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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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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웨스트에그와 뉴욕 사이 중간쯤에서 자동차 도로는 허둥지둥 철길 곁으로 바짝 붙어 사분의 일 마일가량 나란히 달렸는데, 어느 황량한 땅 한 자락을 꺼려 슬금슬금 비켜 가려는 듯했다. 그곳은 재의 계곡(valley of ashes)이었다. 재가 밀처럼 자라 이랑이 되고 언덕이 되고 괴상한 정원이 되는 기이한 농장이었고, 재가 집과 굴뚝과 피어오르는 연기의 모양을 하다가 마침내는 초월적인 안간힘을 다해 잿빛 인간의 모양까지 갖추는 곳이었다. 잿빛 인간들은 가루가 풀풀 날리는 공기 속을 흐릿하게, 벌써부터 바스러져 가며 움직였다. 이따금 잿빛 화차들이 줄지어 보이지 않는 선로를 기어오다가 섬뜩하게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그러면 곧바로 잿빛 인간들이 납빛 삽을 들고 우르르 몰려들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먼지구름을 일으켰고, 그 구름에 가려 그들이 하는 알 수 없는 일은 보는 이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잿빛 땅 위로, 그리고 그 위를 끝없이 떠돌며 경련하듯 일어나는 음울한 먼지 위로, 잠시 지나면 T. J. 에클버그 박사의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T. J. 에클버그 박사의 눈은 파랗고 거대했다. 망막 하나의 높이가 1야드였다. 그 눈은 얼굴에서가 아니라, 있지도 않은 코 위에 걸친 커다란 노란 안경 너머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보아하니 어느 익살맞은 괴짜 안과 의사가 퀸즈구에서 병원 손님을 불려 보려고 거기 세워 두고는, 저 자신은 눈을 감고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거나 그걸 잊어버린 채 이사를 가 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눈은, 페인트칠 한 번 새로 받지 못하고 볕과 비를 맞으며 보낸 숱한 날들에 조금 흐려지기는 했어도, 그 엄숙한 쓰레기 하치장을 굽어보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의 계곡은 한쪽 끝이 조그맣고 더러운 강으로 막혀 있었는데, 거룻배가 지나가도록 도개교를 들어 올리면 발이 묶인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 음산한 풍경을 길게는 30분 동안이나 실컷 바라볼 수 있었다. 기차는 거기서 늘 적어도 1분은 섰고, 내가 톰 뷰캐넌의 여자를 처음 만난 것도 그래서였다.

톰에게 그런 여자가 있다는 건, 톰을 아는 이들 사이에서라면 어디서나 누군가 기어이 짚고 넘어가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톰이 그 여자를 데리고 손님이 북적이는 카페에 나타나서는, 여자를 테이블에 혼자 앉혀 두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만 보이면 붙들고 잡담을 늘어놓는 게 못마땅했다. 나는 그 여자를 한번 보고 싶은 호기심은 있었어도 인사를 나눌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고 말았다. 어느 오후 톰과 기차를 타고 뉴욕에 가던 길이었는데, 기차가 잿더미 곁에 멈추자 톰이 벌떡 일어서더니 내 팔꿈치를 붙잡고 말 그대로 나를 객차 밖으로 끌어냈다.

"내리자." 톰이 우겼다. "내 여자 좀 소개해 줄게."

톰은 점심 자리에서 술을 꽤 퍼마신 게 아닌가 싶다. 나를 기어이 끌고 가겠다는 고집이 폭력에 가까울 지경이었다. 일요일 오후에 내게 그보다 나은 할 일이 있을 리 없다는 게 톰의 거만한 전제였다.

