 가장 맞는 것을 향하는 타고난 기울기이며, 언제나 가장 옳은 것과 짝을 맺는다.
97 명망을 얻고 지키라. 명망은 명성의 열매를 누리는 일이다. 얻기는 무척 어렵다. 탁월에서 나오는데, 탁월은 평범이 흔한 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일단 얻으면 지키기는 쉽다. 많은 의무를 지우고,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다. 그 원인과 영역이 높아 우러름에까지 이르면 일종의 존엄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값어치가 있었던 것은 알맹이 있는 명망이다.
98 의지를 암호로 감추라. 격정은 마음에 난 샛문이다. 가장 쓸모 있는 앎은 감추는 데 있다. 패를 다 펴 보이고 노는 사람은 질 위험을 안는다. 눈 밝은 사람의 주의에는 조심스러운 사람의 삼감으로 맞서라. 스라소니 같은 추론에는 먹물 뿜는 갑오징어 같은 속내로. 제 입맛을 남이 알지 못하게 하라. 그래야 어떤 이는 반대하려고, 어떤 이는 아첨하려고 미리 손을 쓰지 못한다.
99 실제와 겉모습. 사물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통한다.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드물고, 겉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은 많다. 얼굴에 악의가 보이면 옳은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100 깨어난 사내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요 철학하는 궁정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는 말고, 그런 척은 더더욱 하지 말라. 철학하는 일은 신용을 잃었다. 현자들의 가장 큰 일인데도. 슬기로운 사람들의 학문은 권위를 잃은 채 살아간다. 세네카7가 로마에 들여왔고, 한동안 궁정에서 대접받았으나, 이제는 주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깨어남은 언제나 분별의 먹이요 올곧음의 즐거움이었다.
101 세상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비웃으니, 모두가 어리석다. 누가 표를 던지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좋기도 하고 모든 것이 나쁘기도 하다. 이 사람이 좇는 것을 저 사람은 쫓아낸다. 모든 것을 제 헤아림으로 재려는 자는 참을 수 없는 어리석은 자다. 완전함은 한 사람의 마음에 드는 데 달려 있지 않다. 입맛은 얼굴 수만큼 많고 얼굴만큼 가지가지다. 아끼는 사람 없는 흠은 없다. 어떤 이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낙담할 일이 아니니 그것을 높이 치는 다른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갈채에 우쭐할 일도 아니니 또 다른 이들이 그것을 나무랄 것이다. 참된 만족의 기준은 명망 있는 사내들, 그 분야에서 한 표를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인정이다. 사람은 한 표로만, 한 가지 풍속으로만, 한 시대로만 살지 않는다.
102 운이 주는 큰 덩어리를 삼킬 위장. 분별이라는 몸에서 큰 밥통은 결코 하찮은 부분이 아니다. 큰 그릇은 큰 부분들로 이루어진다. 더 큰 행운을 받을 만한 사람은 좋은 행운에 체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물리도록 배부른 것이 다른 이에게는 허기다. 본성이 좁아서, 그렇게 높은 직분에 길들지도 않고 그렇게 태어나지도 않아서, 아무리 귀한 음식도 탈이 나는 사람이 많다. 교제가 시큼하게 상하고, 덧붙인 영예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들은 높은 자리에서 큰 위험에 처한다. 운수가 그들 안에 담기지 않으니, 그들도 제 안에 담기지 못하고 들뜬다. 그러니 큰 사람는 더 큰 것을 담을 여유가 아직 남아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하고, 좁은 마음을 내비칠 만한 것은 무엇이든 각별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
103 저마다 제 나름의 존엄을. 모든 행동이 왕의 행동은 아니더라도, 제 영역에 맞게 왕에게 걸맞은 것이 되게 하라. 슬기로운 운수의 테두리 안에서 왕답게 처신하라. 행동은 높이, 생각은 멀리. 모든 일에서 실제로는 아니더라도 공로로는 왕의 모습을 보이라. 참된 군주다움은 품행의 올곧음에 있기 때문이다. 위대함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함을 시샘할 까닭이 없다. 특히 옥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참된 높음을 조금이라도 몸에 묻혀, 허영의 의례보다는 존엄의 자질을 나누어 받고, 부풀린 겉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알맹이의 돋보임을 갖추어야 한다.
104 직분의 맥을 짚어 두라. 직분은 가지가지다. 그것을 아는 일은 대가의 앎이고 주의가 든다. 어떤 직분은 용기를, 어떤 직분은 묘수를 요구한다. 곧음에 달린 직분은 다루기 쉽고, 꾸밈에 달린 직분은 다루기 어렵다. 앞의 것에는 좋은 본성 하나면 더 바랄 것이 없고, 뒤의 것에는 온 주의와 밤잠을 쏟아도 모자란다. 사람을 다스리는 일은 고되고, 미친 자나 어리석은 자를 다스리는 일은 더욱 그렇다. 지각 없는 사람을 상대하려면 지각이 곱절로 있어야 한다. 사람 하나를 통째로 요구하고, 시간이 정해져 있고, 하는 일이 늘 같은 직분은 견딜 수 없다. 다채로움과 무게를 아울러 지루함이 없는 직분이 낫다. 번갈아 바뀌면 입맛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가장 권위 있는 직분은 남에게 덜 기대거나 멀리서만 기대는 직분이고, 가장 나쁜 직분은 마침내 사람의 심사8에서, 더욱이 신의 심사에서 진땀을 흘리게 하는 직분이다.
105 남을 지치게 하지 말라. 한 가지 일만 붙드는 사람, 한 가지 말만 되뇌는 사람은 대개 따분하다. 짧음은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일도 더 잘 풀리게 한다. 짧아서 잃는 것을 공손해서 번다. 좋은 것은 짧으면 두 배로 좋고, 나쁜 것도 적으면 그리 나쁘지 않다. 잡동사니 더미보다 정수 몇 방울이 더 많은 일을 한다. 긴 사람이 똑똑한 일은 드물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니, 몸의 생김새보다는 말의 짜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장식보다는 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발로 밀어 치우는, 주인 잃은 세간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남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하며, 바쁘게 사는 높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래야 하니, 그런 사람 하나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이 나머지 온 세상을 거스르는 것보다 나쁘기 때문이다. 잘한 말은 빨리 끝난다.
