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관하여 제2권
1 노바투스1 형님, 첫째 권은 다루기 수월한 주제였습니다. 악덕을 따라 비탈을 내려가는 길은 쉽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섬세한 문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분노가 판단에서 시작하는지 충동에서 시작하는지, 곧 분노가 저절로 일어나는지, 아니면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다른 대부분의 것처럼 우리가 알아차린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따져 보려는 것입니다. 이 논의가 이렇게 낮은 데까지 내려가야 저 높은 데로도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도 온몸을 받치고 목숨을 지탱하지만 보기에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은 뼈와 힘줄과 관절이 먼저 자리를 잡고, 다음에 얼굴과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들이 자리를 잡으며, 이 모든 것이 갖추어진 뒤에야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빛깔이 이미 다 지어진 몸 위에 마지막으로 입혀집니다.
불의를 당했다는 인상(species)이 눈앞에 나타나면 분노가 일어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따지려는 것은, 분노가 그 인상을 곧바로 뒤따라 마음이 거들지 않아도 뛰쳐나가는지, 아니면 마음이 동의(adsensus)해야 움직이는지입니다. 우리 생각은 이렇습니다. 분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감행하지 못하고, 마음이 승인해야만 움직입니다. 불의를 당했다는 인상을 받아들이고, 그 앙갚음을 바라고, 해를 입어서는 안 되었다는 생각과 앙갚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나로 잇는 일은 우리 뜻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충동(impetus)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충동은 단순하지만, 분노는 여러 단계가 얽힌 것입니다. 무언가를 알아차렸고, 분개했고, 단죄했고, 그래서 앙갚음합니다. 이 일들은 마음이 자기를 건드린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2 "이런 물음이 무슨 소용인가?" 하고 형님은 말씀하시겠지요. 분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분노가 우리 뜻을 거슬러 생겨난다면 결코 이성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으로 일어나지 않는 움직임(motus)은 모두 이길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찬물을 뒤집어쓰면 소름이 돋고, 어떤 것에 닿으면 움찔하며, 나쁜 소식을 들으면 머리털이 곤두서고, 상스러운 말을 들으면 얼굴이 붉어지며,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면 어지럼증이 납니다. 이런 것은 조금도 우리 힘이 미치지 않으니, 어떤 이성도 일어나지 말라고 설득하지 못합니다. 분노는 가르침으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 분노는 마음이 스스로 택하는 악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처한 어떤 조건 때문에 일어나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닥치는 일들과는 다릅니다. 불의를 당했다는 생각이 든 뒤 우리를 움직이는 마음의 저 첫 일격은 이런 일들 가운데 넣어야 합니다. 이 첫 일격은 무대의 구경거리를 볼 때나 옛일을 읽을 때도 찾아옵니다. 우리는 키케로를 추방하는 클로디우스와 키케로를 죽이는 안토니우스2에게 화가 난 듯할 때가 많습니다. 마리우스의 무력과 술라의 살생부3에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테오도토스와 아킬라스, 그리고 아이답지 않은 짓을 감행한 그 소년4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노래와 빠른 가락과 마르스의 나팔 소리가 우리를 부추길 때도 있습니다. 참혹한 그림이나, 더없이 정당한 처형이라도 그 처절한 광경은 마음을 흔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웃는 사람을 보면 따라 웃고, 슬퍼하는 무리를 보면 함께 슬퍼지며, 남의 싸움에도 피가 끓습니다. 이것은 분노가 아닙니다. 무대에서 배가 난파하는 장면을 보고 이마를 찌푸리는 것이 슬픔이 아니고, 칸나이 전투 뒤 한니발이 로마 성벽을 에워싸는 대목을 읽을 때 읽는 이의 마음을 스치는 것이 두려움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움직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일 뿐, 격정(affectus)이 아니라 격정에 앞서 몸을 푸는 시작일 뿐입니다. 이미 토가를 입고 평화롭게 사는 군인의 귀를 나팔 소리가 일깨우고, 무기 부딪는 소리가 군마의 귀를 쫑긋 세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악사 크세노판토스가 피리를 불자 알렉산드로스가 무기에 손을 뻗었다고 합니다.
3 우연히 마음을 떠미는 것들은 어느 것도 격정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은 마음이 하는 일이라기보다 마음이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격정이란 눈앞에 나타난 사물의 인상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상에 자기를 내맡기고 이 우연한 움직임을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창백해지는 얼굴, 흐르는 눈물, 음란한 체액이 솟는 것, 깊은 한숨, 갑자기 날카로워지는 눈빛 같은 것을 격정의 증거요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못 아는 것이고 이것이 몸의 떨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없이 용감한 사람도 무장을 하는 동안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일이 많고, 더없이 사나운 병사도 싸움 신호가 떨어지면 무릎이 조금 떨리며, 위대한 장군도 두 진영이 맞부딪치기 전에는 심장이 뛰고, 더없이 말 잘하는 웅변가도 연설을 준비하는 동안 손발 끝이 굳습니다. 분노는 움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뛰쳐나가야 합니다. 분노는 충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충동은 결코 정신의 동의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모르는 사이에 복수와 벌을 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앙갚음하려 했다가, 무언가 말리는 까닭이 생겨 곧바로 가라앉았다고 해 봅시다. 저는 이것을 분노라 부르지 않고, 이성에 복종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부릅니다. 이성을 뛰어넘어 이성을 휩쓸고 가는 것이 분노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당했다는 인상이 일으킨 마음의 저 첫 흔들림은 그 인상 자체가 분노가 아니듯 분노가 아닙니다. 그 뒤를 잇는 충동, 곧 불의를 당했다는 인상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승인한 충동이 분노이며, 뜻을 세우고 판단을 내려 앙갚음으로 나아가는 마음의 들끓음입니다. 두려움에는 달아남이, 분노에는 덤벼듦이 따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의 동의 없이 무언가를 좇거나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살펴보십시오.
4 격정이 어떻게 시작하고 자라고 날뛰게 되는지 아시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움직임은 뜻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자면 격정을 준비하는 것이요 일종의 위협입니다. 둘째 움직임은 뜻이 따르되 고집스럽지는 않은 것으로, "나는 해를 입었으니 앙갚음해야 마땅하다"거나 "이자는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움직임입니다. 셋째 움직임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것으로, 마땅하다면 앙갚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앙갚음하겠다는 것이며, 이성을 꺾어 버린 움직임입니다. 마음의 저 첫 일격은 이성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몸에 일어나는 일들도 그렇습니다. 남이 하품하면 우리도 하품이 나오고, 누가 갑자기 손가락을 들이대면 눈이 감깁니다. 이런 것은 이성이 이길 수 없고, 습관과 끊임없는 주의가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을 뿐입니다. 판단에서 생겨나는 저 둘째 움직임은 판단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5 이제 또 하나 따져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포악하게 굴며 사람의 피를 즐기는 자들, 이를테면 아폴로도로스나 팔라리스5 같은 자들이 자기에게 불의를 저지른 적도 없고 저질렀다고 스스로 여기지도 않는 사람들을 죽일 때, 그들이 화가 나서 그러는지 하는 물음입니다. 이것은 분노가 아니라 사나움(feritas)입니다. 사나움은 불의를 당했기 때문에 해치는 것이 아니라, 해칠 수만 있다면 불의를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매질과 살을 찢는 고문을 복수가 아니라 쾌락으로 찾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 악의 뿌리는 분노에 있습니다. 분노는 잦은 연습과 물리도록 실컷 누린 끝에 관용(clementia)을 잊고 사람 사이의 모든 맹약을 마음에서 내던지고 나면, 마침내 잔인함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웃고 즐거워하며 큰 쾌락을 누리고, 화난 사람의 얼굴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느긋하게 포악을 부립니다. 한니발은 사람의 피가 가득 찬 도랑을 보고 "오, 아름다운 광경이구나!"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피가 강이나 호수를 가득 채웠다면 그에게 얼마나 더 아름다워 보였겠습니까! 피 속에서 태어나 갓난아이 때부터 살육 곁에서 자란 그대가 이 광경에 무엇보다 사로잡힌들 무엇이 놀랍겠소? 운이 스무 해 동안 그대의 잔인함을 순순히 따르며 가는 곳마다 그대 눈에 반가운 광경을 펼쳐 줄 것이오. 그대는 그 광경을 트라시메누스호 둘레에서도, 칸나이 둘레에서도, 마지막에는 그대의 카르타고 둘레에서도 보게 될 것이오. 얼마 전 신격 아우구스투스 때 아시아 총독이던 볼레수스6는 하루에 삼백 명을 도끼로 처형하고는, 무슨 장하고 볼만한 일이라도 해낸 듯 거만한 얼굴로 시체들 사이를 거닐며 그리스 말로 외쳤습니다. "참으로 왕다운 일이구나!" 이자가 왕이었다면 무슨 짓을 했겠습니까? 이것은 분노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고칠 수 없는 악이었습니다.