나는 톰을 따라 흰 칠을 한 나지막한 철길 울타리를 넘었고, 우리는 에클버그 박사의 끈질긴 눈길을 받으며 길을 따라 100야드쯤 되돌아 걸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황무지 가장자리에 들어앉은 조그만 노란 벽돌 건물 한 채뿐이었는데, 황무지에 딸린 읍내 중심가를 한 덩어리로 뭉쳐 놓은 것 같은 그 건물은 둘레에 맞닿은 데가 정말이지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안에 든 가게 세 칸 가운데 하나는 세를 놓는다며 비어 있었고, 또 하나는 재가 깔린 길을 밟고 들어가는 밤샘 식당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수리, 조지 B. 윌슨, 자동차 매매'라고 써 붙인 정비소였고, 나는 톰을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장사가 시원찮은 티가 나고 휑해서, 보이는 차라고는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먼지를 뒤집어쓴 포드 고물 한 대뿐이었다. 이 허깨비 같은 정비소는 눈가림이고 위층 어딘가에 호사스럽고 낭만적인 거처가 숨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막 들던 참에, 주인이 걸레 조각에 손을 닦으며 몸소 사무실 문간에 나타났다. 금발에 기운 없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핏기가 없었고 어렴풋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우리를 보자 연한 파란 눈에 축축한 희망의 빛이 반짝 솟았다.

"어이, 윌슨, 이 친구." 톰이 그의 어깨를 호쾌하게 철썩 치며 말했다. "장사는 좀 되나?"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윌슨이 영 미덥지 않게 대답했다. "그 차는 언제 저한테 파실 겁니까?"

"다음 주. 지금 우리 기사가 손보고 있어."

"그 양반, 손이 꽤 굼뜬가 봅니다?"

"안 굼떠." 톰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딴 데다 파는 게 낫겠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윌슨이 얼른 해명했다. "제 말은 그저……"

윌슨의 목소리는 흐지부지 잦아들었고, 톰은 짜증스럽게 정비소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때 계단을 밟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좀 두툼한 여자의 몸집이 사무실 문으로 들어오던 빛을 가로막았다. 삼십 대 중반에 살집이 살짝 있는 편이었지만, 어떤 여자들이 그렇듯 그 살집을 관능적으로 부릴 줄 아는 여자였다. 물방울무늬가 박힌 짙은 남색 비단 크레이프 원피스 위의 얼굴에는 아름답다 할 만한 구석도 반짝이는 데도 없었지만, 한눈에 알아챌 수 있는 생기가 온몸에서 풍겼다. 몸속 신경이 쉬지 않고 불씨처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천천히 미소 짓더니 남편을 그대로 뚫고 지나 걸어왔다. 남편이 유령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톰의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며 악수를 했다. 이어 입술을 축이고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부드럽고도 거친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의자 좀 갖다 놓지 그래. 사람들 앉게."

"아, 그래야지." 윌슨은 허둥지둥 맞장구를 치고 조그만 사무실 쪽으로 가더니, 금세 벽의 시멘트 빛깔 속으로 섞여 들어 버렸다. 하얀 잿가루가 근처의 모든 것을 뽀얗게 덮고 있었는데, 그의 짙은 양복과 옅은 머리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내만은 예외였다. 아내는 톰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만나자." 톰이 여자를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다음 기차 타."

"그래요."

"아래층 신문 가판대 옆에서 기다릴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톰에게서 물러났다. 바로 그때 조지 윌슨이 의자 두 개를 들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우리는 길을 따라 내려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여자를 기다렸다.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며칠 앞둔 때였는데, 온통 잿빛인 깡마른 이탈리아 아이 하나가 철로를 따라 폭음탄을 한 줄로 늘어놓고 있었다.

"지독한 데지?" 톰이 에클버그 박사와 찌푸린 얼굴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끔찍하네."

"그 여자한테는 여기서 좀 벗어나는 게 약이야."

"남편은 반대 안 해?"

"윌슨? 그 친구는 제 마누라가 뉴욕 사는 동생 보러 가는 줄 알아. 어찌나 멍청한지 자기가 살아 있는 줄도 몰라."

그렇게 톰 뷰캐넌과 그의 여자와 나는 함께 뉴욕으로 올라갔다. 아니, 윌슨 부인이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칸에 앉았으니 꼭 함께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혹시 같은 기차에 타고 있을지 모를 이스트에그 사람들의 고상한 비위를, 톰도 그 정도는 맞춰 준 셈이었다.