106 운을 뽐내지 말라. 사람을 내세우는 것보다 지위를 내세우는 것이 더 거슬린다. 잘난 사람 행세는 밉살스럽다. 시샘받는 것만으로도 넉넉했을 텐데. 존중은 찾을수록 덜 얻어진다. 존중은 남의 존경에 달려 있으니, 스스로 차지할 수는 없고 남의 존중을 받을 만하게 되어 기다려야 한다. 큰 직분은 그 일에 걸맞은 권위를 요구하니, 권위 없이는 직분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제 의무의 알맹이를 다하는 데 마땅한 만큼의 권위를 지키라. 쥐어짜지 말고 거들어 주라. 직분에서 일 많은 척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리를 받을 만하지 않았고 지위가 덧대어진 것임을 내비친다. 무엇에 기대야 한다면 굴러온 것보다 제 자질의 탁월에 기대야 하니, 왕조차 바깥에서 얹힌 군주다움보다 제 몸에 지닌 군주다움으로 더 우러름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07 제 만족을 드러내지 말라. 불만 속에 살지도, 만족 속에 살지도 말라. 앞의 것은 소심함이고 뒤의 것은 어리석음이다. 자기만족은 대개 무지에서 나와 어리석은 행복으로 끝난다. 그 행복은 즐거움은 달래 주어도 신용은 지켜 주지 못한다. 남에게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완전함을 알아보지 못하니, 제게 있는 범속한 평범에 흡족해한다. 경계심은 슬기로울 뿐 아니라 언제나 쓸모가 있었다. 일이 잘되도록 대비하게도 하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미 두려워하던 사람에게는 운수가 안기는 무안이 새삼스럽지 않다. 호메로스도 때로는 졸고, 알렉산드로스도 제 자리와 제 착각에서 떨어진다. 일은 많은 형편에 달려 있어서 어떤 자리, 어떤 때에 이긴 것이 다른 때에는 실패하지만, 어리석음을 고칠 수 없는 까닭은 가장 헛된 자기만족이 꽃으로 피어나 그 씨앗이 늘 다시 움트는 데 있다.
108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지름길은 남의 곁에 설 줄 아는 것이다. 교제의 힘은 아주 크다. 습관도 옮고 입맛도 옮는다. 천성은 물론 재치까지도 모르는 사이에 옮아 붙는다. 그러니 성급한 사람은 자제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라. 다른 기질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억지 없이 절제를 얻는다. 자신을 알맞게 누그러뜨릴 줄 아는 것은 큰 솜씨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번갈아 드는 것이 우주를 아름답게 하고 떠받치니, 그것이 자연에서 조화를 낳는다면 도덕에서는 그보다 더 큰 조화를 낳을 것이다. 곁을 지키는 벗과 곁에서 부리는 사람을 고를 때 이 수완 있는 깨우침을 쓰라. 양 끝이 서로 오가면 아주 사려 깊은 중간이 맞추어진다.
109 남을 죄인으로 몰지 말라. 사나운 천성을 타고나 무엇이든 죄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격정 때문이 아니라 본성이 그렇다.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어떤 이는 했다고, 어떤 이는 할 것이라고. 잔인함보다 더 나쁜 비열한 마음을 드러낸다. 어찌나 부풀려 죄를 씌우는지 티끌을 들보로 만들어 남의 눈을 찌르고9, 가는 곳마다 노예선 감독10이 되어 엘리시온11이 될 수도 있었던 곳을 노예선으로 만든다. 격정까지 끼어들면 모든 것을 극단으로 만든다. 반대로 선량한 마음은 무엇에든 빠져나갈 길을 찾아 준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아니면 미처 몰랐다고.
110 지는 해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일에게 버림받기 전에 일을 버리는 것이 슬기로운 사람들의 격률이다. 끝나는 일조차 개선 행진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하니, 해도 때로는 한창 빛날 때 구름 뒤로 물러나 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졌는지 아직 안 졌는지 사람들을 궁금하게 남겨 둔다. 무안을 당해 터지지 않도록 저무는 때를 몸을 틀어 피하라. 사람들이 등을 돌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아픔을 느끼기에는 산 채로, 존중받기에는 죽은 채로 묻힐 것이다. 눈 밝은 사람은 경주마를 제때 은퇴시킨다. 달리다 쓰러져 경주 한복판에서 웃음거리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거울을 제때 꾀 있게 깨뜨려야 한다. 나중에 거울 앞에서 깨어나 참지 못하고 깨뜨리지 말고.
111 벗을 두라. 벗은 또 하나의 존재다. 벗은 모두 벗에게 좋은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이다. 벗 사이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사람의 값어치는 남들이 바라는 만큼이다. 남들이 바라게 하려면 마음을 얻어 그 입을 얻어야 한다. 좋은 섬김만 한 마법은 없고, 우정을 얻는 가장 좋은 길은 먼저 우정을 베푸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많고 가장 좋은 것은 남에게 달려 있다. 벗과 살든 적과 살든, 어느 한쪽과는 살아야 한다. 날마다 막역한 벗까지는 아니어도 애정을 품은 사람 하나씩은 얻으려고 애써야 하니, 그중 몇은 고르는 눈이 맞으면 나중에 속을 터놓는 벗으로 남는다.
