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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 관하여 제1권

1 폐하, 제가 관용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은 말하자면 거울 노릇을 하여, 모든 즐거움 가운데 가장 큰 즐거움에 이르실 폐하의 모습을 폐하께 비추어 드리려는 것입니다. 올바른 행동의 참된 열매는 그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이고, 덕에는 덕 자신 말고 그에 걸맞은 보상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선한 양심을 들여다보고 두루 살펴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거대한 무리, 불화하고 들고일어나기 쉽고 제 몸을 가누지 못하며 이 멍에를 부수기만 하면 남의 파멸에도 제 파멸에도 똑같이 날뛰며 기뻐할 이 무리에게 눈길을 보내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내가 뭇 인간 가운데 마음에 들어 뽑혀 지상에서 신들을 대신하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뭇 민족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자다. 저마다 어떤 몫과 처지를 누릴지는 내 손에 달려 있다. 운이 인간 하나하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는지는 내 입을 빌려 선포된다. 내 대답에서 백성과 도시들이 기뻐할 까닭을 얻는다. 내가 바라고 내가 호의를 베풀지 않으면 어디서도 어느 땅도 번성하지 못한다. 내 평화가 눌러 두고 있는 이 수천수만 자루의 칼은 내 고갯짓 하나에 뽑혀 나올 것이다. 어느 민족을 뿌리째 없애고 어느 민족을 옮겨 살게 할지, 누구에게 자유를 주고 누구에게서 빼앗을지, 어느 왕을 노예로 만들고 누구의 머리에 왕관을 씌울지, 어느 도시가 무너지고 어느 도시가 일어설지, 그것이 모두 내 관할이다. 이토록 큰 권력을 쥐고도 나는 분노에 떠밀려 부당한 형벌을 내린 적이 없다. 젊은 혈기에도, 아무리 고요한 가슴에서도 참을성을 쥐어짜 내곤 하는 사람들의 무모함과 고집에도 떠밀리지 않았고, 공포로 권력을 과시하려는 그 끔찍하지만 큰 권력에는 흔한 영광에도 떠밀리지 않았다. 내 칼은 칼집에 들어 있다. 아니, 칼집에 묶여 있다. 나는 가장 하찮은 피 한 방울도 더없이 아낀다. 다른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사람이라는 이름 하나로 내게 호의를 얻는다. 엄격함(severitas)은 감추어 두고 관용(clementia)은 늘 채비해 둔다. 나는 오랫동안 버려진 채 어둠에 묻혀 있다가 내가 빛으로 불러낸 법들 앞에 셈을 바쳐야 할 사람처럼 나 자신을 지킨다. 누구는 앳된 나이가, 누구는 늘그막의 나이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누구는 지위를 보아, 누구는 비천함을 보아 살려 주었다. 연민(misericordia)을 베풀 까닭을 하나도 찾지 못할 때에는 나 자신을 위해 살려 주었다. 오늘이라도 불멸의 신들이 내게 셈을 물으신다면, 나는 인류를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세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당당히 공언하셔도 됩니다. 폐하의 신의와 보호 아래 들어온 것은 모두 안전하게 지켜지고, 폐하로 말미암아 국가가 힘으로든 몰래든 무엇 하나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더없이 드물고 지금껏 어느 군주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칭송, 곧 결백을 바라셨습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고, 폐하의 남다른 그 선함은 배은망덕하거나 심술궂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폐하께 감사로 보답합니다. 로마 인민에게 크고 오랜 복이신 폐하만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스스로 엄청난 짐을 지셨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신격 아우구스투스를, 티베리우스 황제의 첫 시절을 입에 올리지 않고, 폐하께서 본받으시기를 바라는 본보기를 폐하 밖에서 찾지도 않습니다. 폐하의 치세는 처음 맛보여 주신 그 맛을 잣대로 평가받습니다. 그 선함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한때 걸친 것이었다면 이 일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누구도 가면을 오래 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꾸민 것은 금세 본바탕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밑에 진실이 깔려 있는 것, 말하자면 단단한 땅에서 돋아난 것은 세월이 갈수록 더 크고 더 나아집니다.

폐하의 그 고귀한 천품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알 수 없던 동안, 로마 인민은 큰 도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라의 기원은 안전합니다. 폐하께서 갑자기 폐하 자신을 잊으실 염려는 없으니까요. 물론 지나친 행운(felicitas)은 사람을 탐욕스럽게 만들고, 욕망은 결코 얻은 것에서 멈출 만큼 절제되지 않습니다. 큰 것에서 더 큰 것으로 층계를 밟아 오르고, 바라지도 못한 것을 얻은 사람은 더없이 염치없는 희망을 끌어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폐하의 시민들은 모두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 복에 더할 것은 이 복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밖에 없다고 털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이보다 더디게 나오는 고백은 없는데도, 많은 것이 그들에게서 이 고백을 받아 냅니다. 깊고 넘쳐흐르는 안온함(securitas), 어떤 불의도 넘보지 못하는 높은 곳에 세워진 법이 그렇습니다. 그들 눈앞에는 더없이 기쁜 국가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최고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모자란 것이라고는 멸망할 자유 하나뿐인 국가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폐하의 관용에 대한 감탄은 가장 높은 사람에게도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미칩니다. 다른 복은 저마다 제 처지에 비례해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누리거나 기대하지만, 관용에서는 모두가 같은 것을 바랍니다. 자기 결백에 아무리 흡족한 사람이라도, 인간의 잘못을 받아 줄 관용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2 그런데 관용이 가장 악한 자들을 떠받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관용은 죄가 있은 뒤에야 쓸모가 있고, 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덕 하나만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의술은 병든 사람에게 쓰이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도 존중받듯이, 관용도 벌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부르짖어 찾지만 죄 없는 사람들도 받듭니다. 다음으로, 관용은 죄 없는 사람에게도 설 자리가 있습니다. 때로는 운이 죄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관용은 결백만 돕는 것이 아니라 덕도 자주 돕습니다. 시대의 형편에 따라서는 칭찬받을 일로 벌받는 일도 생기니까요. 게다가 벌을 면해 주기만 하면 결백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가리지 않고 용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악한 자와 선한 자의 구별이 사라지면 혼란이 뒤따르고 악덕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니 고칠 수 있는 성품과 가망 없는 성품을 가릴 줄 아는 절도를 써야 합니다. 관용은 아무에게나 흔하게 베풀어서도, 아예 끊어서도 안 됩니다. 모두를 용서하는 것은 아무도 용서하지 않는 것만큼 잔인합니다. 우리는 중용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알맞게 맞추기는 어려우니, 어느 쪽으로든 넘쳐야 한다면 더 인정 있는 쪽으로 기울게 해야 합니다.

3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제자리에서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제 주제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겠습니다. 첫째는 풀어 줌에 관한 부분입니다1. 둘째는 관용의 본성과 품성을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어떤 악덕은 덕을 흉내 내므로 둘을 가려낼 표지를 찍어 두지 않으면 서로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마음을 어떻게 이 덕으로 이끌고, 마음이 어떻게 이 덕을 굳히며 몸에 익혀 제 것으로 만드는지 따져 보겠습니다.

어떤 덕도 이보다 더 인정 있는 덕은 없으니, 어떤 덕도 이보다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공동선을 위해 태어난 사회적 동물로 보려는 우리뿐 아니라, 인간을 쾌락에 내맡기고 모든 말과 행동이 제 이익만 바라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고요와 여가를 찾는다면, 평화를 사랑하고 손을 거두는 이 덕에서 제 본성에 맞는 덕을 얻은 셈이니까요. 그러나 관용은 누구보다도 왕이나 군주에게 어울립니다. 큰 힘은 사람을 살리는 권력일 때에만 아름답고 영광스럽습니다. 해치는 데 힘을 쓰는 것은 역병의 힘입니다. 모두가 자기들 위에 있는 만큼 자기들 편에 서 있다고 아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과 모두의 안녕을 위해 그의 보살핌이 밤새 깨어 지킨다는 것을 날마다 겪는 사람, 그가 나서면 무슨 해롭고 사나운 짐승이 굴에서 튀어나온 듯 흩어져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밝고 이로운 별에게로 앞다투어 몰려드는 사람, 그런 사람의 위대함만이 흔들림 없이 굳게 터를 잡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자객의 칼끝에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고, 그가 살아남을 길을 사람의 주검으로 깔아야 한다면 제 몸을 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밤에는 보초를 서서 그의 잠을 지키고, 그를 에워싸고 앞을 막아서서 양옆을 지키며, 덮쳐 오는 위험에 몸으로 맞섭니다.