6 "덕은 훌륭한 일에 호의를 보이듯 추한 일에는 화를 내야 한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덕이 비천하면서 동시에 위대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덕을 높이 세우면서 동시에 끌어내리려는 사람은 바로 그런 말을 하는 셈입니다. 옳은 일을 두고 느끼는 즐거움은 환하고 장하지만, 남의 잘못을 두고 내는 화는 천하고 속 좁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덕은 악덕을 누르다가 악덕을 흉내 내는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덕은 분노 자체를 꾸짖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분노는 자기가 화를 내는 그 잘못보다 조금도 낫지 않고, 오히려 더 나쁠 때가 많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덕의 본디 모습이요 본성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슬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덕의 위엄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마름(iracundia)에는 슬픔이 따라다니고, 모든 분노는 뉘우친 뒤에든 앙갚음에 실패한 뒤에든 슬픔으로 되돌아옵니다. 또 잘못을 보고 화내는 것이 현자의 일이라면, 현자는 큰 잘못에 더 크게, 그리고 자주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면 현자는 화난 사람일 뿐 아니라 성마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큰 분노도 잦은 분노도 현자의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없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무엇 때문에 현자를 이 격정에서 아주 풀어 주지 않겠습니까? 저마다의 행실에 따라 화를 내야 한다면 한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르지 않은 잘못에 고르게 화를 낸다면 불공정할 것이고, 죄가 분노를 부를 때마다 불끈 타오른다면 더없이 성마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7 게다가 현자의 마음이 남의 악에 매달려 흔들린다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저 소크라테스가 집을 나설 때의 얼굴 그대로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된단 말입니까? 그런데 현자가 추한 짓을 보고 화를 내고, 죄를 보고 들끓고 슬퍼해야 한다면, 현자보다 고달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평생이 성마름과 비탄 속에 지나갈 것입니다. 비난받을 일을 보지 않는 순간이 한순간이라도 있겠습니까? 집을 나설 때마다 그는 죄인과 탐욕스러운 자와 낭비하는 자와 뻔뻔한 자, 그리고 바로 그 덕분에 운이 트인 자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야 할 것입니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 분개할 거리를 찾아낼 것입니다. 까닭이 요구할 때마다 자기에게서 분노를 짜내야 한다면 그는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날이 밝자마자 포룸으로 서둘러 가는 저 수천 명을 보십시오. 그들의 소송은 얼마나 추하고, 그들의 변호인은 얼마나 더 추합니까! 누구는 아버지의 판단을 고발하는데, 그런 판단을 받을 짓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누구는 어머니와 법정에서 맞서고, 누구는 자기가 더 뻔히 저지른 죄를 고발하러 옵니다. 재판관으로는 제가 저지른 짓을 단죄할 자가 뽑히고, 둘러선 청중은 변호인의 좋은 목소리에 홀려 나쁜 송사 편에 섭니다.
8 하나하나 늘어놓아 무엇 하겠습니까?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포룸과, 온갖 군중이 몰려들어 꽉 찬 투표장과, 인민이 거의 다 모여드는 저 전차 경기장을 보시거든, 거기에는 사람 수만큼 악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토가를 입은 저 사람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하찮은 이득을 위해 서로를 파멸로 끌고 가고, 남이 해를 입어야만 이익을 봅니다. 운 좋은 사람은 미워하고 불운한 사람은 업신여기며, 윗사람은 버거워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버거운 짐이 됩니다. 저마다 다른 욕망에 쫓기고, 하찮은 쾌락과 노획물을 얻으려고 모든 것이 망가지기를 바랍니다. 함께 살면서 서로 싸우는 검투사 양성소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은 짐승들의 모임입니다. 다만 짐승은 저희끼리는 온순해서 같은 무리를 물지 않지만, 이자들은 서로 물어뜯으며 배를 채웁니다. 이자들이 말 못 하는 짐승과 다른 점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짐승은 먹여 주는 사람에게 길들지만, 이자들의 광포함은 저를 먹여 기른 사람마저 뜯어먹습니다.
9 현자가 한번 화내기 시작하면 결코 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죄와 악덕으로 가득합니다. 형벌로 고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사람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악의 경주를 벌이며,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은 날마다 커지는데 부끄러움은 날마다 줄어듭니다. 더 낫고 더 공정한 것을 돌아보는 마음이 쫓겨나자 방종은 어디든 내키는 대로 들이닥치고, 이제 죄는 숨어서 저지르는 일이 아닙니다. 죄는 눈앞을 버젓이 지나가고, 악은 공공연히 풀려나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힘을 얻어, 결백한 사람은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습니다. 법을 어긴 것이 한두 사람이나 몇 사람뿐이겠습니까? 사방에서 마치 신호라도 떨어진 듯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뒤섞어 버렸습니다.
"손님은 주인에게서 안전하지 않고,
장인은 사위에게서 안전하지 않으며, 형제의 우애도 드물다.
남편은 아내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노리고,
무서운 계모들은 시퍼런 투구꽃 독을 섞으며,
아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몇 해나 더 살지 캐묻는다."7
그런데 이것이 죄의 얼마만 한 부분이겠습니까? 시인은 한 겨레에서 갈라져 서로 맞선 진영,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편에 바친 군인 서약, 시민의 손으로 조국에 지른 불, 살생부에 오른 사람들의 숨은 곳을 뒤지려고 떼 지어 맴도는 적의 기병대, 독을 탄 샘물, 사람 손으로 퍼뜨린 역병, 포위된 부모를 둘러 판 참호, 가득 찬 감옥, 도시를 통째로 태우는 불길, 끔찍한 폭정, 왕위를 노리고 나라를 망치려는 은밀한 음모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억누를 수 있는 동안에는 죄이지만 영광으로 여겨지는 일들, 곧 납치와 겁탈, 그리고 입마저 정욕을 비켜 가지 못한 짓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민족들이 공공연히 저지르는 거짓 맹세와 깨진 조약, 저항하지 못해 힘센 자의 노획물로 끌려간 모든 것, 그리고 포룸 세 곳으로도 모자랄 만큼 많은 사기와 도둑질과 속임수와 빚 떼어먹기를 더해 보십시오. 죄의 몹쓸 정도가 요구하는 만큼 현자가 화를 내기를 바라신다면, 현자는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미쳐야 할 것입니다.
10 차라리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헤매는 잘못에는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어둠 속에서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화를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에게 화를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아이들이 마땅히 할 일은 거들떠보지 않고 놀이와 또래의 시시한 장난에 눈을 판다고 화를 낸다면 어떻겠습니까? 병들고 늙고 지친 사람들에게 화를 내려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죽어야 하는 존재가 겪는 여러 불편 가운데 이것도 있습니다. 정신이 흐릿하다는 것, 헤맬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헤매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면 모두를 용서해야 하고, 인류에게 용서(venia)를 베풀어야 합니다. 젊은이와 늙은이가 잘못한다고 화를 낸다면 갓난아이에게도 화를 내십시오. 그들도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아직 사물을 분별할 줄 모르는 나이의 아이들에게 누가 화를 냅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아이라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정당한 변명거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조건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몸의 병 못지않게 마음의 병에도 시달리는 동물이고, 둔하거나 굼뜨지는 않지만 제 날카로움을 잘못 쓰며, 서로에게 악덕의 본보기가 됩니다. 앞서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두가 다니는 큰길에서 헤맨 것이니, 어찌 변명거리가 없겠습니까? 장군의 엄격함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칼을 뽑지만, 온 군대가 탈영했을 때는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자의 분노를 거두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못하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현자는 모두의 악덕에 화를 내는 것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위험한지 압니다.
