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야곱의 싸움
그 별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에게서 아브락사스에 관해 들은 이야기를 짧게 다시 옮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디딘 일이었다. 그 무렵 열여덟 살쯤이던 나는 별난 젊은이였다. 백 가지 일에서는 조숙했고, 다른 백 가지 일에서는 한참 뒤처지고 어쩔 줄을 몰랐다. 이따금 나를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볼 때면 우쭐하고 자만에 빠질 때가 많았지만, 그만큼 자주 기가 꺾이고 비참해지기도 했다. 나 자신을 천재로 여길 때도 많았고, 반쯤 미친 사람으로 여길 때도 많았다. 또래들의 기쁨과 삶에 끼어들 수가 없었고, 마치 그들에게서 가망 없이 떨어져 나간 듯이, 삶이 내게 닫혀 버린 듯이 자책과 근심으로 속을 태울 때도 많았다.
피스토리우스는 그 자신이 다 자란 괴짜였는데, 그는 내게 용기와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 말에서, 내 꿈에서, 내 공상과 생각에서 그는 언제나 값진 것을 찾아냈고, 언제나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진지하게 이야기해 주었으며, 그렇게 몸소 본을 보였다.
"자네가 그랬지." 그가 말했다. "음악이 도덕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그래, 좋네. 하지만 그렇다면 자네 자신도 도덕군자가 되어서는 안 되네! 자네를 남과 견주어서는 안 되고,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었다면 타조가 되려고 해서도 안 되네. 자네는 이따금 스스로를 별나다고 여기고, 남들 대부분과 다른 길을 간다고 자책하지. 그런 버릇은 버리게. 불을 들여다보고, 구름을 들여다보게. 그러다 예감이 찾아오고 자네 영혼 속의 목소리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게 선생 나리나 아버님 나리나 무슨 인자하신 하느님 마음에 들지, 그분들 뜻에 맞을지 먼저 묻지 말고 그것들에게 자신을 맡기게! 그렇게 묻다가 사람이 망가지는 걸세. 그러다 보도 위로 올라서고, 화석이 되어 버리지. 여보게 싱클레어, 우리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일세. 그는 신이면서 사탄이고,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제 안에 품고 있네. 아브락사스는 자네의 어떤 생각에도, 어떤 꿈에도 토를 달지 않네. 그걸 절대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한번 흠잡을 데 없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나면, 그는 자네를 떠나네. 그때는 자네를 떠나서, 제 생각을 끓일 새 냄비를 찾아 나서지."
내 모든 꿈 가운데 가장 변함없이 찾아온 것은 그 어두운 사랑의 꿈이었다. 그 꿈을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꾸었다. 문장의 새 아래를 지나 우리 옛집으로 들어서서 어머니를 끌어안으려 하면, 어머니 대신 반은 남자 같고 반은 어머니 같은 그 커다란 여인이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그 여인이 두려웠지만, 더없이 뜨거운 갈망이 나를 그 여인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 꿈만은 끝내 내 벗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다른 것은 모두 털어놓고도 이 꿈만은 남겨 두었다. 그것은 나의 구석이었고, 나의 비밀이었고, 나의 피난처였다.
마음이 무거울 때면 나는 피스토리우스에게 늙은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저녁의 어두운 교회당에 앉아, 저 자신 속으로 가라앉아 저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그 기묘하고 내밀한 음악에 넋을 잃었고, 그 음악은 들을 때마다 내게 이로웠으며 영혼의 목소리들이 옳다고 인정할 마음이 더 들게 해 주었다.
이따금 우리는 오르간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교회당에 앉아, 높다란 뾰족 아치 창으로 희미한 빛이 비쳐 들다가 스러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우스운 이야기지." 피스토리우스가 말했다. "내가 한때 신학생이었고 하마터면 목사가 될 뻔했다는 게. 하지만 그때 내가 저지른 건 형식의 잘못이었을 뿐이네. 사제가 되는 것, 그게 내 소명이고 내 목표일세. 다만 나는 너무 일찍 만족해 버렸고, 아브락사스를 알기도 전에 여호와에게 몸을 맡겼지. 아, 모든 종교는 아름답네. 종교는 영혼일세. 그리스도교의 성찬을 받든 메카로 순례를 가든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사실은," 내가 말했다. "목사가 되셨어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싱클레어, 아닐세. 그랬다면 거짓말을 해야 했을 걸세. 우리 종교는 마치 종교가 아닌 것처럼 행해지고 있네. 종교가 무슨 이성의 작품인 양 굴지. 가톨릭이라면 아쉬운 대로 될 수도 있겠지만, 개신교 목사는… 안 되네! 정말로 믿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나도 그런 사람을 알지만, 글자 그대로를 붙들기를 좋아하네. 그 사람들에게 이를테면 그리스도가 내게는 한 사람이 아니라 영웅이고 신화라고, 인류가 영원의 벽에 스스로를 그려 넣고 바라보는 거대한 그림자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걸세.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똑똑한 말 한마디를 들으려고, 의무를 다하려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 밖에 이런저런 까닭으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 그래, 그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했겠나? 그들을 개종시키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조금도 바라지 않네. 사제는 개종시키려 하지 않네. 사제는 그저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어 하고, 우리가 신들을 빚어내는 그 감정을 떠받치고 드러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할 뿐일세."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이어 갔다. "지금 우리가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우리의 새로운 믿음은 아름답네, 여보게.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지. 하지만 그건 아직 젖먹이일세! 아직 날개도 돋지 않았어. 아, 외톨이의 종교, 그건 아직 참된 게 아니네. 종교는 함께하는 것이 되어야 하네. 제의와 도취, 축제와 비의가 있어야 하네…"
그는 생각에 빠져 자기 안으로 가라앉았다.