112 으뜸가는 첫째 원인조차 가장 큰 일에서는 미리 마련하고 갖추어 두는 경건한 애정을 얻으라. 감정을 거쳐야 남의 헤아림 속에 들어선다. 어떤 이들은 제 값어치를 너무 믿어 부지런함을 얕보지만, 주의 깊은 사람은 공로만으로 가는 길이 총애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크게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 호의는 모든 것을 쉽게 하고 모자란 것을 채운다. 자질을 늘 깔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얹어 준다. 용기, 올곧음, 지혜, 사려까지도. 추한 것은 결코 보지 않는다.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애정은 대개 천성, 민족, 혈연, 고향, 직분 같은 바탕이 서로 맞는 데서 생긴다. 자질, 의리, 명망, 공로 같은 격이 맞는 데서 생기는 애정은 더 높다. 어려운 것은 얻는 일뿐이다. 지키기는 쉽다. 애써 얻을 수 있고, 얻으면 쓸 줄도 알아야 한다.
113 운이 좋을 때 나쁠 때를 대비하라. 여름에 겨울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고, 그때가 더 수월하다. 그때는 총애가 값싸고 벗도 넘친다. 궂은 때를 위해 아껴 두면 좋다. 역경에는 모든 것이 비싸고 모든 것이 모자란다. 벗과 은혜 입은 사람을 예비로 남겨 두라. 지금은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언젠가는 귀히 여길 날이 온다. 천한 사람에게는 벗이 없다. 잘나갈 때는 제가 벗을 모른 체하고, 어려울 때는 벗이 그를 모른 체한다.
114 결코 다투어 겨루지 말라. 맞서는 자가 있는 노림은 모두 신용을 해친다. 경쟁은 상대의 빛을 가리려고 곧 금박부터 벗기려 든다. 깨끗하게 싸우는 사람은 드물다. 예절이 잊어 준 흠을 경쟁심이 들추어낸다. 많은 이가 맞수가 없는 동안에는 신용을 누리며 살았다. 맞섬의 열기는 꺼져 가는 추문에 불을 지피거나 죽은 추문을 되살리고, 지난날의 악취와 조상 대의 악취까지 파낸다. 경쟁은 흠을 늘어놓는 데서 시작하고, 할 수 있으나 해서는 안 될 온갖 것의 힘을 빌린다. 모욕은 때로, 아니 대개는 쓸모 있는 무기가 못 되지만, 경쟁은 그것으로 제 복수심을 천하게 채우고, 그 복수를 어찌나 세차게 휘두르는지 지난 무안들에 앉은 망각의 먼지까지 털어 낸다. 호의는 언제나 평화로웠고, 명망은 언제나 너그러웠다.
115 서로 기대어 사는 곳에서는 이로우니, 가까운 사람의 나쁜 성품에도 못난 얼굴에 그러듯 익숙해지라. 함께 살 수도 없고 없이 살 수도 없는 사나운 기질이 있다. 그러니 추한 얼굴에 익숙해지듯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이 솜씨다. 그래야 험한 일이 닥쳤을 때 새삼 놀라지 않는다. 처음에는 섬뜩하지만 차츰 그 첫 끔찍함이 사라지고, 되새겨 보면 언짢은 일을 미리 막거나 견딜 수 있다.
116 늘 의리 있는 사람과 사귀라. 그런 사람에게는 신세를 질 수도 있고 신세를 지울 수도 있다. 그들의 의리 자체가 그들과 사귀는 데 가장 큰 보증이다. 다툴 때조차 그렇다. 그들은 제 됨됨이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을 이기는 것보다 좋은 사람과 싸우는 것이 낫다. 비열함은 올곧을 의무를 느끼지 않으니 비열함과는 좋은 교제가 없고, 그래서 비열한 자들 사이에는 참된 우정이 없으며, 정성도 명예를 믿고 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럴듯해 보일 뿐 순금이 아니다. 명예 없는 사람은 늘 멀리하라. 명예를 높이 치지 않는 사람은 덕도 높이 치지 않는다. 명예는 올곧음의 옥좌다.
117 결코 자기 이야기를 하지 말라. 자기를 추어올리면 허영이고, 깎아내리면 소심함이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슬기의 허물이요, 듣는 사람에게는 벌이다. 가까운 사이에서도 피해야 할 일이라면 여럿 앞에서 말하는 높은 자리에서는 더더욱 피해야 하니, 그런 자리에서는 어리석어 보이기만 해도 이미 어리석음으로 통한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도 슬기에 똑같이 해롭다. 아첨이나 비난, 두 암초 가운데 하나에 부딪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118 갈채받기에 넉넉한, 예절 바르다는 명성을 얻으라. 예절은 교양의 으뜸가는 부분이요 일종의 마법이어서 모든 사람의 호의를 사고, 무례는 모든 사람의 업신여김과 짜증을 산다. 무례가 오만에서 나오면 밉고, 투박함에서 나오면 업신여김을 받는다. 예절은 늘 모자라기보다 넘쳐야 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불공정으로 떨어진다. 적 사이에서도 예절은 갚아야 할 빚으로 여겨지니, 그로써 용기가 드러난다. 값은 적게 들고 값어치는 크다. 남을 높이는 사람은 모두 높임을 받는다. 아량과 높임에는 남는다는 이점이 있다. 아량은 베푸는 사람에게, 높임은 높여 주는 사람에게 남는다.
119 미움을 사지 말라. 반감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 바라지 않아도 반감은 저절로 앞질러 온다. 어떻게, 왜 그런지도 모르고 공연히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 적의는 은혜보다 먼저 온다. 해를 끼치는 데 성내는 힘은, 이익을 얻는 데 탐내는 힘보다 더 세고 더 빠르다. 어떤 이들은 남을 짜증 나게 하는 기질 탓에, 또는 늘 짜증 난 기질 탓에 일부러 모두와 사이가 틀어진다. 증오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나쁘게 헤아린 생각처럼 지우기 어렵다. 판단력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고, 험담꾼은 미워하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은 역겨워하고,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꺼리고, 유별난 사람은 내버려 둔다. 그러니 존중받으려면 먼저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라. 집을 세우려는 사람은 남을 마음에 둔다12.