헤라클레이토스8는 밖에 나가 제 둘레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잘못 살고, 아니 잘못 죽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울었고, 즐겁고 운 좋게 자기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겼습니다. 온화한 마음이었지만 너무 여렸고, 그 자신도 울어 주어야 할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반대로 데모크리토스는 사람들 앞에서 웃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진지하게 하는 일 가운데 그에게 진지해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분노가 들어설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웃어넘기든지 울어 주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현자는 잘못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도 현자로 태어나지 않고 현자가 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어느 시대에나 현자가 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자는 인간 삶의 조건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정신이 성한 사람은 자연에 화를 내지 않습니다. 숲속 덤불에 과일이 열리지 않는다고 놀라워하려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가시덤불과 찔레에 쓸 만한 열매가 가득 열리지 않는다고 놀란다면 어떻겠습니까? 자연이 감싸 주는 결함에는 아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자는 평온하고, 헤매는 이들에게 너그러우며, 잘못하는 이들의 적이 아니라 그들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이런 마음으로 집을 나섭니다. "오늘 나는 술에 빠진 사람을 많이 만날 것이다. 정욕에 빠진 사람, 은혜를 모르는 사람, 탐욕스러운 사람, 야심의 광기에 쫓기는 사람을 많이 만날 것이다." 현자는 이 모든 것을 의사가 제 환자를 보듯 너그럽게 바라볼 것입니다. 이음매가 사방에서 벌어져 배에 물이 잔뜩 스며들 때, 배 주인이 선원들과 배에게 화를 냅니까? 오히려 달려가 어떤 물은 막고 어떤 물은 퍼내며, 눈에 보이는 구멍은 틀어막고, 숨어서 몰래 배 밑바닥으로 물을 들이는 구멍에는 쉬지 않고 일하며 맞섭니다. 퍼낸 만큼 다시 차오른다고 해서 일을 멈추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새끼를 치는 악에 맞서려면 끈질긴 도움이 필요합니다. 악이 그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분노는 쓸모가 있다. 업신여김을 피하게 해 주고 악한 자들을 겁주기 때문이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첫째, 분노가 위협하는 만큼 힘이 있다면 무섭다는 바로 그 까닭으로 미움을 받는데, 두려움을 사는 것은 업신여김을 받는 것보다 더 위험합니다. 반대로 분노에 힘이 없다면 더욱 업신여김을 받고 비웃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헛되이 소란을 피우는 성마름보다 김빠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음으로, 어떤 것이 더 무섭다고 해서 더 나은 것은 아닙니다. 현자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짐승의 무기가 그렇듯 두려움을 사는 것은 현자의 무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열병과 통풍과 악성 종기도 두려움을 사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것들에 좋은 점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오히려 그것들은 모두 업신여김을 받고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겨지며, 바로 그런 것이기에 두려움을 삽니다. 분노도 그렇습니다. 분노는 그 자체로 흉하고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못 되지만, 흉한 탈이 아이들을 겁주듯 많은 사람을 겁줍니다. 게다가 두려움은 늘 두려움을 일으킨 자에게 되돌아오고, 남에게 두려움을 사면서 자기는 마음 편한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내전이 한창일 때 극장에서 울려 퍼지자 마치 온 인민의 심정을 대신 외친 목소리처럼 모든 사람을 사로잡은 라베리우스의 저 대사가 떠오르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자는 많은 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9
자연은 남이 두려워해서 커진 것은 무엇이든 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정해 놓았습니다. 사자의 가슴은 아주 작은 소리에도 얼마나 겁에 질립니까! 더없이 사나운 짐승도 그림자와 소리와 낯선 냄새에 놀라 날뜁니다. 겁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스스로도 떱니다. 그러니 현자라면 누구도 두려움을 사기를 바랄 까닭이 없고, 분노가 무서움을 자아낸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고 여길 까닭도 없습니다. 독이나 해로운 뼈나 물린 상처처럼 더없이 하찮은 것도 두려움을 사기 때문입니다. 깃털을 매단 줄 하나가 엄청난 짐승 떼를 가두어 덫으로 몰아넣고, 사냥꾼들이 바로 그 격정의 이름을 따서 그 줄을 「공포(formido)」라고 부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헛된 것에게는 헛된 것이 무서운 법입니다. 마차가 움직이고 바퀴가 도는 모습에 사자가 우리로 쫓겨 들어가고, 코끼리는 돼지 울음소리에 겁을 먹습니다. 그러니 분노는 아이들이 그림자를 무서워하듯, 짐승이 붉은 깃털을 무서워하듯 두려움을 살 뿐입니다. 분노 자체에는 단단하거나 굳센 것이 하나도 없고, 다만 가벼운 마음을 흔들 뿐입니다.
12 "분노를 없애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둘 다 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첫째, 겨울이라도 춥지 않을 수 있고, 여름 몇 달이라도 덥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머무는 곳 덕분에 궂은 날씨를 피하거나, 몸이 단련되어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 말을 뒤집어 보십시오. 성마름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마음에서 덕(virtus)을 없애야 합니다. 악덕은 덕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니, 병들었으면서 동시에 건강할 수 없듯이 누구도 화난 사람이면서 동시에 선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서 분노를 모조리 없앨 수는 없다. 사람의 본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이 이겨 내지 못할 만큼, 끊임없는 연습으로 익숙하게 만들지 못할 만큼 어렵고 험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사납고 제멋대로인 격정이라도 훈련으로 길들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스스로에게 명령한 것이면 무엇이든 이루어 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웃지 않는 데 성공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어떤 사람들은 성애를, 어떤 사람들은 마실 것 일체를 제 몸에 금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짧은 잠에 만족하며 지칠 줄 모르는 깨어 있음을 늘려 갔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가는 줄 위를, 그것도 비탈지게 매단 줄을 거슬러 달리는 법을 익혔고, 사람의 힘으로는 겨우 견딜까 말까 한 엄청난 짐을 지는 법을 익혔으며, 끝없이 깊은 바다로 잠겨 들어 한 번도 숨을 쉬지 않고 물속에서 버티는 법을 익혔습니다. 끈기가 온갖 장애를 넘어서서, 정신이 스스로 견디기로 마음먹은 일 가운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음을 보여 준 일이 그 밖에도 천 가지나 됩니다. 제가 방금 말한 사람들은 그토록 끈질긴 노력의 대가를 받지 못했거나, 받아도 그만한 값어치가 없었습니다. 팽팽한 줄 위를 걷는 법을 익힌 사람이, 엄청난 짐 밑에 목을 들이민 사람이, 잠에 눈을 내주지 않은 사람이, 바다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간 사람이 무슨 대단한 것을 얻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의 수고는 대단치 않은 품삯을 받고 일을 끝까지 해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마음의 흔들림 없는 평정(tranquillitas)이라는 그토록 큰 상이 기다리는 우리가 인내를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가장 큰 악인 분노를 피하고, 그와 함께 광포함과 포악함과 잔인함과 광란, 분노를 따라다니는 다른 격정들까지 피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입니까!
13 분노가 쓸모 있다거나 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우리 자신을 변호해 줄 말을 찾고 방종에 핑계를 댈 까닭은 없습니다. 도대체 변호인이 없었던 악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앓는 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고 우리를 바르게 낳은 자연 자신이 우리가 고쳐지기를 바라기만 하면 우리를 도우니, 분노는 잘라 낼 수 없다고 말씀하실 까닭도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이 생각한 것처럼 덕에 이르는 길이 가파르고 험한 것도 아닙니다. 평탄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헛된 일을 권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삶(vita beata)에 이르는 길은 쉽습니다. 좋은 징조 아래, 신들의 도움을 받아 들어서기만 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들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마음의 고요보다 한가로운 것이 무엇이며, 분노보다 고된 것이 무엇입니까? 관용보다 느긋한 것이 무엇이며, 잔인함보다 바쁜 것이 무엇입니까? 정숙은 여유롭고, 정욕은 더없이 분주합니다. 요컨대 모든 덕은 지키기 쉽고, 악덕은 큰 비용을 들여야 가꿀 수 있습니다. 분노는 물리쳐야 합니다. 분노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이것을 인정합니다. 분노는 통째로 내보내야 합니다. 분노는 아무 쓸모도 없을 것입니다. 분노 없이도 죄는 더 쉽고 더 바르게 없앨 수 있고, 악한 자들은 벌을 받아 더 나은 쪽으로 이끌릴 것입니다. 현자는 해야 할 일을 모두 어떤 나쁜 것의 시중도 받지 않고 해낼 것이며, 한도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섞어 넣지 않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성마름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듣는 이들의 굼뜬 마음을 일깨워야 할 때는 이따금 성난 척할 수는 있습니다. 출발이 굼뜬 말을 박차와 횃불을 들이대 깨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성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따금 두려움을 안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보다 조금도 더 쓸모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가? 분노를 부추기는 일이 생기지 않는가?" 바로 그때야말로 분노에 맞서 손을 들어 막아야 합니다. 마음을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자기에게서 가장 하찮은 부분인 몸에 매달리는 사람들이지만, 때리는 상대의 힘이 다 빠지도록 주먹과 고통을 견디며, 분노가 부추길 때가 아니라 기회가 올 때 칩니다. 체육 경기의 가장 뛰어난 스승이던 피로스는 자기가 가르치는 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늘 일렀다고 합니다. 분노는 기술을 흐트러뜨리고, 어떻게 해칠지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참으라고 권하고 분노는 앙갚음하라고 권할 때가 많고, 처음의 불행으로 끝낼 수 있었던 우리가 더 큰 불행으로 굴러떨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 한마디의 모욕(contumelia)을 담담하게 견디지 못해 추방당했습니다. 가벼운 불의를 잠자코 견디려 하지 않던 사람들이 가장 무거운 불행에 짓눌렸고, 더없이 넉넉한 자유에서 조금 덜어 내는 것에 분개하던 사람들이 제 목에 노예의 멍에를 끌어다 씌웠습니다.