뭇 민족과 도시들이 이처럼 왕을 지키고 사랑하며, 다스리는 이의 안위가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 자신과 제 것을 내던지는 데 뜻을 모으는 것은 까닭이 없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위해 수천수만이 칼을 받고, 때로는 늙고 병든 한 사람의 목숨을 숱한 죽음으로 사들이는 것은 자기를 하찮게 여겨서도, 미쳐서도 아닙니다.

몸 전체는 마음을 섬깁니다. 몸이 마음보다 훨씬 크고 훨씬 보기 좋은데도, 마음은 가늘게 숨어 있어 어느 자리에 숨어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손과 발과 눈은 마음의 일을 하고, 이 살갗은 마음을 감싸 지키며, 마음이 시키면 우리는 누워 있거나 쉴 새 없이 뛰어다닙니다. 마음이 명하면, 그 주인이 탐욕스러우면 우리는 이익을 찾아 바다를 뒤지고, 야심 찬 주인이라면 우리는 벌써 오른손을 불길에 내밀었거나 스스로 땅 구덩이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영혼을 둘러싼 이 거대한 무리는 그 한 사람의 숨결로 다스려지고 그의 이성으로 이끌립니다. 그의 지혜가 떠받치지 않는다면 이 무리는 제 힘에 짓눌려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4 그러니 사람들이 한 사람을 위해 열 개 군단씩 싸움터로 이끌고 나가 맨 앞줄로 달려 나가며, 자기 사령관의 군기가 등을 돌리지 않도록 가슴으로 상처를 받아 낼 때, 그들은 실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국가를 하나로 묶는 끈이요, 이 수천수만이 들이마시는 생명의 숨입니다. 제국의 그 정신이 빠져나가면 이들은 저 혼자서는 짐과 먹잇감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무사하면 모두가 한마음이요,
왕을 잃으면 믿음을 깨뜨린다."2

그런 일이 닥치면 로마의 평화는 끝장나고, 이 위대한 인민의 운은 폐허로 내몰릴 것입니다. 이 인민은 고삐를 견딜 줄 아는 동안에만 그 위험에서 멀리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고삐를 끊어 버리거나, 어쩌다 고삐가 풀렸을 때 다시 채우기를 거부한다면, 이 하나 됨과 이 거대한 제국의 짜임새는 여러 조각으로 터져 흩어지고, 이 도시가 복종을 그치는 날이 곧 다스림을 그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군주와 왕, 그 밖에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나라의 질서를 지키는 이들이 사사로운 혈연을 넘어서까지 사랑받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제정신인 사람에게 공적인 일이 사적인 일보다 중하다면, 국가가 제 몸을 기댄 그 사람이 더 소중한 것도 당연합니다. 황제는 이미 오래전에 국가를 제 몸처럼 입어서, 둘 가운데 하나를 떼어 내면 둘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황제에게는 힘이 필요하고 국가에게는 머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5 제 이야기가 본래 주제에서 꽤 멀리 벗어난 듯 보이겠지만, 맹세코 바로 그 문제를 파고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끌어낸 대로 폐하께서 폐하의 국가의 마음이시고 국가가 폐하의 몸이라면, 관용이 얼마나 필요한지 폐하께서도 보시리라 생각합니다. 남을 아끼시는 듯 보일 때 폐하께서는 폐하 자신을 아끼시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비난받아 마땅한 시민들도 병든 팔다리를 아끼듯 아껴야 하고, 피를 뽑아야 할 때가 오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깊이 베지 않도록 손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앞서 말씀드린 대로 관용은 모든 인간에게 자연에 맞는 것이지만, 통치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어울립니다. 통치자에게는 관용이 지켜 줄 것이 더 많고, 관용이 드러날 바탕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잔인함(crudelitas)은 얼마나 작은 해를 끼칩니까! 군주의 포악함은 전쟁입니다. 덕들은 서로 어울리고 어느 덕도 다른 덕보다 낫거나 더 훌륭하지 않지만, 어떤 덕은 어떤 사람에게 더 잘 맞습니다. 도량(magnanimitas)은 어떤 인간에게나, 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는 가장 낮은 사람에게도 어울립니다. 나쁜 운을 되받아치는 것보다 크고 용감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도 도량은 좋은 운 속에서 더 넓은 자리를 얻고, 평지보다 재판석 위에서 더 잘 보입니다.

관용은 어느 집에 찾아가든 그 집을 운 좋고 평온하게 해 주지만, 궁궐에서는 드문 만큼 더 경이롭습니다. 그의 분노를 가로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가 무거운 판결을 내리면 죽는 사람조차 수긍하며, 누구도 그의 말을 끊지 않을 것이고, 그가 몹시 격노하면 용서를 빌지조차 못할 그런 사람이, 스스로 자기 손을 붙들고 이렇게 생각하며 제 권력을 더 낫고 더 온화하게 쓴다면, 그보다 더 기억할 만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법을 어기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못 한다." 큰 운에는 큰마음이 어울립니다. 큰마음이 운의 높이까지 올라 그보다 더 높이 서지 못하면 운마저 땅바닥으로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큰마음의 특징은 온화하고 평온하며, 불의와 모욕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데 있습니다. 분노에 휩싸여 날뛰는 것은 아녀자의 일이고, 쓰러진 자를 물어뜯고 몰아붙이는 것은 짐승, 그것도 고귀하지 못한 짐승의 일입니다. 코끼리와 사자는 쓰러뜨린 것을 그냥 지나칩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천한 짐승의 짓입니다. 포악하고 누그러질 줄 모르는 분노는 왕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화를 내어 상대와 같은 높이로 내려가면 그보다 그리 높이 솟아 있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위태롭고 잃어 마땅한 이들에게 목숨을 주고 지위를 준다면, 그는 세상을 쥔 사람 말고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목숨은 윗사람에게서도 빼앗을 수 있지만, 줄 수는 아랫사람에게만 줄 수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빼어난 운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운이 가장 우러름을 받아야 할 때는, 선한 이든 악한 이든 그 은혜로 우리를 빛 속에 태어나게 하는 신들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신들의 마음을 제 것으로 삼는 군주는 시민들 가운데 쓸모 있고 선한 이들은 기꺼이 바라보고, 나머지는 머릿수를 채우게 남겨 두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있어서 기쁘고, 어떤 이들은 참아 주는 것입니다.

6 생각해 보십시오. 이 도시에서는 더없이 넓은 길로 사람의 물결이 쉼 없이 흘러가다가도, 거센 급류처럼 내닫는 그 흐름을 무엇이 가로막기라도 하면 서로 짓눌립니다. 이 도시는 세 극장의 객석을 한꺼번에 채울 사람을 내놓고, 온 땅에서 갈아 거둔 것을 다 먹어 치웁니다. 이런 도시에서 엄격한 재판관이 무죄로 풀어 줄 사람만 남긴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황량해지겠습니까. 심문하는 관리들 가운데, 자기가 심문할 때 내세우는 바로 그 법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고발하는 사람 가운데 허물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용서(venia)를 자주 빌어야 했던 사람만큼 용서에 인색한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습니다. 누구는 무거운 죄를, 누구는 가벼운 죄를, 누구는 작정하고, 누구는 어쩌다 떠밀리거나 남의 악에 휩쓸려 지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는 좋은 결심을 굳세게 지키지 못해, 마지못해 그리고 붙들려고 애쓰면서도 결백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삶이 다하는 날까지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누가 이미 마음을 잘 씻어 내어 이제 무엇도 그를 어지럽히거나 속일 수 없게 되었다 해도, 그 역시 죄를 지어 가며 결백에 이르렀습니다.