"비의는 혼자서나, 아주 작은 모임에서도 치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야 할 수 있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오래전부터 치러 왔네. 남들이 알면 몇 해는 징역을 살아야 할 제의도 치렀지. 하지만 그게 아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아네."
그가 갑자기 내 어깨를 탁 치는 바람에 나는 움찔했다. "여보게." 그가 힘주어 말했다. "자네에게도 비의가 있네. 자네가 내게 말하지 않는 꿈을 꾸고 있을 게 틀림없다는 걸 나는 아네. 그걸 알고 싶지는 않네. 다만 이 말은 해 두지. 그 꿈을 살게. 그 꿈을 연기하고, 그 꿈에 제단을 쌓아 주게! 그건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길일세. 언젠가 우리가, 자네와 나와 다른 몇 사람이 세계를 새롭게 할지 어떨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우리 안에서는 날마다 세계를 새롭게 해야 하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걸 명심하게! 자네는 열여덟 살일세, 싱클레어. 자네는 거리의 여자들을 찾아다니지 않네. 그러니 사랑의 꿈, 사랑의 소망이 있을 수밖에 없지. 어쩌면 그것이 자네 스스로 겁이 날 만한 것일지도 모르네. 겁내지 말게! 그건 자네가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일세! 내 말을 믿어도 되네. 나는 자네 나이에 내 사랑의 꿈을 억지로 짓밟는 바람에 많은 것을 잃었네. 그래서는 안 되네. 아브락사스를 알고 나면 더는 그래서는 안 되지. 우리 안의 영혼이 바라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어떤 것도 금지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네."
나는 덜컥 놀라 반박했다. "하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가 싫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내 쪽으로 더 다가앉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도 되네. 다만 대개는 착각일 뿐이지. 그리고 자네더러 머리에 스치는 것을 그대로 다 하라는 말도 아닐세. 아니, 다만 제 나름의 좋은 뜻을 지닌 그런 생각들을 쫓아내고 그것들을 붙들고 도덕을 따지는 바람에 해로운 것으로 만들지는 말라는 걸세. 자기 자신이나 남을 십자가에 못 박는 대신, 엄숙한 생각을 품고 잔에 포도주를 따라 마시며 희생의 비의를 생각할 수도 있네.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도, 자기 충동과 이른바 유혹이라는 것을 존중과 사랑으로 다룰 수 있네. 그러면 그것들은 제 뜻을 드러내네. 그리고 그것들에는 모두 뜻이 있지. 다음에 또 무언가 정말 미친 짓이나 죄스러운 일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누군가를 죽이고 싶거나 어마어마하게 추잡한 짓을 저지르고 싶어지거든, 그때는 자네 안에서 그런 공상을 하는 것이 아브락사스라는 걸 잠깐 떠올리게! 자네가 죽이고 싶은 그 사람은 결코 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는 틀림없이 겉옷에 지나지 않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은 무언가를 미워하는 걸세.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네."
피스토리우스가 내 가장 은밀한 곳을 이토록 깊이 찌르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하고 기이하게 나를 건드린 것은, 그의 이 격려가 몇 해고 몇 해고 내 안에 품고 다니던 데미안의 말과 똑같이 울린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둘 다 내게 같은 것을 말했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과 같은 것일세. 우리 안에 지닌 것 말고 다른 현실은 없네. 대부분의 사람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것은, 바깥의 영상들을 현실로 여기고 제 안의 고유한 세계에는 한마디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고도 행복할 수는 있네. 하지만 일단 다른 것을 알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이 가는 길을 갈지 말지 고를 수가 더는 없어지네.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이 가는 길은 쉽고, 우리 길은 어렵네. 자, 가세."
며칠 뒤, 두 번이나 그를 헛되이 기다린 끝에 밤늦게 거리에서 그와 마주쳤는데, 그는 차가운 밤바람에 떠밀리듯 홀로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었고 비틀거리며 완전히 취해 있었다. 나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채 곁을 지나쳐 갔고, 마치 미지의 곳에서 오는 어두운 부름을 따르는 듯 이글거리면서도 외로운 눈으로 제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거리 하나를 지나도록 그를 따라갔다. 그는 보이지 않는 줄에 끌려가듯, 광신자 같으면서도 맥이 풀린 걸음으로, 유령처럼 떠밀려 갔다. 나는 슬픈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직 풀려나지 못한 내 꿈들 곁으로.
"저렇게 그는 지금 제 안의 세계를 새롭게 하고 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바로 그 순간 그것이 천하고 도덕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꿈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어쩌면 그는 도취 속에서, 두려움에 갇힌 나보다 더 확실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면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는 반 아이 하나가 내 곁에 오려 한다는 것을 이따금 알아차렸다. 작고, 약해 보이고, 마른 젊은이로, 불그스름한 금발이 성기게 났고, 눈빛과 몸가짐에 어딘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골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먼저 지나가게 하더니 다시 뒤쫓아 와서 우리 하숙집 문 앞에 멈춰 섰다.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내가 물었다.