여자는 무늬가 찍힌 갈색 모슬린 원피스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뉴욕에 닿아 톰이 부축해 승강장에 내려 줄 때 보니 그 원피스가 제법 펑퍼짐한 엉덩이 위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여자는 신문 가판대에서 《타운 태틀》1 한 부와 영화 잡지 한 권을 샀고, 역 안 약국2에서 콜드크림과 조그만 향수 한 병을 샀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소리가 엄숙하게 울리는 택시 승차장이 나왔는데, 여자는 거기서 택시 네 대를 그냥 보내고 나서야 연보랏빛 차체에 잿빛 시트를 댄 새 차 한 대를 골랐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육중한 역 건물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눈부신 햇살 속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여자가 곧바로 창에서 홱 고개를 돌리더니, 몸을 앞으로 숙여 운전석 쪽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저 강아지 하나 사고 싶어요." 여자가 간절하게 말했다. "아파트에 한 마리 두고 싶어요. 있으면 좋잖아요. 개 말이에요."

택시는 어처구니없게도 존 D. 록펠러를 빼닮은 백발노인 앞으로 후진해 갔다. 노인이 목에 걸어 늘어뜨린 바구니 안에는 무슨 종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강아지 열두어 마리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무슨 종이에요?" 노인이 택시 창가로 다가오자 윌슨 부인이 들떠서 물었다.

"온갖 종이 다 있습지요. 어떤 종을 찾으십니까, 부인?"

"경찰견3 같은 걸로 하나 사고 싶은데요. 그런 종은 없겠죠?"

노인은 미심쩍은 얼굴로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더니, 손을 푹 집어넣어 버둥거리는 한 마리를 목덜미째 끌어올렸다.

"그건 경찰견이 아니잖아." 톰이 말했다.

"예, 딱 경찰견이라고는 못 하지요." 노인이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는 에어데일 테리어 쪽입니다." 노인은 갈색 걸레 같은 강아지 등을 손바닥으로 쓱 쓸어 보였다. "이 털 좀 보십시오. 대단한 털이지요. 감기 걸려서 주인 속 썩일 일은 절대 없는 놈입니다."

"귀여워요." 윌슨 부인이 신이 나서 말했다. "얼마예요?"

"이 개요?" 노인은 감탄하는 눈길로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이 개라면 10달러는 주셔야겠습니다."

그 에어데일은(발이 깜짝 놀랄 만큼 하얬지만 어딘가에 에어데일의 피가 섞여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주인이 바뀌어 윌슨 부인의 무릎에 자리를 잡았다. 윌슨 부인은 비바람에도 끄떡없다는 그 털을 넋이 나간 얼굴로 쓰다듬었다.

"남자애예요, 여자애예요?" 윌슨 부인이 얌전을 빼며 물었다.

"이 개요? 이 개는 사내아이입지요."

"암캐야." 톰이 딱 잘라 말했다. "자, 돈 받아. 이걸로 가서 개나 열 마리 더 사."

우리는 여름 일요일 오후의 따뜻하고 포근한, 거의 목가적이기까지 한 5번가로 차를 몰았다. 흰 양 떼가 우르르 모퉁이를 돌아 나왔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내가 말했다. "난 여기서 내려야겠어."

"안 되지." 톰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파트에 같이 안 올라가면 머틀이 서운해할 거야. 그렇지, 머틀?"

"같이 가요." 그 여자가 졸랐다. "동생 캐서린한테 전화할게요. 볼 줄 아는 사람들 말로는 굉장한 미인이래요."

"글쎄요,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택시는 계속 달려 센트럴 파크를 가로질러 다시 웨스트사이드의 100번대 거리 쪽으로 돌아갔고, 158번가에 이르러 길고 하얀 케이크처럼 늘어선 아파트 건물들 가운데 한 조각 앞에 멈췄다. 윌슨 부인은 궁으로 돌아온 여왕처럼 위엄 어린 눈길로 동네를 한 번 휘둘러보고는, 강아지와 그 밖에 산 물건들을 챙겨 들고 거만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매키 씨네 부부도 올라오라고 할 거예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윌슨 부인이 선언했다. "그리고 물론 동생한테도 전화 넣어야 되고요."