7 신들을 말씀드렸으니, 군주가 따라 자신을 빚을 본보기를 이렇게 세우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군주는 신들이 자기에게 그러기를 바라는 그대로 시민들에게 그래야 합니다. 그렇다면 죄와 실수에 누그러질 줄 모르고 마지막 파멸까지 적의를 거두지 않는 신들을 모시는 것이 이롭겠습니까? 그렇다면 왕 가운데 누가 안전하겠습니까? 벼락에 찢긴 몸을 점쟁이들이 주워 모으지 않을 왕이 누가 있겠습니까? 달랠 수 있고 공정한 신들이 권력자들의 죄를 곧장 벼락으로 뒤쫓지 않는다면, 사람들 위에 세워진 사람이 온화한 마음으로 통치권을 쓰고, 세상이 맑고 깨끗한 날에 더 눈에 즐겁고 아름다운지 아니면 잦은 천둥에 모든 것이 흔들리고 여기저기서 번개가 번쩍일 때 그러한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얼마나 더 마땅하겠습니까! 그런데 고요하고 법도 있는 통치의 얼굴은 맑게 빛나는 하늘의 얼굴과 다르지 않습니다. 잔인한 통치는 어지럽고 어둠에 덮여 있습니다. 모두가 떨며 갑작스러운 소리에도 소스라치는 가운데, 모든 것을 뒤흔드는 그 사람 자신도 흔들리지 않고 배기지 못합니다. 끈질기게 앙갚음하는 보통 사람들은 더 쉽게 용서받습니다. 그들은 해를 입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은 불의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업신여김을 두려워하고, 해친 자에게 되갚지 않으면 관용이 아니라 나약함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앙갚음이 손쉬운 사람은 그것을 내려놓으면 틀림없이 온화함(mansuetudo)으로 칭송받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송사를 벌이고, 싸움판에 뛰어들고, 분노가 시키는 대로 하기가 더 자유롭습니다. 대등한 사람끼리 주고받는 주먹은 가볍습니다. 그러나 왕에게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말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위엄에 맞지 않습니다.

8 가장 비천한 사람들에게도 있는 말할 자유를 왕들에게서 빼앗는 것을 폐하께서는 가혹하다고 여기십니다. "그것은 통치가 아니라 예속이다" 하고 폐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까? 그 자유는 저희에게 있고 폐하께는 예속이 있다는 것을 폐하께서는 몸소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벗어나지 못하는 군중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은 처지가 다릅니다. 그들의 덕은 드러나기까지 오래 싸워야 하고, 그들의 악덕은 어둠에 가려집니다. 그러나 폐하 같은 분들의 행동과 말은 소문이 받아 퍼뜨립니다. 그러니 어떤 평판을 받을 만하든 큰 평판을 얻게 될 사람들만큼 자기 평판을 마음 써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의 은혜로 저희에게는 허락되는 많은 것이 폐하께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저는 따르는 사람 하나 없이, 집에도 허리에도 칼 한 자루 없이, 도시 어디든 혼자 겁 없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폐하께서 이루신 평화 속에서도 무장을 하고 사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높은 처지에서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그 처지가 폐하를 에워싸고, 폐하께서 어디로 내려가시든 거창한 행렬을 이끌고 뒤따릅니다. 더 작아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가장 높은 위대함의 예속입니다. 그러나 이 필연은 폐하께서 신들과 함께 지시는 것입니다. 신들도 하늘에 묶여 있어서, 신들에게 내려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듯 폐하께도 내려오시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꼭대기에 붙박여 계십니다. 저희가 움직이는 것은 몇 사람밖에 알아채지 못합니다. 저희는 세상이 모르는 사이에 나다니고 물러나고 옷차림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해와 마찬가지로 숨으실 수가 없습니다. 폐하 둘레에는 빛이 가득하고, 모든 사람의 눈이 그 빛으로 쏠려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저 밖으로 나오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떠오르시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면 어디에 있든 모든 민족이 그 목소리를 받아 듣습니다. 폐하께서 화를 내시면 모든 것이 떱니다. 누구 하나를 치셔도 그 둘레의 것이 모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벼락이 떨어지면 위험에 처하는 것은 몇 사람이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듯이, 큰 권력이 내리는 벌은 해를 끼치는 것보다 더 널리 겁을 주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을 두고는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이냐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것도 보태십시오. 보통 사람은 받은 불의를 참으면 불의를 더 당하기 쉬워지지만, 왕은 온화함에서 더 확실한 안온함을 얻습니다. 잦은 앙갚음은 몇 사람의 증오를 누르는 대신 모든 사람의 증오를 돋우기 때문입니다. 포악하게 굴 까닭이 바닥나기 전에 포악하게 굴려는 뜻부터 바닥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린 나무에서 숱한 가지가 다시 돋고 여러 작물을 더 빽빽이 자라게 하려고 베어 내듯이, 왕의 잔인함은 적을 없애면서 적의 수를 늘립니다. 죽은 사람 하나하나의 자리를 그의 부모와 자식, 친척과 벗들이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9 이것이 얼마나 참된지 폐하 집안의 본보기로 일깨워 드리고자 합니다. 신격 아우구스투스께서는 누가 그분을 그분의 치세부터 헤아리기 시작한다면 온화한 군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럿이 국가를 나누어 쥐고 있던 시절에는 칼을 휘두르셨습니다. 지금 폐하의 나이, 막 열여덟을 넘기셨을 때 그분은 이미 벗들의 품에 단검을 숨기셨고, 이미 계략을 꾸며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옆구리를 노리셨으며, 이미 살생부를 함께 만든 동료이셨습니다3. 그러나 마흔을 넘기시고 갈리아에 머무르실 때, 미련한 사람 루키우스 킨나4가 그분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밀고가 들어왔습니다. 그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덮치려 하는지까지 일러바쳤습니다. 음모에 가담한 자 하나가 밀고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께서는 그에게 앙갚음하기로 하시고 벗들을 불러 회의를 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날 밤 그분은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이 일만 빼면 흠 없는 명문가 젊은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손자를 단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탁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불러 주는 살생부 포고문을 받아 적으셨던 분이, 이제는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은 연거푸 신음하며 서로 엇갈리는 말을 이것저것 내뱉으셨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나는 마음을 졸이는데 나를 죽이려는 자는 태평하게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란 말이냐? 그 숱한 내전에서 헛되이 노려졌고 그 숱한 해전과 육전에서도 무사했던 이 목숨을, 땅과 바다에 평화가 자리 잡은 지금 죽이는 것도 아니고 제물로 바치기로 작정한 자가 벌을 받지 않는단 말이냐?" (그분이 제사를 지낼 때 덮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번에는 킨나보다 자기 자신에게 훨씬 큰 소리로 화를 내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네가 죽는 것이 이롭다면 너는 왜 사느냐? 처형은 언제 끝나느냐? 피는 언제 그치느냐? 나는 명문가 젊은이들이 칼끝을 갈아 대는 과녁으로 내놓인 머리다. 나 하나 죽지 않으려고 그토록 많은 것을 없애야 한다면 삶은 그만한 값어치가 없다." 마침내 아내 리비아께서 그분의 말을 끊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녀자의 생각도 받아 주시겠습니까? 의사들이 하는 대로 해 보십시오. 의사들은 흔히 쓰는 약이 듣지 않으면 반대되는 약을 써 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엄격함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살비디에누스 뒤를 레피두스가, 레피두스 뒤를 무레나가, 무레나 뒤를 카이피오가, 카이피오 뒤를 에그나티우스가 따랐습니다5. 그토록 큰일을 감히 꾸몄다는 것이 부끄러운 다른 자들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관용이 당신께 어떻게 듣는지 시험해 보십시오. 루키우스 킨나를 용서하십시오. 그는 붙잡혔으니 이제 당신을 해칠 수 없고, 당신의 명성에는 보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편을 들어 줄 변호인을 찾았다는 데 기뻐하시며 아내에게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회의에 부른 벗들에게 곧바로 회의를 거둔다고 알리게 하시고, 킨나 한 사람만 불러들이셨습니다. 방에서 모두를 내보내시고 킨나에게 의자 하나를 따로 놓아 주게 하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자네에게 이것부터 부탁하네. 내가 말하는 동안 끊지 말고, 내 말 중간에 소리치지 말게. 자네에게도 마음껏 말할 시간을 주겠네. 킨나, 나는 적진에서 자네를 찾아냈을 때, 자네가 내 원수가 된 것이 아니라 아예 원수로 태어났는데도 자네를 살려 주었고, 아버지의 재산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네. 오늘 자네는 이긴 자들이 진 자네를 시샘할 만큼 운 좋고 부유하네. 자네가 사제직을 바랐을 때는 부모가 나와 함께 싸운 여러 사람을 제치고 자네에게 주었네. 내가 자네에게 이만큼 베풀었는데, 자네는 나를 죽이기로 작정했네." 이 말에 킨나가 자기는 그런 미친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고 소리치자,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군, 킨나. 말을 끊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거듭 말하지만, 자네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네." 그러고는 장소와 공모자와 날짜와 음모의 순서, 그리고 누구에게 칼을 맡겼는지까지 덧붙이셨습니다. 킨나가 눈을 내리깐 채, 이제는 약속 때문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가? 자네가 군주가 되려고? 자네가 다스리는 데 나 말고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맹세코 로마 인민의 형편이 딱하게 되었군. 자네는 자네 집안도 지키지 못하네. 얼마 전에는 사사로운 소송에서 해방 노예 하나의 연줄에 밀려 지기까지 했지. 그러니 자네에게는 황제에게 맞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보다 쉬운 일이 없는 모양이군. 말해 보게. 내가 홀로 자네의 희망을 가로막고 있다면, 파울루스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코수스 집안과 세르빌리우스 집안이, 헛된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얼굴상에 오히려 영예가 되는 그 숱한 귀족의 무리가 자네를 받아들이겠는가?"