120 세상 쓰임에 맞게 살라. 앎조차 유행을 따라야 하고, 앎이 쓰이지 않는 곳에서는 모르는 척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하는 법도 즐기는 법도 때에 따라 바뀐다. 낡은 틀로 생각을 펼쳐서는 안 되고, 새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분야마다 우두머리들의 안목이 표를 던진다. 그때그때는 그 안목을 따라야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탁월에 이르러야 한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난 것이 더 나아 보여도 지금에 맞추어야 한다. 영혼의 차림새에서도 몸의 차림새에서도. 오직 선함에서만은 이 삶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다. 덕은 언제나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말을 하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은 이제 알아보는 이도 없고 다른 시대의 일처럼 보이며, 선한 사내들은 좋았던 옛 시절에 지어진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사랑받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더러 있어도 유행하지 않고 본받는 이도 없다. 덕은 낯선 것으로, 악의는 흔한 것으로 여기다니, 우리 시대의 불행이 얼마나 큰가! 사려 깊은 사람은 바라는 대로 살 수 없으면 할 수 있는 대로 살아야 한다. 운수가 거절한 것보다 허락한 것을 더 낫게 여기라.
121 일 아닌 것을 일로 만들지 말라. 어떤 이들이 모든 것을 잡담거리로 만들듯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큰일로 만들어서, 늘 중대한 듯 말하고 무엇이든 진지하게 받아들여 다툼거리나 비밀로 만든다. 언짢은 일 가운데 일부러 붙들어야 할 것은 거의 없다. 일부러 붙들었다가는 부질없이 휘말린다. 등 뒤로 넘겨야 할 것을 가슴에 품는 것은 앞뒤를 뒤바꾸는 일이다. 무엇인가였던 많은 일이 내버려 두자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고, 아무것도 아니던 일이 마음에 두자 큰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끝내기 쉽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다. 약이 병을 만드는 일이 많다. 그냥 두는 것도 삶의 규칙으로 나쁘지 않다.
122 말과 행동의 위엄. 어디서나 넉넉히 자리를 차지하고, 미리 존경을 얻는다. 대화에도, 연설에도, 걸음걸이에도, 모든 것에 스며든다. 눈길에도, 바람에도.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큰 승리다. 위엄은 어리석은 대담함에서도, 짜증스러운 너스레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뛰어난 천성에서 나고 공로가 거드는 품위 있는 권위에서 나온다.
123 티 내지 않는 사람. 자질이 많을수록 티는 덜 낸다. 티 내기는 흔히 모든 자질에 범속한 흠이 된다. 남에게 짜증스러운 만큼 그것을 지탱하는 사람에게도 괴롭다. 마음 쓰는 일에 순교자로 살고, 빈틈없으려다 제 몸을 들볶기 때문이다. 탁월한 점조차 티를 내면 값어치를 잃으니, 자유로운 본성보다 꾸며 낸 억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고, 자연스러운 것은 언제나 꾸민 것보다 반가웠다. 티 내는 사람은 제가 티 내는 것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일을 잘할수록 공들인 흔적은 지워야 한다. 완전함이 본성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게 하려면. 티 내기를 피하려다 티 내지 않는 티를 내어 도리어 티 내기에 빠져서도 안 된다. 사려 깊은 사람은 제 공로를 아는 내색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무심함이 오히려 남의 주의를 깨운다. 모든 완전함을 제 안에 품고도 제 생각 속에는 하나도 품지 않는 사람은 두 번 탁월하다. 그는 거꾸로 난 길로 갈채의 끝에 이른다.
124 사람들이 바라는 사람이 되라. 사람들의 호의를 그만큼 얻은 이는 드물었고,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들의 호의라면 행복이다. 물러나는 사람에게 미지근한 것은 흔한 일이다. 이 애정의 상을 받을 길이 있다. 직분과 자질이 탁월하면 확실하고, 상냥하면 효험이 크다. 탁월하면 사람들이 기대게 되어, 그가 자리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자리가 그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 드러나니, 어떤 이는 자리를 빛내고, 어떤 이는 자리가 빛내 준다. 뒤를 이은 사람이 못나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바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미움을 받는 것일 뿐이다.
125 녹색 책13이 되지 말라. 남의 추문에 마음을 쓰는 것은 제 명성이 닳아 없어졌다는 표시다. 어떤 이들은 남의 얼룩으로 제 얼룩을 씻지는 못해도 가리려 들거나,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어리석은 자들의 위안이다. 이런 자들은 입에서 악취가 난다. 도시의 오물이 흘러드는 하수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서는 많이 파헤칠수록 더 진흙투성이가 된다. 타고난 흠 하나쯤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드물다. 곧은 핏줄로든 곁가지로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허물은 알려지지 않는다. 주의 깊은 사람은 추문의 장부가 되는 일을 피해야 하니, 그것은 미움받는 치욕의 기둥이 되는 일이요, 살아 있어도 넋이 빠져 버린 사람이 되는 일이다.
126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이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고 나서 덮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다. 감정도 봉해 두어야 하는데, 흠은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지만 차이가 있다. 영민한 사람은 저지른 잘못을 감추고, 어리석은 자는 저지를 잘못까지 미리 떠벌린다. 신용은 한 일보다 조심에 달려 있다. 정결하지 못하면 조심이라도 하라14. 큰 사람의 소홀함은 해와 달이 이지러질 때처럼 더 많은 눈이 지켜본다. 우정에도 예외를 두어 제 흠만은 벗에게 털어놓지 말라.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나 여기서는 잊을 줄 알라는 삶의 또 다른 규칙에 기댈 수 있다.