15 "분노에 무언가 고결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싶다면,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인처럼 가장 성마른 민족들이 자유로운 민족이라는 것을 보라."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본디 굳세고 단단한 기질은 훈련으로 누그러지기 전에는 분노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들은 더 나은 기질에서만 자라납니다. 땅이 아무리 버려져 있어도 기름지면 억센 나무를 키우고, 비옥한 땅의 숲이 높이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디 굳센 기질은 성마름을 낳고, 불같고 뜨거운 기질은 가늘고 하찮은 것을 하나도 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술 없이 오직 자연의 혜택만으로 솟아나는 모든 것이 그렇듯 그 기운은 덜 다듬어져 있고, 서둘러 길들이지 않으면 용기에 걸맞던 것이 대담함과 무모함에 길들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온순한 마음에는 연민과 사랑과 수줍음 같은 더 부드러운 악덕이 따라붙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좋은 바탕을 그 사람의 결점으로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본성의 표시라고 해서 악덕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다음으로, 사나워서 자유로운 이 모든 민족은 사자나 늑대처럼 남을 섬기지 못하는 만큼 다스리지도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사람다운 기질의 힘이 아니라 사납고 다룰 수 없는 기질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다스림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통치권은 대개 날씨가 온화한 곳에 사는 민족들 손에 있었습니다. 추운 북쪽으로 기운 곳에 사는 이들은 시인의 말처럼 기질이 "길들지 않았고"
"제 하늘을 꼭 닮았다."10
16 "가장 고결하다고 여겨지는 짐승은 분노가 많은 짐승이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이성 대신 충동을 지닌 것들을 사람의 본보기로 끌어오는 사람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충동 대신 이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짐승들에게도 같은 것이 다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사자에게는 성마름이, 사슴에게는 겁이, 매에게는 덮치는 기세가, 비둘기에게는 달아남이 도움이 됩니다. 더구나 가장 좋은 짐승이 가장 성마르다는 말부터가 참이 아니지 않습니까? 약탈로 먹고사는 들짐승이라면 성날수록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멍에를 메는 소와 고삐를 따르는 말의 참을성을 칭찬하겠습니다. 모든 생명 가운데 사람만이 신을 알아보는 것은 사람만이 신을 본받게 하려는 것인데, 우주와 신을 두고 무엇 때문에 사람을 그토록 불행한 본보기들에게로 돌려보내십니까? "성마른 사람이 가장 순박하다고들 한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속이 검고 교활한 자들과 견주니 순박해 보이는 것이고, 속이 다 드러나 있으니 순박해 보일 뿐입니다. 저라면 그들을 순박하다 하지 않고 조심성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 방탕한 자, 낭비꾼, 그리고 영리하지 못한 모든 악덕에 이 이름을 붙입니다.
17 "웅변가는 화가 났을 때 더 잘할 때가 있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아니, 화난 척할 때 그렇습니다. 배우들도 대사를 읊을 때 화가 나서가 아니라 화난 사람을 잘 연기해서 관객을 움직입니다. 그러니 재판관 앞에서든 민회에서든, 남의 마음을 우리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우리는 남에게 분노나 두려움이나 연민을 불어넣으려고 몸소 그런 척할 것입니다. 참된 격정이 이루지 못했을 일을 격정의 흉내가 이루어 낸 적도 많습니다.
"분노가 없는 마음은 무기력하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분노보다 더 힘센 것이 그 마음에 없다면 맞는 말입니다. 강도가 되어서도 먹잇감이 되어서도 안 되고, 연민에 빠진 사람이 되어서도 잔인한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니, 앞의 마음은 너무 무르고 뒤의 마음은 너무 모질기 때문입니다. 현자는 절제된 사람이어야 하고, 일을 굳세게 해내야 할 때는 분노가 아니라 힘을 써야 합니다.
18 분노를 두고 따질 것은 다 다루었으니, 이제 분노를 고치는 약으로 넘어갑시다. 제 생각에 약은 두 가지입니다. 분노에 빠지지 않는 것, 그리고 분노 속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몸을 돌볼 때 건강을 지키는 법과 건강을 되찾는 법이 따로 있듯이, 분노도 물리치는 법과 다스리는 법이 따로 있어야 하고, 분노를 피하려면 삶 전체에 걸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교육과 그 뒤의 시기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육에는 가장 큰 정성이 필요하고, 그 정성은 가장 큰 보람을 안겨 줄 것입니다. 아직 여린 마음은 바로잡기 쉽지만, 우리와 함께 자란 악덕은 잘라 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9 뜨거운 마음의 본성이 성마름에 가장 잘 빠집니다. 원소는 불, 물, 공기, 흙 넷이고, 그에 맞는 성질도 뜨거움, 차가움, 마름, 젖음 넷입니다. 장소와 동물과 몸과 성품이 저마다 다른 것은 원소들이 섞인 비율 때문이고, 어느 원소의 힘이 더 넘치느냐에 따라 기질도 그쪽으로 더 기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지방을 습하다, 건조하다, 덥다, 춥다고 부릅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도 같습니다. 저마다 습한 것과 뜨거운 것을 얼마나 품고 있느냐가 중요하고, 어느 원소의 몫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성품이 정해집니다. 뜨거운 마음의 본성은 성마른 사람을 만듭니다. 불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끈질기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것이 섞이면 겁 많은 사람이 됩니다. 추위는 굼뜨고 움츠러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토아학파 가운데 어떤 이들은 분노가 심장 둘레에서 피가 끓어올라 가슴에서 일어난다고 봅니다. 하필 가슴을 분노의 자리로 정한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온몸에서 가슴이 가장 뜨겁기 때문입니다. 습한 것이 더 많은 사람은 분노가 서서히 자랍니다. 열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움직여야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와 여자의 분노는 무겁기보다 날카롭고, 시작할 때는 가볍습니다. 메마른 나이에는 분노가 거세고 억세지만, 더 자라지 않고 크게 불어나지도 않습니다. 기울어 가는 열을 추위가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까다롭고 투덜거립니다. 병자와 회복기의 환자, 그리고 피로하거나 피를 많이 흘려 열이 바닥난 사람들도 그렇고, 목마름과 굶주림에 여윈 사람, 핏기 없는 몸에 영양이 모자라 기운이 빠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주는 분노에 불을 붙입니다. 열을 돋우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본성에 따라 어떤 이는 거나하게 취했을 때, 어떤 이는 살짝 취했을 때 끓어오릅니다. 금발에 붉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가장 성마른 것도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낼 때 띠는 빛깔을 본디 지니고 있으니, 피가 잘 움직이고 들끓기 때문입니다.
20 그런데 본성이 어떤 사람들을 분노로 기울게 하듯이, 본성과 같은 힘을 내는 까닭도 많이 생깁니다. 어떤 이는 병이나 몸의 상처 때문에, 어떤 이는 고된 일이나 끝없이 이어지는 밤샘, 근심 어린 밤, 그리움과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몸이나 마음을 해친 것은 무엇이든 병든 정신을 불평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시작이요 까닭일 뿐입니다. 가장 큰 힘을 쓰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이 무거우면 악덕을 키웁니다. 본성을 바꾸기는 어렵고, 태어날 때 한번 섞인 원소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 두면 쓸모가 있습니다. 뜨거운 기질의 사람에게서는 포도주를 거두어야 합니다. 플라톤도 아이들에게 포도주를 주지 말라고 하며, 불로 불을 돋우지 말라고 합니다11. 음식을 가득 먹여서도 안 됩니다. 몸이 부풀면 마음도 몸과 함께 부어오를 것입니다. 지치지 않을 만큼 일을 시켜서, 열이 바닥나지 않고 줄어들기만 하게 하고, 지나친 끓어오름이 거품처럼 걷히게 해야 합니다. 놀이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맞은 즐거움은 마음을 풀어 주고 고르게 해 줍니다. 더 습하고 더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들에게는 분노의 위험이 없지만, 더 굼뜬 악덕, 곧 겁과 까다로움과 절망과 의심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기질은 부드럽게 달래고 따뜻하게 보살피며 즐거움으로 이끌어 내야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분노에 맞서는 약을, 어떤 이에게는 슬픔에 맞서는 약을 써야 하고, 이 둘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정반대의 약으로 다스려야 하니, 우리는 언제나 더 커진 쪽에 맞서야 합니다.