"그냥 한번 너하고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 그가 수줍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몇 걸음만 같이 가 줄래?"
나는 그를 따라갔고, 그가 몹시 들뜨고 기대에 차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너 심령술사야?"1 그가 느닷없이 물었다.
"아니, 크나우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털끝만큼도 아니야.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럼 신지학자야?"
"그것도 아니야."
"아, 그렇게 숨기지 마! 너한테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거, 나는 똑똑히 느낀단 말이야. 네 눈에 그게 있어. 너는 틀림없이 영들하고 사귀고 있을 거야. 호기심으로 묻는 게 아니야, 싱클레어, 정말이야! 나도 찾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나는 너무 외로워."
"어디 말해 봐!" 나는 그를 부추겼다. "영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나는 내 꿈속에서 살아. 너는 그걸 느낀 거야. 다른 사람들도 꿈속에서 살지만 자기 자신의 꿈속에서 사는 건 아니야. 그게 다른 점이지."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그가 속삭였다. "다만 그 사람이 사는 꿈이 어떤 꿈이냐가 문제지. 백마술이라고 들어 봤어?"
나는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거야. 그러면 죽지 않을 수도 있고, 마술도 부릴 수 있어. 너는 그런 수련을 한 번도 안 해 봤어?"
그 수련이 어떤 것이냐고 내가 호기심에 차서 묻자 그는 처음에는 신비로운 척 뜸을 들이다가, 내가 돌아서서 가려 하자 그제야 주섬주섬 털어놓았다.
"이를테면 잠들고 싶을 때나 정신을 모으고 싶을 때 나는 그런 수련을 해. 무언가를, 이를테면 낱말 하나나 이름 하나, 아니면 기하학 도형 하나를 떠올려. 그러고는 그걸 있는 힘껏 내 안으로 생각해 넣어. 그게 머릿속에 들어앉았다고 느껴질 때까지 그걸 머릿속에 그려 보려고 애를 써. 그다음엔 그걸 목으로 생각해 내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온몸이 그걸로 꽉 찰 때까지 해. 그러면 아주 단단해져서 아무것도 나를 흔들 수 없게 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마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다른 무언가가 얹혀 있다는 것도 느꼈다. 그는 이상하게 들떠 있었고 조급했다. 나는 그가 쉽게 물을 수 있게 해 주려고 애썼고, 그러자 곧 그는 정말 하고 싶던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금욕하지?" 그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무슨 뜻이야? 성에 관한 거 말이야?"
"응, 응. 나는 그 가르침을 알게 된 뒤로 두 해째 금욕하고 있어. 그전에는 나쁜 버릇이 있었거든.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는 여자하고 자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거지?"
"없어." 내가 말했다.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났거든."
"하지만 이 사람이다 싶은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하고 잘 거야?"
"그럼, 당연하지. 그쪽만 싫다고 하지 않으면." 나는 조금 놀리듯 말했다.
"아, 그럼 너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거야! 속의 힘은 완전히 금욕해야만 기를 수 있단 말이야. 나는 그렇게 했어. 두 해 동안. 두 해 하고도 한 달 넘게! 그게 얼마나 힘든지! 가끔은 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들어 봐, 크나우어. 금욕이 그렇게 끔찍하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알아." 그가 손사래를 쳤다. "다들 그렇게 말해. 하지만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 더 높은 정신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순결해야 해. 무조건!"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하지만 자기 성을 억누르는 사람이 왜 다른 누구보다 '더 순결하다'는 건지 나는 모르겠어. 아니면 너는 성에 관한 걸 생각과 꿈에서도 다 지워 버릴 수 있어?"
그는 절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로 그게 안 돼! 맙소사, 그래도 해야만 한단 말이야. 밤이면 나 자신한테도 털어놓지 못할 꿈을 꿔! 끔찍한 꿈이야, 정말!"
피스토리우스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말이 옳다고 아무리 절실히 느껴도 그것을 남에게 건네줄 수는 없었고, 내 경험에서 나오지 않은 충고, 나 자신도 아직 그대로 따를 자신이 없는 충고를 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내게 충고를 구하는 사람에게 해 줄 충고가 하나도 없다는 데 굴욕을 느꼈다.
"안 해 본 게 없어!" 크나우어가 옆에서 울먹였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찬물로도, 눈으로도, 체조와 달리기로도 해 봤지만 다 소용없어. 밤마다 생각조차 하면 안 되는 꿈에서 깨어나. 그리고 끔찍한 건 이거야. 그러는 사이에 내가 정신으로 배운 것이 다 조금씩 다시 사라져 버린다는 거. 정신을 모으거나 스스로 잠들게 하는 걸 이제는 거의 해내지 못해. 밤새 뜬눈으로 누워 있을 때가 많아. 이대로는 오래 못 버텨. 결국 이 싸움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무너져서 다시 나 자신을 더럽히게 되면, 그때 나는 아예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나쁜 놈이 되는 거야. 그건 너도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거기에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고통과 절망이 내 마음에 더 깊은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에 나는 나 자신이 섬뜩해졌다. 내가 느낀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나는 너를 도울 수 없다.