127 모든 일에 활달함(despejo). 자질의 생명이요, 말의 숨결이요, 행동의 영혼이요, 돋보임 중의 돋보임이다. 다른 완전함은 본성의 장식이지만, 활달함은 완전함 자체의 장식이다. 생각을 펼칠 때조차 기림받는다. 그 대부분은 타고난 특권이고 공부에 빚진 것은 적어 가르침보다도 위에 있으며, 손쉬움을 넘어 늠름함으로 나아가고, 거침없음을 바탕에 깔고 완전함을 보탠다. 활달함이 없으면 모든 아름다움은 죽은 것이고, 모든 멋은 멋없음이다. 용기에도, 사려에도, 분별에도, 존엄 자체에도 두루 미친다. 일을 처리할 때는 수완 있는 지름길이요, 어떤 곤경에서든 점잖게 빠져나오는 길이다.
128 높은 기개. 영웅이 갖출 으뜸가는 조건 가운데 하나다. 온갖 위대함에 불을 붙이기 때문이다. 안목을 돋보이게 하고, 마음을 키우고, 생각을 드높이고, 성품을 고상하게 하고, 존엄을 갖추게 한다. 어디에 있든 우뚝 솟고, 때로는 운수의 시샘에 눌려도 터져 나와 제 모습을 드러낸다. 할 수 있는 일에서 억눌리면 의지에서라도 넓어진다. 큰 도량과 너그러움과 모든 영웅다운 자질이 높은 기개를 제 샘으로 안다.
129 결코 불평하지 말라. 불평은 늘 신용을 떨어뜨린다. 동정을 불러 위안이 되기보다 격정에게 대담해질 본보기가 된다. 듣는 사람에게 같은 짓을 할 길을 열어 주고, 첫 번째 모욕을 알게 된 것이 두 번째 모욕의 핑계가 된다. 어떤 이들은 지난 모욕을 불평하여 다가올 모욕에 빌미를 주고, 구제나 위안을 바라다가 남의 고소해하는 마음을, 나아가 업신여김까지 부른다. 어떤 이에게 입은 은혜를 기려 다른 이들이 갚아야 할 빚으로 삼게 하는 것이 더 나은 수완이다. 자리에 없는 사람의 총애를 되풀이해 말하는 것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총애를 청하는 일이요, 어떤 이들에게서 얻은 신용을 다른 이들에게 파는 일이다. 주의 깊은 사내는 무안도 흠도 결코 떠벌리지 말고 받은 존중을 알려야 한다. 그것이 벗은 붙들어 두고 적은 붙들어 맨다.
130 행하고, 행한 것으로 보이게 하라. 사물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통한다. 값어치가 있고 그것을 보일 줄 알면 두 번 값어치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이치조차 이치다운 얼굴을 하지 않으면 우러름을 받지 못한다. 속는 사람이 눈 밝은 사람보다 훨씬 많다. 속임이 이기고, 사물은 겉으로 판단된다. 보이는 것과 아주 다른 것들이 있다. 좋은 겉모습은 속에 있는 완전함을 가장 잘 추천해 준다.
131 성품의 아량. 영혼에도 늠름함이 있다. 정신의 씩씩함이니, 그 아량 있는 행동으로 마음이 아주 의젓해진다. 누구에게나 깃들지는 않는다. 큰 도량을 바탕에 깔기 때문이다. 그 첫째 일은 적을 좋게 말하고, 그보다 더 좋게 대하는 것이다. 가장 크게 빛나는 것은 복수할 기회가 왔을 때이니, 그 기회를 버리지 않고 더 낫게 써서, 복수가 가장 승리에 가까울 때 뜻밖의 너그러움으로 바꾼다. 이것은 수완이기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의 꽃이기도 하다. 승리를 결코 티 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티 내지 않기 때문이다. 공로로 승리를 얻으면 선량한 마음이 그것을 감춘다.
132 다시 숙고하라. 다시 심리해 달라고 상소하는 것이 안전하다. 확신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허락하든 더 낫게 고치든 시간을 벌라. 소견을 굳히고 다질 새 이유가 나타난다. 주는 일이라면, 선물은 서둘러 주는 즐거움보다 슬기를 믿고 줄 때 더 높이 쳐진다. 바라던 것은 언제나 더 높이 쳐졌다. 거절해야 한다면 거절하는 법을 궁리할 여유가 생기고, '아니'를 무르익혀 더 맛이 들게 할 수 있으며, 대개는 욕망의 첫 열기가 지나고 나면 식은 피로는 거절의 무안을 느끼지 않는다. 서둘러 청하는 사람에게는 늦게 허락하라. 서두르는 것은 상대의 주의를 따돌리려는 수다.
133 홀로 슬기롭기보다 모두와 함께 미치는 편이 낫다고 정치가들은 말한다. 모두가 미쳤다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고, 슬기가 홀로라면 광기로 여겨질 것이다. 흐름을 따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때로는 모르는 것, 모르는 척하는 것이 가장 큰 앎이다. 남과 함께 살아야 하고, 무지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홀로 살려면 신을 많이 닮든지 짐승을 온전히 닮든지 해야 한다15. 그러나 나는 이 격언을 이렇게 눅이겠다. 홀로 미치기보다 여럿과 함께 슬기로운 편이 낫다. 어떤 이들은 망상에서 유별나고 싶어 한다.
134 삶에 필요한 것을 곱절로 갖추라. 삶을 곱절로 사는 일이다. 기댈 데가 하나뿐이어서는 안 되고, 아무리 빼어나도 한 가지에만 매여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곱절로 해야 하며, 이익과 총애와 즐거움의 근원은 더욱 그렇다. 달은 변하지 않는 것의 경계이고, 그 변덕은 두루 미친다. 깨지기 쉬운 사람의 의지에 달린 것은 더욱 그렇다. 무른 것에 맞서 예비를 두고, 좋은 것과 편한 것의 여건을 곱절로 하는 것을 삶의 기술의 큰 규칙으로 삼아야 하니, 자연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다치기 쉬운 지체를 둘씩 주었듯, 기술은 기댈 것들을 둘씩 마련해야 한다.