아파트는 꼭대기 층이었고, 작은 거실과 작은 식당과 작은 침실, 그리고 욕실이 전부였다. 거실에는 방에 비해 턱없이 큰, 태피스트리 천을 씌운 가구 한 벌이 문간까지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베르사유 정원에서 그네를 타는 귀부인들의 장면에 줄곧 발이 걸려 비틀거리게 되었다. 그림이라고는 지나치게 확대한 사진 한 장뿐이었는데, 흐릿한 바위 위에 암탉이 한 마리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암탉은 보닛 모자로 바뀌었고, 뚱뚱한 노부인의 얼굴이 방 안을 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철 지난 《타운 태틀》 몇 권이 《베드로라 불린 시몬》4 한 권, 그리고 브로드웨이의 자잘한 추문 잡지 몇 권과 함께 놓여 있었다. 윌슨 부인은 무엇보다 강아지부터 챙겼다. 엘리베이터 보이가 마지못해 짚을 채운 상자와 우유를 가지러 가더니 시키지도 않은 크고 딱딱한 개 비스킷 한 통까지 얹어 왔는데, 그중 하나는 오후 내내 우유 접시에 잠겨 심드렁하게 풀어져 갔다. 그사이 톰은 잠가 둔 서랍장 문을 열고 위스키 한 병을 꺼냈다.

나는 평생 딱 두 번 취해 보았는데, 그 두 번째가 그날 오후였다. 그래서 여덟 시가 넘도록 아파트 안에 명랑한 햇살이 가득했는데도, 그날 일어난 일은 내 기억 속에서 하나같이 뿌옇고 흐릿한 막에 덮여 있다. 윌슨 부인은 톰의 무릎에 앉아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러다 담배가 떨어지자 나는 모퉁이 약국으로 담배를 사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두 사람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눈치껏 거실에 앉아 《베드로라 불린 시몬》을 한 장 내리 읽었는데, 글이 워낙 형편없었거나 위스키 때문에 모든 게 뒤틀려 보였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톰과 머틀이(첫 잔을 비운 뒤로 윌슨 부인과 나는 서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막 다시 나타났을 때, 손님들이 아파트 문간에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동생 캐서린은 서른 살쯤 된, 날씬하고 세상 물정에 훤해 보이는 아가씨였는데, 붉은 단발머리를 끈적하게 딱 붙여 굳혔고 얼굴은 분을 발라 우윳빛으로 하얬다. 눈썹은 뽑아 버린 다음 한결 멋 부린 각도로 다시 그려 넣었는데,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자연의 노력 때문에 얼굴 전체가 어딘가 번진 듯 흐릿해 보였다. 캐서린이 움직일 때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도자기 팔찌가 두 팔을 따라 오르내리며 서로 부딪쳐서 딸그락 소리가 쉴 새 없이 났다. 캐서린은 제집에 들어오듯 바삐 들어와서는 가구를 제 것처럼 둘러보았고,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이 여기 사는가 싶었다. 그런데 물어보니 캐서린은 과하다 싶게 웃음을 터뜨리고 내 질문을 소리 내어 되풀이하더니, 여자 친구 하나와 호텔에서 산다고 했다.