"그럼 너도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마침내 그가 지치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무슨 길이 있을 게 아니야! 너는 대체 어떻게 하는데?"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어, 크나우어. 그런 데서는 서로 도울 수가 없어. 나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너는 너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그런 다음 정말로 네 본성에서 나오는 걸 해야 해. 다른 길은 없어. 네가 너 자신을 찾지 못하면 영도 찾지 못할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실망하고 갑자기 말을 잃은 그 작은 녀석은 나를 바라보다가, 별안간 눈에 증오의 불을 켜더니 내게 얼굴을 일그러뜨려 보이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아, 너 참 대단한 성자 나셨구나! 너도 나쁜 버릇이 있잖아, 나는 알아! 너는 현자인 척하면서 뒤로는 나나 다른 모든 애들하고 똑같은 오물에 매달려 있어! 너는 돼지야, 돼지라고, 나처럼. 우리 모두 돼지야!"
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걸어가 버렸다. 그는 두세 걸음 나를 따라오다가 뒤처지더니, 돌아서서 달아나 버렸다. 연민과 혐오가 뒤섞인 감정에 속이 메스꺼웠고, 집에 돌아와 작은 내 방에 내 그림 몇 장을 둘러 세우고 더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내 꿈에 몸을 맡기기 전까지 그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곧 그 꿈이 다시 찾아왔다. 대문과 문장의 꿈, 어머니와 낯선 여인의 꿈이었다. 그 여인의 얼굴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여서 나는 바로 그날 저녁 그 여인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며칠 뒤, 꿈결 같은 15분씩을 여러 번 보내며 정신없이 붓질해 나간 그 그림이 다 되자, 나는 저녁에 그것을 벽에 걸고 그 앞에 책상 등을 끌어다 놓고, 끝장을 볼 때까지 싸워야 할 유령 앞에 선 듯 그 앞에 섰다. 예전의 그 얼굴을 닮았고, 내 벗 데미안을 닮았고, 몇몇 곳은 나 자신도 닮은 얼굴이었다. 한쪽 눈이 다른 쪽보다 눈에 띄게 높았고, 눈길은 넋을 잃고 굳은 채 운명으로 가득 차서 나를 넘어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안간힘을 쓰느라 가슴속까지 싸늘해졌다. 나는 그림에게 묻고, 그림을 탓하고, 그림을 어루만지고, 그림에게 기도했다. 그것을 어머니라 불렀고, 연인이라 불렀고, 창녀라고, 매춘부라고 불렀고, 아브락사스라고 불렀다. 그사이사이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아니 데미안의 말이었던가, 그런 말들이 떠올랐는데, 언제 들은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다시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야곱이 하느님의 천사와 벌인 싸움2에 관한 말, 그리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이었다.
등불 아래 그려진 얼굴은 내가 부를 때마다 모습을 바꾸었다. 밝게 빛나다가 시커멓게 어두워지고, 죽은 눈 위로 핏기 없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가 다시 떠서 이글거리는 눈빛을 번득였으며,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소녀였다가, 어린아이, 짐승이 되었고, 흐릿한 얼룩으로 번졌다가 다시 크고 또렷해졌다. 마침내 나는 안에서 울리는 강한 부름을 따라 눈을 감았고, 이제 그 그림을 내 안에서, 더 강하고 더 힘차게 보았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깊이 내 안에 들어와 있어서 나와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마치 온통 나 자신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때 봄 폭풍 같은 어둡고 묵직한 울림이 들려왔고, 나는 말로 그릴 수 없을 만큼 새로운 두려움과 체험의 느낌 속에서 떨었다. 별들이 눈앞에서 번쩍 솟았다가 꺼졌고, 맨 처음의 가장 깊이 잊힌 어린 시절까지, 아니 태어나기 이전의 삶과 생성의 이른 단계들까지 거슬러 오르는 기억들이 빽빽이 몰려 내 곁을 흘러 지나갔다. 그런데 내 온 생애를 가장 은밀한 데까지 되풀이해 보여 주는 것 같던 그 기억들은 어제와 오늘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미래를 비추었고, 나를 오늘에서 떼어 내어 새로운 삶의 형태들 속으로 끌고 갔다. 그 형태들의 영상은 엄청나게 밝고 눈부셨지만, 나중에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었다.
밤중에 깊은 잠에서 깨어 보니 옷을 입은 채 침대에 가로로 누워 있었다. 불을 켜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떠올려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전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불을 켜고 있자니 기억이 차츰 돌아왔다. 그림을 찾아보았지만 그것은 벽에 걸려 있지도, 책상 위에 놓여 있지도 않았다. 그러자 내가 그것을 불태웠다는 것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듯했다. 아니면 그것을 내 손안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먹었다는 것이 꿈이었을까?