그분의 말씀을 다 옮겨 이 책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겠습니다(그분은 두 시간 넘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것 하나로 만족하실 이 벌을 그렇게 늘이신 것입니다). 그분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킨나, 나는 자네에게 두 번째로 목숨을 주네. 처음에는 적에게 주었고, 이번에는 나를 노려 숨어든 자, 주군을 시해하려 한 역적에게 주네. 오늘부터 우리 사이에 우정이 시작되기를 바라네. 내가 더 큰 신의로 자네에게 목숨을 주었는지, 자네가 더 큰 신의로 그 목숨을 빚졌는지 겨루어 보세." 그 뒤 그분은 킨나가 감히 집정관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을 나무라시며 손수 집정관직을 내리셨습니다. 그분은 킨나를 더없이 가깝고 충실한 벗으로 두셨고, 킨나는 그분을 유일한 상속인으로 삼았습니다. 그 뒤로 그분을 노린 음모는 다시 없었습니다.

10 폐하의 고조부께서는 패한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누구를 다스리셨겠습니까? 그분은 살루스티우스와 코케이우스 집안과 델리우스 집안, 그리고 맨 먼저 알현을 허락받는 측근 무리 전체를 적진에서 데려와 채우셨습니다. 도미티우스 집안, 메살라 집안, 아시니우스 집안, 키케로 집안 등 나라의 꽃이라 할 사람들도 모두 그분의 관용 덕에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레피두스만 해도 그분은 얼마나 오래 그가 제명대로 죽기를 기다려 주셨습니까! 여러 해 동안 그분은 레피두스가 군주의 표장을 그대로 지니는 것을 참아 주셨고, 대신관 자리도 그가 죽고 나서야 넘겨받으셨습니다6. 그 자리가 전리품이 아니라 명예로 불리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 관용이 그분을 안전과 안온함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관용 덕분에 그분은 로마 인민이 아직 굴복하지 않은 목덜미에 손을 얹으셨는데도 고마움과 호의를 받으셨습니다. 이 관용이 오늘날까지도 그분께, 살아 있는 군주들조차 좀처럼 누리지 못하는 명성을 안겨 드립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으로 믿는 것은 그러라는 명령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우구스투스께서 좋은 군주셨고 '아버지'라는 이름이 그분께 잘 어울렸다고 고백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군주에게는 흔히 불의보다 더 쓰라린 모욕마저 그분은 잔인하게 앙갚음하지 않으셨고, 자기를 헐뜯는 말에 웃어넘기셨습니다. 벌을 내리실 때는 그분 자신이 벌을 받는 듯 보였고, 따님과 간통한 죄로 단죄한 자들을 죽이기는커녕 추방하면서 더 안전하도록 통행증까지 내주셨습니다7.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기를 대신해 분노하고 남의 피로 자기 비위를 맞추려 들 사람이 많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목숨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 주는 것, 이것이 용서입니다.

11 이것은 아우구스투스께서 늙으셨을 때, 또는 이미 나이가 노년으로 기울었을 때의 일입니다. 젊을 때는 그분도 달아오르고 분노로 불타셨으며, 마지못해 뒤돌아보실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지나치게 무르익은 노년을 폐하의 젊은 시절과 겨루게 한다 해도, 누구도 감히 그분을 폐하의 온화함에 견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이 절도 있고 관용을 베푸셨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것은 악티움 바다를 로마인의 피로 물들인 뒤였고, 시칠리아에서 자기 함대와 남의 함대를 부순 뒤였고, 페루시아의 제단과 살생부를 거친 뒤였습니다8. 저는 지친 잔인함을 관용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폐하, 참된 관용은 폐하께서 보여 주시는 관용입니다. 포악함을 뉘우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은 관용, 얼룩 하나 없고 시민의 피를 한 번도 흘리지 않은 관용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권력 속에서 마음이 지키는 가장 참된 절제이고, 인류를 제 몸처럼 감싸 안는 사랑입니다. 어떤 욕망이나 경솔한 기질이나 앞선 군주들의 본보기에 물들어 시민들에게 얼마나 마음대로 해도 되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통치권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것입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나라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지켜 내셨습니다. 온 세상에서 사람의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고 폐하께서 담대하게 자랑하신 일은, 누구보다도 이른 나이에 칼을 손에 쥐셨기에 더 크고 더 놀랍습니다.

그러니 관용은 사람을 더 훌륭하게 할 뿐 아니라 더 안전하게도 해 줍니다. 관용은 통치의 꾸밈이자 가장 확실한 안전입니다. 왕들은 늙도록 다스리다 자식과 손자에게 왕국을 물려주었는데, 참주(tyrannus)의 권력은 저주받고 짧았던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참주와 왕은(겉으로 보이는 처지와 방종할 수 있는 힘은 같으니) 무엇이 다릅니까? 참주는 쾌락을 위해 포악하게 굴고, 왕은 까닭과 필요가 있을 때만 그런다는 것 말고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12 "그러면 어떤가? 왕들도 흔히 사람을 죽이지 않는가?" 그러나 왕은 나라의 이익이 그래야 한다고 설득할 때만 그럽니다. 참주는 포악함 자체를 좋아합니다. 참주가 왕과 다른 것은 이름이 아니라 행실입니다. 대(大)디오니시오스9는 마땅히 여러 왕보다 낫다고 할 수 있고, 적이 바닥나서야 죽이기를 멈춘 루키우스 술라를 참주라 부르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술라가 독재관 자리에서 내려와 토가 차림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다 해도, 어떤 참주가 그토록 게걸스럽게 사람의 피를 마셨습니까? 그는 로마 시민 칠천 명을 도륙하라고 명했고, 가까운 벨로나 신전에 앉아 있다가 칼 아래 신음하는 그 수천 명의 아우성이 들려와 원로원이 겁에 질리자 이렇게 말했습니다10. "의원 여러분, 하던 일을 합시다. 몇 안 되는 반역자들이 내 명령으로 죽고 있을 뿐이오."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술라에게는 그것이 몇 안 되는 수로 보였으니까요. 술라 이야기는 적에게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지, 특히 같은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시민들이 적의 이름으로 넘어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따져 볼 때 곧 다시 하겠습니다. 그동안은 하던 말을 이어 가겠습니다. 왕과 참주 사이에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은 관용입니다. 둘 다 무기로 단단히 둘러싸여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한쪽은 평화를 지키는 성벽으로 무기를 쓰고, 다른 쪽은 큰 공포로 큰 증오를 누르려고 무기를 쥐고는 자기 몸을 맡긴 바로 그 손들조차 마음 놓고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는 서로 어긋나는 것에 이끌려 서로 어긋나는 쪽으로 내몰립니다. 두려움을 사기 때문에 미움을 받으면서도, 미움을 받기 때문에 두려움을 사려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곤두박질치게 한 그 저주받을 시구를 입에 올립니다. "미워해도 좋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면."11 증오가 도를 넘어 자라면 얼마나 큰 광란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알맞은 두려움은 마음을 붙들어 두지만, 끊이지 않고 날카로우며 막다른 지경까지 몰아붙이는 두려움은 엎드려 있던 사람들을 무모함으로 일으켜 세우고 무슨 일이든 해 보게 부추깁니다. 짐승들도 깃털 단 줄로 에워싸 가두어 두면 그대로 있지만, 말 탄 사냥꾼이 뒤에서 창을 던지며 몰아붙이면 피해 달아나던 바로 그 줄을 뚫고 달아나려 하고 두려움의 줄을 짓밟아 넘을 것입니다. 막다른 필연이 짜내는 용기가 가장 사납습니다. 두려움은 얼마간 마음 놓을 여지를 남겨 두고, 위험보다 희망을 훨씬 더 많이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똑같이 두려워해야 할 때 사람들은 차라리 위험에 뛰어들고 제 목숨을 남의 것처럼 함부로 쓰고 싶어집니다.