21 거듭 말하지만, 아이들을 처음부터 건전하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끄는 일은 어렵습니다. 아이들 안에서 분노를 키우지도, 타고난 바탕을 무디게 하지도 않도록 애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북돋아야 할 것과 눌러야 할 것이 비슷한 것을 먹고 자라고, 비슷한 것은 주의 깊은 사람마저 쉽게 속이기 때문입니다. 기세(spiritus)는 풀어 주면 자라고 억누르면 쪼그라듭니다. 칭찬받고 스스로에게 좋은 기대를 품게 되면 일어서지만, 바로 그것이 오만과 성마름도 낳습니다. 그러니 아이는 이 둘 사이에서, 때로는 고삐를 쓰고 때로는 박차를 쓰며 이끌어야 합니다. 아이가 비굴하거나 노예 같은 일은 하나도 겪지 않게 하고, 애원해야 할 일이 결코 없게 하며, 애원해서 득을 보는 일도 없게 하십시오. 차라리 아이 자신의 까닭과 지난 행실과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을 보아 들어주십시오. 또래와 겨룰 때는 지게 두지도 화를 내게 두지도 말고, 늘 겨루는 상대와 친하게 지내도록 애써서, 겨룰 때 해치려 하지 않고 이기려 하는 데 익숙해지게 합시다. 이기거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할 때마다 기를 펴게 하되 우쭐대게 두지는 맙시다. 기쁨 뒤에는 들뜸이, 들뜸 뒤에는 부풀어 오름과 지나친 자부심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숨 돌릴 틈은 주되 게으름과 빈둥거림으로 풀어지게 하지는 않고 사치와 맞닿지 않게 멀리 떼어 놓을 것이니, 무르고 응석을 받아 주는 교육만큼 사람을 성마르게 만드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은 응석을 받아 줄수록, 고아는 제멋대로 하게 둘수록 마음이 더 망가집니다. 아무것도 거절당해 본 적 없는 아이, 늘 애태우는 어머니가 눈물을 닦아 준 아이, 돌보는 노예를 두고 투정할 때마다 편을 들어 준 아이는 언짢은 일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처지가 클수록 분노도 커지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부자와 귀족과 관리들에게서 특히 그것이 드러납니다. 마음속에 있던 가볍고 헛된 것이 순풍을 타고 높이 들릴 때 말입니다. 행운은 성마름을 키웁니다. 아첨꾼 무리가 교만한 귀를 에워쌀 때 그렇습니다. "저자가 감히 나리께 말대꾸를 합니까? 나리께서는 나리의 지위만큼 자신을 높이 헤아리지 않으십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단단히 자리 잡은 건전한 정신도 이런 말들에는 좀처럼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린 시절은 아첨에서 멀리 떼어 놓아야 합니다. 아이는 참된 말을 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두려워하고, 늘 공경하며, 어른이 오면 일어서야 합니다. 성마름으로는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하게 하십시오. 울 때 거절한 것은 잠잠해졌을 때 내어 주십시오. 부모의 재산은 눈으로 보게 하되 쓰게 하지는 마십시오. 잘못한 일은 나무라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차분한 스승과 돌보는 노예를 붙여 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여린 것은 무엇이든 가까이 있는 것에 들러붙어 그것을 닮아 자랍니다. 젊은이들의 성품은 곧 유모와 돌보는 노예의 성품을 그대로 옮겨 보여 줍니다. 플라톤 밑에서 자란 한 아이가 부모에게 돌아가 아버지가 고함치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플라톤 선생님 댁에서는 이런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플라톤보다 아버지를 더 빨리 닮았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먹을 것은 소박하고 옷은 값비싸지 않으며, 차림새는 또래와 같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여럿과 대등하게 키운 아이는 누가 자기와 견주어져도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식들에게 해당하는 일이고, 우리 자신의 경우 태어난 처지와 받은 교육은 이미 지나간 일이어서, 이제는 잘못을 저지를 여지도 가르침을 받을 여지도 없습니다. 그 뒤의 일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 원인과 싸워야 하는데, 성마름의 원인은 불의를 당했다는 생각이니 그런 생각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뻔하고 분명해 보이는 일에도 곧바로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인데도 참의 모습을 띤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시간을 두어야 합니다. 세월이 진실을 드러냅니다. 헐뜯는 자들에게 쉽게 귀를 열지 맙시다. 우리는 듣기 싫은 말일수록 기꺼이 믿고 판단하기도 전에 화를 내니, 사람의 본성에 있는 이 악덕을 알고 경계합시다. 게다가 우리는 헐뜯는 말뿐 아니라 의심에도 떠밀려, 남의 얼굴빛이나 웃음을 나쁘게 해석하고 죄 없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리에 없는 사람을 위해 우리 자신을 상대로 변론해야 하고, 분노는 미결 상태로 붙들어 두어야 합니다. 미룬 벌은 언제든 내릴 수 있지만, 내린 벌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23 저 참주 살해자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을 마치지 못하고 붙잡혀 히피아스12에게 공범을 대라고 고문을 받자, 둘러선 참주의 벗들, 참주의 안위를 누구보다 아끼는 줄 아는 이들의 이름을 댔습니다. 히피아스가 이름이 불린 자들을 하나씩 죽이라고 명한 뒤 아직 남은 자가 있느냐고 묻자, 그가 말했습니다. "그대뿐이오. 그대를 아끼는 사람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소." 분노 때문에 참주는 참주 살해자에게 제 손을 빌려주고, 제 칼로 제 호위를 베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얼마나 더 담대했습니까! 그는 어머니의 편지에서 의사 필리포스13의 독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읽고도, 겁내지 않고 건네받은 약을 마셨습니다. 그는 자기 벗을 두고 자기가 내린 판단을 더 믿었습니다. 그는 결백한 벗을 둘 자격이 있었고, 벗을 결백하게 만들 자격도 있었습니다. 제가 알렉산드로스의 이 일을 더욱 칭찬하는 것은 그만큼 분노에 휘둘린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들에게서 절도가 드물수록 더 칭찬해야 합니다. 내전에서 이기고 그 승리에 더없는 관용을 베푼 저 카이사르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중립이었거나 반대편에 섰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14에게 보낸 편지 상자를 손에 넣자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절도 있게 화를 냈지만, 아예 화낼 수 없는 쪽을 택했습니다.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것이 가장 고마운 용서라고 생각했습니다.
24 남의 말을 쉽게 믿는 것이 가장 큰 화를 부릅니다. 아예 듣지 말아야 할 때도 많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의심하느니 속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짐작은 마음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둘 다 사람을 가장 잘 속이는 자극입니다. "저 사람은 내게 인사를 퉁명스럽게 했고, 저 사람은 내 입맞춤을 제대로 받지 않았고, 저 사람은 내가 꺼낸 이야기를 금방 끊었고, 저 사람은 나를 저녁 식사에 부르지 않았고, 저 사람은 얼굴을 돌리는 것 같았다." 의심에는 늘 그럴듯한 근거가 따라붙습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함과 너그러운 눈으로 일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눈앞에 들이닥쳐 분명해진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믿지 맙시다. 우리 의심이 헛된 것으로 드러날 때마다 쉽게 믿은 자신을 나무랍시다. 이렇게 꾸짖다 보면 쉽게 믿지 않는 습관이 생길 것입니다.
25 여기서 또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에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노예 아이가 굼뜨다, 마실 물이 미지근하다, 침상이 흐트러졌다, 식탁을 아무렇게나 차렸다, 이런 일에 들끓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가벼운 바람에도 움츠러드는 사람은 병들고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고, 흰옷에 눈이 부신 사람은 눈병이 난 사람이며, 남이 일하는 것을 보고 옆구리가 결리는 사람은 사치에 늘어진 사람입니다. 시바리스 사람 민디리데스15는 누가 땅을 파며 괭이를 높이 쳐드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지친다고 투덜거리며 제 앞에서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장미 꽃잎이 겹쳐진 자리에 누웠더니 몸이 언짢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쾌락이 마음과 몸을 함께 망쳐 놓으면 견딜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일이 고되어서가 아니라 견디는 사람이 물러서입니다. 누가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거나, 파리를 제대로 쫓지 못하거나, 개가 앞을 얼쩡거리거나, 부주의한 노예의 손에서 열쇠가 미끄러져 떨어졌다고 해서 미쳐 날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의자를 끄는 삐걱 소리에도 귀가 거슬리는 사람이 나랏일을 하며 듣는 욕설과 민회나 원로원에서 쏟아지는 비방을 담담하게 견디겠습니까? 눈을 녹여 술을 차게 하는 일을 잘못했다고 노예 아이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굶주림과 여름 원정길의 목마름을 견디겠습니까? 절제할 줄도 참을 줄도 모르는 사치만큼 성마름을 키우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거칠게 다루어, 무거운 일격이 아니면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6 우리는 우리에게 불의를 저지를 수조차 없는 것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앞의 것 가운데 어떤 것은 감각도 없으니, 글씨가 너무 잘다고 몇 번이나 내던지고 오자가 많다고 찢어 버린 책이 그렇고, 마음에 안 든다고 찢은 옷이 그렇습니다. 우리 분노를 받을 까닭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 것들에게 화를 내다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물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우리 비위를 거스른 것이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첫째, 우리는 그것을 가리기도 전에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다음으로, 그 장인들도 아마 정당한 변명을 내놓을 것입니다. 누구는 그보다 잘 만들 수 없었던 것이고, 남을 모욕하려고 일부러 덜 배운 것도 아닙니다. 누구는 남의 비위를 거스르려고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사람에게 쌓인 울화를 물건에 쏟아붓는 것보다 더 미친 짓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생명 없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이 미친 짓이듯, 뜻을 세울 수 없어 우리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못하는 말 못 하는 짐승에게 화를 내는 것도 미친 짓입니다. 의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불의가 아닙니다. 그러니 짐승은 쇠나 돌처럼 우리를 해칠 수는 있어도 불의를 저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같은 말이 어떤 기수에게는 순순히 따르고 자기에게는 고집을 부리면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어떤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 더 잘 따르는 것이 길들이고 다루는 솜씨 때문이 아니라 판단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것에 화를 내는 것이 어리석듯, 아이들과 아이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분별을 지닌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도 어리석습니다. 공정한 재판관 앞에서는 이런 잘못에서 모두 분별없음이 결백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27 해칠 수 없고 이롭고 살리는 힘밖에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불멸의 신들이 그렇습니다. 신들은 해치려 하지도 않고 해칠 수도 없습니다. 신들의 본성은 온화하고 평온해서, 남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일과도 자기가 불의를 당하는 일과도 똑같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치고 진실을 모르는 자들은, 우리를 해치고 돕는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를 겨냥하지 않는데도, 바다가 사나운 것, 비가 지나치게 오는 것, 겨울이 끈질긴 것을 신들 탓으로 돌립니다. 우주가 겨울과 여름을 되풀이하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들에게는 저마다의 법칙이 있고, 신의 일은 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토록 큰 것들이 우리 때문에 움직인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높이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에게 불의를 저지르려고 일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이 우리를 살리려고 일어납니다. 앞에서 해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해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해치려 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좋은 관리와 부모와 스승과 재판관이 있으니, 그들의 꾸짖음은 수술칼이나 단식처럼, 괴롭지만 이롭게 될 다른 처방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벌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겪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을 했는지도 떠올리고, 우리 삶을 심리하는 배심원 자리에 우리 자신을 앉혀 봅시다. 우리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려고만 한다면, 우리에게 매길 벌을 더 무겁게 매길 것입니다.