크고 경련하는 듯한 불안이 나를 몰아댔다. 나는 모자를 쓰고 무엇에 쫓기듯 집을 나서 골목을 지났고, 폭풍에 휩쓸리듯 거리와 광장을 달리고 또 달렸으며, 내 벗의 캄캄한 교회당 앞에서 귀를 기울이기도 하면서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어두운 충동에 이끌려 찾고 또 찾았다. 창녀들의 집이 늘어선 변두리를 지났는데, 거기는 아직 여기저기 불이 켜져 있었다. 더 바깥으로 나가자 새로 짓는 건물들과 벽돌 더미가 있었고, 군데군데 잿빛 눈에 덮여 있었다. 낯선 힘에 짓눌린 채 몽유병자처럼 이 황무지를 떠다니다가, 언젠가 나를 괴롭히던 크로머가 우리의 첫 셈을 치르려고 나를 끌고 들어갔던 고향 도시의 그 짓다 만 새 건물이 떠올랐다. 그와 비슷한 건물 하나가 잿빛 밤 속에 내 앞에 서서 시커먼 문 구멍을 벌리고 하품을 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나를 그 안으로 끌어당겼다. 피하려 했지만 모래와 잔해에 걸려 비틀거렸다. 끌어당기는 힘이 더 셌고, 나는 들어가야만 했다.
널빤지와 깨진 벽돌을 넘어 비틀비틀 그 휑한 공간으로 들어서자, 축축한 냉기와 돌 냄새가 탁하게 풍겼다. 모래 더미 하나가 잿빛으로 희끄무레하게 놓여 있었고, 그 밖에는 모든 것이 캄캄했다.
그때 겁에 질린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맙소사, 싱클레어, 너 어디서 오는 거야?"
그리고 내 곁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작고 깡마른 녀석이 유령처럼 몸을 일으켰고, 아직 머리털이 곤두선 채로 나는 그가 반 친구 크나우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너 어떻게 여기 온 거야?" 그가 흥분해서 넋이 나간 듯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아낼 수 있었어?"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너를 찾은 게 아니야." 내가 멍하니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힘겨웠고, 죽은 듯 무겁고 얼어붙은 것 같은 입술을 겨우 비집고 나왔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찾은 게 아니라고?"
"응. 무언가가 나를 이리로 끌고 왔어. 네가 나를 불렀어? 네가 나를 불렀을 거야. 그런데 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밤이잖아."
그가 가느다란 팔로 경련하듯 나를 끌어안았다.
"그래, 밤이야. 곧 아침이 올 거야. 아, 싱클레어, 네가 나를 잊지 않았구나!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어?"
"뭘 말이야?"
"아, 내가 그때 너무 못되게 굴었잖아!"
그제야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게 나흘 전이었나, 닷새 전이었나? 그사이에 한 생애가 지나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모든 것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뿐 아니라 내가 왜 여기 왔는지, 크나우어가 이 바깥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까지 다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너, 목숨을 끊으려던 거야, 크나우어?"
그는 추위와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응, 그러려고 했어. 내가 해낼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어.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나는 그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고, 날이 밝아 오며 비치는 첫 가로줄 빛이 잿빛 하늘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갑고 맥없이 희미하게 타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팔을 붙잡고 한참을 걸었다. 내 안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너는 집으로 가. 그리고 아무한테도 아무 말 하지 마! 너는 잘못된 길을 갔어, 잘못된 길을! 우리는 네 말처럼 돼지도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야. 우리는 신들을 만들고, 그 신들과 싸우고, 그러면 신들이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
우리는 말없이 조금 더 걷다가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날이 밝아 있었다.
S 시에서 보낸 그 시절이 내게 가져다준 가장 좋은 것은, 오르간 곁에서나 벽난로 불 앞에서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아브락사스에 관한 그리스어 글을 함께 읽었고, 그는 베다를 옮긴 번역의 몇 대목을 읽어 주며 거룩한 "옴"을 소리 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내 안을 북돋아 준 것은 이런 학식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게 이로웠던 것은 내 안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낸 일, 내 꿈과 생각과 예감을 점점 더 믿게 된 일, 그리고 내 안에 지닌 힘을 점점 더 알아 가게 된 일이었다.
피스토리우스와 나는 어떤 길로든 서로 통했다. 그를 강하게 생각하기만 하면 그가, 아니면 그가 보낸 안부가 내게 오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데미안에게 그랬듯 그에게도, 그가 그 자리에 없어도 무엇이든 물을 수 있었다. 그를 또렷이 떠올리고 내 물음을 강렬한 생각으로 그에게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물음에 쏟은 영혼의 힘이 모두 대답이 되어 내 안으로 돌아왔다. 다만 내가 떠올린 것은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도, 막스 데미안이라는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불러내야 했던 것은 내가 꿈꾸고 그렸던 그 그림, 남자이자 여자인 내 다이몬의 꿈의 영상이었다. 그것은 이제 내 꿈속에만, 종이 위에 그려진 채로만 살아 있지 않았고, 소망의 영상으로, 나 자신이 한층 높아진 모습으로 내 안에 살아 있었다.