13 온화하고 평온한 왕에게는 호위병들이 충실합니다. 왕이 그들을 모두의 안녕을 위해 쓰기 때문입니다. 병사는 자기가 나라의 안온함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기에 자랑스러워하며, 아버지를 지키는 사람처럼 어떤 수고든 기꺼이 견딥니다. 그러나 가혹하고 피에 굶주린 왕은 제 호위병들조차 버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문대나 죽이려고 마련한 쇠붙이처럼 고문 도구로 부리는 자들, 짐승에게 던지듯 사람을 던져 주는 자들에게서 선하고 충실한 마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왕은 어떤 피고보다도 비참하고 불안합니다. 자기 죄를 보고 앙갚음할 증인으로 사람과 신들을 두려워하고, 이제는 행실을 바꿀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잔인함의 여러 해악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 이것입니다. 끝까지 버텨야 하고, 더 나은 길로 돌아갈 길이 열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범죄는 범죄로 지켜야 하니까요. 이제 악할 수밖에 없게 된 사람보다 불행한 이가 누구겠습니까? 아, 가엾은 사람입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학살과 약탈로 권력을 휘두르고, 바깥일이든 집안일이든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만들고, 무기를 두려워하면서 무기로 달아나고, 벗들의 신의도 자식들의 효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을 남들이 가엾게 여기는 것은 죄가 될 테니까요.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과 저지를 일을 둘러보고 죄와 고문으로 가득 찬 제 양심을 열어 볼 때마다, 죽음을 자주 두려워하고 그보다 더 자주 바랍니다. 그를 섬기는 사람들보다 그 자신이 그를 더 미워합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마음에 두고, 어떤 것은 더, 어떤 것은 덜 보살피되 나라의 어느 부분도 제 몸의 일부처럼 기르는 사람, 더 온화한 쪽으로 기울어 벌을 내리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거친 약에 얼마나 마지못해 손을 대는지 드러내는 사람, 마음에 적의도 사나움도 없는 사람, 자기 명령이 시민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며 권력을 온화하고 이롭게 쓰는 사람, 자기 행운을 모두와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넉넉히 운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 말씨가 상냥하고 만나기 쉽고 다가가기 쉬우며 백성의 마음을 가장 잘 얻는 얼굴로 사랑받는 사람, 정당한 바람에는 기꺼이 응하고 부당한 바람에도 가혹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은 온 나라가 사랑하고 지키고 받듭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남몰래 하는 말과 드러내 놓고 하는 말이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식을 낳아 기르고 싶어 하고, 나라의 불행 때문에 스스로 택했던 자식 없는 삶은 끝이 납니다. 누구나 자식에게 이런 시대를 보여 주면 자식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군주는 자기가 베푼 은혜로 안전하니 호위병이 필요 없습니다. 무기는 꾸밈으로 지닐 뿐입니다.

14 그렇다면 군주의 의무(officium)는 무엇입니까? 좋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좋은 부모는 자식을 꾸짖을 때 어떤 때는 다정하게, 어떤 때는 엄하게 꾸짖고, 때로는 매를 들어 깨우치기도 합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가 첫 잘못에 아들의 상속권을 빼앗겠습니까? 크고 잦은 불의가 인내를 꺾어 버리기 전에는, 단죄하는 것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더 크기 전에는, 아버지는 결정을 적어 넣는 펜을 들지 않습니다. 먼저 흔들리고 이미 나쁜 쪽으로 기운 성품을 되돌리려고 여러 방도를 써 봅니다. 가망이 없다고 판명되고 나서야 마지막 수단을 씁니다. 약을 다 써 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형벌에 이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할 일을 군주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군주를 '나라의 아버지'라 부른 것은 헛된 아첨에 이끌려서가 아닙니다. 다른 별칭들은 영예로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군주들을 '위대한 자'라고, '운 좋은 자'라고, '존엄한 자'라고 불렀고, 야심 찬 위엄에 붙일 수 있는 칭호를 모조리 쌓아 올려 그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아버지'라 부른 것은 군주에게 아버지의 권한이 주어졌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권한은 자식을 돌보고 제 일을 자식 다음으로 미루는, 더없이 절제된 권한입니다. 아버지는 제 팔다리를 더디게 잘라 내야 하고, 잘라 낸 뒤에도 다시 붙이고 싶어 해야 하며, 잘라 내면서도 오래도록 망설이며 신음해야 합니다. 서둘러 단죄하는 사람은 기꺼이 단죄하는 사람과 가깝고, 지나치게 벌하는 사람은 부당하게 벌하는 사람과 가깝습니다.

15 우리 기억에 남은 일로, 로마 기사 트리콘이 제 아들을 채찍질해 죽이자 군중이 포룸에서 그를 철필로 찔렀습니다. 아버지들과 아들들이 함께 휘두르는 성난 손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께서 권위로 겨우 그를 빼내셨습니다. 타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꾀하다 들키자 사건을 심리한 뒤 아들을 단죄했지만,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았습니다. 추방으로, 그것도 마실리아로 보내는 편안한 추방으로 만족해 그 존속 살해범을 그곳에 두고, 아들이 아무 죄 없을 때 대 주던 만큼 해마다 생활비를 대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너그러움 덕분에, 더 나쁜 자들에게도 변호인이 모자라는 법이 없는 이 도시에서, 그 피고가 마땅히 단죄되었다는 데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워할 수조차 없던 아버지가 단죄할 수밖에 없었던 아들이니까요.