28 모든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재판관이 되고 싶다면, 먼저 우리 가운데 허물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깁시다. 가장 큰 분개는 바로 여기서 생겨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훈계나 처벌을 받으면 분개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잘못을 저지릅니다. 못된 짓에 오만과 고집까지 보태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모든 법 앞에 결백하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법에 비추어 선하다는 것은 얼마나 좁은 결백입니까! 의무의 범위는 법의 잣대보다 얼마나 더 넓습니까! 효심과 인정과 너그러움과 정의와 신의가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많으며, 그것은 모두 나라의 법전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장 좁은 결백의 기준조차 지키지 못합니다. 어떤 일은 저질렀고, 어떤 일은 꾀했고, 어떤 일은 바랐고, 어떤 일은 부추겼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백할 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잘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너그러워지고, 꾸짖는 사람들의 말을 믿읍시다. 적어도 선한 사람들에게는 화내지 맙시다. 선한 사람에게도 화를 낸다면 누구에겐들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신들에게는 더더구나 화내지 맙시다. 우리가 겪는 불편은 무엇이든 신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죽어야 하는 존재의 법칙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과 고통이 덮친다." 썩어 가는 집을 제비 뽑아 받은 이상, 무언가는 치러야 합니다. 누가 험담을 했다는 말이 들려오거든, 자기가 먼저 그러지 않았는지, 자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입에 올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듭 말하지만 이렇게 생각합시다. 어떤 이들은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되갚는 것이고, 어떤 이들은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이들은 억지로, 어떤 이들은 모르고 그런 것입니다. 알고 일부러 하는 사람들조차 우리에게 불의를 저질러 그 불의 자체를 노리는 것은 아닙니다. 재치를 부리는 재미에 미끄러졌거나, 우리를 해치려고가 아니라 우리를 밀어내지 않고는 제 목적을 이룰 수 없어서 무언가를 했을 것입니다. 아첨도 비위를 맞추다가 비위를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자주 억울한 의심을 받았는지, 운이 자기의 친절에 얼마나 자주 불의의 탈을 씌웠는지, 미워하다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는 사람은 곧바로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속으로 "나도 이런 짓을 저질렀다." 하고 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공정한 재판관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남의 아내라면 누구든 탐내고 남의 아내라는 것만으로 사랑할 까닭이 넉넉하다고 여기는 자가 제 아내는 남이 쳐다보는 것도 싫어합니다. 신의를 가장 엄하게 따지는 자가 배신자이고, 거짓말을 뒤쫓는 자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이며, 무고를 일삼는 자가 자기에게 소송이 걸리는 것을 가장 못 견딥니다. 제 정절은 아끼지 않은 자가 어린 노예들의 정절이 위협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남의 악덕은 눈앞에 두고, 제 악덕은 등 뒤에 둡니다. 그래서 아들보다 더 못된 아버지가 아들이 이른 시간부터 벌이는 술잔치를 꾸짖고, 제 사치는 무엇 하나 마다하지 않은 자가 남의 사치는 하나도 용서하지 않으며, 참주가 살인자에게 화를 내고, 신전 도둑이 도둑질을 벌합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잘못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어본다면 더 절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도 그렇게 헤매지 않았는가? 그런 것을 단죄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로운가?"
29 분노를 고치는 가장 큰 약은 미루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분노에게 이것을 요구하십시오.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분노는 처음 덤벼드는 기세가 거세지만, 기다리면 그칠 것입니다. 분노를 한꺼번에 다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 조금씩 뜯어내다 보면 전부 이길 것입니다. 우리 비위를 거스르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은 남이 전해 주고, 어떤 것은 우리가 직접 듣거나 봅니다. 전해 들은 일은 쉽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이 남을 속이려고, 또 많은 사람이 자기가 속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며, 어떤 자는 남을 헐뜯어 환심을 사려 하고 불의가 저질러진 것에 마음 아파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불의를 지어냅니다. 어떤 자는 심술궂어서 굳게 맺어진 우정을 갈라놓으려 합니다. 어떤 자는 의심이 많은 데다 구경거리를 즐기려 해서, 자기가 맞붙여 놓은 사람들을 멀리 안전한 곳에서 지켜봅니다. 아주 작은 액수를 두고 재판을 하신다 해도, 증인 없이는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맹세하지 않은 증인의 말은 효력이 없을 것이며, 양쪽 모두에게 변론할 기회와 시간을 주고, 한 번만 듣고 말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은 여러 번 손에 들어올수록 더 밝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벗을 당장 들은 말만으로 단죄하시겠습니까?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물어보기도 전에, 그가 자기를 고발한 사람도 죄목도 알 수 있기도 전에 화를 내시겠습니까? 벌써, 정말 벌써 양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으셨습니까? 바로 그 일을 일러 준 사람도, 증명해야 한다면 말을 그칠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끌어낼 생각은 마시오. 끌려 나가면 나는 부인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그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그는 부추기면서 동시에 자기는 다툼과 싸움에서 빠져나갑니다. 몰래가 아니면 말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몰래 믿고 드러내 놓고 화내는 것보다 더 불공정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30 어떤 일은 우리가 직접 목격합니다. 그럴 때는 그 일을 한 사람의 본성과 의도를 따져 봅시다. 아이입니까? 나이를 보아 용서합시다. 아이는 자기가 잘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입니까? 그동안 베푼 은혜가 커서 불의를 저지를 권리마저 있거나, 어쩌면 우리 비위를 거스르는 바로 그 일이 그의 은혜일지도 모릅니다. 여자입니까? 그저 헤매는 것입니다. 명령을 받았습니까? 불공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필연에 성을 내겠습니까? 해를 입은 사람입니까? 자기가 먼저 한 짓을 당하는 것은 불의가 아닙니다. 재판관입니까? 자기 판단보다 그의 판결을 더 믿으십시오. 왕입니까? 죄 있는 자를 벌한다면 정의에 굽히고, 죄 없는 자를 벌한다면 운에 굽히십시오. 말 못 하는 짐승입니까, 아니면 짐승과 다름없는 자입니까? 화를 낸다면 그것을 흉내 내는 셈입니다. 병이나 재앙입니까? 견디는 사람은 더 가볍게 넘어갈 것입니다. 신입니까? 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신이 남에게 화를 내 달라고 비는 것만큼이나 헛수고입니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까? 믿지 마십시오. 악한 사람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그는 자기에게 갚아야 할 벌을 다른 사람에게 치를 것이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 벌을 치렀습니다.
31 앞서 말했듯이 성마름을 부추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의를 당했다고 여겨질 때인데, 이것은 충분히 말했습니다. 둘째는 부당하게 당했다고 여겨질 때인데, 이제 이것을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은 당해서는 안 되었다는 까닭으로, 어떤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까닭으로 부당하다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뜻밖의 일을 억울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바라고 기대한 것과 어긋나게 일어난 일이 가장 마음을 흔들고, 집안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도 언짢아하고, 벗에게서는 소홀함도 불의라고 부르는 것도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원수들이 저지르는 불의에는 왜 마음이 흔들리는가?"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그런 불의를 예상하지 못했거나, 적어도 그만큼 클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자기 사랑이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는 원수에게조차 다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누구나 속에 왕의 마음을 품고 있어서, 자기는 제멋대로 해도 되기를 바라면서 남이 자기에게 그러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성마르게 만드는 것은 무지 아니면 오만입니다. 악한 자들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이 무엇이 놀랍습니까? 원수가 해치고, 벗이 언짢게 하고, 아들이 미끄러지고, 노예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무엇이 새롭습니까? 파비우스16는 장군에게 가장 부끄러운 변명이 "그럴 줄 몰랐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람에게 가장 부끄러운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미리 생각하고 기다리십시오. 좋은 성품에도 무언가 거친 것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음흉한 마음도, 은혜를 모르는 마음도, 탐욕스러운 마음도, 불경한 마음도 낳습니다. 한 사람의 성품을 판단할 때는 사람들 전체의 성품을 생각하십시오. 가장 기쁠 때 가장 두려워하십시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일 때도 해로운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거슬리는 일이 언제든 생길 것이라고 여기십시오. 키잡이는 아무리 마음을 놓아도 돛을 활짝 다 펴는 법이 없고, 언제든 거둘 수 있도록 밧줄을 갖추어 둡니다.