목숨을 끊는 데 실패한 크나우어가 나와 맺게 된 관계는 독특했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웠다. 내가 그에게 보내졌던 그 밤 이후로 그는 충직한 하인이나 개처럼 내게 매달렸고, 제 삶을 내 삶에 이어 붙이려 애쓰며 나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는 더없이 기이한 물음과 부탁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영을 보고 싶어 했고, 카발라를 배우고 싶어 했으며, 내가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다짐해도 믿지 않았다. 그는 내게 못 할 일이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기이하고 어리석은 물음을 들고 하필 내 안에서 무슨 매듭을 풀어야 할 때 나를 찾아오곤 했고, 그의 변덕스러운 착상과 부탁이 내게 실마리와 풀어낼 계기를 가져다줄 때가 많았다. 그가 귀찮아 호되게 쫓아 보낸 적도 많았지만, 나는 그래도 느꼈다. 그 아이 역시 내게 보내진 사람이었고, 내가 그에게 준 것이 그에게서도 갑절이 되어 내게 돌아왔으며, 그 역시 내게 하나의 인도자, 아니면 적어도 하나의 길이었다. 그가 내게 날라다 주고 제 구원을 찾던 그 미친 책들과 글들에서, 나는 그때 깨달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이 크나우어는 훗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길에서 사라졌다. 그와는 담판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피스토리우스와는 달랐다. S 시에서 학창 시절이 끝나 갈 무렵, 나는 이 벗과 또 한 번 독특한 일을 겪었다.
악의 없는 사람들조차 살면서 한 번이나 몇 번쯤은 공경과 감사라는 아름다운 덕목과 부딪치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누구나 한 번은 자기를 아버지에게서, 스승들에게서 떼어 놓는 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누구나 외로움의 혹독함을 얼마쯤은 맛보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조금밖에 견디지 못하고 곧 다시 어딘가로 기어 들어가 숨는다. 부모와 그들의 세계, 내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밝은" 세계와 나는 격렬하게 싸우고 갈라선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낯설어졌을 뿐이었다. 그것이 마음 아팠고, 고향에 다니러 갈 때면 쓰라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슴 깊이까지 파고들지는 않았고, 견딜 만했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이 아니라 가장 깊은 자기 충동에서 사랑과 경외를 바친 곳, 온 마음으로 제자이자 벗이었던 곳에서는, 우리 안을 이끄는 흐름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리는 듯한 순간이 쓰라리고 무섭다. 그때는 벗이자 스승을 밀어내는 생각 하나하나가 독 묻은 가시가 되어 우리 자신의 가슴을 겨누고, 막아 내려고 휘두르는 주먹 하나하나가 우리 자신의 얼굴을 친다. 그때는 올바른 도덕을 제 안에 지니고 있다고 믿던 사람에게 "배신"이니 "배은망덕"이니 하는 이름이 치욕스러운 고함처럼, 달군 쇠로 지진 자국처럼 떠오르고, 겁에 질린 가슴은 두려움에 떨며 어린 시절 덕목들의 정다운 골짜기로 도망쳐 돌아가, 이 단절도 감행해야 하고 이 끈도 끊어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내 벗 피스토리우스를 그토록 무조건 인도자로 받들어서는 안 된다고 거스르는 감정 하나가 내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내 젊은 날의 가장 중요한 몇 달 동안 내가 겪은 것은 그와의 우정이었고, 그의 충고와 위로와 곁에 있어 줌이었다. 그를 통해 신이 내게 말했다. 그의 입을 거쳐 내 꿈들이 맑게 풀이되어 내게 돌아왔다. 그는 내게 나 자신이 될 용기를 선물했다. 아, 그런데 이제 그를 향한 거부감이 천천히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서 가르치려 드는 기색이 너무 많이 들렸고, 그가 나의 한 부분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는 다툼도, 소동도, 결별도 없었고, 셈을 치르는 일조차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단 한마디, 사실 악의 없는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 사이에서 하나의 환상이 알록달록한 사금파리가 되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그런 예감이 한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또렷한 느낌으로 굳어 버린 것은 어느 일요일, 그의 오래된 서재에서였다. 우리는 불 앞의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그는 자기가 연구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 장래가 어떠할지를 궁리하던 비의와 종교 형식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진기하고 흥미로운 것으로만 보였다. 거기서 학식의 냄새가 났고, 사라진 세계들의 잔해 속을 지친 몸으로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 모든 것에, 이 신화 숭배에, 전해 내려온 신앙 형식들을 가지고 하는 이 모자이크 놀이에 진저리가 났다.
"피스토리우스 씨." 나는 나 자신도 놀라고 겁이 날 만큼 터져 나온 심술로 불쑥 말했다. "다시 한번 꿈 이야기를 들려주셔야겠습니다. 진짜 꿈, 밤에 꾸신 꿈 말입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너무… 너무 지독하게 골동품 같습니다!"
그는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바로 그 순간 수치와 놀라움 속에서 번개처럼 깨달았다. 내가 그에게 쏘아 그의 심장에 꽂힌 그 화살은 그 자신의 무기고에서 꺼내 온 것이었고, 그가 이따금 빈정대는 투로 자기 자신을 탓하던 말을 나는 이제 날카롭게 벼려서 심술궂게 그에게 되던진 셈이었다.
그는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슴 졸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이 무섭게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길고 무거운 침묵 끝에 그는 불에 새 장작을 얹으며 조용히 말했다. "자네 말이 옳네, 싱클레어. 자네는 영리한 녀석이야. 그 골동품 같은 소리로 자네를 더는 괴롭히지 않겠네."