135 어리석음과 짜증을 짊어지는 반대의 정신을 품지 말라. 슬기가 그에게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다. 무엇에나 어려움을 들이미는 것이 재치 있을 수는 있지만, 고집스러움은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자들은 달콤한 대화를 잔싸움으로 만든다. 그래서 사귀지 않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적이 된다. 가장 맛있는 한 입에 걸린 가시가 가장 아프게 느껴지는데, 즐거운 시간에 끼어드는 반대가 바로 그 가시이니, 그들은 짐승 같은 데다 사나움까지 보태는 해로운 어리석은 자들이다.
136 일의 요점을 바로 잡고, 일의 맥을 곧장 짚으라. 많은 이가 쓸데없는 생각의 가지로, 지루한 말잔치의 잎사귀로 빠져, 일의 알맹이에는 닿지 못한다. 한 점을 두고 백 바퀴를 돌며 저도 지치고 남도 지치게 하지만, 정작 중요한 한가운데에는 끝내 이르지 못한다. 갈피를 잡을 줄 모르는 흐릿한 지성에서 나오는 버릇이다. 버려야 할 것에 시간과 참을성을 다 써 버리고, 정작 버려 둔 것에 쓸 참을성은 남지 않는다.
137 현자는 자기 자신으로 넉넉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가 제 모든 것이었고, 자기를 데리고 다니며 모든 것을 지니고 다녔다16. 두루 갖춘 벗 하나가 로마와 나머지 온 세상을 대신할 만하다면, 스스로 자기의 그런 벗이 되라. 그러면 홀로 살 수 있다. 제 헤아림보다 큰 헤아림도, 제 안목보다 큰 안목도 없다면 누가 아쉽겠는가? 오로지 자기에게만 기댈 것이다. 지고한 존재를 닮는 것이 지고한 행복이다. 그렇게 홀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짐승은 조금도 닮지 않고, 현자는 많이 닮고, 신은 온전히 닮을 것이다.
138 내버려 두는 기술. 공공의 바다든 집안의 바다든, 거칠게 일렁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람 사이의 교제에는 회오리가 일고 의지의 폭풍이 분다. 그럴 때는 잠시 비켜서는 안전한 항구로 물러나는 것이 슬기다. 약을 쓰면 병이 더 나빠지는 일이 많다. 저기서는 자연이, 여기서는 도덕이 제 일을 하게 두라. 지혜로운 의사는 처방할 줄 아는 만큼 처방하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약을 쓰지 않는 데 기술이 더 있다. 범속한 회오리를 가라앉히려면 손을 떼고 저절로 가라앉게 두라. 지금 시간에 지는 것이 나중에 이기는 길이다. 샘물은 조금만 휘저어도 흐려지고, 맑히려 애쓴다고 다시 맑아지지 않으며, 그냥 두어야 맑아진다. 어지러운 일에는 흘러가게 두는 것보다 나은 약이 없다. 그러면 저절로 가라앉는다.
139 무엇 하나 잘되지 않고 놀이를 바꾸어도 나쁜 운수는 바뀌지 않는 궂은날이 있으니, 그런 날을 알아보라. 두 판쯤 해 보면 알아채고 물러나야 한다. 오늘이 제 날인지 아닌지 살피면서. 지성에도 때가 있어서, 누구도 언제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이 잘 펼쳐지는 것도 편지 한 장 잘 쓰는 것처럼 행운이다. 모든 완전함은 제때에 달려 있고 아름다움도 늘 한창은 아니며, 사려도 제 자신을 배반하여 때로는 모자라고 때로는 넘치니, 무엇이든 잘되려면 제 날을 만나야 한다. 어떤 날에는 모든 일이 틀어지듯, 어떤 날에는 모든 일이 덜 애써도 잘 풀린다. 모든 것이 다 차려져 있다. 재치는 한창이고, 천성은 알맞게 누그러져 있고, 모든 것이 별의 도움을 받는다. 그럴 때는 그날을 잘 써서 티끌만큼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판단력 있는 사내는 한 번 본 우연만으로 나쁘다고, 또는 거꾸로 좋다고 못 박아서는 안 된다. 앞의 것은 때를 잘못 만난 것이고 뒤의 것은 행운이었을 수 있다.
140 무엇에서든 좋은 점을 곧바로 찾아내라. 좋은 안목의 행운이다. 벌은 곧장 단것을 찾아가 꿀을 만들고, 독사는 쓴것을 찾아가 독을 만든다. 안목도 그래서, 어떤 안목은 가장 좋은 것으로, 어떤 안목은 가장 나쁜 것으로 간다.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은 없고, 책이라면 생각해서 쓴 것이니 더욱 그렇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천성이 어찌나 불운한지, 완전함 천 가지 가운데서 하나뿐인 흠을 찾아내 그것을 헐뜯고 떠벌린다. 의지와 지성의 오물을 주워 모으는 이 자들은 흠과 결점을 잔뜩 적어 짊어지고 다니니, 그것은 묘수를 쓰는 일이라기보다 잘못 고른 눈에 내리는 벌이다. 그들은 고달프게 산다. 늘 쓴것을 먹고 불완전함을 꼴로 삼기 때문이다. 흠 천 가지 가운데서 우연히 떨어진 완전함 하나를 곧바로 찾아내는 다른 이들의 안목이 더 행복하다.
141 제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 남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면 제 마음에 드는 것은 별 쓸모가 없고, 대개 혼자만의 만족은 모두의 업신여김으로 벌을 받는다. 제게 흡족해하는 사람도 실은 모두에게 매인 몸이다. 말하면서 제 말을 듣고 싶어 하면 잘될 리 없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광기라면, 남 앞에서 제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곱절의 광기다. 높은 분들의 흠은 버릇말을 달고 말하는 것이다. "내 말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하는 말과, 듣는 사람을 두들겨 대는 그 "응?" 하는 소리. 말 한마디마다 동의나 아첨이 나오는지 귀를 세우니, 슬기로운 사람의 참을성을 바닥까지 짜낸다.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도 메아리를 달고 말하는데, 그들의 대화는 뽐냄이라는 굽 높은 신17을 신고 걸으니 말끝마다 어리석은 자의 "옳은 말씀!"이라는 짜증스러운 부축을 청한다.