매키 씨는 아래층에 사는 창백하고 여성스러운 남자였다. 광대뼈에 비누 거품이 하얗게 한 점 묻은 걸 보니 막 면도를 하고 온 모양이었고, 방 안의 누구에게나 더없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매키 씨는 자기가 "예술 바닥"에서 일한다고 일러 주었는데, 나중에 짐작해 보니 사진사였고, 벽에 심령체처럼 부옇게 떠 있던 윌슨 부인 어머니의 흐릿한 확대 사진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의 아내는 새된 목소리에 나른하고, 반반하게 생겼으며, 끔찍했다. 매키 부인은 결혼한 뒤로 남편이 자기 사진을 127번이나 찍었다고 나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윌슨 부인은 조금 전에 옷을 갈아입어서 이제는 크림색 시폰으로 지은 공들인 애프터눈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방 안을 휩쓸고 다닐 때마다 그 드레스가 쉴 새 없이 사락거렸다. 옷이 바뀌자 사람됨까지 바뀌어서, 정비소에서 그토록 눈에 띄던 강렬한 생기는 위세가 등등한 거만함으로 변해 있었다. 웃음도, 몸짓도, 단언하는 말도 시시각각 더 요란하게 꾸며졌다. 여자가 부풀어 오를수록 둘레의 방은 쪼그라들었고, 마침내 여자는 담배 연기 자욱한 공기 속에서 시끄럽게 삐걱거리는 축 위에 올라앉아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얘." 윌슨 부인이 새침하게 꾸민 목소리를 한껏 높여 동생에게 말했다. "이런 작자들은 대개 번번이 바가지를 씌운다니까. 머릿속엔 온통 돈 생각뿐이야. 지난주에 발 좀 봐 달라고 여자를 하나 여기로 불렀는데, 청구서를 받아 보니 누가 보면 내 맹장염이라도 떼어 낸 줄 알겠더라."

"그 여자 이름이 뭐였어요?" 매키 부인이 물었다.

"에버하트 부인이요. 남의 집에 직접 찾아다니면서 발을 봐 주는 사람이에요."

"옷이 참 예쁘네요." 매키 부인이 한마디 했다. "정말 사랑스러워요."

윌슨 부인은 경멸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그 칭찬을 물리쳤다.

"그냥 막 입는 헌 옷인걸요." 윌슨 부인이 말했다. "남 보기에 어떻든 상관없을 때나 가끔 휙 걸쳐요."

"그래도 정말 근사하게 어울려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매키 부인이 굽히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체스터가 딱 그 자세로 담아내기만 하면 뭔가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요."

우리는 모두 말없이 윌슨 부인을 바라보았고, 윌슨 부인은 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쓸어 넘기고는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마주 보았다. 매키 씨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한 채 그 여자를 골똘히 뜯어보더니, 얼굴 앞에서 한 손을 천천히 앞뒤로 움직였다.

"조명을 바꿔야겠군요." 잠시 뒤 매키 씨가 말했다. "얼굴의 양감을 좀 살려 보고 싶어요. 그리고 뒷머리까지 전부 잡아내 보겠습니다."

"조명을 바꾸다니, 어림도 없어." 매키 부인이 소리쳤다. "내 생각엔……"

남편이 "쉿!" 하자 우리는 모두 다시 그 피사체를 바라보았는데, 그때 톰 뷰캐넌이 들으란 듯이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키네 두 사람도 한잔씩 하지." 톰이 말했다. "머틀, 다들 잠들기 전에 얼음이랑 탄산수 좀 더 가져와."

"그 애한테 얼음 가져오라고 했어요." 머틀은 아랫것들의 게으름에 절망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여간 이런 사람들이란! 줄곧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닦달해야 한다니까요."

머틀은 나를 보고 까닭 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강아지에게 가서 황홀해하며 입을 맞추고는 부엌으로 휩쓸고 들어갔는데, 거기서 요리사 열두어 명이 분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한 기세였다.

"롱아일랜드에서 꽤 괜찮은 작품을 몇 점 찍었지요." 매키 씨가 힘주어 말했다.

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중 두 점은 아래층에 액자로 걸어 두었어요."

"두 점이라니, 뭐가?" 톰이 따져 물었다.

"습작 두 점 말입니다. 하나는 '몬토크 곶: 갈매기'라고 부르고, 다른 하나는 '몬토크 곶: 바다'라고 부르지요."

동생 캐서린이 소파에 앉은 내 곁에 와서 앉았다.

"그쪽도 롱아일랜드에 사세요?" 캐서린이 물었다.

"웨스트에그에 살아요."

"어머, 정말요? 저 한 달쯤 전에 거기 파티에 갔었어요. 개츠비라는 남자네 집이었는데. 그 사람 아세요?"