바로 이 일화로, 좋은 아버지에 견줄 만한 좋은 군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타리우스는 아들을 심리하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자문 회의에 모셨습니다. 황제께서는 남의 집 안채로 오셔서 곁에 앉아 남의 회의의 일원이 되셨을 뿐, "아니, 그 아이를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아버지의 심리가 아니라 황제의 심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건을 듣고 젊은이가 스스로를 변호한 말과 그를 고발하는 말을 모두 꼼꼼히 따져 본 뒤, 황제께서는 저마다 자기 의견을 글로 적어 내게 하셨습니다. 황제의 의견이 모두의 의견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서판을 열기 전에, 부자인 타리우스의 유산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누군가는 말할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단죄해 제 유산 욕심의 길을 트려 한다는 의심을 살까 봐 두려워했으니 소견이 좁았다."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누구든 심술궂은 소문에 맞서 선한 양심을 넉넉히 믿고 버텨야 하겠지만, 군주는 평판에도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황제께서는 유산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타리우스는 그날 상속인을 하나 더 잃었지만, 황제께서는 판결의 자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엄격함에 사심이 없음을 밝히신 뒤(군주라면 늘 마음 써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가 정하는 곳으로 아들을 멀리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황제께서는 자루도, 뱀도, 감옥도 판결하지 않으셨습니다12. 자기가 누구를 판결하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회의에 앉아 있는지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앳된 아들에게 가장 부드러운 벌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남에게 떠밀려 그 죄에 끌려들었고, 그 일에서 머뭇거렸으니 그것이 결백에 가장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로마와 아버지의 눈앞에서 떼어 놓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16 아, 아버지들이 자문 회의에 모실 만한 분이십니다! 아, 아버지들이 죄 없는 자식들과 나란히 공동 상속인으로 적어 넣을 만한 분이십니다! 이런 관용이 군주에게 어울립니다. 군주는 어디를 가든 모든 것을 더 온화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왕에게, 그가 죽어도 왕이 느끼지 못할 만큼 하찮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 제국의 한 부분입니다. 큰 통치를 위한 본보기를 작은 통치에서 찾아봅시다. 다스림에는 한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군주는 시민을, 아버지는 자식을, 스승은 배우는 이를, 천부장이나 백인대장은 병사를 다스립니다. 아주 사소한 까닭으로도 자식을 쉴 새 없이 때려 다잡는 아버지는 가장 나쁜 아버지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스승이 교양 학문을 가르칠 자격이 더 있습니까? 제자가 기억이 막히거나 글을 읽다가 눈이 굼뜨게 걸린다고 제자를 짓이기는 스승입니까, 아니면 타이르고 부끄러움을 일깨워 바로잡고 가르치기를 바라는 스승입니까? 포악한 천부장이나 백인대장을 세워 보십시오. 탈영병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래도 그 탈영병들은 용서받습니다. 말 못 하는 짐승을 다스릴 때보다 사람을 더 무겁고 거칠게 다스리는 것이 공정하겠습니까? 그런데 길들이는 데 능한 조련사는 말을 잦은 채찍질로 겁주지 않습니다. 쓰다듬는 손길로 달래 주지 않으면 말은 겁 많고 고집 센 말이 되고 말 테니까요. 사냥꾼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아지들에게 발자취를 따르도록 가르치는 사냥꾼도, 이미 훈련된 개들로 짐승을 몰아내거나 뒤쫓는 사냥꾼도, 개들을 자주 을러대지 않습니다(그러면 기세가 꺾이고, 타고난 바탕이 무엇이든 비굴한 겁에 질려 부서질 테니까요). 그렇다고 아무 데나 헤매고 쏘다니게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느릿느릿 일하는 짐 나르는 짐승들도 여기에 보태도 좋습니다. 그 짐승들은 업신여김과 고생을 겪으려고 태어났는데도, 지나치게 혹독하게 다루면 멍에를 뿌리치게 됩니다.

17 사람보다 까다로운 동물은 없고, 사람보다 더 큰 솜씨로 다루어야 할 동물도, 더 아껴야 할 동물도 없습니다. 짐 나르는 짐승과 개에게는 화풀이하기를 부끄러워하면서,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두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병을 고치지 병에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마음의 병입니다. 이 병에는 부드러운 약과, 환자에게 조금도 적의를 품지 않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고치기 싫어서 가망 없다고 하는 것은 나쁜 의사의 짓입니다. 모두의 안녕을 맡은 사람도 마음이 병든 이들을 두고 똑같이 해야 합니다. 희망을 서둘러 내던지거나 죽을 징후라고 선언하지 말고, 악덕과 씨름하고 버티며, 어떤 이에게는 그 병을 꾸짖고, 어떤 이는 부드러운 치료로 속여 넘겨 속이는 약으로 더 빨리 더 잘 낫게 해야 합니다. 군주는 목숨을 살리는 것뿐 아니라 흉터가 보기 흉하지 않게 남도록 마음 써야 합니다. 왕이 포악하게 벌을 내려서 얻는 영광은 없습니다(그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반대로 제 힘을 억누르고, 많은 사람을 남의 분노에서 건져 내고, 아무도 자기 분노에 바치지 않는다면 그보다 큰 영광은 없습니다.

18 노예를 절도 있게 다스리는 것은 칭찬받을 일입니다. 노예를 두고도 그가 얼마나 겪어도 벌받지 않는지가 아니라, 공정과 선의 본성이 얼마만큼 허락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본성은 포로와 돈 주고 산 노예마저 아끼라고 명합니다. 하물며 자유롭고 자유민으로 태어난 점잖은 사람들은 노예처럼 함부로 부리지 말고, 지위로는 앞서지만 예속이 아니라 보호를 맡은 사람들로 대하라고 명하는 것은 얼마나 더 정당하겠습니까. 노예도 조각상으로 달아나 몸을 피할 수 있습니다13. 노예에게는 무엇이든 해도 되지만, 살아 있는 것들 모두에게 공통된 법이 사람에게는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있습니다. 베디우스 폴리오14를 그의 노예들보다 더 미워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는 사람의 피로 곰치를 살찌웠고, 무엇이든 자기 비위를 거스른 노예들을 양어장, 아니 뱀 소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곳에 던지게 했습니다. 아, 천 번 죽어 마땅한 인간입니다! 자기가 먹을 곰치에게 노예를 먹으라고 던져 주었든, 그렇게 먹이려고 곰치를 길렀든 말입니다.

잔인한 주인이 온 도시에서 손가락질받고 미움과 혐오를 사듯이, 왕의 불의는 더 널리 퍼지고 그 오명과 증오는 대대로 전해집니다. 나라의 불행으로 태어난 자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얼마나 나았겠습니까!

19 다스리는 사람이 어떤 길로, 어떤 권리로 남들 위에 서게 되었든, 그에게 관용보다 더 어울리는 것을 생각해 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관용은 더 큰 권력에서 베풀어질수록 더 아름답고 더 장엄하다고 우리는 인정할 것입니다. 그 권력이 자연의 법에 맞추어진다면 해로울 까닭이 없습니다. 왕은 자연이 생각해 낸 것입니다. 다른 동물에게서도, 특히 벌에게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벌의 왕은 가장 넓은 방을 차지하는데, 그 방은 한가운데 가장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게다가 왕은 남의 일을 감독할 뿐 자기는 일하지 않습니다. 왕을 잃으면 벌 떼는 통째로 흩어지고, 벌들은 결코 둘 이상의 왕을 견디지 못해 싸워서 더 나은 왕을 가립니다. 또 왕은 생김새가 남달라, 크기로 보나 광채로 보나 다른 벌들과 다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점이 다릅니다. 벌들은 몸집에 비해 더없이 성마르고 싸움을 좋아해서 찌른 상처에 침을 남기지만, 왕에게는 침이 없습니다. 자연은 왕이 포악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비싼 값을 치를 앙갚음을 하기를 바라지 않아서, 왕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그 분노를 무장 해제된 채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왕들에게 더없이 큰 본보기입니다. 자연은 작은 것들로 솜씨를 닦고, 아주 작은 것 안에 엄청난 일의 가르침을 낳아 두는 버릇이 있으니까요. 하찮은 동물에게서 행실을 배우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해를 끼치는 힘이 큰 만큼 더 절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같은 법이 있어서, 분노가 그 무기와 함께 부러지고, 한 번보다 자주 해치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남의 힘을 빌려 증오를 풀지 못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광란이 제 힘으로만 제 뜻을 채워야 하고 죽음을 무릅써야만 힘을 쏟아 낼 수 있다면, 광란은 쉽게 지쳐 버릴 테니까요. 그러나 지금도 그런 사람이 가는 길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움을 사고자 한 만큼 두려워해야 하고, 모든 사람의 손을 지켜보아야 하며, 노림을 받지 않을 때에도 노림을 받는다고 여겨, 두려움에서 벗어난 순간이 한 순간도 없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서 근심 없이, 모두가 기뻐하는 가운데 권력을 이롭게 쓸 수 있는데도, 이런 삶을 견디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왕에게서 아무것도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왕이 안전하리라 여긴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온함은 안온함을 서로 주고받아야 얻습니다. 높이 솟은 성채를 짓거나, 오르기 가파른 언덕에 요새를 두르거나, 산허리를 깎아 내거나, 겹겹의 성벽과 탑으로 자기를 둘러칠 필요가 없습니다. 관용은 탁 트인 곳에서도 왕을 무사히 지켜 줄 것입니다. 무너뜨릴 수 없는 성벽은 단 하나, 시민들의 사랑입니다.