그는 아주 차분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서 상처 입은 아픔을 똑똑히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눈물이 솟을 것 같았다.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가 용서를 빌고, 내 사랑과 다정한 감사를 다짐하고 싶었다. 가슴을 울릴 만한 말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엎드려 불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도 입을 다물었고, 우리는 그렇게 엎드려 있었고, 불은 타들어 가다 주저앉았고, 불꽃 하나가 스러질 때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 아름답고 내밀한 것이 사위어 날아가 버리는 것이 느껴졌다.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마침내 나는 아주 짓눌린, 마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어리석고 뜻 없는 말이 마치 신문 연재소설을 소리 내어 읽듯 기계처럼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자네 말을 아주 제대로 알아들었네."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자네 말이 옳으니까." 그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덧붙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옳을 수 있는 만큼은."
아니야, 아니야, 내가 틀렸어, 하고 내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 한마디 하찮은 말로 내가 그의 본질적인 약점을, 그의 고통과 상처를 가리켰다는 것을, 그가 스스로를 믿지 못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렸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의 이상은 "골동품 같았다". 그는 뒤를 향해 찾는 사람이었고, 낭만주의자였다. 그리고 갑자기 깊이 느꼈다. 피스토리우스가 내게 되어 주고 내게 주었던 바로 그것을, 정작 그 자신에게는 되어 줄 수도 줄 수도 없었다는 것을. 그는 나를 한 길로 이끌었는데, 그 길은 인도자인 그 자신마저 넘어서서 떠나야 하는 길이었다.
그런 말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하느님만 아실 일이다! 나는 조금도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고, 파국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말하는 순간에는 나 자신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입 밖에 냈을 뿐이었고, 조금 재치 있고 조금 심술궂은 하찮은 착상에 넘어갔을 뿐인데, 그것이 운명이 되어 버렸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무심한 무례를 저질렀을 뿐인데, 그에게는 그것이 심판이 되었다.
아, 그때 나는 얼마나 바랐던가. 그가 화를 냈더라면, 자신을 변호했더라면, 내게 고함을 쳤더라면! 그는 그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을 나는 내 안에서 혼자 해야 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미소를 지었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고, 바로 그 점에서 나는 내가 그를 얼마나 깊이 찔렀는지를 무엇보다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서, 주제넘고 은혜를 모르는 자기 제자에게서 받은 그 일격을 그렇게 소리 없이 받아들이고, 입을 다문 채 내 말이 옳다고 인정하고, 내 말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자,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고 내 경솔함은 천 배나 커졌다. 내리칠 때 나는 강하고 맞설 힘이 있는 사람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는 고요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 말없이 몸을 내맡기는 무방비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꺼져 가는 불 앞에 엎드려 있었다. 이글거리는 모양 하나하나가, 몸을 비트는 잿가루 막대 하나하나가 행복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고, 피스토리우스에게 진 내 빚을 점점 더 크게 쌓아 올렸다. 끝내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일어나 그곳을 나왔다. 그의 방문 앞에 오래 서 있었고, 캄캄한 계단에도 오래 서 있었고, 집 밖에서도 오래 서서 혹시 그가 나와 뒤따라오지 않을까 기다렸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저녁이 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시내와 변두리, 공원과 숲을 헤매 다녔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내 이마에 카인의 표를 느꼈다.
차츰차츰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내 생각들은 모두 나를 고발하고 피스토리우스를 변호하려 했다. 그리고 모두 그 반대로 끝났다. 천 번이라도 내 성급한 말을 뉘우치고 거두어들일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말은 참말이었다. 이제야 나는 피스토리우스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꿈 전체를 내 앞에 세워 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의 꿈은 사제가 되어 새로운 종교를 알리고, 고양과 사랑과 경배의 새로운 형식을 사람들에게 주고, 새로운 상징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힘이 아니었고, 그의 직분도 아니었다. 그는 지나간 것 속에 너무 따뜻하게 머물러 있었고, 옛것을 너무 속속들이 알았으며, 이집트에 대해, 인도에 대해, 미트라스3에 대해, 아브락사스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았다. 그의 사랑은 이 땅이 이미 보았던 영상들에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로운 것은 새롭고 달라야 하며 새 땅에서 솟아나야지 수집품과 도서관에서 길어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내게 그랬듯이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도록 거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전에 없던 것을, 새로운 신들을 주는 일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날카로운 불꽃처럼 하나의 깨달음이 갑자기 나를 태웠다. 누구에게나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누구도 스스로 고르고 제멋대로 정하고 마음대로 꾸려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신들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었고, 세상에 무언가를 주려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깨어난 사람에게 의무는 없었다. 없었다, 하나도 없었다, 오직 하나 말고는.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안에서 단단해지는 것,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든 자기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 깨달음이 나를 깊이 뒤흔들었고, 이것이 이 체험이 내게 맺어 준 열매였다. 나는 미래의 영상들을 가지고 놀 때가 많았고, 어쩌면 시인으로서, 어쩌면 예언자로서, 아니면 화가로서, 아니면 그 밖의 무엇으로서 내게 주어질지도 모를 역할들을 꿈꾸었다.