무엇보다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해치려는 힘은 추하고 저주스러우며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은혜를 입으면 사나운 것들도 길이 듭니다. 멍에에 목을 숙인 코끼리, 아이들과 여자들이 등에 올라 뛰놀아도 탈이 없는 황소, 술잔 사이와 품속을 해 없이 기어 다니는 뱀, 집 안에서 다루는 사람에게 순하게 입을 내맡기는 곰과 사자, 주인에게 아양 떠는 짐승을 보십시오. 짐승과 성품을 맞바꾼 것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조국을 해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러니 시민을 해치는 것도 죄입니다. 시민은 조국의 일부이고, 전체가 존엄하다면 그 부분들도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해치는 것도 죄입니다. 사람은 더 큰 도시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손이 발을, 눈이 손을 해치려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몸의 모든 지체가 서로 한마음인 것은 지체 하나하나를 지키는 것이 전체에 이롭기 때문이듯, 사람도 서로를 아낄 것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도록 태어났고, 사회는 그 부분들을 지키고 아끼지 않으면 온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사나 물뱀처럼 물거나 쏘아서 해를 끼치는 것들도, 앞으로 길들이거나 우리와 남에게 위험하지 않게 만들 수만 있다면 때려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도, 그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하지 않도록 해를 가할 것이며, 벌은 결코 지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 올 일을 바라볼 것입니다. 벌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뚤어지고 해로운 기질을 지닌 사람을 모두 벌해야 한다면, 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32 "그러나 분노에는 무언가 쾌락이 있다. 고통을 되갚는 것은 달콤하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은혜는 은혜로 갚는 것이 훌륭하지만, 불의를 불의로 갚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에서는 지는 것이 부끄럽고, 불의에서는 이기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복수는 사람답지 않은 말인데도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고통을 되돌려주는 사람은 순서 말고는 처음 고통을 준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잘못을 저지를 뿐입니다. 마르쿠스 카토17가 목욕탕에 있을 때, 누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심코 때렸습니다. 알면서 누가 그에게 불의를 저질렀겠습니까? 뒤에 그 사람이 사과하자 카토는 말했습니다. "맞은 기억이 없소." 그는 복수하기보다 모른 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토록 무례하게 군 그 사람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하고 형님은 말씀하시겠지요. 아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카토를 알게 된 것입니다. 불의를 업신여기는 것은 큰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앙갚음할 가치도 없는 자로 보이는 것이 가장 모욕적인 복수입니다. 가벼운 불의를 앙갚음하다가 오히려 더 깊이 새긴 사람이 많지만, 작은 개들이 짖어 대는 소리를 큰 짐승처럼 태연히 듣고 넘기는 사람은 크고 고귀한 사람입니다.
33 "불의를 앙갚음하면 업신여김을 덜 받을 것이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치료하러 가듯 앙갚음하러 간다면, 분노 없이 가야 합니다. 앙갚음이 달콤해서가 아니라 쓸모 있어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앙갚음하기보다 모른 척하는 편이 나았던 적이 많습니다. 힘센 자들의 불의는 참을성 있게 견딜 뿐 아니라 밝은 얼굴로 견뎌야 합니다. 자기가 불의를 저질렀다고 믿으면 그들은 또 저지를 것입니다. 큰 운에 오만해진 자들에게는 이런 가장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자기가 해친 사람을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왕들을 섬기며 늙은 어느 사람의 말은 아주 유명합니다. 누가 그에게 궁정에서 가장 드문 것, 곧 늙도록 사는 일을 어떻게 이루었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불의를 당하고 감사하면서." 불의를 앙갚음하는 것이 이롭지 않을 뿐 아니라, 불의를 당했다고 인정하는 것조차 이롭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칼리굴라18는 명망 있는 로마 기사 파스토르의 아들이 멋을 부리고 머리를 너무 공들여 다듬은 것이 거슬려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빌자, 칼리굴라는 그 말에 처형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곧바로 아들을 끌어내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까지 모든 일을 몰인정하게 하지는 않으려고, 그날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파스토르는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 없는 얼굴로 왔습니다. 칼리굴라는 그에게 술 한 사발을 권하며 건배하고 감시꾼을 붙였습니다. 가엾은 아버지는 아들의 피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이 그 잔을 끝까지 비웠습니다. 칼리굴라가 향유와 화관을 보내며 그가 받는지 지켜보라고 명하자, 그는 받았습니다. 아들을 묻은 그날, 아니 묻지도 못한 그날, 통풍을 앓는 노인은 백 명의 손님 가운데 하나로 식탁에 기대 누워, 자식의 생일에도 차마 마시기 민망할 만큼의 술을 들이켰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어떤 몸짓으로도 슬픔이 터져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마치 아들의 목숨을 빌어 얻어 낸 사람처럼 식사를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물으십니까?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저 프리아모스19는 어떻습니까? 그도 분노를 감추고 왕의 무릎을 끌어안지 않았습니까? 아들의 피에 젖은 그 죽음의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향유도 화관도 없이 그렇게 했고, 더없이 사나운 적은 많은 위로의 말로 그에게 음식을 들라고 권했을 뿐, 머리 위에 감시꾼을 세워 놓고 커다란 잔을 비우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로마인 아버지가 자기 목숨이 두려워 그랬다면 저는 그를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를 누른 것은 남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잔치 자리를 떠나 아들의 뼈를 거두러 가도록 허락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친절하고 상냥한 그 젊은이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근심을 덜어 주겠다며 연거푸 건배를 들이밀어 노인을 괴롭혔습니다. 노인은 그와 반대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듯 즐거운 얼굴을 지어 보였습니다. 손님이 망나니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다른 아들마저 죽었을 것입니다.