모두가 자기 장수를 빌어 주고,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기원을 소리 내어 바치는 가운데 사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건강이 조금만 흔들려도 사람들 가슴에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이 이는 것, 누구든 자기를 지켜 주는 그 사람의 안녕과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 분은 정녕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살아야 할 분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선함을 보여 주어 국가가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국가의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사람에게 위험을 꾸미겠습니까? 그 아래에서 정의와 평화와 정숙과 안온함과 품위가 꽃피고, 그 아래에서 부유한 나라가 온갖 좋은 것으로 넘쳐 나는 이 사람에게서, 할 수만 있다면 운마저 비켜 가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라는 불멸의 신들이 자기 모습을 보여 주신다면 우리가 우러러 받들며 바라볼 그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리는 이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신들의 본성을 따라 처신하며 은혜롭고 너그럽고 더 나은 쪽으로 힘을 쓰는 사람은 신들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바라고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지되 동시에 가장 선한 사람으로 여겨지도록 말입니다.

20 군주가 벌을 내리는 까닭은 흔히 두 가지입니다. 자기를 위해 앙갚음하거나, 남을 위해 앙갚음하는 것입니다. 먼저 군주 자신에게 닿는 쪽을 논하겠습니다. 앙갚음이 본보기를 위한 것일 때보다 제 아픔을 갚으려는 것일 때 절제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쉽게 믿지 말고, 진실을 캐내고, 결백한 쪽을 편들며, 재판에서는 위태로운 피고 못지않게 재판관도 시험대에 오른다는 것을 알라고 일깨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관용이 아니라 정의에 속한 일이니까요. 지금 우리가 군주에게 권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분명히 해를 입었더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안전하게 할 수 있다면 벌을 면해 주고, 그렇지 못하다면 누그러뜨리며, 남이 입은 불의보다 자기가 입은 불의에 훨씬 더 너그럽게 마음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남의 것으로 인심 쓰는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주는 만큼 자기 것을 덜어 내는 사람이 큰마음을 지닌 사람이듯이, 저는 남의 아픔에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 제 아픔에 찔려 들쑤셔지면서도 뛰쳐나가지 않는 사람을 관용 있는 사람이라 부르겠습니다. 가장 큰 권력을 쥐고서 불의를 참는 것이 큰마음이라는 것, 해를 입고도 앙갚음하지 않는 군주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말입니다.

21 앙갚음은 흔히 두 가지를 줍니다. 불의를 당한 사람에게 위안을 주거나, 앞날의 안온함을 줍니다. 군주의 운은 위안이 필요할 만큼 작지 않고, 그의 힘은 남의 불행으로 힘이 있다는 평판을 구해야 할 만큼 흐릿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랫사람에게 공격받고 해를 입었을 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때 대등했던 이들을 이제 자기 아래로 내려다본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앙갚음한 셈이니까요. 왕은 노예도, 뱀도, 화살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린 이는 언제나 자기가 살린 사람보다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목숨을 주고 빼앗을 힘을 쥔 사람은 신들이 준 이 크나큰 선물을 담대하게 써야 합니다. 특히 한때 자기와 같은 꼭대기에 섰던 이들을 두고는, 그들의 생사를 가를 권한을 얻은 것만으로 앙갚음을 다 채웠고, 참된 벌로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목숨을 빚진 사람은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데서 원수의 발치로 내동댕이쳐져 제 목숨과 왕국을 두고 남의 판결을 기다렸던 사람은 누구든 자기를 살려 준 사람의 영광을 위해 살고, 눈앞에서 치워졌을 때보다 살아남아서 그 사람의 이름에 더 많이 보탭니다. 그는 남의 덕을 보여 주는 끊이지 않는 구경거리이니까요. 개선 행렬에서였다면 금세 지나가 버렸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에게 왕국까지 안심하고 남겨 두고 그가 떨어진 자리에 다시 앉힐 수 있었다면, 패한 왕에게서 영광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은 데 만족한 사람의 칭송은 엄청나게 커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승리를 딛고 다시 개선하는 일이요, 진 자들에게서 이긴 자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증언하는 일입니다. 시민들, 그리고 이름 없고 비천한 이들은 그들을 짓밟아 봐야 별것 아닌 만큼 더 절도 있게 다루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꺼이 살려 주고, 어떤 이들에게는 앙갚음하는 것조차 하찮게 여기십시오. 작지만 짓밟는 사람을 더럽히는 벌레에게서 손을 거두듯 그들에게서 손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살려 주든 벌하든 온 나라의 입에 오르내릴 사람들을 두고는, 관용을 널리 알릴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22 이제 남이 입은 불의로 넘어갑시다. 그런 불의를 벌할 때 법은 세 가지를 좇았고, 군주도 그것을 좇아야 합니다. 벌받는 사람을 바로잡거나, 그를 벌해 다른 사람들을 더 낫게 하거나, 악한 자들을 없애 나머지가 더 근심 없이 살게 하는 것입니다. 벌받는 사람 자신은 가벼운 벌로 더 쉽게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아직 흠 없는 무언가가 남은 사람은 더 조심스럽게 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체면을 아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는 벌받을 자리가 남지 않은 것도 일종의 면죄입니다. 나라의 풍속은 벌을 아낄 때 더 잘 바로잡힙니다. 죄짓는 사람이 많으면 죄짓는 것이 버릇이 되고, 단죄가 무더기로 쏟아지면 낙인도 가벼워지며, 엄격함은 가장 큰 효험인 권위를 잦은 쓰임으로 잃어버립니다. 군주가 악덕을 참아 주되, 그것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큰 괴로움을 안고서야 벌하러 나서는 사람처럼 보인다면, 군주는 나라에 좋은 풍속을 세우고 악덕을 씻어 낼 것입니다. 다스리는 이의 관용 그 자체가 죄짓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듭니다. 온화한 사람이 정한 벌은 훨씬 무겁게 느껴집니다.

23 게다가 폐하께서도 보시겠지만, 자주 벌하는 죄일수록 자주 저질러집니다. 폐하의 아버님15께서는 다섯 해 동안, 우리가 전해 듣기로 지난 모든 세대에 자루에 꿰매 넣은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자루에 꿰매 넣으셨습니다. 그 죄에 법이 없던 동안에는 자식들이 그 극악한 죄를 감히 저지르는 일이 훨씬 적었습니다. 더없이 높은 뜻을 품고 세상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들16은 더없는 분별로, 그 죄를 믿을 수 없는 죄, 어떤 대담함도 넘어선 죄로 여겨 그냥 지나치는 쪽을 택했습니다. 벌하려다 그런 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느니 그편이 낫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존속 살해범은 법과 함께 생겨났고, 벌이 그들에게 그 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보다 자루를 더 자주 보게 된 뒤로, 자식의 도리는 가장 나쁜 처지에 놓였습니다. 사람이 드물게 벌받는 나라에서는 결백에 뜻이 모이고, 사람들은 결백을 나라의 보배처럼 아낍니다. 나라가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게 하십시오. 그러면 결백해질 것입니다. 모두가 지키는 검소한 법도에서 벗어나는 자들이 몇 안 된다는 것을 보면 나라는 그들에게 더 분노할 것입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악한 자가 얼마나 더 많은지를 나라에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합니다.