142 상대가 먼저 나서서 좋은 편을 골랐다고 해서 오기로 나쁜 편을 들지 말라. 이미 지고 시작하는 셈이니, 결국 무안을 당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다. 나쁜 것으로는 결코 제대로 앙갚음하지 못한다.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한 것은 상대의 꾀였고, 뒤늦게 나쁜 것으로 맞선 것은 제 어리석음이었다. 행동으로 고집부리는 자는 말로 고집부리는 자보다 더 깊이 빠져든다. 말보다 행동에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반대하려고 진실을 돌아보지 않고, 다투려고 이로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고집쟁이들의 범속함이다. 주의 깊은 사람은 먼저 나서든지 뒤에라도 더 나은 쪽으로 옮기든지 하여 늘 격정이 아니라 이성의 편에 서니, 상대가 어리석은 자라면 바로 그 까닭에 방향을 바꾸어 반대편으로 넘어갈 것이고, 그러면 제 편을 나쁘게 만든다. 상대를 좋은 편에서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그 편을 끌어안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버리게 하고, 그의 오기가 그를 벼랑으로 떨어뜨린다.
143 두 극단 모두 신용을 잃게 하니, 범속함을 피하려다 역설에 빠지지 말라. 무게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이든 어리석음의 한 가지다. 역설은 처음에는 갈채받는 일종의 속임이어서, 새롭고 톡 쏘는 맛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토록 나쁘게 끝나는 것을 보고 깨어나면 크게 무안을 당한다. 일종의 눈속임이고, 나랏일에서는 나라를 망친다. 덕의 길로 영웅다운 경지에 이르지 못하거나 감히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역설로 빠져, 어리석은 자들을 놀라게 하고 슬기로운 사람들의 짐작이 옳았음을 증명해 준다. 역설은 소견이 절제를 잃었다는 증거이고, 그래서 분별과 정반대다. 때로 거짓에 기대지 않더라도 적어도 불확실한 것에 기대니, 중요한 일을 크게 위태롭게 한다.
144 남의 뜻을 따라 들어가서 제 뜻을 안고 나오라. 이루어 내는 계략이다. 하늘의 일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스승들은 이 거룩한 꾀를 권한다18. 중요한 시치미이니, 남이 품은 이로움을 미끼로 삼아 그 의지를 낚으면 그는 제 뜻이 앞서간다고 여기지만 실은 남의 노림에 길을 터 줄 뿐이다. 생각 없이 들어가서는 안 되며, 바닥에 위험이 깔린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첫마디가 으레 '아니'인 사람에게도 겨냥을 감추어야 한다. 그래야 허락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상대가 알아채지 못한다. 반감이 느껴질 때는 더욱 그렇다. 이 충고는 두 번째 의도에 속하고, 두 번째 의도는 모두 묘수 중의 묘수다.
145 모든 것이 거기 와서 부딪히니, 아픈 손가락을 드러내지 말라. 아프다고 하소연하지도 말라. 악의는 늘 약한 데가 아파하는 곳을 친다. 발끈해 봐야 남의 놀이에 재미만 돋울 뿐이다. 나쁜 속셈은 사람을 펄쩍 뛰게 할 구실을 찾아다닌다. 아픈 데를 찾으려고 슬쩍 던지는 말로 찔러 보고, 생살에 닿을 때까지 천 가지로 떠본다. 주의 깊은 사람은 결코 알아챈 내색을 하지 말고, 제 몸의 것이든 물려받은 것이든 제 아픈 데를 드러내지 말아야 하니, 운조차 때로는 가장 아플 곳을 다치게 하며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운은 늘 생살을 아프게 한다. 그러니 아프게 하는 것도, 살게 하는 것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앞의 것은 끝나도록, 뒤의 것은 오래가도록.
146 속을 들여다보라. 사물은 대개 보이던 것과 아주 다르다. 껍질을 넘어서지 못한 무지는 속까지 꿰뚫고 들어가면 깨어남으로 바뀐다. 거짓은 늘 모든 일에서 맨 먼저 와서, 끝없는 범속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을 끌고 다닌다. 진실은 늘 맨 나중에, 그것도 늦게, 시간과 함께 절뚝거리며 오니, 슬기로운 사람들은 모두의 어머니가 지혜롭게 둘로 만들어 준 그 능력의 나머지 절반을 진실을 위해 남겨 둔다19. 속임은 아주 겉에 있어서, 겉에만 머무는 사람들이 곧장 부딪힌다. 맞는 것은 제 속 깊이 물러나 산다. 그것을 아는 현자와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더 높이 쳐지기 위해서다.
147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 때로 일깨워 줄 말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구제할 길 없는 어리석은 자다.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사람도 벗의 충고에는 자리를 내주어야 하고, 군주의 자리도 남의 말을 듣는 순함을 물리쳐서는 안 된다. 다가갈 수 없어서 구제할 길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감히 다가가 붙들지 못하니 벼랑으로 떨어진다. 가장 올곧은 사람도 우정에게는 문 하나를 열어 두어야 하니, 그것이 구원의 문이 된다. 벗 하나에게는 거리낌 없이 충고하고 나무랄 수도 있는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 벗을 이런 권위에 앉히는 것은 그에 대한 흡족함, 그리고 그의 신의와 분별을 높이 헤아리는 마음이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존경을, 아니 신용조차 쉽게 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조심스레 닫아 둔 골방에는, 깨어나게 해 주는 바로잡음을 고맙게 여기고 높이 칠 만한 벗, 속을 터놓는 그 벗이라는 정직한 거울 하나를 두라.