34 그러므로 맞서야 할 상대가 대등하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분노를 삼가야 합니다. 대등한 사람과 다투는 것은 결과를 알 수 없고, 윗사람과 다투는 것은 미친 짓이며, 아랫사람과 다투는 것은 천한 짓입니다. 무는 자를 되무는 것은 하찮고 비참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니, 쥐와 개미도 손을 대면 입을 돌려 대고, 약한 것들은 건드리기만 해도 해를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그 사람이 언젠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일을 생각해 보면 더 온화해질 것이고, 그 공로가 잘못을 갚아 줄 것입니다. 관용으로 얻은 평판이 우리를 얼마나 돋보이게 할지, 용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쓸모 있는 벗으로 만들었는지도 떠올립시다. 원수와 적의 자식들에게 화내지 맙시다. 술라의 잔인함을 보여 주는 본보기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살생부에 오른 사람들의 자식들을 공직에서 몰아낸 일입니다. 누군가를 아버지가 받던 미움의 상속자로 만드는 것보다 불공정한 일은 없습니다. 용서하기 어려워질 때마다,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무자비한 것이 우리에게 이로울지 생각해 봅시다. 용서를 거절한 사람이 용서를 비는 일이 얼마나 잦습니까! 자기 발밑에서 쫓아낸 사람의 발밑에 엎드리는 일이 얼마나 잦습니까! 분노를 우정으로 바꾸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입니까? 로마 인민에게 한때 가장 끈질긴 적이었던 이들보다 더 충실한 동맹이 누구입니까? 앞날을 내다본 건전한 지혜가 정복당한 자들을 정복한 자들과 섞지 않았다면, 오늘날 제국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화를 내거든 반대로 은혜로 맞서십시오. 한쪽이 버려 두면 다툼은 곧 무너집니다. 양쪽이 맞서지 않으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쪽에서 분노가 겨루면 맞붙게 됩니다. 그때는 먼저 발을 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고, 이긴 사람이 진 사람입니다. 누가 때렸습니까? 물러나십시오. 맞받아치면 상대에게 더 자주 칠 기회와 핑계를 주게 되고, 나중에 떨어져 나오고 싶어도 떨어져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35 상대를 얼마나 세게 찔렀는지 손이 상처에 박혀 빠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찌르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분노가 바로 그런 무기입니다. 좀처럼 거둬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루기 쉬운 무기, 손에 맞고 잘 듣는 칼을 고릅니다. 그런데 이토록 무겁고 거추장스럽고 되돌릴 수 없는 마음의 충동을 피하지 않겠습니까? 명령을 받으면 걸음을 멈추고, 정해진 데를 넘어 내닫지 않으며, 방향을 틀고 달리다가도 걸음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빠르기라야 좋은 빠르기입니다. 우리 뜻을 거슬러 움직이는 힘줄은 병든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걸으려는데 뛰게 되는 사람은 늙었거나 몸이 약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움직임도 우리 뜻대로 가고 제멋대로 휩쓸려 가지 않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힘센 움직임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먼저 분노가 얼마나 흉한지를, 다음으로 얼마나 위험한지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어떤 격정도 분노만큼 얼굴을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분노는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도 흉하게 만들고, 더없이 평온한 얼굴도 험상궂게 바꿉니다. 화난 사람에게서는 모든 품위가 떠납니다. 옷을 법도대로 단정히 걸쳤어도 옷자락을 질질 끌고 몸가짐을 내팽개치며, 타고났든 다듬었든 머리털이 보기 좋게 누워 있어도 마음과 함께 곤두섭니다. 핏줄이 부풀고, 가슴은 가쁜 숨에 들썩이고, 미친 듯 터져 나오는 고함에 목이 부풀며, 팔다리가 떨리고, 손이 가만있지 못하고, 온몸이 출렁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이토록 흉하다면 그 안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가슴속의 얼굴은 얼마나 더 끔찍하고, 숨은 얼마나 더 거칠며, 기세는 얼마나 더 팽팽해서, 터져 나오지 않으면 제풀에 터져 버릴 지경이겠습니까! 피에 젖었거나 살육하러 가는 적이나 짐승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시인들이 지어낸 지옥의 괴물들, 뱀을 허리에 두르고 불길을 내뿜는 괴물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전쟁을 일으키고 민족들 사이에 불화를 퍼뜨리며 평화를 찢으려고 저승에서 나오는 가장 끔찍한 여신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분노를 그런 모습으로 그려 봅시다. 눈은 불꽃으로 이글거리고, 쉭쉭거림과 울부짖음과 신음과 쇳소리, 그보다 더 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면 그 소리까지 요란하게 내지르며, 두 손에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입니다. 제 몸을 가리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사납고 피투성이에 흉터투성이이고, 제가 휘두른 매질에 시퍼렇게 멍들고, 걸음은 미쳐 날뛰며, 짙은 어둠에 휩싸인 채 덤벼들고, 짓부수고, 내쫓고, 모든 이의 미움에 시달리면서도 남을 해칠 수 없으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땅과 바다와 하늘을 뒤엎고 싶어 하며, 남을 해치는 만큼 남에게 미움받는 모습입니다. 아니면 원하신다면 우리 시인들이 그린 모습 그대로 그려도 좋습니다.
"오른손에 피 묻은 채찍을 휘두르는 벨로나"20
아니면
"찢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기뻐 날뛰는 불화의 여신"
아니면 이 끔찍한 격정에 어울리는 더 끔찍한 얼굴을 지어낼 수 있다면 그 얼굴이라도 좋습니다.
36 섹스티우스21의 말처럼, 화가 났을 때 거울을 들여다본 것이 도움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바뀐 것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마치 현장으로 끌려온 것처럼 자기 모습을 보고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은 참된 흉함의 얼마나 작은 부분만 보여 주었겠습니까!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면, 마음이 어떤 물질을 통해 비쳐 보일 수 있다면, 시커멓고 얼룩덜룩하며 들끓고 일그러지고 부어오른 그 모습이 들여다보는 사람을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지금도 뼈와 살과 그 숱한 장애물을 뚫고 흘러나오는 마음의 흉함이 이토록 큰데, 벌거벗은 채 드러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거울을 보고 분노를 그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자기를 바꾸려고 거울 앞에 간 사람은 이미 바뀐 것입니다. 화난 사람들에게는 사납고 소름 끼치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없고, 그들은 실제로 그런 모습이기를, 또 그렇게 보이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분노가 그 자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끓어오르다가 핏줄이 터졌고, 힘에 부치게 내지른 고함에 피를 토했으며, 눈으로 너무 세게 몰려든 체액이 눈을 흐리게 했고, 병자는 병이 도졌습니다. 광기에 이르는 데 이보다 빠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분노의 광란을 그대로 이어 가, 내쫓은 정신을 다시는 되찾지 못했습니다. 아이아스22를 죽음으로 몬 것은 광란이었고, 광란으로 몬 것은 분노였습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죽음을, 자기에게 가난을, 집안에 파멸을 빌면서도 화가 나지 않았다고 우기니, 미친 사람이 미치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벗에게 원수가 되고,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 피해야 할 사람이 되며, 해를 끼칠 때 말고는 법을 잊고, 아주 작은 일에도 흔들리며, 말로도 친절로도 다가가기 어렵고, 모든 일을 힘으로 처리하며, 칼을 들고 싸울 각오도 칼 위에 엎어질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악, 모든 악덕을 넘어서는 악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다른 악덕은 조금씩 들어오지만, 분노의 힘은 한꺼번에 온통 들이닥칩니다. 분노는 결국 다른 모든 격정을 제 발아래 둡니다. 분노는 가장 뜨거운 사랑도 이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몸을 칼로 꿰뚫고, 자기가 죽인 이들의 품에 쓰러져 누웠습니다. 분노는 가장 모질고 가장 굽힐 줄 모르는 악인 탐욕도 짓밟아, 재산을 흩뿌리게 하고 집과 한데 모은 재물에 불을 지르게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야심가가 높이 치던 관직의 표장을 내던지고 주어진 관직을 물리친 적이 없습니까? 분노가 다스리지 못하는 격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
1. 세네카의 형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노바투스(뒷날의 갈리오).
2. 호민관 클로디우스는 기원전 58년 키케로를 추방했고,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3년 키케로를 살생부에 올려 죽였다.
3. 마리우스와 술라는 기원전 88~기원전 82년 내전에서 차례로 로마를 장악하고 정적들을 학살했다. 술라는 정적들의 이름을 살생부에 올려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다.
4.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신하 테오도토스, 장군 아킬라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에게 쫓겨 이집트로 피신한 폼페이우스를 죽였다. 왕은 그때 열서너 살이었다.
5. 아폴로도로스는 기원전 3세기 초 카산드레이아의 참주, 팔라리스는 기원전 6세기 시칠리아 아크라가스의 참주로, 둘 다 잔학하기로 이름났다. 팔라리스는 사람을 청동 황소 속에 넣어 구워 죽였다고 전한다.
6.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기원후 11년 무렵 아시아 총독을 지냈고, 학정으로 원로원의 단죄를 받았다.
7.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144~148. 사람이 타락한 철의 시대를 그린 대목이다.
8.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00 무렵)는 에페소스의 철학자, 이어 나오는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 무렵~기원전 370 무렵)는 아브데라의 철학자다. 둘은 뒷날 우는 철학자와 웃는 철학자로 짝지어 이야기되었다.
9. 로마 기사이자 소극(마임) 작가 데키무스 라베리우스(기원전 105 무렵~기원전 43)의 대사. 카이사르의 독재를 빗댄 말로 받아들여졌다.
10. 어느 시인의 구절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앞 문단의 「길들지 않았고」와 이어진다.
11. 플라톤 『법률』 2권 666a.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는 포도주를 맛보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12. 아테네의 참주(재위 기원전 527~기원전 510). 전승에 따르면 이 참주 살해자는 기원전 514년 히피아스의 아우를 죽인 아리스토게이톤이다.
13. 아카르나니아 출신의 의사. 다른 전승에서는 경고 편지를 보낸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 장군 파르메니온이다.
14. 카이사르의 맞수 폼페이우스(기원전 106~기원전 48).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에서 그를 이긴 뒤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나온 편지를 읽지 않고 불태웠다고 전한다.
15.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 시바리스는 사치로 이름났고, 민디리데스는 그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사치꾼으로 전한다.
16.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지연자(쿵크타토르)」라 불린 장군.
17. 소(小)카토(기원전 95~기원전 46). 공화정을 지키려 카이사르에 맞섰고, 엄격한 성품으로 이름났다.
18. 황제 칼리굴라(재위 37~41). 원문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19. 트로이의 왕. 호메로스 『일리아스』 24권에서 그는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으려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무릎을 끌어안고 그 손에 입을 맞추었고, 아킬레우스는 그에게 음식을 권했다.
20.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8.702~703. 악티움 해전을 새긴 방패 그림의 한 대목이다. 세네카는 두 행의 순서를 바꾸고 벨로나의 행을 고쳐 인용했다. 벨로나는 로마의 전쟁 여신이다.
21. 퀸투스 섹스티우스. 아우구스투스 때 로마에서 학파를 연 철학자로, 세네카가 존경한 인물이다.
22.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 장수.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오디세우스에게 빼앗기자 분노로 미쳐 가축 떼를 적으로 알고 도륙했고, 제정신이 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