"그 사람 바로 옆집에 살아요."

"글쎄, 다들 그러는데 그 사람이 빌헬름 황제5의 조카인가 사촌이래요. 돈도 전부 거기서 나오는 거고요."

"그래요?"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 사람이 무서워요. 그 사람한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다간 큰일이에요."

내 이웃에 관한 이 흥미진진한 정보는, 매키 부인이 느닷없이 캐서린을 가리키는 바람에 끊기고 말았다.

"체스터, 저 아가씨라면 당신이 뭔가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매키 부인이 불쑥 소리쳤지만, 매키 씨는 시큰둥하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톰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연줄만 닿는다면 롱아일랜드 쪽 작업을 더 해 보고 싶은데요. 제가 바라는 건 그저 첫발을 디딜 기회를 달라는 것뿐입니다."

"머틀한테 부탁해 봐." 윌슨 부인이 쟁반을 들고 들어오자 톰이 짧게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소개장을 써 줄 거야. 그렇지, 머틀?"

"뭘 해 줘요?" 머틀이 깜짝 놀라 물었다.

"매키한테 네 남편 앞으로 소개장을 써 주라고. 그래야 매키가 네 남편을 모델로 습작을 몇 점 찍을 거 아냐." 톰은 뭔가를 지어내느라 잠시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주유기 앞의 조지 B. 윌슨'이라든가, 뭐 그런 거."

캐서린이 내게 바싹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둘 다 자기랑 결혼한 사람을 못 견뎌 해요."

"그래요?"

"못 견뎌 한다니까요." 캐서린은 머틀을 보고, 이어서 톰을 보았다. "제 말은요, 그렇게 못 견디겠으면 뭐 하러 계속 같이 사냐는 거예요. 저 같으면 당장 이혼하고 둘이 결혼해 버리겠어요."

"머틀도 윌슨 씨를 싫어해요?"

대답은 뜻밖이었다. 내 말을 엿들은 머틀이 대답했는데, 사납고 상스러운 말이었다.

"그것 봐요!" 캐서린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고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톰의 아내 때문에 둘이 못 합치는 거예요. 그 여자가 가톨릭 신자라서요. 가톨릭은 이혼을 안 하잖아요."

데이지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그토록 공들인 거짓말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둘이 결혼하게 되면요."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한동안 서부에 가서 살 거래요."

"남의 눈을 피하려면 유럽으로 가는 편이 낫겠는데요."

"어머, 유럽 좋아하세요?" 캐서린이 뜻밖에도 반색하며 외쳤다. "저 몬테카를로에서 막 돌아왔거든요."

"그렇군요."

"바로 작년에요. 다른 여자애 하나랑 같이 갔었어요."

"오래 있었어요?"

"아뇨, 몬테카를로만 딱 갔다 왔어요. 마르세유를 거쳐서요. 떠날 땐 1,200달러가 넘게 있었는데, 카지노 특실에서 이틀 만에 몽땅 털렸지 뭐예요.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정말. 아이고, 그 동네라면 지긋지긋해요!"

늦은 오후의 하늘이 지중해의 푸른 꿀처럼 잠시 창 안에 피어났다. 그러다 매키 부인의 새된 목소리가 나를 방 안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나도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어요." 매키 부인이 기운차게 선언했다. "몇 년이나 나를 쫓아다니던 쪼그만 유대 놈하고 결혼할 뻔했지 뭐예요. 그 남자가 나보다 한참 아래라는 건 나도 알았어요. 다들 나한테 입이 닳도록 그랬거든요. '루실, 그 남자는 너한테 한참 못 미쳐!' 그래도 체스터를 못 만났으면 틀림없이 그 남자한테 넘어갔을 거예요."

"그래요, 그래도 들어 봐요." 머틀 윌슨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적어도 부인은 그 남자하고 결혼은 안 했잖아요."

"그야 안 했죠."

"그런데 나는 결혼했거든요, 그 남자랑." 머틀이 알쏭달쏭하게 말했다. "그게 부인하고 나하고 다른 점이에요."