24 언젠가 원로원에서 노예를 자유민과 옷차림으로 구별하자는 의견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노예들이 우리 수를 세기 시작하면 얼마나 큰 위험이 닥칠지 분명해졌습니다.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때에도 똑같은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나라의 더 나쁜 쪽이 얼마나 더 무거운지 곧 드러날 것입니다. 숱한 장례가 의사에게 수치이듯, 숱한 처형은 군주에게 수치입니다. 느슨하게 다스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더 잘 복종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고집스러워 거스르는 쪽, 가파른 쪽으로 버팁니다. 끌려가기보다는 따라가기를 더 쉽게 합니다. 좋은 혈통의 고귀한 말이 부드러운 재갈로 더 잘 다루어지듯, 결백도 스스로 우러나 제 기세로 관용을 따르고, 나라는 관용을 제 것으로 지킬 만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이 길로 가면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25 잔인함은 조금도 인간다운 악이 아니고, 그토록 온화한 인간의 마음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피와 상처를 즐기고, 사람이기를 내던지고 숲속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짐승의 광포함입니다. 알렉산드로스여, 제발 말해 보시오. 리시마코스를 사자에게 던져 주는 것과 그대가 제 이로 직접 물어뜯는 것이 무엇이 다르오17? 그 아가리는 그대의 것이요, 그 사나움도 그대의 것이오. 아, 그대는 차라리 그대에게 발톱이 있기를, 사람을 삼킬 만한 그 아가리가 그대에게 있기를 얼마나 바랐겠소! 가까운 이들을 틀림없이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손이 누구를 살리기를, 뭇 민족에게 물릴 줄 모르는 재앙인 그 사나운 마음이 피와 살육 없이 배부르기를 우리는 그대에게 바라지 않소. 벗을 죽일 사형 집행인을 사람 가운데서 고르기만 해도 벌써 관용이라 불리니 말이오. 포악함을 무엇보다 혐오해야 하는 까닭은 이것입니다. 포악함은 먼저 익숙한 한계를, 다음에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새로운 형벌을 찾아내며, 고통을 갖가지로 바꾸고 늘일 도구를 궁리하려고 재주를 끌어들이고, 사람들의 불행을 즐깁니다. 잔인함이 쾌락으로 바뀌어 이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즐거워질 때, 그 끔찍한 마음의 병은 마지막 광기에 이릅니다. 그런 사람의 등 뒤를 머지않아 혐오와 증오와 독과 칼이 뒤쫓습니다. 그는 자기가 많은 사람에게 위험인 만큼 많은 위험의 표적이 되고, 때로는 사사로운 음모에, 때로는 온 나라의 봉기에 에워싸입니다. 가볍고 사사로운 해악은 도시 전체를 움직이지 않지만, 널리 날뛰기 시작해 모두를 덮치는 것은 사방에서 찔립니다. 작은 뱀들은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가며, 나라가 나서서 잡으러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뱀이 보통 크기를 넘어 괴물로 자라나, 침으로 샘을 더럽히고, 숨을 내뿜으면 태워 버리며, 지나가는 곳마다 짓뭉갤 때에는 투석기로 공격합니다. 자잘한 악은 속여 넘기고 빠져나갈 수 있지만, 엄청난 악에는 모두가 맞서 나섭니다. 그처럼 앓는 사람 하나는 집안조차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잇따른 죽음으로 역병이 돈다는 것이 드러나면 온 나라가 아우성치며 달아나고, 신들에게까지 주먹을 휘두릅니다. 어느 한 지붕 아래 불길이 보이면 식구와 이웃들이 물을 끼얹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불이 벌써 많은 집을 삼켰다면 도시 한 구역을 허물어 덮어 끕니다.

26 보통 사람들의 잔인함에도 노예들의 손은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앙갚음했습니다. 참주들은 그 해악을 겪던 민족과 백성, 그 해악이 닥쳐오던 이들이 모두 나서서 뿌리째 없애려 했습니다. 때로는 그들 자신의 호위병들이 그들에게 맞서 들고일어나, 배신과 불경과 사나움, 그 밖에 그들에게서 배운 것을 모조리 그들에게 써먹었습니다. 악해지라고 가르친 사람에게서 누가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악은 오래 시중들지 않고, 명령받은 만큼만 죄짓지도 않습니다. 잔인함이 안전하다고 칩시다. 그 통치는 어떤 모습입니까? 함락된 도시의 모습, 온 나라가 두려움에 질린 끔찍한 얼굴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슬프고 떨리고 어지럽습니다. 쾌락마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해서도 혀를 조심스레 단속해야 하는 잔치에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고발과 위험의 빌미를 찾는 구경거리에도 마음 놓고 가지 못합니다. 큰돈과 왕의 재물을 들이고 이름난 배우들을 골라 마련한다 해도, 감옥 안에서 벌이는 놀이가 누구를 즐겁게 하겠습니까?

선한 신들이시여, 이 무슨 재앙입니까! 죽이고, 날뛰고, 쇠사슬 소리를 즐기고, 시민들의 목을 베고, 가는 곳마다 피를 쏟고, 제 얼굴만 보여도 사람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게 하다니! 사자와 곰이 다스리고, 뱀과 가장 해로운 짐승들에게 우리를 다스릴 권력이 주어진다면 삶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 짐승들은 이성이 없고 우리에게서 흉포하다는 죄명으로 단죄받지만, 제 동족은 해치지 않습니다. 짐승들 사이에서도 닮은 것끼리는 안전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의 광포함은 가까운 혈육조차 봐주지 않고, 남의 것과 제 것을 똑같이 다루며, 휘두를수록 더욱 사나워집니다. 그러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이는 데서 민족 전체를 멸하는 데로 번져 가고, 지붕에 불을 지르고 오래된 도시를 쟁기로 갈아엎는 것을 권력이라 여깁니다. 한두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는 것은 황제답지 않다고 믿고, 한꺼번에 가엾은 무리가 칼날 아래 서 있지 않으면 자기 잔인함이 졸병 신세로 강등되었다고 여깁니다.

많은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고, 죽음 그 자체에서 삶으로 불러들이고, 관용으로 시민관을 얻는 것, 그것이 행운입니다18. 시민을 구한 공으로 받는 그 관만큼 군주의 높은 자리에 걸맞고 아름다운 꾸밈은 없습니다. 진 적에게서 벗겨 낸 무기도, 야만인의 피로 물든 전차도,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도 그만 못합니다. 무리 지어, 나라 전체를 살리는 것, 이것이 신의 권능입니다. 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불과 붕괴의 권능입니다.

주

  1. 1. 원문이 의심스러운 곳. 저본의 manumissionis(풀어 줌)를 그대로 옮겼으나, 「길들임」으로 고쳐 읽거나 여러 낱말이 빠졌다고 보기도 한다. 이 세 부분 가운데 전하는 것은 제1권과 제2권 앞부분뿐이다.

  2. 2. 베르길리우스 『농경시』 4.212~213. 벌 떼와 그 왕을 노래한 대목이다.

  3. 3. 기원전 43년 아우구스투스(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레피두스와 삼두가 되어 정적들을 살생부에 올려 죽였다. 키케로도 이때 죽었다. 그 전해에는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4. 4.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폼페이우스의 외손자다. 세네카는 루키우스라 부르지만, 카시우스 디오는 그나이우스라 하고 이 일을 기원후 4년 로마에서 있었던 일로 적는다.

  5. 5. 모두 아우구스투스를 노린 음모에 연루된 사람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기원전 40년), 삼두 레피두스의 아들(기원전 30년), 무레나와 카이피오(기원전 23년 무렵), 에그나티우스 루푸스(기원전 19년).

  6. 6. 삼두의 한 사람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기원전 36년 권력을 잃었으나 기원전 12년 죽을 때까지 대신관 자리를 지켰고,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죽은 뒤에야 대신관이 되었다.

  7. 7.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는 기원전 2년 간통 혐의로 판다테리아섬에 추방되었다. 상대로 지목된 귀족들도 대개 추방되었으나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죽임을 당했다.

  8. 8.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기원전 36년 시칠리아 앞바다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꺾었다. 기원전 40년 페루시아를 함락한 뒤 항복한 자들을 신격 율리우스의 제단 앞에서 제물로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9. 9.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재위 기원전 405~기원전 367).

  10. 10. 기원전 82년 내전에서 이긴 술라는 벨로나 신전에서 원로원 회의를 여는 동안, 가까운 곳에 가두어 둔 항복한 포로 수천 명을 죽이게 했다.

  11. 11. 아키우스의 비극 『아트레우스』의 한 구절. 칼리굴라가 즐겨 입에 올렸다고 수에토니우스가 전한다.

  12. 12. 존속 살해범에게 내리던 벌. 죄인을 가죽 자루에 꿰매 넣어 물에 던졌다.

  13. 13. 노예는 황제의 조각상으로 달아나 주인의 학대를 호소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4. 14. 아우구스투스의 벗인 부호. 수정 잔을 깬 노예를 곰치 연못에 던지려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제지당했다(「분노에 관하여」 제3권 40장).

  15. 15.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그의 양자였다.

  16. 16. 존속 살해에 따로 형벌을 두지 않았던 옛 입법자들. 아테네의 솔론이 그랬고(키케로 『로스키우스 변호』 70), 로마의 로물루스도 그랬다고 전한다(플루타르코스 『로물루스전』 22).

  17. 17. 알렉산드로스가 측근 리시마코스를 사자에게 던졌다는 이야기. 「분노에 관하여」 제3권 17장에도 나온다.

  18. 18. 시민관. 싸움터에서 시민의 목숨을 구한 사람에게 주던 떡갈나무 관.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들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