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쓰려고, 설교하려고, 그림을 그리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다른 누구도 그러려고 여기 있지 않았다. 그런 것은 모두 그저 덤으로 생겨날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참된 소명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일뿐이었다. 그가 시인으로 끝나든 미친 사람으로 끝나든, 예언자로 끝나든 범죄자로 끝나든, 그것은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가 할 일은 아무 운명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어 그것을 제 안에서 온전히, 꺾이지 않게 끝까지 살아 내는 일이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중간한 것이었고, 달아나려는 시도였고, 대중의 이상 속으로 도로 숨어드는 일이었고, 순응이자 자기 내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무섭고도 거룩하게 그 새로운 영상이 내 앞에 떠올랐다. 백 번은 예감했고 어쩌면 벌써 여러 번 입 밖에 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야 비로소 체험한 영상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을 향해, 어쩌면 무를 향해 자연이 던진 한 번의 던짐이었다. 그리고 태초의 깊이에서 나온 이 던짐이 제 힘을 끝까지 펼치게 하는 것, 그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고 그것을 온전히 내 의지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내 소명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나는 이미 많은 외로움을 맛보았다. 이제 그보다 더 깊은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에서는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피스토리우스와 화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벗이었지만 관계는 달라졌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 딱 한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사실은 그만 이야기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사제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건 자네도 알지.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우리가 이런저런 예감을 품고 있는 그 새로운 종교의 사제가 되고 싶었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 걸세. 그걸 알고 있고, 나 스스로에게 다 털어놓지는 않았어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네. 나는 그저 다른 사제 노릇을 하게 되겠지. 어쩌면 오르간으로, 어쩌면 다른 무엇으로. 하지만 나는 늘 내가 아름답고 거룩하다고 느끼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어야 하네. 오르간 음악과 비의, 상징과 신화, 나는 그런 것이 필요하고 그걸 놓고 싶지 않네. 그게 내 약점일세. 나는 이따금 안다네, 싱클레어, 때때로 나는 알아. 내가 그런 소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사치이고 약함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운명에 나를 온전히 내맡긴다면 그게 더 큰 일이고 더 옳은 일일 걸세. 하지만 나는 그걸 못 하네. 그게 내가 못 하는 단 하나일세. 어쩌면 자네는 언젠가 할 수 있겠지. 그건 어렵네. 세상에 정말로 어려운 건 그것 하나뿐일세, 이 사람아. 나는 그걸 자주 꿈꾸었지만 할 수가 없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나네. 그렇게 완전히 벌거벗은 채 외롭게 서 있을 수가 없어. 나도 온기와 먹이가 필요하고 이따금 제 무리의 곁을 느끼고 싶어 하는 가엾고 약한 개일 뿐이네. 정말로 자기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는 같은 무리가 없네. 그는 완전히 홀로 서서 차가운 우주만을 곁에 두지. 알겠나, 그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일세.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힌 순교자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영웅은 아니었고 해방된 사람도 아니었네. 그들 역시 정들고 고향처럼 익숙한 무언가를 바랐고, 그들에게는 본보기가 있었고 이상이 있었네. 오직 운명만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본보기도 이상도 더는 없네. 사랑스러운 것도, 위안이 되는 것도 그에게는 없어! 그런데 사실은 그 길을 가야 하는 걸세. 자네나 나 같은 사람들은 참 외롭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서로가 있고, 남과 다르다는 것, 반항한다는 것, 범상치 않은 것을 바란다는 은밀한 만족이 있네. 그 길을 끝까지 가려는 사람은 그것마저 버려야 하네. 혁명가가 되려 해서도, 본보기가 되려 해서도, 순교자가 되려 해서도 안 되네. 생각만 해도 끝이 없지…"
그래, 생각만으로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꿈꿀 수는 있었고, 미리 느낄 수는 있었고, 예감할 수는 있었다. 아주 고요한 시간을 얻을 때면 나는 몇 번 그것을 얼마간 느꼈고, 그럴 때면 내 안을 들여다보며 내 운명의 영상이 부릅뜬 채 굳은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은 지혜로 가득할 수도 광기로 가득할 수도 있었고, 사랑을 내뿜을 수도 깊은 악의를 내뿜을 수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골라서는 안 되었고, 어느 것도 바라서는 안 되었다.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오직 자기 운명뿐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의 한 구간에서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인도자가 되어 주었다.
그 무렵 나는 눈먼 사람처럼 헤매 다녔다. 내 안에서는 폭풍이 울부짖었고, 걸음 하나하나가 위험이었다.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뿐이었고,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길이 하나같이 그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 가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 안에서 나는 데미안을 닮은 인도자의 모습을 보았고, 그 눈 속에는 내 운명이 서 있었다.
나는 종이에 이렇게 썼다. "인도자 하나가 나를 떠났다. 나는 완전히 어둠 속에 서 있다. 혼자서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나를 도와 다오!"
이것을 데미안에게 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그러려고 할 때마다 그것은 유치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짧은 기도를 외우고 있었고, 자주 속으로 읊었다. 그 기도는 시간마다 나와 함께했다. 나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내 학창 시절이 끝났다. 나는 방학 여행을 다녀오게 되어 있었는데, 그건 아버지가 생각해 낸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어느 학부로 갈지는 몰랐다. 철학을 한 학기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다른 어느 것이었어도 나는 똑같이 만족했을 것이다.