"그럼 왜 했어, 언니?" 캐서린이 따지듯 물었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잖아."

머틀은 곰곰이 생각했다.

"신사인 줄 알고 결혼했지." 마침내 머틀이 말했다. "가문이니 법도니 하는 걸 좀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 구두를 핥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더라."

"한동안은 그 사람한테 푹 미쳐 있었잖아." 캐서린이 말했다.

"미쳐 있었다고!" 머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외쳤다. "내가 그 인간한테 미쳐 있었다고 누가 그래? 저기 저 남자한테 미쳐 본 적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그 인간한테도 미쳐 본 적 없어."

머틀이 느닷없이 나를 가리키자 다들 나를 탓하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애정 따위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표정으로 보여 주려고 애썼다.

"내가 미쳤던 건 그 인간이랑 결혼할 때, 딱 그때 한 번뿐이야. 하자마자 실수한 줄 알았어. 그 인간이 결혼식 올린다고 남의 제일 좋은 양복을 빌려 입고는 나한테 말도 안 했는데, 하루는 그 인간이 없을 때 양복 주인이 옷을 찾으러 왔더라고. '어머, 그게 댁의 양복이에요?' 내가 그랬지. '나는 처음 듣는 얘기네요.' 그래도 양복을 내주고는 드러누워서 오후 내내 대성통곡을 했지 뭐야."

"언니는 정말 그 사람한테서 벗어나야 해요." 캐서린이 다시 나에게 말했다. "그 정비소 위층에서 11년째 살고 있다니까요. 게다가 언니한테는 톰이 난생처음 생긴 애인이에요."

위스키 병은(벌써 두 번째 병이었다) 이제 모두가 쉴 새 없이 찾는 물건이 되었는데, 캐서린만은 예외여서 "아무것도 안 마셔도 똑같이 기분이 좋다"고 했다. 톰은 관리인을 불러 이름난 샌드위치를 사 오게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저녁 한 끼가 너끈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 부드러운 어스름 속을 걸어 동쪽 공원 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할 때마다 어김없이 누군가의 사납고 요란한 말다툼에 휘말렸고, 그 말다툼이 밧줄처럼 나를 의자로 도로 끌어당겼다. 그래도 도시 저 높이 한 줄로 늘어선 우리의 노란 창들은, 어두워 가는 거리에서 무심코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인간사의 은밀함을 제 몫만큼은 더해 주었을 것이다. 고개를 들고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는 그 사람의 모습도 나는 보았다. 나는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었고, 끝없이 다채로운 삶에 매혹되는 동시에 진저리를 쳤다.

머틀이 의자를 내 쪽으로 바싹 끌어당기더니, 느닷없이 따뜻한 입김에 실어 톰과 처음 만난 이야기를 내게 쏟아부었다.

"기차에 보면 늘 맨 마지막까지 남는, 서로 마주 보는 작은 자리 두 개 있잖아요, 거기서였어요. 동생 보러 뉴욕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올 참이었죠. 그 사람은 야회복에 에나멜 구두 차림이라 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쳐다볼 때마다 그 사람 머리 위에 붙은 광고를 보는 척해야 했죠. 역에 들어설 때 그 사람이 내 옆에 붙어 섰는데 하얀 셔츠 앞섶이 내 팔에 닿길래 경찰을 불러야겠다고 했더니, 그 사람은 내가 거짓말하는 걸 알더라고요. 어찌나 흥분했던지 그 사람이랑 택시에 타면서도 그게 지하철이 아니라는 걸 모르다시피 했다니까요. 머릿속에선 그저 한 가지 생각만 자꾸자꾸 맴돌았어요. '영원히 살 것도 아니잖아, 영원히 살 것도 아니잖아.'"