148 사람다운 사람임을 내보이는 대화의 기술을 갖추라.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이보다 주의가 더 드는 일은 없다. 삶에서 가장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한다. 편지는 미리 생각해서 글로 하는 대화인데도 쓰는 데 마음을 써야 한다면, 사려를 그 자리에서 시험받는 평소의 대화에서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는가! 노련한 사람들은 혀에서 마음의 맥을 짚는다. 그래서 현자20는 말했다. "말해 보라, 그대를 알고 싶으니." 어떤 이들은 대화에서 기술 없이 가는 것을 기술로 여긴다. 대화는 옷처럼 헐렁해야 한다는 것인데, 아주 가까운 벗 사이에서나 그렇다. 예를 갖추어야 하는 자리라면 대화는 더 알차야 하고, 그 사람의 알맹이가 크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잘 맞히려면 함께 말을 나누는 사람들의 천성과 재치에 맞추어야 한다. 말마다 트집 잡는 검열관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문법학자 취급을 받는다. 남의 이치를 따지는 검사 노릇은 더욱 안 된다. 모두가 그를 피하고 말 섞기를 꺼릴 것이다. 말할 때는 사려가 웅변보다 중요하다.
149 화를 남에게 돌릴 줄 알라. 적의를 막을 방패를 두는 것은 다스리는 사람들의 큰 수다. 실수에 대한 비난과 뒷공론이라는 뭇사람의 벌을 대신 뒤집어쓸 사람을 두는 것은, 악의가 생각하듯 무능해서가 아니라 한 수 위의 솜씨에서 나온다. 모든 일이 잘될 수는 없고, 모든 사람을 흡족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는 머리21, 불행이 날아와 꽂히는 과녁 하나를 두라. 그 값은 그 사람의 야심이 치른다.
150 제 것을 팔 줄 알라. 그 자체의 좋음만으로는 모자란다. 모두가 알맹이를 씹어 보거나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사람이 몰리는 곳으로 달려간다. 남들이 가는 것을 보고 간다. 꾸밈의 큰 몫은 신용을 얹어 줄 줄 아는 데 있다. 때로는 기리라. 칭찬은 욕망을 부추긴다. 때로는 좋은 이름을 붙이라. 그것은 높여 주는 큰 수단이다. 다만 늘 티 내기를 감추어야 한다. 아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나 자극을 받으니, 모두가 저도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없다는 것이 욕망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일을 쉽다거나 흔하다고 내세워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쉽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범속하게 만드는 일이다. 누구나 드문 것을 문다. 안목에도 재치에도 더 입맛 당기기 때문이다.
주
1. 붙잡히지 않으려고 온갖 모습으로 몸을 바꾸는 그리스 신화의 바다 노인.
2.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라」「절도가 으뜸이다」처럼 고대 그리스 일곱 현인에게 돌려지는 격언을 가리킨다. 원문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3. 라틴어 격언 「지극한 법은 지극한 불의(summum ius summa iniuria)」(키케로 『의무론』 1.33). 원문은 「곧음(derecho)」과 「굽음(tuerto)」을 소리로 맞세운다.
4. 온몸에 눈이 백 개 달려 잠들 때도 몇 개는 뜨고 지켰다는 그리스 신화의 거인.
5. 호라티우스 『시학』 359행 「훌륭한 호메로스도 때로 존다」에서 온 말. 대가도 가끔 실수한다는 속담으로 쓰인다.
6. 17세기 스페인 카드놀이의 으뜸 패(malilla). 어느 패 대신으로도 쓰인다. 어디에나 끼어 쓰이다 값이 떨어지는 사람을 빗댔다.
7.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기원전 4년경~기원후 65년). 히스파니아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8. 레시덴시아(residencia). 스페인 제국에서 관리가 임기를 마치면 그 땅에 머문 채 받던 공식 감사와 심판.
9.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 3절)에서 온 그림.
10. 노예선에서 채찍을 들고 노 젓는 죄수들을 부리던 감독(cómitre).
11.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사랑을 받은 이들이 죽은 뒤 사는 복된 들판.
12. 원문은 「집(casa)을 세우려는 사람은 남을 마음에 둔다(caso)」로, 두 낱말의 소리를 맞세운다.
13. 「아라곤의 녹색 책(Libro verde de Aragón)」. 16세기에 아라곤 귀족 가문들의 유대인 혈통을 적어 돌린 필사본으로, 남의 집안 흠을 들추는 장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14. 라틴어 격언 「정결하지 못하면 조심이라도(si non caste, tamen caute)」에서 온 말. 원문은 「정결한(casto)」과 「조심스러운(cauto)」의 소리를 맞세운다.
15.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권 2장. 나라 없이 혼자 살 수 있는 자는 짐승이거나 신이라고 했다.
16. 그리스 일곱 현인의 하나인 프리에네의 비아스. 고향이 적에게 넘어가 모두 짐을 싸서 달아날 때 빈손으로 떠나며 「내 것은 모두 내가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고 전한다(키케로 『스토아 역설』 1.8).
17. 차핀(chapín). 17세기 스페인 여인들이 키를 높이려고 신던, 코르크 바닥을 두껍게 댄 신.
18.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에게 돌려지는 영혼 인도의 격언 「남의 문으로 들어가 제 문으로 나오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19. 자연이 둘씩 준 귀를 가리킨다. 알렉산드로스는 고발을 들을 때 한쪽 귀를 손으로 막아 고발당한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고 한다(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전』 42).
20. 출처 미상. 흔히 소크라테스의 말로 전한다.
21. 원문은 「testa de yerros」. 남에게 이름을 빌려주고 책임을 대신 지는 사람을 뜻하는 「testaferro(쇠머리)」를 비틀어, 「쇠(hierros)」 자리에 소리가 같은 「잘못(yerros)」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