머틀이 매키 부인 쪽으로 돌아앉자, 방 안이 머틀의 꾸며 낸 웃음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어머, 부인." 머틀이 소리쳤다. "이 드레스, 내가 다 입고 나면 부인한테 줄게요. 내일 새로 하나 사야 하거든요. 사야 할 걸 전부 목록으로 적어 둘 거예요. 마사지 받고, 머리 웨이브 하고, 개 목걸이, 스프링을 누르면 열리는 그 귀여운 조그만 재떨이, 그리고 엄마 산소에 놓을, 검은 비단 리본을 달아서 여름 내내 가는 화환도요. 할 일을 하나도 안 잊어버리게 목록을 적어 둬야겠어요."

아홉 시였다. 그러고는 거의 곧바로 시계를 보았는데 열 시였다. 매키 씨는 주먹 쥔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꼭 행동파 사나이를 찍은 사진 같았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오후 내내 마음에 걸리던 마른 비누 거품 자국을 그의 뺨에서 닦아 냈다.

강아지는 탁자 위에 앉아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담배 연기 너머를 바라보며 이따금 가냘프게 끙끙거렸다. 사람들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고, 어딘가로 가자고 계획을 세웠다가 서로를 놓쳤고, 서로를 찾아다니다가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찾아냈다. 자정이 다 되어 갈 무렵 어느 때인가, 톰 뷰캐넌과 윌슨 부인은 얼굴을 맞대고 서서 윌슨 부인에게 데이지의 이름을 입에 올릴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열띤 목소리로 따지고 있었다.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윌슨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부르고 싶으면 언제든 부를 거예요! 데이지! 데이……"

짧고 날랜 손놀림 한 번에, 톰 뷰캐넌은 손바닥으로 윌슨 부인의 코를 부러뜨렸다.

그러고는 욕실 바닥에 피 묻은 수건들이 있었고, 여자들이 나무라는 목소리가 있었고, 그 모든 소란 위로 높이, 길게 이어지다 끊기다 하는 고통의 울부짖음이 있었다. 매키 씨가 선잠에서 깨어 얼떨떨한 얼굴로 문 쪽을 향해 걸음을 떼더니, 반쯤 가다가 돌아서서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내와 캐서린은 구급 용품을 손에 들고 빽빽한 가구 사이를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나무랐다가 달랬다가 했고, 소파 위에서는 절망에 빠진 형체 하나가 막힘없이 피를 흘리며 베르사유를 수놓은 태피스트리 위에 《타운 태틀》을 펼쳐 덮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매키 씨는 다시 돌아서서 그대로 문을 나섰다. 나는 샹들리에에 걸어 둔 모자를 집어 들고 뒤따라 나갔다.

"언제 점심 한번 하러 오세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데 매키 씨가 권했다.

"어디로요?"

"아무 데나요."

"레버에서 손 떼세요." 엘리베이터 보이가 쏘아붙였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매키 씨가 위엄을 차리며 말했다. "건드리고 있는 줄 몰랐군요."

"좋아요." 내가 응했다. "기꺼이 가죠."

……나는 그의 침대 곁에 서 있었고, 그는 속옷 바람으로 시트 사이에 일어나 앉아 커다란 작품집을 두 손에 들고 있었다.

"미녀와 야수…… 고독…… 식료품 가게의 늙은 말…… 브루클른 다리……"

그러고 나서 나는 펜실베이니아 역의 싸늘한 아래층에 반쯤 잠든 채 누워, 조간 《트리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새벽 네 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

  1. 1. 사교계 소문과 추문을 싣던 가십 잡지. 피츠제럴드가 지어낸 이름으로, 당시 뉴욕에 실제로 있던 가십 주간지 《타운 토픽스》를 떠올리게 한다.

  2. 2. 당시 미국의 약국은 약만이 아니라 화장품과 담배, 잡화까지 두루 팔았다.

  3. 3. 저먼 셰퍼드를 말한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이 개를 흔히 '경찰견(police dog)'이라 불렀다.

  4. 4. 영국 작가 로버트 키블이 1921년에 낸 소설. 1차 대전 중 프랑스에 간 성공회 군목의 연애를 그렸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애정 묘사로 물의를 빚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5. 5.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 1차 대전에서 미국과 싸운 적국의 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